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40대 기수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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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대령과 20대 대학생의 토론
  
  「순교자」란 영문 소설로 유명해진 재미 소설가 金恩國씨(53)는 한일회담 반대 데모가 한창이던 1965년 여름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월간잡지 애틀랜틱에 「오, 마이 코리아」란 르포 기사를 썼다. 이 기사에 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내 동생을 만나 보게』 육군 대령이 말했다.
  『자네는 내 동생 생각이 거의 안 날거야. 전쟁 중 자네가 마지막으로 봤을 땐 여덟 살쯤 됐나』
  『그럼 지금 스물 세 살쯤 됐겠군』
  『지금 대학교 졸업반이야 』
  『그 애도 데모하나?』
  『그런 것 같네. 서로 의사 소통이 안되니 잘 알 순 없지만. 내 말 알아듣겠나! 그 아이가 볼 땐 난 구식이고 반동이야』나는 웃으면서.
  『자네가 대령이기 때문인가』
  『그렇기도 하지. 그보다도 그 애가 하는 일에 찬성을 안 하니까』
  
  여기서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 얘기를 했다. 공산정권에 반대하는 데모를 했던 일, 감옥에서 보낸 세월, 학교에서 쫓겨났던 추억들을 얘기했다. 그날 저녁 대령과 그의 동생이 호텔로 나를 찾아왔다. 화제가 「학생 데모와 군부의 역할」에 이를 때까지는 식사가 제법 유쾌했다.
  
  『그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창피하지도 않아요?』라고 동생이 말하지 않았던들 나의 친구는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을 것이다.
  『 도대체 네가 뭐 길래 나를 심판하는 거야! 난 목숨을 걸고 이 나라를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렀단 말야!』
  『누가 나를 위해 싸워 달랬어요?』내가 말참견을 했다.
  『나도 전쟁에서 싸웠다네. 지원했지. 자네가 날 보고 싸워달라고 한 건 아니었어. 그때는 자네가 너무 어렸으니까. 그건 모두 지나간 일이고,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네들이 4월 봉기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뒤 한 일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알고 싶네』
  『무정부 상태였지 』라고 대령이 말했다.
  
  『네놈들이 국회의사당을 점령하고 모든 사람을 규탄하고 모든 일에 반대했고 너희들이 스스로 정부를 이끌려 했지. 그게 무정부 상태가 아니고 뭐야!』
  『썩은 것은 깨끗이 없애야죠. 그리하여 우리가 막 그런 일에 성공하려 했을 때 …』 여기서 대령이 말을 가로막았다.
  『너희들이 막 나라를 떠맡으려고 했을 때란 말이겠지』
  『바보 같은 군인들이 뛰어들어 그때부터 우리들을 괴롭혀 오고 있는 거죠』
  『자네들은 그전엔 군대가 학생들을 지지했었다는 걸 잊어선 안되네』라고 내가 말했다. 『그 봉기의 성공은 자네들만의 노력만으로 된 건 아니었어. 군인들이 침묵으로, 아니 조용한 반란으로 자네들을 보호해주지 않았던들 봉기는 좌절 했을걸세 』
  『우리는 그때 이 나라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어. 그러나 무정부 사태를 바란 건 아냐』
  『우리가 무정부 사태를 바란다고 누가 그래요?』
  
  『너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 넌 한일협정에 반대하지. 그런데 넌 협정문안의 원문이라도 읽었어? 안 읽었지. 아니 못 읽었지. 데모한다고 바빠서 말이냐. 넌 문제의 그 문서를 안 읽어보고 정부를 조롱하고 장부의 해명을 비웃고 있어. 뭐, 일본한테 나라를 팔아먹는다고? 그러면 우리가 가만히 있을 것 같니? 네 생각엔 니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이 너뿐인 줄 알고 있겠지 . 우리는 지켜보고 있다. 이 나라가 제대로 된 사회라면 지금과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돼 그러나 우리는 총질을 하지는 않을 거야. 현존 질서가 아무리 부패했다해도 그걸 부숴버려선 안돼. 고치도록 해야 돼. 젠장 봉기고 쿠데타고 한번씩이면 충분하잖아. 그런 데 습관이 붙으면 라틴 아메리카 꼴이 된단 말이야』
  
