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범모-"지도자는 교육자다"
사람다운 사람을 길러야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다. 구성원의 행동양식에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지도자는 관리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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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는 회사든 병원이든 나라든 그 단체의 支柱(지주)다. 지도자에게 꿈이 없으면 그 단체에도 꿈은 없어진다. 지도자에게 비전이 있으면 집단은 활력을 얻는다.
 
 지도자가 썩으면 성원들도 썩기 쉽고, 지도자가 옹졸하고 편협하면 성원들도 그렇게 되기 쉽다. 지도자가 깨끗하고 도량이 넓으면 성원들도 그렇게 된다. 자고로 모든 단체의 위기는 대부분 지도자의 위기고, 나라가 망하는 것은 그 나라의 지도층 때문이다.
 
[특별기고] 國力과 國格(월간조선)
  
  
  鄭 範 謨
  1925년 서울 출생. 서울大 사범대 졸업. 미국 시카고大 철학박사. 행동과학연구소 회장·서울大 사범대 학장·충북大 총장·한림大 대학원장·한림大 총장 등 역임. 관훈클럽 한국 언론 2000년 위원회 위원장.
  
  鄭範謨 한림大 석좌교수
  
  오늘의 太平聖代는 환영일 수도
  
  
   몇 년 전 약 3주 동안 중국, 몽골, 만주를 구경간 적이 있다. 광활한 국토에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도 인상적이었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인상을 받은 것은 몽골과 만주의 風情(풍정)이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몽골은 한때 유라시아 대륙을 주름잡던 칭기즈칸의 후예다. 그 몽골이 지금 인구는 겨우 250만 명 남짓, 사람들 삶의 모습은 한국의 1930년대보다도 더 초라했다. 어쩌다 그 큰 나라가 이렇게까지 몰락했을까?
  
   다시 만주 심양에서 淸(청)나라 「최후의 황제」의 궁저를 구경했다. 궁저 이 구석 저 구석에 서려 있는 亡國(망국)의 통한을 느낄 수 있었다. 淸 또한 300년간 東北亞를 지배했던 만주족의 나라, 그러나 이젠 만주족도 만주語도 실질적으로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어쩌다 이렇게 철저하게 망했을까?
  
   귀국 길 東北亞의 하늘에서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문득 머리 속에 이른바 東北亞의 지정학적 지도가 떠오르면서, 「한국인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이렇게 망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자 일종의 전율마저 느꼈다. 이미 일제 강점으로 한 번 철저히 망하지 않았던가? 그런 亡國의 통한이 절대 되풀이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아마도 4000년 한국사를 통독하면서 배워야 할 그리고 어쩌면 몽매에도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쓰라린 교훈은 한국사는 모진 수난의 역사라는 사실과 「정신 차리지 않으면」 그런 수난이 다시 되풀이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古朝鮮(고조선)은 고대국가로서는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도덕에 걸쳐 상당한 국력으로 어엿한 체모를 갖춘 나라였다고 역사가들은 증언한다. 그 고조선이 漢(한)나라의 집요한 침략으로 멸망한 이후, 한민족의 나라들은 수없이 외침에 시달려 왔고, 몇 번을 패하고 망하고, 몇 번인가 全국토가 철저하게 유린당했으며, 치욕의 事大(사대)도 강요당했다. 元나라는 고려 침공 때 어느 한 해에만도 20만 명의 남녀를 노비로 끌어갔고, 임진왜란은 거의 全국토를 초토화시켰다.
  
   일제 강점기엔 우리의 이름, 말, 얼마저도 빼앗길 뻔했다. 36년 후에 겨우 되찾았으나, 나라는 지금도 두 동강이 난 긴장상태에 있다. 실로 살아남은 것이 기적일 정도로 모진 수난의 역사다.
  
   지난 50년 간 한국의 여러 사회사정, 특히 경제사정은 몰라보게 달라졌고 난리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수난의 역사를 배경으로 생각하면, 지금 한국이 누리고 있는 50여 년의 「소강」과 「풍요」가 일장의 환영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지나친 기우만은 아닐 것 같다.
  
   또 다시 어떤 수난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우리에겐 정치, 경제, 문화, 道義(도의)의 각 영역에 걸쳐 國力과 國格을 갖추는 일이 절실하다.
  
