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8군 사령부(상) - (1)주한미군 핵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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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그 한복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주한미군의 신화를 벗긴다.
  
  위컴·전두환(全斗煥)의 요담내막
  충격-핵(核)배치 밝힌 헤이즈 보고서
  12·12밤의 9군 벙커
  한국 군부(軍部)와의 갈등
  
  <1988년 8월 월간조선>
  
  제1장·주한미군의 핵무기
  
  『바보짓은 했지만 나쁜 짓은…』
  
  『우리가 말입니다. 한국에 와서 바보짓은 많이 했지만 나쁜 짓을 한 것은 별로 없지 않습니까』주한 미8군에서 약30 년간 근무했고, 한국어가 유창한 한 미국문관은 기자와의 오랜 인터뷰를 끝내고 헤어질 때 그렇게 말했다. 화난 것 같기도 했지만 쓸쓸한 느낌이 더 짙게 풍기는 말투였다. 그는 『지금같이 반미감정이 격렬해지면 미국에서는 반한 감정이 생길 것이다』면서 『미국을 욕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사실에 기초한 비판이라야 할 것이다. 오늘 내가 한국기자와 만난 것도 사실을 전달하고 싶어서였다』고 했다. 주한미군이 한국에서 점유하고 있는 땅은 서울의 반 정도인 약3백km이다. 주한미군은 1만 5백12개의 빌딩과 1백20 군데의 기지를 갖고 있다. 이들은 또 4만3천3백 명의 미군병사를 포함한 약6만4천 명의 고용인을 데리고 있다. 그 가운데 약1만 9천명은 한국인이다. 가족까지 포함하면 주한미군 사회는 약 10만 명에 이른다.
  
  주한미군의 87년도 예산은 한국 GNP의 약1%인 10억2백10만 달러였다. 6만4천여 명의 고용인 수를 기준 하여 국내재벌과 비교하면 주한미군은 현대(15만5천) 삼성(12만) 대우(8만9천)에 이어 네 번째가 된다. 한국인을 고용하는 규모로 비교해도 주한 미군에서 일하는 1만9천 명이란 한국인 숫자는 현대, 삼성, 대우, 럭키-금성, 효성그룹에 이어 여섯 번째가 된다. 주한미군에 제공하는 한국 측의 지원은 간접지원 16억1천8백50만 달러, 직접지원 2억8천7백60만 달러를 합쳐 약19억 달러에 이른다. 간접 지원 중에서는 우리가 무상으로 제공한 부대의 부지 사용료에 해당하는 10억5천만 달러가 가장 많다. 카투사 인력 공급 등에 따른 인건비 간접지원이 4억 달러에 이른다. 면세 및 기타 감면특혜에 따른 간접지원은 약7천2백만 달러 어치다.
  
  이런 주한미군을 일부 학생들은 지난 43년 동안 이 나라를 좌지우지해온 미제의 교두보, 분단고착의 원인, 군사독재의 후원자, 광주사태의 조종자 등으로 보고 있다. 앞에 나온 그 미국문관은 『한국인은 이 우주를 음모적 시각(Conspiratorial View of the Universe)으로 관찰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10·26사건은 미국 CIA의 조종이다. 광주사태도 미국의 책임이다 는 식으로 미국을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전제한 바탕에서 있지도 않은 음모의 책임을 덮어 치운다는 불평이었다. 주한미군을 한국이 당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여기는 일부 학생들의 시각과 주한미군을 한국의 혈맹으로 생각하는 전통적인 관점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 이 기사는 그 간극을 메우려고 쓰는 것이 아니다.
  
  주한미군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문제는 그런 생각이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느냐 일 것이다. 허구에 바탕을 둔 논리는 아무리 정교해도 허구임이 증명될 때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다. 근래 주한미군을 보는 한국인의 시각에 영향을 준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12·12 사태. 광주사태, 6월 사태, 작전통제권의 문제, 한국내의 핵 문제, 한국군부와의 관계, 용산 미군기지의 문제, 동작대교 건설 등등…. 이런 쟁점들을 중심 축으로 하여 주한미군의 역할에 대한 실증적인 검토를 해 보자는 것이 이 기사의 기획목적이다.
  