  『군인들이 모두 형님같이 생각하는 줄 알아요? 』대령은 나의 손을 툭 쳤다.
  『이걸 꼭 써 주게. 학생들의 난동을 경찰이 못 막고 정부가 우리를 또 불러낸다면 말이냐, 우리는 학생들을 분쇄하고 말테야. 지금 정부를 백 퍼센트 지지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학생들의 난동에 진저리가 나기 때문이야』
  『나가세』 하면서 대령이 일어섰다.『난 일선으로 돌아가야 하네』이 말은 이 나라가 아직도 북쪽의 공산주의자들과 전쟁 상태에 있다는 냉혹한 사실을 나에게 일깨워 주는 것이었다. 이 대화에 나온 대령은 지금 50대, 학생은 40대로 변했을 것이다.
  
   어느 50대의 40대 인상
  
  그 르포의 필자 김은국(金恩國)씨가 미국에서 돌아와 마침 서울에 머물고 있어 만나 봤다. 김씨는 전형적인 6.25전중(戰中)세대의 체험을 갖고 있다. 북한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소년기는 지난 3월에 MBC TV를 통해 드라마로 방영된 소설(영문) <잃어 버린 이름 : Lost Name>에 잘 묘사되어 잇다. 이 TV 드라마는 8.15 다음 날의 대낮에 끝이 난다. 소설에선 밤중에 끝이 나고 있다.
  
  『해방 뒤의 비극을 생각하면 도저히 낮에 끝내지 못하겠다』고 김씨는 말했다. 그 밤중은 해방 뒤 김씨와 같은 우리의 50대가 겪어야 했던 참담한 시대를 암시한 것이었다. 김씨의 아버지는 민족주의 진영의 독립운동가였다. 해방 뒤 북한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다가 월남했다. 미군에 붙들려 간첩혐의로 가혹한 조사를 빋고 풀려 났다. 그의 작은 아버지는 국내파 공산주의자였다. 작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김은국 소년은 밤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 왔다. 작은 아버지는 6.25 뒤 김일성에 의해 숙청돼 총살 당했다.
  
  김씨는 서울 상대 재학중 6.25가 나자 서울에서 공산군에게 붙들려 갔다. 수용소에서 탈출, 인천 근방에서 피신했다. 9.28 수복 뒤 해병대 장교로 지원, 입대했다. 훈련중에 폐침윤이란 병에 걸려 의병 제대. 몸이 완쾌되자 다시 나이를 두 살 줄여 육군장교를 지원, 통역장교 공병장교 등으로 4년간 근무하다가 중위로 제대, 미국으로 떠났다. 그의 부모도 10여년 전 미국으로 이민갔다.
  
  김씨는 『나는 한국. 일본. 미국의 세 문화권과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까지 체험한 셈이다』거 했다. 그는 최근에 <오, 마이 코리아>를 다시 읽었다고 한다. 『기분이 좀 이상합니다. 그 글에서 제기된 문제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어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달라진 게 없으니 말입니다』 <오, 마이 코리아>에서 20대 대학생과 싸우던 그 30대 대령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미국으로 이민 갔다』는 답이었다.
  
  『그 친구는 단신으로 월남, 군 매부의 파벌싸움에 휘말려 예편됐었지요. 예편 뒤 하던 일이 잘 안되고 해서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참 불쌍한 사람이지요』
  『서울에 와 있는 일본 마이니찌 신문의 특파원은 한국 40대의 인상에 대해 「자신만만하다. 지식 수준이 높다. 그렇지만 편협하다 」고 말했어요. 김선생님의 인상은... 』
  『 저도 전적으로 동감합니다』고 김씨는 말했다. 그러면서 50대와 40대를 이렇게 비교했다.
  
