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40대 기수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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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 오늘날 40대의 심벌마크
  
  4·19는 40대의 심볼 마크다. 4·19는 거의 완전히 40대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4·19를 만든 고등학생, 대학생들은 거의 전부가 오늘날의 40대였다. 8·15나 6·25가 40대에겐 수동적 경험이었던 데 반해 4·19는 주체적 경험이었다. 6·25를 구경했던 그들은 4·19를 창조한 것이었다. 우리 역사상 10대와 20대가 정권을 바꾼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될 4·19는 영광과 상처를 같이 안겨 주었다. 4·19처럼 공감대가 넓었던 사건도 드물다. 인간이 가진 동물적인 정의감에서 터져 나온 행동이었기에 복잡한 설명이나 정교한 이념이 필요 없었다.
  
  1인 장기 집권, 그것을 위한 노골적인 부정선거, 폭력적인 데모진압에 대한 단순한 분노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만난 것이 4·19였다. 그때의 학생들은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암울한 50대를 보내면서 정권의 부정 부패를 수없이 목격, 체험했다. 그러나 그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설컸求?교과서였다. 이 교과서와 사회 현장 사이의 괴리감이 학생들의 분노를 자극했다. 李承晩이 비록 4·19로 물러났지만 그런 학생들을 교육해낸 공이 크다는 역설적인 해석도 있다.
  
  4·19는 대구·마산·부산 등 지방의 고등학생 중심 데모를 거쳐 서울로 올라 와 대학생들에 의해 대폭발한 진행과정을 겪었다. 약 50일간에 걸친 연쇄적인 폭발 과정에서 대부분의 「오늘날 40대」는 참여자가 됐다. 지금은 비록 여야, 체제·반체제, 진보와 보수 등으로 입장이 갈려 있지만 25년 전의 그 현장에는 한 덩어리로 뛰고 있었다. 4·19의 동기는 순수하고 단순했기 때문에 호응의 폭이 컸던 것이다.
  
  신민당 李健一의원은 60년 3월24일에 있었던 부산고등학교(당시 3학년 재학) 데모의 선언문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눈·코·귀·입이 있다. 우리더러 눈을 감으라 한다. 귀를 막고 입을 봉하라 한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가슴 속에 한 조각 남은 애국심이 눈물을 흘린다. 우리는 상관말라고 한다. 왜 상관이 없느냐. 내일의 조국의 운명을 어깨에 맨 우리들이다. 썩힐 대로 썩힌 후에야 우리들에게 물려주려느냐. 우리더러 배우라 한다. 무엇을 배우랴. 국민을 기만하고 민주주의를 오용하고 권모술수를 부리기와 정당싸움만 일삼는 그 추태를 배우란 말인가』
  
  4·19세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은 월간잡지 사상계였다. 50년대의 한국 정신사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이 잡지는 고등학생들도 많이 읽었다. 마산고등학교에 다니던 金 孝씨(민정당의원)는 2학년때 사상계에 실린 고 박종홍(朴鍾鴻)교수의 철학에 관한 글을 읽고 철학과를 지망했다고 한다.
  
  『왜 그런 성적으로 법대에 가지 않느냐고 가족과 친구들이 말리기도 했었죠. 저는 서울대 철학과에 들어와서는 공부만 했습니다. 가정교사를 해서 학비를 댔고, 놀러다닐 돈도 없고 점심도 가끔 생략해야만 했습니다. 여름 방학 땐 학교에서 자기도 했는데, 책 읽는 것이 저의 유일무이한 기쁨이었습니다. 하루에 평균 네 시간밖에 안 자고 공부를 했지요. 그러나 4·19 그날만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경무대 근방까지 갔다가 사격을 받고 하수구에 숨는 바람에 매형이 사준 양복이 다 찢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명분없는 독재, 그리고 부패와 무능에 대한 순수한 분노가 저를 뛰어나가게 한 것 같습니다. 이승만(李承晩)이 물러난 뒤에는 다시 공부만 열심히 했습니다』
  
