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8군 사령부(상) - (3)글라이스틴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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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이스틴 증언
  
  글라이스틴씨가 피터슨씨에게 증언한 1979년 12월 13∼5월17일 사이의 미국입장은 대강 이러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재임 중 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한 계획을 세워 두었었다. 그것은 유혈충돌의 방지, 북한의 개입 예방, 정치적 파괴의 최소화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쿠데타의 주체세력과 접촉하고. 미국이 바보스럽게 되지 않도록 한다는 지침을 설정했다.
  
  그는 5·16때 매그루더 사령관이 박정희 그룹에 대해 병영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한 것은 생명을 걸고 나온 그들에게 먹혀들지 않을 것이 분명한 순진한 조치였다고 생각해 왔었다. 12·12사태 때도 워싱턴에서는 한국군들에게 각각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명령을 내리라는 권고가 내려왔으나 그런 지시는 5·16때처럼 무시 당 할 것이 뻔했다.
  
  대사는 전두환 장군과 최규하 대통령에 각각 통로를 확보해 두는 것이 그 뒤의 사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름길이라고 판단했다. 12월13일 아침 글라이스틴 대사는 최규하 대통령을 방문했는데, 그때 벌써 대통령은 「독자적으론 행동할 수 없는」(not an independent actor) 처지에 있음이 분명 했다. 그날 오후에는 전두환 장군이 정동의 글라이스틴 관사로 찾아왔다.
  
  전 장군은 이번 사태는 순전히 군 내부의 젊은 세력과 늙은 세력의 다툼이었으며, 민주적 절차에 결코 간섭하지 않을 것이고, 헌법기관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었다고 한다. 전 장군은 또 자신이 대통령의 꿈을 갖고 있지 않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라고 말했다.
  
  미국 당국은 세 가지 방법을 놓고 검토했다. 첫째는 반(反) 쿠데타를 지원하는 등 적극적 개입, 둘째는 사태의 방관, 셋째는 그때그때 문제가 생기면 미국의 태도를 밝히며 지켜보는 것. 글라이스틴씨는 한국군 내부에서 전두환 세쩔?대한 지지기 광범한데 놀랐다고 한다. 위컴씨는 한국군의 몇 사람이 접근해 와서 카운터 쿱(Counter Coup)을 하겠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해 왔으나 『그들을 쫓아보냈다』고 한다. 그들이 한국군 안에서 지지기반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1980년 4월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헌법규정을 위반하여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취임했을 때 미국은 공개적으로 이를 비판했다」(피터슨씨의 논문 「미국과 광주사태」).
  
  미8군사령부의 한 고위정보통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5월 17일에 국방부에서 전 군 주요지휘관 회의가 열린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날 오후에 이화여대에 모여 있던 학생대표들이 군의 기습을 받아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태의 심각성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광주사태 심각성 눈치 못채
  
  5월 18일 0시부터 취해진 계엄확대조치 이후 미8군과 대사관의 최대 관심사는 연행된 김대중씨 문제였다. 이 문제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에 광주사태가 일어났던 것이다. 우리는 광주 사태의 현장에서 보고를 해줄 정보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광주근처의 공군 부대에 미 공군 정보기관(OSI) 요원 한 사람이 있었으나, 이 사람은 현장에 나가지 못했고, 간접적인 취재 에 의한 보고만 할 수 있었다. 광주사태시 심각성을 알게 된 것은 5월19일. 오후 6시쯤 광주에 살고 있는 미국인 친구한테서 전화를 받고 나서였다.
  
  국군보안사로 가서 물어보았더니 별것 아니라면서 상황을 알려주는데 나중에 보니 사실과 동떨어진 정보였다. 우리는 광주에서 취재하고 있는 외국인 기자들을 통해서 현장상황을 파악하려고 했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우리가 광주사태의 전체적인 상황을 알게 된 것은 1985년 국방부장판 이 국회에서 보 고한 내용을 통해서였다』
  
  글라이스틴씨는 1986년에 「한국 : 미국의 특별한 관심사」란 논문을 「인권외교」(University Press of America)에 실었다. 이 논문에서 그는 「5·17직후 김대중, 김종필씨가 체포되자 미국은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최규하 대통령에게 두 김씨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런 요구는 워싱턴에서 그리고 주한미국문화원을 통해서 공개되었으나 계엄령하의 한국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김대중씨의 체포 문제로 신경을 쓰느라고 광주사태의 초기상황에 관심을 두지 못했고, 우리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공수부대에 의한) 중대한 상처가 가해진 다음이었다」고 썼다.
  
