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6/스트라스부르그 대성당에 새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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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사스-로렌 紀行 6/스트라스부르그 대성당의 파란만장한 역사
  
  샴파뉴, 알사스, 로렌은 현재는 獨佛국경선의 프랑스측이지만 시저가 이곳을 점령한 서기 전 1세기경에는 로마 문명과 게르만 야만족의 경계선이었다. 당시 문명과 야만의 경계선은 대체로 라인강과 일치한다. 이곳은 문명과 야만, 신교와 舊敎, 프랑스 세력권과 독일 세력권의 충돌지역이었으므로 자주 戰場으로 변하기도 했다. 이 지방의 가장 큰 도시인 스트라스부르그에 1949년 유럽회의, 그 뒤에 유럽의회가 본부를 두게 된 것도 유럽역사상 가장 큰 전쟁이 되풀이 되었던 激戰場에 평화와 협력의 상징을 세운다는 의미가 있었다.
  
  이 지방의 큰 건물에는 역사의 파란만장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는 過客도 건물이 곧 역사임을 안다. 스트라스부르그시 한복판에는 노틀담 대성당이 서 있다. 붉게 녹쓴 성채를 연상시키는 나이 千歲의 거대한 건물이다. 이 건물의 독특한 색깔은 붉은 沙岩을 썼기 때문이다. 평면도로 보면 이 성당은 60X120미터, 본건물의 높이는 60미터, 첨탑의 높이는 142미터이다. 정오에 이 성당의 유명한 천문시계가 打鐘(타종)할 때는 건물 전체가 오르간처럼 되어 오묘한 소리를 낸다. 거대한 성당이 거대한 악기가 된 느낌이었다. 우리 여행단이 그 타종소리를 들었을 때는 청명한 하늘 아래였다. 천상의 교향악!
  
   동행한 한 건축가가 감격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 성당은 다른 중세 종교건물이 다 그렇지만 神과 인간의 합작품이다. 아니, 神이 인간을 부려서 스스로 만든 건물이다』
  
  이 건물은 고딕 성당 가운데 최고 작품으로 꼽힌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명단에 뽑혔다. 이 건물이 건설되기 시작한 해는 서기 1015년. 헤라클레스 신전 자리였다고 한다. 그 뒤1880년까지 끊임없이 증축과 개축과 보수가 이어졌다. 지금도 보수공사가 진행중이다. 약800년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새 건물과 새 시설이 붙어 나갔다. 그 사이 정권과 국적과 종파가 여러번 바뀌었지만 이 건물을 헐어버리자는 이야기는 없었던 모양이다.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자 가장 중요한 역사적 건물이었던 중앙청을 민족정기를 회복한다면서 부숴버린 정치인의 위선과 만행 같은 것이 중세 암흑 시대에도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스트라수부르그의 첨탑은 하나뿐이다. 다른 고딕 성당은 보통 두개이다. 기자가 1994년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 식당 웨이터에게 물었더니 2차 세계 대전 때 연합군의 공습으로 한 첨탑이 파괴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연합군이 프랑스의 문화재를 그렇게 파괴하지는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문헌을 찾아보니 처음부터 첨탑은 하나뿐이었음을 알았다.
  
  여행객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와서 역사적인 사실인 것처럼 말하고 글도 쓰곤 하는 것을 가끔 본다. 가이드는 청중 중에 누군가가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다소 과장도 하고 전설을 사실처럼 이야기하니 꼭 검증하고 글을 쓸 일이다.
  
  스트라스부르그 성당 건축은 11세기에 시작되어 15세기에 1단계가 완성되었으나 그 뒤 계속해서 새로운 건물과 시설이 덧붙여졌다. 총13 단계의 증축이 있었다고 한다.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올려 바티칸의 舊敎에 도전장을 내면서 유럽 세계는 종교분쟁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든다. 그 뒤 130년간 계속된 이 내란, 내전,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과 건물이 파괴되었다. 이 소용돌이의 절정은 17세기 초 독일을 주무대로 한 30년 전쟁이었다.
  
