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大選에 김영삼式 우파가 이긴다면
이념무장이 안된 우파정권은 좌파의 속삭임에 넘어가 우파를 분열시키고 좌파의 노리개가 된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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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한나라당의 서울시장후보 오세훈씨기 당선되자마자 親北인사들에게 영합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여 애국운동권 인사들이 흥분하고 있다. 보수층이 표를 모아 보수후보를 뽑아주었더니 그 후보가 좌파와 손을 잡고 보수층을 배신한 예가 바로 金泳三이었다. 이념무장이 안된 보수 정치인은 좌파의 속삭임에 넘어가 보수층을 분열시키고 약화시킨다. 金영삼 전 대통령은 좌파의 宿主가 되어 보수대연합 구도를 해체함으로써 김대중 좌파정권이 들어설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의 머리 속으로 가장 먼저 들어간 것이 현대사에 대한 좌파적 시각이었다. 나는 그가 취임하자마자 그 위험성을 경고했다. 1993년11월호 월간조선에 썼던 기사를 다시 읽어보니 지금 한나라당의 이념무장이 안된 정치인들을 연상시킨다. 2007년12월에 우파가 승리하더라고 김영삼식 우파 정권이 들어서 다시 한번 한국을 위기로 밀어넣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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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朴正熙와 金泳三의 화해― 金泳三대통령의 역사관 문제, 그는 역사의 계승자인가 파괴자인가
  
   '모택동(毛澤東)을 보호한 등소평(鄧小平)의 역사관이 중국개방의 성공을 보장했다. 한국 현대사와 역대 대통령에 대한 金泳三대통령의 부정적인 역사관은 그의 국정운영에도 반영되어 국기(國基)의 수호와 대통령의 역할과 관련된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건국―반공―경제발전―민주화로 이어진 국가건설의 흐름이 아니라 투쟁과 반대의 노선에 정부 정통성의 입각점을 두고 있는 金대통령은 특히 朴正熙 지지세력의 반발을 사고 있고 자신의 권력기반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國力과 국부(國富)에 치중한 李·朴·全대통령 진영의 대표선수와 민주와 정의에 치중한 盧泰愚·金泳三 진영의 대표선수가 역사적 화해를 해야만 우리의 國基가 든든해질 것이다. 과거와 화해한 바탕에서만 미래로, 세계로 나갈 수 있다.'
  
   <1993년 11월 월간조선>
  
   살아 있다는 데 감사해야
  
   金泳三대통령의 생일은 음력으로 1928년 12월4일이다. 6·25동란이 터졌을 때 만 22세였다. 이 연령층은 6·25를 전선에서 몸으로 때워 나라를 지켰다. 그 흔적이 인구구조에서 나타난다. 6·25전쟁이 끝난 뒤인 1955년에 실시한 인구조사에 따르면 1925∼29년생 사이에서는 여자 1백명에 남자가 80명뿐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남자의 손실률이 20%나 달한 불행한 세대였다. 공식통계로 이 전쟁의 한국군 전사상자수(실종자 포함)는 약30만. 金泳三대통령은 다행히 이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 기간중 장택상(張澤相)의원(총리역임)의 비서로서 전선 근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金대통령과 동년배인 육사 8기생들의 경우, 전투병과의 약 40%인 4백19명이 전사했다. 주로 소대장으로 최일선에서 나라를 지켰기 때문이다. 金泳三씨는 대통령이 되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점에서 정말 복 받은 한국남자이다. 인구 구조를 보여주는 삼각형 그림에서 정말 움푹 파여 날아가 버린 戰中세대. 강물처럼 흘렸던 그들의 피와 눈물의 제단을 딛고 이 나라가 서 있다.
  
