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면담록
레이건의 충고: "믿으라, 그러나 확인하라". 노태우-레이건 정상회담 때 레이건은 "공산당은 항상 간접침략에 능하다"고 말했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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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26 사건에서 12·12까지
  
   한밤의 전화
  
  1979년 10월26일, 밤10시에서 11시쯤이었다. 서부전선 최전방 부대인 9사단장 숙소에서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였다.
  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서울에 나갈 때면 만나고 돌아오곤 했지만 그가 전화를 걸어오는 일은, 특히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화를 거는 일은 거의 없었으므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에게 유고(有故)가 생겼다. 범인은 차지철 경호실장인 것 같다.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지휘계통은 거의 마비상태다.”
  전(全) 사령관은 당부했다.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북의 어떤 도발도 응징할 수 있도록 부대를 잘 장악하게.”
  ‘이 무슨 날벼락인가! 불과 몇 달 전에 박 대통령의 건강한 모습을 뵈었는데…. 이 무슨 운명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세한 내용을 알 때까지는 이를 부하들에게 알리지 않기로 했다. 지휘관들에게 무기를 철저히 통제하라고만 지시했다. 밤을 꼬박 새우며 기다려도 지휘계통을 통해서는 아무런 지시도 내려오지 않았다. 나는 군단장인 황영시(黃永時) 장군에게 전(全) 사령관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보고했다. 지시는 다음날인 27일 새벽이 되어서야 내려왔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 서거(逝去), 범인은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으로 판명’이라는 내용과 함께‘비상경계 태세에 들어가라’는 지시였다.
  국무총리로 있다가 대임(大任)을 맡게 된 최규하(崔圭夏) 대통령 권한대행은 이날 새벽 국방부에서 비상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북한의 도발에 대비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가장 시급한 임무였다. 지휘관과 참모들을 소집했다. 상황을 설명하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말이 나오질 않았다.
  나는“우리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김일성(金日成)은 좋아할 게 틀림없다. 북의 도발이 있을지 모른다. 어떤 도발도 이겨내 우리 국민과 국토를 지켜야 한다. 전 장병은 일사불란하게 응전(應戰)태세에 임하라”고 강조했다.
  평소 즐겨 다니던 통일로에 나와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다. 길가에 빼곡히 들어선 새마을 개량 주택들이 전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얼굴로 보였다.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어 눈을 감았다. 운전병에게 방향을 바꾸라고 했다.
  내 평생 이때만큼 눈물을 많이 흘린 적은 없었다. 건강을 위해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정신분열증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머리가 아팠다. 그럭저럭 마음을 추스르는 데 1주일이 걸렸다.
  
  정승화(鄭昇和) 총장의 이상한 태도
  
  며칠 후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계엄사령관)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박 대통령 빈소에 문상(問喪)을 하고 총장실에도 다녀가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정(鄭) 총장의 배려를 고맙게 생각했다.
  정 장군과 나 사이에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방첩부대에서 부대장으로 모신 일이 있는 데다가 그 분은 내 은인이기도 했다.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을 때 나는 북극성회(4년제 육사 졸업생들의 총동창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우리 젊은 장교들은 혁명정부가 저지른 이른바‘4대 의혹사건’등에 불만이 많았다. 이 때문에 한때는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이 우리를‘反혁명’세력으로 몰아 처벌할 계획까지 세우고 동기생인 4년제 정규 육사1기생** 4년제 정규 陸士 1기생 = 나중에 4년제 이전 陸士 졸업생까지 포함해 陸士 졸업기가 조정돼 陸士 11기생으로 분류됐음.일부를 연행해 조사하기도 했다.
  그때 우리의 순수한 동기를 잘 아는 정(鄭) 장군이 박정희(朴正熙) 최고회의 의장에게 진상을 보고해 처벌을 면하게 해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분이었다.
  나는 곧 바로 청와대에 가서 문상을 했다. 그곳에서 유혁인(柳赫仁) 정무수석을 만나 함께 통곡(痛哭)을 했다. 박 대통령의 생전 모습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문상을 마친 나는 육본에 들어갔다. 정 총장은 계엄사령관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어서인지 무척 긴장된 모습이었다. 그는 전방(前方) 상황에 대해 물었다. 나는 철저한 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보고했다.
  정 총장은 자신이‘대통령 시해 사건‘ 현장 가까이 있었다는 점을 예민하게 의식하는 듯했다. 자진해서 합수부(合搜部) 수사관을 불러 조사를 받았다고 말했다.
  나는 정 총장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육군의 최고책임자가 국가원수이자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시해당하는 현장에 있었다면 자진해서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는 의사 표시를 해야 하는 것이 도리 아닌가.
  하지만 내가 기대했던 그런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정 총장은 모든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려는 태도였다. 총장실을 나오면서‘내가 아는 정 총장은 결코 저런 분이 아닌데…’하고 의아해하며 부대로 돌아왔다.
  
  민주투사가 되어가는 김재규
  
  권력의 핵심이 갑작스레 사라지는 것은 대기 속에 진공이 생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진공이 생기면 그것을 메우려는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무서운 태풍이 몰아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라가 혼란스럽고 불안해지면 국민들은 군(軍)을 바라보게 된다. 군이 일사불란하게 단결해 어떤 위협에도 대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일 때 국민들은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때보다도 군 내부의 단결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걱정스런 이야기들이 떠돌기 시작했다.
  군인들의 상식으로는 김재규(金載圭)야말로‘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한 것' 이상의 패륜아였다. 정보부장에 의한 대통령 살해, 그것은 박정희 정권이 어떤 형태, 어떤 성격으로 규정되든 간에 있어서는 안 될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범죄였다.
  김재규는 동료들보다 능력이나 인품이 떨어지는 데도 박 대통령의 고향 후배이자 육사 동기라는 친분으로 늘 과분하게 은혜를 받아온 인물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를 육군 보안사령관 등 요직에 앉히고 중앙정보부장까지 맡겼다. 부모에 못지않을 정도의 큰 은혜를 박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박 대통령이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을 편애(偏愛)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탈을 쓰고는 그런 짓을 할 순 없는 것이다. 그런 김재규에 대한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면서 사회에선 이상기류(異常氣流)가 흐르기 시작했다. 천하의 패륜아 김재규를 민주투사로 미화하려는 이들이 나타났다. 11월 10일 특별담화를 통해서 최규하 권한대행은 유신헌법 개정 방침을 밝혔고 정부는 국민 화합 차원에서 시국사건 복역자들을 대거 풀어주었다. 정부측의 이런 호의에 재야 세력은 불법집회로 대답했다. 11월 24일엔 소위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이 일어났다. 재야 인사들이 결혼식을 위장하여 불법 집회를 열고 최규하 대통령의 특별담화에 반대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봉기를 선동했다. 국상(國喪)을 당하고 비상계엄령이 펴진 가운데 이런 도전이 일어났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 노선과 자주국방 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왔던 국군 장교단 안에선 이런 사회 분위기를 걱정하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에게도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 정 총장이 김재규의 식사 초대를 받아 사건현장 바로 옆 건물에 가 있는 상태에서 대통령 시해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김재규의 부하들은 그로부터 정 총장이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심리적 불안감을 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육군총장이 와 있다는 사실을 군이 대통령 시해에 가담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10.26 사건을 위기로 본 사람과 好機로 본 사람
  
