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핵 게임 - 북한 원전개발과 남한의 대응전략(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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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국의 압력에 무너지다
  
  미국, 프랑스와 캐나다에 압력
  
  미국 버클리 대학의 피터 헤이즈는 한국에서의 미국 핵 딜레머라는 논문에서 朴대통령이 1971년에 병기 개발 위원회를 조직,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것은 71∼72년에 있었던 주한 미군 7사단의 철수에 자극 받은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정부는 장비 현대화 5개년 계획(1971∼75년)을 위한 무상 원조액을 한국의 人權 상황에 연계시켜 삭감하기 시작, 당초 약속한 액수의 3분의 1이 줄어들었다. 인도 핵실험 뒤 미국 정부는 세계 각국의 미국 대사관과 정보 분석 전문가들에게 비상을 걸어 각국의 핵무기 개발 여부를 주시하도록 하였다.
  
  벨리륨, 특수 폭약 등 핵 폭탄 제조에 쓰이는 재료물질의 수입 여부도 감시하였다. 미국 전문가들은 아주 쉽게 한국이 핵무기 개발에 뛰어 들었음을 간파하였다. 1975년 3월 8일 주한 미국 대사 리차드 슈나이더는 주한 프랑?대사 피에르 란디에게 한국이 프랑스로부터 재처리 시설을 도입하려는 것은 핵무기 개발을 위함이라는 정보를 제공하였다.
  
  란디 대사는 즉시 이 정보를 상부에 보고하였다. 1975년 4월에 월남이 패망한 뒤 朴대통령은 그해 6월 26일 워싱턴포스트지와의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한국이 미국의 핵우산 보호를 받지 못하면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핵무기의 개발을 포함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그 다음날 코리아 타임즈는 최형섭(崔亨燮) 과기처 장관이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기술적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정부는 본격적으로 한국 정부뿐 아니라 한국 측에 민감기술(Sensitive Technology)을 넘겨주기로 돼 있었던 캐나다, 프랑스, 벨기에 정부에 대해서도 정치적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키신저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으면 주한 미군의 전면 철수를 고려하겠다고 朴대통령을 협박하였다. 한국은 이런 압력을 견딜 수 없었다.
  
  NRX연구로 도입 좌절
  
  1988년에 미국 콜럼비아 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핵 폭탄 없이도-핵 확산 금지의 정치학」(Without the Bomb)란 책에서 영국 정략 문제 연구소장의 보좌관을 지낸 바 있는 저자 미첼 라이스는 한국 핵 개발의 경과를 한 장(章)으로서 다루었다. 그는 미국이 한국의 재처리 시설 도입에 대해 압력을 넣은 상황을 이렇게 썼다.
  
  「한국은 1975년 4월에 핵 확산 금지 조약을 비준했다. 이것은 미국무성과 의회의 압력이 있은 뒤였다. 미 의회는 수출입 은행에 대해 고리 2호기 건설에 대한 금융 지원을 보류하도록 결의했던 것이다. 75년 가을에 프랑스는 한국 측에 재처리 시설의 機材를 20년 동안 복제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이자고 요구했고 한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국제 원자력 기구, 한국, 프랑스 3자간의 안전조치(원자력 시설에 대한 사찰의 규정)협정도 맺어졌다.
  
  1975년 말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가 프랑스로부터 재처리 시설을 도입한다면 미국은 한국의 원자력 산업에 대한 금융 지원을 중단할 것이며 캐나다도 중수로 판매를 유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朴대통령은 한국이 核 개발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밝힘으로써 미군과 핵무기를 남한에 붙들어 두려고 했던 것 같고 그런 작전은 성공한 것 같다. 그러나 주한 미국 대사관의 한 관리는 1983년 5월 현재 한국에는 핵 폭탄이 4개 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1
  
  976년 1월 한국 정부는, 프랑스의 SGN와 맺었던 재처리 시험 공장 건설계약의 파기를 프랑스 정부에 요청하였다. 프랑스 정부도 미국의 압력을 받고 있었으므로 이를 받아들였다.
  
