신 40대 기수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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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운 좋았던 45세 그룹
  
  70년대는 김지하나 전태일만의 시대는 아니었다. 물질 문명을 창조하는 면에서 그들은 오히려 아웃 사이더였다. 근대화란 70년대의 화려한 명제나 공업화라는 찬란한 성취는 세계를 내집 드나들 듯 하는 상사원들에 의해 주도되어 갔다. 국제화된, 새로운 인간형이 탄생했다. 대학을 나서자마자 갑자기 넓어진 지평과 만난 그때의 30대(오늘날의 40대)는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듯 스스로의 삶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이 낱낱의 그림들이 모여 「국력」이란 기록화로 나타난 것이었다. 누가 뭐래도 70년대의 주인공은 종합상사원으로 대표되는 우리의 기업이었다.
  
  우리의 40대는 70년대에 수많은 신화를 만들었다. 아버지가 납북된 뒤 신문가판원으로 고학을 했고, 결혼일을 포함, 하루도 쉰 적이 없는 맹렬성으로 당대에 대재벌을 이룩한 김우중(金宇中.49), 고려대학 시절 한일회담 반대 데모에 앞장섰다가 그 에너지를 해외 건설 현장에 들어부은 끝에 36세에 현대건설 사장이 됐던 이명박(李明博.44), 삼성에 공채사원으로 들어가 14년만에 제일제당, 17년만에 삼성물산 사장이 돼 합리적.민주적 경영 스타일을 편 경주현(景周鉉)씨(46. 삼성물산 고문) 등이 30대에 정상에 오른 신화의 창조자들이다.
  
  이명박, 경주현씨의 예에서 보듯 60년대 중반기에 기업에 진출한 지금 나이 45세 전후의 사람들이 가장 빨리 승진하고 가장 바쁘게 뛰고 가장 크게 성취한 그룹이다. 그들은 불모지에다 스스로 길을 닦고 스스로 집을 짓고 스스로 운을 개척했다. 참고할 전례도, 거리낄 것도 없었던 그들은 가장 많은 시행착오를 범해 그 부담을 국민들과 후배들에게 물려준 사람들이기도 하다. 중동, 특히 사우디 아라비아의 석유사정과 인맥에 아주 밝은 사람으로 이름난 (주)선경 김창호(金昌浩) 상무(41)가 66년에 서울 농대를 졸업했을 때만 해도 취직난이었다.
  
  시간을 벌려고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에 견디지 못하고 중도 하차, 가내공장을 직접 돌려보다가 (주)선경에 입사한 것이 70년 4월이었다. 농수산물 수출을 맡다가 74년 4월 싱가포르 지사로 나간 것을 시작으로 78년 11월 귀국할 때까지 4년 반 동안 베이루트, 런던, 제다(사우디 아라비아), 카이로 지사를 돌면서 정신없이 일했다. 밤배를 탄 월남, 1.4 후퇴를 겪은 金昌浩씨는 베이루트에선 첩자로 오인돼 팔레스타인 투사의 충혈된 눈동자, 아빠를 감싸는 그의 아들을 보고 긴장을 풀던 투사의 표정,
  
  『살았다』는 생각과 함께 갑자기 치솟던 분노, 비로소 나의 전쟁처럼 느껴지던 남의 전쟁, 『왜 바보처럼 자기네들끼리 싸울까』하는 선(先)경험자로서의 안타까움 등을 그는 아직 기억한다. 그는 중동을 배웠다. 그곳의 문화와 인간을 배웠다. 때는 석유 무기화의 시대. 사우디 아라비아의 왕족 앞에서 쪽을 못 펴는 일본 대사의 모습에서 국력의 소중함과 경제 관계의 비정함을 체득했다. 이슬람의 철학도 이해하려고 했고, 아랍인의 행동 양식도 연구했다. 석유가 앙등으로 쏟아진 부의 홍수가 아랍인을 변화시켜 가는 것도 관찰하면서 한국을 생각했다.
  
  『갑자기 부자가 된 아랍인들은 처음엔 큰집을 지어 놓고 자랑하기 시작합디다. 얼마 뒤에는 요리 자랑을 해요. 집에다가 어느 나라의 유명한 요리사를 채용해 두었다느니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 뒤에는 섹스를 밝힙디다. 그런데 요즘 만나면 그런 사람들이 홱 달라졌어요. 종교적인 명상에 빠져서 철학적으로 된 것 같아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의 초연한 모습 말입니다.』 물질이 인간을 급속히 변모시켜가는 곳은 어디 중동에서 뿐이었겠는가. 70년대의 한국이 바로 그런 인간과 물질의 관계를 설명해 줄 실험장이었던 것이다.
  
