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교재(18) 박정희의 진실 10문10답
박정희에 대한 오해와 해명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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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 박정희는 대구사범 학생 때부터 친일파였나?
  
  답: 기자가 쓴 '근대화 혁명가 박정희의 비장한 생애-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의 일부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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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 있는 꼴찌
  
   영웅에게 있어서 숙명이란 것은 눌러도 눌러도 튀어오르는 생명력 같 은 것이리라. 박정희는 태아시절에 이미 어머니로부터의 집요한 공격을 받고서도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써 최초의 관문을 통과하였다. 대구사범 에 진학할 때도 어머니는 아들이 떨어지도록 빌었으나 정희 소년은 합격 함으로써 상모리를 떠나게 되었다. 박정희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에서 농사꾼으로 주저 앉았다면 그의 운명과 이 나라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구미보통학교 시절에 이 소년의 마음밭에 뿌려진 어떤 소질의 씨앗 이 대구사범시절에 인격의 틀을 갖추면서 자라난 점에서 5년은 중대한 기간이었다. 성적표로만 본다면 박정희 학생의 이 5년은 대실패였다. 천 상에서 골짜기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대구사범 성적표는 대구 사범의 후신인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공개를 금지시켜 왔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었다. 박정희의 집권시절에 나온 전기류에서는 1등 만 한 구미보통학교의 성적표는 소개하면서도 사범학교시절의 성적은 그 냥 '우수한 편' '중간 정도'식으로 넘어갔었다.
  
   기자는 작고한 이낙선(상 공부장관 역임)이 남긴 메모와 자료들을 1991년에 열람하다가 그가 육군 소령으로서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비서로 있을 때인 1962년에 모아 두 었던 '박정희 파일'중에서 사범학교 성적표를 발견하였다. 박정희는 입 학시험에서는 1백명중 51등으로 합격했으나 1학년 석차는 97명 중 60등 으로 내려갔다. 2학년 때는 83명중 47등으로 약간 올라갔다가 3학년 때 는 74명중 67등, 4학년 때는 73명중 73등, 5학년 때는 70명중 69등을 했 음이 밝혀졌다. 이 성적표가 그의 시대에 공개되지 않았던 것도 '꼴찌 출신 대통령'이란 구설수를 차단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박정희의 행동 평가도 나빴다. 품행을 의미하는 '조행'평가는 5년간 '양, 양, 양, 가, 양'이었다. 2학년 담임은 그를 '음울하고 빈곤한 듯함' 이라 적었다. 3학년 때는 '빈곤, 활발하지 않음, 다소 불성실'이라 되어 있고 4학년 때는 '불활발, 불평 있고, 불성실'이라고 적혀 있다. 지조 는 '견실', 습관은 '과언', 사상은 '온정', 학습태도는 '보통'으로 평가 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장기결석이다. 2학년 때 10일, 3학년 때 41일, 4학년 때 48일, 5학년 때 41일이다. 기숙사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고향에 가서 돈이 마련될 때까지 눌러 앉았기 때문이다.
  
   '취미'란에는 '검도'라고 되어 있다. 이밖에도 박정희는 사격, 나팔, 육상에 뛰어났다. 학업에서는 꼴찌였지만 교련 시간에는 소대장이었다.
  
   군사 및 체육과목에서 활발했다는 것은 그의 신체발육상태가 많이 향상 된 것을 반영한다. 5학년 때 그는 키가 1백59.2㎝에 몸무게는 59.5㎏,가 슴둘레 88㎝로서 '갑'의 평가를 받았다. 학과 중에서 그래도 성적이 괜 찮은 과목은 역사, 지리, 조선어였다. 이 '박정희 파일'에는 동기생(대 구사범4회)인 석광수(작고·국제신문 상무 역임)가 이낙선 소령에게 보낸 편지가 철해져 있었다. 학창시절의 박정희를 평한 편지였다.
  
   '말이 없고 항상 성난 사람처럼 웃음을 모르고 사색하는 듯한 태도가 인상 깊었다. 동기생 중 누구와 친하게 지냈는지조차 알 수 없다. 5학년 때 검도를 시작하였으므로 크게 기술이 있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권투는 기숙사에서 그저 연습을 했을 정도이지 도장에는 나가지 않았다. 군악대 에 들어가서 나팔수가 되었다. 축구도 잘했고 주로 자신의 심신 연마에 노력했다. 성적에는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으나 (머리는)우수한 편이었 고 열심히 시험공부를 하지는 않았다.'.
  
   동기생 조증출(문화방송 사장 역임)이 써보낸 인물평도 있었다.
  
   '대체로 내성적인 편이었고 항상 무엇인가를 구상하고 있는 듯하였으 나 외표하지 않은 관계로 그의 진정한 위인됨을 파악한 학우가 희소하였 다. 다른 학우들은 장차의 이상 및 포부에 대하여 종종 피력하였으나 그 는 일절 침묵을 지켜왔고 교우의 범위도 그다지 넓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검도에는 전교에서 손꼽히는 용자로서 방과후에는 죽검을 들고 연습을 하는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평소에 학우들과 장난칠 때도 검도 하는 흉내를 내어 머리를 치곤 했다. 나팔의 제1인자로서 큰 버드나무 아래서 하급생들을 데리고 나팔 연습하는 모습이 기억에 새롭다. 기계체 조도 잘했다. 4, 5학년 여름휴가 때는 대구80연대에 들어가서 군사훈련 을 받았는데 박정희는 교련에 매우 취미를 가진 것으로 기억난다. 시범 때 그가 자주 조교로 뽑혀나왔다. 특히 총검술은 직업군인을 능가할 정 도로 우수하였다.'.
  
   조증출은 이 편지에서 당시 대구사범의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일본정신이 투철한 교육자들만 모아놓았기 때문에 교육이념이 천황 절대 숭배로 출발하여 신격화로 끝나는 교육이었다. 그럴수록 학생들 사 이에서는 민족적 의분심이 불타올라 소위 '무저항적 반항'을 일삼았다. 소설을 읽을 때도 일본인의 작품은 의식적으로 읽지 않고서 세계문학전 집을 읽었다. 기숙사에서도 탄압에 굴하지 않고 조선, 동아일보를 구독 하였고 '개벽'같은 잡지도 읽었다. 특히 신문연재 소설 중에서는 '상록 수'가 기억에 남는다.
  
   사회주의적 경향을 가진 학생들도 있었으나 대개가 민족운동을 전개하 는 한 방편이었다. 1학년에 기숙사에 입사하면 선배들이 민족의식을 고 취시켜주었다. 선배들은 우리에게 기숙사 안에서는 게다를 신지 못하게 하였다. 국어담당이신 김영기 선생이 국어 시간에 우리 국사이야기를 해 주신 것이 많은 감명을 주었다.
  
   박정희는 특히 국사에 흥미를 가지고 있 었던 것이 기억난다. 기숙사 생활은 대체로 유쾌하고 유익하였다. 박정 희의 인품은 이 사생활을 통해서 배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 체생활을 5년간 해왔기 때문에 공덕심과 희생적 봉사정신을 도야하게 되 었고 소아를 대의적입장에서 버릴 수 있는 정신적 소지를 함양하였다.'.
  
   박정희는 학업에서는 바닥을 기고 기숙사비도 내지 못해서 고향으로 내려가 장기간 결석을 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군사훈련 과 체육에는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황민화를 목 적으로 한 학과교육을 충실히 하여 모범생이 되는 길은 포기하고 국가주 의를 추구하는 군사교육에는 열심이었던 것이 박정희였다. 박정희의 이 런 선별적수용이 '나는 민족혼을 너희들에게 팔지는 않겠다. 그 대신 군 사문화의 실질은 적극적으로 배우겠다'는 계산에 의한 것이라면 그의 꼴 찌는 '이유 있는 꼴찌'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1932년 4월8일 대구사범 대강당에서 열린 4회 입학식에서 박정희도 다른 학생들처럼 히라야마 교장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히라 야마 교장은 학생들을 향해서는 일본말로 연설을 한 뒤에 학부형들을 향 해서는 유창한 우리 말로 인사를 했던 것이다. 박정희가 대구사범 4회 입학생으로서 교정에 첫 발을 들여놓았을 때 분위기는 무거웠다. 3년 선 배인 심상과 1기 학생들 중 27명이 사회주의자 현준혁 교사가 조직한 독 서회(사회과학연구회)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고 퇴학을 당한 직후였기때 문이다.
  
   1기로 입학한 한국인 학생은 93명중 86명인데 졸업자는 55명이 었다. 탈락자 31명은 거의가 항일운동에 관계했다가 퇴학을 당한 것이었 다. 해방 뒤 김일성의 지시로 암살되는 공산주의자 현준혁이 대구사범의 교사로 부임한 것은 1929년이었다. 평남 개천 사람인 그는 경성제대 철 학과를 졸업하자마자 대구에 첫 직장을 구해서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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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2. 박정희 학생은 민족주의 정신의 소유자였나?
  
  답. 그렇다고 봐야 한다. 기자가 쓴 박정희 傳記 중 일부를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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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산아, 머리를 들 수가 없구나'
  
   현준혁교사가 구속되어 학교를 떠난 이후 허전해진 학생들의 마음을 붙들어준 것은 김영기선생이었다. 부여 사람인 그는 조선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문학의 혼이 사라지지 않는 한 민족혼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시간마다 학생들에게 시조 백수를 골라 프린트를 해서 나누 어 주었다. 시조를 통해서 겨레의 영혼을 이어가려는 강의법이었다. 그는 우리 역사 강의도 곁들여서 했다. 조용한 성격인 김영기는 박정희의 4기생들을 가르치던 어느 날, 임진왜란과 이율곡의 10만 양병론을 설명 하다가 '나라가 이러니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면서 한동안 흐느꼈다.
  
   학생들도 따라 울었다. 박정희가 3학년일 때인 1934년4월에 또 독서사건이 터졌다. 1기 선배인 4학년생중 진두현 등 여섯 학생들이 독서회를 만들어 사회주의 책들을 읽다가 퇴학당한 뒤에 구속되었다.진 두현을 유치장에 집어넣으면서 조선인 형사가 말했다.
  
   '현이란 새끼가 뿌린 씨앗은 참으로 놀랍구나. 그러나 이번만은 뿌 리째 뽑고 말 것이야.'.
  
   이 말을 듣는 순간 진두현은 조선일보에서 읽은 칼럼 한 구절이 생 각났다는 것이다.
  
   '조선사람은 감옥살이를 2∼3년 해야만 옳은 조선사람이 될 수 있다.'.
  
   진두현은 '나도 이젠 옳은 조선사람이 되기 위한 수련으로써 옥살이 를 한다'는 각오를 다졌다는 것이다. 진두현은 당시 조선일보에 연재되 던 카프계열의 리얼리즘 문학 작품인 한설야의 '선풍시대'와 이기영의 '고향'을 매일 읽었다. 당시는 우리 지식인들이 민족주의보다도 사회주 의에 더 흥미를 느끼고 있을 때였다.
  
