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과 남파간첩 김남식 관계
<수령의 영생은 先軍의 영생이며, 金正日 국방위원장이 영도하는 先軍의 영생은 바로 수령의 영생인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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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 장관 내정자 이종석 연구
  
  남파간첩 金南植, 1980년대 후반 이후 親北논리 전파
  
   李鍾奭씨는 소위 북한전문가 金南植으로부터 대학원 재학시절부터 사사(師事)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李내정자와 교류했던 O씨는 『李鍾奭씨는 80년 대 후반 북한학을 공부하는 대학원 석*박사들을 金南植씨에게 소개하고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할 정도로 李씨와 金씨는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고 말했다.
  
   李鍾奭씨가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 등에서 「당대 최고의 북한전문가」로 격찬하고 있는 金南植은 본명이 김동만(金東滿)으로 63년 철원 지역으로 간첩으로 침투됐다 같은 해 검거된 인물이다.
  
   金南植은 검거 후 남로당 서울시당 선전부장 출신 L씨, 북한 농업성 수석비서관 출신 Y씨, 북한 로동신문 기자 출신 L씨와 팀을 이뤄 「逆공작(검거된 간첩을 통해 간첩을 역으로 검거하는 작업)」에 투입됐고 이를 조건으로 기소유예처분을 받게 됐다.
  
   『북한 민중들의 金正日 중심 일심단결, 틀림없는 사실(?)』
  
   金南植은 1980년대 후반 들어 차츰 親北的 성향의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2004년 7월9일 인터넷 매체 「통일뉴스」에 기고한 「북한의 永生 10년의 이해를 위하여」에서 「金日成 영생론」과 관련된 북한 노동신문의 글을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金日成 수령을 영원한 수령으로 모시는 조건에서 先軍정치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고, 永生과 先軍은 하나의 결합체로서 계속 이어져 나올 것이 분명하다…. 수령의 영생은 先軍의 영생이며, 金正日 국방위원장이 영도하는 先軍의 영생은 바로 수령의 영생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金日成 수령은 영원한 수령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영생 십년 백년 천년이라는 것도 여기서 근거해서 나온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고 북한 인민들의 정서에서 볼 때 영생 10년은 낯선 용어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용어라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金南植은 2004년 출판한 「21세기 우리민족이야기」에 수록된 「북한의 사회주의론」이라는 글에서 사회주의를 공상적 사회주의, 유물사관적 과학적 사회주의, 주체사관적 과학적 사회주의로 나눈 뒤 『主體의 사회주의는 사람 위주의 사회주의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사람을 귀중히 여기고 사람의 본성적 요구, 즉 사회정치적 생명인 자주성을 가장 훌륭히 구현해 나간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金씨는 또 같은 책에 수록된 「金正日시대의 이해를 위하여-사상론과 수령론을 중심으로」라는 글을 통해 북한의 수령(首領)과 수령론(首領論)에 대해 각각『(수령은) 개별적 사람들의 생명의 중심이 뇌수인 것처럼 사회정치적 집단의 생명중심은 집단의 최고 뇌수』『(수령론은) 노동계급의 혁명투쟁은 수령에 의해 개척되고 수령의 영도에 의해서만 승리할 수 있다는 논리인 것이다』라며 『강성대국 건설에서 방법론이며 지도이론으로 되어있는 수령론은 계속 그 기능을 발휘해 나갈 것이 분명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金씨는 통일뉴스에 기고한 「先軍정치란 무엇인가. 2005년 북한의 先軍정치 10주년에 즈음하여」라는 글을 통해 金正日을 「대담하고 통 큰 정치가」로, 先軍정치를 「金正日 국방위원장이 영원한 수령인 金日成 주석이 개척하고 전진시킨 주체혁명위업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정치방식」 「金日成 주석의 先軍혁명영도를 오늘의 시대적 요구에 따라 새롭게 계승, 창조시킨 정치방식」 「세계정치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독창적인 정치방식」이라고 격찬했다.
  
   그는 또 『우리 민족 백년숙적인 미국, 일본과의 적대적 모순관계가 지속되고 있는 것을 항상 잊어서는 안 된다』며 『북한의 軍과 민중들은 金正日 국방위원장이 창조한 先軍혁명, 先軍사상에 입각한 先軍정치가 얼마나 올바른 정치방식인가를 새삼 느낄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의 軍과 민중들은 더욱 더 金正日 국방위원장 중심으로 일심 단결할 것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등의 주장을 폈다.
  
   『민족공조로 6 15실현하면 겁날 것 없다(?)』
  
   金南植은 민족공조로 표현되는 金正日 정권과의 공조이론 전파에도 힘을 기울여 온 인물이다. 金 씨는 「21세기우리민족이야기」 서문에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과 6 15공동선언의 발표는 이러한 민족의 불행을 씻고 하나의 민족으로서 오천 년을 이어온 빛나는 민족사를 주체적으로 창조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계기가 마련된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통일의 이정표인 6 15공동선언 실천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全 민족적 차원에서의 자주권 확보가 기본과제이며 이는 「우리민족끼리」라는 민족공조로서만 해결 가능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한반도의 모순구조가 「남북한 우리 민족 대 외세」와의 관계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한 것이다.』고 적고 있다.
  
