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집] 동백림 對南공작단 사건의 내막
『내무덤에 침을 뱉어라』중 동백림 사건 부분 全文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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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림 대남공작단 사건의 내막
  
  『내무덤에 침을 뱉어라』중 동백림 사건 부분 全文
  
  
  
  林錫珍 교수, 대통령에게 자수하다
  
  1967년 5월17일 수요일 오후 3시 정각, 朴正熙 대통령은 洪世杓를 따라 청와대 1층 서재로 들어 온 林錫珍 교수를 만나 악수를 청했다.
  
  『林선생, 苦心이 많았겠습니다』
  
  현재 명지대학교 명예교수 林錫珍 박사의 회고.
  
  『朴대통령의 그 한 마디는 진심에서 나오는 위로의 말이었습니다. 멀찌감치서 본 적은 있지만 가까이서 보니 단단한 분, 속으로 아주 당찬 분이란 느낌을 받았습니다』
  
  1949년 朴正熙는 좌익이었던 형 朴相熙의 영향으로 남로당에 연루되었다가 여순반란사건 직후 시작된 숙군 수사에 걸려 사형 구형까지 받았다. 그가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白善燁(백선엽) 정보국장에게 구원을 요청 함과 동시에 과감한 전향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金昌龍(김창룡) 특무대장은 朴正熙 소령이 실토한 명단에 의해 軍 내부의 좌익들을 대거 숙청할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朴正熙는 형을 감면받아 자유의 몸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18년 후 대통령이 된 朴正熙는 자신과 비슷한 운명을 걷고 있던 한 젊은 학자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이날 면담자리엔 朴대통령과 林錫珍, 洪世杓 세 사람만 참석했다. 자리에 앉은 뒤 朴대통령은 『林선생, 사실대로 다 얘기하시오. 아무 걱정 마시고 . 발단서부터 얘기해 주시오』라고 말했다.
  
  林錫珍은 자신의 출생에서부터 남북 분단의 현실과 어떤 식으로 인과관계가 엮여졌는지를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2시간5분 동안 진행된 면담에서 朴대통령은 가끔 담배를 피울 뿐 표정의 변화도 없이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고 한다. 가끔씩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질문을 할 뿐이었다는 것이다.
  
  林錫珍은 1932년 11월6일, 강원도 춘천에서 유복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화여전을 졸업한 어머니 金馨粉(김형분)의 절친한 친구인 金씨 姓 부인과의 사이에서 林錫珍의 운명이 꼬이기 시작했다. 金씨 부인의 남편은 日本 교토(京都)대학에 유학하여 마르크스 경제학을 배우고 돌아온 뒤 국내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 해방 전 獄死(옥사)했다. 미망인이 된 金씨는 林錫珍을 수양아들처럼 대했다.
  
   몇 년 후 金씨 부인은 강원도 고성군 郡守를 지낸 尹熙再(윤희재)에게 재가 했다. 林錫珍보다 네댓 살 위인 尹起鳳(윤기봉)이란 아들도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썼던 전형적인 부르주아 집안의 외아들인 尹起鳳은 새어머니 金씨로부터 前 남편의 유품이던 「이조 사회 경제사」 등 마르크스류의 서적과 사상을 전수받고 탐독하게 되었다.
  
   尹起鳳은 동생격인 林錫珍을 무척 아꼈고 자신이 독파한 이론들을 林錫珍에게 전해 주었다고 한다. 林錫珍은 尹起鳳을 형이라 부르며 따르다 보니 그의 영향을 받아 철학 및 사회학에 일찍 눈을 뜬 조숙한 중학생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古書店(고서점)을 들락거리며 일본어판 서양철학사를 탐독하며 책상 앞에 「無知와 貧困의 타파」란 표어를 써 붙이고 삶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 1949년, 경제학부를 졸업한 尹起鳳은 한국은행에 입사했다. 그는 이곳에서 남로당 비밀당원이 된다. 林錫珍의 회고.
  
   『수양 어머니의 사상적 배경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6·25가 일어나자 수양 어머니는 이승엽 서울시 인민위원장과 나란히 지프차에 올라타고 서울 거리를 누비고 다녔지요. 알고 보니 수양 어머니는 북조선 노동당과 깊숙이 연결되어 있었고 서울시 여맹위원장 정도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이들 세 가족은 월북했다.
  
   『한국은행의 엘리트 직원들도 월북했고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우수한 학생들과 권위 있는 교수도 대거 자진 월북했습니다. 환상의 축적이 가져온 결과였지요. 당시 한국의 지식사회 풍토는 좌파여야만 엘리트라는 모종의 의식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편승하거나 동조하면 엘리트가 된다는 자부심도 있었지요』
  
   이 무렵 林錫珍은 집안에서 또 다른 비극을 겪어야 했다. 네 명의 사촌 중 6·25 개전 직후 소위로 임관되어 전사한 형님, 대한청년단을 지휘하다 인민군에 참살된 형님이 있는가 하면 인민군이 되어 국군에게 사살된 형님, 그리고 한 분의 누님은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경찰에 잡혀 네 살바기 아이를 떼어 놓은 채 끌려가 총살을 당하기도 했다.
  
   의식과 경험이 동년배에 비해 앞서버린 林錫珍은 1952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했지만 철학으로 목표를 돌렸다. 이무렵 朴鍾鴻 교수가 헤겔의 변증법을 강의했고 林錫珍은 朴鍾鴻 교수로부터 격려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1956년 1월, 그는 대학을 마치고 부모를 졸라 600달러를 만든 뒤 독일 하이델베르그 대학 철학과로 유학을 떠났다.
  
   『자유당 정부의 무능과 부정부패에 환멸도 많았던 때입니다. 암울한 마음으로 유학길에 오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요』
  
   그가 처음 독일 하이델베르그대학 기숙사에 도착, 여장을 풀자 얼마 안 있어 그의 우편함에는 화려한 컬러판 화보로 꾸며진 북한 체제 선전물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洪世杓 前 외환은행장
  
   1967년 5월14일 林錫珍 교수가 고심 끝에 찾아 간 사람은 한국은행에서 근무하던 洪世杓(홍세표·65·前 외환은행장·陸英修의 언니 陸仁順의 장남)로 朴대통령의 처조카였다. 洪씨는 한국은행에서 재직하던 중 1964년부터 약 3년간 독일 프랑크푸르트 한국은행 지점에서 근무하며 林錫珍과도 친분을 맺고 있었다. 귀국한 지 얼마 안되었던 洪世杓는 사무실로 자신을 찾아 온 林錫珍을 반갑게 맞았다.
  
   『그 양반이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다가 나를 반기면서 의자 하나를 끌어대더군요. 담담한 이야기나 나눌 요량이었겠지요. 나는 그 자리에서 독일 유학시절에 북한을 두 번이나 다녀왔다며 상세한 내막을 털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洪世杓씨의 얼굴은 점점 사색이 되더군요. 도중에 그는 제 말을 중단시키고 한국은행 앞 중국집에 방 하나를 잡아 둘테니 가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한 시간쯤 뒤에 洪世杓씨가 나타났지요』
  
   林錫珍은 이 자리에서 북한이 한국 지식인 사회를 얼마나 집요하게 흔들고 있는지 설명했다. 그 자신이 지난 5년 동안 포섭해 북한 대사관과 연결시킨 교포와 유학생이 20여 명이나 되었다고 했다. 林錫珍의 이야기를 다 듣고난 洪世杓는 『일단 남산으로 올라갑시다』라며 자리를 옮겼다. 말없이 한동안 걸으면서 洪世杓는 곰곰 생각을 정리한 뒤 『朴대통령이나 金鍾泌(김종필) 공화당 의장 혹은 金炯旭 중앙정보부장을 찾아가 털어놓도록 해봅시다』라고 제의했다고 한다. 다음은 洪世杓 現 태평양 법률법인 고문의 회고.
  
   『당시 林錫珍씨는 「한국에는 도처에 북괴에서 심어둔 사람들이 있다. 귀국해서 보니 교수 사회나 정보기관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며 강한 불신감을 나타냈습니다. 저더러 「대통령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며 대통령을 만나게 해 달라는 겁니다. 하여간 사흘간 시간을 달라고 했지요』林錫珍 교수가 33년 만에 처음으로 기자에게 털어놓는다.
  
   『나의 목표는 청와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사건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곳곳에 북한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고 본 저는 막무가내식으로 수사를 하다가는 지식인들의 반감을 사게 되어 결과적으로 북한을 이롭게 할 것이라 보았습니다. 金炯旭 정보부장에 대한 평을 듣고 있었던 차에 그에게 말해 봐야 알아듣지도 못할 것 같아 朴대통령에게 운명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 분에 대해서는 독일 유학 시절에 洪世杓씨로부터 들은 바가 있었습니다. 가난 속에서 대구사범을 나왔으며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하면서 메달을 받았고 한때는 남로당원으로 옥고도 치렀다는 내용이었지요. 1964년 12월 朴대통령 부부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저는 유학생으로 초청받아 만찬장에서 그 분을 뵌 적도 있었습니다.
  
   그무렵 나의 가슴속 깊이 朴대통령이 각인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朴대통령 일행이 라인江가를 차를 타고 달리다가 돌산을 개간해 포도농장을 만든 곳에 이르자 朴대통령은 차를 세우게 한 뒤 산 기슭에 올라 맨손으로 흙을 파보고는 진짜 바위산이었음을 확인하더란 겁니다. 그러면서 바위산을 이런 옥토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고 산을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교민 사회에 퍼지고 있었습니다. 국토개발에 전심전력을 기울이는 진짜 지도자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는 감격이요, 희망이었습니다』
  
   1967년 5월16일, 朴正熙 대통령은 5· 16 기념식에 참석한 뒤 며칠 후부터 시작될 지방시찰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날 저녁, 洪世杓는 처삼촌인 대통령을 찾아가 林錫珍의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朴대통령은 묵묵히 듣고만 있더니 『이북놈들이 교활한 수법을 잘 쓰니까 그렇게 넘어간 사람도 많겠지』라고 한 뒤 『내일 오후 3시까지 데려와 보게』라고 했다고 한다. 5월17일 오전, 林錫珍은 외국어대학교 대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교직원이 들어오더니 급한 전화가 왔다며 받아 보라고 했다. 洪世杓의 전화였다.
  
