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과 한민족
우리민족이 발양시켜 놓은 콩 문화를 지금 온 세계에 팔아먹고 있는 것은 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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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재배의 기원 민족에 관하여
  전 통일원장관 許文道
  
  
  
  우리민족과 발효 콩과의 인연
  
   삼국통일을 완성한 文武王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임금으로 장가를 가게 되었다.(AD 683년 2월) 왕이 보낸 납채(納采)품목이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책인 삼국사기에 실려있다. 폐백(幣帛비단옷감) 15수레, 米酒油蜜醬 脯 가 135수레, 벼가 150수레이다.
   혼수품속의 米酒油蜜醬 脯 에 주목한다. 국사학의 태두였던 고 이병도 선생은 「쌀, 술, 기름, 꿀, 간장, 된장, 포, 식혜」로 번역하였다.(『삼국사기』, 이병도 역주, 을유문화사) 우리가 콩과 관련하여 관심을 갖는 혼수품 속의 '蜜醬 '를 이병도 선생의 「꿀, 간장, 된장」과는 달리 「간장, 된장」으로만 번역해 놓은 소장 사학자 그룹이 있다.(『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청년사)
   이들 두 경우가 당시의 콩 가공품인 蜜醬에 대해 실체를 알고 번역한 것 같지는 않다. 한국의 콩 가공품이 그대로 전해져 코피를 해서 일용하던 당시의 일본에는 내용을 알게 하는 몇가지 기록들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천착한 모리(森浩一 )와 카나자와(金澤庄三郞 )의 소론을 종합하면 三國史記의 蜜醬은 「메주」라 해야 할 것이다.
   당시 일본은 일본된장 미소를 고구려에서 온 것이라 하여 高麗醬이라 표기해 놓고 읽기는 「미소」라고 읽었고, 명칭에 가깝게 未醬이라고 쓰기도 했다. 에도시대의 유명한 학자로 朝鮮통신사도 많이 만났던 아라이(新井白石)는 「미소」를 高麗의 土語에서 온 것이라 하고 12세기초에 고려에 사행(使行)했던 宋나라 孫穆의 鷄林類事란 책에서 「醬은 蜜組라 한다.」고한 이두표기 까지 들어 「미소」가 「메주」에서 온 것임을 단정하고 있다. 카나자와(金澤)는 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참고로 메주란 말은 훈몽자회나 이두考를 참고 할 때 미조→며조→메조→메주로 변해온 것 같다.
  