   79년―40대의 열정에 찬물
  
  지금도 1년에 1백일쯤은 외국 출장을 다니는 金昌浩씨는 『외국 물을 많이 마실수록 점점 더 촌놈이 되는 것 같다』고 한다. 『결국 내가 살 곳은 여기뿐이다』는 생각이 해외 생활로 더욱 굳어졌다고 한다. 한국인의 잠재력을 확장하고 확인하는 최전선에서 70년대를 보내면서 金씨는 상사원들의 활동이 국력으로 축적되고 그 국력이 다시 해외 상사원들을 뒷받침하는 것을 실감했다고 말한다. 자신의 구체적 상행위가 국력에 무게를 더해주는 감동을 실감하면서 땀 흘려 온 金씨는 외국 공항 같은 데서 한국인을 보면 단번에 알아 챌 수 있는 특징이 발견된다고 했다.
  
  『첫째 머리 손질을 안하고 다니고, 둘째 눈동자에 살기가 돌만큼 빛이 나고, 셋째 체격이 다부지게 보이죠.』 여기에다가 『음식을 빨리 먹는다』는 특성을 덧붙이는 사람도 있다. 『우리 세대는 기업의 성장과 같이 커 온 셈이죠. 일을 스스로 만들고 그 일을 수용하려고 조직이 커지고, 그러다가 보니 자리도 늘고, 승진도 빨리 된거지요.』 경제의 고도 성장, 그 선봉에 있었으니 저절로 밀려서라도 급속 승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주)대우의 경우, 73년의 9부1실이 81년에는 26본부 73부로 늘었다. 『4∼5년 뒤만 되면 벌써 인사 정체가 옵니다. 앞으로는 40대 부장도 어려울지 모릅니다』
  
  金昌浩씨와 같은 패기 넘치는 상사원에게 1979년의 제2차 오일 쇼크는 크나큰 타격이었다. 78년이 단군 이래의 호황기요, 고도성장기의 피크였던 만큼 79년의 충격은 더욱 컸다. 더구나 10.26이란 정치 위기와 함께 온 경기침체였다. 79년의 이 좌절은 지금껏 계속되면서 팔팔하던 오늘날 40대의 정열과 야망을 죽이고 있다. 『재벌에 대한 학생.언론의 비판, 이를 의식한 정부의 재벌 규제 조처가 기업의 영리 추구란 본능을 거세해 가고 있습니다. 부의 분배도 물론 중요하지만 따먹을 과일을 맺게 하는 작업도 늦출 수 없습니다. 기업은 날로 부실화되고, 남의 눈치를 보고, 돈 버는 것이 죄 짓는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모험심도 투자의욕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기업을 사회 윤리적인 측면에서 규제는 하되 영리추구 의욕까지 잘라버리면 기업의 절대 조건을 파괴해 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어느 종합상사의 40대 임원은 요즈음 경제위기의 뿌리가 바로 이 「영리 추구의욕의 위기」라고 설명했다. 김창호 상무는 덧붙였다. 『은행, 반도체, 해운, 조선, 중공업, 신발 등 우리산업의 기둥들이 차례로 부실화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경제의 힘을 내부에서 일으켜야 할 때입니다. 지금 시점이야말로 전 국민이 내핍생활을 해야 할 때입니다. 정부는 기업이 신바람나게 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40대는 다시 한번 뛰고 싶습니다. 50대가 되면 너무 늦어요. 모험을 두려워하니까요』
  
   김형효(金炯孝)씨의 논리
  
  70년대는 민중과 대중, 독재와 민주, 빵과 자유, 부의 축적과 부의 분배, 타율과 자율 등 대칭 개념들이 맞부딪친 시대였다. 고도 성장이 가져 온 성과와 부작용을 놓고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편이 갈렸다. 특히 지식층에서 양쪽의 대치는 첨예한 것이었다. 정부.여당 쪽에 참여한 지식인들은 도덕률을 뺀 기술만 팔아먹는 매판 지식인으로 매도됐다. 그 반대편 지식인들은 과격. 불순분자로 지목돼 감옥으로 가기가 일쑤였다.
  