   이 사건이 있은 지 한 달 뒤인 5월에 박정희는 3학년생들과 함께 금 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철원에서 전철로 갈아타서 내금강 입구 미 휘리역에도착하니 태평여관에서 큰 기를 가지고 나와서 여행단을 환영 해주었다. 조선인이 경영하는 이 여관에서는 학생들을 정성 들여 모셨 다. 조선음식도 맛 있었고 잠자리도 쾌적했다. 다음날 내금강을 구경한 뒤에 도착한 곳은 일인이 경영하는 구미산장이었다.
  
   일본인 주인의 대 접이 영 시원치 않았다. 1박3식에 돈은 태평여관보다도 세 배나 많은 2원을 받으면서 저녁은 맛 없는 일본식이교 잠자리는 흙바닥에 가마니 를 깔고 그 위에 재우는 것이었다. 화가 난 학생들은 내일 점심 도시락 은 이 여관 것으로는 먹고싶지 않으니 만들지 말고 식대는 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일인 주인은 내일 도시락 반찬은 이미 준비하였으니 먹든지 안먹든 지 돈은 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조선인 학생들은 오기가 발동했 다.다 음 날 아침에 여관을 나설 때 여관에서 준비해둔 도시락을 아무 도 갖고가지 않는 것이었다. 일인 인솔교사가 '오늘 가는 길은 매우 험하다. 무슨 사고라도 나면 책임지지 않는다'면서 도시락을 가져갈 것 을 권해도 듣지 않았다.
  
   학생들은 점심을 굶어가면서 외금강을 구경하 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인솔교사도 이 사건을 불문에 부쳤는 데 도리카이교장이 이를 알고는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다. 정명모 정헌 욱 두 사람이 주동자로 몰려 퇴학을 당하고 유만식은 무기정학, 다른 일곱명은 1주간의 근신처분을 당했다. 학교에서는 이들 학생들의 부모 를 불렀다.
  
   학생들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이틀 동안 이들 부모들은 복도 에서 대기해야 했다.
  
   이 사건은 '금강산 비로봉 사건'으로 불린다. 박정희와 동기생인 이 정찬은 꼼꼼하고 빈틈없는 성격 그대로 이 금강산 여행중에 들르는 상 점과 공원관리사무소에서마다 기념도장을 받아와서는 스탬프집을 만들 었다. 여기에 친구들의 한 마디를 실었는데 유독 박정희가 쓴 글이 튄 다. 맞춤법을 오늘식으로 약간 고쳐서 소개한다.
  
   '금강산 일만이천 봉, 너는 세계에 명산! / 아! 네 몸은 아름답고 삼엄함으로 천하에 일홈을 떨치는데 / 다같은 삼천리 강산에 사는 우리 들은 / 이같이 헐벗었으니 과연 너에 대하여 머리를 들 수가 없다 / 금 강산아, 우리도 분투하야 너와 함께 천하에 찬란하게…. 온정리에서 정 희씀'.
  
   이 글은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박정희의 글 중에서는 가장 오래 된 것이다. 다른 동기생들은 '아! 평생에 보고싶던 우리 금강산이여! 이제 보고 나니 만시지탄이 없을 수 없네'식으로 자연을 자연으로 만보는데 박정희는 조국의 운명을 한탄하고 있다. 이는 말이 없고 생각이 많은 열일곱 학생의 마음속에서 중대한 문제의식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엿 보게 한다. 박정희를 '근대화 혁명가'로 만든 비범한 성격은 자신의 한 을 민족의 한과 한 덩어리로 파악한 점이다. 공동체가 아닌 자신의 한 만을 풀려고 했더라면 그는 이기적인 입신출세주의자의 길을 걸었을 것 이다.
  
   박정희가 구미보통학교시절에도 특별히 정의감이 있는 소년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정의감이 가르쳐지는 것인지 타고나는 것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을 것이다. 박정희는 그러나 대구사범에 와서는 정의감 이 강한 학생임을 엿보게 하는 몇 가지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박정희가 5학년 때인 1936년에 발간된 '대구사범 교우회지' 제4호에 실린 박정희 의 시를 읽어본다.
  
   '대자연 1. 정원에 피어난 / 아름다운 장미꽃보다도 / 황야의 한 구석에 수 줍게 피어 있는 / 이름 없는 한 송이 들꽃이 / 보다 기품있고 아름답다.
  
   2. 아름답게 장식한 귀부인보다도 / 명예의 노예가 된 영웅보다도 / 태양을 등에 지고 대지를 일구는 농부가 / 보다 고귀하고 아름답다.
  
   3. 하루를 지내더라도 저 태양처럼 / 하룻밤을 살더라도 저 파도처 럼 / 느긋하게, 한가하게 / 가는 날을 보내고 오는 날을 맞고싶다.이상'.
  
   이 시를 한 일본기자에게 읽어보게 하였더니 '언어감각이 참 뛰어나고 순수한 마음이 들어 있다'고 놀라는 것이었다. '일본어의 운율도 잘 맞아떨어져 노래 가사 같다'고도 했다. 실제로도 박정희는 자신의 시에 다가 1, 2,3의 번호를 붙여놓아 그가 작사한 몇 가지 노래의 가사를 연상시킨다. 마지막에 '이상'이라고 써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단정하게 딱끊어버리려는 마음이랄까. 여기에서도 끊고 맺는 것이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박정희의 정신자세를 엿볼 수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다소곳하고 소박한 것에 대한 박정희의 동경이다.들 꽃과 농부로 상징되는 약자와 소박성, 거기에 대칭되는 귀부인과 영웅 사이에서 박정희는 약자편에 서겠다는 것을 이미 선언하고 있다. 박정 희가 죽을 때까지 유지해간 강자와 부자에 대한 반골의식과 소박성은 이미 대구사범 교정에서 틀이 잡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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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3: 박정희는 滿軍내의 비밀 독립군이었나?
  
  답: 박정희를 비밀 독립군이었다고 미화하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다. 다만 그는 滿軍 장교이면서도 민족정신을 버리지 않고 있어 독립군 조직의 포섭 대상자였음은 확실하다. 기자가 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해당 부분을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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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승환 중위
  
   박승환은 1943년에 여운형의 명령을 받고 연안으로 잠입하여 무정을 만나고 왔었다.
  
   만군중위 박승환은 만군내의 조선인 장교들과 무정의 세력을 연결시켜 일본의 패망이 임박한 시점에 국내로 진공한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박승환은 '만주와 중국전선에 있는 조선인 학병들이 탈출하여 백두산으로 집결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하고는 '조국광복의 과정에서 우리가 피를 흘려야만 떳떳하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열변을 토하는 것이었다.
  
   방원철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팔로군과 싸우면서 느꼈던 모순과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 같았다. 박승환은 '오늘부터 방동지는 우리 비밀조직의 일원이 되었으니 절대로 경거망동을 하지말라'고 당부했다. 특히 소영웅적인 행동을 하지 말 것과 개별적인 탈출을 금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박승환은 '같은 부대에 근무하는 조선인 장교들을 포섭하고 무기들을 구해서 봉천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방원철은 열하성의 8단으로 돌아와서 이주일 박정희 신현준을 설득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부대 사이가 수십 리, 수백 리나 떨어져 있어 만나기도 어렵고 그들도 자신과 한 마음일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여운형-박승환계의 이 만군내 비밀조직의 한 회원이었다는 증언들이 있다. 이 증언들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기자는 박승환이란 한 젊은 장교의 비극적이고도 영웅적인 삶과 만날 수 있었다. 박정희는 박승환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었다.
  
   박명근(전 파주출신 4선 국회의원)은 심계원에서 근무할 때인 1950년대 말 박정희 1군참모장을 찾아가 '박승환의 조카입니다'라고 인 사한 뒤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삼촌 말씀을 하시면서 저를 따뜻하게 대해주셨습니다. 삼촌의 딸 정근이 해운대로 피서갔다가 익사하였을 때는 군수기지사령관이시던 그분이 뒷수습을 다 해주셨지요. 제가 경제비서관으로 청와대에서 근무할 수 있었던 것도 그분이 직접 선택하신 때문입니다. 제가 지역구 의원후보로 공천을 받을 때 일부에서 삼촌의 사상에 대해서 시비를 걸자 막아주시기도 했습니다.'
  
   박승환의 미망인 김순자(뒤에 김민행으로 개명)할머니(75세)는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다. '1963년에 박의장이 대통령으로 출마했을 때 마산에 내려왔는데 지방유지들과의 모임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박승환의 처입니다'고 인사했더니 갑자기 정자세를 취하더니 깍듯이 인사를 하여 주위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박대통령 시절에는 아부자들이 박승환과 박정희의 관계를 과장하고 조작하여 박정희가 '비밀독립군이었다'는 내용을 담은 책들을 펴냈다.
  
   1980년8월18일에 육군본부가 펴낸 '창군전사'란 자료집에도 박정희가 '간도특설대에 장교로 근무하면서 비밀광복군이 되어 북경을 비밀리에 오가면서 활약했다'는 요지로 적혀 있다. 1991년에 중국만주지방의 조선족 유지들이 발간한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 결전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특설부대에 참가한 자들은 모두 민족반역자들이다. 박정희는 특설부대의 중대장급 군관이었다. 그는 해방이 되자 시세에 편승하여 하북지대 조선청년들을 묶어세워 조선의용군에 참여하려 했다. 그러나 받아주지 않자 곧추 남조선으로 내뺐는데 그 뒤 우익세력을 긁어모아 나중에는 대통령으로까지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밝혀지겠지만 박정희는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적도, 활동적인 비밀독립군이었던 적도 없으며 독립투사를 잡아가둔 정보장교였던 적도 없다.
  
   미화와 격하의 교차점에서 헷갈리기 쉬운 '박정희의 만군행적'을 좀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려면 박승환이란 인물의 연구가 필요하다. 박승환은 박정희보다 1년 늦은 1918년 경기도 파주군 월룡면에서 태어났다. 대지주 박우용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경복고교의 전신인 경기제2고보를 졸업했다. 수영, 스케이트 선수였고 훤칠한 키에 힘이 셌다. 졸업한 뒤 1년간 집에서 쉬었는데 폐가 나빴던 것이다. 이때 몽양 여운형(여운형)과 접촉하더니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박승환이 1937년에 봉천군관학교 제7기생으로 들어간 것도 여운형의 권고에 의한 것이었다. 봉천군관학교에서는 2·26사건에 연루되었 다가 만주로 밀려온 일본인 교관 간노 히로시(관야홍)의 지도와 격려를 많이 받았다. 졸업후 박승환은 1년간 기병장교로 근무하다가 항공장교로 전과했다. 조종사가 된 것이다. 그는 봉천항공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봉천에는 그때 김태덕이란 조선인이 공장들을 경영하여 돈을 많이 벌고 유지로서 현지 사회에서는 높은 신망을 얻고 있었다. 여운형은 홍사익장군에게 박승환을 김태덕의 둘째 딸 김순자에게 중매해줄 것을 부탁했다. 여운형은 박승환의 조직활동을 은폐하고 엄호해줄 보호막으로써 김태덕의 그늘을 빌리려 했던 것 같다. 그때 홍사익은 소장(별은 하나였다. 준장은 일본군제에는 없었다.)으로서 길림성의 공주령학교 부교장으로 있었다. 일군내의 조선인 장교로는 가장 선임자였을 뿐 아니라 존경받는, 즉 민족혼이 죽지 않은 분이었다. 박, 김 두 사람은 1942년에 봉천신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박승환이 약 7년간 닦아놓은 인맥을 중심으로 조직에 들어간 것은 1945년 4월 봉천에서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박승환, 이상렬, 박준호, 최창륜, 문용채는 여운형의 건국동맹 산하 조직이란 뜻에서 '조선건국 동맹 만주분맹 군사위원회'란 명칭에 합의하였다. 박준호의 기억에 따 르면 이 조직의 대표는 박승환, 연락책은 금주 주둔 만군헌병대 문용 채 상위, 군관학교출신 장교 담당은 최창륜, 재정은 김순자의 형부인 평양갑부 최기영이었다.
  