   7세기말의 삼국사기에는 콩과 연관된 기록이 또 있다.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당이 처음 약속대로 백제 땅을 신라에 주지 않고 웅진(공주)에 도독부를 두고 군대를 주둔시켜 직할통치를 하러 들었다. 신라는 실력으로 당나라 군대를 몰아 부치면서 백제 땅을 잠식해 들어갔다. 당과 신라의 외교적인 관계는 어디까지나 天子와 外臣인 책봉王의 관계이다. 당의 주둔군 사령관인 설인귀는 天軍(천자 나라의 군대)한테 이럴 수 있느냐며 문무왕에게 강력한 항의 편지를 보냈다. 이에 대한 문무왕의 답서는 우리역사상 드물게 보는 외교명문이다. 당대의 大문장가인 强首가 초했을 것이다. 이 답서 속에 콩이 두 번 나온다.
   하나는 熊津道斷, 絶於鹽 . 이병도 역은 「웅진도(웅진에 통하는 길)가 차단되어 염시의 절핍을 보게 되었다.」 鹽 에 대한 보역으로 「된장류」라고만 해 놓았다. 「염시」의 실체는 辛納豆일 것이다. 辛납두는 삶은 콩에 콩누룩을 섞어 소금물에 담궜다가 발효 시킨다음 말려서 만드는데, 지금도 일본의 큰 사찰에 전해온다. 다수인원의 공동생활에 불가결한 일용식이고, 그래서 고대의 전쟁에는 군량으로 필수였다.
   6세기에 백제로부터 일본에 불교가 전해지면서 그때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납두를 일본에서는 寺납두 라고도 하는데, 절의 납소(納所·살림처)에서 하급승려인 납자(納者)들이 만들었다고 納豆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日本납두인 絲引납두(실 빠지는 납두)는 콩을 삶아 짚에 싸서 발효시키는 우리 청국장과 정확하게 제법이 같은데 우리나라에는 이것만 남았다.
   「청국장」이란 호칭이 어째서 생겼는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청나라에서 온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법한데, 청을 일으킨 여진족이 역사무대에 등장하기 전부터 우리민족은 淡 를 만들어 먹고 있었고, 여진은 채취·수렵 민족이라 만주에서 발원했다 해도 콩과는 무관한 사람들이다. 신문 같은데 보면 청국장이 「戰國장」이란 말에서 왔다고도 하는데 맞지 않을 것이다. 조선조 중엽의 훈민정음 한자사전인 훈몽자회에는 를 「젼국 시」라고 했고, 우리말 漢詩풀이인 「杜詩언해」도 花 絲熟을「젼구기 노マ니 시리 닉고」라고 하였다. 우리가 오랫동안 「젼국」혹은 「젼국장」이라고 해오던 것이 틀림없는데, 어느새 오해받을 「청국장」으로 되어 있는 것은 콩 전문가들이 들어 바로잡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文武王의 답설인귀書에 나오는 또 하나의 콩 구절은 太陽之曜, 雖不廻光, 葵藿本心, 猶懷向日(태양의별이 비록 빛을 주지 않아도, 아욱과 어린 콩잎의 마음은 오히려 해를 바라고 있다.) 이다. 주체성을 견지하려는 소국이 대국의 턱을 들이받으면서도 오히려 그 마음을 붙들어 두고자하는 절묘한 표현이다.
   藿(곽)이란 글자에 주목해 둘 필요가 있다. 콩잎 특히 어린 콩잎을 말한다. 콩의 재배기원과 관련하여 곧잘 인용되는 Hymowitz( )는 주로 詩 에 근거하여 기원전 11세기에 이미 중국에서는 콩 농경이 시작되고 있은 것으로 보는데, 시경 속에서 연대가 올라갈수록 콩은 열매로서보다는 아욱 같은 채소 형태로도 이용된 것 같은 감이 든다.
   詩 의 〔小雅·小宛〕의 中原有菽의 숙을 주석가는 藿이라 하고 있다. 가장 연대를 올려 잡을 수 있는 빈풍〔 風·七月〕의 七月 烹葵及菽의 숙은 아욱과 함께 국 끓여 먹는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나라 삼국사기에 처음 콩이 등장하는 것은 신라 일성왕 6년(AD139) 7월의 隕霜殺菽(서리가 내려 콩을 해쳤다)이다. 일성왕조의 그해 기록에 이 기사만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콩 농사는 대단히 중대한 사안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운상살숙」이와 꼭 같은 문자가 춘추시대의 노(魯)나라 역사를 적은 春秋경의 定公元년(B.C 509)조에 보인다. 隕霜殺菽, 가을 초입에 서리가 내려 콩 농사를 망친 것에 온 나라가 관심을 가질 정도로 콩 재배가 보편화 되어있음을 나타내는 관용구급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콩의 最古기록인 신라 일성왕(AD139) 무렵의 중국사람들의 콩 인식을 알려주는 흥미 있는 일화가 소설 삼국지에 있다.
   조조는 큰아들 曹丕(조비)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로 부터 선양을 받아 등극할 모든 채비를 갖춰놓고 AD 220에 눈을 감았다. 둘째 아들 曹植까지 합쳐 조조 삼부자는 그때까지 중국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詩才를 가졌다는 평을 들었다. 詩에 관한한 재주는 동생 植이 형보다 하나 위였다. 조조는 상당한 기간 동생 植을 후계자로 마음에 두기도 했던 모양이다. 드디어 皇位에 오른 형인 魏文帝가 동생을 거세하는 장면이 벌어진다. 동기간인지라 文帝·丕는 植에게 詩로서 내기를 걸었다. 칠보(七步)를 걸어 시를 짖지 못하면 처형하겠다는 것이었다. 한 발자국마다 한 귀씩 읊어 일곱 발자국만에 형인 황제를 눈물 짖게 했다는 유명한 칠보시는 다음과 같다.
   煮豆持作羹 콩을 삶아 국을 만들고
   以爲汁 시를 걸러 즙을 만든다.
   在釜下燃 콩깍지는 가마 밑에서 타고
   豆在釜中泣 콩알은 가마 속에서 우는구나.
   本時同根生 원래 한 뿌리에서 나와
   相煎何太急 어찌 그렇게 서로 볶아대는가.
  