   한 나라의 흥망에는 나라 안팎의 요인들이 다 작용한다. 밖으로 강대국들, 그것도 자주 야욕을 품는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한반도는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수난의 위험이 드리워져 있는 판국이다. 어쩌면 한반도는, 잠시 평온한 때건 아니건, 언제나 「태평세대」라는 환상이 허용되지 않는 판국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많은 역사가들이 증언하듯이, 모든 나라의 쇠망에 外勢(외세)보다 더 결정적인 원인은 「內勢(내세)」, 즉 나라 안 제반 국력의 허약함과 흐트러짐이다. 특히 치명적인 원인은 내홍과 당쟁, 나약과 사치, 부패와 퇴폐 등 내부의 정신적인 요인이다. 강성하게 버티던 고조선도 고구려도 결국 내분으로 망했고, 조선왕조도 당쟁과 부패와 쇄국 때문에 망했다. 한반도의 항시적인 과제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더, 언제나 그 「外勢」를 살피면서, 능히 그 「불리한」 지정학적 형국을 극복할 수 있는 「內勢」, 국력을 배양하는 일일 것이다. 수난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國力과 國格:全방위적 개념
  
   옛날에도 세계화되었다는 현대에도 그리고 아마도 미래에도 사람들의 생존과 번영의 기본단위는 국가다. 옛날에도 지금도 나라가 가난하면 사람들은 가난을 면하기 어렵고, 나라가 허약하면 다같이 난리를 당해야 한다. 국가가 없거나 구차하면 밖에서도 사람대접을 못 받는다.
  
   전통적으로는 국력이란 「富國强兵(부국강병)」을 의미했다. 은연중 「힘의 정치」가 지배하고 있는 현대에도 아직 다분히 그렇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국력의 개념은 훨씬 넓혀져야 한다. 이젠 어떤 나라를 그 부국강병만으로 국력이나 國格(국격)이 높은 나라로 보지는 않는다. 그것은 돈 있고 힘 세다고 人格(인격)이 높은 사람이라고 보지 않는 것과 같다. 뿐만 아니라, 좁은 視野의 부국강병책은 부국강병 자체를 이루지 못 한다는 것이 현대의 논리다. 예컨대 과학의 힘 없이, 정치의 뒷받침 없이, 교육의 부축 없이 또는 건전한 사회도의의 바탕 없이는 부국강병에 한도가 생긴다.
  
   이제 국력의 개념은 국가생활의 여러 영역에 걸친 全方位的(전방위적)인 개념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즉 정치, 행정·외교·국방 역량을 포함하는 통치력, 생산·무역·관리·기술혁신 역량을 포함하는 경제력, 학문·문학·예술·교육 역량을 포함하는 문화력, 개인윤리·직업윤리·사회윤리·신뢰·준법 역량을 포함하는 道義力 등은 다 필수적인 국력이다. 이런 역량들이 합해서 「나라다운 나라의 격조」, 國格을 이룬다.
  
   그리고 각 역량들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정치력이 엉망이면 경제도 제동을 받는다. 경제력이 미약하면 과학·예술도 빈약할 수밖에 없고, 반면 과학기술이 부진하면 逆으로 경제발전에 한계가 생긴다.
  
   사회의 도덕, 준법 상호신뢰가 흐트러지면 정치, 경제, 문화활동 모두가 방향을 잃는다. 아마도 모든 국력의 가장 기강적인 근본은 그 나라의 道義力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문제 하나는 우리 자신이 우리의 여러 국력, 국격의 수준을 얼마나 높게 평가하고 있느냐다. 지나친 국수주의에 빠지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자체평가가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솔직히 자인할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의 國力, 國格이 1900년, 1930년, 1950년의 경우보다 훨씬 나아진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도 명백하다. 경제력은 한때 도약에 힘입어,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그런 대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나라 안팎 사정은 잊고 이전투구로 소일하는 정치, 「협상」마다 패배하는 외교력, 주도권이 제한된 군사력, 「두뇌」가 밖으로 유출하는 과학력, 「교육 붕괴」와 「교육 엑소더스」를 겪고 있는 교육력, 대통령, 그 아들, 장관, 차관, 도지사, 시장 할 것 없이 잦은 부패로 고랑을 차는 사회道義의 현실에서 國格이 높게 자체평가될 수가 없다.
  
   밖에서도 세계은행은 2001년 175개국을 비교하면서, 한국의 「법 집행 공정성」은 52위, 「정치안정」은 50위, 「규제완화」는 62위, 「정부효율」은 49위, 「언론자유」는 39위, 「부패방지」는 48위라고 평가했다.
  