  글라이스틴씨의 논문은 계속된다.
  「우리는 한국군부에 대한 영향력의 부족과 정보부족에 당황하였다. 우리는 추기경의(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의) 중재역할을 지지했다. 한국군에 대해서는 대화를 촉구했고, 또 다른 폭력을 최소화해줄 것을 강력하게 당부했다. 우리는 여러 번 성명서를 발표했다. 시민과 계엄군 양쪽에 대해서 자제를 요청하고 북한에 대해서는 간섭을 경고한 내용이었다. 한국정부에서는 이 성명서를 방송하고 비행기로써 광주시내에 투하하겠다고 약속했으나 광주시민들 중에 우리 성명서를 접했던 이는 거의 없었고, 미국이 진압을 지원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만 돌았다」
  
  미8군의 한 정보관계자는 『글라이스틴 대사는 평소부터 사이가 가까왔던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을 만나 광주사태를 의논했는데 사태수습보다는 현황파악이 주된 목적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공수특전사는 한미연합사 창설 때부터 연합사의 작전통제권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부대였다. 한국정부가 부마사태와 광주사태 때 이 부대를 투입한 것이 미군과 의논 없이 이루어진 일이라는 데 대해서는 별다른 이론이 없다. 일부 학생·재야세력에서 주로 따지겠다는 것은 20사단의 문제이다. 서울 근교에 있는 20사단은 박정희(朴正熙)정권 시절부터 충정작전부대』로 지정돼 있어 서울 등지에서 긴급사태가 발생하면 계엄령 하에서 데모진압에 투입되게 돼 있었다.
  
  10·26사건이 나자 당시 계엄사령관,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은 20사단 병력을 27일 새벽에 서울로 진주시켰었고. 12·12사태 뒤까지도 서울에 주둔하였다. 지난 7월 임시국회에서 오자복(吳滋福) 국방부장관은 『20사단은 10·26 직후 연합사의 작전통제권에서 벗어나 육군참모총장의 지휘를 받고 있다가 광주로 내려갔으므로 한미연합사령관의 출동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요지의 답변을 했었다.
  
  20사단 출동과 1군의 역할
  
  20사단은 1980년 봄에 일단 주둔지로 갔다가 5·17 이틀 전인 5월 15일제 2개 연대가 서울에 진주, 효창공원과 잠실체육관에 주둔해 있었다. 5월 18일에는 주둔지에 남아 있던 1개 연대까지 서울로 왔다. 광주 시내에서 계엄군이 철수하고 있던 21일 저녁에 20사단의 2개 연대에 육군 본부로부터 출동명령이 떨어져 22일 아침에 광주에 도착했었다. 이 20사단의 출동에 대해서는 미국 측의 해명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미8군의 한 정보관계자는 『20사단의 출동에 대한 연합사의 기록은 없다. 자전통제권 바깥에 있어도 출동사실을 통보는 했을 것 같은데 그에 대한 기록도 없다』고 했다. 글라이스틴씨는 1987년의 인터뷰(서울)에서 이렇게 말했다. 『광주시민과의 대화가 진행 중이던 때 한국군당국에서 우리에게 이야기 해 오기를, 협상은 실패할 것 같고, 치안회복을 위해서 광주를 탈환해야겠다는 것이었다.
  
  한국군 당국에서는 특전사병력을 투입하는 아이디어와 20사단을 투입하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나와 위컴씨는 20사단이 민간인의 시위를 다루는 데 경험이 있는 부대라고 판단하여 그것이 이성적인 제안이라고 보고 20사단의 사용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았다. 나는 20사단이 광주로 진입했을 때 희생자가 2명뿐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광주의 많은 시민들과 학생들은 미국이 광주사태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고 하는데 잘못된 이야기다. 대부분의 희생자는 「20사단에 대한 우리의 결정으로서 이 문제와 관련되기 전에」 (before our involvement with the decision about the 20th division) 발생했던 것이다. 나는 그 결정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
  
  위컴씨는 1987년 초 피터슨씨에게 『그 조치( 20사단에 대한 작전통제권의 해제)는 한국 국방부의 요청에 의해 사태를 통제하고 있는 군부와 협조하는 방편으로 취한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미국과 광주사태」) 릴리 현 주한 미 대사는 지난 7월 호 월간 조선과의 인터뷰에서 『1978년에 제정된 한미연합군사령부 협정 아래에서는 한국군부가 연합사의 작전통제권으로부터 부대를 뺄 때 연합사에 미리 통보만 하면 된다. 통보이지 허가요청이 아니다. 이 통보에 대해 승인하거나 반대할 권한을 연합사는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 글라이스틴 전 대사가 「승인했다」는 것이 어떤 내용인지 확실히 모르겠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
  
