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호 時論-공짜의 길은 노예의 길
나라가 성공하는 방정식이나 개인이 성공하는 방정식이나 똑같다. 일은 '思考X열의X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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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柄淏가 바라보는 오늘의 한국 經濟
  (월간조선 2005년12월호)
  
  공짜를 좋아하는 나라는 「노예의 길」을 가게 된다.
  
  
  
  孔柄淏(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
  
  
  프랑스의 실패
  
  『프랑스 파리의 최근 폭동이 주는 최대의 교훈은 더 많은 직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실패」를 커버스토리로 다룬 2005년 11월12일자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소요의 근본적인 원인은 인종적인 문제가 아니라 직업의 부족에서 연유하는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週 35시간 근무」, 「높은 최저임금」 그리고 「엄격한 고용과 해고」 제도와 같은 규제에 의해 묶인 프랑스의 노동시장 때문이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렇다면 프랑스의 지도자들이 이런 문제를 잘 알지 못하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들은 말의 성찬 이외에 지난 수십 년 동안 실질적으로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떤 근본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미 노동시장에 진입한 사람들은 각종 혜택을 누리고 적절한 임금을 보장받을 수 있지만, 새로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젊은이들은 좀처럼 괜찮은 직업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나게 되고, 그런 상황이 이번 소요를 불러일으킨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번의 소요와 같은 사태는 이미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2004년에 발간된 「인간적인 길」에서 프랑스의 지성 자크 아탈리는 자신의 조국을 두고 폭발위기에 접어들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선진국 가운데 스위스와 프랑스가 가장 낮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프랑스 기술자 5만 명 세금 피해 미국行
  
  지난 30년 사이에 실업자 수는 열 배로 증가했고, 막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한 젊은이와 55세 이상 인구가 타격을 가장 심하게 받았다. 예를 들어, 학위나 자격증이 없는 젊은이들 가운데 3분의 1이 장기실업 상태에 빠져 있고, 지난 30년 동안 프랑스가 잃어버린 일자리 수는 150만 개나 된다. 기업의 해외 이전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등장하면서 일자리가 줄어들고, 새로 생겨나는 일자리는 없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과중한 조세부담 때문에 프랑스를 떠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최근 12년 사이에 5만 명의 프랑스人 기술자와 연구원이 미국으로 출국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매년 10개 기업 중 하나가 사라지면서 창업률은 이탈리아 등 다른 유럽 나라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프랑스는 과연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까? 어디에서 그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이것은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프랑스의 회생은 시대정신의 복원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의타심을 조장하고 과중한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재정 자금에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한,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제대로 된 제도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프랑스의 어려움은 날이 갈수록 심해질 것이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거의 없다. 결단을 내리고 행동을 통해서 직접 나서지 않으면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프랑스가 처한 어려움에 대한 탈출구는 1990년대 초반 인도에서 일어난 일을 살펴보면 代案(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도가 딱 2주 분량의 수입 대금을 치를 돈만 가진 채 외환위기에 빠졌을 때, 1991년 6월 새로 취임하는 라오 총리는 총리 취임 선서를 마친 뒤 새로운 재무부 장관으로 현재 인도 총리를 맡고 있는 만모한 싱氏를 선택했다.
  
  싱이 가졌던 확고한 신념은 「아이디어의 변화」이다. 그는 임명 이후에 『인도는 많은 면에서 아이디어를 새롭게 가져야 한다. 과거의 낡은 사고방식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아이디어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라는 믿음을 피력했다.
  
  
  인생 성공의 방정식
  
  세상사는 사고의 산물이다. 교세라의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이 자신의 치열했던 평생을 되돌아보며 쓴 책 중 「일과 인생의 성공에는 한 가지의 성공 방정식이 존재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다시 말하면 「일(인생)의 성공 = 사고×열의×노력」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는 개인의 성공이 건강한 사고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것은 개인·조직 그리고 공동체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건강한 사고 없이는 결국 가난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사람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너무나 다르고 그런 것들이 결코 공짜가 아님을 알아차리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생각에 대한 교육이 그들의 미래에 직접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세상은 사람들이 가진 생각대로 만들어 가게 된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나 인도 역시 지도자의 생각이건 대중들의 생각이건 그들이 선택한 생각의 결과물일 뿐이다.
  