   얼마 전 우리는 월드컵 4강에 이르는 잇닿은 승전고에 전국이 열광했고 오랜만에 국가적 「자존심」을 느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 열광은 하도 자멸감을 강요하는 여러 현상 속에서의 반작용이라고 볼 수도 있고, 더구나 우리가 브라질이 월드컵 일등이라고 일등국가라고 보지는 않는 것과 같이, 명백히 월드컵 4강이 그 자체만으로 국력·국격의 4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그것은 정치, 경제, 문화, 도의력의 각 영역에서도 4강을 이루어야 한다는 다짐의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多가치 사회
  
   國力이란 결국 한 나라의 여러 활동영역에서 제각기 배양되고 발휘되는 다양한 역량의 총체를 말한다. 따라서 정치인, 외교가, 군인, 기업인, 근로자, 기술자, 학자, 예술인, 교육자 등이 제각기 높은 전문역량을 발휘할 때, 간호사, 축구인, 디자이너, 요리사, 사무원이 제각기의 일에 정진하면서 월등한, 기왕이면 남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하제일」의, 노하우와 비결과 도덕성을 발휘할 때, 그 역량과 성취의 총량이 國力을 형성한다.
  
   각 영역에서 전문역량을 배양하고 발휘하는 활동은 우선 일차적으로 각 영역 당사자들의 책임이다. 그러나 사회의 어떤 제도적 조건과 정신풍토적 조건에 따라 그런 활동이 활발하게 촉진되기도 하고, 아니면 위축되기도 한다. 국력 신장을 바란다면 우리는 그런 풍토부터 조성할 수 있어야 한다.
  
   ▲多가치 풍토:多가치 사회란 사회에 필요하고 바람직한 모든 활동이 사람들에 의해서 다 소중히 여겨지고, 각기 응당한 사회적 인정과 대우를 받으며, 각기의 秀越(수월)한 능력과 성취에는 응당한 사회적 可視性(가시성)과 칭송이 따르는 사회를 말한다. 경찰관도 陶工(도공)도 초밥 요리사도 전기수선공도 그 수월한 노하우와 「비결」에 따른 성취가 널리 알려지고 칭송받을 때 그 노하우와 비결은 축적되어가고 그만큼 국력은 고양된다.
  
   이 점에서 다른 여러 가치를 압도할 정도로 유난히 심한 권력가치(출세) 지향의 풍토는 특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일에서 사람들이 벼슬을 향한 욕심에 집착하는 정도에 따라 그들의 「본업」은 소홀히 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권력가치 지향은 어느 사회에서나 어느 정도는 다 있지만, 한국사회는 그것이 좀 심하다. 그것이 「입신양명」을 강조한 孝經(효경) 때문이건, 또는 「富貴壽多男(부귀수다남)」을 갈구하는 무교적인 祈福思想(기복사상) 때문이건, 아니면 벼슬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었던」 옛 왕조시대의 「유산」이건 간에, 이젠 권력가치지향은 과학, 예술, 人情(인정), 도의 등 다른 여러 문화적 가치들과 병행하고 조화되고 균형이 맞추어져야 한다.
  
  
   「위해서」가 아닌 「산이 거기 있기에」
  
   ▲內在的 가치의 풍토:多가치의 풍토는 그 여러 활동들이 제각기 그 자체의 보람, 즉 그 활동의 內在的(내재적) 가치 때문에 추구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內在가치란 예컨대 등산은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등산이 재미있어서, 그저 「산이 거기 있기에」 등산하는 것, 학문은 치부나 명예나 출세를 「위해서」 또는 국가발전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자체의 보람과 뜻, 재미와 묘미 때문에 그 일에 매료되고 정진하는 것을 뜻한다.
  
   多가치 풍토란 여러 활동이 제각기 그 자체로서 독특한 가치 내지 목적을 지니며, 다른 것의 手段(수단)가치 또는 다른 것과의 交換(교환)가치만 지니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이에 비해서 편향된 권력지향, 금전지향 풍토에서는 출제가치와 치부가치가 목적이고 학문, 기술, 예술, 도의 등 다른 여러 문화적 가치들은 수단적, 종속적 가치의 위치로 전락되어 있는 셈이다. 그 결과는, 다양한 國力신장의 동기를 앗아갈 뿐만 아니라, 스스로 표방하는 유교윤리마저 저버리면서 권력쟁탈에 혈안이 되었던 조선조 말기와 별 다름없는 파벌과 파쟁, 수뢰와 부정, 부패와 범죄의 온상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자율적 풍토:다양한 활동영역에서 제각기 그 역량과 업적을 발휘하게 하려면, 그 각 영역에 적정한 자발·자율의 풍토가 필수적이다.
  
   때로는 정치사회적 이유 때문에 다른 영역에서는 자유·자율이 심하게 제한되어 있을망정, 자기의 전문분야에서는 넓게 자율이 허용되어야 한다. 물론 모든 일에서 미숙한 「미전문인」은 유능한 전문인에게서 배워야 하고, 전문인도 때로 남에게서 충고도 받고 계속 배우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자발·자율적으로 이루어져야 그 학습효과가 있다.
  
