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몰학도 충혼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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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토론방에서 퍼온 것이다.
  
  
  ● 위 치 : 경북 포항시 용산동 (산 103번지 및 포항여자고등학교 정문앞)
  ● 내 용
   이 전몰학도 충혼탑은 1950년 한국전쟁당시 동해안 지역으로 공격해오는 북괴군 12사단의 공격을 방어하던 3사단이 북괴군의 집중적인 공격으로 포항이 실함되는 위기의 순간에 포항여자 중학교(현,고등학교)에 위치한 국군 3사단의 후방지휘소를 경계하던 학도병 중대가 후방으로 침투하여 공격해오는 북괴군 766유격부대와 학도병 최초로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결전을 치루고 이를 저지 하므로서 국군 3사단 및 해군, 공군의 일부지원부대가 무사히 후방으로 철수하여 전투지원 임무를 계속 수행할 수 있도록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였다. 전투에 참가한 학도병 71명중 전사한 47명의 군번없는 학도병을 추모하기위하여 격전의 현장인 이곳 포항여자고등학교의 정문앞과 용산동에 1977년 12월 건립하였다.
  
  ● 학도병 이야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생하자 6월 26일 10시를 기하여 문교부는 서울 이북 지역의 초등학교 임시휴교령과 중등학교 이상에 대해서는 학교장의 재량에 의한 휴교지시가 내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정에 모인 학생들은 나라의 위급을 좌시할 수 없어 임시 학도위문대를 자의에 의해 결성하면서 의용종군이 시작되었다. 서울을 북괴군에 빼앗긴 후 시흥의 한강선전투에서 학도병은 처음으로 총과 실탄을 지급받고 교복과 교모를 쓴 채 자진 투입되었다. 한강방어선이 무너지자 수원에서 처음으로 조직을 갖춘 비상학도대가 결성되어, 500여 명이 후방지역 선무활동부터 시작하였다. 이후 대전에서 700여 명이 의용학도대를 조직하여 그 중 상당수가 국군으로 입대하였다. 전선의 변동에 따라 대구로 이동하게 된 학도출신자들은 대한학도의용대로 개편되고, 이와는 별개로 부산에서도 대한학도의용대가 조직되어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외에도 지역별로 자진하여 구성된 학도의용대가 지역내 국군부대로 지원하여 당시 국군의 모든 사단에 학도병이 없는 부대가 없었고 군번도 없이 전투에 참가 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대한학도의용대를 통해 실전에 참가한 대원수는 2만 7700명에 이르고, 20만의 대원이 후방선무공작 등의 보국에 공헌하였다. 그들은 군번이나 계급도 없이 백의종군하여 나라를 구하고자 하였다. 특히 7월 중순에는 부산에서 700여 명의 학도의용대가 유엔군으로 편입되어 일본에서 특수훈련을 받고, 일부는 공수대원으로, 일부는 인천상륙작전에 정규부대원으로 참전하기도 하였다. 9월 28일 서울수복 후에는 전국호국학도병추진위원회 연합총본부를 편성하여 후방치안유지, 유격대원 양성, 선무활동 등을 담당하여 공로를 세웠고, 조국이 적의 남침으로 위기에 처하자 안일하게 방관만 할 수 없었던 재일학도들도 자진 참전할 것을 결의하여 일본 각지에서 700여 명이 유엔군을 통해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하기도 하였다.
  
  ● 전몰학도 충혼탑 비문(용산동)
   동해의 물결이 굽이쳐 반만년 푸르니 거기 파도처럼 청청한 혹국의 넋들이 출렁된다. 쉰여덟 그분 그 이름은 학도 의용군이니 삼천리 기슭마다 보람인 이 겨레를 지키고 1950년 겨레의 반역도들이 이 땅을 피로 물들여 날뛸 때 책을 놓고 총을 잡아 그들과 맞서 싸웠다. 의로운 기백이 그대로 육탄일뿐 철모도 없었고 군번도 모른다. 그해 8월 11일 포항전투에서 마지막 뜨거운 피는 방울방울 아침 햇살에 이글거려 이 나라의 앞날을 비추었다. 사랑스러운 열일곱 내 겨레의 아들들이여 그대들은 영광스런 배달의 꽃이요 참다운 화랑이니 동해물결과 함께 길이길이 이 땅에 푸르리라.
  