  「헤이즈 보고서」의 극비 정보
  
  루이스 C 메네트리 사령관의 한 보좌관은 기자에게 핵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핵무기가 한국에 있다, 없다에 대해서 논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주한미군은 핵에 관련된 정보를 한국정부에 통보하지 않는다. 정보를 통보할 제도화된 채널 도 없고, 비공식적인 통보나 통로도 양국간에는 없다. 비공식적인 채널이 딱 하나 있다면 그 것은 양국의 대통령 사이에 있을 수 있을 뿐이다. 핵무기를 한반도에서 사용할 때 미국은 한국 정부의 요청이나 동의가 있어야 쓸 것이다. 그런 상황은 한국이 전쟁에서 패배직전에 몰렸을 때이다. 그때는 한국정부가 핵무기 사용을 요청해도 미국이 사용을 거부할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미국의 핵 사용정책이 첫 사용자(first user)가 되지 않는 것이라고들 하는 모양인데. 그런 정책은 없다. 유럽에서는 미국이 첫 차용자가 되지 않으면 소련군에 질 것이다』
  
  1980년대에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지낸 한 예비역 대장은 이렇게 말했다. 『한반도에 핵무기가 배치된 상황에 대해서는 나도 모른다. 미군으로부터 핵무기 배치에 관련한 정보를 받은 적도 없고 우리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핵무기 배치 및 사용방침에 대한 정보 제공을 요구하거나 우리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는 없다. 연합사 작전계획에는 핵무기사용에 대한 항목이 없으나 미8군의 작전계획에는 「핵 부록」이 별도로 있다. 그러나 이 문서는 「외국인에게 금지」로 분류돼 있어 나를 포함한 어떤 한국인도 본 적이 없다. 핵무기에 대해서 상부로부터 어떤 지침을 받은 적도 없다. 다만 옛날엔 한국의 중부지방 어느 미군 특 수 탄약고에 전술핵탄두가 보관돼 있었음이 확실하다. 5∼20킬로 톤 정도의 탄두였다고 들었다』
  
  미국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피터 헤이즈 교수는 지난해 12월3일 서울에서 열렸던 한미 안보 관계협의회의 세미나에서 「한국에 있어서 미국 핵의 딜레머」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하이얏 호텔에서 공개로 진행된 이 세미나에는 한미 양국의 전·현직 공무원과 학자들이 참석했었다. 대통령선거운동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여서 그랬는지 헤이즈 논문의 중요성은 주목받지 못했었다. 미8군 고위층에서는 이 논문이 한국에 배치된 미국의 핵무기체제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실증적인 자료라고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 논문의 특징은 비밀등급이 해제된 주한미군의 내부문서와 핵심 지휘관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에 핵 폭탄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것을 탄약고와 관련 부대명칭까지 들어 구체적으로 밝히고있는 등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은 첩보단계의 「한국 내 핵무기 문제」에 대해서 확정적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논문의 요지를 인용한다. 「한국전쟁 중엔 미국은 한국 내에 핵무기를 배치한 바 없다. 지상에서 발사하는 핵무기체제는 한국의 도로나 다리가 견디기엔 너무 무거웠고. 한반도에 출격한 항공기에도 핵 폭탄이 실려진 바 없었다. 1958년 1월28일에 유엔군사령부는 2백80밀리 원자포와 어네스트 존 핵미사일을 한반도에 배치했음을 확인하였다. 1967년의 미 국방성 전쟁시나리오(War game)에는 한국의 방위전략은 핵무기의 조기사용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1968년 미국 전자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해군에 의해 나포되었을 때 워싱턴의 정책 결정자들은 평양에 핵 폭탄 한 개를 투하한다는 발상을 한 적도 있었다.
  