  
   정(鄭) 총장이 범행 기도를 전혀 모르고 현장에 갔다 하더라도 우리의 윤리기준으로 보아 책임을 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적어도 김재규에 의해 이용당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닌가?
  군의 혼란을 우려해 처신을 하기가 어려웠다면 사태를 수습한 후에라도 당연히 거취를 결정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정(鄭) 총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치권에서도 대통령의 서거(逝去)에 대해 슬퍼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여당이었던 공화당과 유정회 사람들도 박정희 시대를 지나간 역사로 흘려보내고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민주주의란 그 과정과 절차가 중요하다. 이런 과정을 생략하고 선거만 한다고 민주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 국군 장교단은 10.26 사건을 국가의 위기로 보았는데 정치인들은 민주화의 호기(好機)로만 보는 듯했다. 이런 시국 인식의 차이를 좁히고 국민을 화합시키면서 민주화의 길을 열 만한 국가 지도층이 그때 존재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정승화 총장은 전군(全軍)을 순회하면서 군의 단결을 호소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핵심이 빠져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위험스러운 점마저 없지 않았다. 김재규를 빨리 수사해 엄단하겠다는 의지가 결여된 것은 물론이고 사건에 대한 견해 또한 명백하지도 투명하지도 않았다. 사회 혼란에 대해서도 별로 염려하지 않는 듯했다.
   11월24일 육군본부 회의실에선 사단장 이상의 육군 지휘관 회의가 열렸다. 회의가 끝나고 토의시간에 한 지휘관이 다음과 같이 물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장병들에게 유신헌법의 당위성을 교육해 왔습니다. 이제 그 헌법이 적절하지 못하여 고쳐야 한다고 정부가 발표하니 이제는 유신이 잘못되었다고 해야 하는지 혼란스럽습니다.'
   정 총장은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억된다.
   '유신헌법은 제정 당시에는 타당성이 있었으나 점차 문제점이 노출되어가던 중 박 대통령의 서거로 존립근거가 없어졌소. 헌법의 문제점을 바로 잡는 방향으로 국민의 뜻을 모아 개헌하겠다는 것이니 논리의 모순이 없다고 생각하오.'
   11월26일 정승화 총장은 언론사 사장들을 오찬에 초청하여 시국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김대중(金大中)씨는 사상이 불투명하므로 대통령이 되어선 안될 인물이라고 밝혔다. 이 발언은 보도되진 않았으나 정 총장이 정치에 개입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권력의 진공상태에서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노재현(盧載鉉) 국방장관과 함께 새로운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최규하 권한대행을 차기 대통령으로 옹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공화당에선 김종필(金鍾泌) 총재를 후보로 내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정(鄭) 총장은 공화당측에 반대의 뜻을 전했다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혔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2월6일 서울시 장충체육관에서 최규하 권한대행을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정부는 12월8일 유신체제를 유지해왔던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고 정치범들을 많이 풀어주었다.
   이날 대통령 시해 사건 재판에서 김재규는 미묘한 답변을 했다. 그는 '정승화 총장이 계엄을 선포하도록 유도해 3군을 장악한 다음, 계엄사령부를 혁명위원회로 바꿀 계획이었다'고 진술했다. 검찰관이 '만약 정 총장이 불응했더라면?'이라고 묻자 김재규는 '불응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때 상황은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고 답했다.
  
  
   전두환 장군의 설명
  
   12월7일, 나는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를 걱정하며 정기 외박을 나왔다.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실시한 선거에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바로 다음날이었다.
   나는 합동수사본부를 찾아가 전두환(全斗煥) 본부장을 만났다. 수사 진행 상황과 군 안팎의 여론 및 동향을 비교적 정확하게 들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보안사령관을 겸하고 있던 전(全) 본부장은 여러 가지 궁금한 사항에 대해 설명했는데 내가 걱정하던 그대로였다.
  “시해사건 수사 마무리가 되지 않고 있네. 정 총장의 처신 때문일세. 정 총장은 사회 혼란을 안정시키는 데는 별로 생각이 없는 것 같네. 정 총장은 혼란을 미리 수습할 필요가 없고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다는 국민여론이 들끓는 극한 상황이 오면 그때 진압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네.'
   전(全) 본부장은, 정(鄭) 총장이 시해사건과 관련하여 자신도 조사를 받을 테니 수사관을 보내달라고 해서 보냈더니 진술 내용을 몇 번이나 번복하는가 하면 조사가 끝나 합수부(合搜部)로 넘어온 진술서를 다시 가져 오라고 해서 고치는 등 심리적으로 불안정해 보인다고 했다.
  전(全) 본부장은 자신의 비서실장인 허화평(許和平) 대령을 불러 그간의 수사 과정을 내게 브리핑하게 했다. 듣고 보니 그냥 넘길 수만은 없는 문제였다. 합동수사본부는 박 대통령 시해사건에 관련된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엄중히 조사해 국민 앞에 그 진상을 낱낱이 밝혀야 했다.
   나는 전(全) 장군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전 장군은“조사를 다시 해야 하는데 정 총장이 합수부를 지휘하는 직속상관이어서 절차와 방법에 어려움이 많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 자신 정 총장과 가까운 사이였지만 정 총장이 다시 조사를 받아야 할 상황임은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정 총장과 친분이 두터운 황영시(黃永時·당시 제1군단장·중장), 차규헌(車圭憲·수도군단장·중장), 유학성(兪學聖·국방부 군수차관보·중장) 장군 같은 분들을 모셔다 수사진행 상황을 설명하고 수사상의 애로점과 우리들의 생각을 솔직히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전(全) 장군에게 말했다.
  “정 총장이 사전에 내용을 몰랐다 하더라도 김재규의 초대를 받아 사건현장 가까이 있던 중에 일어난 사건인 만큼 도의적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조사를 받기에 앞서 참모총장(계엄사령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우리가 존경해온 정 총장이 취해야 할 자세라고 본다. 정 총장이 능히 그럴 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진심을 말씀드리면 받아들이지 않겠나'
   나는 또“군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다면 합참의장으로 올라가시게 하는 것도 어려움을 푸는 실마리가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도 했다.
   전 장군은 내 말에 공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12월12일 그분들을 모셔다 그렇게 일이 풀리도록 협조를 구하자'고 했다. 우리는 12월12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황영시 장군은 내 직속상관이므로 내가 찾아가 취지를 설명하고, 유학성 장군과 차규헌 장군은 전(全) 장군이 연락을 취하기로 했다. 부대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군단에 들러 황(黃) 장군을 뵙고는 전 장군과 얘기한 대로 우리의 취지를 말씀드리고 협조를 구했다. 황 장군도 사태의 심각성을 염려하고 있었던 듯 내 말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하며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처음 들은 '연행'이란 말
  