   朴泰洵 개인사와 역사의 만남
  
  서울대학교 1학년이었던 작가 朴泰洵씨에게 있어서 4·19는 개인사와 역사의 만남이었다. 4·19는 그 뒤의 그를 새롭게 만들었다. 『그날 오전에 권중휘(權重輝)교수의 강의를 받다말고 뛰쳐나갔습니다. 종로를 거쳐 경무대로 밀려든 것이 오후 1시 무렵이었죠. 앞장선 동성고등학교·동국대 학생들이 소방차와 전차(電車)를 밀고 나가는데 일제 사격이 시작됐어요. 사람의 혼을 빼는 듯한 총성이었죠. 모두들 달아나는데 뒤통수를 맞아 많이 죽었습니다. 피를 보고 흥분한 데모대가 반공회관과 서울신문에 불을 지르고 경찰관을 밟아 죽이는 것도 봤습니다.
  
  제가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경기고교 때의 동창이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제일 친했던 박동훈(서울법대 1학년)이의 죽음이었습니다. 경무대 앞에서 총을 맞았는데, 개인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아 뒤늦게 메디칼 센터로 옮겼으나 곧 절명했어요. 망우리에 그 친구를 묻을 때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동훈이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자살한 친구도 있었습니다. 동훈이의 죽음을 통해 저는 4·19와 더욱 짙게 만난 것이고, 저의 문학이 여기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서울대학 60년 입학생 중에서 특히 많은 문학인들이 배출됐습니다. 김승옥, 이청준, 염무웅, 김주연, 정규웅, 김광규 씨 등이 그런 분인데 4·19체험이 글을 쓰는 동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4·19란 큰 사건의 체험이 사람들의 의식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 한 예가 사상계인데, 4·19 이후에는 그 영향력이 눈에 띄게 감퇴하더군요. 학생·지식인층의 의식이 4·19를 겪으면서 순식간에 각성됐기 때문에 사상계가 그 욕구를 채워줄 수 없었거든요』
  
  4·19는 「행동하는 지성」이란 신화를 만들었다. 고려대학생의 격문은 『여러분! 행동이 결여된 지성을 우리는 원치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정의·진리의 이름 아래 과감한 행동으로 빼앗긴 재산 목록을 모조리 되찾아야겠습니다』고 외쳤다.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행동」을 정치에서 찾으려 했던 4·19세대가 특히 많다.
  
  국회에서만 해도, 이기택(李基澤.48·당시 고려상대 학생회장) 이영일(李榮一.46·서울문리대 정치과 부회장·민정당) 안병규(安秉珪.48·서울문리대 학생회장·민정당) 서석재(徐錫宰.50·동아대 총학생회장·신민당) 박관용(朴寬用.47·동아대 4·19학생대책위원장·신민당) 정동성(鄭東星.46·경희대정치과·전국대학생총연합회 회장·민정당) 김현수(金顯秀.47·청주대 경제학과·충북 4·19연합회장·신민당) 이세기(李世基.47·고대정외과·민정당·국토통일원장관) 김득수(金得洙.46·건국대 정외과·4월혁명총연맹최고위원·신민당) 염정길(廉吉正.47·서울문리대·민정당) 장충준(張忠準씨.49·동국대 경제학과·4·19회 회장·신민당) 등 당시의 대학생 지도자 출신들이 여럿 있다.
  
  문정수(文正秀.46·고대정외과·신민당) 이종률(李鍾律씨.44·서울대 정치과·민정당) 등 4·19당시 1∼2학년생으로 데모준비에 「일꾼」역할을 했던 이들까지 합치면 4·19세대라고 부를 만한 국회의원은 20여 명에 이른다. 윤식(尹埴.47·당시 서울대문리대정치과 회장·전 유정회 의원·현산업경제연구원 연구위원) 이수정(李秀正.46·서울대 문리대 정치과·4·19선언문 기초·문화방송 전무) 황선필(黃善必씨.46·서울대 문리대정치과·청와대 대변인) 등도 정치에 몸 담았거나 담고 있는 4·19 인물들이다.
  