   『만나기로 한 분과 약속이 되었소. 2시 반까지 내 사무실로 오시지요』 누구와 만나게 되냐고 물었지만 洪씨는 말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오후 2시 반, 한국은행 정문 앞에 검은 지프차 한 대가 서 있었다. 林박사는 洪씨를 따라 무작정 차에 올랐다. 두 사람만을 태운 차는 시청 앞을 지나 광화문 쪽으로 달리더니 효자동으로 방향을 틀었다. 林錫珍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洪世杓가 말문을 열었다.
   『사실은 朴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거요』
  
  
  林錫珍 박사의 공포
  
   1967년 7월8일 金炯旭(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東伯林을 거점으로 한 북괴 對南 공작단 사건」을 발표했다. 일명「東伯林 사건」은 朝鮮日報 李基陽(이기양) 기자의 실종사건을 중앙정보부가 수사하던 중 그의 친구가 자수함으로써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당시 서독 주재 李基陽 특파원이 1967년 4월14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개최된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 취재차 공산국가이던 체코로 출국한 뒤 소식이 두절됐다.
   이 대회에서 한국팀은 朴信子(박신자) 선수의 맹활약으로 소련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했다. 李특파원의 실종도 덩달아 교민사회에 많은 소문을 낳고 있었다. 독일 교민사회에서는 자진 월북, 납치 혹은 살해 등 각종 소문이 떠돌아 朝鮮日報社측은 사안이 명확하게 판단되기 전까지 가능한 보도를 자제하고 있었다.
  
   朝鮮日報社는 李기자가 체코로 출발한 지 5일 동안 연락이 두절되자 4월19일, 일본 東京을 경유하여 프라하의 한국 여자 농구 선수단에 국제전화로 李기자의 동정을 알아 보았지만, 입국 및 체류 여부에 대해 일체 들은 바 없다는 회신이었다. 4월25일 독일 본을 경유해 귀국한 선수단원들로부터도 李기자를 목격한 단원을 발견할 수 없었다.
  
   5월 초, 중앙정보부 수사국 李龍澤(이용택·12代 국회의원 역임, 現 경주 관광공사 사장) 수사과장이 우연히 朝鮮日報 사장실에 들렀다가 方又榮(방우영·現 조선일보사 회장) 사장으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 들었다.
  
   『아우님, 거 우리 서독 특파원 李基陽 기자가 어떻게 됐는지 좀 알고 있소?』
  
   『무슨 말씀인지요?』
  
   『체코에서 열리는 농구 대회를 취재하라고 지시했는데, 도착했는지 어쨌는지 소식이 없어요. 전화를 걸어보면 집에서는 부인이 받는데 체코에 들어 갔다고 하고, 체코는 공산국가라 확인할 길도 없고… 벌써 보름이 지났거든』
  
   『글쎄요… 한번 알아 보겠습니다』
  
   李龍澤 과장은 최근 기자에게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1967년에 들어서자 미국 정보기관에서 우리에게 유럽을 주의하라고 귀띔해 주고 있었습니다. 직감적으로「북괴에 의한 납치」라고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정보 전문가란 이유로 方사장 앞에서는 표정관리에 무척 신경쓰면서 대수롭지 않게 사장실을 빠져 나왔지요』
  
   李과장은 이문동에 위치한 중앙정보부에 도착하는 즉시 수사에 착수했다.
  
   『서독에서 체코로 들어간 것은 확인되었습니다. 그 다음엔 체코에서 묵을 만한 호텔을 뒤졌으나 도착한 흔적이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체코 공항을 통해 알아보니 공항에서 입국 신고가 안되어 있는 겁니다. 결론은 체코行 비행기를 타고 프라하 공항에 도착해서 막바로 다른 비행기에 실렸다는 것이지요』
  
   당시 朝鮮日報社는 중앙정보부로부터 사건의 성격을 확인한 뒤 1967년 5월 14일자 신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서 열린 제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를 취재하기 위해 지난 4월14일 체코에 입국했던 李특파원이 현재 체코 당국에 의해 억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한달이 지난 14일 현재 그의 소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날 아침 라디오 방송을 통해 李基陽 기자의 행방불명 사건을 접한 林錫珍(임석진·현재 67·現 명지대 철학과 명예교수) 박사는 귀국한 지 일년여 동안 자신을 불안하게 만든 모종의 공포와 직면했다. 서독 유학 당시 林錫珍은 절친한 친구인 李基陽 기자를 포섭해 북한 대사관에 연결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친구 李基陽에 대해 도덕적 책임감을 갖고 있던 차에 친구가 북한에 의해 납치된 것으로 여겨지자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솟아나면서 공포가 사라졌다고 한다.
  
   『도저히 가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나와 李基陽군을 떠나 제2, 제3의 피해자가 나올 것이 뻔했습니다. 우선 누구와 사전협의를 해야할지 잠시 생각했습니다. 여러 가지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이 많은데 이걸 제대로 이해해주고 종합적으로 상의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林錫珍의 북한 기행
  
   1961년 9월5일, 林錫珍은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마자 북한 사회가 잘못돼 있는 곳이란 걸 직감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생각의 고통을 안고 살아야 했지요』
  서독에서 우편물로 받아 본 화려한 화보 속의 밝고 명랑한 북한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중충하고 잿빛 감도는 건물들, 색깔이라곤 새빨간 광목에 쓰여진 金日成에 대한 충성 구호들뿐, 보이는 사람들은 창백하고 공포에 질린 얼굴들이었다.
  
   『20세기 초 유럽의 유명 作家인 아서 케슬러나 앙드레 지드가 사회주의를 주창하다 1930년대에 모스크바에 한 번 가 보고는 그 환상에서 깨어났지요. 그로부터 30년 뒤에 제가 꼭 그렇게 느낀 겁니다. 당시 朴대통령에게 「1970년대에 접어들면 북한은 분명히 위기국면으로 들어설 겁니다. 남한이 북한을 추월하게 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朴正熙는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라고 물었다.
  
   『그 사회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선 인민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공포와 강제만이 꽉 차 있었습니다. 이조시대 탐관오리보다 더한 사람들이 당간부였습니다.』
  
   朴正熙 대통령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고 한다. 마치 자신도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林錫珍은 평양 모란봉 초대소에 도착해 勅使(칙사) 대접을 받으며 3주 동안 북한의 여러 곳을 돌아 다닐 수 있었다. 벤츠 승용차에 감시하는 안내원과 동승하여 정해진 시간표대로 방문하기는 했지만 순간순간 드러나는 빈틈을 林錫珍은 놓치지 않고 발견하곤 분석했다.
  
   『청진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초라한 驛舍였는데 기차가 연착하는 바람에 기약없이 플랫폼에서 서 있어야 했어요. 감시하던 안내인도 화장실을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침 주민들이 기차를 타러 나왔다가 제 곁에서 이야기하는 걸 엿듣게 됐지요. 한 사람이 「우리 고향엔 먹을 게 없어 아이들이 아우성이오」라고 하니 옆 사람이 「그럼 밀가루 과자나 주지」라고 했어요. 그러자 한 숨을 푹 쉬던 주민은 「그것도 있어야 주지요」 하는 겁니다.
   기차 안에서도 주민들은 제가 입고 있던 독일제 양복과 구두를 신기한 듯 쳐다보곤 했습니다. 안내인이 허용하는 북한 사회만 보던 나에게 이런 쥐구멍 같은 틈을 통해 흘러 나오는 북한의 내면은 충격 이상이었습니다』
  며칠 뒤 林錫珍은 안내원들을 따라 모란봉 바로 아래에 위치한 고급 아파트로 갔다.
  
   평양의 유명 음식점 옥류관이 마주하고 있었다. 안내받아 간 곳에는 애타게 그리던 수양 어머니 金씨와 그의 남편 尹熙在, 그리고 尹起鳳이 있었다. 尹起鳳은 이미 결혼해 다섯 살바기 아들도 있었는데 부인은 평안북도 출신 농부의 딸이었다. 건강하고 후덕하게 생겼지만 학교를 제대로 나오지 않았는지 지식수준으로 봐서는 도저히 남편과 대화가 통하지 않을 성 싶었다.
  
   『밤새 술을 마시고 아침에 눈을 떴으니 회포를 충분히 풀었을 성싶은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기봉이 형님은 처음에 나를 보자 반가운 표정을 잠시 짓더니 이내 경계하는 눈빛을 보였고, 그러자 저도 그런 인상이 되어버렸던 겁니다. 푸짐하게 차려진 상을 두고 형님과 제가 마주 앉았는데 중앙당 과장인가 하는 이가 내 옆에 앉고 또 다른 무슨 기관 사람이 그 형님 옆에 앉아 뱀술을 권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작 물어보고 싶은 말, 의미 있는 대화를 서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형님 속마음을 알 것 같았어요. 그 분은 저를 믿지 못한 겁니다. 「석진이 네가 얼마나 이 자들에게 충성했으면 여기 까지 초대받아 왔을까. 내가 너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걸 이해해 달라」 뭐 이런 표정 같았습니다』
  
   林錫珍은 그 집 자체가 수양어머니의 집이 아니란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방이 두 개인데, 아무리 전후 복구기간이라 해도 家具가 없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金日成 사진, 밀감 상자같은 나무 책상 하나에 이불이 개어져 올려 있는 게 전부였습니다. 수양 어머니도 별 말씀 없이 음식을 준비해 놓고는 옆방에 가 누워 계시고… 자리잡고 사는 집이 아니었던 겁니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가 이른 새벽에 깨어나 안내원 들이 없는 틈을 타고 조용히 모란봉으로 산책을 했다고 한다. 아파트 정문 을 나섰는데 거리에는 인적이라곤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모란봉에 올랐지만 11년 만에 만난 의형제는 서로를 믿지 못해 속마음을 털어 놓지도 못하고 혹시 누가 오지는 않는지 주위만 두리번거렸다.
  
   林錫珍은 설사 상부에 보고된다손 치더라도 별 문제가 없을 질문을 생각해 냈다.
  
