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 선거를 통해서 박정희를 본다
'2007 좌파종식'과 함께 전근대적 명분론도 함께 정리한다면 한국은 의식의 근대화를 통해서 선진국으로 갈 것이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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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 선거는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꿀 分水嶺이 될 것이다. 1998년 이후 집권세력으로 등장한 좌파에 대해서 다수 국민들이 '이제 보니 당신들은 아니야'라고 선고한 선거였기 때문이다. 이 선거 이후 反좌파 民心은 이제 커다란 여론의 흐름으로 굳어지고 있다. 좌파들도 자신감을 상실하고, 살 길을 찾고 있다. 2007년 12월 선거에서 反좌파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국가 정상화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희망도 넓게 퍼지고 있다. 이 국가 정상화는 단순히 우파 지도체제로 돌아가는 復古的인 것이 되어선 안될 것이다.
  
  李承晩 朴正熙가 주도했던 국민국가 건설과 근대화 과정은 성공했지만 그 성공에 걸맞는 의식의 근대화와 선진화는 우리의 과제이다. 물질적 근대화에 後續하는 의식의 근대화는 정치, 언론, 學界, 사법, 그리고 시민사회의 문제이다. 경제와 군사 및 과학으로 대표되는 實際의 세계에서 한국은 일류국가 문턱을 넘었다. 정신세계에선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은 전통적인 前근대성과 좌익이념이 결합되어 한국의 선진화를 막아왔기 때문이다. 한국 역사의 선진화 흐름에 대한 이런 守舊的 도전을 지도한 것이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세 대통령이었다. 이 세 대통령의 정치행태는 조선조의 양반정치와 좌파적 생리를 반영하였다. 1993년 이후 민주주의라는 위장막 뒤에서 계속된 이런 좌파적 정치행태에 국민들이 처음으로 '노'라고 말한 것이 5.31 선거였다.
  
  이 선거의 역사성을 잘 살린다면 우리는 좌파종식과 함께 조선조적인 명분-관념론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물질적 근대화는 강력한 지도자에 의하여 주도되었으나, 의식의 근대화는 시민사회에 의하여 주도되고 그 결과물은 '교양 있는 국민층의 등장'으로 나타날 것이다.
  
  잘만 하면 진정한 한국의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르네상스는 불가피하게 자유통일과 一流국가로 가는 길을 열 것이다.
  
  이런 시점에 서서 10년 전 필자가 썼던 기사를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한국의 역사속에서 무엇이 進步이고 무엇이 守舊인가를 고민하면서 朴正熙를 하나의 기준점으로 설정하여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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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한 예언가」 朴正熙의 격정 토로
  
   경제개발에 시동이 걸린 시대. 근대화 혁명가의 비전·울분·좌절 그리고 떨림과 숨결까지 담은 역사적 목소리
  
   <1996년 2월호 월간조선>
  
   대통령 연설이 現代史를 이끈 말
  
   한국의 現代史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1급 文書는 가장 재미없는 문서이기도 하다. 대통령 비서실에서 펴내는 역대 대통령 연설문집이 그것이다. 대통령중심제下에서 대통령의 주요 정책과 결정, 비상조치 같은 것들은 전부가 연설문으로 발표되었다. 이 연설문들은 대체로 딱딱한 형식의 무미건조한 문체로 돼 있으나 대통령의 철학과 인간됨이 직접적으로 담겨있는 1차 자료이다.
  
   이 연설문들을 녹음테이프를 통해 직접 들어보았다. 역대 대통령들의 경륜과 비전뿐 아니라 감정의 기복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인간의 육성에는 활자가 담을 수 없는 복합적이고 多元的인 정보가 담겨 있는 것이다. 격식이 별로 없는 인터뷰나 선거유세의 녹음테이프를 들어보면 대통령들의 숨결과 맥박까지도 들리는 듯, 역사 속의 인간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朴正熙의 경우 1960년대의 연설은 패기에 넘치고 도전적인데 1972년 10월17일 유신선포 이후의 연설은 守勢的이며 변명이 많아지고 힘이 빠진 느낌을 준다. 한국 현대사를 이끌어 오면서 시대 정신을 구현하고 국가를 건설해온 조국근대화, 민족중흥, 공업화, 수출입국, 자주국방, 自立·自主·자조(自助), 민주화, 정의구현, 단임 실천, 신한국건설, 개혁과 사정 같은 말들의 산실(産室)은 바로 대통령들의 육성연설이었다. 대통령 연설문의 그런 낱말은 실천력을 가진 힘센 말이란 점에서 문학작품의 아름다운 단어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現代史에 대한 대통령의 육성 증언
  
   同時代 한국인들의 생활과 나라의 진로에 크나큰 영향력을 끼친 역대 대통령들의 연설문을 재미없게 읽을 것이 아니라 재미있게 느껴볼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한 끝에 月刊朝鮮은 「대통령들의 육성證言―오디오 한국 現代史」 시리즈를 기획하게 되었다. 기자를 부산에 있는 정부기록보존소에 4개월간 상주시켜 역대 대통령들의 연설·회의·지시·인터뷰.생일파티 녹음테이프들을 복사하였다. 이 수백 시간분의 녹음테이프는 거의가 청와대 경호실에서 넘긴 것들이다. 잘 들리지 않는 녹음테이프는 지구레코드에서 음성改善처리를 통해 명료하게 만들었다.
  
