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8군 사령부(상) - (2)격동기의 미군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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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격동기의 미군 역할
  
  오발사고로 보았던 10·26사건
  
  1980년대에 들어서 확산되기 시작한 반미감정의 뿌리는 10·26, 12·12, 광주사태에 있어서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10·26 사건의 배후는 미국 CIA란 얘기가 나오더니. 12·12사태 때는 미군이 바보노릇을 하는 것으로 비쳐졌고, 광주사태 때는 잔혹한 진압을 지원한 것으로 인식되면서 전(全)정권에 대한 증오심은 미국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1979년 10월26일 밤 8시30분쯤(朴대통령이 살해 된지 약 50분 뒤) 미8군사령부는 청와대 안에서 심각한 사고가 발생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미국 대사관도 이와 비슷한 시간에 첩보를 얻었던 것 같다. 미8군 벙커에는 위컴 사령관과 글라이스틴 대사, 하우스맨 UN군사령관 특별 고문 등이 모였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날 오후 4∼6시 사이 대사관저에서 김영삼(金泳三)신민당 총재와 요담을 한 뒤 집에 머물러 있다가 긴급연락을 받고 나온 것이었다.
  
  자정 무렵 미8군에서는 朴대통령이 사망했음을 확인했으나. 오발사고로 판단했다고 한다. 미8군의 한 정보요원이 한국 측 소식통을 시내 모처에서 만나 朴대통령 피살사건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한 것은 27일 새벽. 김성진(金聖鎭) 문공부장관이 朴대통령의 서거를 발표하기 한 시간쯤 전이었다는 것이다. 이 한국 측 소식통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내가 병원에서 시체를 봤는데 머리와 가슴에 두발을 맞았더라』고 했고 미8군 측에서는 『두발을 맞았다면 오발일 수가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0·26사태 때 CIA한국지부장은 제10대인 로버트 브루스터씨(Robert Brewster)였다. 그때 52세였다. 78년 말에 한국에 온 브루스터씨는 6대 지부장인 존 리처드슨씨 밑에서 부지부장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공군장교 출신인 그는 눈이 아주 크고 시원한 인상에 개방적인 泳汰潔駭?
  
  한국에 오기 직전 그는 방광암(췌장암이었다는 설도 있음) 수술을 받았었다. 10월 16일 부산, 10월18일 마산에서 격렬한 시위가 터져 부마사태로 발전했을 때 그는 현장으로 요원들을 보내 정보수집에 분주했다. 그러나 부마사태가 가라앉고, 다른 도시로 확산이 되지 않자 그는 10월21∼24일 사이 경주, 동해안, 설악산 등지로 관광여행을 갔다. 그 급박한 시점에 관광여행을 다녔다는 것이 오히려 오해를 살수도 있겠지만. 단순한 가족끼리의 관광이었음은 우리 쪽 정보에서도 확인됐다.
  
  관광에서 돌아온 지 이틀만에 10·26이 나자 그는 매우 당황했다고 한다. 27일 아침 그는 국군보안사령부와 정보부를 찾아갔으나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는 용산 유엔 촌에 있는 전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朴鐘圭)씨(당시 공화당의원) 집을 찾아갔다. 이때 브루스터 씨를 목격한 朴씨의 한 측근은 그가 굉장히 초췌한 표정이었다고 했다.
  
  박종규(朴鐘圭)씨는 10·26뒤 등장할 군의 신진세력과도 깊은 인간적 유대를 갖고 있었다. 12·12사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군장성들 가운데는 5·16당일과 직후 朴소령 밑에서 박정희(朴正熙)의장 경호요원으로 일했던 사람들도 많고 그가 후원자였던 「하나회」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어쨌든 브루스터씨의 10·26전후 행적으로 봐서도 이 시해 사건에 미CIA가 관련되지 않았음은 불명하다. 세월이 흐를수록 확실해지는 것은 10·26이 김재규(金載圭)의 즉흥적 단독범행이었다는 사실이다.
  