  최근에 비밀 등급이 해제된 미 8군의 「1966년 2/4분기 보고서」엔 전쟁이 나면 핵무기를 먼저 사용해야 할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핵무기를 해외에서 오산기지로 공수하고 오산기지에서 헬리콥터를 이용, 한국내 기지로 공수한다는 계획이 적혀 있었다.
  
  이 당시(1960년대)에 핵지뢰와 나이키 허큘리스 핵미사일은 휴전선에 가까이 배치돼 있었다. 핵지뢰는 남침하는 북한군대가 서울 남쪽으로 진출하지 못하게 김포공항, 한강다리 등을 빨리 폭파시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핵지뢰의 폭파에서 생긴 핵 방사능이 서울 상공을 뒤덮을 때 한국 피난민과 미군이 피해를 본다는 문제가 있었다. 핵지뢰는 또 전방에 있어 적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면 먼저 써야 하게끔 돼 있었다. 한 미국인 보안관계자는 휴전선 근방의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 기지를 방문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 기지가 북한 장거리포의 사정거리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기지는 즉시 서울근교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핵무기를 전방에 배치한 것은 중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즉, 전쟁이 터지면 조기에 사용하든지, 핵무기를 파괴 해버리든지. 아니면 빨리 철수시켜버리든지 해야 하는데 사용과 파괴시의 방사능 오염은 피할 수 없는 위험이었다.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 이후인 1973년에 미군당국은 핵사용 정책을 수정하였다. 즉 북한의 남침을 핵의 조기사용이나 일시 후퇴가 아니고 휴전선에서 저지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이다」 이에 대해 한 미8군 고위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훈련을 하면 최종단계에서는 늘 우리가 핵 폭탄을 써야만 북괴의 남침을 저지할 수 있도록 시나리오가 작성되었다. 지난 73년부터는 전진방어개념(Forward Defense Concept)이 적용돼 핵무기를 안 쓰고 휴전선에서 적의 남침을 저지한다는 방어계획이 확립되었다』
  
  군산공군기지에 핵무기 저장
  
  「이 방침에 따라서 1975년에 전방에 배치되었던 핵무기들(당시 핵탄두가 한국 내에 약6백 개 있었다고 함)은 군산공군기지로 옮겨져 저장되었다. 1976년 8월 도끼만행사건 이후 한 달간 광도를 이룩한 B-52핵폭격기는 북한 상공을 침범할 듯 휴전선을 향해 직진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비켜 나가버리는 위협비행을 계속했다. 북한의 전방통신을 엿들었던 한 미국인 정보장교는 『우리는 그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고 말했다. 1977년에 카터 대통령은 1980년까지 미2사단을 한국에서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는 적어도 미 지상군이 한국 내에서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도 철수시킨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1979년에 카터 행정부는 철군정책의 포기를 결정했고, 그 때까지 철거하지 않고 있던 핵무기들은 그대로 두는 것으로 되었다」
  
  「헤이즈 보고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미8군과 한국군의 핵무기체제를 소상히 밝힌 「한국에서의 핵군 조직」이란 장이다. 발췌인용을 계속한다. 「1986년의 주한미군내부자료에 따르면 미8군에는『주한 핵 작전계획 부』(Plans and Operations Nuclear Division in South Korea)가 있다. 이 부서에는 3개 과가 있다. 이 부의 기능은 핵 공격목표 분석, 핵 발사, 핵사용 계획작성 등이다. 핵사용에 있어서는 명령을 전달하는 통신 관제체제의 유지가 핵무기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 1968년 7사단의 보고에 따르면 이 통신·관제 체제는 신뢰성이 약하다는 것이다. 『야전에서 발사 훈련을 해보니. 발사임무에 대한 전달이 발사부대에까지 제때에 전달되지 않는 등 사고가 잦았다』는 것이다.
  