   12월12일 오후 나는 군단에 들러 황(黃) 장군을 모시고 보안사로 향했다. 보안사 정문 앞에 이르렀을 때 안내장교가“30경비단장실로 가시면 된다'면서 안내를 해주었다.
   나는‘모이는 장소가 변경되었구나'하고 생각하면서 30경비단장실로 들어갔다. 안에는 유학성 차규헌 장군 외에 예상치 않았던 백운택(白雲澤) 71방위사단장(준장), 박준병(朴俊炳) 20사단장(소장), 박희도(朴熙道) 1공수여단장(준장), 최세창(崔世昌) 3공수여단장(준장), 장기오(張基梧) 5공수여단장(준장) 등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조홍(趙洪) 수경사 헌병단장(대령)과 김진영(金振永) 수경사 33경비단장(대령)이 들어왔다. 이들은 장군 진급을 앞두고 있었다.
   왜 이렇게 많이 모였는지 이유를 물으니 정 총장을‘연행'하는 과정에서 반대하는 세력이나 불만을 가진 수도권 지역 장성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나와 황영시·유학성·차규헌 장군은 정 총장을 설득하고 다른 사람들은 상황에 맞춰 다른 세력을 설득해 사태가 원만히 해결되도록 보안사에서 사전에 협조 요청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全) 본부장은 보이지 않았는데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 총장 연행을 위한 재가(裁可)를 받기 위해 총리 공관에 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연행'이라는 표현을 그곳에서 처음 들었다. 그 전부터 나는 '모셔온다'는 생각이었기에 속으로는 기분이 상했지만 합동수사본부의 입장에서는 그런 용어를 사용할 수도 있겠다 싶어 그냥 이해하기로 했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장세동(張世東) 30경비단장의 보고에 따르면 총장 공관에서 충돌이 생겨 사상자가 발생하고 정 총장은 서빙고(西氷庫)로 연행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 본부장은 정 총장 연행에 대한 대통령의 재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국방장관이 동의해야만 재가를 하겠다는 것이 최(崔) 대통령의 완고한 뜻이라는 것이었다.
   정작 노재현(盧載鉉) 국방장관은 행방불명이라는 보고였다. 사태가 이렇게 확대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앉아서 사태 추이를 지켜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저녁 8시가 조금 지나서였던 것 같다. 장태완(張泰玩) 수도경비사령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총장을 즉각 원대복귀시켜라. 30경비단에 모여 있는 장성 놈들은 모두 반란군이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유학성 장군과 장태완 장군이 통화하는 내용을 옆에서 들어보니 유(兪) 장군의 설득에 대해 장(張) 장군은 이성을 잃은 듯했다.
   나는 큰 낭패라고 생각했다. 그러나‘무슨 일이 있더라도 군의 충돌만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선배 장군들에게 이에 역점을 두어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서리였던 이희성(李熺性) 장군은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李) 장군은 유학성 장군, 장세동 단장 등과 전화로 통화하면서 군의 충돌만은 피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정 총장이 연행된 후 윤성민(尹誠敏) 참모차장을 비롯한 육본 지휘부는 수도경비사령부로 옮겨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군의 지휘계통이 장태완 장군의 이성을 잃은 행위를 제어하지 못하여 혼돈 상태에 빠진 것을 알게 되었다. 장(張) 장군은 전차부대를 동원해 30경비단을 포위하라고 명령했다. 서울의 주요 길목을 장악하고 병력 이동을 통제하게 하고 심지어 포병까지 동원해 105㎜ 포를 경복궁으로 향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그 포를 발사하면 경복궁뿐만 아니라 청와대, 총리 공관 모두가 낙탄(落彈)지역에 들어가게 된다.
  