  이기택(李基澤)씨는 4·19세대의 정치 선호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젊었을 때 가졌던 용기나 의협심이 4·19를 통해서 거대한 역사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현장에서 확인했습니다. 이상과 현실이 만난 셈인데, 그런 열정과 에너지가 정치로 연장된 자연스런 결과가 4·19세대의 러시를 가져왔다고 봅니다』
  
  그는 4·19출신들이 여야로 갈라져 서로 입장은 다르지만 기본적인 신뢰감은 있다고 말했다. 『어떤 위치에 서든 간에 최후에 가서는 민주주의의 보루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절대로 한계를 벗어나는 배신이나 이탈은 하지 않을 것이란 기대라 할까요』 李基澤씨는 『4·19란 멍에 때문에…』란 말을 잘 쓴다.
  
  『4·19세대라는 것, 그 주역 중의 하나라는 것이 때로는 저를 고양시키고, 때로는 저를 고통의 길로 내몹니다. 朴정권 때나 5공화국에서도 제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훨씬 편하게 지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직위뿐 아니라 이권이나 정치자금도 손쉽게 거머쥘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유혹이 올 때마다 4·19가 저를 붙잡습니다. 저를 견제하고, 자제케 하고, 희생을 감수하게 하는 굴레가 되고 있다는 뜻이죠』
  
  『역사는 참여하는 쪽의 기록』
  
  4·19세대는 변질됐다는 비판도 많이 듣는다. 주로 정부나 여당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다. 李榮一의원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4·19에 참여했다고 해서 자기 한계성을 긋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개인의 인식과 지식의 양이 늘면 사고의 영역도 확대되어야 한다. 내가 4·19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 후에 나는 반드시 이런 이을 해야 한다는 사고의 경직성보다는 어떤 일에 부딪쳤을 때 가치 판단의 준거를 세우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월간조선 84년 4월호).
  
  李秀正씨도 비슷한 논리를 폈다. 『지난 20년 동안 국가 건설이란 지상명제 앞에 국외자로 서 있을 여지는 거의 없었다. 그 동안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우리 세대가 할 일은 많았다. 정부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체제 밖에서 있다고 할 수 있나? 역사라는 건 결국 참여하는 쪽의 역사다. 참여하지 않는 삶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아무 의미가 없다』(월간조선 84년 4월호).
  
  李鍾律의원은 『비판보다는 문제를 실질적으로 풀어나가는 일에 참여하고 싶었다. 그런데 야당에는 집권 가능성이 없었다. 정치인의 투쟁 경력과 의곬 만 높이 사는 풍토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떤 일을 창조적으로 해보고 싶은 인재가 정부나 여당에 몸담는 것은 발전의 논리로 이해해야지, 젊었을 때의 행동과 다르다고 변절이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4·19를 체험했던 오늘날의 40대들은 4·19가 정권획득을 목적으로 한 학생운동이 아니었고 그런 준비도 전혀 없었다고 말한다. 자유당 정권의 붕괴를 보고 『우리의 힘이 이렇게 셀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는 식이었다. 4·19 이후 정치·사회를 향한 학생들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도 뒤늦게 깨달은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의 붕괴를 학생들은 혁명의 출발점으로는 본데 반해 기성 정치인들은 혁명의 완성으로 보았다. 그래서 학생들의 열정은 기성 정치에 수용되지 못한 채 탕진되고 4·19 정신은 좌절되었고 5·16에 의해 완벽하게 배반되었다.
  
   4·19로 민족주의에 눈 떠
  
  4·19 이후 학생들이 제기한 가장 큰 문제는 남북 통일 논의였다. 반독재와 민주주의 회복이란 목표가 달성되자 학생들의 각성은 한 차원 높아져 민족주의로 관심이 집중됐다. 61년 5월5일 전국17개 대학 대표 50여 명은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결성 준비대회를 갖고 남북회담을 5월 안으로 판문점에서 개최할 것을 결의했다. 「학우에게 보내는 글」을 통해 『기어코 북한 학생과 만나서 민족의 노래, 도라지와 아리랑을 부르며 통일 축제를 열겠노라』고 선언했다. 냉전체제의 일반원칙을 무시하려는 젊은 오만심이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중 한 사람이었던 李榮一의원은 이렇게 반성한다.
  