  1983년 미 제2사단 포병이 한국군과 함께 실시했던 훈련에서도 전방 관측장교와의 연결과 한국군과의 연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국군의 통신장비와 통신용어가 미군과 다르다는 것도 그 한 이유였다. 미군은, 북한이 남침한다면, 화생방(化生放)전과 관계가 있는 부대-포병, 미사일 기지, 공군의 통신·관제체제를 혼란시키는 데 최우선 공격목표를 두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대전에 있는 제78 무기관리파견대(Ordnance Detachment)는 핵의 운반, 긴급 파괴, 긴급 철거, 긴급 통신 및 핵의 조준 등 임무를 훈련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용산 기지의 주한 무기 지원 파견대(Weapons Support Detachment Korea)는 미군의 핵무기 관리조직과 기능을 한국군과 연결시키는 임무를 갖고 있다. 이 파견대는 용산 기지에 있는 주한미군 핵 작전계획 부(2462호실)내에 본부가 있고. 대부분의 인력은 춘천에 있는 캠프 페이지 기지 안에 있으며, 의정부의 한미 야전사 포병 부 등에 연락 팀을 보내 핵무기 분야에서 한국군과의 협조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북한은 핵전 대비 없어
  
  군산 미 공군기지는 주한 미군의 핵무기를 저장하는 중요한 부대이다. 1985년 초 현재 이 기지에는 팬텀기와 F16전폭기에 실을 수 있는 투하용 핵폭탄 60개가 있다고 보도된 바 있다. 여기에는 또 핵지뢰 21개와 70개의 핵포탄이 있다고 한다. 미8군은 1987년 2월9일에 랜스 미사일을 한국에 배치했다. 랜스 미사일에 탑재시킬 핵탄두까지 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1985년 초 현재 2백3, 1백55밀리에 포에 쓸 수 있는 40발의 핵포탄이 군산기지에 저장돼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미8군은 서울 근교의 스탠리 기지에 핵포탄 발사가능 포 대대를 배치하고 있고, 의정부 근처의 도봉산 탄약창에는 전방 임시 핵무기 저장소가 있다고도 한다」(편집자주=최근 서울의 모국 대사는 그 나라 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에는 7백∼1천 개 사이의 전술 핵탄두가 배치돼 있다고 말했다)
  
  「주한미군의 특수전부는 용산 기지에 핵지뢰 폭파 기술팀 2개를 두고 있다. 핵 지뢰는 적군의 전진을 막기 위해 터널, 다리, 도로를 폭파하여 지상에 큰 균열을 만들고 대규모 산불을 일으키는 등의 기능을 하고 있다. 북한이 후방지역에 대한 미군의 핵 공격에 대비하고 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기동성 있는 차량 지휘부라든지 방사능의 침투를 막아줄 격납고 같은 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북한이 남한에 대한 공격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도 지불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석가들의 견해와 배치된다. 북한은 그런 방어부문의 투자가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고.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피아가 뒤섞이기 때문에 미군이 핵폭탄을 쓸 수 없으리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에 미군이 핵무기를 두는 것은 한국이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고자 하는 의욕에 채기 역할을 하고 있다. 77년에 카터 행정부는 위장핵무기를 군산기지에 남겨둠으로써 남한을 안심시키려는 방안을 검토한 적이 있었다. 이 계획은 취소되었는데, 한국 당국이 미국인 경비원들의 거동을 관찰함으로써 쉽게 위장 핵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라 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헤이즈 보고서」는 한국의 핵 개발 계획이 전개된 상황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한국의 핵 개발은 미국의 핵 전략과 한반도 주변정세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국은 1968년에 핵 개발에 필수적인 핵연료 재처리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1972년에는 공개적으로 프랑스로부터 핵연료 재처리 기술을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닉슨이 주한 미7사단을 철수시킨 데 발끈하여 1971년 무기개발위원회를 만들어 핵무기를 확보하는 일을 시작했다. 1974년 인도가 핵실험을 했다. 미국 정보 분석가들은 세계 각국에 나가 있는 미국대사관들을 통해서 무역의 대상품목 가운데서 핵 개발과 관련 있는 품목들을 관찰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이 핵 개발에 착수했음이 명백해졌다. 미국관리들은 즉시 프랑스, 캐나다, 벨기에 정부에 압력을 넣어 한국에 대한 핵연료 재처리 기술 제공 상담을 중단시키게 했다. 미국은 박(朴)대통령으로부터 핵무기를 갖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한국은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朴대통령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1978년까지 핵무기 개발 작업을 계속했다고 믿을 만한 소식통은 얘기했다.
  