  ● 전쟁 이야기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가랑비가 소리없이 내리고 짙은 안개가 산골을 메운 아름다운 산하가 허리가 부러지는 폭음과 함께 새벽의 고요를 깨고 동족상잔의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육군본부 상황실에는 밤새 적의 공격을 예고하는 징후가 고조되더니 01:00 옹진반도의 보병제 17연대로부터 인민군의 남하 상황보고를 시작으로 북괴의 전전선에 걸친 남침상황이 쇄도하기 시작하였고 이시간 국군의 주요지휘관 및 참모는 육군회관 장교구락부 준공기념 파티에서 02:00까지 술을 마시고 있었으며 이들이 채 귀가하기도 전에 북괴의 남침소식이 주요지휘관 및 참모들에게 전달되고 있었으며 06:00에 가서야 전군에 비상을 발령하고 07:00에 KBS라디오 방송으로 북괴의 전면 남침공격을 전국민에게 알렸다. 북괴는 치밀한 계획하에 남침을 도발, 민족사에 비극을 초래케하고서 이를 날조하여 조국해방전쟁이니 북침이니 하면서 그들의 정치적 선전의 도구로 삼고 있으나 이를 알지 못하는 (아니 않는)일부의 좌경분자들이 이에 동조하여 북침을 주장하는 현실을 보면서 참으로 암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후 북괴군은 소련의 지도와 전쟁지도 지침아래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하여 국군이 한번도 본적이 없는 최신형 소련제 T-34전차 와 장갑차, 그리고 공군전투기의 지원을 받아 가면서 전 전선에 거쳐 전면 남침하였고, 국군은 열세한 전투력으로 북괴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수류탄을 들고 전차에 뛰어올라 전차와 함께 장렬히 전사하는등 용전분투하였으나 역부족으로 전선이 돌파되고 퇴각하기에 이르렀다. 북괴군은 남침 개시후 3일만에 수도 서울을 함락시켰으며 이후 파죽지세로 남진하였다. 국군은 북괴군의 공격을 저지하면서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획득하는 전략전술인 지연전을 실시하면서 후방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이때 미국을 중심으로한 UN군이 공산군으로부터 자유를 수호 하기위하여 참전, 오산의 죽미령에서 북괴군과 첫 전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군은 북괴군의 무기체게와 전략전술등이 수준이하라고 얕보고 있었으며 첫전투에 참가한 스미스특수임무 부대는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세계최강의 군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있었으며 북괴군은 미군이 참전한 것만 보아도 공격을 중지하고 물러갈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밖으로 북괴군의 무기체계와 전략전술은 미군을 능가하는 수준이었으며 이 스미스특수임무부대는 전투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완패하여 퇴각하였으며 이후 대전전투에서는 미 제 24사단이 북괴군의 공격으로 사단이 크게 패하고 사단장이 포로가 되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으로 부대를 이동하여 낙동강이주는 천연적인 방어력을 이용하여 북괴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전투력을 복원하여 반격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게 되었다.
  
   한편 동해안에서는 북괴군 3사단의 공격을 받아 국군 3사단이 악전고투하고 있었으며 백두 대간을 타고 침투해온 북괴군 766유격부대의 활동은 사단의 방어력 발휘를 더욱 곤란하게 하였다. 그러나 국군은 영덕을 사수하고 있었으나 8월 9일 오십천 하구 일대를 방어중이던 국군 3사단 22연대가 북괴군의 기습을 받자 상황을 오판하여 오십천교를 조급하게 폭파하므로서 영덕을 포기하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북괴군 12사단이 비학산을 넘어 기계로 진출 국군 3사단의 후방을 위협하였으며 다음날 흥해 일대에 대규모의 북괴군이 출현, 국군과 유엔군이 포항방어를 위하여 대규모 병력을 증원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 북괴군 766유격부대가 국군의 후방지역으로 침투하여 후방교란 및 후방시설에 대한 공격을 가해오고 있었으며 때마침 포항여자중학교에 위치하고 있던 국군 3사단의 후방지휘소가 이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곳에는 학도병 중대 71명이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으며 학도병 최초로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며 이날 12:30 까지 북괴군의 공격을 저지하므로서 후방지휘시설을 형산강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속적인 전투지원을 하도록 임무를 완수 하였으나 학도병 47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의 공격으로 포항을 고수하고 반격작전을 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 국립묘지의 학도병 충혼비에 새겨진 비문(서울 동작동)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이 사람의 상정이다. 6.25 사변에 온천지가 붉은 깃발과 괴뢰의 발길로 더러워질 때 져야할 의무도 없고 나라의 부름도 받지 아니한 20세 미만의 소년학도 49명은 대구땅에 모여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죽을 것을 맹세하고 수도 사단장 김석원장군 휘하로 들어오니 장하다 ! 이들 학도 의용병이여 ! 이때 전세는 급하고 불리했다. 작전에서는 학도병에게 포항여학교인 3사단 전면에서 적을 막으라는 큰임무를 맡겻다. 8월11일 새벽 적이 쳐들어왔다. 용감한 학도 병들은 세차례나 후퇴시키고 수십명을 사살한뒤에 최후로 돌격전을 취하여 49명 이 일시에 '옥' 되어 부서지니 슬프다 ! 군인도 아닌 학도 이름으로 구슬로 부서진 그네들의 의거는 전후만대에 대한민국 역사와 함께 영원히 빛나리라 ! '
  
  
  
출처 :
[ 2003-05-30, 15:2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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