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이 쓴 몸과 肢體의 화합론
"만일 온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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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新約의 고린도 前書는 사도 바울이 쓴 것이다. 바울은 지금의 그리스 땅에 있는 고린도에서 교회를 세웠으나 유태인들의 방해를 받고 여기를 떠났다. 그가 지금의 터키 땅인 에베소에 머물면서 고린도 교회로 쓴 편지가 이 고린도 前書이다. 고린도 前書에는 사랑과 화목을 강조하는 내용이 많다. 교회의 내분을 걱정하면서 쓴 글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감동적 定義를 내린 고린도 前書 13장과 부활을 주제로 한 15장은 문학적으로도 훌륭한, 詩 같은 글이다. 12장은 개성이 다르고 능력이 다른 개인이 교회와 성령 안에서 화합하는 것의 당위성에 대해서 아주 쉬운 글로 설명하고 있다. 필자는 화합과 단결에 대해서 이 글만큼 적절하게 표현된 글이 없다고 생각한다. 12장12절부터 인용한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肢體가 있고 몸의 肢體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肢體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肢體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肢體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였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肢體의 각 부분이라>
  
  바울은 교회를 몸에, 교인들을 지체에 비유하고 있다. 교인들의 개성과 능력은 몸을 이루는 눈, 코, 귀처럼 각각 다르다. 많은 교인들은 이 다름에 대하여 거부반응과 시샘이 있다. 귀는 눈을 부러워하고, 발은 손을 부러워한다. 그 좋아보이는 것들만으로 통일하여 몸을 만든다면 눈 같은 몸, 손 같은 몸이 되어버린다. 몸이든 교회이든 회사이든 성격과 능력과 모습이 다 다른 이들을 한 이념과 문화(여기서는 성령)로 통합해야 위대한 힘이 생긴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다름 속에서 화합하고 화합속에서 개성을 잃지 않도록 하려면 이 다름에 대해서 부러움과 시샘을 할 것이 아니라 그 다름이 소중한 것임을 인정하고 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다양성과 관용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원리주의적 儒敎인 朱子學은 이 세상만물을 통일적 논리로 보려 함으로 획일성과 교조성과 엄격한 계급성을 띤다. 이 朱子學이 정치이데올로기로 변하면 명분론과 도덕론으로 흘러 實事求是하는 實用정신이 약해진다. 이런 사회에선 同等과 차별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 문화에 익숙해지면 금강산과 설악산에 대해서도 꼭 '어느 산이 더 아름다운가'라고 서열을 매겨야 마음이 편하다. 설악산은 설악산대로 금강산은 금강산대로 아름답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경직된 문화에 젖은 사람들은 회의를 할 때도 참석자가 같은 의견일 것을 전제로 하여 토의에 임한다. 그럼으로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에 대해서는 감정부터 상한다.
  
  반면 민주사회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각자 생각이 다를 것이란 점을 전제로 하고 회의에 임하고 회의를 통해서 통일된 견해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한다. 前者의 회의는 싸움판이 되고 後者의 회의는 생산적 토론장이 된다.
  
  지도자의 임무는 인간의 각자 다른 기능과 역할을 인정하고 이를 통합시키고 협조시키는 일이다. 민주사회는 다른 집단과 사람에 대한 존중심이 전제되어야 기능한다. 사회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인간사회를 계급투쟁의 시각으로 분석함으로 사회와 국가를 분열시켜 이득을 보려고 한다. 좌파가 집권한 나라에서는 반드시 분열과 갈등이 격화된다. 지금 노무현 좌파정권이 하고 있는 일이다.
  
  눈과 귀처럼 각각 다름에도 한 몸의 구성원으로서 각자 보람되는 일을 하려면 성령과 같은 대원칙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국가에선 그 대원칙이 헌법이고 회사에선 社是, 가정에선 家訓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성령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언론자유, 선거자유, 그리고 私有재산제일 터이다.
  
  
  
  
  
  
[ 2006-05-15, 17:2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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