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族'이란 말의 정체 추적기
『「네이션」이 「民族」으로 번역되는 바람에 쇼비니즘적 성격 강화됐을 것』(宋敏)

裵振榮(월간조선)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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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민족' 어떻게 만들어져 어떻게 쓰이고(惡用되고) 있는가
  
  
  
  
  북한이 말하는 民族은「金日成 민족」, 北과의「民族共助」는 金日成을「민족의 태양」으로 받드는 것
  
  
  
   ● 日本에서는 1888년경부터 쓰이기 시작, 「民族」보다는 「國民」이 널리 사용
  ●『「네이션」이 「民族」으로 번역되는 바람에 쇼비니즘적 성격 강화됐을 것』(宋敏)
  ●『우리가 나라를 잃지 않았으면 「民族」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득세하지 못했을 것』(卓石山)
  ●『光復 後 右翼을 「민족진영」으로 호칭, 용어 싸움에서 승리했다』(李哲承)
  ● 1990년대 初 國內 자칭 進步진영에서 「民族共助」라는 용어 사용 시작, 北에서는 6·15 공동선언 이후 본격 사용
  ●『북한이 「民族」을 들고 나오면 100% 통일전선전술』(柳東烈)
  ● 북한, 1994년부터 「金日成 민족」, 1996년부터 「조선민족제일주의」 주장
  
  裵振榮 月刊朝鮮 기자 (ironheel@chosun.com)
  
  「民族」이라는 유령
  
  
  <「주체조선」이라는 글자가 쓰인 미사일이 서울을 정조준하고 있는 이 선전포스터는 북한이 말하는「민족공조」의 허구성을 잘 보여 준다.>
  
  
   지난 6월11일 서울 양천구 목동 「자유북한방송」 앞.
  
   「6·15 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이하 통일연대) 회원들이 몰려와 방송 중단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이들은 이런 주장들을 했다.
  
   『자유북한방송과 같은 北에 대한 비방방송국이 생겨 민족화합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이 방송은 6·15 공동선언의 기본 이념인 「우리 민족끼리」를 배반하고 있고, 민족의 화해를 해치는 일을 하고 있다』
  
   자유북한방송을 운영하는 脫北者 10여명이 북한 어린이들의 굶주린 모습과 金正日의 사진 등을 펼쳐 들고 통일연대 사람들에게 격하게 외쳤다.
  
   『北에서 한 달만 살아보고 와서 말해라』
  
   『엄마가 내 앞에서 죽어 가는데 썩은 물조차 먹일 수 없었다. 당신들이 그 심정을 아는가? 그걸 당해 봤나?』
  
   통일연대 사람들은 馬耳東風(마이동풍)이었다.
  
   통일연대 측은 300만 명의 대량 餓死(아사)사태를 불러온 북한 공산체제의 모순과 金正日의 罪行을 「民族」이라는 말로 간단하게 덮어 버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토록 엄청난 힘을 가진 「民族」이라는 단어는 언제 어떤 경로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일까? 영어의 「네이션(Nation)」이라는 말은 「國家·國民·民族」으로 번역되는데, 「國家」와 「國民」은 어디로 가고 유독 「民族」이라는 말만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8월15일이 日帝로부터 解放된 날이라는 것은 기념하면서도, 그날이 대한민국이 건국된 날이라는 것은 의식조차 못 하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들을 풀기 위해 「民族」이라는 단어의 탐험에 나섰다.
  
  
  
  
   「民族」은 1888년 日本에서 사용하기 시작
  
   「民族」이라는 단어가 明治維新 이후 일본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의외로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在日동포 학자인 尹健次(윤건차) 일본 카나가와大 교수의 책 「日本- 그 국가·민족·국민」이라는 책에서였다. 이 책에서 尹교수는 야스다 히로시의 논문을 인용해 『1888년 간행된 잡지 「日本人」과 신문 「日本」에서부터 「民族」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일본에서는 「族民」이라는 말도 쓰였는데, 1887년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는 독일인 J.K 블룬칠리의 「민족·국가론」을 「族民的인 건국 및 族民主義」라는 제목으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民族」이라는 말은 언제쯤 우리나라에 들어왔을까?
  
   6월 初 국립국어연구원의 趙南浩(조남호) 학예연구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民族」이라는 단어가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趙연구관은 상당히 곤혹스러워했다. 그는 『그에 대해서는 아직 國內에서 연구가 없는 것으로 안다. 近代 문물을 나타내는 다른 말들처럼 일본에서 만들어져 개화기에 들어왔지 않겠느냐』고 했다.
  
   ―舊韓末에 나온 사전에는 나와 있지 않을까요.
  
   『1897년 제임스 S.게일 목사가 만든 「韓英사전」이 가장 오래된 사전이기는 한데, 거기에 「民族」이라는 단어가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사전에 어떤 단어가 오르는 것은 그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지 상당한 기간이 지난 후입니다. 차라리 당시의 신문이나 잡지들부터 찾아보는 것이 나을 겁니다』
  
   趙연구관은 「民族」이라는 단어의 유입 경로를 찾아보겠다는 기자의 작업에 흥미를 보였다.
  
   기자는 趙南浩 연구관의 조언에 따라 언론학자인 鄭晉錫(정진석) 한국외국어大 명예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鄭교수는 『독립신문에서는 「民族」이라는 말이 보이지 않고, 대한매일신보에서는 1907년 8월27일字 신문에서 처음 보이네요』라고 했다.
  
   鄭교수는 『「民族」이라는 말이 나오는 대한매일신보는 모두 177건』이라고 덧붙였다. 너무나 명쾌한 대답이어서 그 근거를 물어보았다. 鄭교수는 『언론재단에서 운영하는 종합뉴스 데이터베이스인 「카인즈」(www.kinds.or.kr)에서 찾았다』고 했다. 카인즈의 독립신문 및 대한매일신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사람이 바로 鄭교수였다.
  
  
   독립신문에서는 「民族」이 보이지 않아
  
   기자는 당장 카인즈 사이트로 들어가 보았다. 鄭교수의 말처럼 「民族」이라는 단어는 1907년 8월27일字 대한매일신보 「시사평론」란에서 처음 발견됐다. 해당 대목을 현대어로 옮겨 본다.
  
   『여보 조선 양반님들 일분이라도 사람의 마음이 있거든 좀 생각하여 보시오. 소위 삼한갑족이니 선정자손이니 교목세신이니 하는 것이 무슨 수가 있어 미국의 토종(원주민, 즉 아메리카 인디언을 말함-기자 注)과 같이 심산궁곡으로 몰려 들어갈 뿐이오, 월남국의 민족과 같이 청천백일을 보지 못할 터이니 참 불쌍하고 답답하오』
  
   「월남 민족」이라면 몰라도 「월남국의 민족」이라는 표현은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 앞에는 『일본이 한국을 대하여 시정개선을 한다 칭탁하고 일절 이익만 탈취하기로 위주하여 전국 인민이 원수같이 미워하는 적신들을 쓰는 고로…』하는 글이 보였다. 말로만 들었던 대한매일신보의 칼날 같은 비판정신이 물씬 느껴졌다.
  
   1907년이면 乙巳조약에 이어 丁未조약이 체결되는 등 國運이 나날이 기울던 때였다.
  