   月刊朝鮮에서는 대통령의 육성을 10시간분 정도로 정리, 앞으로 매달 공개할 예정이다. 녹음테이프가 체계적으로 보존되기 시작한 朴正熙의장 시절부터 金泳三 대통령 시대까지의 흐름을, 대통령들의 육성을 중심으로 하여 정리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대사를 만든 주인공에 의한 역사 해설이기도 할 것이다.
  
   朴正熙의 정확한 용어선택
  
   기자는 지난 연말연초의 연휴 3일간 최고회의 의장 시절의 朴正熙육성 연설을 들었다. 1961∼63년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조국근대화의 여명기이자 경제개발의 시동이 걸린 시기이다(제1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된 것이 1962년이다). 44세의 朴正熙소장이 해병대와 공수단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와 정권을 잡은 직후의 목소리답게 격정과 열정을 담은 패기 넘치는 연설이었다.
  
   ● 朴正熙의 말은 과장과 수식이 최소화되고 용어 선택이 아주 정확하다. 1963년 10월7일 5代대통령 선거 진주유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녹음테이프 참조). 『지게 목발을 두드리던 불우한 농촌청년들이 끌려 나와 나라를 지켰습니다…그들은 그후 싸우다가 죽어 지금은 저 동작동 국군묘지에 잠들어 있습니다』 (유세장 같은 들뜬 분위기에선 그냥 『그들은 지금 저 국립묘지에 묻혀 있습니다』라고 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데 굳이 「싸우다가 죽어」라고 하여 「농촌청년들 중 전사한 사람들」이 동작동에 묻혀 있다고 정확을 기하고 있다.
  
   얼렁뚱땅 적당하게 넘어가는 것을 싫어하고 항상 정리·정돈된 모습을 좋아했던 그의 면모는 이런 話法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그는 연두순시 때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도 자신의 탁자위에 종이와 볼펜이 직선이나 직각으로 놓여져 있지 않으면 꼭 스스로 바로잡아놓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 3일간 朴正熙의 육성연설을 다 듣고나니 한 마디가 계속 귓전에서 맴돌았다. 「맹글라야 하겠습니다」란 경상도 사투리. 이것은 즉석연설, 선거유세, 기자회견 같이 격식이 덜한 원고 없는 연설·대화에서 등장한다. 기공식, 개통식, 입주식, 준공식 같은 건설현장에서 한 연설이 많고 朴正熙가 국가건설을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강조하며 돌아다니던 때였음을 반영한 것이다.
  
   ● 그의 연설에는 통계수치가 많이 등장한다. 5·16 후 행정에 군대의 기획제도가 도입되면서 심사·분석업무가 정착되고 조직운영이 효율적으로 되어가고 있던 「계획의 시대」였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포병출신인 朴正熙는 수치에 대한 기억력이 비상했다고 한다.
  
   ● 연설 내용도 관념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며 실용적이다. 1962년 5월1일 연설 「농민에게 드리는 부탁의 말」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실질적인 농촌 발전은 환경정리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뜰 안이나 집앞에 습관적으로 버려둔 쓰레기나 우물들은 깨끗이 치워야 할 것이며 짚이나 나뭇가지로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울타리」와 「담」은 흙과 돌로써 아담하게 새로 쌓아야 할 것이며 마을 앞을 흐르는 계천(溪川)은 양쪽 제방을 돌로 쌓고 잔디를 입히고 나무를 심고…>
  
   국민을 질책한 최후의 대통령
  
   ● 그림을 잘 그렸던 朴正熙는 肉眼과 함께 기억과 상상의 눈도 좋았던 것 같다 1963년 10월7일 진주유세 연설에서 6·25 때 정찰기를 타고 국민학교 상공을 날면서 관찰을 하던 상황을 묘사하면서, 그는 플라타너스의 모습과 지붕의 색깔까지도 6·25 당시와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다. 10월9일 부산 유세에서는 『맑고 푸른 가을하늘, 키 큰 코스모스, 코스모스보다 낮은 주막집, 두 농부, 막걸리…』라고 가을 풍경을 詩的으로 묘사하고 있다
  
   朴正熙는 독도법(讀圖法)에 능통했고 헬기를 타고 국토를 내려다보면서 대사업을 구상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지방시찰을 다녀와서는 『꼭 내가 그린 작품을 보는 것 같애』라고 말한 적도 있다 朴正熙는 일종의 시각적 기억력(Photo memory)을 같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런 능력이 그의 장대한 비전을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 朴正熙연설에서는 요즈음의 대중정치인들로부터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국민들에 대한 요구와 질책이 자주 나온다. 1961년 12월10일 공영주택 입주식 치사에서 그는 주민들에게 『우리가 집을 지었으니 길을 넓히고 포장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해주어야 하겠다. 그런 것까지 정부가 해줄 수는 없다』고 自助노력을 요구했다. 1962년 연두사에서도 그는 이렇게 요구했다.
  