  朴정권 시절 역대 미국CIA한국 지부장이 업무상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은 한국의 중앙정보부장과 국군보안사령관이었다. 특히 중앙정보부장과는 한 달에 두세 번은 만났다. CIA지부장은 꼭 한국 측 두 기관장을 찾아가 만난다. 10·26 뒤 중앙정보부가 무력화되자 미 CIA 한국지부는 상대역을 국군 보안사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브루스터 지부장과 全사령관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공백기의 미8군과 C-A  
  10·26사건 뒤에 미8군사령부는 한국 군부를 더욱 주시하게 되었고 하우스맨과 브래드너씨 등 한국정보통은 바빠졌다. 한 미군정보 관계자는 『그때 우리는 박정희란 권력의 중심이 사라져 진공상태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진공을 메울 인물로는 세 사람을 꼽았는데 노재현 국방부장관, 정승화 계엄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그들이었다. 우리는 정규육사출신 그룹을 오랫동안 연구해 왔었다.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키운 세력으로서 그 뒤의 군부개입은 그의 유산인 셈이다. 전두환 장군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전보할 것이라는 소문이 11월말 에 떠돌았다. 정승화씨는 최근에 말하기를 12월9일에 전장군의 인사문제를 노장관과 처음으로 의논했다고 증언했는데, 소문은 그 앞서부터 나 있었고, 이것이 12·12사태의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고 판단한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또 『정규육사출신들의 학력 등을 알아보니 14∼24기 출신들이 전성기로서 아주 우수한 사람들이고 25기부터는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12∼12사태 뒤 나는 전장군의 정권장악이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비정규육사출신이 정권장악을 했다 해도 정규육사 그룹에 의한 쿠데타가 또 일어났을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CIA 서울지부도 이 중요한 시기에 새로 대두될 세력에 대한 탐색작업을 진행했다. 그런 문제에 대해 브루스터씨는 이미 확실한 채널(국군보안 사령부와 전두환 장군)을 갖고 있었다. 미국본부에서도 한국통을 가동시켰다.
  
  10·26사태 5일 뒤인 10월31일 워싱턴에선 흥미 있는 모임이 있었다. 그때 현대건설 대표이사로 있던 장우주(張禹疇/61·전 국방부관리차관보·예비역 소장)씨는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워싱턴에 와 있었다. 張씨는 주한 미국 대사관이나 주한미군 사람들과는 수십 년 동안 교분이 두터운 미국통이다. 그는 워싱턴에서 두 CIA본부 간부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1976∼78년 사이 CIA한국지부장이었고 그 땐 극동담당국장이던 로버트 그릴리씨와 73∼75년 사이 한국지부장이었고 그땐 국가안보회의에 파견 나가있던 도널드 그랙씨는 張씨에게 10·26이후의 사태진전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張씨는 정규육사출신 장교집단의 부상(浮上)과 세대교체의 조짐, 그리고 전두환(全斗煥)장군의 리더쉽에 대해서 설명했다고 한다. 그랙은 全장군의 이름을 메모할 만큼 열심이었다고 한다.
  
  노(盧)국방의 피신
  
  1979년 12월12일 저녁 7시를 조금 지나 서울 한남동의 정승화(鄭昇和)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성이 연발로 울리자 바로 옆집인 국방장관공관에 있던 노재현(盧載鉉)장관은 황급히 담을 뛰어넘어 모처로 피신했다가 저녁 8시가 넘어서 육군본부 지하벙커에 나타났다. 지하벙커에는 김용휴(金容烋)국방차관, 윤성민(尹誠敏)육군참모차장, 하소곤(河小坤)육본작전참모부장 등 군 수뇌부가 미리 나와 전군에 비상을 걸고 「총장 납치자들」을 수배해놓고 있었다. 盧장관은 합수본부 측을 진압하려는 육본 측에 서 있었던 셈이다. 밤 9시 조금 전에 尹차장은 지휘소를 육군본부에서 수도경비사령부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육본 지하벙커에 있었던 당시 육본헌병감 김진기(金晋基)준장은 『10·26이후 육본을 방어하기 위해 불러다 놓았던 9공수여단 병력이 공교롭게도 그 며칠 전에 돌아 가버렸기 때문에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로 한 것이었다.
  
  이때 우리는 노 국방에게 안전한 미8군 영내로 가 있으라고 권했었다. 거기서 전두환 장군을 불러 사태를 수습하도록 권했다. 그래서 노 국방은 육본에서 미8군 벙커로 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때 육본 측에서는 노(盧)국방이 전두환(全斗煥)장군을 미8군 영내로 불러들였을 때 그를 체포하거나. 全장군이 최규하(崔圭夏)대통령을 만나러 총리공관으로 들어 갈 때 경비를 맡고 있던 헌병대 병력을 동원 사살하는 계획도 검토했었다. 첫째 계획은 全장군이 육본이나 8군사령부로 오지 않아 실패했고, 두 번째 계획은 헌병경호병력이 합수본부 측에 붙은 청와대 경호실 병력에 의하여 무장이 해제됨으로써 수포로 돌아갔었다.
  