   모든 전문영역이 제각기 역량을 提高하려면 제각기 다 자율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말은 곧 사회 전반에 보편적으로 자유·자율의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이런 관점에서 1960년대의 빈곤탈출을 위한 개발독재가 낳은, 그리고 지금도 각 영역에 짙게 작용하고 있는 중앙집권적 관료권위주의는 각 영역의 국력배양의 견지에서도 심각하게 再考되고 止揚되어야 한다. 그것이 혹 低개발기의 경제 비약을 위해서는 혹 발전의 촉진제가 되었을지는 몰라도 선진국 문턱을 자랑하는 지금엔 도리어 큰 저해요인일 뿐이다.
  
  
   全人敎育
  
   國力은 다양한 활동영역 역량의 총합이다. 그리고 그 역량은 근본적으로 각각의 활동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역량」이다. 따라서 국력신장은 지금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그 역량이 多가치 풍토 속에서 고도로 발휘되게 하는 일과 또 한편 내일 그 일들을 담당할 사람들의 역량을 함양하는 일을 포함해야 한다.
  
   後者는 바로 한 나라의 「교육」을 뜻한다. 그리고 그 교육은 학교교육만 아니라, 가정, 직장, 매스미디어, 각계각층이 펼쳐 놓는 모든 교육적 영향을 다 포함한 넓은 뜻의 교육을 의미한다.
  
   본래 교육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사람다운 사람」을 기르는 일이고, 또 하나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일이다. 물론 둘은 밀접하게 상호관련되어 있다. 사람들이 사람다워야 그들의 나라가 나라다울 수가 있고, 나라가 나라다워야 그 속의 사람들이 사람다울 수 있다. 그리고 교육 실제에서 둘을 나누어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러나 거의 모든 나라에서 나라의 돈을 들여 공공교육이 실시되고 있는 원초적인 이유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고 영위할 수 있는 국민의 역량, 국력을 기르려는 데 있다.
  
   이제 우리에게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도 교육은 全人的이라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바로 국력의 필요는 「전방위적」이고, 국가경영엔 갖가지 영역에 다양한 역량들이 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도덕은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기본 특성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입시 등 기타 어떤 연유로든 全人교육체제가 부실한 정도에 따라 그 교육은 도리어 국력 쇠퇴에 이바지하는 교육이 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 점에 옛 科擧(과거)의 유습 때문에 오늘날도 지나치게 교육에서 「글」을 중시하고 인문을 중시하며, 교육을 출세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풍조는 심각하게 반성되어야 한다. 본래 옛 중국 周(주)나라에선 六藝(육예)가 교양이었다. 즉 禮樂射御書數(예악사어서수), 예법, 음악, 활쏘기, 말타기, 쓰기, 셈하기의 여섯이었다.
  
   과거제도는 漢나라 高祖(고조)가 전국통일 후 충성스러운 관료를 뽑기 위해 실시한 제도였고, 그 시험내용은 「육예」 중에서 「禮」 하나만을 강조한 유교였다. 그 결과 고대에는 천문, 지리, 농사, 화약, 나침반, 종이, 바퀴 그리고 「제자백가」 등 발랄한 문화창조자였던 중국이 이때부터 아편전쟁으로 쇠퇴할 때까지 긴 세월 세계사에서 문화 창조자이기를 멈췄다.
  
   그런 과거제도를 고려와 조선은 그대로 이어받았고, 그 결과 나라의 지도층은 知·情·意·體를 겸비한 전인적 人材가 아니라 「글」만 잘하는 「시험선수」로 구성되었던 셈이다. 그런 「시험선수」가 반드시 정서의 선수, 도덕의 선수, 사명감과 책임감과 통찰의 선수는 아니었다는 점에서 國運 쇠망의 큰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잘못은 유교가 아니다. 유교를 교양의 전부로 생각한 것이 잘못이다.
  
  
   자유민주주의에는 투철한 이념의식이 필요하다
  
   우리가 바라는 국가는, 헌법에서도 명백히 천명했듯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그렇게 헌법에 國是로 밝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긴 인류역사에서 자유민주주의가 그래도 가장 그 속에서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나라」라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국력·國格을 배양함에 있어서 동시에 자유민주주 국가로서의 국력·國格을 배양할 수 있어야 한다.
  
   가끔 한국 사회는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고 「이념이 不在하다」는 말을 듣는다. 어떤 관점에서는 그런 말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는 다음에서 분석할 것처럼, 거기에서 여러 이념과 목적의 파생이 가능한 뚜렷한 이념체제인 것이다. 끈질긴 이념부재론은 혹 논자 자신의 자유민주주의 신념의 부족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좀더 투철한 신념이 필요하다.
  