  그래서 재무장관을 지냈던 싱氏는 인도의 회생을 위해서는 근본적인 「아이디어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확신하고 이에 걸맞은 제도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제대로 된 사회를 원한다면 「사상 전쟁의 수행」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사회의 뜻있는 구성원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어떤 사회든지 간에 매력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국가 건설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욱 많은 개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향유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대신에 평등한 사회의 구현을 위해 거대정부의 길로 달려가는 것은 예외 없이 국가 파산 내지 빈곤의 만연으로 끝났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국가개입주의가 유행하던 시절에 영국과 미국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생각해 보자. 자유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는 한 권의 책을 집필하게 된다. 이 책은 영국과 미국의 知的(지적) 풍토가 진보를 앞세운 국가개입주의에 의해 압도되고 있을 때,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이에크의 가르침
  
  1944년에 출간된 하이에크 교수의「노예의 길」이 미국에서 시카고대학版(판)이 나온 이후 그 요약본이 「리더스다이제스트」에 실렸고, 이어 100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인기를 끄는 소설이 아니라 사회과학서가 100만 부 이상 판매된 것은 대단한 일이다. 하이에크 교수가 거둔 성과는 전무후무할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정부개입주의가 지배적인 분위기 속에서 하이에크의 저서는 이후 자유주의(미국적 의미의 보수주의)의 확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다. 특히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은 잠자고 있던 몇몇 자유주의자들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결과를 낳게 된다. 역사는 이처럼 의도하지 않은 사건들에 의해서 진행되기도 한다.
  
  「노예의 길」에서 감명을 받은 인물들 가운데 자유주의의 확산에 큰 기여를 한 인물들은 미국의 헤럴드 루노, 레너드 리드, F.A.하퍼, 그리고 영국의 앤서니 피셔를 들 수 있다.
  
  
  하이에크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
  
  헤럴드 루노는 「노예의 길」을 읽은 뒤에 철저한 고전적 자유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볼커 기금의 이사장으로서 자유주의의 확산을 위해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노는 첫째, 볼커 기금을 통해 그 당시 미국內 대학에서 자리를 얻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하이에크·루드비히 폰 미제스·아론 디렉터 등 세계적 학자들을 지원했다. 둘째, 그는 소수의 자유주의 학자들이 만나서 토론하고 생각들을 나눌 수 있도록 지원했다. 셋째, 자유주의에 대한 교육과 계몽사업의 추진에 큰 기여를 했는데, 1961년에 설립한 인문과학연구소(IHS)가 그 예이다. 넷째, 자유주의에 입각한 서적들을 출판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끝으로 「개인주의자들의 대학 간 협회(ISI)」, 「경제교육재단(FEE)」, 「이어하트 & 레임재단」 등과 같은 자유주의 싱크탱크들의 설립을 지원했다.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이 구원해 낸 또 한 명의 인물인 레너드 리드는 1939년부터 미국에서 가장 큰 로스앤젤레스 상공회의소의 회장을 지냈다. 자유주의의 입장을 지지하게 된 리더가 미국 사회에 남긴 최고의 업적은 1946년에 자유주의를 체계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경제교육재단을 설립한 것이었다.
  
  리드는 37년간 경제교육재단의 이사장으로 일하면서 자유주의를 확산시키기 위한 교육의 길을 개척했다. 그는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고, 경제교육재단은 미국이 자유로운 사회가 될 수 있는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F. A. 하퍼 역시 루노와 리드처럼 「노예의 길」을 읽고 자신의 인생항로를 바꾼 사람 중 하나다. 「노예의 길」을 만날 당시에 그는 코넬大의 경제학과 교수였다. 그는 즉시 이 책을 이용해 강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자금지원을 받고 있던 대학에서는 이 강의를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그 사건 이후 하퍼는 레너드 리드와 합류해 경제교육재단의 연구원이 되었으며, 1950년대 중반에는 볼커 기금의 선임연구원이 되었다. 1961년에는 자리를 옮겨 인문과학연구소를 설립했다. 인문과학연구소는 1970년대 말부터 우수한 人材를 스카우트해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학자나 지성인으로 양성하는 일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
  
  
  사회 진로를 바꾸는 것은 사상의 변화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지성적 사업가는 앤서니 피셔이다. 「노예의 길」을 읽고 감명을 받은 그는 하이에크를 찾아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정치에 입문해야 할까요?』 라고 그가 물었다.
  
  『아니오』
  
  하이에크는 대답했다.
  
  『사회의 진로는 오직 사상의 변화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먼저 당신은 합리적인 주장으로 지식인들, 교사와 작가들을 설득하십시오. 이러한 사상이 그들의 영향으로 보편화되면 정치가들은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피셔는 1955년 「런던경제문제연구소(IEA)」를 설립해 자유경제와 지식인들을 위한 활동무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영국에서 자유시장을 신봉하는 마지막 두 명의 경제학자」라고 불리던 랠프 해리스와 아서 샐든을 초빙했다. 그러고 나서 런던경제문제연구소는 일련의 독립적인 연구들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이 책들은 대부분 학자들에 의해 저술되었지만,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쓰였다. 훗날 대처 총리에 의한 영국병을 치유하기 위한 개혁의 산실이 바로 IEA이었다.
  