   이들은 지역별로, 또 기수별로 조직대상 장교들을 추리게 되었다. 박준호는 생전에 기자에게 '신경 비행대에 있던 최창륜이 1기 후배인 박정희를 2기생 대표로 추천한 것으로 기억된다. 박정희와의 연락은 그가 맡았을 것이다. 박승환이 해방 전에 박정희를 직접 만난 적은 없 다고 본다'는 증언을 남겼다. 간도 용정 광명중학교 출신의 쾌남아 최 창륜은 생도시절에는 후배 박정희를 구타하여 눈물을 맺히게 한 적도 있었으나 졸업한 뒤에는 친해졌다. 연령초과인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에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강재호 상위는 간도특설대 에 있었다.
  
   간도특설대는 1개 대대규모의 부대였지만 부대장을 제외하 고는 거의 전부가 조선인이었으므로 국내진공작전을 위해선 가장 중요 한 병력이었다. 이 부대에선 최남근, 강재호 두 장교가 버티고 있으면 서 박승환과 완전히 호흡을 같이 하고 있었으므로 따로 공작을 할 필 요가 없었다. 박정희가 강재호, 최창륜 같은 핵심 장교들과 믿고 지내 는 사이였고 그의 평소 성향이 민족적이었다는 점들로 미루어볼 때 '만주분맹'의 회원이 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박정희는 주 동적 참여자나 활동가는 아니었다. 박정희가 중도좌파로 분류되는 여 운형계열에 해방 전부터 동조했다는 것은 해방 후 그에게 닥쳐올 험난 한 역정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問4/박정희는 독립군을 토벌했나?
  
  답: 박정희는 滿軍 장교로 임관된 뒤 만리장성 북쪽의 열하성에 배치되어 毛澤東의 이른바 8로군과 대치했다. 박정희는 만주의 조선인 독립군을 토벌하는 부대에 근무했던 적도 없고 독립지사들을 수사하는 부서에 근무한 적도 없다. 기자가 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관련 부분을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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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벽산
  
   박정희는 1944년 7월 열하성 흥륭현 반벽산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제 8단으로 배속되었다. 단은 연대규모의 부대를 가리켰다. 반벽산은 만리 장성의 바로 북쪽 산악지대에 있었다. 반벽산에서 북쪽으로 40㎞쯤 가면 청조의 이궁이 있는 승덕, 북서쪽으로 가면 몽골이었다. 모택동(모택동) 의 팔로군 제17단이 만군 8단의 주적이었다. 8단의 당제영 단장은 중국 인이었다. 상교(대령)인 그는 박정희를 부관 겸 기수로 임명했다. 부관 이하는 일은 작전참모의 보좌였다.
  
   머리 좋은 장교가 맡는 자리였다. 박 정희로서 반가웠던 일은 이 8단에 만주군관 1기 출신 조선인 장교 두 사 람이 먼저 와서 근무중이란 점이었다. 박정희에게 난생 처음인 군대주먹 맛을 보여주었던 방원철은 중화기 중대(연이라 불렀다)의 선임장교였다. 이주일(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감사원장 역임)은 대대 부관장교였다.
  
   보병8단은 1944년 1월에 조선인들이 많이 살던 목단강 영안에서 열하 성으로 이동한 부대였다. 그때는 장백산 밀림 지대에서 활동중이던 중국- 조선 공산계열의 항일빨치산 부대가 소련으로 밀려난 뒤였으므로 8단은 작전지역을 바꾼 것이었다. 이주일, 방원철 두 조선인 장교도 이동하는 8단을 따라왔다. 만주와 중국의 접경지대를 관할하게 된 이 부대는 팔로 군의 공격으로부터 촌락들을 방어하는 것이 임무였다. 만주국의 용병처 럼되어 중국공산군과 싸우게 된 박정희로서는 신바람이 날 수 없는 임무 였다.
  
   방원철은 자신의 회고록(미발표)에서 이때의 진중생활을 자세히 기록 하여 놓았다. 이 기록은 박정희가 처했던 상황을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방원철이 소속된 중대의 대장은 일본인 장교 오노키 상위(대 위)였다. 방원철은 조선인으로서 일본인의 명령을 받아서 중국인 군인들 을 지휘하여 또 다른 중국인을 공격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곤혹스러웠 다. 더구나 팔로군은 인민들 가운데 숨어 있고 전선이 뚜렷하게 형성되 지않아 사관학교에서 배운 군사학을 그대로 적용할 수도 없었다. 방원철 은한 경험을 통해서 현지 중국인들의 민심을 얻는 것이 가장 안전한보신 책임을 알게 되었다. 8단 소속 6중대의 중국인 중대장이 당천이란 마을 에 주둔하면서 민폐를 많이 끼쳤다.
  
   이 중대장은 한 과부 집에 놀러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팔로군 공작원 에게 피살당하였다. 단본부에서는 6중대 병력을 물리고 방원철 중위로 하여금 1개 소대를 끌고가 당천에 주둔하라고 명령했다. 주민들은 새 부 대가 들어오자 겁을 먹고 있었다. 방원철은 마을의 유지들을 모이게 하 고는 이렇게 말했다.
  
   '일전에 있었던 중대장 피살 사건과 이 마을 주민들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믿습니다. 앞으로 우리 부대원들이 행패를 부리면 저한테 알려주 십시오. 부대원들의 가슴에 번호표를 붙이도록 지시했습니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번호를 알려주십시오. 번호를 붙이지 않는 자가 약 탈을 하면 때려죽여도 좋습니다. 마을에서 공출하는 땔감과 식품에 대해 서는 월2회씩 그 대금을 지불하겠습니다.'.
  
   방중위는 출입증을 유지들에게 주어서 부대로 놀러오도록 했고 자신 도 마을에 놀러가서 마작도 하고 아편도 빨았다. 노인들이 가르쳐주는 요령대로 아편을 빨았더니 중독도 되지 않고 금단현상도 없어 오히려 건 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루는 중국인들과 마작을 하다가 불 쑥 이렇게 떠보았다.
  
   '내가 여기 놀러나오는 것을 팔로군이 알고 있을텐데 왜 안 잡아가는 지 모르겠어.'.
  
   '부대장님은 안심하십시오. 팔로군이 잡으러 오면 우리가 막겠습니 다.'.
  
   그때부터 방 중위는 마을사람들이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고 안심하게 되었다. 하루는 일본인 중대장 오노키가 저녁을 먹다가 호주머니에서 엽 서를 꺼내더니 방중위에게 보여주었다. 일본에 살고 있는 그의 여동생이 보낸 것이었다. 요지는 '오빠, 만주에는 쌀이 많다는데 다음에 고향에 오실 때는 좀 가져오세요. 쌀밥이 먹고싶어요'였다. 오노키는 '이 정도 면 전쟁은 다 끝난 것이 아닌가'라고 했다.
  
   '글쎄요, 그것 참 심각한데요.' '우리도 적당히 하면 돼.'.
  
   해방의 그날
  
   만리장성 북쪽의 열하성에 포진하고 있던 만군8단의 네 조선인 장 교들. 8월9일 소련군의 참전을 가장 먼저 안 것은 반벽산의 단본부에 있던 단장부관 박정희 중위였다. 그는 7월1일자로 중위로 진급했었다. 8단은 만리장성 북쪽에 흩어져 있는 전병력(약4천명)을 흥륭에 집결 시켰다가 상부의 명령에 따라 내몽골의 다륜으로 북진하라는 작전임 무를 부여받았다. 박정희는 이런 명령을 신현준의 제6연을 비롯한 예 하 부대에 전달했다.
  
   그때 방원철이 속해 있던 중화기중대는 만리장 성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 일군과 합동작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통신 이 되지 않았다. 당시 만군은 대대급 부대만이 발전식 무전기를 갖고 다녔다. 한 30분간 발전기를 돌리고 통신기를 틀어야 송수신이 되는 퇴물이었다. 방원철이 선임장교로 있던 중화기중대가 만리장성 남쪽 에서 작전을 마치고 반벽산에서 20리쯤 떨어진 고산자의 본부로 돌아 온 것은 8월13일 오후. 목욕을 하려는데 박정희 중위가 전화를 걸어 왔다. 긴장된 목소리였다.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지금부터 기밀유지를 위해서 조선어를 쓰 겠습니다. 지난 9일 소련군이 침공하여 전면전에 돌입하였습니다. 우 리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서 흥륭에 집결했다가 다륜으로 진격하게 되 었습니다. 내일 새벽 5시까지 반벽산에 도착해주십시오. 반벽산에서 부대를 정비하여 흥륭으로 향합니다. 장비를 최대한 가볍게 꾸려주십 시오.'.
  
   이 순간 방원철도 아차 했다. 그 한 달 전 평천에 주둔하던 헌병 상위 문용채가 엽서를 보내왔던 것이다. '건국동맹 군사분맹'의 연락 책인 문용채는 이 엽서에서 '나는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봉천으로 간다.
  
   방 중위도 몸이 좋지 않은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는데 휴가를 얻어 서 우선 건강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라고 했다. 방 중위는 이 편지를, '이제 일제의 패망이 임박했으니 휴가를 내어 후방으로 빠졌다가 거사하자'는 취지로 이해했다. 그래서 상부에 휴가를 신청 했더니 일군의 합동작전이 끝난 뒤 한 달간의 휴가를 주겠다는 약속 을 받았던 것이다. 방원철의 중화기중대 약2백50명은 당나귀 50마리 에다가 짐을 싣고서 14일 새벽에 반벽산으로 출발했다.
  
   폭우가 쏟아 지기 시작했다. 반벽산에 집결한 8단 병력은 행군대열로 재편성하여 바로 흥륭으로 출발했다. 반벽산 흥륭은 약60㎞의 거리였지만 강원 도 산악지대처럼 험했다. 차는 다닐 수 없었다. 당나귀와 보병으로 구성된 긴 행렬이 연일 계속되는 폭우를 뚫고 걸어갔다. 절벽과 계곡 을 따라 난 길을 걷자니 하루 50리가 고작이었다. 방원철의 중대에서 는 졸면서 걷던 병사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기도 했고 급류를 건너 다가 떠내려가기도 했다.
  
   신현준의 중대도 식량과 탄약을 실은 당나귀가 물에 떠내려가는 사고를 당하는가 하면 정체불명의 부대로부터 야간기습을 당하기도 했다.
  