  『나는 그 문제로 실형언도도 받았지만, 그로부터 15년 뒤에는 국토통일원 정책담당관이 되어 남북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당시에는 순수성만을 내세웠지 북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정부가 무력통일정책에서 평화통일정책으로 전환한 것이 1970년이니, 우리가 제기한 문제가 현실화되는 데는 1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때 우리는 분단국가에서 민주혁명이란 것은 민족운동의 과제로 연결될 때 그 의의가 더 살아난다고 인식했다. 결국 학생운동의 순수성이란 것도 주·객관적인 현실정세의 수요와 일치해야 실효가 있는 것, 즉 타이밍을 맞추어야지 빛을 보지, 그렇지 못하면 감옥에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정경문화 85년 4월호).
  
  『주장이 옳아도 그 시기가 현실을 너무 앞서면 감옥에 간다』는 분단국가적 삶의 법칙을 지금의 40대는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인식이 40대를 온건·보수화 시키고 있는 한 요인이란 해석도 가능하겠다. 4·19 세대라는 오늘의 일부 40대는 대학생들을 향해 『너희들 주장은 이론상 옳지만 실천하기에는 너무 성급하다』고 말한다. 4반세기 전에 그들이 들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朴泰洵씨는 4·19 주동자들의 변절시비에 대해 『체제냐, 반체제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고 말했다. 『행동 논리의 일관성이 문제이고, 그런 행동이 타인들을 납득시킬 수 있느냐에 의해 판단되어져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결국 그 시대의 정신이 그런 판단의 기준이 되겠지요』 이런 시대 정신을 만드는 데 가장 정력적이었던 것이 40대이니 만큼 변절여부의 판단은 40대가 스스로에게 내리는 선고일 터이다.
  
  「쿠데타」는 사전에만 있는 줄 알아
  
  5·16. 40대 후반에 속하는 4·19 경험자들에게 있어서 5·16은 대체로 거부반응을 불렀다. 5·16의 한 명분이 학생들이 몰고 온 「혼란」에 대한 진정책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학생들은 민주당 정권에 실망하기도 했으나 민주당질서는 그들의 작품이었고 그래서 기본적으로 애정을 갖고 있었다. 5·16은 이러한 그들에게 박탈감을 안겨 주었다.
  
  뒤에 5·16이 건설한 질서에 몸을 담게 되지만, 현홍주(玄鴻柱)의원도 5·16 당일 새벽 방송을 듣고는 『큰일났다』는 생각을 했다. 『생리적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쿠데타라는 것은 사전에 있는 말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것이 현실로 나타났으니까요. 우리가 배웠던 교육정신과도 어긋났고요』 서울 법대를 졸업한 뒤 미군들에게 비행기 표와 성서를 팔러 다니던 한창기 씨는 『이승만을 상대한 것이면 모르되 저것은 무슨 명분일까? 엉뚱한 짓이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朴泰洵씨는 5·16새벽 총성을 듣자마자 서울 시경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공산군의 남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때만 해도 군부 쿠데타란 개념 자체가 그들에겐 없었던 것이다. 전화를 받은 경찰관이 『일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곧 진압이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곧 『은인자중하던 군은 오늘 미명을 기하여…』운운하는 방송이 나왔다. 朴泰洵씨는 궁금하여 시청으로 나가 보았다.
  
  거기서 그는 5·16을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에 나오는 장면을 보았다. 검은 색안경을 쓴 소장이 딱 버티고 서 있었고, 車智澈로 생각되는 장교가 그 옆에 서 있었다. 車智澈로 보이는 장교는 권총을 뽑아 공포를 소면서 『이 새끼들아 집으로 돌아가!』라고 시민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朴씨 곁에 있던 한 시민이 『이놈들아 너희들이 그런 장난질해 가지고 오래 갈 것 같으냐』고 분해 하는 말도 들었다. 朴泰洵씨가 거기서 느낀 것은 쓰디쓴 배신감이었다.
  
  5·16 군사정권은 곧 자리를 굳혀갔다. 쿠데타의 주체들은 한 손엔 구악의 일소와 민생고 해결을, 다른 손에는 민족주의의 기치를 들고 나왔다. 학생들은 이 민족주의의 기치에 매혹되기 시작했다. 특히 金鍾必 당시 정보부장의 반미 발언은 젊은이들의 호응을 많이 받았다. 5월 안에 거의 모든 대학교 학생회는 지지선언을 냈다.
  