   여기에서 煮豆燃 (콩은 삶기고 콩깍지는 불탄다)라는 숙어가 생겨 가까운 형제간이 서로 해쳐가며 다툰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조식이 위급한 상황에서 콩을 주제로 시를 지으려 든 데에서 콩이 3세기 전후에서 중국사람들의 일상생활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게된다. 국도 끓이고 발효가공품도 먹고 스프도 만들고 불도 때는 등으로.
  
  
   콩의 재배기원族에 대하여
  
   등나무, 스위트피, 낙화생, 아카시아, 클로버, 감초 등까지 콩과식물이라니까, 그 분포는 열대우림 지대로부터 아한대의 사막지대까지, 해변에서 고산지대까지 세계적으로 광범 하다고 한다.
   그러나 콩만은 동아시아의 특산물이라 할 것이다. 쌀, 밀 등이 천년도 더 전에 세계적으로 퍼져나가 인류의 주식의 자리를 차지한 것을 생각하면, 온 세계가 콩의 중요성을 알아버린 오늘, 콩과 동아시아의 특수한 인문적 관계는 특기할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세한 것은 다른 데로 미루겠지만 콩이 서양세계에 알려지고 전해진 것은 18세기 이후이다. 콩이 갖는 생리활성물질의 조화롭고 뛰어난 생체방어기능이 날이 갈수록 확인되는 속에서, 동아시아인들 만이 2천년도 더 이전부터 특수하고 고유한 콩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는 사실은, 오늘날 미국이 전세계의 60%의 콩을 생산한다해도 그 중요성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하겠다.
  
  
   콩 재배 기원지
  
   콩의 재배 기원지 추정에 있어서는 많은 이들이 Vavilov의 gene center theory를 원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유전적 변이의 다양성이 현저하고 야생종 들이 존재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바빌로프에 따르면 작물은 그 근원지에서 가까울수록 우성의 대립인자가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다.(④)
   그동안 학계는 바빌로프의 이론에 따라 중국동북부 즉 만주지역을 재배 기원지로 하다가 중간에 Hymowitz등의 중국 북부설이 나왔고 근년에는 중국남부설 주장자가 많아졌다 한다. 중국남부설 주장자 중에는 민족식물학적 견지라 하여 콩의 조리·가공법의 다양성 등을 함께 생각하여 중국남쪽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중국 남부의 콩 요리의 발전이 외래 자극에 의한 근세 이후의 것이라면 논의거리로 삼기어렵다.)
   세계학계는 지금 기원지를 두고 중국 남부설과 북부설이 대립하고, 중국동북부·만주설은 들어가 버렸다 한다. (海妻矩彦 ⑤)
   중국동북부 기원설이 부정된 연유를 밝혀놓은 문헌에 비전문적인 나는 접할 기회가 없었다. 생각컨데 중국의 연구자들이 콩에 관한 최고의 기록으로 치는 詩 에의 시의 채록경위를 유추하여 재배기원을 지금부터 5,000년 전으로 잡는데서(Junyi Gai, Wentto Guo ⑥) 문제는 생긴 것 같다. 이들은 지금부터 2,700∼3,000년 전에 해당 글자가 생기면서 콩에 관한 얘기들은 이내 기록되었는데, 그같은 기록 대상이 된 구전(口 )의 전승은 또 3,600년이나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둘을 합하면 재배지 콩의 기원은 5,000여년전 이 된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만주 기원설은 약해진다. 재배는 사람이 하는 것이지 땅이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5,000년 전에는 만주에 농경족이 없었는데, 어떻게 재배기원지가 있겠는가.
  