  법률적으로 따진다면 1979년 10월27일부터 연합사 작전통제권에서 벗어난 20사단을 광주로 내려보내는데는 한국 측이 미군 측과 협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컴 및 글라이스틴씨의 증언으로 미루어 한국 군부가 20사단의 투입문제에 대해 미국 측과 상의한 것은 사실일 것이고, 그 상의는 미군의 양해를 구하는 형식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1987년까지도 위컴 및 글라이스틴씨가 「결정」 「조치」 등의 용어를 쓴 것으로 봐 20사단의 출동을 미국 측에서는 승인사항으로 잘못 알고 있었지 않나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오(吳)장관의 답변처럼 20사단이 그 때 작전통제권 바깥에 있었다는 것을 글라이스틴씨가 알았다면 애써 해명할 것도 없이 『20사단은 연합사와의 상의 없이 한국군이 쓸 수 있는 부대였다』고 해버리면 됐을 테니까.
  
  기자보다 못했던 상황파악?
  
  글라이스틴씨와 미8군 정보관계자는 『광주사태를 초기에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있는 글라이스틴씨의 최근 해명도 그렇고 기자가 만나 본 미8군 당무자의 광주사태에 대한 지식은 간접적이고 잘못된 점이 많았다. 한 미군 측 정보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발생단계의 헛점 때문에 우리의 광주사태에 대한 지식은 한국 정부와 재야, 그리고 언론에서 나오는 문서에 주로 의존하는데 그것들도 각각 달라 사실과 소문을 가려내는 일이 여간 어렵지 않다. 미국의 정보기관을 전지 전능하다고 과대평가 하는 이들이 많은데 10·26, 12·12, 광주사태 등에서는 기자들보다도 우리의 상황 파악이 늦었다』
  
  미군 측에서는 20사단의 문제로 골치가 아팠든지 세네월드 사령관 재직 때(1982∼84년) 20사단을 평상시에는 영구적으로 연합사의 작전 통제권 바깥에 두기로 결정해 버렸다. 한국군의 한 장교는 이렇게 말했다. 『반정부 인사들은 12·12 사태와 광주사태 때 미국 측이 전두환 장군의 쿠테타를 저지하지 못했고, 광주사태의 유혈진압을 막지 못했다고 비난하는데 만약 미국이 군부 쿠데타도 막아 주고 광주공화국처럼 된 지역의 탈환도 못하게 했다면 우리 나라는 과연 독립국가이며 미국은 제국주의가 아닐까? 1980년에 한국이 민주화가 안된 책임을 미국에 돌리는 심리의 바탕에는 미국의 힘에 대한 과대평가와 사대주의적 기대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들쥐 발언의 내막
  
  광주사태 뒤에 미국 측이 전두환(全斗煥) 정권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바뀌었고 레이건 대통령이 81년 초에 全斗煥대통령과 회담함으로써 그 지지를 고착시키는 과정에서 반미감정은 강화되었다. 특히 1980년 8월8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와 AP통신을 통해 보도된 위컴 사령관의 유명한 「들쥐 발언」은 많은 한국인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이 기사는 한 고위 장교의 말이라면서 「미국은 또 다른 한국의 군사정권을 지지할 것이다」고 보도했고 「한국인들은 늘 들쥐처럼 그들의 지도자를 따라가며 지금은 전두환 장군을 따라 가고 있다」는 요지의 논평을 소개하였다. 위컴씨와의 인터뷰를 정리한 피터슨씨의 논문 요지는 이러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위컴 사령관에게 기자들과 때때로 만나 정보를 주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8월 위컴씨는 AP통신의 테리 앤더슨 기자(그 뒤 레바논 사태 취재 중 납치돼 억류 중)와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의 샘 제미슨 기자를 만났다. 이 인터뷰는 『엎 레코드』이며 『배경 설명』으로 양해가 이루어졌으나 위컴 장군은 언제나 그러듯 녹음은 허용하였다. 두 기자가 인터뷰를 끝내고 일어서면서, 앤더슨 기자가 『미국은 한국에서 또 다른 군인지도자를 지지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위컴 사령관은 미국무성 주변에서 논의되고 있던. 얘기를 옮겼다. 즉, 『한국의 새 지도 그룹은 선거와 같은 방법으로 정권의 정통성을 만드는 과정을 거쳐야 하며, 그들이 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위컴씨는 그런 조건이 충족된다면 미국은 새 정부를 지지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두 기자는 이 논평을 특종이라고 생각하고 『미국은 한국의 전 장군을 지지한다』는 제목으로 기사를 보냈다. 다음날 뉴욕 타임즈의 도오쿄 특파원 헨리 스톡스 기자는 위의 두 기자와 같은 숙소에 머물고 있었는데. 문제의 인터뷰 테이프를 들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찾아가 테이프를 틀어 주고는 누구의 목소린가 하고 물었다.
  