   알고보니 우군부대가 오인사격을 해온 것이었다. 8월15일, 16일도 행군이었다. 일본이 항복한 사실도 모르고 그들은 걷고 있었다. 폭우 를 맞으면서 잠을 자고 깨어나면 또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 발전기를 한참 돌려야 작동하는 무전기를 켤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8월17일 방원철의 부대가 흥륭에 거의 당도하였을 때 무전기를 작동시켰다.아 무 방송도 잡히지 않았다. 이리저리 돌리고 있는데 중국어 방송이 나 오는 것이었다. 그 순간 장개석의 육성연설이 방송되고 있었다. 방원 철은 그 연설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일본은 14년에 걸친 중국 침략전쟁에서 완전히 패망하여 항복하 였습니다. 동북지방에서는 조선 사람들이 우리보다도 더 심한 압제를 받았습니다. 조선사람들 중에는 일본인에게 빌붙어 나쁜 짓을 한 사 람도 있습니다만 일체의 보복행위를 금하는 바입니다. 동북변사처를 조직하여 왕장군(중국군 소속 조선인 김홍일장군을 지칭)을 파견하기 로 하였으니 자중자애해주시기 바랍니다.'.
  
   뒤따라오던 신현준은 흥륭에 당도하여 중화민국의 청천백일기가 휘날리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 신현 준, 방원철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인 8단장은 매우 원만하게 이 사태 를 관리했다고 한다. 박정희 등 조선인 장교 네 명은 일본인 장교 13 명과 함께 무장해제를 당했다. 당제영 단장은 일본인 장교들을 흥륭 소재 일본군게도 부대에 인계했다. 다른 만군 부대에서는 일본인 장 교들이 중국인 사병들에 의해서 피살되는 사고가 빈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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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問5: 朴正熙 소령은 누가 살렸나.
  
  답: 백선엽 정보국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기자가 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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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선엽의 결심
  
   항공사관학교 김정렬 교장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박원석 교수부장을 구해내려면 상선으로 되어 있는 박정희의 무고함을 증명하면 될 것 같 았다. 그래서 수사책임자 김창룡 소령에게 다짐하듯 재차 물었다.
  
   '만약 박정희 소령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어 풀려나온다 면 어떻게 하겠소?' '그야 박원석이는 자동적으로 풀려나오게 되겠죠.'.
  
   '박정희가 빨갱이가 아니면 박원석은 그저 나오는 것이오?' '예, 그렇습니다.'.
  
   김정렬은 육군참모차장이던 정일권 대령을 찾아갔다. '만군 후배인 박정희가 빨갱이로 몰려 있으니 살려내라'는 식으로 다그쳤다.
  
   '지금 김창룡이가 나까지 빨갱이로 보고, 나를 못 잡아서 안달인데 내가 어떻게 하겠소?'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참모차장인데 한번 따져볼 수는 있지 않 습니까?' '아이고! 김창룡이 이야기는 하지도 마시오.'.
  
   김정렬은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을 찾아갔다. 백 대령은 숙군수사의 총책임자였다. 백선엽 대령도 김정렬의 구명요청에 대해 난색을 보였 다. 그도 '형님, 말도 마십시오. 김창룡이는 지금 나를 잡아넣지 못해 서 안달입니다'라고 하더란 것이다(김정렬 회고록).
  
   이에 대해서 백선엽 전 육군대장은 '김정렬씨가 와서 박원석 대위 를 선처해달라고 말한 적은 있지만 박정희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김 창룡은 나의 지시를 잘 따르는 부하였다'고 말했다.
  
   김정렬은 일본 육사5기 선배인 채병덕 준장의 갈월동 자택을 찾아 갔다. 그는 지금의 합참의장에 해당하는 총참모장으로 있었다. 김정렬 교장의 말을 듣더니 채병덕은 즉시 김창룡을 불렀다. 김정렬은 다른 방으로 피했다. 김창룡과 이야기를 나누고 돌려보낸 뒤 채병덕은 김정 렬을 다시 불러 이렇게 말했다.
  
   '김창룡이가 말하기를 박정희가 남로당 프락치인 것은 확실한데 풀 어줄 길은 있다고 하는구만.'.
  
   김창룡이가 제시한 '살릴 길'은 이러했다.
  
   '수사관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러 갈 때 열번만 박정희 소령을 앞 세우고 동행한다. 만약 박정희가 남로당 세포가 아니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기에 협력하여 누명을 벗을 것이요, 그가 공산주의자라 하더라 도 열번을 배신하게 만들면 그 세계에서 영원히 추방되어 전향하지 않 을 수없을 것이다'.
  
   설명을 마치자 채병덕은 김정렬에게 물었다.
  
   '박정희 소령이 거기에 응해줄까 몰라.' '아, 그거야 물론 당연히 응하겠죠.'.
  
   다음날 일찍 김정렬은 다시 김창룡을 찾아갔다. 박정희가 적극적으 로 협력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일을 하는 데는 한 보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김창룡이 아무리 숙군수사의 실력자라고 해도 박정희 를 마음대로 풀어줄 수는 없었다. 절차를 밟아야 했다. 전국적 규모로 벌어지고 있던 숙군수사를 총괄 하고 있던 것은 육본정보국 특무과장 김안일 소령이었다.
  
   이 특무과는 SIS(Special Investigation Section) 이라불렸다. 이 과는 곧 육군특무대로 확대되고 이 부대가 방첩대, 보 안사령부로 바뀌면서 두 대통령, 두 정보부장을 배출하는 등 한국 현 대사를 주름잡는 권력기관으로서 역사의 전환기때마다 중심적 역할을 하게된다. 김안일은 김창룡이 박정희를 살려주자고 해서 그를 지금 조 선호텔 근방에 있던 특무과 사무실로 불러 직접 신문했다.
  
   '그는 자포자기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생에 애착이 있 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의식적으로 태연한 척하는 것도 아니고. 그 래서 내가 백선엽 국장에게 살려주자는 제의를 했습니다. 자기 조직을 털어놓은 공산주의자는 거세된 환관과 같아 풀어주어도 안심할 수 있 다고 판단한 겁니다.'.
  
   백선엽 국장은 김안일의 건의를 받아들여 박 소령을 면담하기로 했 다. 김안일이 수갑을 찬 박정희를 데리고 정보국장실로 들어와서 백 국장옆에 앉았다. 백선엽은 석달 전 여순 14연대 반란군토벌사령부의 참모장일 때 박정희 소령을 작전장교로 데리고 있었다.
  
   마주 앉은 박 정희의 모습은 처연했다. 생사의 기로에 선 한 연약한 인간이 생명을 애원하는 순수한 모습, 그것이 백선엽을 움직였다. '저를 도와주십시 오'라는 박정희의 애원에 백선엽은 무심코 '도와드리지요'라고 말하고 말았다. 백선엽 장군은 지금도 그 결정적인 말이 '무심코' 나왔다고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말이 결국 그를 살린 것입니다. 도와주겠다고 약속해놓고는 어 떻게 살리나 하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통수계통을 따라 재가를 받 아야했으니까요. 그분이 살아난 것은 간단합니다. 저와 직접 대면했기 때문입니다. 숙군수사 책임자인 저에게 아무도 박정희를 살려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무서운 수사선풍이 불고 있을 때인데 감히 저에 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을 때였습니다. 저 앞에 앉아 있던 그분의 모 습, 거기에 저의 마음이 움직인 겁니다.'.
  
   개인적 친분으로 친다면 최남근 중령이야말로 백선엽이 구해야 할 인물이었다. 최남근은 봉천군관학교 선배이고 간도특설대에서 같이 근 무했으며 함께 38선을 넘어와 같은 날 임관하여 군번도 백선엽 바로 앞이었다. 그런 백선엽은 숙군수사가 시작되자 잠적한 최남근을 체포 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입장이 되었다.
  
   김안일의 기억에 따르면 김창룡 이 박정희 구명사유서를 겸한 신원보증서를 적어 자신과 함께 백선엽 국장에게 갔다고 한다. 백 국장은 '너희들도 여기에 도장을 찍어'라고 하여 세 사람이 박정희의 신원보증인이 되었다. 붉은 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던, 저승사자 같은 김창룡이 박정희를 살렸다는 것--. 우리 현대사의 뒤안길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기구한 인연중의 하나이다. '김형,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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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내 좌익세포를 숙정하는 수사과정에서 박정희의 제보 어느 정도였 던가, 박정희의 역할과 위상은 어느 정도였던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수사-재판기록이 없어진 현재,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관련자들의 증언을 종합하고 검토해야 한다. 숙군수사본부였던 육군정보국 첩보과 장 겸 전투정보과장 김점곤(육군소장 예편·평화연구원장)은 이 무렵 박정희 소령과 인간적으로나 업무적으로 무척 가까웠다.
  
   육사 1기 선배인 김점곤은 또 1연대 정보주임으로서 숙군수사를 사 실상 주도하고 있던 김창룡 소령의 보고상선에 있었다. 숙군수사에 시 동이 걸린 어느 날 김창룡 소령이 전화로 '이재복이를 잡았습니다'고 보고해 왔다.
  
   '이재복이 누군데?' '남로당 거물입니다.'.
  
   한 시간쯤 뒤 김창룡이 나타나더니 김점곤 과장에게 흑백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김(김) 과장은 '잘 모르겠는데 어디서 본듯하기도 하 고'라고 했다. 김창룡은 '이 놈이 이재복인데 김 과장과 춘천에서 저녁 을 같이 했다는데요'라고 했다. 그제서야 어떤 회식자리가 생각났다. 김점곤은 '박정희가 숙형라며 데리고 온 사람과 저녁을 먹은 것이 기억 난다'고 했다.
  
   김창룡은 '이 놈이 그날 박정희의 숙형이라 위장하고 그 자리에 나 타난 겁니다'라고 했다. 1년반 전 8연대 시절 그 회식 자리가 마련된 것은 작전참모 박정희 소위가 김점곤 중위에게 '시골에서 산판을 하여 돈을 좀번 숙형(삼촌)이 계시는데 저녁을 사겠답니다'라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원용덕 연대장을 모시고 술을 함께 마시는데 서로 인사 가 끝나고 잔이 몇 바퀴 돌고나서 원용덕이 소리를 빽 질렀다.
  
   '야, 정희야, 너 아주 쌍놈이구나.'.
  
   박정희는 '예?'하고 묻더니 '저는 가난하게는 살았어도 쌍놈은 아닙 니다'라고 했다.
  
   '이놈아, 숙질간에 성이 다르니 쌍놈일 수밖에.'.
  
   그 순간 김점곤과 박정희의 눈길이 마주쳤다. 김점곤의 눈은 '어떻 게 된거야?'라고 묻고 있었고, 박정희의 눈은 '어떻게 하지?'라고 도움 을 청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김점곤의 반응이 없자 잠시 머뭇거리다가 '저의 외숙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원용덕은 기다리던 대답이란 듯이 '그러면 그렇지'라고 하여 웃음을 터뜨려 분위기는 정상화되었다. 그때 박정희의 외숙이 사실은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 이재복이었다는 사 실에 경악한 김점곤은 다음날 일어나 생각하니 박정희도 붙들려 들어가 있을 것이라는 직감을 했다. 전화로 김창룡을 불렀다.
  
   '박정희는 고문하지 말아요. 몸이 약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다루면 죽을 가능성이 있어.'.
  