  스트라스부르그가 있는 알사스 지방 사람들은 거의가 독일계통 인종이었다. 1523년 종교개혁파가 이곳에서 권력을 잡았다. 스트라스부르그 성당도 치열한 투쟁의 결과 개혁파의 차지가 되었다. 알사스 지배층이 舊敎편을 선택하여 프랑스의 영토가 된 직후인 1681년 루이 14세 때 이 성당은 다시 舊敎측에 넘겨졌다. 루이 14세는 알사스 로렌 지방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인물이다.
  
  프랑스 혁명중에는 이 성당내의 聖像 230개가 파괴되었다. 1870년 普佛전쟁 땐 프러시아 군의 포격이 쏟아졌다. 13발이 첨탑을 강타했으나 부러지지는 않았다. 1944년 연합군의 공습 때도 몇 발을 얻어맞았다.
  
  이 성당내에는 천문시계탑이 있다. 예술과 과학과 기술이 결합된 이 시계탑은 천문적인 통계와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면서 낮 12시 30분(이 시계는 30분이 빠르므로 실제론 정오)엔 天上의 음악과 같은 타종소리를 들려준다.
  
  지금도 그렇지만 스트라스부르그는 獨佛 접경지역의 교통요지이다. 이름 자체가 길의 도시란 뜻이다. 그 때문에 이 도시는 침략자와 방어자 사이의 戰場으로 변해 파괴되고 재건되고 다시 불타고 다시 재건되는 역사를 이어갔다.
  
  이 도시는 격전지였던 만큼 여러 문명의 교차로였고 그러다가보니 아주 혁신적인 분위기를 가졌다. 구텐베르그는 독일의 마인츠에서 1395년에 났다. 그는 정치적인 탄압을 피해서 스트라스부르그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금속 활자에 의한 인쇄술을 연구했다.
  활자 인쇄술의 발전은 그동안 신부들이 독점하고 있던 성경읽기를 일반인들에게 확산시켜 종교개혁의 길을 열었다.
  
   젊은 모차르트는 이 도시에서 연주회를 열었고 괴테도 이곳 대학에서 공부했다. 1770년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 앙트와네트가 루이 16세와 결혼하기 위해 비엔나에서 파리로 가는 길에 이 성당에서 성대한 영접을 받았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는 프랑스 혁명 직후 처형된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스트라스부르그는 그 진보적 성향 대로 혁명 지지 쪽으로 기운다. 혁명파는 스트라스부르그 노틀담 성당에서 성모상 등을 들어내 부숴버렸다. 프랑스의 유명한 國家 라 마르세이에즈는 마르세이유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혁명열기 속의 스트라스부르그 市長이 1792년엔 출정하는 라인강 지역 지원병을 위하여 로우그 리슬이란 장교에게 작곡과 작사를 부탁했다. 이 사람이 하룻밤만에 만든 것이 ‘라인 군대를 위한 軍歌’였다. 이 노래가 유명해진 것은 마르세이유 지원병이 파리로 행진하면서 이를 불렀기 때문이고 그래서 곡목이 라 마르세이에즈로 바뀌었다. 1795년에 국가로 프랑스 정해졌다.
  
  2차세계대전중에 제작된 명화 카사브랑카는 독일군이 점령한 모로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카사브랑카시의 한 술집에서 벌어지는 노래 대결 장면이 있다. 독일 장교가 악단에 군가를 연주하도록 시킨다. 비밀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는 청년에 화가 나서 악단에 라 마르세이에즈를 연주하도록 주문하니 술집에 앉아 있던 프랑스 사람들이 일어나 열나게 합창하는 장면이다. 이 영화의 가장 감격적인 장면. 한국인이 보아도 감격할 정도이니 노래의 선동성은 정말 대단하다. 애국심이 조직적으로 高揚될 때의 힘을 실감케 한다.
  
  
  
출처 :
[ 2003-04-05, 19:5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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