   『형님, 박헌영 이하 남로당원들을 미국 고용간첩으로 사형시켰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아닌 것 같은데요. 솔직하게 말씀해 보세요. 형님도 아시다시피 그 사람들이 어떻게 미국 간첩이 됩니까? 전부 몰아버린 것 아닙니까』
  
   林錫珍은 형이 北쪽의 상투적인 주장을 하는지 주의깊게 살폈다. 형은 한발 물러나서면 『정말 나도 그 속을 모르겠다. 다만 金日成광장에서 그들이 간첩활동 할 때 사용하던 물품을 전시하면서 학생과 직장인들을 관람시켰지』라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함께 자라면서 형의 의식세계를 넘나들었던 林錫珍은 형의 말투에서 「박헌영과 관련된 북한 당국의 발표는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암시를 받았다.
   모란봉 공원에서 내려 온 뒤 林錫珍은 尹起鳳의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다.
  
  
  『동독주재 北대사관에서 용돈받다』
  
   1959년 6월 하순, 유학생 趙明勳(조명훈)이 林錫珍의 기숙사로 찾아왔다. 구수한 전라도 억양에 술을 좋아했던 趙明勳은 지난 1988년 5월 북한 방문에 이어 한국에 들어와 북한 방문기를 펴낸 바 있으며 이때 북한 사회를 통렬히 비판, 독일 교민사회에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林錫珍을 만난 趙明勳은 이렇게 털어 놓았다.
  
   『하루는 尹伊桑 선생이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날 오라고 전화를 했어. 자가용이 생겼다는 거야. 그 어려운 형편에 차를 어떻게 샀을까 궁금했지. 같이 드라이브를 하자고 하더라고. 겸사 겸사 베를린에 갔더니 날 태우고 여기 저기 다니다가 차를 세웠는데 거기가 東베를린 도로데아슈트라세 4번지의 북한 대사관이야. 尹선생은 날더러 「趙君. 여기가 북한 대사관인데, 이 사람들과 만나 얘기를 나눠보면 좋을 거야. 같이 들어가세」하고 날 끌고 들어갔지. 조금 있다가 尹선생은 가버리고 나 혼자 남은 거야. 그런데 거기 대접 한 번 후했어. 밤새 술을 마실 수 있었으니까. 만나보니 다 같은 우리 민족이더라고. 尹선생이 생활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있는 것 같더라니까. 하긴 尹선생은 수입이 아무것도 없는데 車도 사준 것 같았어. 자네도 한 번 가봐』
  
   당시 독일 교민사회에서 한국 유학생이 자가용을 몰고 다닌다는 것은 꿈 같은 시절이었다. 趙明勳은 북한 대사관 주소를 적어 林錫珍에게 건네주었다. 林錫珍의 회고.
  
   『東伯林 사건의 원점은 尹伊桑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겁니다. 그가 바로 첫 통로를 연 사람이었고 趙明勳도 이 사람 밑에 있었으며 나도 거기에 끌려 들어간 사람이었습니다. 尹伊桑은 1956년에 파리에 유학와 이듬해엔 베를린으로 유학지를 옮겨 버렸습니다. 북한 대사관이 지척이었지요. 프랑스의 李應魯 화백은 부인 때문에 순진하게 북한에 말려든 경우였습니다. 그때 독일에 유학 온 학생 대부분은 가난했습니다. 북한은 우리보다 경제사정이 좋아 유학생이 찾아가면 술도 대접하고 돌아올 때면 생활에 보태 쓰라며 돈도 집어주는 겁니다. 당시 100달러면 우리같은 유학생들에게는 아주 큰 돈이었으니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데 거의 결정적이었습니다』
  
  1954년경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林錫珍은 심야에 북한 방송을 듣곤 했다. 어느 날 방송에서 남로당의 거물로 알려진 朴憲永(박헌영), 林和(임화), 金起林(김기림), 李承燁(이승엽) 등등의 이름이 나오면서 모두 미국의 스파이 활동을 하다 死刑당했다는 내용이 흘러 나왔다. 이때부터 수양 어머니 金씨와 그의 아들 尹起鳳의 生死가 궁금했었다.
  
   1959년 겨울, 친구 趙明勳으로부터 격려를 받고 林錫珍은 용기를 내 북한 대사관 앞으로 편지 한 통을 썼다. 수양 어머니 金씨와 아들 尹起鳳의 소식을 알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해가 바뀌어 1960년. 한국에서는 4·19 소식이 들려 왔다. 독일에서 바라 본 고국은 승승장구하고 있던 북한에 비해 엉망진창인 나라로 비쳤다고 한다. 지식인 대열에 포함된 유학생들은 남북한간 대결상황에서 「국가」보다 「민족」개념을 택할 때 북한과의 접촉에 조국을 배반하는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무렵 그에게 「조선민주청년동맹위원장 오정수」란 명의의 유려한 필체로 쓰여진 네 장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는 긴 서론이 이어진 뒤 말미에 이런 구절이 쓰여 있었다.
  
   <지금 남에서는 피끓는 애국청년 학생들이 「오라 南으로, 가자 北으로」 하며 통일을 염원하는 열기가 고조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 절호의 기회에 나라의 장래를 함께 이야기하고 걱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뜻깊은 일입니까. 한번 만날 기회를 가집시다>
  
   다시 며칠 뒤에는 東伯林의 북한 대사관 직원 石學哲(석학철)로부터 북한 대사관으로 정식 초청하는 편지가 왔다. 프랑크푸르트에서 東伯林까지 왕복 항공료와 체재비 일체를 책임질 테니 다녀가라는 것이었다. 林錫珍의 파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林錫珍의 행적은 1967년 7월8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수사 자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독 주재 북한 대사 朴日英에게 면접 서신을 보내고 1960년 4월 북괴 대사로부터 이에 응하는 회신을 접하고 東伯林 북괴 대사관 근처 「옥호 미상 호텔」에 투숙하면서 북괴 石學哲로부터 조국의 평화통일, 북괴의 발전상, 자연법칙에 의한 사회주의화 이념 등 교육을 받고 북괴 공작에 동조, 「黨命(당명)에 충실할 것을 선서한 후」 한국 모 신문사 서독 특파원을 「 대동하라는 지령」과 함께 공작금조로 미화 500달러를 수수, 1960년 8월 중 순경 前記 특파원을 대동, 東伯林으로 월경, 북괴 대사관 공작원 石學哲로 부터 전시와 같은 방법으로 교양을 받고 공작금조로 미화 400달러를 수수한 사실이 있고(하략·「 」 부분은 林錫珍씨가 사실과 다르다고 한 부분임-注)…>
  
  李基陽 특파원에 대한 林錫珍 교수의 회고.
   『참 안된 일이었습니다. 내가 서울대학교에 들어가 가장 친하게 사귄 친구였지요. 내가 1956년 1월 독일로 유학온 뒤 李基陽군은 수시로 나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아무래도 나도 공부를 해야겠다」고 했습니다. 李基陽은 3년 뒤인 1959년에 특파원 신분으로 튀빙겐 대학에 유학와 제가 공부하던 철학을 전공한 겁니다. 그만큼 저와 가까웠던 친구였습니다.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 尹伊桑이었어요』
  
   李基陽 기자가 실종됐던 1967년 당시 林錫珍은 이것이 자신에 대한 北측의 노골적인 경고라고 느꼈다고 한다.
  
   『내가 한국으로 귀국하겠다고 北측에 의사를 밝히자, 그들은 나를 끝까지 신사적으로 말렸습니다. 내가 편지 한 통을 보내고 귀국해 버리자 李基陽이 납치되었던 것은 나에 대한 북한의 경고로 보였지요』
  
   다시 1961년으로 돌아가 보자. 북한 대사관에 발을 들여 놓았던 林錫珍은 그때부터 약 1년 동안 교포와 유학생 등 20여 명을 연결시켜 주었다. 그 자신은 소개로 알았지만, 北측으로선 포섭이었다. 순진했던 林錫珍은 자신을 따라 유학 온 남동생 林錫勳과 쾰른에 살고 있던 여동생부터 北측과 연결시켜 주었다.
  
   林錫珍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른 채 공부를 계속하여 1961년 7월26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마지막 면접 시험을 마치고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잠시 1967년 5월17일 오후 청와대 집무실로 돌아가 朴正熙 대통령―林錫珍과의 대화를 옮겨 본다.
  
   林錫珍:『독일 유학을 해 보니 자유당 시절의 부패니 뭐니 해서 나라의 어려운 사정이 가슴에 더욱 저려오고, 독일인들의 우월의식이 강해서 반발심으로 우리들 대부분이 냉철한 國家 理性을 지향하기보다는 감상적인 민족주의자로 변해 가더군요.
  
   1961년 5·16이 일어난 뒤 어느 날 두툼한 봉투가 우편함에 들어 있는 겁니다. 열어보니 속 봉투가 있었는데 발신지가 평양이었습니다. 내용은 제가 찾으려던 수양어머니 가족들이 북한에서 잘 살고 있다면서 尹起鳳씨는 조선 중앙은행에 근무하고 있다는 것과 사진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북한으로 들어가게 됐지요』
  
  朴正熙:『평양에는 어떻게 들어갔습니까』
  林錫珍:『모스크바를 경유해서 옴스크, 이르쿠츠크를 거쳐 들어갔습니다. 모스크바에서는 저를 안내하던 공작원들과 고리키 공원을 구경했지요』
  朴正熙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林錫珍은 朴대통령이 「굉장한 데를 구경하며 다녔군」하는 뜻으로 웃었다고 기억한다.
  
  
  林錫珍의 고뇌와 탈출
  
   1961년 9월30일 서독으로 돌아온 뒤부터 林錫珍에게는 고뇌의 나날이 시작되었다. 북한 대사관과 연결되었던 李基陽 기자는 이런 林錫珍과 만나 술을 마시면 노골적이다시피 북한을 비판하며 함께 고민했다.
  
   『李基陽 기자는 술을 좋아하고 낭만적인 데가 많았습니다. 배짱도 좋아 웬만한 것은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북한에 들어가 보고 겪은 걸 털어놓자 술을 마시며 「그럴 줄 알았다. 나쁜 자식들. 우리를 이렇게 속이다니」하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어요. 조심성이 많았던 저는 겁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 이후 李基陽은 북한 대사관쪽 사람들과 겉으로는 아무 일 없이 지내려 했겠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북한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다녔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미움을 사게 된 것이죠. 독일에서 나와 가장 가까웠으니 내 문제로 인해 그가 피해를 보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林錫珍은 학위를 마친 뒤 독일에 머물며 연구원 생활과 번역 등을 통해 어렵게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북한측은 간헐적으로 林錫珍의 생활비를 대주곤 했다. 그런 만큼 林錫珍은 北쪽과의 관계를 정리할 수 없었다. 1963년 5월 결혼한 林錫珍은 급기야 가을에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노동당 입당원서를 쓰게 되었다. 마음의 방황은 거듭됐다.
  