   그때 박정희는 자신을 좀 혹사하고 있었다. 무슨 고민이 있는지 말 술을 퍼마시는데 체력이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점곤이 김창 룡으로부터들은 보고에 따르면 박정희는 남로당의 군사부책인 이재복의 직속인물로서 군내 남로당 조직도에선 최상층부에 위치하고 있었다.'여 수 14연대 반란사건 직전에 이재복이 박정희를 군내조직 책임자로 임명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인간적으로 자신과 직접 연결되고 두뇌와 인격 이 뛰어난 박정희로 하여금 조직을 관리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그때 남 로당의 군내세포 관리체계는 엉망이었습니다. 박헌영은 빨치산 출신인 김일성과는 달리 군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육사 3기생부터 군내당을 건설하기로 한 것 같은데 지휘체계의 혼선이 컸습니다. 여수 14연대 반란사건도 중앙당의 이재복이 지시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도당이 관리하던 하사관들이 멋대로 주동하여 일으킨 것입 니다.
  
   중앙당은 장교들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김지회 중위가 뒤늦게 지 창수상사로부터 지휘권을 인수하여 반란군의 두목이 된 것입니다. 지창 수는 같은 부대에 있던 김지회가 남로당 세포라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김창룡이 박정희를 통해서 군내 남로당 조직의 윤곽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도 큰 수확이었습니다. 저는 김창룡에게 박정희로부터 자 술서를 받되 그 내용이 우리가 후에 조사한 것과 다르게 나오면 용서할 수없다고 못을 박고 이 점을 말해두라고 했습니다.'.
  
   박정희가 조직을 털어놓기 전에도 김창룡은 이재복보다 먼저 붙든 그의 비서 김영식을 통해서 군내 조직원 수백명의 명단을 입수하였다. 수사책임자 백선엽 육군 정보국장에 따르면 경찰로부터도 군내의좌익명 단이 넘어왔다고 한다.
  
   김태선 서울시경국장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 한 명단이었다. 군정시대 경찰은 좌익소탕에 앞장 선 때문에 체계적으 로 정보를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통령은 미군사고문단장 로버 츠를 불러 그 자료를 내놓으면서 '그 동안 미군은 뭘하고 있었는가. 이 런 군대를 대한민국 정부에 인계했는가. 책임지고 숙청하라'고 다그쳤 다.
  
   이 명단은 이응준 육군총참모장에게 건네졌고 숙군수사 때 기초자료 로 쓰여졌다. 이 경찰자료와 이재복 비서로부터 압수한 명단 중에 박정 희의 이름이 끼여 있어 그의 체포로 연결되었던 것 같다. 박정희가 털 어놓은 명단 때문에 군내의 좌익들이 몽땅 체포되었다는 주장은 과장이 다.
  
   좌익세포가 가장 많이 들어가 있었던 곳은 육군사관학교였다. 1중 대장 박정희 소령에 이어 1중대 2구대장 황택림 중위, 4구대장 장구섭 소위, 2중대장 강창선 대위가 체포되었다. 그 이전에 사관학교에서 간 부로 근무했던 오일균, 조병건, 김학림도 제거되었다. 박정희의 만주군 관학교 2기 동기 출신들 가운데서도 이병주, 안영길, 강창선, 이상진이 숙청되었다. 혈연, 학연, 군맥에 의해 좌익인맥과 이중삼중으로 얽혀 있었던 것이 박정희였다.
  
   김점곤의 관사는 박정희의 용산 관사와 길 하 나를 두고 대각선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박정희가 구속된 뒤에는 혼자 있는 이현란을 총각의 몸으로 찾아가기가 뭣했다. 옆집에 살고 있던 군 악대장 이종태 부부와 함께 들러 쌀도 갖다주곤 했다. 1949년 1월말,박 정희가 풀려나온 것을 김창룡의 전화를 받고 알게 된 김점곤은 다음날 아침 일찍 찾아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침상을 받아놓고 밥숟 가락에 김을 막 얹으려던 박정희가 김점곤을 보더니 달려나와 와락 끌 어안았다. 그는 '김형, 고맙습니다'라면서 엉엉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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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問6: 朴正熙의 5.16 거사는 미국의 뒷받침을 받아 성공했다.
  
  답: 반대이다. 주한미군은 4.19 이후 군내의 숙군을 주장하는 청년장교들의 배후에 박정희 소장이 있다고 그를 퇴역시키려고 했다. 그는 5.16 뒤에도 주한미군에 맞서고 그들을 설득하여 권력을 지켰다. 필자가 쓴 박정희 전기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인용한다.
  
  
   매그루더 사령관
  
   군부가 김종필 중령 등 8기생 장교들이 제기한 정군 문제로 시끄럽던 9월10일 최경록 신임 육군참모총장은 후속 인사에서 1관 구 사령관 박정희 소장을 육본 작전참모부장으로 불러올렸 다. 이 직후 박정희가 남긴 두 편의 글이 있다.
  
   박정희는 편지를 많이 쓴 사람이다. 대통령에 있을 때도 그 바쁜 일정 속에서 수많은 사신을 보내 받는 이들을 감동시키기 도 했다. 그는 지위의 고하나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꼭답 장을 했다. 1960년 9월23일 박정희가 부산 영남상업고교 이동 룡 교사에게 보낸 편지가 그런 예이다. 이동룡은 4·19혁명 때 부산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서 이승만 하야 뒤의 혼란기에 박정 희 계엄사무소장의 지시에 따라 질서유지에 협력했다. 그가 박 정희에게 편지를 보낸 데 대한 답장의 요지는 이러했다.
  
   <형들의 힘으로 성취한 4·19혁명은 이 나라, 이 겨레에 강 심제를 놓고 활력소를 주입케 한 역사적인 혁신이었습니다. 혁 명의 격동기에 형들과 동일한 공간성에 처재하였고 호흡을 같 이 했다는 것을 생애를 통해서 잊지 못할 인연이자 본인의 영 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지난 9월10일자로 다시 육 본으로 전속발령을 받고 지금은 감군문제 등 복잡한시기에 본 부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서울에 오시는 기회가 유하 시면 필히 왕방하여 주심을 고대합니다.>.
  
   이 편지를 쓴 6일 뒤에 박정희가 자신의 잡기장에 쓴 글이 전한다.
  
   <만사가 이대로만 순환하고 진전이 없다면 명일의 사회는 여하히 될 것인가. 사월 혁명에 선혈을 흘리면서 민주주의를 찾으려고 선두에 서서 젊은 청춘을 초개와 같이 버리던 학도들 이 또다시 거리에 나와서 생활계몽을 호소하고 기성인들의 경 각을 부르짖었다. 정열과 반응이 없는 사회의 무신경함에 너무 나 안타까운 나머지 왕왕이 탈선도 한다. 이 나라의 지도층을 자처하는 기성 정치인들의 근자의 무절제하고 몰지각하고 파렴 치한데는 통탄을 불금한다.
  
   대중은 신생 제2공화국의 혁 신적인 시책과 국민생활 향상을 위해서 지대한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관망하고 있다. 연이나 정국은 난마와도 같이 헝크러지 고 걷잡을 수 없이 혼란과 무질서만을 노정하고 국민들의 실망 만 커가고 있다. 난하면 악한 놈이 득세한다는 옛말대로 이 정 권 하에서 국민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던 자 또다시 고개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며 세태를 비웃는다. 가도가도 시관이 보이 지 않는 정국의 불안정, 국민생활의 궁핍, 도의의 타락, 윤리 의 문란 이러한 도정을 줄달음질친다면 그 다음에 올 것이 무 엇일까. 공산당의 독소가 침투되고 잠식하기 쉬운 병약적인 사 회 즉 공산당의 밥이 되는 길밖에 더 있겠는가. 동포여! 겨레 여! 과거 우리 조상들이 저지른 과오를 우리 다시 범할 것인가. 진실로 조국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우리 후손을 사랑하 거든 우리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사월혁명 정신을 다시 상기하 고 젊은 학도들의 조국애의 대정신으로 돌아가자.>.
  
   이 무렵 쓰여진 박정희 측근 이낙선 소령의 잡기장 속 잡문 도 정군파 장교들의 생각을 엿보게 한다.
  
   <조국아! 당신은 영영 시들려나. 이 나라를 구하는 길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장면씨가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으 니 회심대오하여 사심을 버리고 솔선수범을 하고 나서 일대 혁 신정책을 쓰는 방법. 둘째, 군에서 일대혁신을 단행하여 국민 에 모범을 보이고 비정하는 정부를 강압적으로 시정시키는 방 법. 셋째, 혁명으로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는 방법. 이상 세 가 지 방법에서 첫째 것은 장면씨에게 새로운사람이 되어달라는 것인데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어려운 일이다. 둘째 방법에는 군의 지휘관들중에 앞장 서서 대담하게 일할 사람이 없다. 그 들도 정부 고관과 다름 없이 썩었다.
  
   썩지 않은 장군에게는 참 모총장직을 맡길 리가 없다. 셋째 방법만이 한국의 살 길이다. 그리고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누가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하느냐. 학생들도 이젠 그들의 무기력을 노정시키고 말았다.혁 신계는 공산화할 위험이 있으며 족청계는 사심이 너무 크다.충 성무사(어느 정치계열에도 속하지 않는)한 군인이 혁명을 일으 켜 일정한 기간 군정으로 국가발전의 기틀을 만들고 건설은 지 자에 넘겨주도록 해야 한다.>.
  
   1960년 가을 박정희 육본 작전참모부장은 마음이 편치 않았 다. 우리 군수뇌부와 미8군은 그를 김종필 중령이 주동한 이른 바 '16인 하극상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하고 있었다. 더 구나 미8군 사령관 매그루더 대장은 박정희의 해묵은 좌익 전 력을 문제삼아 예편시키려고 했다. 박정희는 16인 사건(최영희 연참총장을 찾아가 항의하려다가 연행된 사건)과는 관계가 없 었다.
  
   김종필 중령은 처삼촌이 오해를 받을까 하여 이 무렵 일 부러 박 소장을 찾아가지도 않았다고 한다. 미군측에선 여러 경로를 통해서 박정희를 예편조치하라는 압력을 장면 정부에 넣었다. 매그루더 대장은 직접 현석호의 후임인 권중돈 국방장 관과 최경록 참모총장을 만나 그런 뜻을 전달했다고 한다. 미 군은 한국군이 안정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박정희와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정군파가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는 데 불안을 느끼 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히 박정희의 좌익전력에 새삼 주목하게 되었다. 한국군에선 6·25전쟁을 통해서 입증된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으나 사상문제에 대해서 관대한 미군 측에서 오히려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김영선 재무장관이 미 국을 방문했을 때 국방부 고위 관리가 박정희를 거명했다고 한 다.
  
   '한국군의 작전참모부장은 공산주의자다. 체코슬로바키아도 공산화되기 전에 육군의 작전국장이 빨갱이였는데 그 사람이 주동이 되어 국가 전체를 공산화시켰다. 만약 한국 정부가 박 정희 소장을 그 자리에 둔다면 우리는 원조를 재고하겠다.'.
  
   김영선 장관은 귀국한 뒤 장면 총리에게 이런 말을 전했고 장 총리는 최경록 총장에게 미국측의 뜻을 알려주었다(이낙선 의 '정의의 수난').
  