  
  콩 글자 풀이와 재배기원
  
   어떤 서양의 언어학자는 중국 한자를 보고 그림 뎃쌍이라 했다 한다. 漢字의 글자는 사물의 모양과 의미와 음을 동시에 표현한다. 글자 하나가 하나의 센텐스이기도 하다. 그래서 漢字를 문자언어라고도 한다. 漢字는 당연히 글자 속에 역사를 내포하고 있다.
   콩의 의미로 쓰이는 豆는 원래 祭器(제기)의 상형문자로서 그 모양이 콩꼬투리와 닮았다 하여 콩으로 쓰이는데 뒷날의 일이고, 더 올라가면 菽, ○ ,叔의 세 가지가 있었다. 중국의 최고의 사전인 후한 때 許愼 의 說文解子에서 세 글자의 글자 풀이를 본다. 비슷한 글자니까 심플한 글자가 먼저 만들어 졌을 것이다. ○을 說文解子는 먼저 비슷한 모양의 篆文(전문)을 그려놓고 「상형이다. 지상에 두 잎과 지하에 뿌리가 뻗은 콩의 모양을 그린 것으로, 콩의 의미를 나타낸다.」고 했다. 그 동안의 연구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는지 日本의 큰사전에 제일 발생이 빠른 갑골문(甲骨文)이나 그 다음 단계인 金文에 이 글자는 없다.
   그 다음 叔자의 說文解子를 본다. 「叔은 줍는다 이다. 又에 ○의 소리를 보탰다」이다. 일본 모로하시(諸橋) 큰사전의 풀이에는 갑골문과 금문과 전문의 자체(字 )를 실어놓고 篆文의 자체를 풀어서 「콩을 줍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글자가 金文에서는 弔와 통해서, 슬퍼하고 불쌍히 여긴다는 뜻을 나타내는데, 아재비란 뜻의 叔이 甲骨文에서 弔자 모양이었던 것도, 불쌍히 여겨야 할 앳된 아이란 뜻의 의미를 기본으로 하고 있어서 일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갑골문 이나 금문단계에서 叔이란 글자는 콩과는 관계없는 글자였다. 생각해보면 叔자 속의 又는 원래 「오른쪽」의 의미로 오른손의 象形이라 하는데 오른손 앞에 콩이 있으니까 줍는다는 의미로 된 것 같다. 그러니까 콩은 줍는다는 叔은 갑골문이나 금석문이 나타난 殷대 이후에 나타난 글자로 콩을 줍는 단계 즉 농경적 수확이 아니라 야생적 채취의 단계에서 만들어진 글자임을 짐작케 된다.
   형질이 좋아 재배종에 가가운 야생종이 화북 여기저기에 군생하고 있어서 애써 재배하기 보다는 어른들은 아니고 아이들을 시켜 줍기만 하는 대상으로서 콩은 오래 동안 황하문명 발생지 중원의 민족들과 관계를 가졌을지 모른다. 콩알의 저장이 있었다 해도 얼마든지 농경이 아닐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菽이라는 글자, 콩을 의미하는 글자 중에는 획이 제일 많은 글자이다, 모로하시(諸橋)의 큰사전에 갑골문이나 금문이나 篆字는 보이지 않는다. 풀이는 콩으로서, 豆류의 총칭이고, ○과 같다 했다. 주석서인 說文通訓은 菽을 옛날에는 ○이라고 했고, 漢나라 때에 豆라 했다 한다. 그러므로 草두가 붙는 숙이 ○보다 나중에 만들어 진 것은 틀림없다. 詩 의 여기저기에 菽이 등장하는 노래 중에서 상한인 BC 9세기(『漢字百話』,白川靜)에 가까운 시기에 채록된 노래는 風(빈풍)속의 七月이란 제목의 시로 보인다. 이란 섬서성 서북쪽에 있던 周왕조의 발상지다. 周가 옮겨왔던 몇 개의 도읍중에 제일 서쪽에 있던 지역이다. 「七月」이란 시는 빈지방 농촌의 월령가이다. 周武王이 殷(은)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얻게 된 것은 BC 1122년, 문자를 만들어 가며 노래를 채집한 것은 그 이후 일 것이다. 周의 조정은 노래를 채집하는 단계에서 콩이 채집 상태에서 농경상태로 전환했기 때문에 채취시대에 이미 있었던 ○이나 叔을 쓰지 않고 (초두)를 붙여 菽이란 글자를 새로 만든 것이 아닐까. 고고학과 금석문연구를 더 기다려야 할 문제이다.
   殷이 황하의 河谷에 왕조를 세운 것은 BC 1500년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의 글자와 연관된 검토를 딛고서면 갑골문이나 금문이 등장하는 殷대의 전기간은 아니고 周가 되고 나서도 한참 있다가 중원의 민족들이 콩을 농경화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대강 BC 9세기 전후로 볼수 있을 것이다.
  