   <하나의 민족이란 영원한 生命體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理想이 있어야하고 희망과 꿈이 있어야 하며, 시대적인 사회환경(社會環境)을 극복하고 生成發展 해 나갈 생명의 약동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타의적(依他的)인 인습과 숙명론적인 사고방식(思考方式)은 민족의 발육을 장해(障害)하고, 진취 활달한 민족적인 氣象을 위축시키는 것입니다>
  
   이 녹음테이프에도 들어 있지만 1963년 5월2일 황지(黃池)본선철도 개통식에 참석한 朴正熙는 청중들이 국기의례와 애국가봉창을 제대로 하지 않은 데 대해 단단히 질책을 한 뒤 『다시 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그는 대중정치가들처럼 국민을 영합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고, 민중운동가처럼 숭배의 대상으로도 보지 않았으며 교도(敎導)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런 점에서 문경보통학교 교사를 2년여만에 그만둔 朴正熙는 평생 교사였다.
  
  
   그때는 재미없던 연설이…
  
   ● 朴正熙의 연설은 재미가 적다. 기자는 高2년 재학시절 이 녹음테이프에 나오는 1963년 10월9일 부산유세(부산공설운동장)의 구경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 朴正熙의 연설은 한 마디로 「잠 오는 것」이었다. 소년시절 더러 보았던 이른바 舊정치인(민주당·자유당 정객들)의 웃기고 울리던 대중연설에 비하면 더욱 그러했다. 이제 녹음테이프들을 들어보니 그 재미없음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천성적으로 선전·선동·과장·우스개의 재주가 없는 朴正熙는 너무 성실하게, 너무 단정하게, 너무 딱딱하게, 너무 선생님처럼 청중들을 가르치려 들고 시키려 들고 따지려 들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너무 진지한 것이다. 진지한 연설에 무슨 재미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30여년이 지나서 들어보니 그때는 못 느꼈던 감동이 생기는 것이었다. 30여년 전의 그런 진지한 자세가 국가근대화의 집념으로 승화되어 세계 최빈국(最貧國)의 한국을 GNP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으로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그 실적의 증명이 있기 때문이리라. 30여년 전, 기차소리 들리는 삭막한 식장에서 그가 절규하다시피 했던 조국의 미래상은 예언 이상의 달성을 보았던 것이다. 이는 그가 「무장한 예언가」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비무장한 예언가의 비전은 말장난으로 끝나지만 총구에서 나온 권력의 뒷받침을 받은 朴正熙의 권력은 국가근대화라는 거대한 비전을 실현하도록 한 유일무이한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李朝 잔영(殘影)에 대한 도전자
  
   박정희의 육성연설에서는 頂上에 도달한 권력자의 여유나 오만이 느껴지지 않는다. 챔피언의 느긋한 자세라기보다는 도전자의 오기·분노·정의감 같은 것이 스며있는 말투이다. 그는 무엇인가를 향해 끊임없이 돌파매질을 하고 있었다. 그 무엇인가는 무엇인가. 봉건적 잔재, 李朝, 양반, 한민당, 구정치인 尹潽善…. 이 시기 朴正熙의 연설테이프와 1963년 가을에 나온 朴正熙 著 「국가와 혁명과 나」를 함께 읽고 들으면 그의 내면 속 깊숙이 들어가 볼 수 있다. 근대화혁명가로서 朴正熙가 가졌던 열정과 꿈을 담고 있는 「국가와 혁명과 나」는 朴相吉씨(前 청와대 대변인·水協 회장)가 대필한 것이지만 朴正熙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한 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朴相吉씨는 10여년 전에 나온 「나와 제3공화국」이란 회고록에서 1963년 가까이서 지켜 본 朴正熙를 이렇게 묘사했다.
  
   비장감 속의 우수
  
   <1963년 1월 중순 어느 날 최고회의 의장께서 만나자고 한다는 전갈이 왔다. 몇 번을 사양하다가 안내하는 대로 지정된 곳까지 따라갔다. 장소는 한남동 중턱의 어느 外人주택이었다. 조금 있으려니까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몇 사람이 들어섰다. 朴正熙 의장을 선두로 당시의 실력자 몇 분이 뒤따르고 있었다. 단 둘이 되자 박 의장이 말했다. 『도무지 틈이 나야지요.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저를 좀 도와 주십시오』
  
   이것저것 번거로운 말이나 완곡한 표현은 전혀 없고 간결, 소박한 딱 한 마디였다. 얼굴을 쳐다보니 안광은 바위를 뚫을 듯한데 어딘가 피곤하고 우수가 스쳐 가는 비장감 같은 게 엿보였다. 나는 별로 말을 안 했고 또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완전히 믿고 마음 한 구석에 점쳐 있던 어떤 초점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통고해 버리는 식 같기도 했다. 나로서는 바로 내 앞에 국가가 서 있고, 무서운 운명의 주체가 서 있는 듯한 엄숙감과 절대자의 번쩍하는 결심과 단심(丹心)의 흐름을 읽을 수가 있었다. 며칠 후 박 의장은 밤 열시가 넘어 나 혼자만을 은밀히 불렀다. 이 날 비로소 본론이 나왔다.
  