   근래 잦은 통일의 염원과 논의에서 커다란 허점이 엿보인다. 그것은 「통일해야 한다!」는 당위론과 「이렇게 통일할 수 있다」는 방법론은 요란하면서도 「어떤 이념체제로 통일하느냐」는 이념론은 거의 금기사항인 것처럼 논외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통일이 아무리 그립고 급하다 해도 우리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그 속에서 사람이 사람답기 힘든, 어떤 독재국가로의 통일은 바라지 않는다.
  
   ▲자유와 민주:우리가 흔히 자유와 민주를 「자유민주주의」라고 붙여 쓰고 짧게는 한마디로 「민주주의」라고 하면서, 자유를 그저 민주주의의 수식사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는 별개의 두 개념인 자유와 민주주의의 합성어이고, 좀더 근본적인 것은 자유의 개념이며, 민주주의는 자유의 한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본래 語源(어원)대로는 민주주의란 폭력에 의해서가 아닌, 국민의 일 인·일 투표 원칙에 의한 정권 창출, 權力獲得(권력획득)의 제도를 의미한다. 국민 개개인의 정권 선택의 자유를 보장함이다. 이에 비해서, 자유는 개개인이 어떤 강제도 당함이 없이 자율적으로 각기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상황을 말하며, 정부가 최대한 그런 자율을 보장하면서 통치하는 權力行使(권력행사)의 원칙을 의미한다.
  
  
   민주적으로 탄생하는 정권의 독재
  
   ▲非자유민주주의:이렇게 둘은 별개 개념이기 때문에 이른바 「非자유·민주주의」의 출현이 가능해진다. 즉 정권은 일 인·일 투표의 보통선거에 의해서 「민주적」으로 획득했지만, 일단 집권 후 그 권력행사는 심하게 국민의 자율을 제한하고 무자비하게 인권탄압을 일삼는 정권이 출현하는 경우다. 근래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유고의 밀로셰비치와 페루의 후지모리 정권이다. 둘다 「민주적」인 보통선거에 의해서 탄생한 정권이다. 그러나 집권 후 밀로셰비치는 적대 종족을 아예 말살해 버리려는 무자비한 「인종청소」를 감행했고, 후지모리도 반대당을 냉혹하게 탄압했다. 두 사람은 결국 쫓겨났다.
  
   많은 신생국가의 정권들이, 가끔 부정이 끼기는 하지만, 제도적으로는 보통선거에 의해서 민주적으로 탄생했으나, 이념의 미숙과 관습의 미비 때문에 그 권력행사는 대소간에 독재가 잔존하고, 대부분 「非자유·민주주의」를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 대개는 여러 영역에서 갖가지 형태로 자율을 제한하는 「관료권위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대한민국도 그 하나다. 지난 50년 역대 정권은, 한두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다 「민주적」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한국을 자유민주주의가 성숙된 나라라고 볼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기업가도 금융인도 건축인도 의료인도 교육자도 관료권위주의의 심한 간섭에 무거운 壓制(압제)감을 느끼고 있다.
  
   ▲제도와 심성:이렇게 그 성숙이 어려운 까닭은 자유민주주의는 制度(제도)의 문제인 동시에 그보다 훨씬 더 心性(심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창달하려면 우선 그럴 수 있는 제도, 즉 여러 가지 법, 규정, 관습이 마련되어야 하고, 때로는 반대로, 불필요하게 사람들을 옥죄는 규정은 폐지하고 그런 관습도 바꾸어가야 한다. 여러 영역에서 관료권위주의에 젖은 풍토에서는 이 일도 쉽지 않다.
  
   그러나 더 어려운 필수조건은 자유민주적 심성의 성숙이다. 그 심성의 중핵은 너와 나의 인간존중, 인권존중이라는 윤리의식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악순환이 작용할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긴 세월의 권위주의 풍토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심성이 배양되기 어렵고, 결과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심성의 不實은 정권에게 계속 권위주의 풍토를 합리화하고 강화하는 구실이 되면서, 그 악순환이 지속되기 쉽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의 제도와 심성의 격차 또는 괴리를 좁힘으로써 명실공히 자유민주주의를 성숙시키자면 우리 사회는 먼저 여러 영역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영위할 수 있는 심성, 「자유의 심성」을 배양할 수 있어야 한다.
  
  
   自律한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말
  
   자유의 심성은 위에서 말했듯이 인권의 자유·자율 존중이라는 윤리의식이 그 중핵이고, 그것은 자율성, 감수성, 시민성, 개방성의 네 가지 심성을 포함한다. 이 네 가지 심성은 바로 자유인의 역량, 즉 자유를 복되게 누릴 수 있는 역량을 뜻한다.
  
   ▲자율성:자율과 자유는 동의어다. 어디에서 살건, 무슨 직업을 갖건, 무슨 말을 하건, 밖의 어떤 강제나 간섭없이 스스로의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상황이 자율이고 자유다. 자율은 인간이 스스로가 인간임을 느끼게 되는 「인간적 質感(질감)」의 가장 긴요한 조건이다. 자율 없이는 인간은 자신이 동물, 노예, 기계의 위치에 전락한다는 「인간상실」을 느낀다.
  