   「전쟁」이란 말에 대해서도 거부감
  
   金泳三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전몰장병들에게 대해선 감사의 말씀 없이 「민주화의 도정에서 오늘을 보지 못하고 애석하게 먼저 가신 분들의 숭고한 희생 앞에 머리를 숙인다」고만 했을 뿐이다. 민주화를 위한 희생도 숭고하지만 전몰장병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민주화 운동의 대상인 국가 자체가 존립할 수 없었다. 지난 6월 金泳三대통령은 옛 육군본부자리에 지은 전쟁기념관을 민족기념관으로 개편하고 여기에다가 국립박물관을 포함시킨다는 부하들의 발상에 동의했다가, 군 관계자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여 취소한 일이 있었다. 金대통령의 측근에서 언론에 흘린 전쟁기념관 개편의 논리 중에는 동족상잔의 내전(內戰)인 6·25동란을 굳이 기념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리고 기념관이 군사문화의 잔재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이것은 두 가지 무식을 드러낸 발상이었다.
  
   한 민족의 정신적 유산의 집결체인 국립박물관을 다른 용도로 만든 건물에다가 느닷없이 옮길 수 있다는 문화적 무식, 그리고 전쟁기념관의 성격에 대한 무지가 그것이다. 파리 루브르 미술관 바로 옆에는 「앵발리드(Invalide)」로 불리는 군사 박물관이 있다. 이 두 곳을 둘러 본 사람들은 루브르미술관의 그 화려한 예술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앵발리드의 총과 칼이란 것을 실감한다. 군사력과 거기에 기반을 둔 문화, 그것이 바로 국가인 것이다.
  
   전쟁기념관은 6·25를 상기하고 다시는 그런 참화를 당하지 말자는 다짐을 담는 곳이지 호전성을 고취하자는 것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 번도 외국을 침략해 보지 못한 한국인이 아닌가. 가장 큰 문제는 6·25를 내전으로, 전쟁을 군사문화의 유산으로 보는 사고방식이다. 한완상(韓完相) 통일원장관의 한국전쟁관(觀)이 내전적 시각을 갖고 있다고 함은 월간조선 8월호 기사를 통해 이미 보도된 대로다. 내전적 시각은 金日成의 남침행위에 의해 일어났던 국제전쟁을 민족해방전쟁으로 성격규정함으로써 전쟁책임 소재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리는 데 이용당하기도 한다.
  
   舊한국군이 6·25 때 싸웠나?
  
   전쟁기념관 해프닝은 金泳三정부의 전쟁관과 국가관에 대한 또 하나의 시사였다. 金대통령은 지난 10월1일 국군의 날 치사에서 「新한국군의 원년」이란 말을 썼다. 그렇다면 6·25동란 때 나라를 지킨 군대는 舊한국군이었던가. 그 舊한국군은 해체돼 버렸는가. 金泳三대통령이 즐겨 쓰는 문법에 따른다면 「신한국군의 元年」이란 말은 적합하다. 새 정부의 구호 「신한국의 창조」는 신한국군의 창조와 舊한국의 해체를 전제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신한국 창조」 「신경제」 「신외교」 따위의 말에는 金대통령 이전의 한국 현대사와 단절하겠다는 뜻이 있다. 그런 뜻이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임시정부 다섯 요인의 유해가 봉환되자 金대통령과 그 주변에서는 『임정의 정통성은 문민정부로 바로 연결되고 있다』는 취지의 의미를 부여했다. 한 국가의 정통성이 李承晩―尹潽善―朴正熙―崔圭夏―全斗煥―盧泰愚 등 역대 정권을 건너뛰어 金泳三대통령으로 직결될 수 있다는 발상이다. 전기도 선이 끊어지면 흐르지 못하는데 한 민족의 총체적인 삶의 역정인 국가의 정통성이 그런 식으로 반세기를 점프할 수 있다는 무모하고 오만한 생각, 여기에 金泳三대통령의 역사관·국가관·인간관을 문제 삼는 이유가 존재한다.
  
   한국 현대사가 청산대상?
  