   『혁명인가 뭔가 했는데 국민들도 그렇고, 심지어 다리(漢江)를 같이 넘은 자들까지도 정확하게 내 심정을 몰라주니 미국X들도 그렇고…. 접장인가 교수라는 자들도 무얼 알아듣지 못할 소리들만 하고…가슴 속에 있는 생각을 시원하게 정확하게 털어놓을 방법이 없을까요?』
   『…』
   『정치라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건지? 이놈 말 다르고 저놈 말 다르고 앞으로 그때그때 요긴한 대목에…의견을 좀 말해 주십시오』
   『…』
   『혁명이라고 하지만 헤이따이(兵隊)만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도대체 구정치인들 중에서 쓸 만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는『이때 가난을 벗고 약소민족의 서러움을 벗지 못하면 언제 기회가 있겠느냐?』고도 했고, 『특권층의 당쟁, 세도가 나라를 말아먹었는데 해방이 되고 민주세상이 되었다는 마당에 또 특권층이 설치니 원… 이 나라 백성들은 언제 햇빛을 봅니까?』라고도 하면서 노기띤 안광에 슬픔이 가득차 있기도 했었다. 나는 아랫배에 힘을 주고 입을 꽉 다물면서 지그시 결심했다. 이분을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도와드리자.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애국이다….
  
   이즈음 의장의 일상은 보기에도 민망하리만큼 망쇄(忙殺)하였지만 저술의 핵심을 잡기 위해서는 상당한 담론이 필요치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같은 담론은 성질상 단 두 사람의 시간이 필요하였으며 그같은 기회는 미리 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무시로 대개의 경우 자정을 전후한 야반에 장충단 의장공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내가 메모한 예정된 내용이다 때로 그분이 말하는 자유로운 의견들을 중심으로 대충 골간을 잡아 당초 세운 논술 구성방향에 따라 글을 써내려 갔다.
  
   나는 이 책을 쓴 전후 6개월 이상을 그 분이 마련해 주겠다는 워커힐의 호화로운 별채를 마다하고 남산 밑의 3류 여관인 회현여관의 6첩 다다미방에서 지냈다. 50장에서 1백장 정도의 원고가 되면 의장공관으로 직행하여 읽어보고 의견을 말하곤 하였는데 바로 이 前後가 격동의 절정기였는지라 좀체로 차분하게 담론할 수가 없었다. 가다가는 돌발적인 사태, 정치적인 難題 등이 주제로 등장하여 혹은 진지, 혹은 흥분, 혹은 격정적이 되는 등 의외의 경우가 많았다.
  
   이 같은 일들은 한 민족국가의 운명을 거머쥔 한 영도자의 스스럼 없는 나상(裸像)을 보는 데서 역사의 엄숙, 민족의 비애, 국가의 어려움을 가슴에 느낄 수 있었고, 이 절대한 파도와 맞선 한 운명적 인간의 순정, 정열, 비장, 결심 등을 그대로 읽을 수가 있었다. 이런 중에서 어느 사이 내 스스로도 그분의 일부 의논상대가 되어 버리기는 하였으나, 무엇보다도 그분의 책을 저술함에 있어 최대한 정확을 기하는 데에 기본적인 도움이 되었었다. 나는 영원히 확신하고 있다. 이 이후 이 분의 이름으로 몇 권의 책이 나온 바 있지만 이 분의 철학·사상·정치·경제·문화·외교·사회관은 물론 인생관에 이르기까지 이만큼 정확한 바는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민족적 민주주의론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朴正熙의 主敵은 李朝의 지배계급, 즉 양반이며 그 정치문화를 이어받은 한민당 계열의 구정치인이요 그들의 당파성이다. 李朝, 李朝의 殘影, 그리고 李朝的인 것을 통틀어 그는 봉건적 잔재라느니 前근대적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제시한 조국근대화 혁명의 핵심은 李朝的인 것, 즉 양반정치 문화의 청산이었다. 朴正熙는 양반정치 문화의 전통이 한민당·자유당·민주당 계열 舊정치인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고 규정하고 이들을 가식적·사대적 자유민주주의자라고 비판했다. 즉, 양반적인 사고 방식을 갖고서 권력쟁취를 위해서 편의상 자유민주주의라는 대의명분을 들고 나왔을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박정희가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지적한 양반정치 문화의 병폐는
   분열성, 사대성, 부패·무능·독선으로 요약된다.
   「언(言)으로는 수(首)를 가고 행(行)으로는 말(末)을 차지하면서, 거기다가 시비와 패거리라면 창자를 움켜쥐고 달려들었던 이 악유전(惡遺傳)을 우리는 이제 거부할 때도 되지 않았던가」
  
   朴正熙는 1963년 9월23일 5代 大選 방송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족의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유민주주의는 항상 잘못 해석되고 또 잘 소화되지 않는 법입니다. 「사회질서를 요구하는 것은 강압이다」「외국대사관 앞에서 데모하는 것은 자유다」라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모두 자유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주·자립의 민족적 이념이 없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천박한 자유민주주의인 것입니다. 본인이 가진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그들의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그 자세와 조건이 다릅니다. 즉 자유민주주의는 건전한 민족주의의 바탕 위에서 존재해야 합니다』
  
