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庾信·朴正熙이라면
『개는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이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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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GDP는 한국의 50분의 1 내지 100분의 1로 추정된다. 북한은 중국과 동맹관계이나 韓美동맹처럼 굳건하지 못하다. 김정일이 핵실험을 하고 유엔 안보리가 對北제재를 하는 데 중국이 미국, 일본과 합세하였으므로 中北 관계는 위기에 처해 있다. 물론 북한 땅에 중국 군대가 들어와 있지도 않다. 그렇다면 왜 盧정권은 이처럼 김정일에게 事大하고 굴종하는가? 왜 국민들은 盧武鉉 대통령의 그런 수치스런 모습을 보고도 들고일어나지 않는가? 國力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나는데도 왜 남한은 북한정권을 갖고 놀지 못하고 오히려 끌려다니고 공갈당하고 뜯어먹히는가?
   대한민국과 국군과 국민들은 '전쟁을 결심할 수 없는 나라-군대-국민'이 아닌가? 그렇다면 아무리 허우대가 좋고 富者이더라도 한국은 식민지이고 군대는 용병이며 국민은 백성이다. 혼이 빠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盧정권이야 태생적으로 반역적이니 그렇다고 치자. 국방을 남의 문제로 생각하는 이런 국민들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自主의 화신 金庾信과 朴正熙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다. 死生觀이 정립된 국가엘리트층이 보이지 않는다. 머리 좋은 식민지 관료형 기회주의자와 거짓선동의 名手인 반역자들은 많다. 그들은 국민들을 속이고 自主와 주체성의 기둥을 뿌리뽑아 정신 없는 국민들을 만들려 한다. 그 결과 그들은 '一戰不辭'(일전불사)라는 말만 들어도 화들짝 놀란다. 김정일이 핵폭탄을 손에 넣었으니 한국도 對應핵개발을 해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하면 무슨 죄라도 짓는 것처럼 안색이 변하는 지식인들도 있다.
   자유와 번영의 공동체를 지키는 일에도 여기 저기 소심하게 금지선을 쳐놓아 김정일이 핵실험을 해도 '전쟁을 각오하자'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오늘이 막히면 과거를 돌아보고 그 속에서 용기의 원천을 찾아 재충전한 뒤 미래를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 司馬遷의 史記정신이다. 7세기로 시계를 돌려놓는 이유이다.
  
   서기 660년 金庾信이 이끄는 신라군 5만 명은 황산벌에 도착하여 백제 장군 階伯(계백)의 5000 결사대와 대치했다. 여기서 일어난 일들은 三國史記에 실감 나게 적혀 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많이 소개되어 있는 장면들이다. 6·25 전쟁 후의 195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닌 우리 세대는 階伯, 官昌(관창)의 장렬한 죽음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흥분을 맛보았다. 아이들끼리 병정놀이를 할 때 『너는 階伯 장군, 나는 金庾信』式으로 별명을 붙여 일종의 연극을 하기도 했다.
  
   기자는 당시 별명이 「階伯」이었다. 그런 별명을 갖고 나니 金庾信이 미워지고 백제軍을 동정하게 되어 주로 그런 성향의 역사소설을 많이 읽었다. 지금은 金庾信을 「삼국통일로 한민족 형성의 출발점을 만든 민족사 제1인물」로 평가하게 되었지만 어릴 때의 彼我감정이 퍽 오래 갔던 기억이 있다.
  
   황산벌에서 일어난 장면들은 三國史記의 기록 덕분에 영화처럼 생생하게 想像(상상)할 수 있다. 소년기에 읽었던 플루타크 영웅전이나 三國志, 또는 일본 戰國시대 武士 이야기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황산벌 전투는 한국 군사문화의 絶頂(절정)을 보여 준다. 그 이후의 한국사에서 실종된 武士道와 男性美의 현장감이다.
  
  
   階伯은 출정하기 전에 패배를 예감한 듯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三國史記 列傳).
  
   『한 나라의 인력으로 唐과 新羅의 大兵을 당하게 되었으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가 없다. 내 妻子(처자)가 노비가 될까 두렵다』
  
   그는 처자를 모두 죽이고 출정했다. 황산벌에서 階伯의 결사대는 10배나 많은 신라軍을 네 차례 격퇴했다. 金庾信은 여기서 신라軍도 決死특공의 방법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그전 진덕여왕 시절 金庾信은 백제軍과 싸울 때 苦戰(고전)하자 충직한 부하 丕寧子(비령자)를 불러 술을 함께 마시면서 부탁했다. 비령자는 『저를 알아 주시고 또 이런 일을 맡겨 주시니 죽음으로써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비령자는 아들 擧眞(거진)을 데리고 출전했는데 걱정이 되어 종 合節(합절)을 불러 부탁했다.
  