  한쪽은 여론의 손가락질에 괴로워했고, 다른 쪽은 철권의 제압 아래서 스러져갔다. 김형효의원(민정당)은 공개적으로 새마을 정신을 지지한 소수의 학자 중 한사람이다. 그는 벨기에 루벵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을 때 서양 철학에 젖어 있었다. 그는 박사 논문의 대상이었던 가브리엘 마르셀에 심취해 있었다. 마르셀은 인격공동체의 가치를 중요시하고 혁명과 같은 열광성이 가진 사기성을 비판했다. 김씨는 인간의 불행한 면을 강조하는 사르뜨르가 싫었고 진실된 까뮤가 좋았다고 한다. 그는 귀국하여 장교 신분으로 공군사관학교 조교수로 일했다. 사관학교의 분위기는 딱딱했지만 부정과 협잡을 배척하는 학생들의 정의감에는 느끼는 바가 많았닥 한다. 김씨는 이즈음 고민을 많이 했다. 서양철학과 한국 현실과의 너무 큰 괴리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승국(柳承國)교수(62. 당시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교수. 현 정신문화연구원 원장)를 찾아가 동양철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이율곡과 원효를 좋아하게 됐다. 이율곡의 「기발이승」(氣發理乘) 사상이 마음에 들었다. 기와 이, 즉 이상과 현실의 힘을 다 중시하고 조화시키려는 현실적인 학문 자세가 좋아졌다는 것이다.
  
  김형효씨는 조선왕조시대 지식인의 정신사를 이렇게 이해했다.
  
  개국 초기 두 가지 타입의 지식인이 있었다. 정도전은 현실, 정몽주는 이상을 중시했다. 조선조 시대에는 이 두 흐름이 줄곧 대치, 교차하면서 갈등하는 바람에 지식사회의 에너지가 탕진돼 갔다. 정도전을 계승한 학자들은 관학(官學)이라 하여 권력에 봉사하는 바 되었다. 정몽주의 맥을 잇는 학자들은 급진 이상론을 펴기 시작했으니 조광조가 그 대표다. 조광조의 실패 이후 이상파들은 현실에서 물러나 학문과 교육에만 힘썼다.
  
  이율곡은 이 두 흐름을 종합하려 하나 당정에 휘말려 실패하고 만다. 관학은 이념이 없는 출세주의로 흘러 타락해 버린다. 말기에 실학이 나왔지만 실학의 이상은 현실 권력의 뒷받침을 못받아 실험으로만 그친다. 정몽주에서 시작된 순수주의는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으로 나타났고 해방 뒤에는 지식인의 비판적 의식을 지배하게 된다. 이 순수주의는 현실을 이상 속에서 증발시켜버리고 흑백논리를 몰고 올 위험성을 늘 갖고 있다. 순수주의.저항주의는 무엇을 창조하고 책임지는 자리에 서면 공허해 진다.
  
   국민의 평균 수준만큼만 발전
  
  이러한 생각에서 그는 박대통령의 전통문화를 중시하는 자세나 새마을 정신을 좋아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박대통령을 생전에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어용이란 비난을 학생들로부터 많이 받았는데 『학자로서 양심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다』고 했다.
  
  『당시 대학가는 박대통령을 완전히 부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어떤 현상에도 양면이 있는 법인데, 그러한 완전부정은 비과학적이며, 그 자체가 또 다른 폭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유 없기는 피차 마찬가지였습니다. 박대통령을 비판할 자유는 물리적 폭력에 의해, 지지할 자유는 여론이란 폭력에 의해 억압을 받았습니다. 우리 가족에게 협박 전화도 많이 왔어요. 이런 흑백 논리는 양쪽에 다 책임이 있어요. 저는 저항과 과학적 비판은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박대통령이 아무리 나빠도 0.001%쯤은 좋은 점이 있을 테고, 저는 그 0.001%의 좋은 점을 대변하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박대통령의 단점은 통치철학이 그 개인에게 종속되었다는 점입니다. 그가 이념에 종속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는 10.26뒤에도 박대통령을 계속 옹호했다.
  『국장 때 TBC-TV에서 좌담회를 하는데 저를 불러요. 주변에서는 시대가 바뀌었다고 말렸지만 나갔습니다. 저와 상대하게 돼 있었던 어느 원로는 박대통령이 총애를 많이 받은 분인데 그 자리를 피하더군요. 인심 무상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공자가 제 나라의 관중을 평가한 말을 빌어 박대통령과 같은 현실주의자의 역사적인 역할을 긍정적으로 말했습니다. 80년 봄에 저에 대한 중상과 비방이 쏟아져 저는 교수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끼고 차라리 행상이나 하겠다는 각오로 사표까지 썼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모든 목표를 한꺼번에 이루겠다는 동시적 이상주의의 환상이 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그 국민의 평균 실력만큼만 발전하는 것이지, 만병통치약은 역사엔 절대 없습니다』
  