   그러나 자유는 放恣(방자), 방종과는 거리가 멀다. 자유는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 행사, 자율의 행사에는 응당하게 성숙된 능력과 책임의식과 도덕의식이 필요하다. 그것 없이는 자유·자율은 當者에게나 남에게나 도리어 위험부담이 된다.
  
   운전면허 없는 친구가 차를 몰고 마음대로 어디든 갈 자유는 없다. 운전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책임은 자유·자율의 뒷면이다. 자율한다는 것은 그 책임을 진다는 말이다. 노예는 자유가 없다. 져야 할 책임이 성공의 희열과 칭송일 때도 있지만, 잘못 했을 때의 참패와 문책의 나락일 때도 있고, 심지어는 파산, 절망, 죽음일 때도 있다. 그래서 자유·자율은 동시에 무섭고 두려운 것이다. 철학자 사르트르가 말한 대로 『자유는 보물이기는 하지만 지고 다니기가 아주 무거운 보물』이며, 『인간은 자유이기로 축복받은 것이 아니라 자유이기로 저주받고 있는 것이다』
  
   자유는 근본적으로 도덕적인 개념이다. 칸트는 『자유는 도덕의 존재 근거고, 도덕은 자유의 인식 근거다』라고 말했다. 자유가 있기 때문에 도덕이 있다. 자유가 없는 사람의 행위에 도덕을 물을 수는 없다. 또한 도덕은 어떤 행위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라는 「선택」을 포함하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자유가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율의 인간을 기른다는 것은 방종이 아니라 바로 그런 응당한 능력과 책임의식과 도덕의식의 소유자인 윤리적 인간을 길러야 함을 뜻한다.
  
  
   人權존중의 첫 조건은 감수성
  
   ▲감수성:인권존중은 우선 남의 희로애락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그것을 나의 희로애락처럼 「느껴 들이는」 능력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感情移入(감정이입)」의 능력이고, 「四端(사단)」의 하나인 惻隱之心(측은지심)과도 같은 것이다. 어린아이가 넘어져 울고 있으면 「아프겠다!」라고 느끼고, 추워서 떨고 있으면 「쟤가 참 춥겠구나!」하고 느낄 줄 아는 능력이다.
  
   인간적 감수성은 따지고 보면 모든 인간관계, 사회관계의 근본이며, 따라서 도덕적 심성의 근본을 이룬다. 특히 민주사회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인간적 감수성은 필수조건이다. 민주사회는 인권존중사회고, 남이 나의 인권을 존중해 주기를 바란다면 나도 남의 인권을 존중해야 하며, 그런 인권존중의 첫 조건이 남의 희로애락에 대한 감수성이기 때문이다.
  
   ▲시민성:인간은 무리 속에서 서로 관계지으며 살아가야만 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개인인 동시에 여러 집단의 일원이다. 집단의 일원이 되는 자질을 市民性(시민성)이라고 불러두자. 그 시민성에는 적어도 세 가지가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첫째는 個體(개체)의식을 넘어서는 공동체의식이고, 둘째는 충동을 넘어서는 준법의식, 그리고 셋째는 「우리」를 넘어서서 「남들」을 생각하는 개방성이다.
  
   모든 사회집단은 애국심, 애향심, 애교심, 愛社心 등 그 나름으로 공동체의식 또는 사회의식을 강조하고 조성하려고 한다. 이것은 독재사회에서나 민주사회에서 매한가지다. 다만 독재사회에서는 개체의식을 압살한 채 사회의식만을 강조하지만, 민주사회에서는 개체의식을 존중하고 장려하면서 동시에 사회의식을 강조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도리어 개체를 존중해야 하고 또 그렇게 개체를 존중하는 사회를 지켜내야 하기 때문에 더 견고한 공동체의식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어느 경우에나 사회의식은 단순한 정서적인 애국심을 넘어서, 속해 있는 사회집단을 자아개념 속에 받아들이는 사회적 동체감, 사회의 문제를 내 문제로 느끼고 인식하는 사회적 감수성, 그런 사회문제에서 자신의 역할을 의식하는 사회적 책임감 내지 사명감 등 情的, 知的, 도덕적인 특성들을 포함해야 한다. 우리의 공동체의식에는 정서적 특성은 강하지만, 知的, 도덕적 특성이 부족하다는 반성은 경청할 만하다.
  