  스톡스 기자는 뉴욕타임즈 기사에서 전두환 사령관이 로스앤젤레스 기사의 소스는 위컴 장군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2주 내에 전 장군은 최규하 대통령을 사임시키고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미국과 광주사태」). 뉴욕타임즈 기사가 보도되었을 때 위컴 사령관 부부는 워싱턴에서의 공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렸었다. 미 국방성에선 이 기사의 영향을 검토하기 위해 3일간 위컴의 한국귀환을 연기시켰다고 한다. 위컴씨의 부인은 나중에 친우들에게 『우리 생애에 있어서 가장 길었던 3일간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국방성에서는 위컴 사령관을 다른 직책으로 전보시키는 문제도 검토했었다고 한다.
  
  김대중(金大中) 구명 공작
  
  위컴 사령관은 1928년 뉴욕에서 났다. 1950년에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 육군의 엘리트 코스를 두루 거쳤다. 월남전에서 싸운 경력도 있다. 미 합참본부. 국방성에서 근무한 경력에서 보듯 참모의 능력이 뛰어났다. 미 육군의 최강사단으로 불리는 제101 공정사단의 사단장을 지낸 정도로 탁월한 지휘관이었다. 대단한 도덕적 자부심을 가진 그는 전두환(全斗煥)장군이 자신이 깍듯하게 모셔야 할 주둔지역의 국가 원수가 되자 상당한 갈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는 서서히 좋아져 全대통령은 『내가 레이건에게 부탁하여 위컴을 육군참모총장이 되도록 했다』고 사석에서 말하기도 했었다.
  
  전 미8군사령관 위컴씨는 지난 7 월3일 김포공항을 통해 서울에 와 3일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3일 저녁에는 서울의 스위스그랜드 호텔에서 있었던 만찬에 참석했었다. 미8군 측에서는 그의 방한을 비밀에 붙이려고 애썼는데 국내 신문에는 보도되지 않았다.
  
  위컴씨는 육군참모총장을 그만둔 직후인 지난해 6월에 한국을 방문하기로 돼 있었는데. 미국무성이 한국의 사태와 관련지서 방한에 반대 뜻을 나타내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미8군사령부의 한 관계자는 『위컴 씨가 그때 못한 이임인사를 하러 온 게 아닐까』라고 했다. 그는 지금 군사 통신협회의 국제 회장이다. 10·26, 12·12, 광주사태 등 격동기에서 한미관계를 개선하는 데 주한 미군은 평상시보다 더 활발하게 정치적 역할을 하였다. 한국 측의 실권자가 군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국과 미군 사이를 오가며 관계 개선에 힘쓴 이로는 육사 9기 출신인 손장래(孫章來)씨(전 안기부 제2차장·주미대사관 공사)와 지금은 현역소장인 육사 17기의 李모씨가 있다. 孫씨는 합참의 전략기획국장을 지내면서 미8군과 가까워 졌었고, 李씨는 영관 장교시절에 베시 당시 미8군사령관 겸 연합사령관의 보좌관으로 근무하면서 베시 대장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이였다.
  
  한미 관계 개선에서 중요한 장애요인을 계엄군법 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金大中)씨의 문제였다. 미8군 정보 부서에서는 한국 군부가 金大中씨를 죽이지는 못하리라고 판단하고 있었으나, 온건파로 분류돼 있는 장성들까지 『김대중씨를 사형 집행하면 미국 측이 어떤 태도를 보이겠는가』하고 물어오자 긴장했었다고 한다. 미8군의 수뇌부는 金大中씨를 살릴 수 있는 길은 레이건 대통령 당선자와 미국의 언론을 움직이는 방법뿐이라고 판단했다.
  
  글라이스틴 대사와 위컴 사령관, 베시 전8군사령관, 그리고 레이건 대통령 취임준비위원회… 이런 쪽에서 힘을 써 金씨의 집행이 보류되었다는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 측근들은 미8군과 미국대사관의 조언을 받아 들여 金大中씨의 사형 집행보류와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방미 초청을 교환조건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출처 : 월조
[ 2003-07-04, 17:1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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