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적 독일군과 수세적 프랑스군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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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 11/아르덴느 돌파 작전 이야기
  
  하버드 대학의 어네스트 메이 교수는 上記 저서 「이상한 승리」에서 1940년 독일이 6주만에 프랑스군을 괴멸시킨 가장 큰 功을 독일군의 정보 부서에 돌렸다. 독일 참모본부의 정보참모 티펠스킬크 장군과 그 휘하의 서부군 담당 리스 대령이 프랑스군 지휘부의 생리와 병력배치, 그리고 방어전략을 정확히 파악하여 독일군의 공격작전계획을 수립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메이 교수는 독일과 프랑스의 전략정보 수집능력을 비교하기도 했다. 독일군의 정보기능은 작전기능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프랑스의 정보기능은 작전 담당자에게 조간신문을 던져놓고 가는 식으로 상호간에 유리되어 있었다고 했다.
  
  티펠스킬크 소장은 1차세계대전 때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었고 프랑스어를 잘해 프랑스군에 대한 정보수집에는 적격의 인물이었다. 리스 대령은 승마선수로도 유명한 엘리트 장교로서 프랑스와 영국군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두 사람이 파악한 프랑스 참모본부의 문제점은 이런 것들이었다. 프랑스 지휘부는 안전성을 대담성보다 중시한다. 즉, 모험을 하지 않으려 한다. 지휘관들의 재량권이 제한되어 있다. 승리할 수 있다는 보장이 확실할 때만 공격한다. 전투현장에서 프랑스군 지휘관이 好機를 잡았을 때 이를 잡아 戰果를 확대하려고 해도 상부로부터의 규제가 많아 어렵다는 결론도 도출되었다.
  
   독일 참모본부의 정보참모부서는 1938년 가을에 체코슬로바키아 사태로 전쟁일보 직전까지 간 상황에서 프랑스군이 보인 반응을 면밀히 분석했다. 프랑스군은 독일에 대한 공격보다는 독일군의 공격에 대한 방어계획을 세우는 데 주력했다. 프랑스군은 또 벨기에 국경지대에 주력을 배치했다. 독일 정보부서는 프랑스 장교들의 행태는 기본적으로 방어위주이며 정부로부터 명령을 받지 않으면 스스로 공격에 나서지는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독일군 참모본부가 분석한 프랑스군의 행태는 방어 위주의 프랑스 사회분위기와도 맞아떨어지는 현상이기도 했다. 요컨대 프랑스군은 소극적이고 관료적이라 변화무쌍한 전쟁상황에 신속하고 대담하게 대응하는 체질이 못 된다는 이야기였다.
  
   1939년 10월 독일 참모본부의 정보부서 서부과는 프랑스군의 행태를 이렇게 분석했다.
  <프랑스 군인들은 감정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다. 전쟁의 목표가 분명하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면 그들은 임무를 수행하더라도 열심히 하지는 않는다. 이 경우 피해를 크게 보면 부대는 내부로부터 흔들리게 된다. 반면, 프랑스군은 설득력 있는 말을 들으면 쉽게 士氣가 고양된다. 국토를 지키는 전쟁에서는 항상 열정적으로 격렬하게 싸운다. 프랑스군의 핵심적인 문제점은 너무 조심한다는 것이다. 대담한 작전으로 큰 전과를 거두는 것보다 안전성을 항상 우선시킨다.>
  
   1939년12월에서 1940년초에 걸쳐 정보참모부 西部課는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주력 75개 사단을 벨기에쪽 국경지대로 집결시키고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이 주력 가운데는 프랑스의 기계화 사단과 자동화 사단의 거의 전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원래 [황색 작전](Yellow Plan)이란 작전명으로 1940년1월17일에 프랑스를 기습하려고 하였다. 작전 개시 며칠 전 이 작전문서의 일부를 갖고 가던 장교가 탄 비행기가 악천후로 벨기에 지역에 불시착하였다. 장교는 문서의 일부를 불태웠으나 나머지는 벨기에군에 넘어갔다. 히틀러는 작전계획이 누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공격을 연기했다.
  