   준법성, 준법의식은 독재사회에서보다는 민주사회에서 특히 필수적이다. 독재사회에서는 사회통제력의 원천이 군주나 독재자고, 법도 그 군주나 독재의 전횡으로 만들어낸 법이지만, 민주주의사회에서는 사회통제력의 원천이 법밖에 없다. 대통령도 법 아래에 있다. 그래서 민주사회의 대명사가 「법이 지배하는」 사회인 것이다. 준법이 무너지면 민주사회는 막가는 사회로 전락하고, 그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잘못된 법은 고쳐야 한다. 그러나 고쳐질 때까지는 지켜야 한다.
  
   준법에 두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엄준하게 인식해야 한다. 하나는 법의 준수고, 하나는 법의 집행이다. 하나는 범법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는 범법은 법에 따라서 필벌하는 것이다. 개인이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나 정부가 법을 집행하지 않는 것이나 둘다 「범법」이다. 법 집행이 느슨해지면 법 준수도 허물어진다. 신학자 니버는 『민주주의는 正義로 향하는 인간의 능력 때문에 가능하고, 동시에 부정으로 향하는 인간의 성벽 때문에 필요하다』고 말했다. 바로 그 「부정으로 향하는 性癖(성벽)」은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에겐 긴 왕조의 법, 식민지의 법, 민주를 가장한 독재정권의 법 등, 그런 불행한 법 경험 때문에 범법행동 또는 법에 대한 반항을 당연시, 범상시, 때로는 영웅시하는 풍조가 일부 남아 있다. 그러나 독재 파괴가 아닌 민주 건설을 위해서는 기필 지양해야 할 풍조이며, 준수에서도 집행에서도 법은 존중되어야 한다.
  
   ▲개방성:민주사회는 열려 있는 사회다. 가족 안에서만 서로 아끼고 마음 터놓고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집 사람들도 응당하게 아끼고, 고향사람끼리만 아니라 다른 지방 사람과도 응당하게 터놓고 사는 사회다. 열려 있는 사회는 인권의 평등이라는 민주사회의 원칙의 당연한 귀결이다.
  
   각종 폐쇄집단들은 자연 서로가 서로에 대한 감수성을 무디게 하고, 상대방을 포함하는 공동체의식의 형성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감수성보다는 적개심이, 「우리」보다는 「그것들」이라는 격리의식이 지배적이 된다. 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집단들의 다양성을 용인하지 않는 폐쇄성은, 생물들의 근친교배에서와 같은 「劣性 유전」으로 인하여, 집단의 퇴화·위축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또한 더 심각하게는 폐쇄집단은 그 非공개성 때문에 그 속에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가 감추어져 있어서 쉽게 부정부패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가족이나 고향에 대한 사랑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국가 전반을 생각하는 공동체의식의 형성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공동체의식은 마치 호수에 던진 돌을 중심으로 몇 겹의 동심원의 물결들이 퍼져가듯이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점점 넓게 열려져 가는 것이라야 한다.
  
  
   교육세력:부모, 교사, 매스미디어, 지도층
  
   어엿한 체모의 국격을 갖출 제반 「國力」을 배양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차질 없이 누릴 수 있는 「자유심성」을 함양함에 있어 교육의 역할은 크다. 「역량」을 기르고 「심성」을 기른다 함은 바로 교육을 뜻하기 때문이다. 단 이때 교육은 학교교육만 아니라 넓은 뜻의 교육을 의미한다.
  
   한 사회에서 사람들의 지식, 능력, 성격, 의식구조와 행동방식을 기르는 힘을 가지고 있는 「교육세력」은 많고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가정의 부모, 학교의 교사, 매스미디어, 각계각층의 지도자의 교육력은 좌우간에 대단히 막강하다. 이들 네 교육세력이 스스로 지니고 있는 막강한 교육력이 어떤 연유로든 부실하고 왜곡되어 있다면 그 정도에 따라 국력과 國格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의 장래는 어두워진다.
  
   ▲부모:가정에서 부모는 아이들의 사람됨, 모든 건전한 人性 특성의 기초를 기른다. 그런 부모의 교육은 원초적으로 부모가 아이와 같이 보내는 시간, 이름지어 「親子時間(친자시간)」에 이루어진다. 그 시간이 부족할수록 아이는 겉은 멀쩡해도 속으로는 어떤 모양으로든 시들어가고 비뚤어져간다.
  
   문제는 현대사회에서 「바빠진」 부모들 때문에 아이들은 많은 시간을 더 부모와 떨어져 실질적으로 내버려져 「나홀로」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탁아소, 유치원, 가정부, 代理母가 도움은 되지만 그들이 아무리 좋아도 자상한 부모와의 시간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많은 아이들이 학교 파한 후 빈 집과 거리에서 방황한다. 시들고 비뚤어질 수 있는 시간이다.
  