   부대출동 명령
  
  
   우리측 병력은 30경비단밖에 없었다. 장 장군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충돌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때 9공수여단이 육본측의 명령에 따라 서울로 출동한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나는 윤흥기(尹興基) 여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출동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윤 여단장은 출동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언질은 하지 않았지만 내 말은 이해하는 것 같았다. 장(張) 장군의 부하들에 대한 공격 독촉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만 갔다. 그 시점에 이르러 나도 각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저들이 30경비단을 점령해 단장실로 쳐들어온다면 일전(一戰)이 불가피하다. 그럴 경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과 싸워야 하는가?
   나는 '아니다. 결코 우리 병사들과 총을 맞겨누고 싸울 수는 없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권총에 장전되어 있는 탄알을 확인하고 '그들과 부딪치기 직전에 스스로 자결하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곧바로‘이것은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라는 큰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 장군이 공격 명령을 내리고 전차를 30경비단 내에 진입시켜 그곳에 모여 있는 장성들을 사살하라고 독촉하는 데도 어느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병사들이 상관 명령에 불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과연 이것이 정당한 명령인가?'를 머릿속에서 되뇌며 망설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우리는‘기회는 이때다. 대세로 밀어붙여 장 장군의 기세를 꺾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우리측에서도 이제는 병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들이었다. 우리는 우선 공수부대를 지휘하는 부대장(1, 3, 5 여단장)들을 모두 자기 부대로 복귀시켰다. 나는 군단장인 황영시 장군의 승인을 얻어 9사단의 예비연대를 출동시키기로 결심했다. 황 장군은 군단 직할의 전차여단 1개 대대도 함께 출동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자정 무렵 나는 구창회(具昌會) 사단 참모장에게 전화를 걸어“29연대를 출동시켜 중앙청에 집결시키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어 보안사에도 연락해 '병력이 검문소를 통과할 때 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만반의 조치를 해달라'고 당부했다.
  그 직전에 1·3·5 공수부대가 출동했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군단 직할 전차대대도 출동하게 되어 있으므로 도중에 9사단 29연대와 합류해 중앙청까지 함께 진입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어느 곳에서도 충돌이 없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자정을 넘어 공수부대가 국방부에 진입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런데 진입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나 약간의 사상자가 생기고 3공수도 정병주(鄭柄宙) 특전사령관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충돌을 빚어 정 사령관이 부상하는 등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드디어 수경사 지휘부를 제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장태완 사령관을 체포했는데 그 과정에서 하소곤(河小坤) 작전참모부장이 부상했다고 했다.
  나는 내가 출동시킨 부대에서는 충돌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 얼마 후 내가 동원한 병력이 아무런 사고없이 무사히 중앙청에 진입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제 큰 고비를 넘기고 우려했던 유혈사태는 막은 셈이었다.
   나는 즉시 중앙청에 들러 부대가 도착했음을 확인하고 그곳에 와 있던 부관, 운전병과 함께 보안사로 향했다. 내가 군단에서 서울로 올 때는 황영시 군단장 차를 함께 탔으므로 내 차를 다시 쓰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하룻밤 사이에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돌발사태가 벌어지고 군의 지휘체계가 잠시 마비되었다. 다행히 盧載鉉 국방장관이 崔(최) 대통령을 만나 사후(事後) 승인 형식이지만 정(鄭) 총장 연행에 대한 재가를 받아냈다. 최(崔) 대통령은 후속 인사 조치를 신속하게 단행해 새로운 군 지휘체계를 갖추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재판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것이 내가 겪은 12·12사태의 전모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12·12사태는 국가원수를 시해한 김재규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 사건에 관련이 있다고 의심되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려다가 일어난 돌발사고였다. 만일 이 사건을 쿠데타로 규정한다면 쿠데타의 구성요건인‘사전계획'이 있었어야 하는데 수사계획 이외의 말을 어느 누구에게서건 들어본 적이 없다. 역사상 어느 쿠데타도 병력을 동원하는 부대장이 부대를 이탈해 지휘할 수 없는 곳에 가 있은 예는 없었다. 다시 말해 쿠데타가 성립될 수 있는 구성요건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2. 수도경비사령관
  
   1) 5·17 학생시위
  
  1980년의 국내 상황을 안이하게 보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은 것 같다. 군(軍)이 가만히 있었으면 민주주의가 저절로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안보에 관계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안이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79년 12월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돼 서울의 치안상황을 점검해 보니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민주주의만 부르짖었지 혼란을 수습해 질서를 찾게 하려고 노력하는 정치지도자는 보기 힘들었다. 그들은 거리로 뛰쳐나온 학생과 재야인사들을 선동하고 부추길 뿐 자제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 군은 누구를 믿고 나라에 충성해야 하는가?
  결론은 분명했다.‘현 체제’, 즉 최규하 대통령을 믿고 나라에 충성하는 길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유언비어들이 꼬리를 물었지만 당시로서는 최 대통령을 모시고 나라의 안보와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나는 미약하나마 최 대통령을 받들어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치안질서를 확립해 서울시민들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신성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매일 아침 수도권 치안과 시위 등에 관한 상황을 보고받아 소요(騷擾)의 성격과 위험 요소를 분석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며칠에 한번은 서울에 있는 기관장들을 소집해 회의도 가졌다. 계엄분소장으로서 그들을 소집할 권한이 있는 데다 그들의 기능을 조정·통제해야 하는 책무도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관장뿐만 아니라 언론계 간부들과 대학교수 등을 만나 여러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회의 때마다 경찰 쪽에서는 군 병력의 동원을 요청했다. 소요의 규모가 계속 커지고 있어 경찰력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경찰력으로 소요를 수습하지 못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게 되고 그렇게 되면 대외적으로 국가위신이 떨어져 외교와 경제, 특히 무역에서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므로 경찰력만으로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면서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소요 진압에 대한 철저한 훈련을 강조했다. 내가 작전을 통제할 수 있는 부대는 많았는데 그 핵심은 수경사 병력이었다.
  1980년 5월에 접어들면서 대학생들의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갔다. 비상계엄 하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공권력의 권위마저 떨어져 경찰 부상자가 하루에도 수십 명씩 발생했다. 시위는 서울뿐 아니라 지방으로까지 확산되기 시작했다.
  나는 김종환(金鍾煥) 내무장관으로부터“군 병력을 출동시켜 달라”는 요청을 여러 차례 받고 있었다. 폭동에 가까운 격렬한 시위로 인해 경찰력만으로는 도저히 서울의 치안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입장을 이해하고 안타까워하면서도‘그래도 가능하면 군을 동원하지 않고 수습해야지…’하며 군 출동을 유보하고 있었다.
  5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시위의 한계를 넘어 일부 폭동화하기 시작했다. 남대문 주변의 시위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버스를 탈취해 전경들을 향해 돌진하는 바람에 여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사건마저 일어났다.
  시위대는 어느새 수십만 명 규모로 불어나 있었다. 그들은 현 정권의 무조건 퇴진을 요구했다.
  현 정권이 퇴진하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정권이 물러나고 공권력이 무너지면 무정부 상태가 되는데 그것이 민주주의란 말인가. 김일성이 가만히 있을 리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 시점에서 이름있는 정치지도자들이 흥분된 군중심리를 가라앉히면서 질서를 외쳤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훨씬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시위대와 함께 거리로 나설 뿐이었다.
  급기야 5월17일에는 전국 대학의 학생회장들이 이화여대에 모여‘정권퇴진’운동을 전국적으로 실시하기로 했다는 정보가 사전 입수되었다. 5‧17 계엄확대조치는 바로 이 정보에 근거해 취해진 것으로 알고 있다.
  이날을 기해 비상계엄은 전국으로 확대되고 서울에서는 군이 투입되었다.
  나는 병력을 동원하기에 앞서 곰곰이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학생들의 흥분이 정점(頂點)에 올라 있는 시위현장에 군인들을 투입시키면 쌍방간에 불상사만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시위의 근원지를 진압해 무력화시키기로 했다.
  사람의 심리는 낮보다는 밤, 특히 새벽 2~3시쯤이면 가장 약해진다는 데 착안해 새벽 2시를 기해 서울의 주요 대학에 병력을 출동시켰다. 예상대로 거의 저항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주동자급을 연행하고 각종 증거물들을 압수할 수가 있었다. 근거지를 빼앗긴 학생들은 힘을 쓰지 못했다.
  서울은 이렇게 해서 아무런 불상사 없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지난 일이지만‘광주에서도 - 상황이야 다르겠지만 - 이 같은 방법을 썼더라면…’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2) 아쉬움
  