   이 기사 이후 대한매일신보에서는 「民族」이라는 단어가 실린 기사는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이듬해부터 급격히 자주 보이게 된다. 1907년에는 한 건에 불과하던 것이 1908년에는 48건, 1909년에는 80건으로 급증하는 것이다. 대한제국이 망하던 1910년에는 48건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1월에서 韓日합병이 발표되기 이틀 전인 8월27일까지 수치이다(대한매일신보는 韓日합병 직후 총독부에서 판권을 매수,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된다).
  
   「民族」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기사들은 대개가 亡國의 위기에 처해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는 글들이다.
  
   1909년 8월18일자 대한매일신보 논설란의 「한인이 마땅히 지킬 국가주의」라는 글을 보자.
  
   <오늘날 한국 동포 이천만 중에 능히 국가와 민족의 관계가 어떠한 것을 아는 자 몇이며… 이 때를 당하여 급급히 국가정신을 고양하며 일반 국민의 지식을 양성하며 국민의 용기를 분발하여 전국 인민의 마음속에 차라리 나라를 사랑하다가 죽을지언정 나라를 망하고 사는 것은 아니 하겠다 하는 정신이 철석같이 굳어야만 가할지니…>
  
  
   『조상·역사·居地가 같다고 국민이라 할 수 없나니…』
  
  
  
   「民族」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아직 그 개념은 분명히 서 있지 않음을 볼 수 있다.
  
   1908년 2월12일자 대한매일신보 寄書(기서·독자투고)란에 실린 김민식의 「민심을 빼앗지 못하면 나라를 빼앗지 못함」이라는 글이 그 例이다.
  
   <수천 년 역사상 우리 동포의 뇌수에 굳은 애국성으로 어찌 이 나라를 일조에 국가 명의가 없어지게 하겠는가. 우리 민족이 있고야 우리 한국을 어떤 나라이든지 병탄하겠는가. 우리 동포가 유순하나 의리를 위하는 곳에는 성명을 아끼지 아니하니, 가상하도다 대한 인종이여, 장하도다 대한 민족이여. 우리 국민은 덕의를 숭상하는 민족이라…>
  
   「우리 국민은 덕의를 숭상하는 민족」에서 보듯 이 글의 필자는「國民」과 「民族」을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 글의 필자는 「民族」을 「人種」과도 혼용하고 있다(尹健次 교수의 책 「일본-그 국가·민족·국민」에 의하면 일본에서도 「人種」이 「民族」과 혼용되어 쓰였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1908년 7월30일자 대한매일신보는 「민족과 국민의 구별」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싣고 있다.
  
   이 논설은 「民族」을 『다만 같은 조상의 자손에 매인 자며 같은 지방에 사는 자며 같은 역사를 가진 자며 같은 종교를 받드는 자』라고 규정하면서 『국민이라는 것을 이와 같이 해석하면 불가한지라』라고 지적한다.
  
   이 논설은 「民族」과 「國民」의 관계를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
  
   <대저 한 조상과 역사와 居地와 종교와 언어의 같은 것이 국민의 근본은 아닌 것이 아니언마는, 다만 이것이 같다 하여 문득 국민이라 할 수 없나니, 비유하면 근골과 맥락이 진실로 동물되는 근본이라 할지나, 허다히 버려 있는 근골 맥락을 한 곳에 모아 놓고 이것을 생명 있는 동물이라고 억지로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저 별과 같이 헤어져 있고 모래같이 모여 사는 민족이라는 것을 가리켜 국민이라 함이 어찌 가하리오>
  
   이 논설은 「國民」에 대해서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국민이란 자는 그 조상과 역사와 居地와 종교와 언어가 같은 외에 또 반드시 같은 정신을 가지며 같은 이해를 취하며 같은 행동을 지어서 그 내부에 조직됨이 한 몸에 근골과 같으며 밖을 대하는 정신은 한 영문에 군대같이 하여야 이것을 국민이라 하느니라>
  
   「國民」을 설명하면서 「같은 정신, 같은 이해, 같은 행동」을 강조하는 부분에서 눈이 번쩍 뜨였다. 「민족공동체에 기꺼이 자신을 귀속시키고자 하는 民族 구성원의 主觀的 의지가 민족을 만든다」고 보는 「國家民族」 개념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民族」, 즉 「언어, 공통의 문화유산, 종교, 관습 등과 같은 객관적 기준」을 중시하는 「民族」의 개념은 「文化民族」이라고 한다<표1>.
  
   논설 「民族과 國民의 구별」은 「文化民族」은 「民族」으로, 「國家民族」은 「國民」으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國民」, 「國家」, 「民族」이 모두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1908년 11월12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소학교 교과서는 마땅히 정긴하게 지을 일」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보자.
  
   <신체가 건강하고 마음이 용감한 국민이 되어 쇠퇴한 국가의 운수를 붙들어 돌아오게 하고 암매한 민족의 전도를 열어줄 자는 저 만리전정이 양양창창한 청년자매들이 아닌가… 국가 사상을 함양할 재료와 국민지식을 발달할 정신으로 소학교 교과서를 편찬하되…>
  
   앞에서 인용했던 글들에 비하면 「國民」과 「國家」와 「民族」을 비교적 的確(적확)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趙南浩 연구관과 첫 통화를 한 지 한 달쯤 지나 서울 강서구 방화동에 있는 국립국어연구원을 찾아갔다. 趙南浩 학예연구관(어문규범연구부)은 『연락이 없어서 「民族」이라는 단어의 淵源 찾는 것을 포기한 줄 알았다』며 반겨 주었다. 趙연구관은 기자를 도서실로 안내한 후, 舊韓末의 語文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들을 내오기 시작했다.
  
  
   사전에는 1938년에 처음 등장
  
   먼저 현존하는 국어 관련 사전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는 「韓英사전」(A Korean-English Dictionary·제임스 S.게일 著)부터 뒤져 보았다. 우리말 영어표기를 기준으로 단어를 알파벳 순서로 배열해 놓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을 찾았지만 「民族」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았다. 당시 독립신문 등에서 상당히 널리 쓰였던 「人民」도 보이지 않았다. 「백성」에 대한 설명에서 「셩 百姓 the various surnames. the people. See 인민」이라고 되어 있었지만, 정작 「人民」이 나와야 할 페이지를 뒤져도 「人民」은 나오지 않았다.
  
   趙南浩 연구관은 『1920년 조선총독부에게 발간한 「조선어 사전」를 찾아봤지만, 「民族」은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趙연구관에게 『日本에서는 1880년대 후반 「民族」이라는 단어가 나타나는데, 대한매일신보에는 1907년이 되어야 「民族」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고 말하자, 그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1890년대 이후에는 대개 일본에서 쓰이기 시작한 開化語(개화기에 들어온 新문물들을 나타내는 용어)들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에서도 쓰이기 시작했는데, 「民族」은 1907년에야 쓰이기 시작했다는 게 좀 뜻밖이네요』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최초의 국어사전은 1938년에 나온 「조선어 사전」(조선어사전간행회刊, 文世榮 篇著)이다. 이 책의 증보수정판인 「증보수정국어대사전」(1954, 영창서관)에는 民族을 이렇게 풀이해 놓고 있었다.
  
   「민족 : 국민의 종족」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해석이었다. 「民族」에 대해 여러 가지로 定義해 놓은 것을 보았지만, 그런 해석은 처음이었다. 다만 「民族」을 혈연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짐작이 갔다.
  