   이 나라가 정녕 내일의 어엿한 國格의 주인공들을 바란다면 사회의 적절한 제도적, 정책적 조처로 또는 부모들의 개인적 각성과 노력으로 親子시간을 보충하는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TV의 경박성·소란성
  
   ▲교사:학교교육은 국가의 역량과 기강의 기초를 기른다. 그래서 모든 현대국가는 公敎育(공교육)에 방대한 예산을 경주한다. 한국도 그러하다. 그러나 그 한국 교육이 오래 전부터 백해무익의 입시준비 교육으로 시달려 왔고, 급기야 근래엔 「교육붕괴」, 「교육 엑소더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한 병폐에 빠져 있다. 몇 번의 「교육개혁」에도 불구하고 그 병폐는 거의 百藥無效의 지경에 놓여 있다.
  
   교육력의 원천은 교사다. 한국 교육을 되살리려면 교사의 자율성이 크게 회복되고 신장되어야 한다. 교육부는 교사에 대한 관료권위주의를 벗어나서 국가교육의 大綱(대강)만을 살피는 참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반면 교사는 전문적 자율의 필수조건인 사명감, 식견과 기량, 전문 윤리를 스스로 견지하고 계속 스스로 提高할 수 있어야 한다.
  
   ▲매스미디어: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등 매스미디어는 현대 사회에서 부모와 교사에 못지않은 막강한 교육세력이다. 특히 텔레비전은 全국민이 하루에 몇 시간씩 꼭 다니는 「全국민 학교」와 같고, 노소남녀의 지식, 의견, 가치관, 의식구조에 엄청난 형성력과 파괴력을 다 같이 지니고 있다.
  
   언론·방송은 언필칭 사회의 木鐸(목탁)으로 자처한다. 사회가 나가야 할 길을 선도하는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은 극심한 상업주의와 煽動(선동)주의 때문에 이런 역할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 보인다. 특히 한국 텔레비전의 상업성과 선동성, 경박성과 소란성, 그렇게도 많은 쇼, 드라마, 개그, 시시덕거리는 넌센스 프로그램은 어느 외국의 텔레비전에서도 보기 드물다. 언론방송 또한 성질상 그 개혁을 자율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언론방송은 天敵(천적)이 없는 한 權府(권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더구나 더 그렇다. 언론방송은 그 자신의 무서운 교육력을 직시해야 한다.
  
  
   지도자는 곧 교육자다
  
   ▲지도층:지도자의 한 定義는 「휘하 성원의 행동양식에 변화를 가져오는 사람」이다. 게으른 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들고, 서로 으르렁대던 사람들을 화목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사람의 행동양식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은 바로 교육의 定義이기도 하다. 기실 유능한 지도자는 반드시 동시에 유능한 교육자다. 동시에 교육자가 못되는 지도자는 그저 「별 볼 일 없는」 관리자일 뿐이다.
  
   지도자는 회사든 병원이든 나라든 그 단체의 支柱(지주)다. 지도자에게 꿈이 없으면 그 단체에도 꿈은 없어진다. 지도자에게 비전이 있으면 집단은 활력을 얻는다.
  
   지도자가 썩으면 성원들도 썩기 쉽고, 지도자가 옹졸하고 편협하면 성원들도 그렇게 되기 쉽다. 지도자가 깨끗하고 도량이 넓으면 성원들도 그렇게 된다. 자고로 모든 단체의 위기는 대부분 지도자의 위기고, 나라가 망하는 것은 그 나라의 지도층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지도자 빈곤의 한탄을 자주 듣는다. 그래서 하다 못해 외국인 축구감독 히딩크에게서 지도자의 모델을 찾는다. 그러나 지도자 빈곤感에는 지도자 후보의 빈곤 자체보다는 전래의 指導者像(지도자상)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權勢(권세)의식이 강하나 義務(의무) 의식이 약했던 전통적인 지도자상에 대한 불신인 것이다. 벼슬을 권력과 치부와 영예 과시의 자리로 생각하는 「변 사또」의 후예가 벼슬을 의무와 책임과 畏怖(외포)의 자리로 아는 「이순신 장군」의 후예보다 흔히 더 많다는 데에서 오는 불신이다.
  
   우리가 스스로 자처하고 남에게도 기대하는 지도자像에는 전래의 타성을 넘어서는 큰 변혁이 필요하다. 지도자들은 실질적으로 그 휘하 성원들의 「교육자」며, 그의 「교육」 여하에 그 단체의 성쇠가 달려있고, 나아가 나라의 국력·국격의 高揚, 자유민주의 창달 여하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내일, 내일의 흥망성쇠의 가장 큰 관건, 만에 하나라도 다시는 수난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가장 큰 관건은 한국 사회 각계각층의 지도층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 2005-12-24, 11:0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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