  - 50대는 8.15와 6.25 전쟁으로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 40대 보다 체계적이거나 전문적인 지식이 약하다.
  - 50대는 전쟁을 주체적 입장에서 겪었고 비참한 상황을 많이 보아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 50대는 대체로 이기적이다. 정치에 관심이 별로 없다. 사회 불안에 대한 본능적 공포감이 있다. '우리는 고생한 세대다'는 생각을 늘 지녀 '사회나 후배가 우리를 위해 무슨 보상을 해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알리바이 심리> 비슷한 것을 갖고 있다.
  - 50대는 모험을 하지 않으려 한다. 직장을 잃는 것에 대한 공포심은 대단한 것 같다.
  - 50대의 인간관계는 기능적. 사무적이기보다는 고향. 학교. 혈연 등 연고 중심이다.
  - 40대는 대단한 야망가들이고, 모험심도 있다. 40대 여자들이 특히 세다.
  - 40대의 행동은 보수적이다. 젊은이들이 보는 눈은 <나>보다는 더 보수적인 것 같다. 상당한 지위와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 변혁기에 잃을 것이 많다는 것이 그 원인이 아닐까. 그런데도 말하는 것은 굉장히 리버럴한 면이 있다. 말을 행동이 따라 주지 못하는 데서 40대의 좌절과 갈등이 있는 것이 아닐는지.
  
  김씨가 말하는 <40대의 인상>은 1965년에 당시의 20대(즉, 오늘의 40대)가 바라본 30, 40대의 얼굴들과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까 20년 전의 문제들 - 안보와 혼란, 자유와 질서, 정치와 군대의 역할 등이 지금껏 그대로 남아 있는 셈이다.
  
   해방세대 여성과 가족계획 성공
  
  한일 회담 반대 데모가 한창이던 1964년 5월 7일 울산 정유공장 준공식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5.16 주체들에겐 감격적인 행사였다. 울산 공업단지의 중심이며 공업화의 상징인 이 정유공장은 고도 성장의 견인차 구실을 떠 맡았던 것이다. 고도성장 정책은 석탄 대신 기름을 주된 동력원으로 결정했던 것이다. 잡초 우거졌던 태화강변의 밤하늘을 밝히는 정유공장 굴뚝의 불길은, 고도성장의 진로를 조명하는 횃불이기도 했지만 공해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이기도 했다. 한국의 고도성장을 결정적으로 도와준 것은 군사정부에 의해 1962년부터 시작된 가족계획사업 이었다. 이 사업의 성공은 당시 20대였던 오늘날 40대의 실용주의와 진취성에 힘입은 바 컸다.
  
  가장 아기를 많이 낳을 나이에서 이들은 가족계획 사업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였다. 1960년의 인구 증가율은 3% 였는데 이 증가율이 계속됐더라면 지금 우리나라의 인구는 5천만 명에 이르렀을 것이다. 지난 62 ~ 83년 사이 가족계획 사업으로 <출산이 방지된> 인구수는 부산시와 인천시의 인구를 합친 것과 비슷한 4백80만 명이나 된다. 83년의 경우, 출산이 예방된 수는 약 63만 명이다. 대전시 규모의 인구 출현을 막는데 든 동은 약 3백30억 원에 불과, 가족계획 사업의 놀랄만한 투자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40대 여성들이 개척자적 정신으로 가족계획에 협조한 덕분으로 82년 현재 가밍 부인들의 피임 싱천율은 57.7%, 피임 경험률은 81%, 인공 유산 경험률 50%, 1인당 평균 인공유산 횟수 3회, 불임수술 실천율은 세계 최고인 36%다. 교리상 인공유산을 반대하는 가톨릭 교인들의 임신 중절률이 다른 종파보다도 높다는 통계가 있다. 유교적 사회에서 일어난 이 출산 혁명은 엄청남 변혁을 몰고 왔다.
  