   趙南浩 연구관도 사전의 뜻풀이를 보더니 『뭔 소린지 영 모르겠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서고에 내려가 1938년版 「조선어 사전」을 보고 올라온 그는 『1938년版에도 똑같이 定義되어 있다』고 했다.
  
   같은 사전에서 「國民」을 찾아보았다. 「같은 국적을 가지고 있는 인민, 백성」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 해석대로라면 「民族」은 「같은 국적을 가지고 있는 인민 혹은 백성의 종족」이 되는 셈이다.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해석이었다.
  
   1929년 편찬에 착수해 1947~1950년에 발간된 한글학회의 「큰사전」에는 「民族」의 개념이 이렇게 定義되어 있었다.
  
   「인종을 말과 풍속이 다른 독특한 문화를 표준하여 가른 겨레」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民族」의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趙南浩 연구관은 「개화기 국어 어휘자료집」(全 5권. 박영섭 강남大 교수 著)라는 책을 가져다 주었다. 개화기에 수입되어 새로 쓰이게 된 외래어·외국어들을 用例와 함께 정리한 책이었다.
  
   「개화기 국어 어휘자료집─개화기 신문에 나타난 어휘 연구」 제3권을 뒤져 보았다.
  
   「민족주의: 民族主義의 국가」(황성 1907. 6.21.)
  
   대한매일신보보다 두 달여 먼저 황성신문에서 「民族主義」라는 말이 쓰인 것이다. 「이게 최초의 用例를 소개한 것이라면, 「民族」이라는 말에 대한 탐험은 여기서 끝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趙南浩 연구관이 그런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건 단순한 用例일 뿐입니다. 그 책에 소개된 用例가 최초로 사용된 用例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내슌」과 「시틔슨」
  
   문득 「네이션이나 내셔널리즘 같은 단어들이 나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개화기 국어 어휘자료집」 제4권을 뒤져 보았다.
  
   「내슌: 國民(내슌)은 强大롭게 됨」(소19. A.11)
  
   1910년 7월15일 발간된 잡지 「少年」을 찾아보았다.
  
   「社會의 隆昌이란 것은 個人(맨)은 幸福스럽게, 府民(시틔슨)은 自由롭게, 國民(내슌)은 强大롭게 됨을 이름」
  
   「Citizen」을 「府民」으로,「Nation」을 「국민」으로 번역하고, 그 옆에 「시틔즌」,「내슌」이라고 영어 단어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 흥미로웠다. 이 앞에는 프랑스의 정치 현실에 대한 비평, 人權과 平等의 확보 방안에 대한 얘기들이, 뒤에는 부유하지만 소외계층을 양산해 내는 영국의 현실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전후 맥락을 보니, 『國民(내슌)은 强大롭게 됨』에서 「내슌」은 「國民」이 아니라 「國家」로 번역해야 맞을 것 같았다. 「네이션」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들어왔으나, 「國家」, 「國民」, 「民族」 사이에서 혼동을 겪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꽤 수준 있는 사회과학 논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살펴보았더니, 「역사소설 ABC契」의 일부였다. 저자는 빅토르 위고이고, 『「미써리」에서 摘譯』이라고 되어 있었다.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시민봉기를 일으켰던 ABC 클럽에서 운동권 청년들이 의식화 학습을 하는 부분을 발췌해 소개한 것이었다.
  
   趙南浩 연구관은 헤어지기 전 『宋敏(송민) 前 국민大 교수(국문학과)가 舊韓末 국어 어휘에 관한 연구를 많이 했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日本에서는 「民族」이 널리 쓰이지 않아
  
   宋敏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19세기 말 明治維新 시기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民族」이라는 단어가 언제, 어떻게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 알 수 있을까요.
  
   『「民族」이 日本에서 만들어진 단어가 아닐 수도 있어요. 개화기 西歐 문물을 표현하는 단어들은 日本에서 완전히 새로 만든 단어도 있고, 원래 중국 古典에 있던 어휘에 일본인들이 새로운 의미를 덧붙인 경우일 수도 있기 때문이죠. 예컨대 「國民」은 「춘추좌씨전」에, 「人民」은 「周禮」에 나옵니다. 「人民」과 유사한 「民人」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 말은 正祖가 제주도민들에게 내리는 윤음에도 나와요』
  
   宋교수는 자신이 갖고 있는 자료들을 찾아본 후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民族」은 중국 古典에서 온 단어가 아니라, 明治 시기 日本에서 만들어진 단어 같다』고 말했다.
  
   『어휘의 의미를 典據나 用例와 함께 밝혀 놓고 있는, 日本의 소학관에서 발간된 백과사전을 찾아보았어요. 「民族」에 대해서는 1920년대에 나온 「暗夜行路」라는 소설에 나온 「一民族」 운운하는 대목을 인용해 놓았더군요. 단정할 수는 없지만, 「民族」은 日本에서 만들어진 단어 같습니다』
  
   宋교수는 『「民族」이라는 단어가 明治 시대에 그다지 많이 쓰이진 않은 것 같다』고 했다.
  
   『明治 시대에 새로 만들어진 단어들을 典據(전거), 用例와 함께 소개한 「明治의 말(言語)사전」을 뒤져 봤는데, 「民族」은 보이지 않네요. 1889년 나온 일본 최초의 사전 「言海」에도 「民族」은 없어요. 아마 19세기 말 일본에서 「民族」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그리 널리 쓰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도 20세기에 들어와서, 특히 제1차 세계대전 후 「민족자결주의」가 등장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民族」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 같아요』
  
   宋교수의 말을 듣고 보니, 日本에서 1880년대 후반에 등장하는 「民族」이 우리나라에서는 1907년을 前後해서야 본격적으로 쓰이게 된 이유가 짐작이 갔다. 일본에서 그다지 널리 쓰이지 않았던 단어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늦게 輸入(수입)된 것이다.
  
   ―「네이션」에는 혈연·문화 공동체라는 측면말고도, 정치·이념 공동체라는 의미도 있는데, 종족적 냄새가 풍기는 「民族」으로 번역한 것이 「民族」에 대한 오해를 낳은 것은 아닐까요.
  
   『다분히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日本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民族」이라는 개념에 의지하게 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쇼비니즘적 성향이 강하게 됐는데, 「네이션」이 「民族」으로 번역된 것도 그런 측면을 조장했다고 봅니다』
  
   宋교수의 말처럼 「民族」이 「네이션」(Nation)의 번역어로 한계가 있다고 느꼈음일까? 林志弦(임지현) 한양大(사학과) 교수는 『일본에서는 근래 「네이션」을 그대로 일본어로 표기하는 경향』이라고 전했다.
  
   月刊朝鮮의 鄭淳台(정순태) 편집위원이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일본의 「大漢和辭典」(대한화사전)에 한자어의 뜻과 典據가 함께 나와 있다고 귀띔했다. 이 책에서도 「民族」의 典據는 없이, 그 뜻만 나와 있었다. 반면에 「國民」은 그 뜻과 함께 典據로 중국 古傳인 「左傳」 등을 밝혀 놓고 있었다.
  