   朴正熙는 저서와 연설에서 「건전한 민족주의」의 名論을 전개하고 있다. 自立경제, 自助的 태도, 自主정신이 그것인데 自立경제 건설을 이 모든 것의 제1 가는 기본으로 삼고 있다. 즉 국가예산의 52%를 미국원조에 의존하는 나라는 독립국가라고 할 수도 없으니 우선 자립경제를 건설해야 그 뒤에 自主정신도 생기고 자주국방, 복지국가건설, 최종적으로 통일도 가능해진다는 논리이다. 朴正熙가 저서와 연설에서 제시한 이런 우선 순위의 국가발전 전략은 그 뒤 30여 년간 한국에서 실천되었고 성공적인 결과물을 낳았다. 朴正熙는 이런 방향의 국가근대화는 정치안정 속의 강력한 지도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선거유세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李朝的 당파싸움 체질을 강화시킨 인맥 중심의 붕당(朋黨)을 대체할 이념중심의 公黨이 생겨야 정치안정이 제도적으로 보장된다고 그는 보았다.
  
   봉건과 싸워 전사(戰死)
  
   그러나 朴正熙가 조직한 그 公黨은 1963년 정치활동이 재개되자 JP 對 反JP 세력으로 분열했다. 동시에 야당은 다시 舊정치인의 朋黨으로 돌아가 朴正熙가 말살하려 했던 양반정치 문화는 되살아났다. 1963년 초의 연설에는 이런 현상에 대한 그의 좌절과 분노가 처절하게 스며 있다. 자신의 민정불참을 선언한 2·27선서식에서 朴正熙는 『본인은 오늘 혁명 정부가 당초 기도했던 「세대의 교체」라는 정치목표에 있어서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음을 솔직히 자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고백하면서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서둘러 연설을 끝내고 있다(녹음테이프 참조).
  
   朴正熙가 3·16선언으로 2·27선언에서 약속한 민정불참 약속을 파기한 뒤 자신을 「불행한 군인」으로 부르면서 군복을 벗고 5代 대통령에 뛰어든 번의와 번의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표차 15만6천이라는 힘겨운 승리를 거머쥐었다. 軍政 2년6개월의 업적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朴正熙로서는 15만6천표차의 선택은 섭섭한 것이었다. 그는 前근대적 양반정치 문화의 벽이 이 나라에서 얼마나 두터운 것인지를 새삼 실감했을 것이다. 朴正熙는 尹潽善 후보에 대해서 중국식 주자학처럼, 미국식 민주주의를 사대적으로 맹종하는 가식적 민주주의자라고 비판했지만 자유민주주의는 이미 한국 사회에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大義명분이 돼 있었고 「한국적 민주주의」니 「민족적 민주주의」니 하는 自主的 변용을 이단으로 몰아버릴수 있는 힘을 쌓아가고 있었다.
  
   더구나 한민당-민주당-민정당으로 이어진 야당의 주류는 朴正熙에 의하여 양반 정치 문화의 잔재로 비판받긴 했지만 민주화 정통세력이란 명분을 결코 빼앗기지 않았다. 朴正熙가 물리적 권력을 휘두르고 있을 때에도 정치와 언론, 그리고 지식인 사회에서 그는 챔피언이 될 수 없었고 기껏해야 도전자였다. 야당, 또는 양반정치 문화 세력은 항상 强者였고 주도권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야당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고 한국 지식인층의 지지를 받았으며 한반도의 좌익세력도 반(反)朴正熙 전선에 동참했다. 인권을 중요하게 여기는 미국식 민주주의, 당파성과 위선적 명분론에 강한 전통적 정치문화, 여기에다가 증오의 과학이자 기만과 선동의 기술인 공산주의 이념까지 뒤섞여 비빔밥이 되긴 했지만 바깥으로 발사되는 구호는 민주화로 통일되었다.
  
   10·26 그날 밤 朴正熙 가슴이 관통당하는 총격을 받고도 『난 괜찮아』라고 했을 때 그는 3面초가 상태였다. 그는 북한, 미국, 국내의 민주화 요구 세력으로부터 3面의 포위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아사히 신문 서울특파원 출신인 다나카 메이(田中明)교수(日本拓殖대학)는 『그는 한국의 봉건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말했다. 적어도 형이상학적인 의미의 정치분야에서 勝者는 양반(민주화세력)이고 敗者는 朴正熙였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그는 1992년 大選 직전에 쓴 「예외(例外)시대의 종언」이란 논문(「한국정치를 투시한다」란 책에 수록. 吉安社 발행, 1995년)에서 주목할 만한 분석들을 제시했다.
  