  지금 41 ~ 43세의 사람들이 태어났던 1942 ` 44년의 경우, 신혼 부인의 3.5% 만이 결혼한 지 1년 안에 아기를 낳았다. 이 아기들이 24 ~ 26세의 어른이 됐던 1966 ~ 68년에는 신혼부부의 약 40%가 결혼 1년 안에 아기를 낳고 있었다. 이 통계는 옛날엔 부인들이 아기를 <천천히 많이> 낳았는데 비해 오늘날의 40대는 <빨리 적게> 낳았다는 뜻이다. 여자들이 그만큼 출산과 양육의 부담에서 일찍 벗어날 수 있었다는 얘기다. 30대 초반을 넘기면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다.
  
  문제는 이들 해방세대 여성들이 남아 도는 에너지를 우리 사회가 발전적으로 수용해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70년대에 가면 도시에선 아파트 생활이 늘게 된다. 부엌일이 줄었고 외출이 편리해졌다. 이 시대에 몸과 마음이 팽팽한 30대였던 해방세대 여성들 가운데 복부인들이 많이 배출됐던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서울 공대 출신 여성들의 도전
  
  <해방세대>란 낱말이 여자들에게는 얼마나 가혹한 조어(造語)인가 하는 것을 극적으로 실증한 사람들은 서울공대를 졸업한 여자들이었다. 입시철만 되면 서울대 화공과가 전국의 톱으로 화제가 되던 1958년부터 65년까지 서울공대가 그 인기의 극을 달리던 시절, 공대에 들어간 여학생은 12명이었다. 학사 편입한 1명을 보태 13명이 졸업했다.
  
  이 7년 동안 서울 공대에 입학한 학생은 약 3천명. 4년 전 이들을 대상으로 취재한 윤호미(尹浩美)기자(조선일보 주불 특파원)의 기사에 따르면 생존 졸업생 12명 가운데 전문직에 종사하는 이는 4명 뿐이고 나머지 8명은 가정주부 역에 충실하고 있었다. 이들은 똑똑한 남편감을 구하기 위하여 서울 공대에 들어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모드가 전문직 지망생 이었지만 우리 사회가 그들의 재능을 외면하고 부엌으로 보내버린 것이었다. 『원자력 연구소에 시험을 쳐 합격했어요. 면접시험에서 그만 떨어졌어요. 총무처에선 여자는 안 된다면서 나를 빼고 남자를 발령했어요. 연구소에선 내가 필요하다고 했는데도....』(전자공학과 졸업 김춘자씨. 46)
  
  1969년에 (주)선경의 공채시험에 합격한 김복희씨의 경우, 그의 채용 여부를 놓고 이사회까지 열렸다고 한다. 그해 사원모집 광고에 <**년 이후 출생 남자에 한한다>는 말이 빠져 김씨의 원서를 받아주지 않을 수 없었고, 이사회도 결국 김씨를 채용했다. 여성의 진출이 옛날부터 있었던 인문. 사회부문에 비해 이공부문의 여성 차별은 훨씬 심했다고 한다. 어렵게 직장에 들어 간 서울 공대 출신 여성들에게 닥친 직장에서의 차별 대우는 더 심했다.
  
  승진, 봉급, 인간적 대우 면에서 그들은 모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대부분은 직장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가정으로 돌아갔다. 12명 중 미국에 살고 있는 이가 7명, 12명 중 9명이 서울 공대 출신 남자들과 결혼했다. 그들은 대부분 결혼과 동시에 전문직에서 손을 뗐다. 결혼이냐, 전문직이냐의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사회에서 그들은 <원만한 결혼 생활>쪽을 택했던 것이다.
  
   李美子와 파월 사병들의 대합창
  
  1964년에 스물 세 살의 이미자(李美子)씨가 부른 <동백 아가씨>는 대히트를 했다. 그는 이 노래를 가지고 65년에 월남 비둘기부대로 위문공연을 갔다. 월남 파병은 한국군 최초의 해외원정 일 뿐 아니라 오늘날의 40대가 집단적으로 경험한 최초의 <국제화>였다. 이씨는 <동백 아가씨>가 비둘기부대의 사단가처럼 돼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장교식당에 사단장이 들어오면 꼭 그 노래를 틀게 돼 있었고, 사병들도 즐겨 불렀다. 애상에 젖은 그 노래를 왜 군가처럼 부르는지 이미자씨는 의아해 했다.
  