  
   「민족」과 「국민」이 혼용
  
   서울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皇城新聞 축쇄판을 뒤지기 시작했다. 體言을 제외하면 모두 漢字로 되어 있어 읽기가 쉽지 않았다. 皇城新聞은 1907년 6월20일과 21일 兩日에 걸쳐 「民族主義」라는 제목의 논설을 싣고 있다. 그중 일부를 현대어로 옮겨 소개한다.
  
   <近世에 기풍이 크게 바뀌고, 사람의 지혜가 크게 발달하여 국가는 한 민족 公共의 나라요, 한두 사람의 사유물이 아니다.… 한 나라의 행복도 한 민족이 함께 하는 것이요, 한 나라의 재앙도 민족이 함께 하는 것이다, 나라가 가야 할 바를 민족이 함께 도모하지 않을 수 없고, 나라의 정세도 한 민족이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문득 「1907년 6월, 민족주의에 대한 논설이 실릴 정도면, 그에 앞서 「民族」이라는 단어가 이미 쓰인 적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논설란을 중심으로 1907년 상반기의 皇城新聞들을 찾아보았다.
  
   같은 해 5월3일자 「滅國新法論」(續)이라는 논설에서 「民族」이 보였다. 「波亞者는 南非洲之强健民族이라」 운운하는 구절에서였다. 前後 맥락을 살펴보니 네덜란드人들의 후예인 보어人들이 南아프리카에 「杜蘭斯蛙(두란사와) 民主國(트랜스바알공화국)」을 세웠다가 보어 전쟁에서 패해 영국에 점령된 얘기였다.
  
   같은 논설 중 필리핀의 사례에서는 「非律賓者는 我同洲同種之國民으로」 운운하는 대목이 보인다. 여기서도 「民族」과 「國民」이 정확한 개념 구별 없이 혼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트랜스바알공화국이라는 나라를 가지고 있다가 영국에 倂呑된 보어人들을 언급할 때는 「民族」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미국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에 이미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人에 대해 언급할 때는 「國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해 5월6일자에 실린 「保國論」, 5월20일자에 실린 「告全國同胞」(續)라는 논설에서도 「民族」이 보인다. 「民族」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皇城新聞 논설들도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대한매일신보의 경우처럼 亡國의 위기에 처한 民族의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들이었다.
  
  
   皇城新聞, 초기에는 국가의식 강조
  
   皇城新聞에서는 언제부터 「民族」이라는 단어가 쓰였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발간 초기의 皇城新聞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初期의 皇城新聞들을 보면서 신문의 분위기가 1907년과는 많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民族」은 보이지 않는 대신 「自主」 와 「獨立」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1899년 2월17일자 皇城新聞 논설을 보자.
  
   <한 사람에게는 한 사람의 권리(一人之權)가 있고, 한 나라에는 한 나라의 권리(一國之權)가 있으니…, 自主國家(自主之國)에게는 전국 인민의 생명권과 재산권(性命財産之權)을 보호하기 위한 법령이 있고, …우리 대한 동포는 각자의 自由權(自由之權)을 지키고 키워 한 나라의 自主權(自主之權)을 보호하기를 바라노라>
  
   「自主」와 「獨立」의 主體가 「民族」이 아니라, 「國家」로 상정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人民의 생명과 재산의 自由, 法治에 대한 인식도 보인다. 무엇보다도 개인의 自由와 국가의 自主性을 함께 생각하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皇城新聞 발간 초기는 이른바 光武改革이 한참 진행되던 시기였다. 당시 정부는 여전히 무패·무능했지만,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淸나라의 宗主權이 부정되고,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나름대로 「근대화」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었다.
  
   李泰鎭(이태진) 서울大 교수 같은 이는 이 시기 高宗의 근대화 정책들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독립협회가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것도 이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가 신문에 반영된 것은 아니었을까?
  
  
   「國家」에서 「民族」으로
  
   林志弦 한양大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林교수는 1999년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는 책을 펴내 민족지상주의에 가까운 국내의 민족의식에 큰 충격을 주었었다.
  
   ―1890년대 末 皇城新聞 등에서는 초보적이나마 국가 의식이나 근대시민 의식이 엿보이는 것 같더군요.
  
   『당시 신문을 만들던 사람들이 인간의 발전 가능성을 믿고 국민들을 그쪽으로 이끌려고 했던 「계몽주의자」였기 때문일 겁니다』
  
   ―일본에게 國權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그러한 의식이 근대시민 의식이나 「國家 民族」 의식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요.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런 가능성은 있었다고 봅니다』
  
   ―초기의 皇城新聞들이 국가나 근대시민의식을 강조하던 것에 비해, 1907년 이후 「民族」을 강조하는 신문기사들이 부쩍 늘어난 것을, 日帝에 國權을 빼앗겨 가던 당시 상황과 연결해 이해해도 될까요.
  
   『물론이죠.「국가」가 없는 상황에서 혈연·문화·역사 등에 기초한 「문화 民族」 개념을 강조하게 되는 것은 주변부 국가들에서는 흔히 있는 현상이에요. 유럽에서도 (통일국가 형성이 늦었던) 독일이나, (근대로 접어들 무렵 러시아 등에게 병합된) 폴란드에서의 민족 개념은 多민족의 종족적·문화적 요소를 강조하는 「문화 民族」 개념이었어요』
  
  
   申采浩의 배타적 민족주의
  
   舊韓末 民族지도자들은 「民族」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月刊朝鮮에 「孫世一의 비교 評傳: 李承晩과 金九─한국 民族主義의 두 유형」을 연재하고 있는 孫世一 前 의원의 말이다.
  
   『李承晩은 末年까지도 우리 민족을 지칭할 때는 「우리 韓人」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 것으로 보아 「民族」은 쓰지 않은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 민족주의라고 하면 대개 外勢, 특히 일본에 배타적 민족주의인데, 李承晩의 경우 1905년 이전에는 그런 의식은 보이지 않습니다. 李承晩이 제국신문에 쓴 논설 등을 보면 「韓·中·日이 連帶(연대)해서 러시아에 맞서야 하는데, 한국에 나와 있는 二流 일본인들 때문에 일본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이 악화되고 있다」고 걱정하고 있어요.
  
   金九의 경우, 舊韓末 그가 쓴 글이 발견된 것이 전혀 없어 「民族」이라는 말을 썼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李萬烈(이만열) 국사편찬위원장은 『舊韓末 다른 분들은 모르겠고, 丹齋 申采浩(단재 신채호) 선생은 1909년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논설을 남겼다』고 말했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는 1909년 5월28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논설. 여기서 申采浩는 제국주의를 『영토와 국권을 확장하는 주의』, 민족주의를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아니하는 주의』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한반도가 오늘날 이토록 캄캄하고 침침한 마귀굴 속에 떨어진 것은 한국 사람의 민족주의가 어두운 까닭』이라면서 『우리 민족이 아니면 우리를 반드시 해롭게 한다는 구절로 몸을 호위하는 부적을 삼아 민족을 보전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亡國 직전의 상황에서 申采浩는 철저한 저항 민족주의, 배타적 민족주의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기자는 「네이션」의 번역어인 「民族」은 1880년대 후반 日本에서 등장했으나, 日本에서는 그다지 널리 쓰이지 않았던 탓에 우리나라로의 유입은 늦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國權이 日帝에 침탈되어 가던 1907년을 前後해 대한매일신보·皇城新聞 등 民族紙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國家」가 사라진 자리를 「民族」이 대신
  