  『40대를 용서할 순 없다』
  
  40대는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살았다. 金恩國씨는 한국에 올 때마다 한국인의 말이 빨라진 데 놀란다고 한다. 어느 교수는 60년대 초 미국에서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땐 한국인의 행동이 느린 데 놀랐는데 요즈음 외국에 나가면 한국인의 몸가짐이 가장 민첩한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 70년대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빨리 돌아갔는지를 가수 이미자씨의 경우가 상징하는 바도 크다.
  
  『70년대 초가 저의 절정기였는데요, 하루에 신곡을 스무 곡이나 취입한 적이 있어요. 작곡가들이 너무나도 악보를 들이밀었는데 한 두번 연습하곤 취입했죠. 가끔 그때 취입한 노래가 요사이 흘러나오면 저게 내가 부른 노래인가 잠시 의아해지기도 해요. 제가 취입한 노래가 몇 곡이냐고요. 1천5백 곡이래요. 70년대 초에는 극장 쇼 무대의 전성기이기도 했어요. 하루에 다섯 극장에서 네 번씩 공연을 하는데 스무 번을 왔다 갔다 하자니, 차안에서 밥 먹고… 그러다가 텔레비전이 늘어나면서 극장 쇼가 없어지고 술집의 밤무대로 변했어요. 퇴보한 거죠』
  
  1985년의 40대는 어떤 얼굴인가. 어느 방송국에서 일하는 26세의 여자 스크립터는 개인 체험에 바탕한 관찰이란 전제를 달고 40대를 이렇게 그린다. 『피투성이의 길을 걸어 온 50대에겐 연민의 정이 앞서고 그들의 단점은 탓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40대의 맹목적 실적 중심주의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들은 걸핏하면 「세상은 다 그런 거야」라는 말로, 마치 인생을 다 알아버렸다는 듯 젊은이들의 건의를 죽여버려요. 40대의 추진력은 존경하지만 그것이 윤리나 목적성을 상실한 실적 숭배주의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을 때는 한심하기만 해요.
  
  프로의 제목을 정하는데, 한번도 내용을 본 적이 없으면서 여러 제목 후보들을 적어 오게 해 놓고 골라잡는 식의 비합리적 업무처리가 잘못돼 있다는 것 자체를 몰라요. 업무의 개선을 제도적으로 할 줄도 모르고, 일의 처리는 명령에만 의존하고, 토론도 할 줄 몰라요. 20대와 30대는 말이 통하는 데 30대는 아직 힘이 없으니 불평밖에 못하잖아요』 이 20대가 지적한 것은 40대의 기능적 우수성과 윤리적 열등이었다. 이런 성향은 어차피 보수로 나타나게 된다. 변혁이 오면 잃을 만한 위치와 재산과 명예를 누리고 있는 중산층 이상의 40대는 거의가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듯하다.
  
  여론 조사기관 리스피아르의 84년말 집계에 따르면 남침위협을 가장 많이 느끼고 사회안정에 가장 관심이 높고 물가에 가장 예민한 세대가 40대 남자층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4.19세대를 대표하는 김광규(金光圭) 시인은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에서 4.19에 참여했던 동창들이 망년회에 모여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
  하고는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면서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고 거듭 반성한다고 읊었다.
  
  「잃을 것」은 많고 용기는 적고
  
  말은 결코 보수적이지 않은데 행동은 보수적이고, 그래서 말과 행동의 간극속에서 고민하고 때로는 그 고민을 즐기는 것이 40대의 창백한 초상화란 게 이 시의 요체인 것 같다. 미국 문화원 사건이 터졌을 때 학생들을 과격하다고 비판하는 텔레비전에 화를 내면서도 화염병 투척 장면에선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심리와 비슷한 것 같다. 40대는 나이에서도, 소유에서도, 의식에서도 중간집단이다. 「중간」이란 것은 항상 양쪽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자리다.
  