  당시 나는 모든 생각과 역량을 수도권 치안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는 눈길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때에는 대통령의 권위와 통치권이 더욱 엄정하게 행사되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최 대통령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사태 수습을 어렵게 했다.
  최 대통령이 중요한 상황에 대해 결단을 내리지 못함에 따라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선(先)배치, 후(後)보고’라는 불가피한 일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되면 계엄사의 보좌기능이 강화될 수밖에 없고, 계엄사의 기능이 강화되면 정보를 장악하고 있는 보안사의 기능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 각 조직이 주인의식과 책임의식을 갖고 상황에 대처해 나가면 되는 것인데 이것이 결여되다 보니 계엄사와 보안사의 역량이 자연히 커질 수밖에 없었다.
  요즈음에 와서 당시의 보안사가 월권을 했다느니,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느니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비겁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당시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들은 바로 자신이 해야 할 직무를 포기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놓으니까 보따리를 내놓으라며 왜 구하는 과정에서 무리를 했는가 하고 시비를 거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격이다. 비굴한 식자(識者)들을 보면 한심스러울 뿐이다.
  나는 지금도 수도 서울의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치안 유지 차원에서 5·17 비상계엄 확대 등의 조치가 이뤄진 것으로 믿고 있다.
  결과적으로 8월16일에 최 대통령이 하야(下野)하고 열 하루 뒤인 8월27일에 실시된 통일주체국민회의선거에서 전두환 장군이 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정권을 인수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 내가 아는 한 - 사전에 계획된 일은 아니었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대책을 세워 나가는 과정에서 최 대통령 스스로가 통치능력의 한계를 인식해 나라의 생존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으로 택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최 대통령이 통치권을 정상적으로만 행사했다면 시국을 안정시켜 빠른 시일 안에 국민의 뜻을 받든 민주정부를 출범시켰을 것이다.
  
   3) 5·18 광주(光州) 사태
  
  광주사태 당시 나는 수도경비사령관으로서 서울지역의 계엄분소장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광주에서 발생한 불행한 사태에 대해서는 관여할 입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군 간부 중 한사람으로서 그런 불행한 사태가 일어난 데 대해 마음이 아프고 걱정스러웠다.
  어떻게 그토록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고 확대되었을까. 나는 사건이 발생한 후에 각종 자료를 통해 나름대로 사건을 정리해 보았다.
  첫째, 광주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들 수 있다.
  광주는 그동안 크고 작은 소요가 있었어도 대부분 경찰에 의해 진압되고 군이 투입된 적은 없었다. 서울시민의 경우에는 경찰과 군의 진압을 엄격히 구분할 줄 알아 학생이건 일반인이건 전경들과 맞서다가도 일단 위수령이나 계엄령이 내려져 군이 나서면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군은 경찰과 달리 명령이 떨어지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임무를 완수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군인이 임의로 융통성을 부리는 것을 용납한다면 그 군인은 전쟁터에서 싸울 수 없을 것이다. 국민들도 그런 군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서울시민들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5월17일과 5월18일 서울지역에서 경찰력만으로 진압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에도 군이 출동하자 사태가 조용히 수습되었음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광주처럼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 곳에 군이 투입되었다. 광주시민들은 군을 경찰과 마찬가지로 생각했을 것이다. 군은 후퇴할 줄 모르므로 시민들이 물러서지 않는 한 충돌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처음부터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던 것 같다.
  둘째, 광주사태의 진범은 유언비어(流言蜚語)였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악랄한 유언비어가 광주 시내를 뒤덮었다.“경상도 군인들이 광주시민들 씨를 말리러 왔다”,“무지막지한 군인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잘라냈다”,“처녀의 젖가슴을 도려냈다”는 등 수많은 유언비어가 사실인 양 퍼져나갔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광주시민들은 치를 떨면서“저들을 보고 과연 우리 군대라고 할 수 있는가! 저들은 국민의 군대라기보다 차라리 적(敵)”이라며 적개심을 불태우고 이들 중 일부는“우리도 맞서 싸워야 한다”면서 무기고를 습격하고 군 장비를 탈취해 군과 대항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지역에 투입된 군인들은 누구인가?
  우선 광주에 주둔하고 있는 향토사단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광주 또는 전남 출신들이었다. 또 광주시민들이‘가장 난폭했다’고 지목한 공수부대원들 역시 광주 근교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들로‘연고지 우선 배치’원칙에 따라 광주‧전남 출신이 가장 많았다. 이런 병사들이 어떻게 부모형제와 다름없는 시민들에게 그토록 잔학무도(殘虐無道)한 만행(蠻行)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셋째, 사후 수습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관계자와 시민들이 검시(檢屍)를 통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사망자는 1백96명** (재)5·18기념재단의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현황’(2001년12월18일 현재)에 따르면 사망 신청 2백18명 가운데 최종 인정된 사망자는 1백54명이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군인이 소지한 M16소총에 맞아 사망한 수는 36명이고 나머지 1백60명은 칼빈총, M1소총, 차량충돌 등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 집계가 정확하다면 이들 희생자는 앞의 36명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게다가 사망자 가운데 16명은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혼란이 있을 때마다 북측이 이를 조장하기 위해 공작원을 상투적으로 침투시키곤 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잘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본다.
  나는 지금도 1백60명의 사망자들은 군인에 의해 희생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원인을 철저하게 규명한 후에 유족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함께 응분의 보상을 했어야 옳았다.
  당시의 책임자들이 앞의 세 가지 점에 대해 소홀히 하지 않고 관심을 기울였다면 그렇게 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극소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사건 발생 직후에 책임 소재를 엄격히 따져 처벌할 사람은 처벌했어야 했다.
  서울과 달리 광주에서는 시민들이 군 무기고를 약탈하고 도처에서 유혈충돌이 빚어지는 등 사태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었다.
  사태 진압의 1차적 책임은 광주지역 계엄분소장에게 있고, 그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은 계엄사령관과 국방장관, 최종적으로 대통령에게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다. 당시 보안사령관은 참모로서 조언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책임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나는 한 가지 기막힌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광주사태가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는 데도 청와대로부터 아무런 조치가 내려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라의 앞날이 몹시 걱정되었다. 주영복(周永福) 국방장관이 최 대통령에게“대통령께서 직접 광주시민이나 국민들을 상대로 담화문을 발표해 난국 수습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셔야 합니다”하고 여러 차례 진언했는 데도 최 대통령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어떤 조치나 결단을 내리지 않은 채 1주일이 경과했다는 것은 통치권자로서는 상식 밖의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일로 주 장관은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주 장관의 건의가 받아들여졌다. 주 장관과 3군 참모총장이 최 대통령을 모시고 광주 근교에 내려가 방송을 통해 설득했다. 광주시민들에게 최 대통령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어 이성을 찾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직무를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최 대통령의 소극적인 자세는 국가 장래에 대한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상임위원장 전두환)를 발족하게 된 것도 최 대통령이 책임지지 않으려는 중요 사안들에 대해 자문하고 보좌하는 기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수도경비사령관이라는 직책 때문에‘국보위’의 당연직 비상대책위원으로 임명되었지만 국정을 다루는 상임위원회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다시 말해 내 임무는 치안과 관련된 일이지 정치문제나 국가경영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5·18사태의 처리에서부터 김대중(金大中) 내란 음모사건 등이 터져 나왔다. 이어 전국적인 치안확보 문제, 자유행동을 제한하는 문제, 그리고 국가비상사태에 따른 각종 조치들이 연속적으로 취해졌다.
  여기서 이 시기에 대한 몇 가지 소견을 밝혀두고 싶다.
  첫째, 최 대통령의 권위와 결단력이 너무 약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역설적으로‘군부(軍部)가 너무 강하게 나오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최 대통령은 오랜 외교관 생활로 상당한 관록을 지닌 분이다. 내가 알기로는 외교관은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할 일이 거의 없다. 본국의 훈령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외교적 테크닉이 능숙하면 되는 것이다.
  1980년도와 같은 혼란기에는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 산적하게 마련이다. 그런 중대한 시기에 최 대통령이 국정의 책임을 맡았다는 것은 그분이나 국가를 위해서 불행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일 신현확(申鉉碻) 당시 국무총리 같은 분이 대통령으로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군부가 절대 나서지도 않고 나설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분은 최 대통령의 단점을 보완하고도 남을 만큼의 능력과 결단력을 갖춘 인물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불행하게도 당시 정가에서는 신현확씨가 군부와 손잡고 정권을 노린다는 루머가 나돌았다. 그리고 그 소문은 그에 대한 실질적인 견제 역할을 했다. 나는 신씨 자신은 그런 소문과 상관없이 정권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었다고 생각한다.
  둘째, 최 대통령이 헌법 개정을 비롯한 정치 스케줄을 너무 길게 잡지 않았나 싶다.
  최 대통령 자신이 국정을 이끌어갈 자신과 소신이 있었다면 일정을 여유있게 잡아 그 사이에 나라의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과 질서를 다진 후에 정권을 넘겨주어도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자신이 없었음에도 정치 일정을 길게 잡는 바람에 혼란만 가중시키는 꼴이 되고 말았다.
  셋째, 정치지도자라는 분들이 제각기 민주화만을 부르짖으며 거리로 나섰다. 그들은 학생과 재야인사들이 공권력에 맞서고 질서를 어지럽히고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는 데도 이들 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들의 행동을 오히려 부추겼다. 북한의 위협을 경고하면서 먼저 혼란을 막고 안정을 꾀한 후에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지도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만일 그때 그런 지도자가 있었다면 나는 국가의 운명을 그분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4) 전두환 장군의 결심
  
