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에 대한 재인식
그는 민족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실용주의자였다.

이영훈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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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바로 알기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특강
  실용주의-민족주의자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의 원훈(元勳)
  이영훈
  
  
  
  대한민국을 세움에 있어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공로가 지대하였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간에는 이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가득합니다. 첫날 강의에서 소개하였습니다만, 송건호는 『해방전후사의 인식』1권에서 이승만을 친미 사대주의자이며 개인의 집권욕에 사로 잡힌 나머지 분단을 획책한 분단의 원흉으로 비난하였습니다. 그 밖에 이승만은 독립운동의 분열가이며, 독선적 성격의 권위주의자이며, 술수에 능한 정치꾼이며, 친일파의 보호자이며, 부정부패의 주범이라는 온갖 비난이 여기저기서 어렵지 않게 들립니다.
  
  이승만에 대한 온갖 비난은 거의 중상모략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음모와도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사를 폄하하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기획된 음모의 가장 중요한 고리가 바로 이승만 부정(否定)입니다. 문제의 중대성을 깨달은 다음, 저는 지난 며칠간 이승만에 관한 5-6종의 성향을 달리하는 연구서를 검토하였습니다. 제 나름의 관점이 처음부터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습니다만, 될 수 있는대로 공평하게 그의 일대기를 평가해보고 싶었습니다. 아직은 짧은 독서라 조심스럽지만, 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첫째, 이승만은 철저한 자유민주주의자였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그에게 있어 거의 종교적인 것이었습니다. 1875년에 태어난 이승만은 나이 20세까지 과거시험을 위해 전통 성리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는 갑오경장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배재학당에 들어가 서재필 선생을 통해 서구의 사상을 접하게 됩니다. 이후 이승만은 독립협회 활동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고종황제의 폐위 음모에 가담한 반역죄에 걸려 1899년 이래 근 6년간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됩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그는 배재학당에서 들은 선교사의 설교를 기억해내곤 그의 영혼을 기독교에 의탁하게 됩니다.
  
  기독교의 정신세계에 관해 저는 많이 알지 못합니다만, 대강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몸으로 홀로 선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의 계명과 소명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그 영혼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누구도 그의 구원을 대리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 앞에 외롭게 선 자신의 책임으로 구원을 성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종교적 구원관에서 기독교의 정신세계는 철저히 개인주의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성리학의 전통 정신세계와 많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성리학의 정신세계에서 인간은 부자(父子), 군신(君臣), 형제(兄弟), 장유(長幼), 붕우(朋友)와 같은 인간관계의 일환으로서만 그 존재론적 근거를 부여 받습니다. 그러한 우리 동양의 전통 정신세계에 비하자면 서구의 기독교는 고독이랄까 걱정이랄까 그러한 불안한 정신세계를 특질로 하고 있습니다. 그 개인주의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나 정치적 행위와 관련하여 자유주의로 자신을 표방한다고 생각됩니다만, 여기서는 더 이상 그런 복잡한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개종 이후 이승만의 일생은 종교적인 삶이었습니다. 이승만의 종교적 정신세계는 정치가로서 그를 자유민주주의의 비타협적인 실천가로 만들었습니다. 그에게서 공산주의와의 타협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인이 보기에조차 지나칠 정도로 고집불통의 반공주의자였습니다. 이후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이 취한 정치적 자세와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점을 무엇보다 전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둘째, 이승만은 철저히 실용주의적인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정치의 실리적인 이해타협과 특히 국제정치의 냉혹함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한제국의 멸망 과정을 두 눈으로 목도한 사람입니다. 위정자의 정치적 선택이 어떻게 잘못되면, 한 사회가 정신적으로 어떻게 타락하면, 한 국가가 망하는지를 그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미국의 도움으로 대한제국의 멸망을 막아볼 요량에서였지요. 그 최초의 실패한 외교활동에서 이승만은 국제정치가 얼마나 냉혹한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이후 5년간 그는 하바드와 프린스턴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정치학박사를 취득합니다. 이후 그가 벌인 외교주의 독립운동은 그의 비판자들이 자주 지적해 왔듯이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그럴듯한 성공을 거둔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는 패망한 나라의 무기력함을 그 과정에서 수도 없이 통절하게 느꼈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면서 그는 어떠한 명분론에도 쉽게 현혹되지 않는 매우 철저한 현실주의적이며 실용주의적 정치가로 성숙하였습니다.
  