  이 부대에서 있었던 위문공연을 이미자씨는 지금도 <생애 최고의 감격>으로 기어하고 있다. 사병들은 이씨와 <동백 아가씨>를 합창하면서 엉엉 울었다, 이씨도 함께 울었다. 앵콜 요청이 들어오는 대로 몇 십번을 불렀는지 모른다. 애조띤 노래를 부르면서 온 장병들이 울음바다를 이뤘는데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 고 한다. 이미자씨는 바로 이것이 한국인의 심성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실컷 울어버리면 후련해지는 그런 상태였다.
  
  <동백 아가씨>는 1965년 말에 <왜색 가요>라 하여 방송이 금지됐다. 이미자씨는 지금도 무대 공연 때 가장 요청이 많이 들어오는 게 이 노래라고 했다. 40대 가수 이미자씨의 인기는 지금 40대에서부터 노년층으로 갈수록 특히 높다. 지금의 40대 가운데는 20대 시절 이미자씨의 <뽕짝>을 시시한 걸로 경멸하고 폴 앵카나 냇 킹 콜, 또는 톰 존스의 노래를 좋아했던 경험을 가진 이들이 많다. 이들도 30대 후반부터는 이미자씨를 재발견하게 된다.
  
  <이미자로의 회귀>는 바로 한국적 정서로의 귀환을 뜻하는 것이다. 여론조사 기관인 서울의 리스 피아르에서 1천8백75명을 대상으로 집계한 84년 12월 현재의 인기 여자 가수 랭킹에 따르면 이은하(22%) 이미자(19.3%) 김연자(11.4%) 이선희(9.7%) 양희은(7.5%) 정수라(6.8%) 차례다. 세대별로는 10대에선 이미자씨가 1.8%란 아주 낮은 인기도에 머물러 있는데 40대 여자에선 41.5%, 40대 남자에선 30.8%로 인기 1등이다(50대. 60대도 마찬가지)
  
  60, 70년대를 질주하면서 자주 상처받고, 주주 넘어졌던 오늘날의 40대를 감미롭고 슬픈 목소리로 어루만지고 같이 아파하면서 그들의 울적한 기분을 풀게 했던 청량제가 이미자씨였다. 그런 뜻에서 85년 1월에 한국일보가 뽑은 근대 인물 1백명에 이씨가 끼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 세대의 가수와 사병들이 <동백 아가씨>를 목놓아 불렀던 월남전의 현장은 우리 40대의 나이테에서 아주 애매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
  
  이 전장에서 1만여 명이 죽거나 다치고 군인 30여만 명이 전쟁을 경험했지만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평가가 미진한 역사로 남아 있다. 월남전은 40대가 뚜렷한 자각 하에서 치른 첫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었다. 오늘날 40대는 그런 점에서 월남전도 6,25처럼 국외자의 입장에서 경험한 셈이다. 따라서 전쟁 경험에 따른 정신적 갈등도 별로 없었고 패전에 따른 좌절감도 심각한 정도엔 이르지 않았다.
  
  정부도 월남전에 참전한 피의 대가로 경제적 이득을 도모한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해 타산이 뚜렷한 참전이었고 인류애나 동족애가 재개되기 힘든 전쟁이었다. 그러기에 패배로 끝나도 아쉬움이나 원통함이 남을 여지가 거의 없었다. 월남전은 계산이 끝난 전쟁이었다. 계산이 끝났다고 해서 평가까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월맹군의 승리는 정권의 정통성이 과연 우리가 밀어준 사이공 쪽에 있었느냐 하는 검토를 강요했고, 그 검토는 40대 보다는 20 - 30대의 세계관이나 분단. 통일관에 더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70년대의 양심을 때린 全泰壹
  
  오늘날의 40대가 주로 30대로서 뛴 1970년대는 도전과 성취, 갈등과 격동의 시대였다. 크나큰 야망과 깊고 깊은 타락이 함께 온 시대였다. 한국 역사상 가장 큰 변화가 이루어진 시대였다. 한국인이 자신감을 넘어서서 자만해 지기까지 한 시대였다. 물질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철학적 각성이 이뤄진 시대였다.
  