  1980년 8월 초순으로 기억된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긴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시간이 괜찮다면 저녁에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장소는 전 장군 자신의 집이 좋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 나는 전 장군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매우 긴장한 모습이었는데‘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구나’하고 직감할 수 있었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오후에 최 대통령이 불러서 가 뵈었는데…. 자신이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 어려운 정국을 이끌기에는 역부족이어서 고민 끝에 물러나기로 했다는 거야. 그러면서 이 난국을 타개할 사람은 전 장군밖에 없으니 국정을 맡아달라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네.”
  너무나 뜻밖의 이야기여서 한참을 전 장군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잠시 후“맡기로 승낙했는가?”하고 물었더니“아닐세.‘그럴 능력도, 생각도 없습니다. 열심히 보필할 테니 그런 생각 거두십시오’하고 강하게 사절했네. 그런데도 최 대통령께서는‘나도 신중히 생각하고 또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었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소. 나라를 구할 방법은 (전 장군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결론을 얻었소. 그렇게 알고 준비를 해주시오’하고 거듭 당부하셨네. 그래서‘각하! 재고해 주십시오’하고 나와서는 곧바로 자네에게 전화한 걸세.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나?”하고 말했다.
  순간 나는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 머리가 멍했다.
  역사라는 크나큰 실체가 눈앞에 다가오면서 두려움마저 일었다.
  나는 생각을 가다듬어“‘뜻을 거둬 주십시오’하고 사절한 것은 잘한 일일세. 그런데 내 예감으로는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네. 조용히 날을 잡아 군 원로들의 의견을 물어 결정하는 것이 좋을 듯 싶네”하고 말했다.
  그는 내 의견을 따랐다. 며칠 후 저녁 무렵에 공군참모총장 공관에서 국방장관과 각 군 참모총장, 주요 사령관 등이 모였다.
  주영복 국방장관이 먼저 본제(本題)를 꺼내 여러 원로 장성들의 의견을 물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의견들이 쏟아져 나왔다.
  국가 위기를 극복하고 난국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전 장군이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어 참석자 모두는 전 장군을 국가지도자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전 장군은 울음을 터뜨렸다.“이 어려운 운명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면서“능력이 부족하고 두렵다”는 이야기를 거듭했다. 함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 모두는 생명을 바쳐 나라를 구하는 일에 전력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드디어 전 장군은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듯했다.
  나는 그가 보여주는 결연한 모습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나 자신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해 보았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올 때까지 굴러온 것이 아닌가. 이를 피하는 것은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다른 어떤 대안도 있을 수 없다. 만약 책임을 회피한다면 북쪽과 내통하는 좌익(左翼)이 정권을 잡게 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다. 그래서는 안된다. 절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얼마 후 최 대통령의 하야(下野) 성명이 나오고 정권을 인수하는 절차가 이루어졌다.
  