   그는 또 2004년 12월13일 통일뉴스와의 대담에서 2005년을 전망하며『외세와 결탁한 냉전수구세력인 내부의 반민족 외세굴종 反통일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한 우리민족이 하나가 되어 6 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공조가 강화됐을 때 이러한 대내외적 악조건들은 그리 두려움이 될 수가 없다』는 논리를 폈다.
  
   2003년 7월24일 도쿄에서 개최된 6 15남북공동선언 발표 3주년 기념 통일강연회에서는 『미국은 자기들의 추종 국가들을 내세워 북한을 몰아붙이고 있지만, 남북간에 민족공조로 6 15공동선언을 제대로 실현시켜나가고 민족대단결과 우리문제는 우리가 주체가 되어 풀어 나간다는 민족자주의식의 강력한 축이 되면 지구상에서 겁날 것이 없습니다...방법은 그 길 밖에 없습니다』등의 주장을 폈다.
  
   「민족통일장」, 김근태, 김원웅, 이부영 씨 등 조문 잇따라
  
   지난 해 1월7일 金南植이 사망하자 정치인들과 민족해방(NL)계열 단체들이 대거 참여, 金씨에 대한 성대한 장례행사를 치러졌다.
  
   이부영 열우당 前의원, 천영세 민노당 의원 등을 비롯, 민족해방(NL)계열 단체인 「통일연대」한상렬 대표, 강정구 지도위원,「전국연합」 오종렬 상임의장 등을 위원장으로 하는 장례위원회는 金씨의 장례를 「통일애국지사 金南植 선생 민족통일장」으로 치렀다.
  
   金씨의 장례에는 현역 정치인들의 조문도 이어졌다. 1월 8일 김원웅 열우당 의원과 김혜경 민노당 대표 조문에 이어 1월 9일에는 이부영 前 의원, 통일부 이봉조 차관이 조문을 갔고, 1월 10일에는 김근태 열우당 의원, 이재정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등이 조문했다. 김근태 의원은 『선생님, 선생님을 우리 가슴 깊이 간직하겠습니다』라는 문구를 방명록에 남겼다.
  
   金南植이 고문으로 있던 통일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김근태 의원은 『젊었을 때 열정을 갖고 있더라도 나이가 들면 시들어지는데 한결같은 민족에 대한 사랑을 갖고 있던 분』이라고 고인을 회상하고 『한번도 원칙을 포기한 적 없는 활동가며 지식인이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김원웅 의원과 이재정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은 각각 『한평생 민족을 부둥켜안고 온갖 분단의 시련 속에서 80평생을 보내신 金南植 선생이 남북분단의 장벽이 무너지는 새로운 기운이 일어나는 이 시점에 온 민족과 함께 호흡하지 못하시고 떠나서 안타깝다』『金南植 선생님은 민족통일운동사의 큰 업적을 이룬 분이며 존경해 마지않던 분이다. 그 업적을 높이 치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金南植, 위장전향 再접선 가능성
  
   金南植을 검거 시부터 담당했던 전직 기무사 간부 D씨는 『金씨는 다른 간첩출신자들과 달리 공작 성과가 없는 상태에서 기소유예처분을 받았고, 이후에도 그를 통해 검거한 간첩은 전혀 없었다. 金씨는 다른 전향자들과 다른 케이스였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배신」을 하지 않았고, 같은 맥락에서 북한에 남은 가족들도 무사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金南植은 이후 정부의 도움으로 여러 기관에서 연구원으로서 일하며 反共강연 연사 등으로 활동했으나, 80년대 이후 정부의 관리가 소홀해지자 애매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D씨는 『기무사 내부에서 金南植의 위장전향 내지 再접선의 의혹이 제기됐지만, 시간이 지나 담당자가 교체되고 정권이 바뀌면서 흐지부지됐다. 나 역시 80년대 기무사를 떠나면서 추정만 해왔을 뿐 손을 쓸 수 없었다』고 말했다.
  
   북한공작원으로 수 차 남파됐다 70년대 후반 자수한 E씨는 金南植에 대해 이렇게 술회한다.
  
  『공안분실을 나와 처음 만나 본 남한 사람이 당시 국책기관 연구위원으로 있던 金南植씨였다. 대화를 할수록 모호한 對北觀을 드러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가 간첩 출신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됐다. 그 사실을 알고난 후 「완전히 돌아선 것이 아니구나」싶었다.』
  
   E씨는 또 이렇게 말했다.
  
  『金南植은 80년대 모 기관 연구위원을 그만두고 친북적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일자리를 잃고 돈도 궁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만일 재접선을 했다면 그 무렵이 아니겠는가 싶다』
  조선로동당 對南부서에서 근무하다 탈북한 Y씨는 학문의 자유를 근거로 제기되는 친북적 주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식인 간첩의 역할은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지 않으면서 親北的 주장을 퍼뜨리는 것이다. 북한체제를 합리화하는 논리들은 북한식의 낯 뜨거운 미화가 아니어도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그 같은 이유 때문에 북한은 지식인들에게 많은 공을 들여왔다』
  
   김남식 본인 역시 공안당국의 관리 속에서 살게 되면서 강연과 저술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소위'침묵의 시절'에 대해 '노예의 언어로 말하고 글을 쓸 수 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끝) (konas)
  
   김성욱 미래한국신문 기자
  
  
  
[ 2006-01-30, 11:0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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