   매그루더는 1960년 11월18일 최경록 총장 앞으로 편지를 보 내 '현재 군법회의에 넘어가 있는 16인 항명사건을 엄격히 다 루고 그 선동자들을 조종한 장군 두 명을 군에서 제거한다면 미 국방부의 태도는 한국측에 유리하게 바뀌어질 것이다'고 했 다.
  
   '조종한장군 두 명'으로 지목된 것은 박정희와 인사참모부 장 박병권 소장이었다. 박정희 소장의 직속부하는 공교롭게도 1948년 특무과장으로서 숙군수사를 주도했던 김안일 준장이었 다. 작전참모부 차장이던 김 준장은 미군측에서 박정희 작전참 모부장을 의심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불시에 미군이 사무실로 들이닥쳐 한국방어계획 문서를 점검하는 것이 무슨 약점을 잡으려 하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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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問7: 민심은 5.16 쿠데타에 대해서 반대했다.
  
  답: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쿠데타에 반대한 주한미군의 방첩대가 그날 서울시내에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는 시민들의 쿠데타 지지가 60%였다. 필자가 쓴 박정희 전기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관련 부분을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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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 방첩대의 여론조사
  
   박정희의 쿠데타가 성공하느냐, 아니면 매그루더의 미8군과 이한림 의 1군에 의해서 진압되느냐. 한국의 운명이 이처럼 기로에 서 있던 5 월17일 매그루더 사령관은 미 합참의장 렘니처 대장에게 전문을 보낸다.
  
   <군사쿠데타 배후세력은 아직 불분명하지만 그 세력은 증강되고 있 는 듯하다. 미 8군의 방첩대(CIC)가 거리에 나온 구경꾼들을 상대로 조 사해본바 열 명에 네 명꼴로 쿠데타를 지지하고 있었고, 두 명꼴로 지 지는 하지만 시기가 빨랐다고 했으며, 네 명꼴로 반대하고 있었다.
  
   장도영 총장은 이 거사를 미리 알고 있었다. 그는 의기소침한 상태 라 행동을 분석하기가 쉽지 않다. 윤보선 대통령과 백두진참의원 의장 은 진압군을 끌어들이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주요인사들 은 쿠데타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저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쿠데타의 기본 목적은 장면 정부의 제거 또는 내각제를 없애버리자 는 것으로 보인다. 반미 또는 친공 성향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이 번 쿠데타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박정희 장군인데 그는 이승만 정부하에 서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 후에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여 제거하는 데 협력했다. 그 이후로는 반공주의 자란 평판을 얻었다. 쿠데타 세력 안에서 반미주의자나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장교들은 없는 것 같다.
  
   이한림 사령관의 충고에 따라서, 또 1군을 내 지휘권 안에 묶어둠 으로써 모든 중립적인 부대들이 반란군 편으로 넘어가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나는 합헌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지지한다고 방송해왔다. 나는 반란군의 지휘부에 대해서 본대로 돌아가라고 압력을 넣고 있다. 이는 반란행위를 저지하기 위해서이다. 해병대는 돌아갈 가능성이 있으나 6 군단포평단은 원위치시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다. 장도영은 계엄사령 관의 직책을 이용하여 반란군을 서울에서 철수하도록 명령하겠다고 약 속했다.
  
   이한림 1군사령관은 4개 사단을 출동준비 태세로 대기시켜놓고 있 다. 이부대들을 서울로 끌고들어오면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한림은 장면 총리가 명령하면 반란군을 진압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 다. 그는 아마도 내 명령에도 복종할 것이다.
  
   나는 장면 총리가 간밤에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오늘 아침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측근들과도 접촉해보았는데 그들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제발 우리한테 연락을 달라고 부탁 했지만 아무응답도 없다. 만약 장면 총리가 1군을 동원하여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지시한다면 나는 그의 지시를 지지할 것이다. 그가 그런 지 시를 내릴 때까지는 1군을 그런 목적을 위하여 내편으로 묶어둘 작정이 다.나는 언제까지 1군을 우리편으로 묶어둘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장 면이 숨어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그가 정권을 회복할 확률은 낮아 진다.
  
   하나의 가능한 방법은 대통령, 참의원 의장, 국방장관, 육군 참모 총장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내가 이한림에게 명령하여 1군으로써 반 란을 진압하는 것이다. 내가 그런 방식으로 성공한다 해도, 그리하여 정권이 회복된다 하더라도 그 정부를 이끌 지도자가 없는 상태, 그리고 이미 국민들의 지지가 없어진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내 임무는 공산주 의자들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방어하는 것이다. 아울러 한국 내부의 공산세력으로부터 한국을 방어하는 것도 나의 한 임무이다. 그런데 쿠 데타세력은 전공산주의자에 의하여 지도되고 있으나 공산당이 조종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나는 내 권한만을 이용하여 1군을 동원, 쿠데타군 을 진압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을 제기하는 바이다.>.
  
   매그루더의 이 전문은 많은 진실을 전해주고 있다. 서울 시민 다수, 즉 약 60%가 쿠데타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 1군을 붙들어두는 것은 있을지도모를 장면의 출현과 진압명령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란 사실, 장면의 진압지시만 떨어지면 매그루더도 1군에 작전을 명령할 태세가 되어있다는 사실, 그리고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는 그 자신의 권한만으 로 진압을 시작하기엔 너무 무리가 따른다는 판단 등이다. 장면 총리의 은신이 쿠데타의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이 이 전문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한편 혁명군의 두뇌 역할을 맡은 김종필은 미리 준비했던 포고령을 차례로 발표하여 군사정권의 힘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고 있었다. 포고령 제5호는 '금융기관의 인출은 1회에 10만환 이하, 월간 50만환까지로 제 한한다'는 것이었다. 6호는 '물가를 16일 현재선으로 동결하고 매점매 석 행위자는 극형에 처한다'고 했다. 7호는 '외국인의 재산 및 생명을 보호한다'는 것이었고, 8호는 '금융동결령 가운데 군사비는 제외한다' 는 것, 9호는 '통행금지 시간을 완화하여 17일부터는 밤10시부터 다음 날 5시까지로 한다'는 것, 10호는 '혁명완수상 필요하면 법원의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수색하고 군사재판소를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11호 는 검찰과 법원에 대한 지시였다.
  
   <법원과 검찰에 재직하는 공무원은 구태를 일소하고 혁명정신에 입 각하여 새롭고 정기찬 사법운영의 태세를 갖추도록 하라.모든 민형사 사건은 지체없이 정상적인 법체제 아래에서 신속공정히 처리하라. 대법 원장과 법무부 장관은 위의 사항에 관한 실정 기강을 본관에게 제시하 라.>.
  
   혁명군 본부가 된 육본 상황실에서 사법 기능을 통제하고있던 이는 장교 시절 고시준비를 하여 법률에 밝은 이석제 중령이었다. 그는 미국 정보기관이 박정희와 김종필의 사상적 배경을 뒷조사하고 있다는 소식 을 듣게 되었다. 이석제는 '골치아픈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판단을 했 다.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이런 상황에서 폭로되고 이용당하면 쿠데타는 실패할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이석제는 이 미묘한 문 제로 누구하고 상의도 할 수 없었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여기저기로 뛰 어다닌다고 정신이 없었다. 이석제는 자신의 결심으로 해결책을 찾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의심 많은 미국측에 보여줄 결백증명을 생각하다가 '전국에 있는 좌익 사상범들을 체포하자'는 발상에 도달했 다.
   그는 전국의 군수사기관 헌병, 그리고 경찰, 검찰에 비상을 걸었다. '좌익사상범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전달되었다. 전국에 검거선풍이 불었다. 장면 정부 시절에 표면에 등장했던 좌익세력뿐 아니라 혁신정 당 관련자들, 교원노조 관련자들, 보도연맹원들(전향한 공산주의자 모 임), 노조 지도자들 등 약 4천 명이 영장없이 체포되었다. 진짜 좌익과 억울한 사람들이 뒤섞였다. 역사가 크게 굽이치는 상황에서는 개인은 힘없이 격류에 휘말려드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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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필자가 쓴 1998년 월간조선 8월호 [편집장의 편지] 중 관련부분이다.
  
   <저는 지난 해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1년간 공부하는 가운데 진 K.로버츠슨이란 분을 만났습니다. 한국 이름은 서진규인데 미 육군에서 소령으로 전역하여 하버드에서 박사과정 연구를 하고 있는 50세의 교포 여성이었습니다. 이분은 1991년에 석사논문을 쓰기 위해 우리나라에 와서 아주 재미있는 여론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40세 이상의 어른들 4백67명을 상대로 「1961년에 5.16이 났을 때 지지했습니까, 반대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응답자의 46%가 「지지했다」고 응답했고 19%는 「반대했다」고 했으며 나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찬반 의견을 표시한 사람들 중 약 70%가 「혁명을 지지했다」는 뜻입니다. 로버츠슨씨는 연령층을 확대하여 8백 8명을 상대로 「5.16 혁명의 한국 발전에 대한 영향」에 대해서 물었다고 합니다. 응답자의 62%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 5.16혁명은 필요했다」고 답했고 17%는 「방해가 되었다」고 했으며 21%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고 답했습니다. 「박정희의 독재적 통치가 한국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 가」란 질문에 대해서는 69%가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답했고 11%는 「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했으며 20%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로버츠슨씨가 이런 조사를 한 이유는 당시 중학생으로 맞았던 5.16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군사혁명을 환영하고 있었던 것을 뚜렷히 기억하는데 학자들의 논문에는 이런 여론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게 이상하여 그런 조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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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問8: 朴正熙는 군인답게 경제에서도 폐쇄-억압정책을 썼다
  
  답: 정반대이다. 朴正熙는 군인임에도 경제적 자유-개방정책을 썼다. 5.16 혁명 후 일부 민족주의적 장교들은 수입대체와 민족자본 동원에 의한 이른바 自主정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곧 수출주도 정책으로 전환했고 해외에서 외자를 과감하게 받아들여 공장건설에 투자했다. 이를 위해서 한일 국교정상화, 월남파병, 중동진출, 무역확대 등 적극적인 對外 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박정희는 세계화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진정한 글로발리제이션을 추구했다. 한국적 현실을 딛고서. 필자가 쓴 박정희 전기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관련 대목을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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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자유화 정책의 태동
  
   1964-65년은 우리나라가 대외개방쪽으로 국가전략의 방향을 확실히 잡은 시기였다. 한일국교정상화, 월남파병,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및 미국방문, 남미이민, 서독광부 및 간호사 파견과 함께 경제정책면에서도 장기영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의 지휘하에 개방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변동환율제의 실시, 수입자유화, 수출주도 정책, 금리현실화, 적극적인 외자도입, 재정안정정책과 물가안정정책.
  
   시장기능을 활성화하는 이런 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과 달리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일국교정상화와 월남파병에 박정희 정부가 미국의 세계전략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대가로서 박정희는 국내정치의 안정을 위한 미국의 협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정책에 대해서도 많은 협조를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1964년 5월에 입각한 장기영에게 시장자유화 정책을 건의한 사람은 재무부 차관을 지낸 김정렴(뒤에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김씨는 1964년 초 한국일보 사장이던 장기영과 함께 도쿄에 가서 일본으로부터 어업 및 선박 협력 차관을 도입하는 비밀교섭에 참여했다.
  