  미8군 벙커속의 위컴
  
  정승화(鄭昇和)총장 공판에서 총격전이 있었던 20여분 뒤인 12일 저녁 7시30분쯤 위컴 사령관과 글라이스틴 대사는 미8군 벙커에 나타났었다. 밤 10시 현재 미8군 벙커에는 위컴 사령관, 글라이스틴 대사, 노(盧)국방장관, 김종환(金鍾煥)합참의장, UN군사령관 고문 브레드너씨 등이 모여 있었다. 미군 측에서는 10·26때와 마찬가지로 이 사태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全장군이 이 하극상 사건의 지휘자라는 것도 처음엔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全장군이 지휘자라는 것을 미8군이 알게 된 것은 13일 새벽 2시께였다고 한다.
  
  월리엄 글라이스틴 전 대사는 지난해 1월13일 서울 미국 문화원에서 기자들과 회견한 자리에서 『마침 나는 그 사건이 난 저녁에 용산 기지에 있던 위컴 사령관을 방문하고 있었다. 내가 한 첫 시도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아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파악에는 서너 시간이 걸렸다. 결과는 내가 짐작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우리의 첫째 우려는 한국군부 안에서의 충돌이었다. 그런 충돌은 북한의 개입을 부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북한에 대한 경고를 하기로 했던 것이다』 고 말했었다. 위컴씨는 지난해 부산에 사는 현대사 연구가 마크 피터슨씨와의 인터뷰에서 『고위한국군 장성들이 군대를 동원, 서울로 진입하여 전두환 그룹을 진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새벽까지 기다려 보라고 권고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피터슨의 논문 「미국과 광주사태」에서). 그날 육군본부의 당직실장은 김재명(金在明)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副長·소장) 이었다.
  
  金소장은 전두환(全斗煥)장군의 부탁에 따라 8군 벙커로 전화를 걸어 노(盧)장관에게 『빨리 국방부로 나오셔서 사태를 수습해달라』는 뜻의 권고를 했다고 한다. 위컴과 글라이스틴씨는 『가면 위험하다』면서 盧국방과 김종환(金鍾煥)의장을 붙들어 두려고 했다고 한다.
  
  13일 새벽 1시를 넘어서 盧장관과 金장군은 국방부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위컴 사령관은 자신의 승용차를 내주었다. 이들이 차를 타고 나간 직후 육본과 국방부 쪽에서 콩볶듯하는 총격전 소리가 들려왔다. 미8군 벙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盧장관과 金장군이 사살되었다고 판단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군 측에선 국방부로 전화를 걸어 두 사람의 안위를 문의했는데 『신상에는 이상이 없다』 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때의 총격전은 박희도(朴熙道)준장이 지휘하던 공수1여단이 육본과 국방부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이런 혼란상태에서 국방부로 들어가던 盧국방과 金의장을 태운 위컴의 승용차는 공수부대원의 사격을 받았다. 안테나가 총격을 받고 부러졌다. 이 총격으로 한때는 위컴 사령관이 탄 승용차가 총을 맞았고, 이 때문에 위컴 사령관이 더욱 전두환 사령관을 미워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었다.
  
  국방부로 들어간 김종환(金鍾煥)대장은 다른 군 수뇌인사들과 함께 장관실에 있다가 공수부대원들에게 무장 해제되었고, 盧장관은 지하실 계단 밑에서 새벽 3시58분까지 숨어 있다가 공수부대원에게 발견되었다. 그는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모셔져」 최규하(崔圭夏)대통령으로부터 정승화(鄭昇和) 총장 연행결재를 뒤늦게 받아내는 역할을 수행했다. 위컴 사령관은 김종환(金鍾煥)합참의장을 통해서 9사단을 통보 없이 출동시킨 데 항의했고 며칠 뒤 합참의장은 사과하는 답신을 위컴에게 보냈다.
  