   이[황색 작전]의 핵심은 1차세계대전 전에 참모총장 슐리펜이 만들었던 작전 계획과 거의 같았다. 슐리펜 계획이라 불리는 이 작전의 핵심은 서부전선의 우익에 주력을 집중시켜 벨기에를 돌파하여 프랑스의 옆구리를 강타한 다음 거대한 좌회전을 하여 파리를 포위한다는 것이었다.
  
   이 작전이 성공하려면 우익에 병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슐리펜이 물러나고 大몰트케의 조카 小몰트케가 참모총장이 되었다. 小몰트케는 소심하고 조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익에 너무 많은 병력을 집중시키면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좌익으로 역공을 펼 때 방어가 어렵게 된다고 걱정하여 우익에 붙여주어야 할 병력을 좌익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1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은 이 변형된 슐리펜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이 작전계획엔 전제조건이 있었다. 중립국인 벨기에로 우익의 주력을 진출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벨기에를 작전의 공간으로 삼고 있었다. 자동적으로 벨기에의 중립을 무시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벨기에로 독일군이 쳐들어가자 그때까지 참전 여부를 놓고 고민하던 영국이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다.
  
   이 변형된 슐리펜 작전계획에 따라 진격을 계속한 독일군은 파리 근교 마른느까지 진출했으나 조프레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의 끈질긴 방어전에 걸려 마지막 순간에 진격을 멈추고 후퇴하고만다. 戰史家들은 당초 계획대로 우익에 압도적 병력을 배치해두었더라면 마른느를 돌파하여 파리를 포위하고 프랑스를 쉽게 무너뜨렸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히틀러는 이 슐리펜 작전계획의 원안대로 프랑스를 치려고 했다. 비행기 사고로 공격이 연기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독일군의 주력을 기다리고 있던 프랑스-영국군의 주력과 정면충돌하여 지구전으로 갔든지 독일군이 패배했을 것이라고 보는 戰史家들이 많다.
  
   만슈타인, 구데리안 등 독일의 몇몇 장군들은 처음부터 히틀러에게 슐리펜 계획의 반복사용에 반대했다. 히틀러는 이런 반론을 무시했다가 공격이 연기된 상황에서 작전계획을 재고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참모총장 할더 장군에게 새로운 작전계획을 짜보도록 지시했다.
  
   이때 할더 장군은 이미 정보참모부장 티펠스킬크 소장과 리스 대령으로부터 主攻을, 벨기에 평원이 아닌 벨기에 남쪽의 아르덴느 숲을 통해 프랑스 세단으로 나오는 방향에 놓는 게 유리하다는 연구 보고를 받아 놓고 있었다.
  프랑스는 아르덴느 숲 지대로는 탱크가 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 전선에는 아주 취약한 방어부대만 배치시켜놓고 있었다.
  
   1939년12월에 독일군 참모본부는 워 게임을 했다. 이때 프랑스군의 총사령관 가므랑 장군역을 맡은 것은 정보참모부의 서부과장 리스 대령이었다. 이 게임에서도 기갑군단을 아르덴느 숲지대로 보내 프랑스의 취약한 벙어선을 기습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얻었다.
  
   리스 대령은 이런 평가를 했다고 한다. 독일군이 벨기에로 쳐들어가면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은 슐리펜 계획을 연상하여 이것이 主攻이라고 속단하고 자신들의 주력군을 벨기에로 북진시킬 것이다. 이때를 기다려 독일의 주력인 기갑군단(10개 기갑사단)은 벨기에 남쪽의 아르덴느 숲지대를 지나 프랑스 방어선을 돌파하여 도버 해협쪽으로 진격한다. 이렇게 되면 프랑스-영국군 주력의 배후에 독일 기갑군단이 나타나 연합군을 남쪽의 파리와 북쪽 벨기에로 양단한다. 그런데 파리쪽에는 예비병력이 소수이므로 쉽게 함락시킬 수 있다.
  