  朴대통령은 이스라엘에 그의 측근을 보내 군사 전략을 현장에서 견학하도록 했다고 하며 1978년 10월 국군의 날에는 미국의 어네스트 존과 나이키 허큘리스를 고쳐만든 미사일을 선보였다. 군사 전문가들은 이 미사일이 핵탄두 운반용으로 쓰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1984년에 캐나다 원자력은 한국 정부에 대해 한국에 있는 미국회사의 경수로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사용된 핵연료』를 혼합산화 우라니움 연료(Mixed Oxide Fuel)로 재 순환시켜 월성에 있는 캐나다 중수로 원자력 발전소에서 쓸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의 판매를 제의했었다 고 보도되었다. 이 혼합산화연료는 원자탄의 원료인 플루토니움을 품고 있어 핵 개발에 이용될 수 있다. 캐나다 측에서는 부인했으나 미국이 압력을 넣어 이 상담을 중단시킨 것이 확실하다」
  
  핵 개발 포기 않았던 朴대통령
  
  미국의 브라운 국방부장관은 1970년대 말 연례안보회의에서 『양국간에 핵 개발 문제로 말썽이 있는 듯한데 그런 일이 없도록 합시다』고 넌지시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이런 고위회담에서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므로 브라운 장관의 이야기는 완곡했으나 그 메시지는 『한국이 핵 개발을 추진하면 양국간의 관계가 불편해진다』는 것이 분명했다. 미국무성은 하비브 전 주한 미대사를 특사로 보내 朴대통령에게 『핵 개발을 계속하면 철군하겠다』는 식으로 노골적인 위협까지 했었다고 한다.
  
  주한 미군의 한 정보관계자는 『우리가 실수를 많이 하기도 하지만 핵 정보의 수집은 잘 한다』고 했다. 「헤이즈 보고서」의 말대로 朴대통령은 75난께 미국에 대해 핵 개발의 포기를 약속해 놓고도 극비리에 핵 개발을 계속했음이 확실하다. 1977년 무렵 건설부장관이던 신형식(申炯植)씨에 따르면 申씨는 중동의 어느 나라로부터 핵 폭탄 운반용 미사일을 공해상에서 건네 받는 방식으로 도입하자고 朴대통령에게 건의했는데, 김재규(金載圭) 당시 중앙 정보부장이 강력히 반대하여 성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방과학연구소의 핵 개발 밝은 한국의 한 핵 물리학자는 말했다. 『원자탄의 원료물질인 플루토니움은 천연상태에서 있는 게 아니라 우라니움이 원자로 안에서 연소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재처리라는 것은 타고 있는 핵연료를 빼내 거기에서 플루토니움을 빼내는 작업이다. 1974년 12월에 우리나라는 캐나다로부터 가압중수형(加壓重水型·일명 CANDU) 원자로의 도입계약을 맺었다. 중수로는 핵연료를 수시로 끄집어내 재처리하여 플루토니움을 빼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소를 거의 다 만든 미국의 웨스팅하우스 원자로는 핵연료를 교환할 때만 끄집어낼 수 있으므로 국제기구가 플루토니움을 빼내는지 여부를 감독하기가 쉬운데, 중수로는 수시로 연료를 빼낼 수 있어 감독이 거의 불가능하다. 중수로를 도입한 것은 핵 개발과 관련이 있음이 명백하다』
  