   『내가 죽으면 아들이 반드시 따라 죽으려 할 것인데 너는 거진과 함께 나의 해골을 거두어 돌아가 어머니를 위로해 다오』
  
   비령자가 적진으로 돌입하여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을 보고 아들도 뛰어들려고 했다. 종 합절이 말리니 거진은 칼로 합절의 팔을 친 다음 달려가 전사했다. 합절도 『상전이 죽었는데 내가 죽지 않고 무엇하랴』면서 뛰어들어 죽었다. 이 세 사람의 죽음을 본 신라軍이 분기탱천하여 일제히 돌격, 백제軍을 무찌르고 3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는 것이다.
  
  
   階伯과 대결할 때 신라군 사령관 金庾信은 부사령관 둘을 데리고 있었다. 부사령관 金欽純은 金庾信의 동생이었다. 그는 아들 盤屈(반굴)을 불렀다.
  
   『신하는 충성이 제일이고 자식은 효도가 제일이다.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는 것은 忠孝를 다 완성하는 것이다』
  
   반굴은 아버지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적진으로 돌입하여 장렬하게 전사했다. 다른 부사령관 品日(품일)은 아들 官昌을 데리고 출전했다. 品日도 아들을 백제軍으로 돌격시켰다. 階伯은 사로잡힌 관창의 갑옷을 벗겼다.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것을 보고는 살려보냈다. 관창은 신라軍으로 돌아와선 우물물을 들이켜 마시고는 다시 돌격을 감행하였다. 階伯은 생포한 관창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아버지 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붙들고 옷소매로 피를 씻으면서 말했다.
  
   『내 아들의 面目(면목)이 아직 살아 있는 것 같구나. 임금님의 일로 죽었으니 후회가 없을 것이다』
  
   신라軍은 이 두 소년 장군의 죽음을 보고는 흥분하여 북을 두들기면서 진격하여 백제軍을 격파했다는 것이다.
  
   金庾信의 조카가 되는 盤屈의 아들이 있었다. 金令胤이라고 했다. 문무왕 다음이 神文王인데 이때 고구려의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명령을 받은 장군 金令胤은 출전할 때 아버지 盤屈의 명성을 의식했음직한 발언을 한다.
  
   『나는 이번에 친척들과 친구들이 악평을 듣지 않도록 하겠다』
  
   반란군과 대치할 때 金令胤의 동료 장수들은 『잠시 병력을 물렸다가 적이 피곤해진 뒤 공격하자』고 건의한다. 金令胤은 그 건의를 거부하고 즉시 돌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從者(종자)가 말렸다.
  
   『장군들이 저렇게 하는 것은 자신들의 목숨을 아끼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잠시 예봉을 거두고 틈을 보자는 것인데 장군님만 홀로 나아가려고 하니 안 될 일입니다』
  
   金令胤은 이렇게 말했다(三國史記 列傳).
  
   『싸움에 임하여서는 나아감만 있을 뿐 물러남이 있어선 안 된다. 장부가 일에 임하여 스스로 결정할 일이지 衆意(중의)를 왜 따라야 하는가』
  
   金令胤은 적진으로 쳐들어가 격투하다가 죽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神文王은 비통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 아비가 없었으면 그 아들도 없었을 것이다』
  
   金令胤은 신라 사람들의 귀감이 된 아버지를 너무 의식하여 좀 무모한, 일종의 자살 공격을 했다는 것을 왕이 알았다는 느낌이 드는 말이다.
  
  
   삼국통일의 주체세력이 된 신라의 武士들은 忠孝를 일치시킨 도덕률을 항상 가슴과 머리에 새겨 놓고서 생활했다. 화랑도는 東아시아에서 나타난 최초의 장교양성 교육기관이다. 이들의 행동윤리는 臨戰無退(임전무퇴)로만 단순화되지는 않았다. 圓光 법사가 만든 화랑 5계에 의해 殺生有擇(살생유택)이란 인도적 배려가 따랐다. 반드시 이겨야 하되 쓸데없는 살육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배려, 국가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가 3위1체로 통합된 것이 新羅武士 집단의 행동윤리이자 도덕률이었다. 화랑도의 대표인 風月主 출신이자 신라 무사도의 化身인 金庾信에게도 後日譚(후일담)이 있다.
  
   그의 둘째 아들 元述(원술)은 唐軍과 싸우다가 패했다. 다른 장군들은 전사했고 그도 죽으려 했으나 보좌관이 말리는 바람에 살아서 돌아왔다. 金庾信은 자신이 죽인 수많은 신라의 젊은이들을 생각하였음인지 문무왕에게 원술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왕은 그러나 『원술한테만 중죄를 물을 수는 없다』면서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원술은 시골로 도망해 있다가 아버지가 죽은 뒤 나타나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는 면담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부인에게는 三從(삼종)의 義(의)가 있다. 지금 홀로 되었으니 마땅히 자식을 따라야 할 것이나 원술 같은 자는 이미 남편의 자식 노릇을 못 하였는데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되겠는가』
  
   원술은 그 뒤 對唐결전의 최대 승부처였던 매소천성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세상을 마쳤다고 한다.
  