  소설가 박태순(朴泰洵)씨는 『우리 40대는 60 - 70년대를 살면서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박정희 통치 18년에 우리의 황금기를 헌납했다. 』고 말한다 소설가 최인호(崔仁浩)씨는 『그 한 분으로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고 박대통령을 말한다. 40대에 있어서 70년대는 박정희란 이름과 묶이어서만 제대로 기억될 것이다. 박태순씨는 『70년대를 상징. 암시하는 사건이 70년대에 일어낫는데, 그것은 김지하 시인의 담시 <오적>의 필화사건과 전태일씨 분신 자살사건 이었다』고 말한다.
  
  『오적사건은 표현의 자유가 처한 위기를 느끼게 했으며, 전태일씨 사건은, 르포를 쓰려고 현장답사를 하면서, 도대체 문학이란 무엇하는 인간이어야 하는가 하는 깊은 고뇌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하였습니다』 조국의 분단은 사상. 학문. 언론 등 표현의 자유를 왜곡. 제한함으로써 진실의 분단을 가져온다는 것을 깨닫게 한 시대가 70년대였다.
  
  전태일 분신 자살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양심을 때린 사건이었다. 한 젊은 노동자의 짧고 깨끗하고 치열했던 삶과 죽음은 절망감과 증오감보다는 깊은 감동을 주었고, 많은 대학생들이 이 감동을 수용하면서 자신의 진로를 바꿨다. 전태일은 그가 남긴 일기장 속에서 살아 있었고, 그 일기장을 특종으로 보도한 것은 당시 학생들로부터 비판받던 제도 언론이었으며, 많은 학생들이 이 일기장을 통해 전태일과 만나고 스스로를 다짐해 갔다. 전태일사건을 사회문제로 부각시킨 핵심 인물은 장기표씨(41.민통련 사무차장)였다.
  
  한일회담 반대 데모 때부터 적극적이었던 장씨는 그때 군에서 제대한 뒤 복학, 서울 법대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 장기표씨는 <자유의 종>이란 지하신문을 내는 데 관계하고 있었다. 신문을 통해 청계천 평화시장의 근로조건이 열악하다는 데 관심을 쏟고 있는데 전태일사건이 났다. 그는 후배 세명을 데리고 전태일씨의 어머니 이소선씨를 만나러 갔다.『그 사건은 사실 어머니(이소선)가 크게 만든 것입니다. 아들의 유언(노동조건 개선 요구)이 이뤄지지 않으면 시체를 인수하지 않겠다고 나왔으니까요. 저희들과 만남 이여사는 대여섯 시간동안 폭포수처럼 애끓는 이야기를 토해 내셨어요.
  
  전태일이 노동법을 연구하면서 「나에게도 대학생 친구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이라고 애태웠다는 이야기도 하셨고 우리를 보고는 왜 이제 오느냐고 말했습니다. 이 말들이 우리를 통해 외부로 전달되어 지금은 유명해졌습니다만, 그 자리에서 저희들은 전율과 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를 보면 아들을 안다고, 그 아들에 그 어머니였습니다. 영웅의 주검이 안치된 영안실은 쓸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학교로 돌아가 전태일 장례식을 우리 법대 학생들이 치르기로 한 것이죠』
  
  경찰의 제지로 그런 장례식은 치러지지 않았으나 서울 법대생들의 데모를 계기로 <근로조건 개선하라!>는 시위가 대학가. 종교계로 확산되었다. 전태일사건은 전국 학생운동사의 분수령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은 질적인 전환을 하기 시작했다. 60년대의 학생운동은 <정치적 자유>를 주제로 한 것이었다.
  