  핵 개발 관계자들의 증언
  
  당시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정부내의 중수로 도입반대 여론을 꺾고 민충식(閔忠植) 한전사장에게 중수로 도입을 단호하게 추진하도록 지시했는데 이것은 핵 개발에 대한 집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캐나다 원자력공사의 대리인이 되어 중수로를 한국에 판 이는 유명한 유태인 국제 브로커 사울 아이젠버그였다. 박(朴)대통령, 이후락(李厚洛)씨 등 권력의 중심부 인사와 오랫동안 친분을 가졌던 그는 이 거래에서 1천8백만 달러의 대리인 커미션을 받았다.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나자 주로 미국언론에 의해 민충식(閔忠植)사장과 당시 총리 김종필(金鍾泌)씨가 이 커미션의 분배와 관련되었다고 보도된 적도 있다. 일부에선 캐나다의 중수로 판매와 한국의 핵 개발에 대한 견제로 미국정부가 그런 보도를 부추겼다고 생각하고 있다. 핵 개발에 참여했던 한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1960년대 말에서 70년 초에 걸쳐 과학기술처의 주선으로 약 20명의 핵 관련 전문학자들이 한국으로 초빙되어 왔다. 아파트무상제공, 자동차면세구입, 아파트 관리비면제 등 특혜를 많이 받았다. 우리는 1980년까지 연구를 계속했다. 핵탄두의 운반수단인 미사일개발을 먼저 시작했다. 핵 연구결과는 박대통령에게 직접 보고 했다. 75년 무렵에 잠시 연구가 중단되었으나 카터 대통령시절, 즉 1977년부터 다시 시작했다.
  
  1979년 여름으로 기억하는데 박대통령이 대전에 있던 우리 연구소를 찾아와 연구원들을 불러 놓고, 막걸리와 사이다를 섞은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한 것이 기억난다. 박대통령은 「이것을 만들어야 우리가 명실상부한 자주독립국가가 된다. 나를 독재자라고 욕하는 사람도 많지만 이 일을 완수할 사람은 나뿐이다. 성공한 다음엔 은퇴하여 조용히 살고싶다」는 뜻의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재임기간 중(84년 이전)에 실전 배치가 되었으면 한다는 희망도 내비쳤다. 그때의 분위기는 비장했고, 우리도 사명감에 불타고 일었다』 핵무기개발이 공식으로 중단된 것은 1980년 하반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전두환(全斗煥)정권은 미국의 지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은 새 정권에 대한 지지의 대가로 여러 가지를 얻어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핵 개발중단이었던 것 같다. 핵무기 연구팀은 해산되고. 핵무기개발연구를 직접 담당하지도 않았던 한국 원자력 연구소와 한국 핵연료개발공단은 한국 에너지 연구소로 통합, 개편되었다. 새 연구소의 이름에서 원자력과 핵이라는 낱말을 뺀 것은 한국이 핵무기의 꿈을 포기했다는 하나의 결백 증명용이었다.
  
  핵심정보에서 소외된 한국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한국에 배치 된 핵무기에 대해서 한국정부가 어느 정도의 발언권과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가가 관심사다. 한반도와 한국인 전체의 운명과 관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헤이즈 보고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대부분의 미국 및 한국인들이 모르 고 있는 사이 한국군은 오래 전부터 한반도에 있어서의 미군의 핵 작전, 훈련, 일반 작전계획에 통합돼 있다. 이런 통합은 1960년 초부터 시작되었다. 1966년 미8군은 핵무기 사용 및 방어에 대한 표준안내서를 보안성 검토를 거쳐 한국어로 번역, 한국군이 사용하도록 결정했다. 1978 년 한미연합사가 창설됨으로써 한국 측은 미군이 가진 핵 관계 정보나 계획에 좀더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한국군의 수뇌부는 정기적으로(최소한 한해에 한번 이상) 핵 전략에 대한 브리핑과 협의를 받고 있다고 한다.
  