  
   金庾信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고려 때까지는 매우 높았다. 三國史記를 쓴 金富軾은 삼국의 제1인물이 金庾信이고, 삼국통일의 제1元勳(원훈)도 金庾信이란 평가를 깔고서 임금도 아닌 그에게 가장 많은 紙面(지면)을 내주었다. 金庾信 列傳의 끝에서 金富軾은 이런 평을 하고 있다.
  
   『신라에서 유신을 대함은 친근하여 틈이 없고, 위임하여 변함이 없었으며, 꾀를 행할 때 말을 들어주어 부리지 않는다고 원망치 않게 하였다. 그러므로 유신이 그 뜻을 펼 수 있게 되어 삼국을 합쳐 한집안을 만들고 공명으로써 일생을 끝마쳤다. 유신에 대해서는 지금껏 잊지 않고 士大夫(사대부)뿐 아니라 배우지 못하고 천한 사람들도 잘 알고 있으니 반드시 남다른 점이 있는 것이다』
  
   국가와 장수가 삼국통일이란 목표를 두고 서로 믿고 한 덩어리가 되어 일했다는 표현이다. 국가(이 경우 왕이겠지만)와 신하 사이에 틈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신라와 통일주도층에 대한 최대의 찬사이다. 이는 국가와 공직자, 국가와 군대 사이의 이상적 관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金庾信은 兵權을 잡고 선덕여왕,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네 왕을 모셨지만 반역을 꾀하지 않았고, 왕들의 의심도 사지 않았다. 역대 왕들은 金庾信의 욕심이 정권이 아니라 통일에 있음을 알고 그를 믿어 그가 하자는 대로 밀어 주었던 것이다. 그런 일은 金庾信의 인격에 대한 신뢰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런 金庾信에 대한 기억은 고려를 지나 文臣들이 정권을 잡는 朝鮮朝에 들어가면 잊혀지고 만다. 朝鮮王朝實錄 CD를 검색해 보면 金庾信에 대한 언급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군사문화나 무사도가 사라진 세상에서 金庾信의 위대성을 알아줄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金庾信에 대한 기억은 국군이 세계적 强軍으로 성장한 지금도 희미하다. 기자는 군대나 예비역 장성들 앞에서 강연할 때 金庾信에 대해서 자주 언급한다. 강연에 대한 호평도 있었지만 비판적인 이야기도 많았다. 충격적인 것은, 金庾信이 외세인 唐과 손잡고 사대주의적인 통일을 한 민족반역자쯤으로 알고 있는 군인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육사의 별명이 화랑대인데 그곳에서 공부한 사람이 대표 화랑 金庾信의 가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육사의 역사 교육이 한참 잘못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삼국통일을 할 때 三國의 주민들은 비슷한 종족이었지만 민족은 아니었다. 민족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존재가 아니고 같은 언어, 풍습, 종교, 제도, 국토를 오랫동안 공유한 결과의 자연스런 産物이다. 따라서 신라의 입장에서는 唐도 백제, 고구려와 똑같은 외국이었다. 민족의 출현 이전에 있었던 일을 민족주의라는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세종대왕에게 왜 영어를 가르치지 않았느냐고 불평하는 꼴이다.
  
  
   지금은 좀 덜해졌지만 한때 군사문화라고 하면 萬惡의 근원인 것처럼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날 한국인은 군대 때문에 우리가 중국인이나 북한인으로 흡수되지 않고 한국인으로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여야 한다.
  
   삼국통일기에 신라가 唐의 식민지가 되지 않은 것은 金庾信으로 대표되는 자주국방의 의지 덕분이었다. 唐은 신라와 손잡고 백제, 고구려를 친 뒤 신라마저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다. 이때 金庾信 등 지도부가 對唐결전을 결단했기 때문에 민족통일국가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승부는 군인이 아니면 할 수 없다. 선비는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자』는 말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원래 唐은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여세를 몰아 신라를 치려고 했다. 태종무열왕이 이를 알아차리고 신하들을 불러 대책을 의논했다. 多美公(다미공)이란 사람이 나와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 백성을 백제 사람으로 위장하여 도둑질을 하려는 것처럼 하면 唐의 사람들이 반드시 공격할 것입니다. 그때 더불어 싸우면 뜻을 얻을 수 있습니다』
  
   金庾信이 『그 말도 취할 만하니 따르십시오』라고 했다. 태종무열왕은 내키지 않았다.
  