  프랑스의 한 잡지는 「한국이 핵 기술 도입 선을 다변화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은 미국의 私有地에 지나지 않는 존재인 한 그것은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평했다. 캐나다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중수로 1기와 함께 한국에 끼워 팔기로 돼 있었던 NRX연구로 판매 협상을 중단하였다. 캐나다의 중수로를 사줌으로써 플루토늄 生成用 연구로 등 여러 가지 민감 기술을 얻으려던 한국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월성에는 그때 중수로 2기지를 예정이었으나 미국의 계속된 압력으로 1호기 도입으로 끝나고 말았다. 1977년 11월에는 원자력 연구소가 벨기에 BN사와 추진하던 플루토늄을 재 사용한 제2 핵연료 가공 사업도 취소되었다. 핵 포탄 개발에 필수적인 연구로, 재처리 사업이 문서 작업 단계에서 움도 터보지 못한 채 죽어 버린 것이었다.
  
  재처리 공장 설계서의 내용
  
  주재양(朱載陽) 원자력 연구소 부소장 밑에서 재처리 사업 담당 실무 책임자였던 김철(金哲) 공정개발 실장(현 아주대학 교무처장)은 프랑스와의 계약을 파기할 당시 SGN사와 개념 설계를 끝낸 상태였고 기본 및 상세 설계의 용역 계약을 완성한 직후였다고 회고했다. 기자는 지금 모 연구기관에 보관돼 있는 SGN사의 개념 설계서를 볼 수 있었다. 1974년 10월1일에 작성된 개념 설계서는 두 권의 큰 책으로 돼 있다. 재처리 공장의 규모는 1년에 2백일간 가동하는 것으로 잡고 하루 처리량을 사용 후 핵연료 20㎏(우라늄 기준)으로 했다.
  
  1년에 우라늄 4t을 재처리한다는 것인데 그럴 경우 추출되는 핵 분열성 플루토늄 239는 약 20㎏으로서 나가사키 투하 원폭 (20kt짜리 TNT 2만t의 폭발력과 같음)두 개를 제조할 수 있는 양이었다. 이 제조 시설은 시험 공장 개념으로서 캐나다에서 도입을 추진하고 있었던 NRX연구로와 경수로 및 중수로의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 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가동 목표일은 건설 확정일로부터 5년 뒤로 잡았으며 건설설비는 약 3천9백만 달러였다. 이 시설은 그 중요성에 비해서 건물 자체는 소규모였다. 길이 54m, 너비 46m, 높이 27.5m, 하루에 소요되는 냉각수는 80㎥, 食水는 50㎥, 증류수는 20㎥으로 중소기업 수준이었다, 이 공장 운영에는 15명의 책임자급 엔지니어, 1백 65명의 기술자, 74명의 노동자가 필요할 것으로 추산되었고 6∼12개월의 훈련 과정이 필요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 개념 설계에는 「핵 분열성 물질의 회수」(Fissile Material Recovery)를 목적으로 한다고 하여 이것이 핵무기 제조용임을 분명히 했다.
  
  1976년에 미국의 압력으로 플루토늄 관련 사업은 포기된 듯 하였으나 朴대통령은 재처리를 맡고 있던 원자력 연구소의 특수 사업 담당 부서를 대덕 공학 센터로 분리시킨 뒤 76년 12월 1일에는 그 자신이 설립자가 되어 한국 핵연료 개발 공단을 발족시켰다. 핵연료 개발 공단은 포기한 재처리 사업을 우라늄의 정련·변환 시설, 조사후(照射後)시험 시설, 방사성 폐기물처리 시설 도입 사업으로 대체하여 추진하였다. 이 사업은 화학 처리 대체 사업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재처리 대체 사업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인데 재처리 때문에 워낙 미국인들로부터 시달려 화학처리란 말을 고안해 낸 것이었다. 그 뒤 우리나라의 원자력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재처리란 말은 금지된 언어처럼 돼 버렸다.
  
  朴대통령의 우회전략
  
  김철(金哲) 교수는 화학 처리 대체 사업의 성격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재처리 기술을 우회적으로 배우려고 한 것입니다. 재처리와 연관된 여러 가지 기술을 따로 따로 배워 놓았다가 나중에 하나로 통합한다는 전략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대체 사업은 조사 후 시험시설이었어요. 원자로에서 나온 사용 후 핵연료의 연소 상태나 변형 상황 및 방사성 물질 조성비 등을 검사하는 것을 조사 후 시험이라고 합니다. 이 일을 하자면 사용 후 핵연료를 수조와 방사능 차폐 시설 안에 두고 바깥에서 원격 조정 장치로 해체, 절단, 측정하고 용해, 분리시켜야 합니다. 이런 과정은 재처리 과정의 핵심부분과 같은 성격으로서 재처리 기술의 일부를 익히는 일인 것입니다. 재처리를 하면 강한 방사능을 가진 폐기물질이 생깁니다. 대체 사업에는 방사능 폐기물 처리 기술과 시설도 도입하게 돼 있었습니다.』
  