  일부 한국인 국방 전문가들은 한국정부의 최고위층만이 『주한미군 작전계획서의 핵 부록』에 대해 브리핑을 받는다고 했다. 미국관리들은 그러한 협의는 한·미군당국 사이에서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주한미군의 조직 및 기능 편람』에 따르면 미8군의 무기지원파견대는 한국군의 무기체제(주로 대포)를 이용하여 핵무기를 발사하는 준비작업에 핵 지원팀(Nuclear Support Team)을 보내게 돼 있다는 것이다. 이 팀은 춘천에 있는 캠프 페이지 기지 내에 있다.
  
  의정부 한미야전사 포병부장은 한국인 대령, 차장은 미국인 장교인데, 미8군 무기지원파견대에서 나온 연락 팀도 있다. 이 포병 부는 한국군의 핵무기 발사연습을 지원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 한미야전사의 종합정보센터를 관장하는 부서의 책임자도 한국인 장교인데, 이 센터는 화학 및 핵무기 사용에 따른 적의 대응능력과 작전의도를 평가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핵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실시하는 책임은 완전히 미군 손에 있다. 미군은 핵 작전계획에서 한국군과 협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한국 육군의 1, 3군 사이에 연락 팀을 끼워놓고 있다. 한국군의 이러한 지원 역할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는 한국에 있거나 한국에서 쓰여질 핵무기의 종류, 숫자 그리고 배치장소에 대한 정보엔 접근 할 수 없다. 한미 합동의 핵 작전계획도 없다(미8군의 핵 작전계획만 있다).
  
  한미합동 핵 작전계획이 만들어지면 비밀등급이 돼 있는 미국의 핵 기술, 규정, 정보를 공유해야 하는데, 이는 미 의회의 『협조계획(Program of Cooperation)』에 대한 승인을 요한다. 『협조계획』관계는 미국과 벨기에, 캐나다, 그리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터키, 영국, 서독과는 되어 있지만 한국과는 돼 있지 않다. 한국정부가 한국군에 대한 완전한 작전통제권을 요구한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핵 작전계획에 대한 협의와 참여의 폭을 높여달라는 압력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럴 경우 의회가 『협조계획』을 승인해야 하는데 지금과 같은 분위기에서는 『협조계획』이 통과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蘇 통해 북한에 핵 개발중단 압력
  
  「헤이즈 보고서」의 요지는 한국군은 미군의 핵탄두(또는 핵폭탄) 사용에 있어서 운반수단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며, 이를 위해서 미군 전문부대의 지도 아래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 고 있으나. 미8군만이 독자적인 핵전쟁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군과 한국정부의 고위층은 이 계획의 대강만 보고 받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작 중요한 한국 내 핵무기의 배치상황, 숫자, 종류 등에 대해서는 한국정부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한국정부는 한국 내에 배치된 미군의 핵무기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공식정보도 가지고 있지 못할 뿐 더러 그것의 사용에 대한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위치에 있지 않고, 이 나라에서의 핵무기 사용은 순전히 미군의 독자적인 계획에 따를 뿐이라는 얘기다.
  
  「헤이즈 보고서」의 이 요지는 기자가 여러 한미군 고위장교를 만나 취재한 결과와도 일치했다. 「헤이즈 보고서」는 북한이 30메가와트 짜리 원자로를 건설하기로 한 것은 앞으로 한반도 핵 문제에 있어서 중대 한 변수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은 1990년에 이 원자로가 가동하게 되면 핵연료 재처리기술을 얻으려고 애쓸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면 미국은 한국의 핵 개발을 말리지 못할 것이라고 이 보고서는 주장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남한과 북한이 각각 독자적인 핵무기체제를 갖추는 것이라고 헤이즈씨는 지적했다. 그렇게 되면 양쪽은 서로 예방적인 기습공격을 꾀하게 될 것이란 얘기였다.
  