   부국강병을 외면한 양반
  
   <지금까지도 몇 번이나 언급해 온 바 있지만, 1961년 朴正熙 장군이 일으킨 군사쿠데타와, 그로 말미암아 성립된 군인정권은 한반도의 정치·문화사상 참으로 희귀한 존재였다. 한국의 역사상에서 군인정권의 전례를 찾아본다면, 7백년 전의 고려시대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로부터 조선시대 6백년 동안 文民우위·武人멸시의 풍조로 일관해 온 것이 한국사회였다. 따라서, 朴正熙 장군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군인이라는 「인종」이 집권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65년, 즉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4년 후에, 해방 후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나는 당시 일류 지식인으로부터 참으로 놀라운(나로서는) 고백을 들었다.
  
   「우리들은 군사혁명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나라에도 정부를 넘어뜨릴 수 있는 무장집단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우리들의 시야에 있었던 것은 학생이나 노동자들뿐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사정에 어둡고, 역사적으로 武人정권에 익숙해 있었던 일본인들은 그것이 예외라는 것을 모르고 「통상(通常)의 한국」이라고만 착각했던 것이다. 그것이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릴 만큼 눈부신 경제건설을 이룩함으로써 일본인의 착각을 한층 더 북돋웠다. 그만큼 성과를 올린 정권이니 기필코 한국의 체질에 맞는 것이려니 하고 생각했지, 예외적인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한국의 「通常」이란 무엇일까. 어떤 사회에 있어서 「통상」이란, 그 사회가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빚어내는, 때문에 그 사회의 토양에 가장 알맞은 인간의 존재양식일 것이다. 한국 정치에 있어서 「통상」이란 보수유산층(保守有産層)의 인사들이 이합집산을 되풀이하면서 벌여 온 권력쟁탈전이었다. 해방 직후부터 연면히 명맥을 유지해 온 한국의 정당은, 공산세력의 진출에 위기감을 느낀 지주·사업가·관료들에 의해서 조직된 한국민주당(한민당)의 계열로서, 김영삼씨다 김대중씨도 이 계열 속에서 정치가로서의 기량을 연마해 왔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을 부정하고 도전해 온 공산세력이 모험주의로 치달아, 미군정의 탄압으로 이북으로 도망하고 난 후부터는 부전승자(不戰勝者)로서 한국정치를 독점해 왔다.
  
   이들은 거의가 왕조시대의 지배층·양반의 가문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며, 으레 전통적인 색채를 짙게 띠고 있었다. 이 양반이라는 것은 중국의 학예를 습득하고 있는 지식인으로서, 도덕(修己)과 정치(治人)를 두 기둥으로 하는 유교의 학습자였다. 그들은 자기들만이 백성을 敎化하고 지배하는 유자격자라고 굳게 믿어마지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춘추의 필법을 구사하여 대의명분(이데올로기)을 논함에 있어서는 능하나, 대개의 경우 실용적인 학문에는 어두워 육체를 쓰는 무예나 노동을 천시했다.
  
   그들이 풍기는 태연자약한 大人의 풍모에는 동양인의 정신적인 고향을 연상케 하는 그 무엇이 있지만, 그러나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과제를 어쩔 수 없이 수행해 나가야만 하는 근대국가의 경영자로서는 바람직스럽지 못했다. 조선시대 말기, 일부 志士들이 그런 중세적인 사상 풍속으로부터 벗어나서 근대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깨닫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亡國의 길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을 때이며 탈피의 기회를 영영 잃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일본의 식민지 통치하에서는 조선인에게 근대정치의 훈련장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해방한국의 정치를 담당한 사람들은 전통사회로부터 양반들의 작풍과 그 정치감각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었다>
  
   양반의 나라와 민초(民草)의 나라
  
   <그들(朴正熙와 그 부하들)을 구시대 사람들과 확연히 구별짓는 것은 무엇보다도 「국가」감각이 아닌가 생각된다. 양반정치가들의 「나라」와 압도적인 농촌출신자들이 많은 군대를 배경으로 하는 장교들(박정희 장군을 비롯해서 빈농출신이 많다)의 「나라」와는 미묘하게 다른 점이 있다. 생각해보면 그들은 양반의 후예이며, 「나라」라는 것은 인민을 지도하고 지배하는 자기들의 관장물이라고 생각해온 조상의 피를 이어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나라」를 자기들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침략자에 대해서는 격렬한 저항을 했다.
  
   하지만 그들이 「나라」를 자기들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 지도·지배를 받는 일반 백성들은 「나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의 「소유자」인 양반은 하층의 백성들보다 훨씬 애국자(오늘날의 의미에서)였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유교라는 초국경적(超國境的)인 이데올로기의 신봉자이며 모화사상(慕華思想)에 흠뻑 젖어있던 양반의 「나라」는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국가보다도 훨씬 상대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韓末의 의병투쟁 때 조상의 忌日이 다가오면 전장에서 이탈, 황망히 집으로 돌아가 버리는 선비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며, 현대에서는 60년대의 말엽이라고 기억하고 있지만, 유명인사들의 자제가 징병을 기피하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던 정부가, 그러한 젊은이들과 부친의 이름을 나란히 해서 신문에 광고 형식으로 발표한 것을 본 적도 있다.
  