  1962년 고려대학교 4·18 2주년 선언문은 『4월 혁명과 5월 혁명은 조국재건이라는 근본이념에서부터 일치되어 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학생들의 이런 민족주의적 성향은 향토개척운동과 한미 행정협정 촉진 데모로 나타났으나 반 군사정권의 성격은 띠지 않고 있었다.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은 61년 여름 방학 때 전국 2백 여 지구에 1천5백여 명의 단원을 파견했다. 이 농촌활동의 4원칙은 조사·봉사·계몽·지도였다. 그들은 농민을 「동정하는」입장에서 출발했고, 그들을 지도·계몽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식의 이런 활동은 나름대로의 타당성과 함께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두 전환기에도 40대가 주체
  
  뜨거워지기 시작한 민족주의에 대한 학생들의 열정은 이론적 탐구에 관한 필요성을 드높였다. 1963년 서울대 문리대에서 창립된 민족주의 비교연구회는 학생들의 이런 욕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초대 회장이 된 李鍾律씨(민정당 의원. 당시 정치과 4학년)는 『혼돈된 상황에서 행동의 방향을 모색하자니 우리가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했다. 자유당 정권은 반공과 친미를 너무 강조했다. 이 바람에 민족주의라는 것이 불필요한 개념인 것처럼 인식돼 왔다. 金九선생에서 끊어진 것 같은 한국 민족주의를 다시 탐색하기 위해, 제3세계로 눈을 돌려 그들의 민족주의와 비교.연구해가며 한국에서 바람직한 민족주의를 모색한다는 것이 이 연구회의 창립 취지였다고 한다.
  
  63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 이 연구회가 중심이 되어 金鍾必씨를 초빙, 세미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종율, 김중태, 현승일, 박범진 씨 등 재학생이 질문자로 나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李鍾律씨는 『金鍾必시가 그때 대단히 좋은 인상을 주었다』고 말한다. 대답하는 자세도 당당했고, 논리도 정연했으며, 젊은이들과 호흡이 맞는 스타일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40대에게는 金鍾必씨에 대한 향수가 아직도 상당히 깔려 있다. 金씨가 당시의 젊은이들이 품었던 민족주의에 대한 열정과 숨결이 비슷한 듯한 이미지를 풍겼기 때문이다.
  
  30대 후반인 金씨에 대해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이 큰 세대차를 느끼지 않았던 것도 그 현상의 한 이유가 될 것이다. 당시 5.16 주체들은 구악과 구세대를 결부시키는 세대론을 펴기도 했었다. 구세대를 공직에서 추방하는 캠페인도 벌였다. 당시의 주체 세력은 40대 초반과 30대 후반이 주축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구세대는 50대, 즉 지금의 70대층이었다. 5.16과 5.17이란 두 차례 전환기에서 주체 세력은 40대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주체세력 다 세대차를 부각시켜 주체세력의 능력이나 정통성을 강조하려고 했으나 어느 정도의 공감을 얻었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세대의식은 패기에 찬 40대의 자신만만한 기질에서 연유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민족주의를 접착제로 한 金鍾必씨와 20대의 밀월은 오래 가지 못했다. 朴正熙대통령이 민간복으로 갈아 입고, 한일회담을 정력적으로 추진하면서 이 민족주의란 것은 격돌의 도화선으로 변해버렸다. 金鍾必씨를 초청했던 「민비연」은 64년 학생 데모의 불쏘시개가 되었고, 그에게 좋은 감정을 가졌던 학생 리더들은 그들 제2의 이완용(李完用)이라고 규탄하는 대열의 선봉에 서게 된다.
  
   6.3사태―시민 냉담으로 좌절
  
  64년의 6.3사태로 상징되는 64∼65년의 한일회담 반대 시위는 지금 40대 초반(40∼44세)의 공유 체험이다. 4·19가 40대 후반의 공통 체험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6.3사태의 참여자들 가운데는 4·19 때 고등학생으로서 시위를 벌였던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민족주의가 주제였던 6.3사태는 민주주의가 주제였던 4·19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데모는 요즈음 스터디 그룹의 원형인 학생 연구단체와 과회를 중심으로 상당히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6.3 지도그룹은 이론적인 무장면에서 4·19주체를 압도했다. 데모의 구호는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에서 「반매판·반외세·반봉건·반전제」로 확대됐고, 「박 정권 물러나라」로 절정을 이루었다. 학생들의 구호가 정권퇴진 요구로 치달으면서 공화당 정권의 대응은 강화됐다. 국민들도 학생들의 순수한 반일운동엔 동조했으나 정권퇴진 요구에는 냉담해졌다. 국민들의 이 냉담이 4·19의 재판을 거부했고, 6.3사태의 좌절을 결과했다.
  