  이 중간집단이 튼튼해져 눈치를 덜 보게 되면 사회는 안정되고, 온건.보수적 민주주의는 터를 잡는다고 한다. 그러려면 40대 중간층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그들의 논리도 분명하게 천명되어야 한다. 오늘의 40대나 중산층이 느끼고 있는 소외감은 『학생층과 권력층의 목소리만 높고 우리는 뭐냐』하는 무력감이다. 그 무력감의 원천은 「말 따로, 행동 따로」의 「용기 없음」이긴 하지만.
  
  40대가 여러 부문에서 온건과 합리를 내세우며 영향력을 넓혀가는 조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회에선 이미 중심세력이 된 40대, 그 중에서도 특히 40대 후반 의원들 사이에서는 여야를 초월한 동질적 분위기가 꽤 퍼져 있다. 경제계에선 재벌2세들과 40대 임원들이 천민 자본주의적 작태를 청산하는 발전적 기풍을 보이고 있다. 출판계에선 지난번 금서 파동 때 「출판 문화 발전을 위한 17인 선언」을 발표한 중견 출판인들이 있다. 이 선언은 주장이 논리적이고 온건한 표현을 썼던 만큼 호응의 폭도 컸고, 광범위한 설득력도 확보할 수 있었다.
  
  대부분이 40대인 이들 중견 출판인들은 엄격한 객관주의 고수, 전문직업가적인 출판인상(像)의 모색 등을 추구하고 있다. 이런 전문가 집단의 층이 두꺼워지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다양하고 용기있게 발표할 수 있을 때 40대 중간층의 소외감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40대의 중간결산은 흑자
  
  이번 취재로 만난 40대들은 대부분이 사회의 엘리트였다. 그들은 비판적이긴 해도 비관적이진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에, 역사의 진보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야지요』란 말을 그들로부터 자주 들었다. 입장이 정반대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오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한 80%쯤은 비슷한 논리였다. 같은 연령층 속에서 수평적 공감대는 매우 큰 것 같다. 20대와의 수직적 공감대는 단절되고 있는 듯했다.
  
  40대가 온건.보수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꼭 패배주의적인, 방어적인 온건.보수라고 매도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 온건과 보수에다가 합리와 용기까지 덧붙여질 가능성도 높으니까. 40대의 최대 강점은 전문적 지식과 경험의 깊이다. 성취와 좌절의 극한까지 가 본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슬기와 결단의 잠재력을 이들은 갖고 있을 터이다. 이런 40대가 20대의 이상주의를 수용하여 우리 사회를 내부로부터 개혁해 나가는 리더십과 용량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 한국의 앞날을 좌우할 것이다.
  
  미시적으로는 암담한 면도 많지만 거시적으로는 낙관적인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구 구조의 근본적 변화다. 해방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 85년 현재 전인구의 약 77%를 차지하고 있다. 1990년에 가면 83.5%가 된다. 이들을 상대로 속임수를 쓴다는 것은 점점 어렵게 될 것이다. 40대는 60년대엔 정치에, 70년대엔 경제에 도전하며 이 나라를 변혁시켰다. 정치는 실패했고 경제는 일단 성공작이었다. 40대의 좌절된 정치적 이상은 낭비됐을까. 아닐 것이다.
  
  20년 전 김은국씨는 「오, 마이 코리아」에서 「한국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행세해야 한다. 이 겉치레는 한국인들이 즐기는 놀이인 바, 아주 의식적(儀式的)으로 연출되고 있다. 이는 한국인들이 그 놀이를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하며 하나의 습관으로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환상과 자기 기만에서 이상한 기적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니까」라고 끝맺었다. 그가 말한 「놀이」는 아직 계속되고 있는데, 다행히 민주주의란 간판을 버리지 않고 있다. 언젠가는 그 놀이가 실연(實演)으로 변할 것이고, 그런 점에서 40대의 젊은 시절 정치적 좌절은 제 값을 치러받을 것이다.
  
  나는 25년 전쯤 가족이 파라과이로 이민가는 수속을 밟기 위해 사진관에 가서 여권용 사진을 찍고 희망에 부풀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희망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지만, 당시엔 한국을 떠난다는 그 기대만으로도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지금 나는 미국으로 이민하는 친구들을 측은해 하는 마음으로 보내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좋아짐」은 박정희나, 김지하나, 전태일 때문만이 아니다. 이름 없는 우리 국민들, 그 중에서도 나 같은 해방동이를 포함한 4백30여만 명의 40대가 성실하게 일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누가 뭐래도 40대의 중간 결산표는 흑자라고 봐야 마땅하지 않을까.
  
출처 : 월조
[ 2003-07-04, 16:5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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