  그 좋은 예를 저는 초대 헌법의 제정과정에서 봅니다. 유진오 등의 젊은 법학자들이 초안을 잡은 정부형태는 내각책임제였습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강하게 반발하며 대통령책임제로 바꾸었습니다. 그의 권력욕 때문일까요. 저는 60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 정치의 일상적 행태를 보면서 아직도 내각책임제는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대화와 타협의 기술이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1987년의 일인가요, 드디어 오랜 개발독재의 시대를 종식하는 대통령 선거가 행해질 때 어떠한 일이 벌어졌습니까. YS와 DJ라는 두 야당 지도자가 대통령을 먼저하겠다는 욕심을 억제하지 못해 결국 야당을 분열시키면서, 그렇게 출신 지역을 분열시키면서, 동시에 출마하지 않았습니까. 그 얼마나 우스꽝스런 일이었습니까. 그런 엉터리 같은 일은 그 이전에도 많았고 또 2006년의 오늘날에도 계속 반복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권력을 코 앞에 두었다고 민주화운동을 함께 한 정치가들마저 분열하였다면, 그보다 40년 전 초창기 대한민국의 정치에 대화와 타협의 예술이라 할 내각책임제를 안정적으로 꾸려갈 능력이 부족했다고 보아도 큰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이승만이 내각책임제를 무산시킨 것은 초창기의 미약하고 혼란스런 국가는 강력한 리더쉽을 요구한다는 현실주의적 정치원리에 충실하였기 때문이지 그 자신의 권력욕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필요하다면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함에 주저하지 않는 정치 역량을 과시하였습니다. 그는 인간들의 명예와 권력과 황금에 관한 헛된 욕망을 미끼로 자신의 정치세력을 조직하고 그들을 동원하였습니다. 소기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다음 이승만은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 그들을 버렸습니다. 이 같은 이승만의 정치 기술에 관해서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2권에 실린 김일영의 「전시 정치의 재조명 -부산 정치파동의 다차원성에 대한 복합적 이해-」란 논문이 흥미롭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김일영 교수에 의하면 당대의 정치가로서 정치의 그러한 속성을 이승만 이상으로 잘 이해하고 구사했던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그는 확실히 권위주의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권위주의 정치가 그의 개인적 치부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끝내 금욕적이었으며 청렴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정부에서 관료로 재직한 경력의 사람들은 그가 부족한 달러를 아끼기 위해 단돈 1달러의 지출도 직접 결재하였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정신 나간 외교관이 도오쿄 출장 중에 비싼 요리점에 들어갔다가 대노한 대통령의 질책을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신생 후진국의 정치지도자로서 그런 미덕을 보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채 빈털터리로 죽었습니다.
  
  셋째, 이승만은 시종일관 민족주의자였습니다. 미국에서 40년 가까이 살면서도 그는 끝내 미국의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에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음을 이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그를 친미 사대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비난입니다. 그는 해방 이전부터 사사건건 미 국무성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미 군정의 하지 장관과 심하게 반목하였습니다. 미 군정이 좌우합작을 추진했기 때문이지요.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그 노선을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의 현실주의적 감각으로 볼 때 그것은 처음부터 공상이었습니다.
  
  이승만의 실용주의와 민족주의가 그의 재임기간에 남긴 최대의 업적은 1956년 미국과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승만은 미국에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습니다만, 미국은 한국과 같이 약소한 나라와 동맹을 체결함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미국을 군사동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승만은 한반도에 걸린 미국의 이해관계를 미국에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외교자원으로 충분히 활용하였습니다.
  
  그는 휴전을 반대하였으며 끊임없이 북진통일을 부르짖었습니다. 그의 부르짖음이 한갖 수사(修辭)가 아니었음을 미국은 깨닫게 됩니다. 어느 날 거제도의 반공포로 수만 명을 기습적으로 석방하였기 때문이지요. 전 세계가 놀랐습니다. 이승만이 미국의 코를 세게 비튼 셈입니다. 그런 식의 무모한 외교를 당시 미국사람들은 “칼을 입에 물고 뜀을 뛰는 것”과 같다고도 했습니다.
  