   한국은행 출신인 두 사람은 자연히 한국 경제의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다. 개발연대의 경제정책에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김정렴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국제금융에 밝은 사람이었다. 그는 미국 뉴욕 연방준비은행에서 연수, 한국은행 뉴욕사무소 개설요원으로 근무한 뒤 클라크대학에서 경제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김씨는 일본통이기도 했다. 일본 오이다고상((대분고상)을 졸업하고 조선은행(한국은행의 전신)에 들어갔다가 구마모도 육군예비사관학교를 나와 히로시마 소재 군관구 사령부에 근무중 원폭투하 때 화상을 입었다.
  
   김정렴은 한국은행 도쿄지점에서 1년간 근무했고 한일회담에도 관계했다. 미-일의 경제사정에 밝은 그는 '한국이 따라야 할 개발모델이 미국식과 일본식 중 어느쪽인가'하는 화두를 품고 다녔다. 그가 내린 결론은 자원이 빈약한 대신 우수한 인력을 가진 일본이 수출입국정책으로 성공한 모델을 한국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수출대체 산업에 안주하지말고 수입대체를 위한 보호적 요소를 자유화해서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수출지향적 공업화에 착수하고 나아가서는 중화학공업,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고도기술산업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요지의 건의서를 만들어 장기영에게 주기도 했다. 장기영은 입각교섭을 받자 김정렴을 불러 주요경제정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요약해서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측과 연차 협의를 할 때마다 수입대체산업에 대한 보호정책의 시정, 즉 환율과 금리의 현실화, 수입의 자유화, 관세율의 인하 등 소위 '시장자유화정책'을 권고하고 있었다. 김정렴은 IMF의 권고사항이 쓴 약이기는 하지만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결국은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메모를 밤새워 작성했다.
  
   환율과 금리를 현실화하면 외국차관과 은행돈을 쓰고 있는 기업은 이자부담이 늘어난다. 수입을 자유화하고 관세를 인하하면 수입규제와 관세장벽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던 기업들이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과보호를 받고 있던 기업들은 체질개선을 하지 않으면 도산하게 된다. 우리나라가 IMF관리체제하에서 겪은 것과 비슷한 고통이다.
  
   이런 고통과 자구노력은 결국은 기업체질을 향상시킬 것이지만 정부는 경제계의 반발과 정치권의 압력에 직면할 것이다. 표에 민감한 여당도 시장자유화에 반대할 공산이 크다. 이 정책은 중간에 그만두면 큰 혼란을 불러 안한 것만 못하게 된다. 따라서 대통령의 확실한 이해와 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김정렴은 메모에서 강조했다.
  
   며칠 뒤 장기영 부총리가 김정렴을 불렀다. 장기영은 '정일권 총리도 있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에게 시장자유화정책을 설명하고 이 정책에 대한 지지를 약속받았다'고 했다. 장부총리는 '대통령께서는 '경제팀은 언제든지 당신이 원하는대로 구성해주겠으니 기필코 시장자유화정책을 성공시켜라'고 말씀하셨다'고 덧붙였다. 장부총리는 한 달 뒤 박충훈 상공부장관과 의논하여 김정렴을 상공차관에 임명했다.
  
   딱딱하게 보이면서도 유연한 발상의 소유자인 박정희는 시장원리에 대한 이해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는 1962년에 쓴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대한의 자유, 최소한의 계획'을 원칙으로 경제계획을 완수하여 '한강변의 기적'을 이룩해놓는 것이 승공의 길이다. 우리는 진정한 경제발전이 민주주의적인 자유와 창발성 가운데서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경제개발을 어디까지나 시장경제의 원리를 바탕으로 깔고 국가에 의한 계획성을 종으로 놓고 추진한다는 소신인 것이다. 박정희에 의한 국가의 개입은 시장원리를 제한하는 데 그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도록 여러 가지 제도와 관행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는 이듬해 나온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는 '민주주의의 신봉을 견지하는 한, 여론의 자유를 막을 수는 없다. 토론의 자유 속에서 혁명의 구심력을 찾아야 하는 혁명이기 때문에 어렵다'고 썼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원칙을 전제로 한 국가주도의 근대화 전략이었다는 점에서 박정희식은 김일성의 전체주의식이나 필리핀과 파키스탄의 기득권층만을 위한 민주주의와는 차원이 달랐다.
  
  
  
  
  問9: 朴正熙 등 5.16 주체 장교들은 무식했다.
  
  답: 정반대이다. 당시 한국에서 조직운용과 국가개조에 가장 높은 열정과 많은 경험을 가진 선진 집단이 장교단이었다. 그들은 학자들보다도, 공무원보다도, 기업인보다도 능력과 의욕이 앞서 있었다. 요사이처럼 시대착오적인 이념으로 무장한 무식-저질 집단이 나라를 좌지우지하지 않았다. 박정희 전기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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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군인 장관들
  
   5월19일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명칭을 바꾸고 사무실을 태평로 옛 국회의사당(민의원) 건물로 옮겼다. 최고회 의 의장은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부의장은 박정 희소장. 이날 오전 윤보선 대통령은 하야를 결심한다. 그는 최고 회의측에 이 결심을 통보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날이 저물도록 아무도 청와대에 찾아오지 않았다.
  
   이날 밤 8시 윤 대통령은 하야 성명서를 등사하여 언론사에 돌림으로써 성명서를 대신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금번 군사혁명이 발생하면서 나는 무엇보다도 귀중한 인명희 생이 없기를 바랐으며 순조롭게 수습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다 행히 하늘은 우리를 도와서 이 나라의 일을 군사혁명위원회의 사 람들이 맡아 보게 하였으며 국민 여러분이 또한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안심하고 이 자리를 물러나겠 습니다. 아무쪼록 군사혁명위원회 사람들은 이 국민을 하루속히 궁핍에서 건져내 주기를 바라며 국민 여러분도 적극 협조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바입니다.>.
  
   장도영은 이 하야성명이 방송으로 보도된 이후에야 이 중대사실을 알았다. 5·16 이후 장교들은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긴 장된 가운데 정신없이 이리 저리로 쫓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대 통령의 하야하겠다는 연락도 이런 가운데 장도영에게 닿지 않고 실종되어버릴 정도였다. 장도영은 하야 성명을 알게 되자 청와대 로 올라가려고 맞은 편 박정희 방에 들어갔다.
  
   '이 시기에 대통령이 사임하면 대내외적으로 큰 충격을 주게 되니 지금 청와대로 같이 올라가서 만류합시다.' '그만둔다면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박정희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장도영은 어이가 없어 말없이 박정희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만 둔다는 것을 저희들이 어떻게 합니까.'.
  
   장도영은 언성을 높였다는 것이다.
  
   '여보, 당신 지금 혁명을 바로 하려는 것이오? 이 시기에 계 엄을 선포한 대통령이 없어지면 어떻게 이 사태를 수습하려는 것 이오?' '지금 대통령이 있으나 없으나 그렇게 큰 문제가 될 것은 없 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가 이 말을 할 때 표정은 '냉소적'이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없소. 빨리 나하고 올라갑시다.'.
  
   박정희는 말없이 장도영을 따라나섰다. 박정희는 이왕 혁명을 하는 마당인데 실권 없는 대통령을 장식물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장도영은 사태 수습에 대통령의 권위를 빌리려 했으니 두사람의 혁명관은 하늘과 땅 사이만큼 컸다. 청와대를 방문한 장도영은 윤 대통령에게 번의를 간청했다.
  
   '각하께서 떠나시면 당장 대외관계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혁 명이 아직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데 유일한 헌법기관 인 대통령께서 물러나시면 수교국과는 물론이고 유엔과의 관계에 서도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 외교관들의 견해입니다.'.
  
   장도영은 밤늦도록 설득을 계속했다. 그러는 사이 박정희는 혼자서 돌아가고 말았다. 장도영의 그런 설득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윤보선은 장도영에게 물었다.
  
   '민정이양은 언제 할 거요.' '아직 완전한 합의는 못보았지만 석달 내지 반년정도 잡고 있 습니다. 각하께서 마음에 드시지 않더라도 민정이양 때까지는 대 통령으로 계시면서 도와주셔야 한다고 믿습니다.'.
  
   윤보선은 장도영의 성의 있는 설득에 마음이 움직였다. 자신 이 물러나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할 사람은 장도영인데 그가 그 책임을 모면하려고 하야를 만류하고 있는 것은 아니란 생각을 했 다. 다음날 오후 2시쯤에는 김용식 외무차관이 대통령을 찾아와 서 국제법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하야를 말렸다.
  
   '각하께서 사임하시고 난 후 당장 북괴군이 남침해와도 우리 는 속수무책입니다. 국가로 승인을 못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유엔 이나 자유우방 국가에 호소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김용식은 대통령이 하야하면 우리 정부가 54개국과 수립해놓 은 국교가 무효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윤보선은 이날 오 후 장도영과 박정희가 배석한 가운데 하야를 번복하는 기자회견 을 했다. 이날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혁명내각을 구성했다.
  
   내각수반 겸 국방부 장관은 장도영(39), 외무부 장관은 김홍 일(57) 예비역 육군중장, 내무장관 한신 육군소장(국방연구원·40), 재무장관 백선진 육군소장(육본 군수참모부장·40), 법무장관 고 원증 육군준장(41·국방부 법제위원장), 문교부 장관 문희석 해 병대령(해병대 작전교육국장·40), 부흥부를 대체한 건설부장관 박기석 육군대령(2군 공병부장·34), 농림부 장관 장경순 육군준 장(육본 교육처장·40), 상공부 장관 정래혁 육군소장(국방연구 원·38), 보사부 장관 장덕승 공군준장(공군의무감·44), 교통부 장관 김광옥 해군대령(해군대학총장·36), 체신부 장관 배덕진 육군준장(1군 통신부장·38), 국무원 사무처장 김병삼 육군준장 (육본 일반참모비서실장·40) , 공보부장 심흥선 육군소장(육본 인사참모부 차장·36).
  
   이들 14명중 50대는 한사람뿐이었다. 40대가 7명, 30대가 6명 이었다. 장면 내각 장관들보다도 20세 가량이 젊어진 것이다. 거 의 한세대의 연령차였다. 이 세대교체는 5·16쿠데타가 혁명으로 진행하기시작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목표달성과 효율성, 그 리고 책임감과 추진력으로 무장한 30, 40대가 60대의 민간정치인 들을 대체하고 국가지도부를 차지한 것이다. 젊어진 국가지도부는 그 젊음 그대로 전광석화같은 개혁 조치들을 연일 터트리기 시작한다.
  
   패기만만한 장교단에 의한 대한민국의 전면적인 접수 와 개조작업이 발진한 것이다. 중앙정부 부처, 국영기업체, 경찰, 지방행정기관의 장과 간부로 나간 장교들은 현대적 조직경영을 경험한 당시 대한민국의 가장 선진된 세력이었다. 당시 한국군 장교단 약 6만명 가운데 약 10%가 도미 유학경험을 가지고 있었 다. 이 비율은 당시 외무부 공무원보다도 높은 수치였다.
  