   1910년 대한제국은 日帝에 강제 倂呑됐다. 「國家」가 사라진 것이다. 「나라 잃은 백성」들은 더 이상 「國民」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일본 천황이 임명한 조선총독의 통치를 받는, 그러나 「일본제국」이라는 정치공동체 안에서는 소외되어 있는 被지배자에 불과했다. 이제 그들이 의지하고, 자신의 존재 의의를 확인할 수 있는 준거 집단은 「民族」뿐이었다.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의 저자 卓石山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네이션」은 「國家」, 「民族」, 「國民」으로 번역되는데, 번역 자체에 문제는 없다고 봐요. 다만 우리의 경우 日帝의 식민지가 되면서 「國家」가 없어졌기 때문에 「民族」이라는 단어가 득세한 것이죠. 우리가 나라를 잃지 않았다면, 「民族」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득세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民族」이 그다지 위력이 없었던 대신, 「國民」이 위세를 떨쳤죠』
  
   이에 따라 191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 「民族」은 더 이상 생소한 단어가 아니었다. 1919년 3·1 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은 자신을 「朝鮮民族 대표」라고 일컬었다.
  
   崔南善이 지은 己未독립선언서는 「民族의 恒久如一한 자유발전을 위하여」 독립을 주장한다면서, 「최대 급무가 민족적 독립을 확실케 함」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己未독립선언서는 日帝의 침략을 「異民族 箝制(겸제)」로 표현하고, 日帝침략으로 인한 폐해의 하나로 「利害相反한 兩 民族 간에 영원히 和同할 수 없는 怨溝(원구)」를 들고 있다. 일본의 침략을 「대한제국(조선)」과 「일본제국」 兩 국가 간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민족과 일본 민족이라는 兩 민족 간의 문제로 보고 있는 것이다.
  
   3·1 운동 이후 1920년을 前後해 사회주의 思潮가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抗日운동 진영內에서 左右翼 이념갈등이 나타났다. 이러한 흐름을 日帝下 朝鮮日報 기사 데이터 베이스를 중심으로 추적해 보았다.
  
   1920년 3월5일부터 1940년 8월10일 日帝에 의해 강제 폐간될 때까지 朝鮮日報에 「民族」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기사는 모두 369건이었다.
  
   이 중 색인에서 抗日기사로 분류된 것이 219건이었다. 抗日기사로 분류되지는 않았지만, 내용상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기사도 52건이 있었다.
  
   <표2>에서 보는 것처럼 日帝 후반기로 갈수록 抗日기사 성격의 기사는 물론, 「民族」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빈도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 朝鮮日報가 폐간되던 1940년 「民族」이 들어가는 기사 19건 가운데 11건은 레니 리펜슈탈의 베를린 올림픽 기록영화 「民族의 祭典」과 관련된 것이었다.
  
   日帝에 의해 압수 처분을 받았던 「조선 민중의 민족적 불평, 골수에 심각한 大血恨」(1920년 6월9일자)을 보면 이미 1920년대 초부터 계급의식이 강하게 표출되기 시작했음을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일찍이 조선에 통치의 대권을 행사하던 寺內伯(데라우치 백작)과 長谷川 대장은 어떠한 뜻으로 조선을 통치하였으며, 조선 민족의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얼마나 근로함이 있었는고? 조선 민중은 알고자 함이니라』라는 구절이 보인다. 「민족」과 함께 「민중」이라는 말이 나란히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中樞院(조선총독의 자문기구)에 몸담고 있는 親日派 귀족들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부분이다.
  
   『귀족이니 무엇이니 하여 일찍이 조선으로 하여금 멸망의 함정에 빠지게 한 그들의 귀족들 또는 그러한 귀족들의 혈통을 받았거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 아닌가. 소위 高等官의 지위에 앉아 백성의 피를 빨아먹던 더러운 야욕으로써 된 탐욕의 관리 퇴물들이 그 대부분이 아닐꼬』
  
   親日派 귀족들의 附日賣國이 아니라, 그들이 조선왕조의 지배계층으로 민중을 착취하고, 失政으로 조선을 멸망으로 이끈 잘못을 추궁하고 있는 데서 지배 계급에 대한 격렬한 증오감이 느껴진다.
  
  
   민족운동 對 사회운동
  
   이후에도 계급 의식·사회주의 의식이 엿보이는 글들은 자주 발견된다. 1924년 5월14일자 朝鮮日報 기사에서는 『배부른 계급 배부른 민족이 배고픈 계급 배고픈 민족을 죄 주린 범 잡듯이 하는 일이 많다』는 표현이 나타난다. 「階級意識과 民族意識」(1926년 6월14일), 「국가·민족·계급」(1926년 6월19일)이라는 사설도 보인다. 小作쟁의나 水利조합 관련 분규에 대한 기사들도 계속 늘어난다.
  
   1926년 1월11일자 朝鮮日報는 당시 대표적인 左翼단체였던 북풍회·화요회·無産者동맹·노동당 합동위원회의 활동을 보도하고 있다. 이 기사는 『조선 사상운동계 공로자 四단체─북풍회·화요회·無産者동맹·노동당 합동위원회, 농민운동에 힘쓰고 민족운동과 협동·제휴한다』는 내용이다. 1927년 1월4~16일에는 「민족·사회운동의 唯心的一考察」이라는 제목 아래 일곱 회에 걸쳐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기사들을 통해 日帝 시대에 사회주의 思潮가 유입되면서, 右翼계열의 독립운동은 「민족운동」, 左翼계열의 운동은 「사상운동」, 「사회운동」으로 호칭했었음을 알 수 있다.
  
   抗日운동이 左右로 분열됨에 따라 兩者의 통합을 모색하는 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민족단일당 운동이 그것이다.
  
   1926년 4월14일자 朝鮮日報는 「사회운동과 민족운동과의 상관관계」에 대해 언급하면서 『제국주의를 약화시키기 위해 필연적으로 협조하기를 바란다』고 촉구, 민족단일당 운동을 先導하고 나섰다.
  
   1927년 1월19일 左右翼 합작의 민족운동 단체인 新幹會가 공식적으로 發起했다. 발기인은 申錫雨(신석우)·李商在(이상재)·安在鴻(안재홍) 등 34명이었는데, 朝鮮日報 관련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창립 당시 중앙본부의 회장단을 거의 민족주의 진영에서 독점해 사회주의系의 불만이 있었다고 한다.
  
   新幹會가 정식으로 출범하자 朝鮮日報는 1927년 2월24일자 신문에서 『新幹會가 중요시되는 이유는 그것이 단일민족진영으로서 존재하게 됨에 인하여 단일민족진영은 非타협적인 민족주의를 최후 목표로 함에 의의 및 가치가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이 「단일민족 진영」은 左右翼 간의 갈등으로 內訌(내홍)을 겪다가 결국 1931년 5월16일 자진 解消(해소)하고 말았다.
  
  
   광복 후 민족진영은 용어 싸움에서 이겼다
  
   日帝下에서 右翼진영을 「민족진영」으로 지칭하던 전통은 광복 후에도 이어졌다. 당시의 사정을 광복 후 反託전국학생총동맹 중앙위원장으로 활약했던 李哲承(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총재에게서 들어봤다.
  
   ―광복 후 左右翼진영을 어떻게 호칭했습니까.
  