   『학문도 할 수 없고,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저 쪽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북한에 들어가 헤겔을 공부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요. 정리를 결심했습니다』
  
   林錫珍은 정신적인 방황을 끝내야겠다고 결심하고 1964년에 東베를린의 이원찬을 찾아갔다. 이원찬은 노동당 연락부 소속으로 1960년 초 東베를린에 부임해 유럽 공작 총책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동안 조국통일에 기여한다는 생각에서 포섭공작도 하고 여러 일을 해 왔지만 이제 저로서는 서독에서의 삶에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습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생활할 경우 머잖아 정체도 노출될 겁니다. 신분을 위장해서라도 서울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원찬은 林錫珍의 제의에 대해 『너무 위험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남한 당국이 林선생의 활동에 대해 낌새를 채고 있는지 아닌지 판단이 안섭니다. 좀 더 두고 봅시다』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林錫珍에게 방 두 칸짜리 아파트와 중국 음식점에 투자할 수 있는 돈을 건네주었다. 이로써 겨우 경제적 어려움은 해결되었지만, 정신적 고통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북측과 실랑이가 3년째 이어지던 1966년 5월, 북한 대사관에 나와 있던 공작원 이원찬은 사람을 보내 林錫珍의 귀국 의사를 타진했다.
  
   『더 이상 못 참겠다고 말했지요. 그랬더니 회신이 왔는데 東베를린으로 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거역할 수도 없었지요』
  
   북한 대사관의 이원찬은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내게는 林선생의 귀국 문제에 대해 가부를 결정할 권한이 없소. 그러니 평양에 가서 林선생이 직접 당중앙을 설득해 재가를 받으시오』
  
  林錫珍은 이렇게 해서 두 번째로 평양을 들어갔다. 1966년 6월5일 평양에 도착한 林錫珍에게 對南공작 총책인 중앙당 부위원장 李孝淳(당 연락부장, 정치국 서열 4위), 연락국장 林春秋(최고인민위원회 위원장) 등 거물급 간부들이 마중 나왔다. 林錫珍은 일주일간 초대소에 머물렀지만 한 순간도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이들은 번갈아 林錫珍의 방으로 찾아와 밤새 술을 마시며 「움직이지 말라」고 설득했다. 이효순과 가장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절대로 나를 의심하지 마십시오. 마음이 변해서가 아니라 나는 학문할 사람인데, 내 적성에는 정치활동이건 뭐건 맞지 않으니 귀국해서 조용히 지내겠습니다』
  
  『林선생, 너무 위험합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해결책이 없지 않소』
  
  조용히 설득하던 그들은 닷새가 지나면서부터 자기들끼리 새로운 방법을 찾느라 고심하는 모습이 보이더란 것이다.
  
  『우리가 계속 생활비를 대줄 테니 일단 스위스나 네덜란드 아니면 벨기에로 이사를 하시오. 일단 뚝 떨어져 있으면 우리가 상황을 판단해서 적당한 때 귀국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겠소』
  
   林錫珍은 잘못하다가는 북한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이면서 서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효순은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2000달러를 건네 주었다.
  
   이 무렵 林錫珍은 북한에서 등골이 오싹할 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林錫珍에게 尹伊桑과 함께 崔德新(최덕신) 서독 대사까지 거론하며 자신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국가의 외무장관을 지낸 사람까지 연결되었다니 큰일이다 싶었습니다.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내가 더 큰 죄를 짓게 될 것 같았지요』
  
  부인과 함께 서독으로 돌아온 다음날 이삿짐을 서울로 발송하고 빈 손으로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떠나기 전 林錫珍은 이효순 앞으로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내가 당신들로부터 이탈행위를 하지만 통일에는 장애가 되거나 역효과가 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4차 黨대회
  
   林錫珍이 방북했던 시기는 공교롭게도 북한 노동당 제4차 黨대회가 열리던 기간이었다. 형식상 黨 최고기관인 「黨대회」는 북한 정권의 공식적인 정책 결정 기구이다. 1946년 8월28일에 처음 열린 이후 1948년, 1956년에 이어 1961년 9월11일부터 8일간 제4차 黨대회가 열렸다. 1961년에는 북한이 승승장구할 무렵이어서 중공의 당중앙 총서기 등소평, 소련의 공산당 이론가 수슬로프도 참가했다. 林錫珍은 노동당 대의원 1657명과 함께 이 대회의 기념집회에 참관했다.
  
   『金日成광장에서 바라보니 70∼80명이 나란히 앉은 主席壇(주석단)이 보이 더군요. 맨 가운데 金日成이 서 있고 옆에는 검은 안경을 쓰고 서 있는 金正日도 보았지요. 당시 金日成대학에 재학중이라고 안내원이 설명해 주었습 니다』
  
   노동당 제4차 黨 대회는 「인민경제 7개년 계획」의 수립을 결정하는 중요한 회의였다. 우리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보다 1년 먼저 시작한 북한의 경제계획은 그 후 60년대를 관통하면서 朴正熙가 이끌었던 남한과의 경쟁에서 완전히 패배했다.
  
   제4차 黨 대회에서는 對南공작의 전술적 전환을 모색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노동당은 이른바 남조선에서의 혁명의 성격을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에 반대하는 「민족해방 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이 대회를 통해 남한에서 「지하당 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지하당 조직」이란 남한 사회 저변에 숨어서 정치(反정부·反체제 운동), 경제(노동 운동), 사회문화(계급의식 고취·反美·親北 문화 조성) 분야에서 非合法, 非公開를 원칙으로 운동하는 집단을 의미한다. 지하에 숨어야 하는 만큼 핵심으로만 구성되는 두뇌조직이 지하당 조직이다. 어느 정도 사회가 이완되면 半합법, 半공개로 전환하며 정세가 완전히 유리하게 전개 되면 비로소 합법, 공개조직으로 변신하여 각종 단체 이름을 걸고 사회에서 대중적 활동을 한다는 것이 북한의 對南혁명전략이다.
  
   1989년 독일에서 유학하던 韓秉勳(한병훈)씨는 30여년 전의 林錫珍과 같은 방법으로 포섭되어 북한을 네 번 드나들었다. 그는 북한에서 2~3주 동안 「교양」을 받으며 지하당 조직의 연원에 대해 교육받은 바 있다면서 제4차 黨대회와 관련해 이런 증언을 했다.
  
  『제4차 黨대회 때 「지하당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된 까닭은 5·16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북한은 남한사회에 朴正熙를 중심으로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그 성격이 反共的임을 확인하자 남한內에 활동하던 親北 운동가들의 역량을 보존하고 육성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 무렵부터 북한의 對南공작 부서는 남한과 해외 교민사회內 고급 지식인들을 상대로 포섭활동을 벌여왔지요. 고급 두뇌들로 구성된 지하당 조직을 구축해야 혁명 역량의 보존이 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1967년의 東伯林 사건은 북한의 지하당 조직 공작 사업 중 하나가 드러난 정도입니다. 이 사건에 관련된 조직망은 그 후 독일 內에서 다시 소생하여 지금은 半공개 혹은 완전 공개 조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들 입장에서는 상황이 좋아졌다고 보는 겁니다』
  
   1961년 9월 林錫珍이 제4차 黨대회에 초청받아 가게 된 배경도 對南공작 부서의 지하당 조직과 관련된 것으로 이때 북한은 林錫珍에게 노동당에 정식 가입할 것을 강권했다고 한다(林錫珍은 1963년 서독에 거주하며 입당원서를 쓰게 된다).
  
   임석진의 거듭된 거절끝에 입당원서 문제가 보류되자 이번에는 초대소에 머물도록 하면서 공작부서 간부들로부터 對南혁명전략 중 지하당 공작에 관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林박사에게 지하당 조직을 꾸려 남한에서 민주기지를 만드는 일에 대해 강의하고 연방제 통일방안을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우리 黨의 노선을 인민 대중, 나아가 사회 전반 基層(기층)에 파급시켜 나갈 방도를 강구하셔야 합니다. 지하당 조직을 꾸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머리 좋은 동지들을 규합해 문화운동으로 시작하시는 것이 안전합니다. 문화운동은 민주기지 건설에 이르는 중간 다리입니다. 민주기지란 권력 핵심부를 장악했을 때 완성됩니다.
  북조선의 공고한 혁명기지와 남조선의 공고한 민주기지가 손을 잡으면 외세 를 물리쳐버리고 제1단계 연방제로 나갈 수 있습니다. 나중에 군중 봉기가 나면 우리는 무력으로 제압하고 통일 과업은 완수되는 겁니다』
  
  그들은 林錫珍이 북한을 떠나는 날 비행장에서 尹起鳳씨만 다시 만나게 해 주었다.
  
  『다섯 시간 가량 출발이 지연되었습니다. 공항 대기실에서 두 사람이 죽치고 앉아 있었지만 얘기다운 얘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형님도 가끔씩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보곤 입을 다물었지요. 자기 선배와 동료들이 하나같이 간첩으로 몰려 총살을 당한 판이니 누굴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朴대통령의 격려
  
   1966년 6월24일, 林錫珍 부부는 서울에 도착했고 그 해 가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현대철학 강의를 맡았다. 11월경 林錫珍 교수는 훗날 한국 사회의 인문과학계에 내로라 하는 이름들을 갖게 되는 동료들과 저녁 술좌석에 합류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林錫珍은 북한에 다녀왔다는 말은 못했지만, 자신이 체험한 북한 체제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자 동료들은 林錫珍의 의견을 한사코 부정하면서 그들이 상상하는 북한을 제시하곤 했다. 林錫珍은 반동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몰렸고 이들과는 1990년 초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후에야 비로소 다시 만날 정도로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지식인 사회의 풍경이었다.
  