   미국의 극찬
  
   박정희 정부를 견제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여겼던 주한미국 대사 버거는 젊은 장교들의 국가개조를 지켜보고는 시각을 바꾼다.
   1961년10월 28일 사뮤엘 버거 대사가 국무부에 보고한 전문은 혁명정부에 대한 극찬으로 변해 있었다.
  
   <군사정권이 들어선 지 다섯 달이 되었다. 이 정권은 권위적이고 군 사적인 면에서 대외적인 인상이 다소 나쁜 면이 있긴 하지만 정열적이고 성실하며 상상력과 의지력으로 꽉 차 있다. 이 정권은 일반 국민들로부 터는 적극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고 대중적 지지 기반도 없지만 진정한 의미의 '위로부터의 혁명'을 시작하여 전면적이고 본질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 前 정부하에서 토의되었거나 구상되었던 개혁 프로젝트들 은 행·신용정책,무역, 실업자들을 위한 공공 공사의 확충, 탈세대책, 농업 과 노조 대책, 교육 및 행정부문, 복지(교도소의 개혁, 윤락녀 재활대책, 가족계획사업, 상이군경과 유자녀 지원)등이 실천되고 있다. 많은 개혁 은 긍정적이고 상당수는 미국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들이다.
  
   몇몇 개혁들은 뜻은 좋았지만 너무 급히 서두는 바람에 잘 진행되지 않고 있다. 혁명정부는 그런 잘못을 인정하고 수정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매점매석행위, 뇌물, 정경유착, 밀수, 군사물자 횡류, 깡패, 경찰 과 기자들의 공갈 행위에 대한 군사정부의 단속은 이미 효과를 내고 있 다.공산당의 침투공작에 대한 사찰활동과 반공선전의 질과 양이 모두 증 가 했다. 군인출신 장관들은 행정을 유능하고 효율적으로 지휘함으로써 우리들에게 큰 감명을 주고 있다. 과로로 인하여 쓰러지는 사람들이 많 아 문제이다. 송요찬 내각수반은 근 한 달간 건강이 좋지 않았다. 가장 유능한 장관중의 한 사람인 정래혁 상공부장관은 내각회의중 쓰러졌다가 2주간의 휴식을 끝내고 현업에 복귀했다.
  
   경제기획원 장관은 두 달간 휴식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박정희 의장 도 과로로 인해 피로한 상태이다. 유능한 장관들의 효율성은 그러나 최 고회의와 내각 사이에 기능과 책임의 분명한 구분이 잘 안되어 있어 다 소 약화되고 있다. 몇몇 최고회의 위원들은 내각의 결정을 뒤집고 간섭 하며 군인출신 장관들 가운데는 내각수반을 젖히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 다. 송요찬 내각수반은 최고회의의 기능을 입법활동에 한정시키고 내각 이 행정을 전담하도록 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는 쿠데타에 처음부터 가 담한 사람이 아닌데다가 이정권 때의 경력과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의심 때문에 명령이 잘 먹히지 않고 있다. 대다수 국민들의 태도는 방관자적 이다. 이런 태도는 비관적인 태도와 구별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한국사 람들이, 특히 지배층이 장기간에 걸쳐서 유능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뿌 리깊은 자신감의 결여 때문이다. 이 혁명이 어느 길로 갈 지를 예측하기 는 너무 이르다.
  
   최고회의 안에서 고질적인 분파주의가 생기고 있다는 증거 도있다.지 난 9월에 가장 심각한 사건이 있었다. 즉, 김종필정보부장과 대령급들이 함경도 출신 장성들을 거세하려고 했던 것이다. 박정희 의장은 그런 내 부권력투쟁을 막겠다는 뜻이 확고하여 상황은 안정을 되찾았다. 부정부 패가 상부층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는 조짐도 보인다. 이 문제에 대해 서도 박정희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런 부정사례를 공개하여 무자비하게 처리하겠다는 자세이다. 박의장에게 많은 것들이 달려 있 다. 그는 가장 냉정하고 믿음직하며 안정되어 있는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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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問10: 박정희 시대의 고속 경제 성장은 貧益貧 富益富(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되는 현상)였다.
  
   답: 정반대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이 다 같이 부유해졌다. 1960, 70년대의 한국은 개발도상국들 중 富의 균형분배가 가장 잘 된 나라였다. 세계은행 개발연구센터가 주관한 '경제성장과 소득분배에 대한 국제비교' 연구보고서를 읽어보자.
   1. 1970년도 한국은 하위 40% 계층의 소득이 전체의 18%였다. 이는 선진국의 평균 비율 16%보다도 높다(이 수치는 높을수록 평등하다. 즉 한국이 선진국보다 더 富의 분배가 균형잡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2. 조사대상 66개국중 평등도 순위로 한국은 14위, 개발도상국 42개국 중에는 6위였다.
   3. 하위 40%의 소득 증가율과 국가 전체의 경제성장률을 비교하여 前者가 높으면 평등도가 향상되었고, 後者가 높으면 평등도가 악화되었다는 뜻이 된다. 같으면 경제성장에 따른 富의 분배가 비교적 공정했다는 뜻이다. 1964-70년 사이 한국은 年평균 9.5%의 경제성장률을 보였고 하위 40%는 이 기간 거의 같은 소득 증가율을 보였다. 따라서 서민층이 경제성장의 피해자였다느니 그늘에 있었다는 주장은 선동일 뿐이다. 박정희 시대 한국인들은 다 같이 잘 살게 되었다.
   4. 박정희 통치 기간중 한국은 인간개발지수에서도 크게 향상되었다. 정치적 자유에서도 대부분의 통치기간중 한국은 '부분적 자유'를 누리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는 경제성장과 국가안보에서의 성취가 인권향상에도 긍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이야기이다. 즉, 박정희는 민주주의의 파괴자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물질적 기반을 놓았다는 말이다. 가장 중요한 인권은 인간답게 사는 것이고 인간답게 살려면 굶지 않아야 한다. 박정희는 민족사에서 처음으로 굶주림을 추방했다. 가장 큰 인권신장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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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국민자료/30년간 한국의 인권은 향상 추세
   -프리덤 하우스 조사 자료 분석. 군사정부 시절에도 「부분적으로 자유」로 분류돼-
  
   미국의 세계 인권 감시 관찰 기구인 프리덤 하우스(www.freedomhouse.org)는 매년 세계 192개국의 인권상황을 세 등급으로 나눠 발표한다. 기준은 정치적 자유와 시민적 자유의 합산이다. 평균 점수가 1에서 2.5점이면 「자유」(free), 3점에서 5.5점 사이는 「부분적으로 자유」(partly free), 5.5-7점 사이는 「자유롭지 못함」(not free)로 분류한다.
  
   2003년 보고서에 따르면 34개국이 「자유」국가중에서도 1등급인 1점 국가였다. 대부분이 유럽 국가와 北美 국가들이다. 우루과이(南美), 투바루(남태평양), 마샬군도, 키리바시(남태평양의 영연방 소속 島嶼 국가), 도미니카, 사이프러스, 바베이도스(남미), 호주, 산마리노(이탈리아 반도의 小國)의 이름이 보인다. 자유국가들 중 2등급인 1.5점 국가로는 불가리아, 체코, 그리스, 파나마, 남아프리카, 폴란드, 헝가리 등 28개국이 여기에 포함된다. 일본과 칠레도 이 그룹이다.
  
   한국은 자유국가중 3등급인 2점 국가인데 보츠와나, 크로아티아, 멕시코, 몽골, 루마니아, 사모아, 대만 구야나, 이스라엘, 도미니카 공화국 등 11개국이다. 무장대치상황하에 있는 세 나라, 이스라엘 대만 한국이 같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흥미롭다. 세 나라는 선진국 문턱에 있는 나라란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무장대치상황에선 인권을 제약할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국가」로 분류되고 있다는 점에선 대단한 것이다. 이스라엘과 대만과 한국은 국민국가를 만들어 운영한 햇수로는 50여년에 불과하지만 찬란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민족임이란 점에서 공통성이 있다. 한 국가의 선진성을 좌우하는 3대 요소는 국민국가 운영 경험의 길이, 문명사의 깊이, 지정학적 위치의 組合이다. 한 요소에 결함이 있어도 다른 요소가 월등하면 선진국 수준에 육박할 수가 있다.
  
   자유국가중 4등급은 2.5점 국가이다. 페루, 필리핀, 타일랜드, 인도 등 16개국이다.
  
   북한은 이 조사가 실시되기 시작한 1972년 이후 한번도 「자유롭지 못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자유롭지 못한 국가들도 4등급이 있는데 북한은 최악중의 최악인 7점 국가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북한주민들은 평화시에도 300만 명이 굶어죽을 정도의 절대 빈곤 속에서 살고 있는데다가 가장 억압받는 주민이란 이야기이다.
  
   물질적, 정신적 조건에서 다 최악의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북한동포들이다. 이 지국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 지경으로 만든 金日成 金正日은 최악중의 최악이란 이야기다. 예컨대 북한과 함께 7등급으로 분류된 나라들중 북한처럼 주민들이 굶어죽는 나라는 없다. 버마, 쿠바, 이라크, 사우디 아라비아, 리비아, 수단, 시리아, 투르크메니스탄 중 수단이 10년 전 內戰으로 100만 명이 굶어죽은 적이 있을 뿐이다. 북한은 내전이 아닌데도 평화시에 수백만 명이 한 마디 항의도 없이 조용히 굶어죽은 곳이다.
  
   한국은 1972-73년과 1976-77년 사이 두번 「자유롭지 못한 국가」로 분류되었다. 朴正熙 대통령의 유신통치기였다. 이 두번을 뺀 朴正熙, 全斗煥 통치기간 내내 한국은 「부분적으로 자유로운 국가」로 분류되었다. 한국은 盧泰愚 정권이 들어선 1988년에 처음 「자유로운 국가」로 승격했는데 점수는 정치적 자유에서 2점, 시민적 자유에선 3점이었다. 점수는 작을수록 자유롭다는 이야기이다.
   金泳三 정부가 들어선 1993년부터는 「자유국가」중 한 등급이 올라 2점 국가로 되었다.
  
   위의 통계는 한국의 인권상황이 소위 군사정부 시절에도 말살된 적은 없었으며 부분적 자유는 항상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의 인권상황이 꾸준히 향상되어오다가 1993년도에 2점 국가가 된 이후엔 10년이 지나도록 1.5점 국가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 문민정부, 국민정부란 구호는 좋지만 인권향상의 속도에선 권위정부 시절보다도 오히려 떨어지는 셈이다.
  
   朴正熙 全斗煥 정권을 비난하는 이들은 파시즘이니 전체주의니 스탈린 체제와 같다느니 하는 비교법을 쓴다. 프리덤 하우스의 통계는 이런 비난이 과장된 것이며 「권위적 정부」라고 표현하는 정도가 맞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적 자유 이외에 물질적 자유, 즉 굶주리지 않을 자유를 소위 군사정부가 국민들에게 준 점까지 감안한다면 박정희, 전두환 정부의 인권 점수는 더 올라갈 것이다.
  
  
  
  
[ 2005-11-16, 17:0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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