   『남이 보기에 左右翼이지 우리 스스로는 「민족진영」이라고 불렀어. 언론에서도 그렇게 불렀고…』
  
   ―스스로 민족진영이라고 부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日帝 시대부터 右翼진영을 민족진영이라고 불러 왔던 이유가 크지.
  
   그리고 우리에게는 3·1 운동과 上海 임시정부의 法統을 이어받았다는 긍지가 있었소. 1920년대 이후 사회주의가 들어오기는 했지만, 抗日 독립운동의 主流는 右翼민족주의 계열이었소. 上海 임시정부에도 말기에 일부 사회주의자·無정부주의자들이 참여하기는 했지만, 中核을 이룬 것은 민족진영 인사들이었소. 독립운동의 兩大 巨頭였던 李承晩 박사, 金九 선생을 비롯해서, 국내에서 활동하던 宋鎭禹(송진우)·金性洙(김성수) 같은 민족지도자들이 右翼진영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右翼을 민족진영이라고 부르게 된 거지』
  
   ―광복 직후, 「民族」이라는 말은 무척 대중 호소력이 있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혹시 左翼과 「民族」이라는 말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지는 않았습니까.
  
   『공산주의자들도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같은 용어를 쓰기는 했지만, 그들은 원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아닌가? 日帝 시대부터 「민족주의」라고 하면 배타주의·국가주의·권위주의로 매도하던 자들이었는지라, 자기들이 「민족」이라는 말을 빼앗아 가려고 애쓸 수도 없었지』
  
   ―용어 싸움에서 이긴 셈이네요.
  
   『맞아. 우리가 「민족진영」이라고 하니까, 공산주의자들은 자연히 「反민족진영」이 되는 거요.
  
   게다가 공산당은 처음에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다가 나중에는 찬성으로 돌아서더니, 소련을 「조국」이라고 부르고, 朴憲永이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선이 소비에트 연방에 가입하는 것을 검토」 운운 하는 등, 스스로 「反민족적」임을 입증하지 않았겠소. 용어 싸움에서 이긴 결과, 민족진영은 贊託 좌익세력을 몰아내고 대한민국을 세울 수 있었소』
  
   李哲承 총재는 『건국운동 참여세력들을 모아 단체를 만들면서 「자유민주민족회의」라고 命名한 것은 「민족진영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세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民族」이 우세
  
   그러나 1948년 대한민국 건국에도 불구하고 「民族」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國家」나 「國民」을 압도하고 있다. 그 이유를 卓石山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아직 우리나라가 온전한 국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겠죠. 南北 모두 반쪽이라고 여기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南北을 하나로 묶는 유일한 끈은 같은 「民族」이라는 것밖에 없으니까요.
  
   우리는 통일을 얘기할 때도 「민족통일」이라고 하지, 「국가통일」이라고는 하지 않죠. 이는 「국가의식」이 투철하지 않은 것입니다』
  
   한국의 右翼은 日帝下와 광복 후 「民族」이라는 단어를 先占했었지만, 오늘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오늘날 한반도에서 「民族」을 高唱하는 것은 북한이나, 親北·左派 집단들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民族共助」이고, 「우리 민족끼리」이다.
  
  
   『「民族共助」의 투쟁 과녁은 미국』
  
   북한은 지난 7월8일 金日成 사망 10주기 중앙추모대회에서도 「民族共助를 통한 민족통일 실현」을 강조했다.
  
   북한이 주장하는 「民族共助」는 곧 「反美共助」를 의미한다. 이는 북한 노동신문이 6·25 남침 54주년을 맞아 게재한 사설에서 『조선반도의 대결구도가 北과 南이 아니라 전체 조선 對 미국으로 되고 있는 지금 民族共助의 투쟁 과녁은 미국』이라고 한 데서 분명히 나타난다.
  
   북한이 「民族共助」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김광인 朝鮮日報 통한연구소 기자는 『1990년대 말 北核문제가 다시 불거져 나왔을 때, 북한 측에서 「미국과 共助하지 말고 우리 민족끼리 잘 해 보자」는 식으로 나오면서 처음 나오기 시작했다』고 기억했다.
  
   언론재단의 언론 검색 사이트와 연합뉴스 사이트 등을 통해 국내 언론에 「民族共助」라는 말이 언제부터 등장하는지 찾아보았다. 「1990年代 초·중반경 북한에서 民族共助를 얘기하기 시작했고, 이 사실을 국내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적어도 國內 언론에 보도된 것만 봐서는 「民族共助」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國內 종교단체 등 자칭 進步인사들이었기 때문이다.
  
   국내 언론보도 가운데 처음으로 「民族共助」가 언급된 것은 1994년 9월30일字 국민일보였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제79차 총회에서 金泳三 정부의 對北정책을 비판하면서 『남북 民族共助 체제 수립을 촉구』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다음에는 1996년 7월26일 金承勳(김승훈) 신부, 李昌馥(이창복) 전국연합 상임의장, 權永吉(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 등 106명이 정전협정 체결 43주년을 맞아 발표한 「민족평화선언문」에서 『南北韓은 체제 대립의 논리와 정서에서 벗어나 民族共助 체제를 수립하라』고 주장했다는 연합뉴스 보도가 있었다.
  
   1999년 12월14일 연합뉴스는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주최 정책토론회에서 姜禎求(강정구) 동국大 교수가 『남한은 미국과 「북한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해야 하는 「공동운명체」가 아니며, 남한은 21세기 통일과 평화를 위해 民族共助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2000년 5월16일자 한겨레신문에서는 그 전날 민주당을 방문한 段炳浩(단병호)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이 徐英勳(서영훈) 당시 민주당 대표를 찾아간 자리에서 『韓·美·日 공조체제를 남북 간의 民族共助 체제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趙誠宇(조성우)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은 「民族共助」라는 말을 가장 먼저 쓴 것은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南과 北, 해외동포가 한데 어우러지다 보면 통일에 뭔가 이바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 범민족대회를 준비하면서, 南과 北, 해외 동포가 서로 화해하고 협력하자는 의미에서 民族共助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金大中, 1997년 「우리 민족끼리」 先唱
  
   북한의 공식 매체에서 「民族共助」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인 2001년에 접어들어서였다.
  
   2001년 1월1일 노동신문·조선인민군(인민군 기관지)·청년전위(김일성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 기관지) 신년공동사설(『「고난의 행군」에서 승리한 기세로 새 세기의 진격로를 열어 나가자』)에서 북한은 『외세 의존 및 외세와의 공조를 탈피, 「동족과의 공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같은 해 1월10일 평양에서 북한 정권 및 정당·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우리 민족끼리 통일의 문을 여는 2001년 대회」는 「7000만 겨레에게 보내는 호소문」에서 『외세와의 공조를 배격하고 民族共助로 통일문제를 우리 민족 자체의 힘에 의하여 해결해 나가자』고 주장했다.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도 『(남한의) 당국과 정치인들은 민족자주 의식에 투철해야 하며 외세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민족 자체의 힘에 의거하고 외세와의 공조가 아니라 동족과 공조하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북한은 기회 있을 때마다 「民族共助」를 강조하고 있다.
  