   서양에서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즉 귀족의 의무와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朴정권은 그러한 종래의 「나라」를 농민들도 「내 나라」라고 여길 수 있도록 하는 근대국민국가로 재편성하려고 했다. 박정희씨는 군인이었지만, 군사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함이 없이 오로지 경제건설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나라를 부강케 하고 국민에게 안정된 사회를 보장한다. 그렇게만 하면 거기서 얻어지는 안정감이 이번에는 나라를 지키려는 국민 상호간에 유대(紐帶)를 형성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을 가능케 한다―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한국정치를 더듬어 보면, 어떤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전통에 반역해서 「예외」를 지속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때까지 야당이나 학생 등 反정부운동 그룹들은 독재자의 가혹한 탄압으로 자기들이 얼마나 학대를 받아왔는가를 정력적으로 호소해 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강한 정부·여당, 약한 야당‥이라는 통념을 구축해 왔던 것이다. 실제로 체포하고 투옥하는 권력측은 한없이 강해 보인다. 하지만 선거에서 나타나는 정치력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야당도 결코 약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국민들은 「예외」의 정부가 쌓은 성장의 과실은 향수(享受)하면서도, 한국의 토양에 알맞는 야당인들의 언설·행동에는 심정적으로 공명하고 야당에 한 표를 던져왔던 것이다.
  
   朴정권 성립 이래 실시된 9회의 총선거 중 야당 전체의 득표율이 여당의 득표율보다 밑돈 것은 불과 세 번뿐이었다. 더구나 그 중 두 번은 4.3%, 0.7%라는 미세한 차였다. 따라서 「예외」의 정권은 정권유지를 위해서 정신없이 뛰지 않으면 안되었다. 정권이 그나마 유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명사 정당의 고질(痼疾)로서 야당이 분열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과, 「예외」측에 박정희라는 카리스마가 있어서 가까스로 열세를 부축해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리스마가 죽은 뒤엔 어쩔 수 없이 쇠퇴의 길로 들어갔으며, 90년대에는 여당이 김영삼씨를 영입함으로써 政界는 舊야당세에 의해서 좌지우지되게 되었다. 「예외」의 시대는 완전히 끝장이 난 것이다>
  
   민주화를 요구했다고 해서 반드시 민주주의자는 아니다
  
   여기서 또 착각이 생겼다. 군인정권이 퇴장하고 「예외」로부터 「통상」으로 추이(推移)하는 과정을 민주 저항의 승리, 즉 민주화의 진전이라고 보는 착각이다. 야당 세력이 민주화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권력에 항의하고 저항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민주화를 부르짖은 사람이 곧 민주주의자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 된 후의 서울의 봄(80년)이라고 불린 시기나, 1987년 말의 대통령 선거, 혹은 이듬해 봄에 있었던 국회의원 선거 때―각종 규제가 소멸되고, 민주화 열기로 전국이 들떠 있던 시기―에 어떤 광경이 벌어졌는가를 알고 있다.
  
   지난날 권력의 폭력을 규탄하고 민주화를 절규하고 있었던 兩金氏의 지지자들이 각목을 휘두르면서 난장판을 벌인다든가, 돌이나 화염병으로 반대파 후보의 연설을 방해하는 등, 폭력 광경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이 政界 일부의 현상으로만 머물지 않고 사회 전체에 「민주세력이 막무가내로 행패를 부리는」 언어 모순적인 현상을 빚었으며,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해야 할 언론의 자유마저 위협을 받는다는 사태까지 일어났던 것이다. 한국정치가 「예외」의 시대를 매장해 버리는 「통상」으로 복귀한 것은, 「예외」라는 것을 참아가면서 새나라 건설을 추진해 온 견인차 격인 지도자가 없고, 「통상」과의 갈등에 견디어낼 만한 에너지가 체제측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에너지가 없어지면 한국의 정치토양에 알맞는 「통상」이 부활한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이치다>
  
   朴正熙 18년은 한국 역사상 예외(例外)의 시대
  
   다나카 교수는 全·盧정권을 예외의 시대, 즉 무인(武人)시대로 보지 않고 있다. 이 두 군인출신 지도자는 朴正熙와 같은 논리와 배짱을 갖지 못하고 양반정치 文化에 굴복해 갔기 때문이란 평가이다. 金泳三대통령의 이른바 文民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에 쓴 이 논문에서 그는 또 의미심장한 예언을 했다.
  
   <예외에서 통상으로 복귀했을 때, 즉 한국인의 기질에 알맞는 文民정치가 되돌아오려 할 때 금방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자기체질에 맞지 않는 예외의 시대에 건설과 성장이 이루어지고 체질에 맞는 정치가 부활하려 할 때 막다른 골목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은 커다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다나카씨가 지적한 양반정치, 즉 통상적 한국정치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는 임진왜란―정묘호란·병자호란―한일합병의 예를 들어 양반정치의 단점을 지적하고 있다. 조선조의 지배엘리트는 임진왜란의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국가위기관리에서 똑같은 실수를 그 뒤 세 차례나 되풀이하여 민중들의 고통을 가져왔다. 1591년 일본에서 돌아온 조선통신사의 正使 황윤길(黃允吉)의 전쟁임박론에 대해 部使 金誠一이 전쟁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한 것은 다분히 당파적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었다. 국가의 운명과 관계된 문제에 대한 판단에서도 당파적 이해관계를 앞세운 사람이 어떻게 존경받는 학자로 지금껏 추앙될 수 있는가―이런 분위기가 바로 국가나 국민에 대한 애정 없이 오직 권력투쟁만 해온 양반文化의 전통이 아니겠는가―라고 다나카 교수는 지적했다.
  