  융숙(戎菽)과 大豆전쟁
  
   콩과 관련하여 오래된 사연의 기록은 詩 다음으로 春秋 의 주석서인 春秋穀梁 에 보인다. 春秋의(莊公31년조 AD662) 원문은 齊候來獻戎捷(齊候가 와서 전쟁에서 노획한 것을 바쳤다.)이다 이에 대한 穀梁 의 설명은 獻戎捷, 軍得曰捷, 戎菽也. (헌융첩이란, 전쟁에서 얻은 것이 첩이고, 그 얻은 것은 융숙 이다.)이다. 후漢末의대학자 鄭玄(AD 127∼200)은 「戎菽은 大豆이다」라고 주를 남겼다.
   이와 연관되는 기사가 司馬遷史記의 齋太公世家 桓公 23년(BC 663)에 있다. 「산융(山戎)이 燕을 치자, 연이 위급을 齋나라에 알렸다. 齋의 桓은 燕을 구하고 山戎을 쳤으며 끝내 孤竹까지 갔다가 되돌아 왔다.」 史記와 춘추곡량전의 기사를 아우르면 「BC 623에 山戎이 연나라를 쳤는데, 연이 위급을 제나라에 알리자 제나라의 환공이 연을 구해주고, 북으로 산융을 정벌하고 고죽국 지역까지 갔다가 융숙을 얻어 돌아왔는데, 제환공은 이 융숙(戎菽)을 이웃 노나라에 주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사실을 부연하면서 콩의 재배와 관련하여 결정적 이라할 기사가 「管子」에 보인다. 「관자」란 齊환공을 春秋五覇의 필두로 만든 중국역사상의 명재상인 管仲의 治國論같은 저작이다.
   「管子戒편」에「北伐山戎, 出冬蔥與戎菽, 布之天下.」라고 있다. 북쪽으로 산융을 쳐서 겨울파와 융숙을 가져와 온 세상에 폈다는 것이다. 이는 대두재배사상에 결정적인 사건이 아닌가. 사실 詩 속의 菽이란 그것이 콩類이라는 것 일뿐 그것이 대두인지, 소두인지, 녹두인지 강남콩인지 조차도 알 길이 없다. 훗날의 주석일지라도 여기서 처음으로 豆가 아니고 大豆가 등장하는 것이다. 제갈량이 모델로 삼고 싶어했던 管仲은 「管子」를 보면 농업을 통한 식산흥국에 고도의 전략을 구사했던 인물이다.
   산동반도의 바다 쪽에 노(魯)나라가 있고 산동반도의 안쪽으로 인접해 齊나라가 있고 그 북쪽에 지금 북경지방에 연나라가 있었다. 연나라의 북쪽인 山戎의 지역은 중국 전체적으는 동북지역이다.
   농업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재상 관중이 山戎이 콩을 재배하고 있다는 정보를 캣취하여 알굵은 산융의 대두종자를, 정벌했던 기회에 가져와 「布之天下」했던 것이다. 혹은 관중의 국가경영 스타일로 봐서 戎菽을 얻고자 연나라 도운다면서 콩을 재배하는 산융지역을 거쳐 孤竹國까지 갔는지 모른다. 고대중국의 BC 623의 전쟁을 「大豆전쟁」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BC 622의 고대중국에서 중국동북지역의 알굵은 山戎의 대두콩이 전 중국에 퍼지게 되었다는 것은 대두 재배사상의 일대혁명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오늘날의 東아시아의 콩 역사는 여기서 시작됐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대륙 쪽으로부터 만주로의 초입부근에 있던 山戎의 콩이 BC 622 단계에서 온 중국에 퍼졌다는 사실이 오늘 갖는 의미는 크다. Hymowitz가 지적하기를, 「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재배품종은, 중국, 일본 등으로부터 도입한 11개 품종이 관계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Mandarin이란 중국유래의 품종은 아메리카 中北部의 재배품종의 84%에 대해 그 육성에 계보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아메리카의 주요품종은 어느것이나 無限伸育型의 草型을 나타내는데, 중국 동북부계(만주계)로 부터 유래된 것이 명료하다.」고 했다 한다(海妻矩彦 ⑦). 전세계 콩의 60%를 점하는 아메리카 콩을 생각할 때 BC 622의 戎菽혁명의 의미는 심대하다 해야 할 것이다.
  