  대서양을 건너 로널드 美 레이건 대통령에 의한 보수주의 혁명 역시 그냥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아이디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헌신했던 일군의 선각자들이 있었다.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이 출범할 당시인 1973년에는 닉슨 행정부가 집권하고 있었다. 공화당 정권이 집권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닉슨 행정부의 많은 아이디어는 진보주의 노선의 연구소들에 의해서 공급되고 있었다.
  
  「아이디어 전쟁」 면에서 보수주의자들은 거의 수세에 몰려 있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보수주의 노선에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한 미국 기업연구소는 여러 가지 문제와 구조적인 한계 때문에 타이밍이 중시되는 행정부나 의회의 정책 보좌에 큰 역할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때 이런 틈새시장을 정확하게 간파한 사람이 현재 헤리티지의 회장인 에드윈 J. 퓨러너이다. 그는 아이디어 시장에서 기업가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한 인물이다. 의회 보좌관 출신인 그가 의회 생활을 하면서 목격한 것은 보수주의자들은 아이디어 전쟁에서 거의 완패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몇몇 연구소들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대부분 책 출간 등과 같은 장기를 요하는 프로젝트에 주력함으로써 정책 입안가들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변화무쌍한 정책 아이디어를 수시로 공급하면서 정책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싱크탱크들의 출현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헤리티지 재단의 오늘은 바로 퓨러너처럼 철저한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된 사람이 아이디어 시장에서 거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헤리티지 재단의 등장
  
  헤리티지의 등장과 성장은 「지성적 기업가」와 「현실세계의 기업가」가 힘을 모아서 만든 한 편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헤리티지의 창립에 기본 아이디어를 가졌던 퓨러너와 위릭이라는 두 젊은이는, 진보주의자들은 정교하게 조직된 정책결정기구를 갖고 있는 데 반해 보수주의자들은 그것에 필적할 만한 어떤 것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데 문제의식을 가졌다.
  
  이때 두 젊은이들의 활동을 후원하기 위해 등장한 중요한 인물이 쿠어스 맥주의 창립자인 조셉 쿠어스였다. 쿠어스는 버지니아 리치먼드의 저명한 검사였던 루이스 파월이 쓴 5000字 가량의 강연초록을 읽고, 국가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는 기업가들과 그들이 만든 단체들이 미국 정부의 잘못된 경제정책에 대해서 강력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조셉 쿠어스는 자신이 세운 회사가 정치적으로 더욱 깊게 간여하기로 결정한 이후 「어떤 조직을 지원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당면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쿠어스의 눈에 30代 초반의 두 젊은이가 눈에 띈 것이다.
  
  퓨러너와 위릭을 중심으로 한 창립자들은 1973년 조셉 쿠어스가 기증한 25만 달러의 기금으로 헤리티지 재단을 설립했다. 쿠어스에 이어서 존 스케이프 재단, 노블 재단, 존 M. 올린 재단 등이 헤리티지를 후원했다. 이렇게 해서 퓨러너가 헤리티지 재단의 소장이 된 1977년경에는 연간 예산이 200만 달러를 넘어섰고, 연간 30%의 신장률을 보여 1983년에는 1000만 달러, 1989년에는 1800만 달러에 달했다. 1995년에는 최고 수준인 2900만 달러에 달했고, 2000년에는 2798만2372달러의 수입을 기록했다.
  
  연구기관의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는 수입과 지출을 보면 거시적인 윤곽을 확인할 수 있다. 헤리티지 재단의 수입은 개인 기부가 54%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헤리티지는 설립 당시부터 카네기나 포드 재단 등과 같이 어느 특정 재력가나 기업으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견지해 오고 있다.
  
  
  아이디어전쟁의 승자가 돼야
  
  이념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튼튼한 시민사회라는 배경이 있지만, 약 20만 명을 상회하는 개인 기부자를 확보했다는 점과 이들이 거의 매년 기부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 헤리티지의 숨은 힘이라고 할 수 있다. 2000년, 그들의 슬로건은 헤리티지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자유와 기회, 번영과 시민사회가 꽃을 피우는 미국을 건설하자」
  
  장기적으로 한국 사회에 번영의 토대를 구축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아이디어 전쟁」에 주목해야 한다. 아이디어 전쟁에 승리하지 못하면 게임에서 이길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좋은 시절을 허송하고 말았다.
  
  일단 아이디어의 헤게모니가 반대 진영으로 넘어가고 나면 그것을 쉽사리 되찾기 어렵다. 한 시대를 지배하는 아이디어 역시 강력한 관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이제 힘겨운 아이디어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一喜一悲(일희일비)하지 말 것이며, 자만해서도 안 될 것이다. 과거에 그들이 허송했던 세월에 대해 뼈저린 자기 반성과 미래를 향한 체계적인 노력이 있지 않으면, 그들이 쉽사리 아이디어 전쟁에서 승리를 낙관할 수는 없을 것이다.●
  
  
  
  
  
[ 2005-12-19, 19:5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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