  지난해 1월 한미연합사 대변인은 작전통제권 문제를 설명하면서 「12·12사태 때 서울로 들어온 9사단의 1개 연대에 대해서 한국정부는 사전에 작전 통제권 해제 요청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었다. 12월 13일 새벽에 이미 9사단 병력은 서울로 진입했는데 그날 오후에 공식통보가 연합사에 도착했고 9사단에 대한 작전 통제권은 14일 낮 12시1분을 기해서 한국 측으로 넘어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위컴-전(全) 회담의 해프닝
  
  위컴씨에 따르면 그는 12·12사태 전에 쿠데타에 관련한 루머를 듣고 이를 한국육군과 국방부에 알려주었으나 그들의 태도는 『우리보다 미군이 어떻게 먼저 알 수 있다는 말인가』란 듯 냉담했었다고 한다. (「미국과 광주사태」) 12·12사태 뒤 위컴 사령관은 대노하여 약 한달 동안 全사령관을 만나주지 않았다. 위컴과 全 사령관의 불화가 계속되면 군부내의 파워 게임이 복잡해질 위험이 있다고 판단한 위컴 사령관 측근과 허화평(許和平)국군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이 서로 연락하여 1980년 1월에 위컴-全의 초대면이 한미연합사 사령관실에서 이루어졌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연합사에 도착하자 한국인 장교들이 나가서 영접했다. 그러나 위컴 사령관은 집무실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자기 군화를 벗어 올려놓고 그 옆에는 성경책을 펴 두었다. 위컴 사령관은 독실한 기독교신자이고, 술·담배를 하지 않으며, 신변관리에 철저한 군인이었다.
  
  월남전 때 베트콩의 기습에 걸려 옆구리에 총격을 받고 피를 흘리면서도 하느님께 『저는 죽어도 괜찮으나 부하들을 살릴 수 있을 때까지만 생존해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는 사람이다. 이런 성격이었기 때문에 12·12사태에 나타난 하극상과 유혈극을 매우 싫어했고, 그 불만의 표시로 군화와 성경책을 이용한 것이었다. 전두환 사령관이 들어서도 위컴 사령관은 일어서지 않았다. 전 사령관은 노기를 띤 듯했으나 냉정을 유지했다고 한다. 전 사령관이 나갈 때도 위컴씨는 일어나지 않았다. 위컴 사령관은 全장군과의 회담내용을 보고하는 문서에 「그는 마치 『왕으로 태어난 것 같이』(Born to the purple) 행동했다」는 촌평을 덧붙였다. 위컴 사령관이 앞에서 소개한 피터슨씨에게 한 全장군과의 면담에 관한 이야기의 요지는 이러했다.
  
  『12·12뒤 전 장군은 글라이스틴 대사를 먼저 찾아갔었다. 이어서 나와 만나게 되었는데 전장군의 발언 요지는 우리는 부정부패를 일소한 뒤 병영으로 돌아갈 것이며, 우리를 믿어주면 언젠가는 우리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옛날 자료를 찾아보았다. 5·16쿠데타 뒤에 매그루더 사령관이 태평양 사령부에 보고한 김종필씨와의 대화 요지였다.
  
  그때 김종필씨가 말한 것과 전씨가 나에게 말한 내용은 기가 막히게 꼭 같았다. 나는 전장군의 말에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날의 대화에 대해서 한 관계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위컴 사령관은 아주 딱딱하게 질문을 했어요. 그런 식으로 피를 흘리면 어떻게 하느냐, 왜 9사단 병력을 사전통보 없이 빼갔느냐… 이런 식으로 물었는데 전두환 사령관은 (계엄사 발표문대로) 정승화씨와 정병주씨가 김재규의 돈을 받았다느니 하면서 설명을 하더군요. 그리고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면서 「우리를 지켜봐 주십시오. 안심하시게 될 것입니다」는 뜻의 이야기를 했어요』
  