   5) 3김(金)
  
  나는 계엄분소장으로서 유관기관장뿐만 아니라 언론계 간부와 교수·학자들을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았다. 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 가운데 당시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 김종필(金鍾泌)씨 = 정치적인 감각과 국가경영의 관록 등은 누구보다도 잘 갖추고 있다는 평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인 두 가지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제3공화국의 주요 국정책임자로서 유신(維新)과 장기집권에 대한 책임을 피할 길이 없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유신과는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유신을 반대했다고 변명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는 이 때문에 가장 큰 결점을 자초하고 말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제3공화국과 관련해 많은 책임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나라 발전을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잘 잘못은 국민들의 심판에 따르겠다’는 자세를 보였다면 역사는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군인의 입장에서 몹시 안타깝고 아쉽게 생각했다.
  
  ◇ 김영삼(金泳三)씨 = 장래를 내다볼 수 있는 인물로 손꼽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언론계에서 기대를 거는 편이었다.
  그러나 국가안보에 대한 신념이 부족하고 군에 대한 친근감이나 인맥이 두텁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 김대중씨 = 당시의 상황으로만 보아 군 내부의 평가는 한마디로‘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색깔과 이상(理想)이 불분명하며 통일정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주장들이 김일성과 맥(脈)을 같이 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언론계, 학계에서의 의견도 비슷한 편이었다. 국가에 어떤 불행한 사태가 일어난다면 그가 배후인물일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였다. 실제로 그에게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선동적인 것들이었다.
  
  이상이 12·12사건 이후 국내에서 전개된 일련의 상황과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이다. 내가 직접 관여한 것도 있고,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알게 된 사실도 있다.
  당시 보안사에서 내가 모르는 어떤 계획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정권을 탈취할 목적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모든 상황이 정권을 책임지지 않으면 안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나는 후에 민정당을 책임진 입장이 되었을 때 이런 일련의 사실들을 정리해 설명하고 제5공화국의 본질은“구국의 차원에서 이뤄진 결과에 의해 탄생한 정권”이라고 강조했다. 혹자는 제5공화국을 일컬어‘주인없는 정권을 주은 습득(拾得)정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나는 언제, 어디서건 정권 탈취를 목표로 한 계획적인 행동이 아니었다는 점을 증언할 것이다.
  
  
  
  
  
  
  
  
  
  
  
  
  
  
  
  재임 시절보다도 퇴임 후 시간이 지나면서 커지는 인물이 있다. 이승만, 박정희, 트루먼, 레이건 같은 인물이다. 레이건 대통령은 東西 냉전을 서방의 승리로 종결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트루먼 대통령이 승리의 기틀을 놓았고 승리의 수확을 한 사람은 레이건이다. 미국의 위대한 10대 대통령 안에 두 사람이 들어간다. 하지만 현직에 있을 때는 욕을 많이 먹었다. 트루먼은 한국전으로, 레이건은 이란 콘트라 스캔덜로 얻어맞기에 바빴다.
  
  레이건은 공산권 붕괴를 퇴임 직후에 구경했다. 그는 1989년 초에 퇴임했는데 이해 말에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의 공산정권이 무너졌다. 2년 뒤엔 소련이 해체되었다. 레이건은 말폭탄으로 공산세계를 붕괴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련은 악의 제국'이란 연설로써 소련 지도부의 기를 꺾고, '스타 워즈' 구상으로써 소련 군대를 겁에 질리게 했다.
  
  이 레이건을 상대했던 한국 대통령은 전두환, 盧泰愚 두 사람이었다. 최근 盧泰愚 전 대통령에게 레이건에 대한 인상을 물었더니 간단하게 대답했다.
  
  '큰 사람이지'
  
  레이건은 몸집이나 생각이 다 큰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여리고 순수하고 겸손했다.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선 작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특히 부인 낸시 여사를 끔찍이 사랑했다. 사랑이 지나쳐 거의 존경하는 마음이었다. 낸시 여사가 잠시 백악관을 비운 사이에 쓴 일기에는 '낸시가 떠난 백악관은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곳이다. 밥맛이 없다'는 대목이 나온다.
  
  레이건 대통령은 서울 올림픽이 안전하게 치러질 수 있도록 신경을 많이 써주었다. 소련에 부탁하여 북한이 장난을 치지 않도록 압력을 넣도록 했다. 올림픽 기간 중엔 한국 근해에 항공모함 미드웨이 戰團을 배치하여 북한정권에 대해서 '너희들이 테러를 하면 폭격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필자도 그때 미드웨이호를 방문했었다. 미드웨이호는 놀러 온 것이 아니었다. 북한 군부에 경고를 보내기 위하여 종일 작전을 하고 있었다. 평화시의 작전이란 實戰 훈련을 말한다. 80여 대의 전투기들이 떴다가 내렸다가를 반복했다.
  
  서울 올림픽 기간중 한국은 미국 선수단에 여러 가지로 섭섭하게 대했다. 한국 관중들은, 미국과 소련이 대결하면 소련 편을 들어 박수를 쳤고, 언론은 미국 선수가 場外에서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을 문제삼아 가혹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올림픽 직후 미국을 방문하여 레이건 대통령을 만나 회담한 盧泰愚 대통령은 미국 지도부에 대해 오해가 없도록 설명까지 했다.
  
  노태우-레이건 정상회담은 1988년 10월20일 백악관에서 열렸다. 오전 11:50 - 11:55 사이엔 두 사람이 레이건 집무실에서 단독 회담을 했고 그 뒤 35분간 각료들을 배석시킨 뒤 확대회담을 했으며 12시30분부터 1시간 동안 레이건 대통령의 가족 식당으로 옮겨 오찬회담을 했다. 단독회담시 배석자는 미국측에서 제임스 켈리(James Kelly) 백악관 아시아擔當 特別補佐官(記錄)과 이창호(通譯)씨, 한국측은 盧昌熹 儀典首席(通譯)과 申斗柄 外務部 美洲局長(記錄)이었다.
  
  확대회담 및 오찬에는 미국측에서 슐츠(George P. Shultz) 국무, 칼루치(Frank Carlucci) 국방, 브래디(Nicholas Brady) 재무, 링(Richard Lyng) 농무장관과 두버스타인(Kenneth M. Duberstein) 대통령 비서실장, 오글레스비(M. B. Oglesby, Jr.) 비서실 차장, 콜린 파월 (Collin Powel) 대통령 안보보좌관, 릴리(James R. Lilley) 주한미국대사, 시규어(Gaston Sigur)국무부 차관보, 아미티지(Richard Armitage) 국방부 차관보, 켈리(James Kelly) 백악관 아시아擔當 特別補佐官(記錄), 이창호(通譯)씨가 배석했다.
   한국측에선 崔侊洙 외무, 李洪九 통일부 장관, 朴東鎭 주미대사, 洪性澈 비서실장, 李賢雨 경호실장, 盧昌熹 의전通譯), 李秀正 공보수석, 金宗輝 안보보좌관, 申斗柄 外務部 美洲局長(記錄)이 참여했다.
  