   金泳三대통령은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자리에서 『누가 그런 정신빠진 일을 했는지, 국립박물관을 어떻게 총독부 건물 안에다 갖다 놓느냐 말이야』라고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국립박물관이 들어설 땐 그 건물은 총독부가 아니라 중앙청이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제헌국회가 열리고 건국이 선포된 곳, 6·25때 서울 수복의 태극기가 올라갔던 곳, 그리고 한국인들의 삶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던 國政의 주요 결정과 조치가 이루어지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 건물을 철거하면 민족정기가 바로 선다는 보장은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한국 현대사의 영욕을 증언해 줄 수 있는 「역사의 현장」과 「역사의 추억」도 日帝의 기억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는 것. 이런 고민이 있었기에 역대 대통령들은 철거를 미루었던 것이지 「정신 빠진」 때문은 아니었다. 철거엔 고민이 따르지 않지만 보존엔 고뇌가 있는 것이다.
  
   김정남(金正男) 교육·문화담당 수석비서관은 『金대통령은 중앙청 건물에서 이루어진 한국의 현대사가 정부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부끄럽고 청산해야 할 역사이기 때문에 그 건물에 대해 크게 애착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金대통령의 그런 역사관은 청와대 안에 있던 歷代 대통령 집무실 건물을 철거하는 데서도 잘 나타났다. 이 건물은 총독관저로 지은 것이지만 더 긴 세월 동안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과 살림집으로 쓰여 그야말로 현대사의 進路를 좌우한 일들이 일어났던 곳이다. 일반인들의 시야로부터는 가려져 있어 일제의 치욕을 떠올리게 할 일도 없다. 철거업자가 이 건물을 옮겨서 보존하도록 해달라는 건의를 하자 金대통령은 그 말을 전해 듣고는 『아직 친일파가 있는 모양이지…. 벽돌 한 장까지도 깨어 없애버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전해졌다. 개혁에 반대하면 수구세력, 옛 중앙청의 철거에 반대하면 친일파라는 수사관식 어법(語法)은 정부에 반대하면 불순분자라고 몰던 시대의 말투를 연상시킨다.
  
   세계적 금자탑을 「역사 후퇴」라고
  
   한국 현대사와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金대통령의 부정적 시각은 취임 1백일 기념 기자 회견 때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한 일본기자의 질문에 답변하면서 金대통령은 『5·16은 우리의 역사를 후퇴시킨 큰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이 말도 과학적이지 못하다. 사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1965∼80년 사이, 즉 朴正熙대통령 시절과 거의 겹치는 16년간 한국의 연(年) 평균 GDP(국내총생산) 증가율은 9·5%로서 세계 9위였다. 1980∼90년의 11년간, 즉 全斗煥―盧泰愚대통령 시절 한국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10.1%로서 세계 1위였다. 5·16 쿠데타 직후인 1963년 한국의 1인당 GDP는 1백 달러로서 말레이시아(2백71달러) 필리핀(1백69달러) 태국(1백15달러)보다 못했다.
  
   그 말레이시아의 국민소득이 지금은 한국의 반밖에 되지 않으니 지난 30년간 한국은 말레이시아보다도 다섯 배나 빨리 달렸다. 지금 필리핀의 1인당 GNP는 한국의 약 10분의 1이다. 우리는 그들보다 17배나 빨리 뛰었다. 그리하여 한국은 GNP 규모에서 세계 37위(1960년)로부터 15위, 1인당 GNP에선 83위→30위, 무역부문에선 세계 51→11위로 도약하였다. 세계 最貧國을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변모시킨 것이 朴正熙 대통령을 지도자로 하는 5·16 주체세력과 국민들이었다. 더욱 가슴 뿌듯한 것은 삶의 질 부문에서도 한국은 세계 35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UNDP의 인간개발지수 랭킹). 우리 외무부장관이 자랑했듯이 한국은 인권문제가 국제적으로 거론되지 않는 아시아의 두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金泳三대통령은 이렇게 답변했어야 했다.
  
   『5·16은 정치적인 면에서 나라를 후퇴시켰으나 경제적인 면에선 나라를 발전시키는 시작이 되었다. 따라서 종합적이고 정확한 판단은 후세의 역사평가에 맡기자』
   역사는 지도자와 국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삶의 총체적 축적이다. 그 시대의 지도자가 밉다고 역사마저 부정하면 그 역사의 건설자들 전체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신중하고 섬세한 용어 선택을 해야 한다.
  