  전태일사건 이후 70년대의 학생운동은 <경제적 평등>에도 관심을 돌리게 된다. 운동의 방법도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데서 벗어나 공장이나 농촌의 현장에서 실천을 통해 구체적인 문제를 체험하고 그 속에서 행동 논리를 확인하는 쪽으로 바뀐다. 그들은 몇몇 리더나 사회명망가 중심의 하향식 운동을 배격하고 민중의 의식화. 조직화에 의한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일꾼 중심의 운동으로 나아간다. 정치운동에서 사회운동으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60년대를 주름잡았던 40대의 학생 운동가들은 후배들에 대한 영향력과 그들로부터 존경심을 다 같이 잃게 된다.
  
  60년대 학생운동과 70년대 이후의 학생운동은 그 맥이 단절되고 만다. 새로운 세대에게는 60년대의 리더들이 졸업후 체제에 편입되어 일신의 영달을 꾀하는 소시민적 변절자로 보였고, 60년대의 리더들에게는 새 세대의 운동 방식이 너무 진보적인 것으로 비쳤다. 이런 세대적 단절은 40대와 20대 사이에 특히 크다. 인간적 교류조차 찾기 힘들다. 30대가 40대의 지도를 필요로 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 20대는 그런 지도력을 자가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의 약점까지도 사랑해야
  
  지금의 40대 학생운동 출신가들 가운데 장기표씨는 20대와 맥이 통하는 몇 안되는 사람 축에 든다. 그는 20대로부터는 학생운동의 현장을 노동.농민 쪽으로 확장시킨 개척자로 비치고, 반체제 인사들로부터는 새로운 유형의 사회운동 지도자로 기대되고 있다. 학생운동의 정신을 자신의 사회생활로까지 연장시킨 점에서는 최초의 직업 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는 경남 김해군에서 출생, 마산공고를 나와 서울 법대에 들어갔어도 주위의 세속적인 기대를 박차고 나와 감옥과 은신과 공장 노동자 생활로 점철된 지난 15년을 보냈다. 그의 생각은 어떠한가.
  
  - <민중>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돼야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 못한다. 』그러나 민중은 그 속에 진보적 요소뿐 아니라 진보에 장애가 되는 조건도 갖고 있다. 이런 현상을 꿰뚫어 보지 않고 민중을 우상숭배해선 안된다. 민중에 아첨해서도 안된다. 민중에 아첨해서도 안된다. 민중을 각성시키는 것은 누구인가. 지식인이다. 지식인이 민중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다. 지식인의 고유 기능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민중의 약점을 직시해야 민중의 실상을 볼 수 있고, 그 약점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민주화>에 대해서.
  
  『민주화는 글자 그대로 인간이 각자의 주체가 되려는 행위다. 내가 나의 주체가 되어 나를 해방시키면 거기에 참 기쁨과 자유가 깃든다. 민주화는 남을 위한 운동이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을 위한 운동이 된다. 그래서 나는 민주화를 인간화 운동이라고 믿는다. 인간의 마음이 분열되어 있을 때 기쁨이 없듯이, 인간이 자기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한덩어리가 될 때 즉, 내재적 통일이 이뤄질 때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 자신이 자신의 주체가 되는 것은 곧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인간과 우주의 통일도 이뤄지고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법열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의 심적 통일, 민족의 통일, 민주화는 동일 선상의 개념이다. 나는 민주화를 「사랑을 사회과학적으로 실천하는 행위」라고도 정의하고 싶다.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지극히 관념적이지만 정치에서 말하는 사랑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이어야 한다. 나를 먼저 사랑하지 않고서는 남도 사랑할 수가 없다. 즉, 스스로의 인간화가 안된 상태에서는 남을 위한 민주화도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가냘파 보이면서도 강인하고, 차게 보이면서도 열정을 품은 듯한 장기표씨는 대학생 때 가장 듣기 싫었던 교수의 말이 『너희들도 커 보면 안다』는 타이름이었다고 했다.
  
  『그런 자세는 오늘의 문제를 그냥 온존시키자는 기성세대의 비겁함이죠. 나는 커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아야 되겠다고 다짐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출처 : 월조
[ 2003-07-04, 16:5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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