  미국정부는 소련을 통해서 북한이 핵무기개발을 중단하도록 압력을 넣으려고 하고 있으나 소련에서는 『북한이 우리에게도 핵 개발정보를 주지 않는데 우리가 먼저 그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는 없다』고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 서강대학의 이상우(李相禹)교수는 한국정부가 핵 개발에 의욕을 보이고 있던 지난 70년대 후반에 국제정치학회에서 핵 개발의 비효율성에 대해 이런 논지의 주장을 편 적이 있다. 「핵이 전쟁억지력을 가지려면 북한 인구의 40%, 경제력의 60∼70%를 살상, 파괴할 수 있는 확증적인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1메가톤 짜리 핵폭탄 12개를 동시에 각각의 목표물에 투하해야 한다. 12개의 핵폭탄을 운반하는 데는 팬텀기 12대가 있어야 한다.
  
  12대를 북한상공에 보내려면 북한의 대공방어체제가 세계 최고수준이므로 적진 침투율을 10%로 계산 할 때, 1백20대의 팬텀기를 투입해야 한다. 이런 편대를 유지할 기술도 돈도 없다. 더구나 한국의 핵무장은 필연적으로 북한의 핵무장을 유도할 것이다」 李교수는 『그때 일본의 한 연구소에서 한국의 핵 개발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보고서를 본적이 있다』고 했다.
  
  핵폭탄을 만드는데는 2백여 전문영역의 기술이 필요한데 한국이 아무리 동원해도 핵심적인 10여 개 영역은 비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 보고서는 단서를 달았는데 「이스라엘, 대만 등과 기술교류를 한다면 한국이 핵 개발에 성공할 가능성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의 한 핵 물리화학자는 한국의 미사일 및 핵 개발에 대해 아주 비판적인 이야기를 했다.
  
  깊이 못 들어갔던 핵 개발
  
  『박대통령이 눈물을 흘렸다는. 1978년 8월26일에 시험발사 된 중거리 유도탄은 다분히 전시용이었다. 그 발사가 성공할지 여부에 대해서 전날까지도 가슴을 조려야 할만큼 충분한 검토를 거치지 않은 미사일이었다. 그날의 성공은 행운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나버렸고, 그 미사일은 끝내 실용화되지 못했다. 핵 개발도 깊이 들어가지 못한 상태에서 끝났다. 핵연료의 재처리에는 굉장한 전문인력과 시설이 필요하다. 타고 있는 핵연료를 끄집어내면 무서운 방사능이 방출되므로 두꺼운 차폐시설 속에 집어넣어 놓고 바깥에서 원격조정을 해야한다.
  
  이런 시설과 수백 명의 인력이 필요한 데 그때의 연구팀 수준은 제작단계가 아니고 초보적인 연구 단계였다. 수십 명의 연구원을 데리고 핵폭탄을 만들 수는 없다. 나는 핵 개발이 하나의 정치적 애드벌룬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이 무렵 프랑스의 갈로아 장군이 한국을 방문, 프랑스 핵무기체제를 한국에서 도입하도록 로비를 벌인 적도 있다고 한다. 갈로아 장군은 드골 대통령의 군사고문으로서 프랑스의 독자적인 핵 개발에 깊이 관여했던 전문가였다. 그는 정부와 학계의 요인들을 만나 『미국의 핵우산을 믿을 수 없다. 미국이 자국민 2천4백만 명이 죽을 것을 각오하고 한국을 위해서 소련에 대해 핵폭탄을 사용하겠는가』라면서 북한과 중·소 강대국의 침략을 억제할 정도의 소규모 핵무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출처 : 월조
[ 2003-07-04, 17:1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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