   대통령의 역사관은 왜 중요한가
  
   역사가 뿌리라면 국가와 민족은 줄기이고 이념은 거기에 매달린 나뭇잎이다.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흐름에서 파생된 産物이 국가요 민족이며 이념이다. 따라서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자세는 국가관과 인간관과 이념체계와 직접 관련된다. 더구나 대통령의 경우엔 역사관이 바로 國政의 방향잡기와 직결된다. 인간으로서는 더 오를 데가 없는, 대통령이란 頂上에 선 사람은 역사와 마주하게 된다. 그의 국정운영은 역사를 의식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바로 역사와 바둑을 두는 사람이다. 대통령은, 그가 혁명으로 집권하지 않았다면, 본질적으로 역사의 계승자가 될 수밖에 없다. 왕이 社稷(사직)의 수호자였던 것처럼, 宗孫이 家門의 계승자인 것처럼. 역사의 계승자란 의미는 국기(國基)를 수호하고 역대 정권과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이고 더 구체적으로는 역대 대통령의 맥을 잇는다는 뜻이다.
  
   역사의 계승자가 된다는 것은, 지나간 역사를 총론적으로는 긍정하되 각론적으로는 비판적·선별적 계승을 해 가는 자세이다. 한국의 정통성은 독립운동―반공―건국―6·25 동란―경제개발―민주화로 이어진다. 金泳三대통령은 역대정권과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반면 자신의 문민정부가 3·1운동―4·19의거―5·18광주사태―6월사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국가건설이 아닌 반대의 노선에 정부의 정통성을 귀착시키고 있는 듯한 말이다. 이런 시각은 야당 지도자나 在野 지도자일 때는 무리가 적을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 국가와 정부의 정통성을 그런 좁은 기반 위에 둔다면 대통령도 정권도 불안해진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스스로 축소시키고 있다. 國政의 흐름에 있어서 반대하는 편만을 대통령이 대변한다면 역사건설에의 참여파는 배제되거나 소외되거나 불만세력으로 남게 된다.
  
   논리적으로도 그런 대통령은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게 아니라 민주투쟁 세력과 문민세력, 즉 일부 국민만 대표하게 된다. 대통령은 영욕의 역사를 통 크게 아우르고 참여와 반대, 文民과 武民을 포괄하는 전체 국민을 대표한다는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는 자리이다.
  
   옛 중앙청·옛 대통령관저 철거에서 보듯이 金대통령은 역사의 처녀성을 보존하는 것이 가능하며 또 좋은 일이라고 믿는 것 같다. 이런 역사관이 청교도적 인간관과 결합하여 최근에 「도덕국가」란 비전으로 나타난 것 같다. 인간이란 존재는 능력 면에선 개인차가 크지만(예컨대 한 시즌에 홈런을 다섯 개 치는 타자와 그 열 배를 치는 타자가 있다) 도덕 면에선 비슷하다(보통사람보다 열 배나 성스러운 인간이 있는가). 그런 세상에서 순결·도덕·正義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필연적으로 독선과 위선이 된다. 단테가 「신곡」에서 말했듯이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善意)로 포장돼 있다고 하지 않던가.
  
   자신의 도덕성을 내세우고 남에게 도덕성을 강요해서 地上에서 도덕국가를 만들려다가 결과적으로는 지옥을 만든 사례가 역사엔 너무나 자주 등장한다. 도덕성 강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덕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다.
  
   毛澤東을 보호한 鄧小平의 계산
  
   우리 모두의 기억에 생생하고 직접 오늘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대사를 평가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있다. 「건국 이래 黨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가 그것이다. 1981년 6월27일 중국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모택동(毛澤東)과 중국 공산당에 대한 역사적 평가 문헌이다. 이 문헌의 기초사업은 鄧小平과 호요방(胡耀邦)이 주재하였다. 毛澤東이 일으킨 10년간의 대재난―문화대혁명이 남긴 악몽에서 깨어난 중국의 進路를 개방쪽으로 선회함에 있어서, 중국의 정치지배 엘리트들이 과거의 문제를 어떻게 정리한 뒤 새출발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담긴 문헌이다. 이 문헌(사계절 출판사에서 1990년에 「정통 중국 현대사」란 제목으로 全文번역 출판)을 읽어본 기자는 숙연한 느낌을 받았다.
  