   다나카 교수는 또 金誠一을 옹호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들어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 지식인의 풍토를 비판한다. <요컨대 선생(김성일)은 군자인(君子人)이고 소인편(小人便)은 아니다. 일본 수신사로서는 적격자이지마는 탐정군(探偵軍)으로는 대부당(大不當)한 것이다. 참으로 왜군이 쳐나올 것을 몰랐다면 탐정군으로서의 자격은 없었던 것이지만 王命을 존봉(尊奉)해서 굴욕은 당하지를 않았으니 수신사로서의 임무는 다하시었던 것이다. 수신사는 최고의 인물을 선견(先遣)하는 것이나 탐정군은 최하의 인간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최고의 인격만이 할 수신사의 임무는 수행하였는데 최하의 인간만이 할 탐정군의 자격은 없다고 해서 충신을 간신으로 폄하(貶下)시키는 자는 탐정군의 편(便)이고, 수신사의 편(便)은 아닌 것이니 그러면 그는 최고의 인물이 아니라 최하의 인물이 아닐까(유정기.柳正基,『국역(國譯) 학봉전집(鶴峰全集)』해설에서>경
  
   文民정부는 양반정치문화로의 복귀인가
  
   조선조의 양반은 보통인간과 자신도 지킬 수 없는 명분론을 정치무기로 삼아 政敵제거 게임을 벌이는 데는 열정을 불태웠으나 자주국방이나 民草들의 고통에 대한 관심은 약했다. 자주국방에 무관심하니 외교감각도 둔감했다. 망해가는 明에 충성하다가 신흥제국 淸에 두 번이나 국토가 유린당한 뒤에도 또다시 국제정세를 오판하고 내부분열을 일으켜 韓日합병을 자초했다. 국방과 외교와 경제에 대한 무관심과 反비례한 내부권력투쟁의 격화라는 양반지배층의 본질은 일본에 나라를 내준 뒤에도 제대로 비판받지 않고 온존되었다.
  
   해방 뒤에는 자유민주주의로 옷을 갈아입고 다시 한국정치를 주도하다가 6·26남침을 당했으나 이번에도 외국의 힘을 빌어 겨우 國體를 보존했다. 반성이 없는 이 양반정치세력은 朴正熙 18년의 예외적 시대를 견뎌낸 뒤 全, 盧정권하의 과도기를 거쳐 金泳三시대에 와서 만개(滿開)하고 있다는 것이 다나카 교수의 해석이다. 다나카씨는 위대한 건국대통령이자 개혁가인 李承晩을 한민당類의 守舊的 양반정치인과 구별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文民이란 말은 먹물, 선비, 士, 또는 양반으로 통한다. 金泳三의 소위 문민정부에서 이뤄지고 있는 학자우대, 역사관논쟁, 옛 중앙청 철거, 군사 문화 비판, 국방·외교정책의 혼란, 더 극렬해진 정치판의 권력투쟁, 관념적 정치구호의 범람. 이런 것들은 비정상이 아니라 한국의 통상적인 양반정치 文化에 알맞는 정상적 행태라는 것이 다나카 교수의 해석이다.
  
   朴正熙는 유교적 관념론에 문제를 제기한 유교적 실용주의, 즉 실학의 실천자였다. 실학의 핵심은 士農工商의 신분제도에서 생산성이 약한 양반계급, 즉 士를 약화시키는 대신 商工을 강화시키자는 것이었다. 朴正熙는 商工農士식의 계층서열을 주장하였다. 1962년 5·16기념식에서 그는 「농민, 노동자, 소상인, 기업인, 지식인, 학생」의 순번으로 호칭했다. 朴正熙는 생산계층을 키우면 양반계층이 자연스럽게 약화될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최근 한국에선 士를 대표하는 현대의 양반세력인 정치인, 검사, 기자가 칼자루를 잡고 기업인과 군인들(공교롭게도 구속된 두 대통령은 工高출신이고 구속시킨 현직 대통령은 문리대 출신이다)을 벌벌 떨게 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생산양식을 주도하고 있는 商工農계층은 그 압도적인 덩치 값을 못하고 있다. 실제의 생산능력에 비해 과잉 대표되고 있는 士와 과소 대표되고 있는 商工계층의 불균형을 어떻게 정상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한국사회를 이끌어갈 권력관계의 정상화 과제를 제시한다. 즉 제1의 근대화가 물질 면에서 이루어진 데 대해 제2의 근대화는 한국정치의 脫양반화로써 완결되어야 한다는 숙제를 던지고 있는 것이 朴正熙의 육성 토로가 담고 있는 메시지일 것이다.
[ 2006-06-28, 12:2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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