   해가 바뀌어 1967년이 되자 林錫珍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서울대, 서강대 등에 강의를 나가며 명지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 자리를 얻었다. 李基陽 특파원이 실종되기 한 달 전쯤 林錫珍은 독일서 함께 공부했으며 북한에 포섭되었던 친구 某씨를 만났다. 林錫珍은 그에게 『함께 정리하자』고 제의했다. 그 친구는 『그렇게까지 용단내릴 일이 아닌 것 같다』며 끝내 거절했다. 이 사건이 林錫珍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의 속마음을 털어 놓은 셈이었는데, 거절 당했습니다. 그 친구가 만약 北쪽에 이런 사실을 전해버리면 어떻게 되나 하는 생각에 잠을 못잘 정도가 되었어요. 훗날 알게 되었지만 그 친구는 끝내 나의 입장을 이해해주고 비밀을 지켜주었습니다』
  
   1967년 5월14일 李基陽 특파원의 실종 보도가 알려졌을 때 林錫珍은 生死의 갈림길에 선 자신을 발견했다.
  
   『다른 문제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유럽 동포들에 대한 북한의 공작 실태가 한국사회에 알려지면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북한에서는 당 고위층을 포함, 나와 관계된 이들은 이 사실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을까 등등 엄청난 고민이 시작된 겁니다.
  대한민국 출신의 젊은 유학생들이 오죽하면 집단으로 움직이다시피 하면서 순간적인 착각으로 조국과 등을 돌리게 되었나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요. 사회적 비리와 피폐한 상황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정리가 되더군요. 그렇다면 이 사건이 알려질 때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릴 수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朴正熙 대통령을 만난 것이다. 林錫珍은 朴대통령에게 말미에 이런 식의 救命 운동을 했다고 한다.
  
   『각하, 단순한 동기와 목적과 수단으로 대한민국의 젊은 지식인들을 자기네 수족으로 붙들어 놓을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부탁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 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순수한 동기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다 말려들었습니다. 이들도 살려주십시오』
  
  朴正熙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너그럽게 선처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1967년 5월17일 오후, 청와대에서 朴대통령과 만나 2시간5분 동안 털어 놓은 이야기의 끝부분은 이같은 내용이었다. 朴대통령은 가끔씩 굳은 결심을 할 때나 그렇듯 어금니를 깨물어 얼굴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것 외에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면담을 마치고 일어서는 林錫珍과 악수를 나누면서 朴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
  
  『林선생, 앞으로 사회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보장해 드릴테니 염려말고 열심히 일하십시오』
  
   林錫珍은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朴대통령이 다시 『林선생』하고 불렀다.
  
   『예?』
  
   『지금 하신 말씀을 글로 써서 빨리 갖다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참, 中情에서 연락이 오면 협조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林錫珍은 그날 밤부터 200자 원고지 200장 가량의 글을 써 이틀 뒤 洪世杓에게 전달한다. 최근 기자와 만난 林錫珍 명예 교수는 朴대통령에 대해 이 런 소감을 털어 놓았다.
  
   『朴正熙 대통령은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세상이 흉흉해서 朴대통령을 독재자라고 힐난하고 있지만 이 분은 훗날 우리 역사에 특기할 만한 자리를 차지할 겁니다. 누구는 어디에 끌려가 모진 고생을 했다며 朴대통령을 비난하는데, 그 양반은 쉽게 사람을 옭아매고 죽이는 걸 삼가는 분입니다. 그 분이 어릴 때 고생하고 자랐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풀 캐어 먹고 살아야 했던 이 민족을 가난의 구렁텅이에서 이 정도로 끌어냈다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부정될 수 없을 것입니다. 南과 北을 들여다보니 더욱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1967년 5월22일 오전, 서울 갈현동 자택에 머물던 林錫珍은 전화를 하고 온 중앙정보부 직원과 함께 남산 분실로 갔다. 金炯旭 정보부장실로 안내되었다. 金炯旭과 林錫珍은 예전에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한 번 만난 사이기도 했다. 林錫珍 교수를 맞이한 金炯旭은 『아이고, 林박사 아니십니까』하며 『그런 일이 있으면 저한테 직접 오시지 않고』라고 말했다. 대통령에 직접 보고한 것이 불쾌하다는 뜻이었다고 林교수는 회고했다. 그러나 金炯旭 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林錫珍 교수가 자신에게 찾아와 자수했다고 쓰고 朴 대통령과의 부분은 완전히 누락시키고 있다.
  
   林교수는 이 자리에서 金炯旭 정보부장에게도 부탁을 했다고 한다.
  
   『희생자가 덜 나면서 사회적 물의가 크게 일어나지 않고 북한을 정면으로 자극하지 않게 내면적으로 처리하는 길을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金炯旭은 일을 제대로 처리할 능력이 없는 사람 같아 불안했습니다. 결과는 예측한 대로 였습니다』
  
  
  崔德新을 살려준 朴대통령
  
   崔德新은 1914년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나 1936년 중국 남경 육군중앙군관학교를 졸업했다. 1946년 육군 경비사관학교 특별반을 거쳐 1956년에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고, 1956년부터 1961년까지 駐월남 대사로, 1961년 5·16 이후 외무부장관으로 재직한 뒤 1963년 12월 서독 대사로 발령받았다. 그는 東伯林 사건 이후 1977년까지 천도교 교령을 지내다가 공금횡령 등 비리로 교단의 배척을 받자 그 해 미국으로 망명했다(崔德新의 뒤를 이어 천도교 교령이 된 吳益濟는 이후 국민회의 고문을 지내다가 1997년 8월15일 월북했다). 崔德新은 미국에서 反체제활동을 벌이다 1986년 4월 부부가 함께 북한으로 들어갔다.
  
   그는 북한에서 對南 전위조직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과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원장, 조선종교인협회 회장 등을 맡아 金日成-金正日 부자 체제 선전과 對南 평화공세의 선전장에 동원됐다. 1989년 崔가 75세로 사망하자 북한은 國家葬(국가장)으로 성대한 장례를 치러 주었다. 崔德新의 부인 유미영은 천도교 중앙지도위원회 위원장직을 이어받아 남편을 대신해 활동하며 1995년 安浩相(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의 밀입북 당시 초청자로도 활 동했다.
  
   崔德新의 아버지 최동오는 일제시대에 만주에서 목사로서 독립운동을 했던 臨政 계열의 독립운동가였다. 金日成은 중학교 在學(재학)시절 기숙사에 묵고 있을 때 최동오 목사와 친분을 맺었고, 훗날 만주에서 金日成이 경찰에 잡혀 구금되었을 때 그를 구사일생으로 살려준 사람이 최동오였다. 이런 이유로 해방 후 북한에서 정권을 잡은 金日成은 월남하지 못한 최동오를 극진히 대우해 주었고 1963년 최동오가 사망하자 혁명 열사릉에 안장했으며 평소에도 「선생」이란 호칭보다 「동지」라는 호칭을 쓸 만큼 각별했다고 한다.
  
   李龍澤 당시 수사과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林錫珍 교수가 써 준 진술서를 바탕으로 崔德新 대사의 주변을 조사했더니 이미 尹伊桑의 下部線과 접촉하여 아버지의 소식을 타진했고 北측과 접촉도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崔德新은 東伯林 사건에서 조사를 받지 않고 무사히 빠져 나갔을까. 당시 李龍澤 과장은 金炯旭 부장을 거치지 않고 이 사실을 朴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고 한다. 그런데.
  
   『李과장, 거 신중하게 하시오. 좀 더 철저하게 수사해 보고. 崔대사도 고향이 이북이니 어쩌면 北에서 마수를 뻗쳤는지도 모르지…. 개인적으로는 효자인데, (만약 사실이라면)법률적으로는 안되는 것 아니야…』
  
  李龍澤 前 의원은 이렇게 회고했다.
  
   『崔德新은 朴대통령이 軍시절 때부터 개인적으로 좋아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장관을 지내고 현직 대사로 나가 북한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로 판명될 경우 朴대통령 개인과 정권에도 큰 흠이 될 만한 사안이었습니다. 朴대통령이 「신중하게 하라」는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崔德新을 주목하기만 하고 극도의 보안을 기했습니다. 자칫하면 망명할 것으로 보았지요. 이때문에 崔德新은 東伯林 사건 관련자들을 소환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소외되었다며 우리에게 감정이 상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서독과 프랑스에서 혐의가 있는 관련 당사자들을 소한하는 과정에서 외교적 마찰이 빚어질 때 崔德新은 소극적인 대응을 했다. 그리고 자신은 서독 정부의 항의로 도저히 대사직을 수행하지 못하겠다며 본국 소환을 요청했다. 이런 행동을 하고 있던 崔德新에 대해 金炯旭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현지에 도착한 요원들은 대사 崔德新에게 특수임무를 알리지 않고 임무수행 동안 기밀유지를 위해 대사관의 모든 공문서, 전보의 발신 및 수신을 통제했다. 나중에 이를 안 양심적인 외교관 崔德新이 우리 임무에 非협조적이고 국제적인 문제가 야기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시간이 급해. 그 사람의 우려는 이해하지만 할 수 없소. 강행하시오(金炯旭의 말)』>
  
   한 나라의 정보부장이 북한과 선이 닿아 있던 대사를 두고 「양심적인 외교관」이란 修辭를 써야 하는 배경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朴대통령이 崔대사의 소환 요청을 수락하여 본국으로 불러들였을 때, 崔대사는 청와대로 들어가 대통령에게 東伯林 사건을 보고했다. 李龍澤 前 의원의 증언-.
  
   『崔德新은 사건 전말을 대통령께 보고하면서도 자기가 북한측 요원들과 접촉했다는 사실은 쏙 빼버립디다. 그리고는 한 술 더 떠 자신도 북괴로부터 친인척 상봉 제의를 받았지만 한 마디로 거절했다고 보고했던 겁니다』
  
  朴正熙 대통령은 崔德新의 거짓말을 알고 있었을까.
  
   『알고 계셨다고 봅니다. 제가 보고 드린 것과 崔대사의 진술에서 드러나는 차이를 금방 눈치챘을 테니까요. 崔德新은 그 후 朴대통령이 다른 국가의 대사로 내보낼 줄 알고 기다렸지만 朴대통령은 崔대사를 해외로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외무장관을 지낸 사람을 국내에만 묶어 둔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崔德新은 朴대통령이 대사로 발령을 내리지 않자 朴대통령에게 천도교 교령 자리를 원했다고 한다. 다시 李龍澤 前 의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해 말, 崔德新은 천도교 교령에 앉게 해 달라고 朴대통령께 부탁한 모양입니다. 하루는 대통령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내무부 장관에게도 지시했는데 천도교 교령 선거에 崔德新 대사가 될 수 있도록 힘을 써 보게」라고 지시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中情 요원들이 천도교의 각 지방 대의원들을 만나 부탁을 하고 다녀야 했습니다. 결국 교령으로 추대가 되었지만 실제는 官選 교령이었던 셈입니다』
  
   李龍澤은 중앙정보부에서 극비리에 崔德新을 계속 주목했다고 한다. 1977년, 崔德新은 천도교 교령을 연임했지만, 경리부정사건이 터지자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1986년 4월에 북한으로 들어가 버렸다.
  