  김철(金哲) 교수는 『대체 사업시설 도입은 재처리 사업을 위해 마련해 놓았던 프랑스 정부 차관 2천만 달러로 한 것이다. 그래서 이 사업을 불(佛)차관 사업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했다. 시설 및 기술 도입선은 프랑스의 SGN사 그대로였다. 관련 기자재는 金哲 실장이 프랑스에 가서 구매했다. 핫셀(Hotcell 방사능 차폐시설), 글로브 박스(Glove Box) 등 조사 후 시험시설과 방사능 폐기물 처리시설을 도입하는 것이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고 한다. 핵 공단은 또 20여 명의 우수 인력들을 핵 재처리 시설이 있는 유럽 여러 원자력 연구소로 보내 재처리 관련 기술을 연수해 오도록 했다. 출발시킬 때는 『재처리 기술 관련 정보나 자료를 많이 얻어 오고 가능한 한 재처리 관련 연구를 하도록 해 보라』고 지시했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 미네소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했던 김강진(金康鎭)씨(현재 고려대 화학과 교수)의 경우 벨기에의 BN연구소에서 다른 두 연구원과 플루토늄 정량 분석법을 1년간 연구하였다. 이런 정량 분석법은 재처리 과정을 추적, 감시하는데 꼭 필요한 기술이었다. 金교수에 따르면 BN사는 재처리 시설 등 민감 기술분야에 대해서는 한국 연구원들을 접근시켜 주지 않았다고 한다.
  
  프랑스의 그레노블 원자력 연구소에서는 박현수(현재 원자력 연구소 사용 후 핵연료 관리부장), 박헌휘 연구원(현재 원자력 연구소 방사성 폐기물 관리부장)이 연수를 했다. 이 두 사람은 지금 재처리 관련 부문의 국내 권위자로 알려져 있다. 주한 미국 대사관은 수시로 과학관 로버트 스텔러씨를 핵 공단으로 보내 연구상황을 점검하곤 했다.
  
  그는 미국 국기를 단 승용차를 타고 나타나 핵 공단의 시험실과 사무실을 샅샅이 조사했다는 것이다. 일반 사무실까지 열어 보라고 하며 한국 연구원들의 감정을 건드리기도 했다. 스텔러씨 등 주한 미국 대사관의 역대 과학관들은 모두 핵 기술에 관한 교육도 받고 부임, 장기 근무하면서 한국의 핵 연구 상황을 감시하는 역을 맡았다. 朴대통령은 두 번 핵 공단을 방문했다고 한다. 유도탄 개발을 맡고 있던 국방 과학 연구소에 들르는 길에 핵 공단을 찾았는데 이때 朴대통령의 주된 관심은 국방 과학 연구소에 쏠려 있었다고 한다.
  
  미국, 핵 공단 수시로 감시
  
  핵 공단은 화학처리 대체사업 이외에 핵연료 성형가공시험 시설 도입을 프랑스의 CERCA사로부터 추진, 성공하였다. 외자 2백 80만 달러, 내자 9억 원으로 핵연료 가공 기기를 구매하고 1천 2백 평의 시험시설을 이용하여 중수로 핵연료의 제조기술개발을 시작, 1980년대에 성공하게 된다. 정부 일각에서는 이즈음 파키스탄 방식으로 핵 개발을 추진하자는 주장도 나왔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핵 재처리사업이 벽에 부딪치자 유도탄 개발에 박차를 가했는데 미국의 감시를 피해 제3국으로부터 유도탄을 공해 상에서 인수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등 자력 개발에 고심하고 있었다. 파키스탄 방식의 핵무기 제조는 주로 지하 공작과 산업 스파이식 접근법이었다.
  
  압둘 카이라는 파키스탄 기술자는 네델란드의 우라늄 농축 회사 와렌코사에 원심 분리 기자재를 납품하는 회사의 기술 상담역이 된 것을 기회로 삼아 와렌코로부터 농축 기술의 핵심인 원심 분리법에 대한 극비자료를 수집, 75년 말에 파키스탄으로 달아났다. 파키스탄은 이 자료를 근거로 하여 자체적인 농축 공장 건설에 나서서 스위스 등지에서 부품들을 사들이기 시작하였다.
  