  山戎은 韓族이다.
  
   필자의 과문인지 모르나 그동안 콩의 재배기원을 따지는 중국이나 日本의 학자들이 史書속의 戎菽의 布之天下의 기사에 주목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이유의 일단은 山戎, 戎菽의 戎에 있을 것이다. 말하것도 없이 東夷, 北狄, 西戎, 南 인만큼 서융의 戎한글자로 중국서쪽의 오랑캐 즉 중국 서변의 이민족을 중국이 일컫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연나라 북쪽의 戎이란 동夷라면 몰라도 도대체가 있을수 없는 존재로 뭔가 착오로 받아 들여졌을지 모른다.
   작년에 주로 중국쪽의 사료해석과 고고학의 성과를 딛고서, 통찰력 넘치는 추론으로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신화의 줄거리에서 우리민족의 한반도에의 진입과정을 역사로서 그려내는 획기적 작업을 농업경제학자인 김성호(⑧)씨가 해냈다. 그의 소론을 따라가면 齊환공이 BC 623에 정벌했던 연나라 북방의 山戎이 단군의 후손인 韓씨족임을 알게 된다. 사마천史記의 五帝본기에 「요임금이 三苗를 西戎으로 되게 했다.」가 있다. 이 「서융」이 동진하여 周2대의 成王 12년(1103)에는 詩 . 大雅韓奕편에 나오는 섬서성 韓城의 주인공이 되고, 周의 11대 선왕(BC 827∼782)때에 燕의 혜왕이 북경부근에 연나라를 재건 할 때에 韓城의 한씨족들은 동방으로 함께 이동하여 BC 810년 북경동북방 대능하(大凌河) 중류의 아사달(지금의 遼寧省朝陽)에 韓씨 조선을 세웠다. 역사 속의 우리 민족처럼 상투를 틀던 민족인 묘족들은 요임금이 西戎으로 하고 나서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韓씨라 이름 붙여도 漢族들은 계속 山戎 혹은 西戎으로 불렀다 한다. 바로 이들이 오늘 우리민족의 하나의 큰 뿌리 인 것이다.
   그러므로 齊환공이 BC 623년에 침공하여 大豆종자를 거둬온 山戎은 바로 韓씨 조선이다. 이때의 제환공의 침공의 반환점인 고죽(孤竹)은 주무왕에 항의하여 수양산에 들어가 버렸다는 백이·숙제의 본국으로 北京동쪽 河(난하)하류의 秦皇島부근인데 여기까지가 한씨조선의 경역 이었다 한다. 구당서(舊唐書)권63에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이라 했는데, 이를 두고 김성호씨는 한씨조선의 후예가 고구려의 주축세력을 형성했기 때문에 이 같은 얘기를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齊나라의 명재상 管仲에게 콩을 건네준 산융이 韓씨 조선이며 그 후예가 고구려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콩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니까 주의 본거지 인근인 섬서지역에서 농경문화를 터득한 한씨족이 BC 9세기말 만주의 중국동북평원의 초입인 朝陽에 도달하여 우수한 형질의 야생콩을 만나 콩 농사를 시작한 것이 아닌가한다. 그래서 韓族들은 동아시아 어떤 종족 보다 일찍부터 콩 문화를 발전 시켜왔다.
  