  
  수사 착수
  
   1967년 5월22일 오후 金炯旭 중앙정보부장은 李龍澤 수사과장을 부르더니 메모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각하께서 이 사람이 李基陽 특파원의 行不사건에 상당한 단서를 갖고 있다고 하시면서, 東伯林에 있는 북한 대사관에서 對南공작을 벌여 왔다고 하시는구먼. 은밀한 수사를 지시하셨으니 당신이 이 사람을 만나 알아 보고 결과를 나와 함께 청와대로 들어가 대통령께 보고하시오』
  
  李과장이 메모지를 펼쳐 보니 林錫珍 교수의 이름과 전화번호였다. 李과장은 다음날부터 이틀간 충무로에 있는 아스토리아 호텔에 방을 잡아두고 林錫珍 교수와 만났다.
  
   『얘기를 들어 보니 엄청났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던 정보는 林교수의 진술에 비하면 지엽말단적인 것에 불과했지요. 다음날 또 만나자고 하여 상세한 내막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5월24일경, 李龍澤 수사과장은 金炯旭 정보부장과 함께 청와대로 들어갔다 . 李과장은 朴대통령에게 사건 개요를 보고했다. 그런데 朴대통령은 보고가 끝나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거,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비슷하군』
  
  李龍澤 前 의원의 회고.
  
   『대통령께서 우리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알아 보니 林교수가 사전에 朴대통령을 만났고 보고서를 작성해 올렸다고 합니다. 그 보고서는 金炯旭 부장도 보지 못한 걸로 보아서 대통령 당신이 연구하기 위해서인지 혹은 金炯旭 부장의 업무능력 평가를 위해 갖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날 朴대통령은 金炯旭 부장에게 따끔한 질책을 했다.
  
   『북괴가 해외에 나가 사는 우리 동포를 활용해서 해외로부터 우리를 포위하고 침투공작을 하려는 의도인 것 같은 데, 당신은 외국 정보기관에서 주는 것만 갖고 일하나? 너무 국내에만 치중해서 對南간첩이나 지하당 간첩단 사건에만 얽매이지 말고 국제적으로도 신경 좀 쓰시오. 국외업무도 강화하고. 그리고 이 사건은 철저히 수사해서 뿌리 뽑으시오. 이게 어디 東伯林뿐이겠어? 북괴 대사관이 있는 곳이라면 전부 이럴 테지』
  
   『예, 철저히 하겠습니다』
  
   金炯旭 부장은 90도 각도로 절을 했다. 朴대통령의 「철저 수사 지시」를 金炯旭부장은 「합리성을 잃어도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을까. 해외로부터 무리한 拘引(구인)과정, 합리적이지 못한 확대 수사, 도처에서 나타나는 고문 흔적들은 眞犯(진범)을 찾아내 엄중처벌하는 데 실패하고 무고한 피해자 속에 眞犯들이 섞이게 만들어 종국에는 사건 자체가 조작이란 汚名(오명)을 쓰기에 이르렀다. 중앙정보부內에서 金炯旭의 위력은 막강했으나 부하 직원들의 자발적 복종심을 얻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고 한다. 「존경할 수 없는 인물」로 군림했던 金炯旭 시대의 정보기관원들은 북한의 진일보한 지하당 공작 사건에 직 면하여 재래식 일반 간첩 수사 기법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당시 李龍澤 수사과장은 정보부 수사국 직원을 총 동원하다시피 해서 혐의자 명단을 만들어 갔다고 한다. 李龍澤 前의원의 증언.
  
   『東伯林 사건 수사는 결과적으로 미완의 수사가 되었습니다. 수사관은 한정되었고 東伯林뿐 아니라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와 미국에까지 지하망의 뿌리가 뻗쳐 있어 혐의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일부 관련자를 소환한 직후부터는 서독과 프랑스에서 외교적 압력이 가해져 서둘러 종결 시켜야 했습니다.
  
   당시 북괴가 한국 사회에 조성해 놓은 지하당은 통상 선거 시기에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아무래도 선거가 있다보면 수사관들의 힘이 선거 쪽으로 분산되는 걸 알고 있다는 것이죠. 東伯林 사건도 林교수가 대통령께 제보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학생데모가 과열되는 가운데 7월 말이나 되어야 꼬리가 잡혔을 겁니다. 저의 경우 李基陽 특파원 실종사건을 내사중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에서 단서를 잡았을 테고 그러자면 체코에 어떤 수를 써서라도 사 람을 투입시켜야 했을 테지요. 그런데 林교수의 제보는 이런 수고를 덜어 주었습니다』
  
   중앙정보부의 수사는 그 해 5월 말에 시작하여 7월 초까지 한 달 반 가량 진행된 후 검찰로 넘겨졌다. 林錫珍 교수는 매일 출근하다시피 중앙정보부로 나와 수사관들의 질문에 응하고 새벽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李龍澤 과장은 수시로 청와대로 들어가 朴대통령에게 直報(직보)했다.
  
   『서독의 경우는 수사를 하면 할수록 관련자들의 상부선은 尹伊桑에게 연결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의 정점은 尹伊桑이라고 판단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林錫珍 교수가 朴대통령을 만나 털어 놓았을 때엔 주요 인물 한 명이 빠져 있었다.
  당시 서독 대사로 근무중이던 崔德新이었다. 중앙정보부 수사관들과 대면한 林錫珍은 崔德新 대사도 혐의자라고 지적하고 북한에서 보고 들은 그의 행적에 관해 진술서를 작성했다. 다음날 金炯旭 정보부장이 林錫珍을 불렀다.
  
   『崔德新 대사까지 거론했던데, 이거 너무 범위가 넓어지는 거 같아요. 당신 逆工作하는 거 아니오?』
  
   林錫珍은 경멸스런 감정이 솟아나면서 어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대들 수도 없는 처지라 『나는 다만 이상한 말을 들었기에 적어준 것뿐입니다 』라며 빠져 나왔다고 한다.
  
  
  작곡가 尹伊桑
  
   尹伊桑은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일제시대에 한국과 일본에서 음악교육을 받았다. 통영여고, 부산사범학교, 부산고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다 1954년부터 서울의 여러 대학에서 강사생활을 하던 중 1955년 「현악 4중주 1번」과 「피아노 3중주곡」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1956년 프랑스 파리 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가 東베를린 북한 대사관과 가까운 베를린 대학으로 유학지를 옮긴 것은 1957년, 이때 이미 북한과 연계되었다는 것이 당시 수사관과 현지 교민들의 증언이다. 1959년 베를린 음대를 졸업할 무렵 그는 이미 독일 사회에서 유명해져 있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음악가이지만, 북한이 「길렀다」고 자부하는 음악가이기도 하다.
  
   1967년 6월, 중앙정보부에서 바라본 尹伊桑은 여러 모로 거물이었다. 현지에서 음악가로서 이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내사 단계에서부터 그의 이름은 항상 계보 맨 위에 위치해 있었다. 1967년 6월17일, 尹씨는 베를린 슈판다우의 한 아파트에서 광복절을 즈음한 대통령의 초청이라는 中情요원 들의 말에 속아 서울로 拘引되었다. 尹伊桑은 이문동 중앙정보부 본청 지하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당시 中情 수사과장 李龍澤의 증언-.
  
   『尹伊桑은 이미 1960년경부터 북한을 드나들었고, 北쪽에서도 그의 사회적 명성이 지하당 공작에 유리하다는 판단하에 그를 위해 끔찍하게 지원해 주 었던 것 같습니다. 예술만 알던 사람이니 정치적인 관계를 해석하는 데 서툴러 그들과 엮이게 되었을 거란 짐작은 갔지만,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수십 명이 북한 공작에 이용됐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尹伊桑은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가 쓴 「尹伊桑-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상처 입은 龍)」에서 자신이 북한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1959년의 일이고 북한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63년이라고 말하고 있다.
  
   尹伊桑은 본에 있던 한국 대사관에 유인된 직후 라디오를 크게 틀어 놓는 소음 고문을 받았다고 「상처입은 龍」이란 책을 통해 밝히고 있다. 서울에 와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모진 고문 끝에 「나는 북한에 봉사하는 공산주의 자이다」라는 자백을 했다고 한다. 구타와 고문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시도 했고, 재떨이로 자신의 머리를 내리쳐 중상을 입었고 오랫동안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李龍澤 당시 수사과장은 『고문은 없었다고 믿는다. 저 사람들이 법정 투쟁 을 하기 위해 고문받았다고 허위 주장을 했던지, 실제로 나 모르게 수사관 들이 고문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했지만, 현장에 그 자신이 항상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이 증언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東伯林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받은 194명 중에는 고문과 관련하여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林錫珍과 그의 동생들처럼 당국에 자수하여 조사에 순순히 응했던 사람들과 청와대 등 상부의 요인과 관계있는 사람들은 거의 고문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尹伊桑처럼 혐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일수록 고문의 강도가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尹伊桑의 경우, 재떨이 자해사건은 요모조모로 알려져 왔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東伯林 사건의 수사 속도가 늦춰지는 계기가 되었다. 전후관계를 李龍澤 당시 수사과장의 증언으로 再조합해 보았다.
  
  李과장은 그날 담당 계장이 尹伊桑에게 崔德新 대사에 관한 심문을 하는 장면을 관찰하다가 올라와 2층 야전침대에서 눈을 붙이고 있었다고 한다. 새벽에 담당 계장이 흔들어 깨웠다.
  
   『왜?』
  
   『尹伊桑이가…』
  
  李과장은 직감적으로 尹伊桑이 죽은 줄 알았다고 한다.
  