  핵 개발에 필요한 기자재가 트리거 리스트란 이름의 국제 금수 품목에 들어 있긴 했지만 파키스탄 정부는 유령 회사들을 통해서 이것들을 사 모았다. 1980년대 초에 파키스탄 정부가 카후타에 세운 농축공장에서 순도높은 우라늄을 생산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1987년 2월 칸 박사는 인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파키스탄이 원자 폭탄을 이미 만들었다고 말했다가 나중에 그 발언을 부인하였다.
  
  당시 대덕의 국방 과학 연구소에서 추진하던 국산 유도탄 개발은 朴대통령 앞에서 시험 발사에는 성공했으나 후속 연구가 따르지 못하여 정확도가 보장되지 않고 실용화되지는 못하였다. 독자개발의 한계였다. 국방 과학 연구소에서 핵 폭탄 설계 연구 책임자로 일한 이는 서울공대 원자력과 교수 출신인 李모 박사였다. 그는 미국의 알곤 연구소에서 일한 적도 있었다. 국방과학연구소 연구부장 직책을 맡았던 그는 핵 폭탄의 부품 재료를 구하는 일을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뇌관용 HMX폭약을 미국에서 수입하긴 했는데 미국 측이 이를 그리셀린과 섞어 수출해 HMX를 못쓰게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朴대통령의 집념을 등에 업고 우회적으로 추진하던 화학 처리 대체 사업은 1978년에 주재양(朱載陽)소장이 물러나고 1979년에 朴대통령이 피살된 뒤 후견인을 잃었다. 1980년에 핵 공단이 원자력 연구소에 통합돼 에너지 연구소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 사업은 일단락 돼 버렸다.
  
  핵 폭탄 설계도 연구
  
  전두환(全斗煥)정권은 출범초기에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애쓰고 있었는데 핵 개발 포기를 약속하는 의미에서 연구소 이름에서까지 원자력이라는 말을 떼 버렸다. 영문 약어 표기는 KAERI를 그대로 썼다. 여기서 A는 Atomic이 아니고 Advanced를 뜻했다. 1979년 당시 핵 공단의 핵심 연구원들을 보면, 물자 관리 실장 김강진(金康鎭), 개발 제2 연구부장 김철(金哲), 기전과장 남장수(南章洙/현 원자력연구소 정책 부장), 안전관리 실장 어성기(魯聖基/현 원자력연구소 안전시험 해석 부장), 개발 1연구부장 박원구(朴元玖/현 인하대 교수 핵연료성형 가공담당), 품질관리 기술실장 서경수(徐庚壽/전 원자력연구소 핵연료 사업부장 작고), 물리 제2 연구실장 서두환(徐斗煥/원자력연구소 원자로 관리실장), 화학 3연구실장 이철수(李哲洙/현 고려대 화학과 교수)씨 등등이었다.
  
  1980년 12월 19일 핵연료 개발 공단이 에너지 연구소에 통폐합되었을 때 인력은 2백 66명, 그 해 예산은 45억4천8백만 원이었다. 예산의 대부분은 시험시설 건설비였고 순수 연구비는 보잘것없었다. 한편 인도 핵실험의 여파로 캐나다제 NRX연구로의 도입이 불가능하게 되자 원자력연구소는 70년대 후반에 자체 개발 설계에 의한 연구로 건설을 추진하게 된다. 이 사업의 책임자는 김동훈(金東勳)박사였다.
  
  金박사팀은 4만㎾짜리 재료 시험로 설계에 착수 5년 만인 1979년에 상세 설계까지 끝냈다. 연구로의 이름은 TFTF(Thermal Flux Testing Facility)였다. 제작에 옮기려면 중요 부품 및 기재는 외국에서 조달해야 하고 중수 등 몇 가지 품목은 국제 원자력기구가 정한 규제품목에 걸린다는 것이 밝혀졌다. 미국 정부는 이때도 한국이 플루토늄 생산용 연구로를 제작하는 것이 아닌가 신경을 곤두세우더니 우리 정부에 압력을 가해 이 사업을 중단시키고 말았다.
출처 : 월조
[ 2003-07-04, 17:4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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