  정승화(鄭昇和) 생일카드 소동
  
  위컴-전두환 회담 뒤 하우스맨 유엔 군사령관 특별고문 등 한국군부의 사정에 밝고 오래 전부터 전(全)장군을 잘 알고 있었던 한국 통들이 나서서 全장군과 자주 접촉하게 되었고, 全장군쪽 에선 유학성(兪學聖)씨(당시 3군사령관)가 위컴 사령관과 자주 접촉하였다. 1980년 2월27일은 정승화(鄭昇和)씨의 생일이었다. 그는 군 교도소 감방에서 생일을 맞았다. 이날 위컴 대장은 鄭씨의 집으로 생일선물과 축하카드를 보냈다. 카드에는 『귀하의 나라를 위해 최대의 헌신과 봉사를 하셨고 앞으로도 하시게 될 장군의 생일을 맞아 진심으로 축하를 보냅니다』고 쓰여져 있었다. 鄭씨의 아내는 이 카드를 갖고 교도소로 면회를 가서 鄭씨에게 보여주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전두환(全斗煥)보안사령관은 8군사령관 고문 하우스맨씨를 호텔에서 만나 항의했다. 글라이스틴씨가 피터슨씨에게 털어놓은 이야기에 의하면 전 장군은 직접 글라이스틴 대사도 만나 위컴 사령관이 국내 문제에 간여하고 있다고 불평하였다고 하니 카드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었던 것 같다. 정(鄭)씨에 따르면 주영복(周永福)국방부장관도 위컴 대장에게 직접 이 문제에 대해 항의했다고 한다. 미8군 사령관측에 따르면 이 생일 카드와 선물은 위컴 대장이 직접 지시해서 보낸 것이 아니고, 비서실에서 생일축하대상자 명단에 따라 처리를 한 것뿐이었다 고 한다. 육사 11기 출신의 한 예비역 대장은 『그때 전두환 이를 만났더니 그 카드문제로 위컴 대장에게 굉장한 악감정을 갖고 있더라』고 말했다.
  
  全에 우호적인 CIA지부장
  
  12·12사태가 났을 때 CIA 한국지부는 10·26때보다 또 미8군보다도 훨씬 덜 당황했던 것 같다. 12월12일 전날 밤 지부장 브루스터씨는 전두환(全斗煥)사령관의 연희동 집을 몰래 찾아가 상당한 시간 이야기를 하고 나왔다. 이 중대한 시점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갔는지는 그 뒤의 사태발전을 근거로 추리하는 수밖에 없겠다. CIA한국지부는 12·12사태의 기정사실화 쪽으로 나갔다. 이때 한국의 미국통 인사들이 그릴리, 그랙, 클리블랜드씨(주한 미 대사관의 참사관을 지냈고 당시는 국무성의 한국과장)등 CIA와 국무성의 한국인맥을 설득, 한미간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암을 앓고 있었던 브루스터씨는 재임 중 한국 중앙정보부장이 네 번이나 바뀌고, 한국 대통령을 세 명이나 겪는 격동의 시절을 보냈다. 재임 중 암이 재발, 일시 귀국하여 2차 수술을 받고 돌아와 다시 근무에 임해야 할만큼 격무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그는 병색을 일체 내보이지 않고서 의연하게 임무를 해내 부하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국 고위층과의 인간적 유대도 더욱 돈독해졌다. 全사령관은 위컴 사령관을 굉장히 싫어했으나 브루스터씨와는 매우 친했고, 그를 중요한 대미(對美) 대화통로로 활용했다. 全사령관은 그 즈음 자신의 전기를 쓰고 있던 천금성(千金成씨/소설가)에게 『브루스터가 나보고 중장계급장을 달라고 했는데 거절했다』고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브루스터씨는 80년 말 암이 악화돼 본국으로 후송됐다. 그 얼마 뒤 그는 사망했다. 12·12사태부터 5·17까지의 기간에 대해 미8군의 한 정보 관계자는 「역사상 가장 길었던 쿠데타」라고 표현했다. 12·12사태 직후 글라이스틴 대사는 힘의 중심점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한 감을 잡지 못하고 최규하(崔圭夏)대통령, 李희성 계엄사령관, 전두환(全斗煥)보안사령관 등을 자주 만나 『군도 학생도 나와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미8군에서는 12·12사태로써 군의 재등장을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한 관계자는 『그래서 우리는 광주사태가 정권장악을 위한 각본이라는 주장을 믿지 않고 우발적 사태였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이미 군 의 정권 장악은 기정사실화 돼 있었으므로 그런 사태를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 다만 5·17직전에 계엄당국이 며칠동안 학생시위와 이의 보도를 조장함으로써 군의 정치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한 공작을 편 것은 사실이다』고 말했다.
출처 : 월조
[ 2003-07-04, 17:1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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