   『그는 주범이었습니다. 입구에는 헌병 둘을 배치해 두고 있었는데 담당 계장이 화장실 간 사이에 尹씨는 책상 위에 있던 네모난 사기 재떨이를 깨 자기 머리 오른쪽을 몇 차례나 찍었습니다. 계장의 보고에 놀라서 뛰어내려가 보니 4평 정도되는 취조실 바닥이 피로 물들었을 정도로 많은 피가 흘렀 습니다』
  
   이미 尹伊桑은 후송되고 있었고 벽에는 손가락에 피를 묻혀 쓴 글이 있었다. 「崔德新은 결백하다」
  
   李과장은 현장보존을 지시하고 사진을 찍어 두었다고 한다. 1999년 9월19일 MBC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끝나지 않은 東伯林 사건」에서 尹伊桑의 처 이수자는 이런 증언을 했다.
  
   『…피가 흘러서 흐르는 걸 갖다가 손가락에 찍어 벽에다 「우리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간첩이, 간첩이 아니다」라고 쓰고…』
  
   다시 李龍澤 당시 수사과장의 입장으로 돌아가 본다. 그는 즉시 尹伊桑이 후송된 청량리 파티마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가 면도칼로 尹伊桑의 머리 털을 깎고 있었다. 尹씨의 손과 발은 침대에 묶여 있었다. 李과장과 尹씨의 대화.
  
   『尹선생, 정말 죽고 싶어요?』
  
   『내 자신을 저주했습니다. 저는 참 어리석은 놈입니다』
  
   『죽는다고 일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 종교는 불교입니다. 자살도 살인입니다. 살고 싶습니까』
  
   『예, 살고 싶습니다』
  
  의사는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自殺 미수가 아니라 自害로 보입 니다』라고 소견을 말했다.
  
   이 사건으로 尹伊桑에게 강제수사를 할 입장이 못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외교적인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하고 정보부에서의 구속기간 20일이 만료되어 감에 따라 증거 포착에 많은 애로가 따랐다. 이런 요인들이 이 사건을 未完의 수사로 만들었다고 한다.
  
   尹씨는 1967년 말, 제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68년 제2심에서 15년 징역형으로 감형처분받고 1969년 제3심에서 10년 형으로 다시 감형받았다 . 이 해 2월 尹씨는 형 집행 정지를 받고 출감해 서울에서 약 1개월간 머물다 독일로 돌아갔다.
  
   당시 독일 정부와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고 이면에서는 북한의 공작도 한 몫을 했다. 그는 이러한 정치 외교적 협상의 결과로 다시 독일로 돌아간 것이다.
  
   1995년에 사망한 尹伊桑은 東伯林 사건 이후 한국땅을 한번도 밟지 않았지만 북한은 여러 번 방문하고 金日成과도 만나는 등 北측과는 활발하게 접촉했다. 북한은 수시로 尹伊桑 음악제를 개최하는 것은 물론, 1984년에는 尹伊桑음악연구소를 설립해 그의 음악을 집중 연구하고, 그 자신도 북한에 몇 달씩 체류하면서 교향악단과 합창단을 지도하기도 했다.
  
  
  「납치」와 「도피」
  
   1967년 6월 초, 중앙정보부는 林錫珍의 진술을 바탕으로 다섯 쌍의 부부를 포함해 23명의 혐의 대상자 명단을 최초로 작성했다. 수사관들은 이 명단을 토대로 인맥을 그려나가면서 12명을 추가하고, 며칠 뒤 13명을 추가하여 총 48명의 교포 및 유학생들을 명단에 집어 넣었다.
  
   중앙정보부는 이들 48명을 A급, B급, C급으로 나누었다. 尹伊桑, 李應魯 같은 거물급은 A급, 학위를 마치고 교편을 잡고 있던 젊은 교수들은 B급, 유학생들과 派獨광부들은 C급이었다. 6·8선거가 끝난 이틀 뒤인 6월10일, 정보부는 특수공작 책임자를 현지에 급파했다. 이후 총39명의 공작요원들을 서독과 프랑스로 보냈다. 6월15일 현지에 도착한 정보부 요원들은 다음날 3명 1개 조로 편성하여 혐의 대상자가 거주하는 서독과 프랑스 등의 20여개 지점으로 출발, 혐의 대상자와 접촉했다.
  
   A, B급 혐의 대상자들에게는 朴대통령의 초청이라 속이고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토록 모시러 왔다고 했다. 비행기를 전세냈다며 여권과 항공권까지 대사관에서 알아서 마련해 줄 것이라고 설득해 대부분이 이 말에 넘어갔다. C급 대상자는 한국 정부 당국에서 귀하의 활동에 의심나는 것이 있으니 한국에 들어가 해명하고 오자는 식의 半협박을 했다.
  
   사흘간에 걸쳐 독일 본의 한국 대사관으로 30명을 집결시켰다. 총 48명 중 10명은 혐의가 없다고 판명되었고, 나머지 8명은 눈치채고 도주하여 대부분이 북한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집결한 30명 중에는 프랑스에서 자동차로 獨佛 국경을 넘어온 10여 명도 있었다.
  
   당시 프랑스 파리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공보관으로 근무했던 李基鐸(이기택·現 연세대학교 정외과 교수)씨는 임기를 마치고 귀국 준비를 하던 중 서독 본에 있던 한국 대사관에서 急電이 들어오는 것을 목격했다. 내용은 대사를 제외한 공사 및 참사관 이하 직원들은 비상대기하라는 지시였다. 잠시후 본에서 북괴 공작에 포섭되어 긴급 호송할 인물들의 명단을 암호전문으로 보낼 테니 해독준비를 하라고 했다. 암호를 다룰 상황이 아니라고 하자 이름을 거꾸로 부를 테니 받아 적으라고 했다. 李基鐸 교수의 회고.
  
   『직원들이 긴장감에 싸인 채 전화에서 흘러 나오는 이름들이 하얀 종이 위에 쓰여져 내려가는 걸 보았습니다. 그리고 모두 경악했습니다. 열댓명 가량 되었는데 대부분이 대사관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유학생들은 전부가 대사관에서 용역을 하던 사람들이었고 무관부 소속의 직원도 있었습니다. 기밀이 얼마나 빠져나갔을까 생각하면 소름끼치는 일이었습니다』
  
  駐佛대사는 대사관 직원들의 여권을 모아 정보부 요원에게 넘겼다. 이 여권들은 즉석에서 혐의자들의 위조여권으로 둔갑했다. 혐의자들을 독일로 호송하기 위해 사진을 감쪽같이 바꿔 붙여 혐의자들의 여권으로 위조한 것이다. 駐佛대사관 직원들은 차량을 동원하고 연이어 도착한 수사관들과 분승하여 파리 주변에 산재한 혐의 대상자들의 거주지를 급습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6명 가량의 유학생들이 종적을 감추었다. 李基鐸 교수의 기억-.
  
   『코르베지 건축학교에 다니던 어느 유학생도 그렇고 方俊(방준) 유학생 부부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프랑스에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朴俠(박협)은 실종됐던 李基陽 기자의 서울대 정치학과 2년 선배였습니다. 평소 대사관에 나와 번역일도 했습니다. 일본의 유엔 대사의 조카딸과 동거하고 있었는데, 이 친구 방을 급습해 보니 급히 개봉했던 편지 한 통만 있었습니다. 편 지 내용은 朴俠의 영문자 이름 略語인 P. H. 를 이용해 만든 암호전문이었습니다.
  
   「Paul Heimat is seriouslly ill. And should be immediately hospitaliz ed in Paris.(폴 하이마트가 위독하다. 즉시 파리에서 입원시켜라)」
  朴俠에게 도피하라는 경고였는데, 박협은 이걸 받아 읽고 사라진 것이었지요. 「입원」이란 의미는 모종의 비상통로를 찾아 잠적하란 의미였습니다. 朴俠을 포함한 프랑스에서 잠적했던 6명은 그 후 행방불명으로 처리됐지요 . 몇 개월 뒤 프랑스 경찰청은 駐佛 한국대사관측에 이들의 출국사실을 발견할 수 없었다며 「KGB 계통으로 중국이나 소련 대사관을 통해 프랑스에서 빠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는 회신을 보내왔습니다』
  
  정보부는 혐의 대상자들을 본 공항을 통해 출국시키기 쉽지 않다고 판단, 함부르크까지 열 시간에 걸쳐 자동차로 이동, 한국과 수사협정이 체결되어 있는 일본항공(JAL)을 이용했다. 그러나 이미 국제법을 위반해 사태가 꼬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 교민은 자신의 집을 찾아온 정보부 요원을 따라 나섰다가 낌새가 이상하자 도주해, 언론을 통해 이 사실을 폭로했다. 서독 언론은 처음엔 반응이 없다가 시간이 갈수록 한국인 실종신고가 늘어나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북한의 유언비어에 의해서인지, 혐의 대상자 중에서 허위사실을 발설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李修吉(당시 마인츠 대학 병원 방사선과 의사·現 73세) 박사 등 몇몇 무고한 사람들은 1967년 6월20일자로 駐西獨 한국 대사 관을 경유해 서울로 끌려온 경우였다.
  
   李修吉 박사는 1965년부터 한국 간호사들의 독일 진출에 앞장섰고 선천성 기형 아동 34명을 한국일보를 통해 모집하여 미국과 독일에서 무료로 치료받게 해주는 등 韓獨 의료계 교류에 힘을 쏟았던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의사였다. 그는 또 1997년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崔炯佑 신한국당 고문의 치료를 맡았고, 이후 두 집안끼리 사돈 관계를 맺기도 했다.
  
   당시 정보부 수사관들은 서독 주재 한국대사관으로 李修吉 박사를 유인한 뒤 구금하고 강제로 「급히 서울에 가야 할 일이 생겼다」는 내용의 편지를 부인에게 남겨 두게 했다. 대사관측은 평소 부인과 안면이 있던 양두원 참사관을 통해 「조용히 계시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부인도 잠자코 있었다.
  
   7월3일, 프랑크푸르트 신문은 李修吉 박사를 포함한 5명의 한국인이 행방불명되었다고 보도했다. 다음날엔 마인츠 신문과 라디오 방송까지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7월6일에는 마인츠 경찰서 수사과장이 형사와 함께 집을 찾아 왔다. 金炯旭 中情부장이 국내 언론을 통해 東伯林 사건을 발표하기 전부터 벌어진 일들이었다.
  
   林錫珍 교수가 金炯旭을 만나 조사를 받기 시작한 5월 하순부터 6월 하순까지 한국에서는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고 선거부정 시비로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이 기간중 金炯旭은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회고록을 통해 「나는 서독 현지에서의 말썽이 전파를 타고 한 국에 전해지기 전에 이 사건의 관련자로서 국내에 있던 혐의자들을 이미 구속해 두고 있었다」고 쓰고 있다.
  
