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는 자유수호전전쟁이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누리는 번영과 자유는 6.25의 도전에 한민족이 응전한 결과물이다. 2007년 12월 大選에서 좌파를 청산하게 되면 6.25를 자유통일로 끝내는 길이 열릴 것이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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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 전 6.25 사변이 일어난 일요일이다. 6.25는 끝나지 않고 휴전상태이다. 하프타임이다. 하프타임이 너무 길기 때문에 전쟁이 끝났다고 착각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 평화협정이 맺어져야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난다.
  
  아직도 전쟁중인 한반도에서 살면서도 安保를 걱정하는 보수층을 냉전세력으로 모는 인간들이 득세하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으로 대표되는 이런 인간들은 한국의 안보와 경제발전에 숫가락 하나놓은 적이 없는 공짜人生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빨리 인간을 타락시키는 방법은 공짜를 가르쳐주는 것임을 새삼 실감하게 한다.
  
  6.25 전쟁에서 한국인들은 자유진영의 일원으로서 국제공산주의의 확산을 휴전선에서 저지시킴으로써 자유진영의 승리를 가져온 원동력이 되었다. 6.25 전쟁으로 인해 대만이 살아남았고 일본의 경제부흥이 이뤄졌다. 美日 안보조약, 독일의 재무장, 미국의 군비증강, NATO의 군사동맹화 등이 모두 6.25의 産物이다. 김일성은 스탈린과 모택동의 지원을 받아 동족을 치는 민족반역행위를 통해서 국제공산주의가 망하는 길, 북한체제가 망하는 길을 열었다. 남침은 공산주의자들의 자살행위였던 것이다.
  
  6.25 남침전쟁 56주년의 날에 우리가 감사해야 할 사람은 많다. 남침 소식을 듣자말자 '그 자식들은 우슨 수를 써더라도 막아야 한다'면서 즉석에서 미군 파견을 결단했던 트루먼 대통령, 인천상륙작전으로 戰勢를 역전시킨 맥아더 장군,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으나 한국군의 트럭에 받혀 숨진 미8군 사령관 워커,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서울을 내주고 밀린 유엔군을 지휘하여 다시 휴전선까지 중공군을 밀어올렸던 8군사령관(뒤에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 조종사인 아들을 한국전에서 잃었던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 戰死者 약800명을 낸 터키, 미국 다음으로 빨리 군대를 보내주었던 호주 등등 한국인들은 참으로 신세를 많이 졌다.
  
  자손 萬代에 걸쳐 절대로 잊지 않아야 할 원수들도 많다.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 박헌영 같은 인간들이다.
  
  이 원수들을 좋아하고 恩人을 저주하는 인간들이 盧정권 안에 많이 들어가 있다. 국민들은 자연히 이런 배은망덕을 알게 되었고, 5.31선거를 통해서 그 분노의 일단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예고편이고 진정한 분노는 내년 대통령 선거 때 '좌파 청산'으로 표현될 것이다.
  
  1951년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이 2년간 끈 것은 포로 송환 문제가 풀리지 않아서였다. 포로에 대한 제네바 협약은 포로는 무조건 조국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2차 세계대전 때 이 원칙을 적용해보니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독일군에 잡힌 소련군 포로들 가운데 상당수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연합군은 이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돌려보냈다. 이들중 상당수는 총살되고 강제수용소로 갔다.
  
  6.25 휴전협상 때 공산군측은 포로의 무조건 송환을 요구했다. 거제도에 수용되어 있던 중공군과 북한군 포로중 상당수는 그러나 대만으로 가거나 한국에 남고 싶다고 말했다. 미국측은 이 포로문제로 고민했다. 미 국방부
  는 전쟁을 빨리 끝내고 미군포로들을 데려오고싶어서 공산측의 요구를 다 받아주려고 했다. 미 국무부는 자유의사를 존중한 포로문제 해결을 주장했다. 양측은 회의를 거듭했으나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딘 에치슨 국무장관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결심을 받자고 제안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국무부의 제안에 손을 들어주었다. 이렇게 되자 공산군측은 반발하여 2년간 전쟁이 더 계속되었다. 이 기간에 포로들보다도 더 많은 전사자가 나왔다. 그럼에도 자유진영은 자유의사의 원칙을 고수했다.
  
  1953년3월에 스탈린이 죽고나서야 공산측도 자유의사 송환 원칙을 받아들였다. 모택동과 김일성은 미군포로는 다 돌려주었지만 국군포로 수만 명은 강제억류했다. 많은 중공군과 북한군 포로가 송환되기를 거부하고 남아버린 데 대한 보복이었다. 이런 휴전협정 위반에 대해서 강제조치를 취할 수단이 없었던 한국은 지금까지도 이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그 어려운 6.25 전쟁중에도 포로자유송환원칙을 관철시켰던 선배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의 국가 및 국군지도부이다.
  
  이처럼 6.25전쟁에서 자유진영은 자유의 원칙을 固守하였다. 6.25전쟁은 김일성쪽에서 보면 민족반역전쟁이지만 우리쪽에서 보면 자유수호전쟁이었다. 6.25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유행인데 그 말속에는 자유와 正義의 개념이 결여되어 있다.
  
  6.25 전쟁을 계기로 하여 한국에서는 좌파가 일소되어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공고해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상에선 소외되어 있었으나 마무리 단계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韓美동맹이란 보장책을 만들어내었다. 자유민주체제와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은 그 뒤 산업화, 민주화를 성공시켰다.
  
  地下로 들어갔던 좌파는 1980년대부터 다시 地上으로 나왔다. 1998년부터는 2대에 걸친 좌파정권을 만들어낼 정도로 득세했다. 이 좌파세력은 2000년 6.15 반역선언을 활용하여 한국사회에 6.25보다 더 심각한 6.15사변을 일으켜 國體변경을 시도하고 있다. 밀리던 자유진영은 지난 5.31선거를 통해서 낙동강방어선을 치고 반격자세로 전환했다.
  
  이런 가운데서 맞은 6.25남침전쟁 56주년의 의미는 남다르다. 盧정권은 6.25의 세계사적 의미를 축소하거나 왜곡하고 있으나 오늘의 대한민국이 누리는 번영과 자유는 6.25의 도전에 한민족이 응전한 결과물이다. 2007년 12월 大選에서 좌파를 청산하게 되면 6.25를 자유통일로 끝내는 길이 열릴 것이다.
[ 2006-06-25, 14:3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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