   배후가 뚫렸다는 것을 알아차린 프랑스군 지휘부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리스 대령은 오랜 프랑스 지휘부의 행태 연구를 통해서 신속한 대응, 즉 돌파된 프랑스 전선으로 북쪽의 주력군을 재빨리 이동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했다. 프랑스군 장교들의 생리가 임기응변에 약하고 자세한 명령을 받기 전에는 작전 변경을 하지 않는데다가 통신망이 취약하고 전화는 도청된다고 인편을 통해서 명령을 수령하기 때문에 급변하는 상황에 제때 대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1940년5월10일 히틀러는 변경된 [황색 계획]에 따라 공격을 개시했다. B 집단군이 네덜란드, 벨기에로 쳐들어가자 프랑스 영국 연합군은 기다렸다는듯이 주력군을 벨기에로 북상시켰다. 독일군은 B 집단군이 주공인 것처럼 위장했다. 그 사이 10개 기갑사단을 핵심으로 한 진짜 주력인 A집단군이 벨기에 남쪽의 아르덴느 숲 지대를 지나 프랑스 국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아르덴느 숲지대를 전차가 통과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으나 독일군은 쉽게 통과했다. 이 길가의 나무를 베어 길에 걸쳐놓기만 해도 기갑부대의 통과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을 것이다. 프랑스군의 정찰기가 대부대의 이동을 탐지하고 상부에 보고했으나 무시당하고말았다. 그 방향으로 대부다가 기동할 리가 없다는 선입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 프랑스군 지휘부였다.
  
   독일 기갑군단은 5월14일과 15일 뮤즈강을 도하하여 프랑스 세단으로 나왔다. 취약한 프랑스 방어군의 저항은 분쇄되었다. 프랑스군 지휘부는 이 지역으로 主攻이 들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허약한 부대만 골라서 배치했던 것이다. 독일 기갑군단은 후속 부대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渡河와 진격을 계속했다. 기갑부대가 보병부대의 지원이 없으면 적진에서 고립될 수도 있지만 롬멜, 구데리안처럼 상상력이 뛰어난 장군들의 임기응변에 의해 기갑군단의 진격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열흘간 계속되었다.
  
  독일 기갑군단은 뮤즈강 도하 열흘만에 도버해협에 도착함으로써 영불 연합군의 주력을 북쪽으로 포위하고 얼마 되지 않는 프랑스 예비병력을 남쪽의 파리 방향으로 고립시키는 데 성공한다. 대혼란에 빠진 프랑스의 200만 대군은 불과 6주만에 괴멸된다.
  
  아르덴느 돌파전이라고 불리는 이 작전은 한니발의 칸나에 전투와 함께 세계전사상 가장 뛰어난 기습전으로 꼽힌다. 독일군의 성공에는 프랑스군 지휘부의 무사안일주의를 간파한 정보부서, 안전보다는 모험과 속도를 중시한 롬멜, 구데리안 등 창의적인 장군들의 역할이 있었다.
  
  프랑스군 지휘부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수세적이고 관료적이며 책임회피적으로 대처하다가 찬스를 놓치고 기습을 허용하였던 것이다. 독일의 적극적 사고와 프랑스군의 소극적 사고의 대결에서 이긴 쪽은 모험을 감행한 독일이었다.
  
  
  
  
  
  
  
  
  
  
  
  
  
  
  
  
  
  
  
  
  
  
  
  
  
  
  
  
  
  
  
  
  
  
  
  
  
  
  
  
  
  
  
  
  
  
  
  
  
  
  
  
  
  
  
  
  
  
  
출처 :
[ 2003-04-08, 01:5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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