   1967년 7월8일 金炯旭은 기자회견을 통해 194명에 달하는 대규모 간첩사건을 포착, 이 중 107명을 입건 또는 구속 수사중이라고 발표했다.
  
  
  실패한 수사
  
   서울 상대 출신인 詩人 千祥炳(천상병·1993 사망)은 마산 중학교 재학중 담임선생 金春洙(김춘수)의 권유로 詩를 써 靑馬 柳致環(청마 유치환)의 추천을 받아 소년 등단했다. 가난했던 천재 千祥炳은 술을 친구처럼 벗삼은 기인이기도 했다. 서울대 재학시절 韓戊淑(한무숙) 선생 집에서 기숙할 때 , 대낮에 안방 화장대 앞에 놓여진 작은 洋酒병이 생각나 밤늦게 몰래 들고 나와 마셨더니 향수병이었다는 사건이 일화로 남아 있을 정도다.
  
   그가 이 사건에 연루된 것은 상대 동기생 姜賓口(강빈구·당시 35·현 국내 거주)와 절친했기 때문이다. 姜賓口(국내거주)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유학시절에 아내(姜하이디)와 東伯林에 들어가 金日成대학 교수를 두 차례 만난 적이 있다』며 『그 일 때문에 애꿎은 친구만 죽도록 고생시켰다. 고문이란, 당시로서는 자칫하면 당하는 일인 만큼 별 할 말이 없다』고 했다. 당시 서울 상대 조교수를 근무하다 부인과 함께 구속된 그는 친구의 이름을 댄 적이 없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千祥炳이 잡혀와 있더라고 했다.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바이얼린 연주를 즐겼던 낭만주의자 姜賓口는 학창시절부터 千祥炳과 단짝이었다. 유학을 다녀와서도 千祥炳을 불러 술을 사주곤 했다.
  
   수사관들에게는 「지하당 조직」으로 보였을 것이다. 東伯林 사건 관련 詩人 千祥炳의 공소장에는 죄목이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상의 불고지죄 및 형법상의 공갈죄」였다. 千祥炳은 6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었지만 행려병자가 되어 떠돌다가 세상 모르게 청량리 국립정신병원에 강제입원되어 있었다. 文友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60여 편의 遺作 詩를 모아 遺稿(유고) 시집 「새」를 출간했다(1970년 12월). 살아 있는 사람을 두고 유고 시집이 나온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다.
   책이 나온 뒤 비로소 병원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친구들이 달려가 보니 千祥炳은 침대에 걸터앉아 아이같이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친구들을 맞았다.
  
   그의 다리 사이에는 소변을 가리지 못해 채워진 커다란 기저귀가 있었다. 朴正熙 대통령을 만나 자수했던 林錫珍 교수는 수사만 받고 풀려났으나 그의 친동생 林錫勳(당시 독일 유학중)은 15년 형을 확정 선고받고 1969년에 사면되어 서독으로 돌아갔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 국적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처는 물론 자식들도 한국 국적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기자와의 통화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형님이 북한을 찾아 간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고 다녀온 뒤 태도를 바꾼 것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제가 북한에 연루된 것에 대해 원망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를 문초했던 수사관들은 지식인들의 속성을 몰라 막무가내로 다루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들이 대한민국을 대표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조국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東伯林 사건에서 등장한 혐의자 尹伊桑과 李應魯는 각각 독일과 프랑스에서 富와 명예를 누리며 살아갔지만 이들은 한국에 대해 냉정한 만큼 북한에 우호적이었다. 尹伊桑에 의해 인생의 곡절을 겪어야 했던 철학박사 林錫珍의 경우 1979년에 가서야 겨우 그에 대한 출국금지조치가 해제되었다. 이후 독일을 오가며 국제 헤겔학회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어 뒤늦게 철학계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현재 명지대 철학과 명예교수인 林錫珍이 1961년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 「헤겔의 노동의 개념」은 이미 세계헤겔학회에서 선정한 12권의 名著 중 하나로 뽑혀, 林錫珍을 하이데거, 루카치 등에 이은 세계적인 철학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東伯林 사건 이후 국내에서 「배신자」 혹은 「이중 간첩」이란 비난을 받아가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꾸준히 학문에 몰입하여 지금까지 헤겔 저서 10권을 번역, 동양 최고의 헤겔 전문가란 평가와 함께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헤겔의 철학세계를 창조적으로 지향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4년 독일 유학생 부부 간첩으로 활동하다 자수한 韓秉勳씨는 林錫珍 교수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사회가 무려 30년 이상 林錫珍 같은 학자를 깔아 뭉개고 尹伊桑, 宋斗律 같은 이들을 영웅시하게 됐습니다. 林교수야말로 세계적인 석학임에도 국내에서 그가 운영하는 헤겔 학회에 지원하는 재벌 기업은 하나도 없습니다. 요샛말로 「왕따」를 당하면서 홀로 꿋꿋하게 학문에 정진하여 헤겔의 본고장에서까지 머리를 숙이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를 보는 눈이 멀었습니다. 누가 우리의 눈을 멀게 했단 말입니까』
  
   1967년 5월17일 林錫珍 교수의 자수로 시작된 「東伯林 사건」은 1970년 12월25일 크리스마스 특사로 모든 혐의자가 풀려남으로써 공식적으로는 종결된 사건이었다. 내용면에서는 북한 對南공작 기관의 전술적 변화에 한국 정보·수사기관이 재래식 간첩 수사 기법으로 대응하다 본질을 놓쳐버린 사건이었다. 그 결과 정치적으로 국내 지식인 그룹을 反정부 성향으로 전환시킨 계기가 되었고 朴正熙 死後까지 한국 사회 깊숙이 북한의 지하당 공작이 개입하게 되는 여지를 남겨 놓았다.
  
  
  李修吉 박사
  
   독일 유학생 간첩으로 자수한 韓秉勳씨는 독일에서의 尹伊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민족주의자다」라고 말하지요. 그럴 만도 할 겁니다. 그가 무슨 마르크스 철학을 알 것이며 계급혁명을 알겠습니까. 아무런 인문학적인 바탕이 없는 사람입니다. 단지 음악으로 명성을 얻은 것이 유럽 사회에서는 문화 권력가로 활동할 수 있으니 북한이 이를 최대한 이용한 것이지요.
   尹伊桑의 계보를 따라가면 송두율, 김용무 등 최근까지 한국 유학생들을 포섭했던 학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제자들이 국내 학교나 언론, 출판계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경우도 비일비재한 시대가 왔습니다. 서독에서 구축된 지하당 사건인 東伯林 사건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겁니다』
  
  東伯林 사건 혐의자 중 金玉姬(女)는 난수표를 소지하고 있다가 발각된 경우에 속했다. 그는 프랑스에 유학중 북한 공작원에 포섭되었고 뒤에 朴鐘圭 청와대 경호실장 비서로 근무하다 이 사건으로 구속됐다. 1999년 9월19일 MBC텔레비전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끝나지 않은 東伯林 사건」에서 金玉姬의 남편 趙榮秀는 PD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난수표를 갖고 와서 그냥 묻어 두었다가 끝내 버렸다. 이용택 과장의 얘기가 맞다』
  
   李龍澤 당시 수사과장은 『그 난수표는 치마 밑에 숨겨갖고 들어왔던 겁 니다. 하지만 조사결과 한 번도 사용한 적은 없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林錫珍 교수에 의해 신고된 23명이 194명으로 확대되는 중에는 억울한 사람들도 많이 끼어 있었다. 李修吉 박사는 1997년 자신의 회고록 「한강과 라인강 위에 무지개 다리를 놓다(지식산업사)」를 통해 무고하게 연루되어 고문받았던 과정을 일기체 형식으로 비교적 객관적으로 소상하게 밝혀 놓았다.
  
   그가 겪은 고초는 뺨 때리기에서부터 물고문과 전기고문에 이르기까지 말로만 듣던 고문들을 다 겪었다고 한다. 李修吉 박사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지팡이에 의지하며 살았던 1급 장애인 의사였다. 그가 남산 지하실에서 고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수사관이 『언제 북한 대사관에 갔느냐』는 문초에 『언제라고 쓸까요. 불러주시는 대로 쓰겠습니다』라고 했다가 『너같이 지독한 간첩은 처음 본다』며 더 심한 고초를 겪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 정부와 독일 정부 사이에 架橋(가교)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비용을 대면서 시작한 간호원 派獨 사업은 북한이 자금을 대준 공작으로 오인받아 없는 사실을 허위 자백해야 했다고 한다.
  
   공작금 액수와 날짜를 대야 하고 상대방과 접선 장소 등을 써야 했기 때문에 전후관계가 맞지 않으면 다시 고문을 당하는 과정을 되풀이 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李修吉 박사는 독일정부측의 압력이 계속되는 가운데 수사결과 「무혐의」로 밝혀져 20여일 만에 풀려났다. 당시 駐韓 독일 대사관의 페링 대사는 李修吉 박사를 대사관으로 불러 『독일에 돌아가서 조국을 비난한다는 것은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충고를 했다.
  
   1967년 그는 7월20일, 한 달 만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해 공항 회견실에서 서독 언론들과 기자회견을 했다.
  
  <문:당신은 한국 정보 요원들한테 납치되어 갔는가?
  답:나는 간첩 혐의를 받고 있다는 梁참사관의 말을 듣고 해명하기 위해 자진해서 서울에 갔다.
  문:한국 정부의 부정선거 때문에 국민들과 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을 무마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답:이런 질문의 답은 한국의 위정자들이 할 성질의 것이다. 한국 여론은 이번 東伯林 사건의 적발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동시에 민첩한 수사활동에 만족하고 있다. 만일 지금 이러한 사건을 적발하지 못하였으면 뒷날 많은 유학생·간호원·광부들이 희생될 뻔하였다.(하략)>
  
   李修吉 박사의 이런 회견은 물론 사실과 달랐다. 李박사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런 소감문을 썼다.
  
  「한국에서 받은 인간으로서는 당할 수 없는 고문과 치욕을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워서 침을 뱉으면 다시 자기 얼굴에 떨어진다는 것을 생각할 때 독일 사람들 앞에서 나의 조국 한국을 헐뜯을 수가 없었다」
  
  
  
[ 2006-01-27, 17:0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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