  공화당 정부는 자유당 정부와 같이 썩고 무능한 정부는 아니었다. 조국 근대화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지는 굳었다. 군의 충성도 절대적이었다. 신념을 가지고, 물리적 통제력을 관장하고 있는 정부가 특수한 국내적 질변(質變)이나 국제관계의 변수가 작용되지 않는 한, 민중의 시위로 붕괴되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적 통칙이다. 李鍾律씨는 6.3사태 때는 동아일보기자로 있다가 계엄령 선포 뒤 「민비연」활동과 연루되어 구속됐다. 그는 지금 6.3사태를 이렇게 평가한다.
  
  『당시 국민들이나 학생들은 공화당 정권이나 한일회담 자체를 반대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굴욕적인 협상 자세를 비판한 것이었죠. 지금도 그때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를 착취했던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인데, 그 정도의 반발도 없었다면 일본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보았겠습니까. 우리 정부도 이 반대 여론을 대일 협상에서 지렛대로 잘 이용했던 것 같습니다』 李健一의원은 『회담에 대한 항의 표시로 시작된 데모가 정권퇴진 요구로 흐르는 바람에 순수 학생운동론자들은 크게 실망했다. 학생들의 뜻이 정치 집단에 의해 왜곡됐다』고 말했다.
  
   근대화 철학에 대한 도전
  
  6.3사태엔 민족주의란 정치적 쟁점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대외의존적 근대화 전략에 대한 도전의 성격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5.16 이후 군사정부가 외자도입으로 강력하게 추진한 공업화정책에 대해, 또 한일 국고 정상화에 의해 일본 자본을 들여오려는 방침에 대해 학생들은 「반매판. 반외세」를 절규했던 것이다. 『공화당 정부가 내걸었던 민족주의 는 어디로 사라져 가 버리고, 우리의 우방 미국이 덮어씌운 면사포가 정부를 현혹한다.… 우리는 절규한다. 우리의 피 어린 노력으로 우리끼리 잘 살아보자고 …』(고려대학교 3·24선언문).
  
  6·3사태가 극명하게 대치시킨 것은 일제시대 교육을 받은 당시의 40대 지배층과 한글 교육을 받은 20대 대학생들의 가치관이었다.
  
  ·외자에 의한 급속한 공업화냐, 아니면 「우리의 피 어린 노력으로 우리끼리 종주국 없이」한번 살아보느냐?
  ·민족자본이 충분히 쌓이고 농업경제가 충실해지는 것을 기다려 공업화를 추진하느냐, 아니면 먼저공업화를 이룩한 다음 농업을 살리느냐?
  ·공장을 먼저 짓고 공해방지를 생각하느냐, 아니면 환경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공장을 짓느냐?
  · 힘의 집중과 그에 의한 효율의 극대화인가, 아니면 힘의 분산에 의한 자율의 극대화인가?
  ·능률 중심인가, 가치 중심인가?
  ·물질의 양인가, 삶의 질인가?
  
  이런 삶의 양식에 관한 선택의 문제가 시비된 것이 6·3사태로 상징되는 소용돌이였다. 그 소용돌이에 휘말린 당사자들이 그 사태의 구체적 의미와 역사적 좌표를 깨닫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그런 통찰력을 가지기에는 그 뒤의 20년이 너무나 급격한 변화를 몰고 왔기 때문이다. 단순, 과격, 과격, 감정적인 구호에 담긴 젊은이들의 다듬어지지 못한 생각을 20년이 지난 시범에서 냉정하게 따져 볼 때 그런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이다.
  
  어쨌든 6·3사태는 고도성장 정책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다. 이 도전과 응전으로 한국 현대사의 나갈 길이 결정되었다.
  
출처 : 월조
[ 2003-07-04, 17:5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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