   柳東烈 對北전략연구소 전문위원은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기는 남한의 자칭 진보인사들이 「民族共助」라는 말을 먼저 쓰기 시작한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이 때문에 후일 남북 장관급 회담 등에서 북한 측은 합의서에 「民族共助」를 명시할 것을 주장하면서 「民族共助 얘기는 남쪽에서 먼저 하기 시작한 것 아니냐」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고 했다.
  
   북한이 「民族共助」와 거의 같은 의미로 널리 사용되는 「우리 민족끼리」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1998년경부터였다.
  
   그해 2월 北京에서 열린 「남북해외동포국제학술회의」에 참석했던 김경남 북한 사회과학원 부원장은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반도 통일문제는 내부문제이면서도 미국 등의 열강에 의해 생겨난 문제』라면서 『우리 문제는 우리 민족끼리 푸는 게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한겨레 1998년 2월23일자).
  
   이보다 두 달쯤 전에 「우리 민족끼리」를 얘기한 한국 정치인이 있다. 金大中 당시 대통령 당선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1997년 12월19일 기자회견에서 『남북한 간의 직접 대화를 통해 우리 문제를 우리 민족끼리 해결하는 길을 모색하겠다』고 했다.
  
   물론 1994년 1월 徐大肅(서대숙) 하와이大 교수가 북한에게 北核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 정부와의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하면서 「우리 민족끼리」라는 표현을 쓰는 등, 前例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 당선자」가 말하는 「우리 민족끼리」는 무게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 「우리 민족끼리」는 2000년 6·15 공동선언 제1조에 다음과 같이 명문화된다.
  
   『南과 北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民族共助 주장은 한국안보 흔들기 위한 정치적 장난』
  
   6·15 頂上회담 때 金大中 당시 대통령을 따라 訪北했던 文正仁 연세大 교수는 이에 대해 『「自主」 앞에 「反외세」가 빠져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면서 『「民族共助」와 「국제공조」를 모두 추구한다는 金大中 대통령의 二元的 접근이 반영된 것』이라고 풀이했었다.
  
   북한의 「民族共助」 주장에 대해 趙誠宇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은 『「民族共助」는 소련·東歐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고 孤立無援(고립무원)의 상황이 된 북한으로서는 韓·美·日 共助에 대항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자, 생존의 문제였다』고 말했다.
  
   기자가 『그렇다면 우리는 북한의 民族共助 주장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民族共助」를 韓美·韓日 共助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지 말고, 북한이 처한 어려움을 南北이 함께 풀어 나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현실적으로 한국이 미국의 세계정책과 충돌하면서 독자적인 길을 갈 수는 없어요. 예컨대 한국이 이라크에 파병하면서, 對美 발언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면, 韓美共助와 民族共助 모두 충족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柳東烈 對北전략연구소 전문위원은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을 부정하게 마련인데, 북한이 민족을 들고 나오는 것은 그것이 민족 대단결이 됐든, 민족공조가 됐든, 100% 통일전선전술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말하는 「民族共助」의 허구성을 입증하는 사진을 한 장 내놓았다. 1998년 12월19일字 노동신문에 실렸다는 북한의 선전 포스터였다. 이 포스터는 몸체에 「주체조선」이라고 쓴 세 基의 미사일이 서울·워싱턴·東京을 정조준하고 있는 그림 밑에 「타격목표는 명백하다!」는 구호가 적혀 있다.
  
   柳전문위원은 『노동신문의 주장은 곧 북한 정권의 생각』이라면서 『그들이 정말 「民族共助」를 생각한다면, 서울은 타격 목표에서 제외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운동권 출신인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는 『북한이 「民族共助」를 주장하는 것은 金正日 체제를 연명하고, 한국의 안보를 흔들기 위한 정치적 장난인데, 일부 지식인까지 그러한 주장을 따라가는 것은 한국 사회가 그만큼 건강하지 않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했다.
  
  
   「金日成 민족」과 「金正日 민족」
  
   「民族共助」라고 할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북한이 주장하는 「民族」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民族」과 같은 개념이냐』 하는 점이다.
  
   趙誠宇 民和協 상임의장은 『북한에서 말하는 민족 개념도 근본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민족 개념과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북한에서 말하는 「民族」의 개념들을 살펴보자.
  
   『영토와 핏줄, 언어와 문화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사람들의 공고한 집단. 민족은 사람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중요한 단위이다』(「백과전서」, 1983년, 과학·백과사전출판사刊)
  
   『핏줄·언어·문화·지역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생활 단위이며, 사람들의 공고한 운명공동체』(「조선어대사전」, 1992년, 사회과학출판사刊)
  
   『민족은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발전하여 온 사람들의 공고한 집단이며, 사회생활단위입니다』(金日成, 「우리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자」(原典), 「조선대백과사전(제10권)」, 1999년, 백과사전출판사刊에서 轉載)
  
   일견 「民族」을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연구원刊)이라고 定義하는 우리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북한이 말하는 「民族」이란 「金日成 민족」을 말한다.
  
   「金日成 민족」이란 「사회주의 조선의 始祖는 金日成이기 때문에 朝鮮 민족은 곧 金日成 민족」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金正日이 1994년 10월16일 金日成 100일 추모회를 마친 뒤 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처음 나왔다고 한다. 김광인 朝鮮日報 統韓연구소 기자는 『金正日이 「해외동포들 사이에서 조선 민족은 金日成 민족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더라」는 식으로 처음 얘기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후 북한에서는 1994년 12월10일 檀君祭(단군제)를 개최하면서 「金日成 민족」과 「사회주의 조선 始祖」를 언급했고, 1995년 1월18일 평양방송은 『오늘 우리 민족은 수령을 始祖로 하는 「金日成 민족」이고, 현대 우리나라는 수령이 세운 「金日成 조선」이라고 주장했다. 노동신문(1995년 3월27일), 조선중앙통신(1995년 4월14일)에서도 「金日成 민족」이라는 주장이 잇달아 나왔다.
  
   이 매체들은 『민족의 元始祖는 檀君, 사회주의 조선의 始祖는 金日成』이라고 주장하면서, 檀君과 金日成을 同列에 올려놓았다.
  
   한술 더 떠 북한은 「金正日 민족」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 냈다. 1996년 7월8일 평양방송은 『우리는 태양을 따르는 해바라기… 우리는 태양의 나라에서 사는 金日成·金正日 민족, …태양이 영원하듯 金日成 민족, 金正日 민족은 영원무궁하리라』라고 방송했다.
  
   바로 이날 북한은 노동당 중앙위원회·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국방위원회·중앙인민위원회·정무원 결정서를 통해 金日成이 태어난 1912년을 元年으로 하는 「主體 연호」를 제정하고, 金日成의 생일인 4월15일을 「太陽節」로 선포했다.
  
   1998년 9월5일 개정된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은 헌법 序文에서 『위대한 수령 金日成 동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시며,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이시다』라고 선언, 「金日成 민족」이라는 개념을 헌법에 명시했다.
  
  
   『民族보다 중요한 것은 自由』
  
   북한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金日成 민족」, 「金正日 민족」과 「共助」를 해야 하는 셈이 된다. 이는 「단순히 北核 문제 해결 등을 위해 함께 미국에 맞선다」는 차원을 넘어, 한국 국민들도 「태양을 따르는 해바라기」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인 것이다.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는 『「金日成 민족」 운운하는 것은 과학적 근거도 없는 사기』라고 했다. 그는 『북한이 민주화되어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民族共助」가 가능하다』면서 『군사정권에 반대해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이라면, 그보다 백 배, 천 배 악랄한 金正日 정권에 대해서도 맞서 싸우는 것이 일관성 있는 행동일 것』이라고 말했다.
  