  한족의 세계적 콩 문화
  
   중국사람들은 일찍부터 우리 韓族의 콩 문화에 주목했던 것 같다. 콩의 재배기원지로 일부 학자들이 주목했던 중국의 동북평원이 있는 만주에서 농경문화를 영위한 민족은 부여, 고구려, 발해의 우리민족이다. 오늘날의 국경개념으로 만주가 중국 땅이라고 그때 중국사람들이 만주에 가서 콩 농사를 지었던 것은 아니다. 역사시대에 들어와 만주에는 선비, 오환, 여진, 거란, 말갈 등이 있었지만 그들은 농경족이 아니었다. 콩 문화를 발전시킨 것은 우리민족이다. 중국고대의 농사·요리서로 가장 권위있는 북위의 가사협이 지은 제민요술(齊民要術 6세기)의 二권 제6 大豆의 첫 머리의 주에 大豆류 품종 4가지를 들어 놓고 있는데 첫째와 둘째가 黃高麗豆, 黑高麗豆이다. 물론 이때의 고려란 고구려이다. 고대 日本이 고구려에서 왔다고 高麗醬이라 써놓고 미소라 읽었다는 것을 앞에서 보았다. 3세기의 魏誌·東夷 ·고구려조에 善藏釀이란 구절이 있다. 잘 갈무리하고 띄운다는 얘기인데, 술을 만드는 것도 釀이라 할 수 있지만, 술 만들기라면 뒷전에 가지 않을 중국사람들이 고구려 사람들의 술 만들기에 관심 가졌을리는 없고, 역시 그것은 고구려의 콩 발효문화 일 것이다.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의 콩 문화도 중국은 주목했다.
   신당서(新唐書) 발해조에 「속에서 귀히여기는 것은 남해의 다시마와 책성(柵城)의 시( )」라 했다. 책성이란 발해의 수도 東京용천부로 지금의 吉林省 寧安 부근이다. 「시」가 納頭류인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콩가루를 만들어서 기기묘묘한 꽃떡을 만들면 고급 콩 문화 인 것일까. 콩의 발효가 고급 콩 문화 일 것이다.
   발효를 통해 콩에 더욱 많은 생리활성물질이 생성되는 것을 알게 된 오늘, 만주땅은 중국이 되었어도 만주 땅에서 발양된 콩 문화는 우리민족과 함께 있다. 된장, 청국장, 담북장 등등 각양각색으로 삼천리 강산의 골짝 골짝마다 꽃피어온 우리민족의 콩 발효문화가 지금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를 찾아내고 현대과학으로 조명하여 세계 앞에 내어놓아야 할 화급한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열 받을 얘기 하나만 하고 끝내겠다. 영국에서 발행된 옥스퍼드 대사전에 콩을 의미하는 영어 Soy의 어원 설명이 있다. 「일본말인 Soy(혹은 Shoy)로부터 왔다. Soy는 일본말 Sho-yu의 Colloquial form(구어체)이다.」 일본말 간장에서 콩을 의미하는 영어 Soy는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두부의 일본말인 Tofu가 그대로 영어로 된 것은 다 아는 얘기다. 일본최대의 간장공장인 기꼬망은 1972년 미국의 위스콘신주에 현대식 대규모 간장공장을 지었다 한다.(⑨) 우리민족이 발양시켜 놓은 콩 문화를 지금 온 세계에 팔아먹고 있는 것은 일본이다.
  
  (2001. 11. 7. 칠보산 밑에서)
  
  
  
  
  
  인용문헌
  
  1. 森浩 - 편, 『味 ·醬油·酒のきに道』, 小學館 (1987).
  
  2. 金澤庄三郞, 『鹽と味 』, 朝鮮學報 9집 (1959).
  
  3. Hymowitz, T :ON the domestication of soybean. Econ. Bot, 23. (1970).
  
  4. 飯家宗未, 矢口暢子, 田中義一, : 植物遺傳資源をめぐる諸問題 4 .
   農業および園藝 第59卷 第7號, pp. 873-876 (1984).
  
  5. 海妻矩彦, 植物遺傳資源集成, pp. 450-457 (1989).
  
  6. Gai, Junyi, Guo, Wento : History of maodou production in China, proceedings
   of Second International Vegetable Soybean Conference, Washington State University.
   pp. 41-47 (2001).
  
  7. 海妻矩彦, 植物遺傳資源集成, pp. 450-457 (1989).
  
  8. 김성호 : 씨성으로 본 韓日민족의 기원. 푸른숲 (2000).
  
  9. 山內文男 : 大豆食品の 歷史, 大豆の科學. 朝食書店 (1992).
  
  
[ 2006-03-06, 18:2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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