  드디어 미국은 한국군을 자신의 통제하에 둘 실용적인 계산에서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합니다. 이승만은 대륙의 공산주의 국제세력으로부터 대한민국을 방위할 가장 확실한 방호막을 한미동맹으로부터 설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미동맹을 체결하기까지 이승만이 펼친 능수능란한 외교에 관해서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2권에 실린 차상철의 「이승만과 1950년대의 한미동맹」라는 논문이 좋은 참고서입니다. 청취자 여러분께서는 꼭 구해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이승만에 대한 온갖 모략성의 비난이 통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한 ‘반민족특별행위조사위원회’의 활동을 중단시킨 사실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 점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반민특위는 1948년 10월 설치되어 1949년 8월 말 공소 시효가 만료될 때까지 활동하였습니다. 그 기간에 305명이 체포되고, 221명이 기소되었으며, 40명이 재판에 회부되고, 12명에게 실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당시의 재판기록을 읽어 보면 반미특위의 활동은 사실상 처음부터 중대한 한계에 봉착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등계 형사와 같이 독립운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하고 탄압한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경우엔 재판이란 것이 일종의 도덕 훈계와 자기 반성의 형식을 넘지 않았습니다. 타인의 재산과 인명을 탈취하고 살상한 실정법 상의 범죄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검사가 범죄를 논증하고 변호인이 반론하는, 그렇게 법리를 치열하게 다투는 재판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해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서 지적하였습니다만, 해방은 우리 힘으로 성취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독립군이 일본군을 밀어내는 전쟁을 통해 해방을 성취했다면 친일파의 숙청 문제는 제기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나치에 대항하여 레지스탕스가 활약한 프랑스가 그러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악질적인 친일파들은 전쟁 도중에 이미 처형되었을 것입니다. 처형을 면하기 위해 친일파들은 일본군을 따라 일본으로 도망쳐야 했겠지요. 그렇지만 연합군이 일제를 항복시키는 통에 해방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주어진 해방공간에서는 그 누구도 친일파를 숙청할 수 있는 물리적인 힘과 도덕적 권위를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어정쩡한 상황에서 친일파 문제는 이미 좌파와 우파 정치세력 간에 가장 심각한 대립점의 하나를 이루었습니다. 좌우간의 대립에서만도 아니었습니다. 같은 우파끼리도 이 문제를 둘러싼 대립은 심각하였습니다. 1945년 12월 중순 서울의 국일관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귀국한 임시정부의 요인을 환영하는 자리가 한민당의 간부에 의해 마련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임시정부의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들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장덕수가 “그럼 난 어김없는 숙청감이군 그래”라고 받아쳤습니다. 이후 더 소개하기 민망할 정도의 언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씁쓸한 일화는 당시부터 이른바 친일파의 숙청 문제가 나라세우기라는 중차대한 역사적 사명을 앞둔 인간들을 얼마나 당혹하게 만들고 있었던가를 잘 들려 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이승만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가 초대 내각을 구성하여 발표하자 일부 각료 중에 친일 경력의 소유자가 포함된 것에 대해 비판 여론이 일었습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악질적인 독립운동 방해자 이외에 친일파란 있을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욕을 먹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승만 대통령의 이 같은 주장에 공감합니다.
  
  초대 정부의 경제부처에 근무했던 어느 나이 많으신 분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정부의 관료들은 친미파, 친중파, 친일파로 나뉘었다고 합니다. 친미파는 미국 출신으로서 소수의 고위직이었고, 친중파는 중국에서 임시정부와 함께 돌아온 사람들로서 정치적 명분이 가장 강한 사람들이었지만 실무 능력이 거의 결여된 사람들이었으며, 숫적으로 가장 많은 친일파는 일본에 유학을 하거나 국내 대학의 출신자들인데 정치적 입장이 가장 약하면서도 막상 실무 능력은 가장 우수했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반민특위의 활동은 정부의 실무 관료들을 동요시켰습니다. 제주도와 여수ㆍ순천에서는 남로당이 일으킨 반란이 전개 중이었습니다.
  
  그러한 정치적 혼란기에 반민특위는 법적으로 주어진 1년의 기한으로 이미 그 역사적 사명을 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이승만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불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대한제국이 패망하고 40년간이나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다가 남의 나라 힘으로 해방되고 독립한 나라로서는 역사의 업보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가슴에 묻어둔 채 침묵함으로써 모두가 모두에게 관대해질 필요가 있는 그러한 역사적 업보였습니다. 오랜 침묵 후에 역사의 성찰로서 후세에게 조용히 가르침으로 남길 그러한 업보였습니다. 이 문제를 둘러싼 초대 대통령의 고뇌에 가득찬 정치적 결단은 그러하였다고 저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승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권위주의적이고 고집불통이었다는 도덕적 비판에는 저도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가 범한 정치적 실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라를 세운다는 몇 세기만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지극히 중대한 정치적 사건과 관련된 한 역사적 인물을 개인적 성품이나 집권 이후의 몇 가지 정치적 과오로 덮어서는 공정한 평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가 추구한 정치적 이상은 무엇이었는지, 그 나라를 반석에 놓기 위해 그가 추구한 국제정치는 어떠한 것이었는지, 내외정에 걸친 그의 업적은 이후 장기적으로 어떠한 영향으로 남았는지 등등의 정치사적 시각에서 이승만은 재평가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 시각에서 다시 볼 때 이승만은 그를 배제하고서는 대한민국의 출발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나라세우기에 지대한 공로를 남긴 사람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교과서는 그를 건국의 원훈(元勳)으로 정중하게 모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와 정치적으로 대립한 사람들, 심지어 북한의 김일성까지 단독으로 그 얼굴이 전해지는 역사교과서에 왜 이승만 대통령의 단독 사진은 없습니까. 워낙 얼토당토 않은 중상모략성의 비난이 중ㆍ고등학교의 교과서에서부터 횡행하고 있어서 그 점을 새삼스레 지적해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영훈(서울대 교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공동편집자)
  
  *이영훈 교수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특강>은 EBS 라디오 홈페이지(다시듣기)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http://www.ebs.co.kr/Homepage/?progcd=0002420
  
  
[ 2006-06-29, 15:4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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