   『唐나라 군사가 우리의 적을 멸해 주었는데 도리어 함께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소』
  
   이에 金庾信이 말했다.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자신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金庾信이 한 말은 삼국사기에 「自救」로 표현되어 있다. 신라가 개노릇을 하여 唐을 섬길 용의는 있다. 唐이 신라를 존중해 주면 말이다(이것이 자주적 사대주의의 정신이다). 만약 唐이 크고 힘센 것만 믿고 신라의 자존심과 그 존재 자체를 말살하려 한다면 신라는 唐을 물어뜯어서라도 自救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야말로 新羅와 같은 小國이 大國을 옆에 두고도 自我를 지켜갈 수 있게 한 정신무장의 핵심 논리이다.
  
   신라가 臨戰태세를 갖추자 蘇定方(소정방)의 唐軍은 백제 포로들만 데리고 귀환했다. 당시는 唐의 전성기 고종시대였다. 고종은 『어찌하여 신라마저 치지 않았는가』라고 물었다. 소정방의 대답은 그대로 신라에 대한 세계 최강국의 최고 찬사이다.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 아랫사람은 윗사람 모시기를 父兄 섬기듯 하니 비록 작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新羅其君仁而愛民 其臣忠以事國 下之人事其上如父兄 雖小不可謨也)
  
   仁愛忠事. 즉 어짐, 사랑, 충성, 섬김, 이것이 신라의 공민 윤리였다는 것이다. 이런 공덕심은 21세기 대한민국에도 加減(가감) 없이 쓸모 있는 국가와 국민의 윤리이다. 국가와 지도층은 국민들을 어짐과 사랑으로 대하고, 국민은 국가에 충성하며 지도층을 섬긴다. 이것은 국민국가의 이상적인 「국가-국민」 관계이다. 화랑도의 武士道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국가윤리는 근대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근대성의 핵심은 자존심과 실용성이다. 金庾信의 말에서 잘 묻어 나온다. 우리는 아무리 개처럼 작은 나라이지만 주인이 그 존재를 무시하면 사생결단하여 싸워서 지킬 만한 그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이야말로 아무리 힘센 것과도 맞바꿀 수 없는 나만의, 우리만의 自我인 것이다. 신라 지도층의 위대성은 이런 집단적 自我를 발견하고 이를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고 지켜내는 과정에서 민족적 自我로 확대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여기서 종족을 민족으로 만든 동족의식이 생겨났던 것이다.
  
   신라는 자주성을 지켜내는 방식에서 국력을 초과하는 무리를 하지 않았다. 金正日처럼 유아독존으로 모험을 하다가 必亡의 길을 걷는 바보짓을 하지 않았다. 신라는 唐의 힘을 빌리고 그 唐의 패권을 인정하고 唐에게 감사하려고 했다. 唐에게 무모한 도전을 하지 않았다. 唐과 결전할 때도 외교적으로는 항상 유화책을 썼다. 자존심을 뱃속에 숨겨 놓고 펼친 强穩 양면의 실용노선이 신라의 독립을 성취했다.
  
  
   자주국방이란 말을 신라 이후 처음으로 되살려낸 朴正熙의 어록은 金庾信과 같은 맥락이다.
  
   <자주국방이란 것은 이렇게 비유해서 얘기를 하고 싶다. 가령 자기 집에 불이 났다. 이랬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우선 그 집 식구들이 일차적으로 전부 총동원해서 불을 꺼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는 동안에 이웃 사람들이 쫓아와서 도와주고 물도 퍼다가 주고, 소방대가 쫓아와서 지원을 해 준다. 그런데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그 집 식구들이 끌 생각은 안 하고 이웃 사람들이 도와주는 것을 기다리고 앉았다면, 소방대가 와서 기분이 나빠서 불을 안 꺼줄 것이다. 왜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멍청해 가지고 앉아 있느냐? 자기 집에 난 불은 일차적으로 그 집 식구들을 총동원해 가지고 있는 힘을 다해서 꺼야 한다> (1972년 1월11일 기자회견에서)
  
  
   朴正熙와 金庾信의 자주국방, 그 핵심 철학은 민족과 국가의 자존심을 실용적인 방법으로 지킨다는 것이다. 반면, 金大中과 盧武鉉 두 대통령이 金正日에게 보여 준 태도는 자존심이 없고, 두 사람이 미국에 대하여 보여 준 자세는 실용성이 없다.
  
   인류 역사상 이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가 외국 군대의 주둔에 힘입어 경제규모가 수십분의 1도 안 되는 金正日 집단을 상대로 쩔쩔 맨 사례가 있을까. 국민들은 이 사태를 창피하게 생각하는가, 당연시하는가. 여기에 대한 집단적 응답이 바로 핵위기의 극복與否(여부)를 가를 것이다. ●
  
[ 2006-10-17, 17:0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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