   朴聖祚(박성조) 베를린자유大 교수는 『민족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라고 강조했다.
  
   『지금의 한국에서는 막연한 「同族」, 또는 「南北經協」이 통일로 가는 지름길처럼 부각되면서, 최소한의 통일의 공감대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관은 경시되고 있어요.
  
   최근 어떤 여론조사 결과 많은 국민들이 「체제에 상관없는 통일을 선호한다」고 나타난 것은 한국이 「가치관의 위기」에 얼마나 깊숙이 빠져 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가치관이 흔들리면 자연적으로 국가관이 의문시될 수밖에 없습니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가족상봉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自由라는 가치관을 절대 버릴 수 없다는 마음과 행동,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건전하고 활기찬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이룩하겠다는 의지입니다』●
  
  
  
  ◈ 네이션(Nation)의 語源
  
  「민족」의 語源은 古代 라틴語의 「나티오(Natio)」에서 나왔다. 古代 그리스語의 데모스(Demos)·에트노이(Ethnoi), 라틴語의 포풀루스(Populus)·시비투스(Civitus)·겐스(Gens) 등과 마찬가지로 나티오도 「戰士공동체에 기초한 古代의 부족국가나 폴리스」를 의미했다.
  
  데모스·포풀루스·시비투스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이었던 반면, 에트오니·겐스·나티오는 외부의 공동체나 적대적 부족국가를 일컫는 말이었다. 前者는 「시민권을 가진 집단」이라는 뜻으로 쓰이다가 後日에 가서는 「被지배 계층」이라는 뜻으로 의미가 변화하기는 했지만, 「정치적 공동체」라는 의미가 강했던 반면, 後者에는 「집단적 원초성」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中世에 이르러 나티오는 「대학의 숙소」와 같은 「특수한 결합체」를 지칭하거나, 출생에 의한 신분적 구분을 위한 법률적 용어로 의미가 변질됐다. 種族공동체로서의 의미가 사라진 것이다.
  
  近代민족국가 성립기에 「네이션」은 「국가·민족·국민」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그 의미가 분리되지 않은 것은, 서양의 近代 민족국가의 경우 「국가」가 「민족」을 단위로 형성되었고,국가를 구성하는 「국민」들이 공동체의 주인, 즉 主權者라는 自覺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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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시대 사람들은 「民族」의식을 갖고 있었을까?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가 三國읕 통일했더라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해 보는 소박한 생각일 것이다. 심지어는 『신라는 異民族의 나라인 唐을 끌어 들여 同族의 나라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다』는 이유로 金春秋(김춘추)와 金庾信(김유신)을 민족반역자로 폄하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三國시대 사람들 사이에 민족의식 혹은 同族의식이 있었고, 그러한 의식에 바탕을 두고 통일을 향한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과연 三國시대 사람들 사이에 그런 의식이 있었을까? 역사학자들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徐吉洙(고구려연구회장) 梁職貢圖(양직공도·6세기 중반 중국 梁나라 元帝 때 梁나라를 찾아온 외국 使臣들을 그린 그림-기자 注)에 그려진 백제 使臣을 보면 고분벽화에 나오는 고구려人들과 의복이나 생김새가 거의 비슷하다.
  
  신라人과 중국人이 대화하는데, 백제人이 통역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신라와 백제의 언어가 상당히 유사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다. 백제 武王이 젊은 시절 신라에 들어와 선화공주를 아내로 취했다는 서동요 설화를 보면 백제인과 신라인 간 의사소통이 자유로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三國시대 사람들 사이에서는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민족」의식은 아니더라도 서로 상당한 동질감을 느끼는 「겨레 의식」은 있지 않았을까?
  
  李道學(국립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광개토대왕비를 보면 고구려인들은 백제와 신라는 臣屬(신속)시켜야 할 대상으로, 倭는 멸망시켜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는 종족적·문화적으로 어느 정도 同質의식을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韓圭哲(경성大 교수) 濊族(예족)과 貊族(맥족)이 가깝고, 韓族은 상대적으로 멀기는 하지만, 세 종족 모두 크게 보면 한 종족이며, 언어도 통했을 것이다. 古代로 올라갈수록 통행이 자유롭고, 의사소통에 필요한 단어의 수도 적었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오히려 후대로 내려와 영역 국가가 생기고 통행이 막히면서 언어의 차이가 커지게 됐다. 따라서 三國시대 사람들 사이에 오늘날과 같은 민족의식은 없었지만, 언어·습속이 비슷한 데서 오는 동질감은 있었을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보이는 一統三韓 의식은 同族 개념이나 적극적인 통일 의지의 발로라기보다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병탄했다는 王朝的 역사의식의 발로로 봐야 한다. 三國이 爭覇(쟁패)한 역사를 共有하면서 後代에 이르러 「三國」이라는 의식, 三國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라는 의식이 생기고, 후일 「三國史記」·「三國遺事」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신라의 三國 통일은 민족공동체 의식이 형성되는 시초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林志弦(한양大 교수) 신라의 입장에서 볼 때, 고구려나 백제는 피를 나눈 같은 민족이 아니라 唐이나 倭와 마찬가지로 友邦이 되기도 했다가, 원수도 되는 대외적 전략의 대상일 뿐이다. 고구려와 隋·唐의 전쟁을 외세에 대한 민족 항쟁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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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민족제일주의
  
  북한의 「民族共助」 주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조선민족제일주의」 (또는 「우리민족제일주의」)이다. 북한은 지난 1월1일 노동신문·조선인민군·청년전위 공동사설에서 올해 통일운동의 구호로 「우리민족제일주의의 기치 밑에 민족공조로 자주통일의 활로를 열어 나가자」를 제시했다. 노동신문에서도 『「우리민족제일주의」는 자주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애국애족의 기치』(1월5일)라고 주장했다.
  
  「조선민족제일주의」라는 말은 金正日이 1986년 7월15일 노동당 중앙委 책임일꾼들에게 행한 담화인 「주체사상 교양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이때는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소련과 東歐에 개혁·개방의 바람이 불면서 사회주의권이 흔들리기 시작할 때였다.
  
  「조선민족제일주의」의 주된 내용은 『조선민족은 그 사상과 전통, 역사에서 어느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우월성의 근거를 「생물학적」요인이 아니라 사상·전통·역사에서 찾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1999년 북한에서 나온 「조선대백과사전」에서 민족을 설명하면서 『우리 민족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단일민족이며, 예로부터 외래 침략자들과 역대 통치배들을 반대하여 줄기차게 싸워 온 용감하고 패기 있는 민족이며, 인류의 과학과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한 재능 있는 민족』이라고 서술하고 있는 것도 「조선민족제일주의」의 반영이다. 1983년에 나온 「백과전서」에는 이런 내용이 없었다.
  
  북한은 이와 함께 민족사적 정통성이 「단군조선 → 고구려 → 발해 → 고려 → 북한」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1993년에는 동명왕릉을, 1994년에는 단군릉을 발굴, 복원했다.
  
  
  
  
  
  
[ 2006-03-06, 18:3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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