   역사의 피해자(鄧小平)가 그 가해자를 객관적으로 보려고 애쓴 흔적, 그 가해자(毛澤東)와 그가 주도한 한 시대의 역사를 서로 분리시키지 않고 한 덩어리로 파악함으로써 긍정적인 평가를 도출하고 그리하여 피해자와 가해자가 다 같이 승리자가 되는 결론을 내려가는 역사관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毛澤東에 의하여 두 번이나 숙청 당함으로써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던 鄧小平은 이 결의문의 초안에 대한 의견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毛澤東 동지가 만년에 이론과 실천면에서 범한 오류를 언급하려면 객관적이고 절절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주된 내용은 올바른 것을 집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역사에 부합됩니다. 毛澤東 동지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서거할 때까지 줄곧 우리 당의 영수였습니다. 모택동 동지의 오류에 대하여 度가 지나치게 써서는 안됩니다. 度를 넘게 되면 모택동 동지의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될 뿐 아니라 우리 당과 우리나라의 체면에도 먹칠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어긋납니다」
  
   이 결의문은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당과 국가와 인민에게 건국이래 가장 심각한 좌절과 손실을 맛보게 한」 재난이라고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였다. 그러면서도 鄧小平은 「우리도 일부 책임을 져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조건 아래서는 사실상 반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피하지 말고 책임을 져도 나쁠 것이 없고 오히려 좋은 점이 있습니다.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나와 陳雲 동지는 정치국상무위원이었으므로 적어도 우리 두 사람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대통령 주도의 역사 평가
  
   鄧小平식의 역사관에 따르면 5·16이 군사쿠데타라면 그것을 막지 못한 책임의 일단을 당시의 현역 정치인 金泳三씨도 져야 한다(군사쿠데타를 부른 가장 큰 원인은 민주당 新舊派 싸움에 의한 정권불안이었다). 유신시대에 약 3년간 야당당수로서 朴대통령의 정치적 상대자였던 金泳三씨는 만약 그 역사가 후퇴한 역사라면 그 후퇴에 대해서 일부의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자책을 전제로 한 역사평가일 때만 피해자의 한풀이가 아닌, 새출발의 동력자원이 되는 생산적인 역사평가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金泳三 개인에 의해서 즉흥적으로 주도되는 역사평가는 우리 시대가 딛고 있는 뿌리를 잘라냄으로써, 또 우리가 기대고 있는 역사의 언덕을 무너뜨림으로써 북한 金日成 정권의 정통성만 상대적으로 강화해주는 자해행위, 그리고 소모적인 국론의 분열로 연결될 위험이 있다.
  
   지나간 현대사를 대통령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려면 그것은 깊은 고뇌와 실증적인 연구가 뒷받침되는 정정당당한 정면승부여야 한다. 그러나 金泳三정부하의 역사논쟁은 우발적 사고에서 비롯되었다. 황인성(黃寅性)국무총리가 국회에서 12·12 사건에 대해서 애매한 발언을 하지 않았더라면 청와대에서 「쿠데타적 사건」이란 해석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5·16에 대한 평가도 일본 기자의 질문이 없었더라면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과 그 참모들이 깊은 생각 없이 툭툭 던진 말 몇 마디를 언론과 지식인들이 받아서 확대재생산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과거사 논쟁, 현대사 격하 쪽으로 가버린 것이다.
  
   최근에 또 金대통령과 金正男수석이 경제개발 주체세력과 민주투쟁 세력간의 역사적 화합을 외치고 나왔다. 극단적으로 나쁜 평가를 해 버린 뒤에 참여파들에게 화해의 손길을 뻗쳐 보았자 선뜻 응할 마음이 생기겠는가.
[ 2006-06-23, 15:0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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