  盧 대통령 : 선거 등으로 대단히 분주한 일정 가운데에서도 초청해 주시고, 격조 높은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레이건 : 본인은 각하와의 오늘과 같은 만남을 오랜 전부터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어제는 대통령선거전 지원유세를 하였습니다. 지난해 9월 대통령후보로서 방미 시 만난 후, 오늘 한국의 대통령으로서 백악관에서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대통령 : 지난 2월, 그리고 9월 각하의 訪美초청을 받고서도 국내사정상 응하지 못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최근 부시 부통령의 인기도가 상승하고 있고, 당선 전망이 높아지고 있다는 고무적인 소식을 듣고 반가우며, 부시 후보는 각하가 지난 8년간 이룩하신 여러 위업들을 계승 발전시키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레이건 : 본인도 부시 후보가 現 행정부의 정책을 보다 훌륭히 계속 추진해 나갈 것으로 확신합니다. 본인은 현재 부시 후보의 선거 지원 유세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서울올림픽 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축하드리며, 이는 한국 국민 전체의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 : 성공적 올림픽 개최에 따른 영광은 미국을 비롯한 모든 참가국과 나눠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특히 한 건의 사고 없이 최대규모의 올림픽을 무사히 안전하게 치룰 수 있었던 것은 각하의 각별한 개인적 관심과 미 행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이었습니다.
  
  레이건 : 분에 넘치는 치하의 말씀에 감사합니다. 성공적으로 서울올림픽대회를 치룬 당사자는 한국인입니다.
  
  대통령 : 각하의 업적에 힘입어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이후, 한국은 민주화를 추진함에 있어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레이건 : 한·미간의 안보협력관계 또한 계속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각하의 UN총회 연설내용은 창의적이고, 진취적이었다고 봅니다.
  
  대통령 : 한국에 대한 변함없는 안보지원과 자유무역체제 유지를 위한 각하의 굳은 의지에 감사합니다.
  
  레이건 : 이제 각료들이 대기하고 있는 회의장으로 모시겠습니다.
  
  (백악관 각료회의실)
  
  레이건 : 각하의 워싱턴 방문을 환영하며, 88 서울올림픽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다시 축하드립니다. 한·미간의 동맹관계는 전쟁으로 다져진 血盟의 관계로서, 자유체제를 수호하는 데 현재의 긴밀한 안보협력관계는 상호 유익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소한 문제에 신경 쓰기보다는 이러한 주요 공동 관심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각하의 영도 하에 현재 추진되고 있는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대통령 : 금번 초청에 감사하며, 성공적인 올림픽대회의 개최는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조에 힘입은 바 크며, 이에 따른 영광과 축하를 여러분 모두와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지난 8년간 각하의 업적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며, 한·미간의 우호관계는 각하 재임시가 최상의 관계라 생각합니다. 힘과 일관성을 바탕으로 한 각하의 외교정책은 전세계의 안정과 평화유지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INF 조약의 체결, 자유무역제도의 신장 등으로 발현되었습니다.
  
  동북아지역에서도 평화와 화해의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한국은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용기를 얻어, 종전의 對북한 접근방법을 달리하여 보다 차원 높은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금일 회담에서 한국정부가 현재 추진하고 있는 북방정책, 남·북한 관계외 한·미 우호관계의 증진에 보다 유익한 협의를 기대합니다.
  
  레이건 : 통상문제는 후에 언급키로 하고, 우선 양국간 안보협력과 관련, 조금 전에 있었던 기자회견시 주한미군에 관련된 질문이 있었는 바, 주한미군은 지난 35년간 북한으로부터의 도전을 효과적으로 억제해 왔으며, 주한미군 철수문제에 관한 논의로 북한에 대해 잘못된 신호(Wrong Signal)를 보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각하의 UN총회 연설내용 중 여러 對북한 제의를 환영하며, 북한이 이에 호의적인 반응을 해 오길 기대합니다. 한국정부의 對北조치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미 행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對북한 정책내용에 관하여 슐츠 국무장관으로 하여금 설명토록 하겠습니다.
  
  대통령 : 미측이 고려하고 있는 조치내용에 관하여 오기 전에 슐츠 장관으로부터 설명을 들은 바 있습니다.
  
  본인이 UN총회 연설에서도 밝혔듯이 정상회담 개최 제의 등, 각종 제의를 하여 북한이 더 이상 고립되지 않고,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나와서 우리와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평화 노력에 동참토록 하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북한을 모퉁이로 몰려 하였다면 이제부터는 그들을 끌어내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국이 적절한 방식으로 북한과 교류, 협력함으로써 우리 노력을 지원해 줄 것을 이 회담에서 미측에 요청할 예정이었습니다.
  
  동 문제는 양국간 긴밀한 협의 하에 추진되어 많은 성과가 있게 되길 희망합니다.
  
  슐 츠 : 영빈관에서 이미 설명드린 바 있기 때문에 반복을 피하는 의미에서 간단히 말씀드리면, 미 행정부는 북한인의 입국사증 발급규제 완화, 민간분야에서의 교류권장, 인도적인 물품교역의 허용 및 외교관 접촉 금지 지침완화를 주요 골자로 한 새로운 정책을 일관적으로 가까운 시일 내에 발표예정이며, 추가조치를 북한의 반응에 따라 강구하고자 합니다.
  
  최광수 : 슐츠 장관이 설명한 미 행정부의 새로운 정책은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하며, 동 정책은 현재 한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북방정책의 기본취지와도 부합되는 바, 미측이 동 정책을 내주 중에 발표하는 데에도 동의합니다.
  
  슐 츠 : 여사한 조치를 취하는 데 있어서 법규정의 개정 등, 의회승인 또는 對의회 협의사항을 제외한 행정부의 독자적인 조치 가능사항부터 우선적으로 시행해 나갈 예정입니다.
  
  대통령 : 본인의 뉴욕체류시 미 언론들로부터도 주한미군 감축문제, 작전권 통제문제에 관한 여러 질문들을 받은 바 있습니다.
  
  북한측이 상금 아측의 건설적 제의에 대해 호응치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소련은 북한에 신예무기를 제공하는 등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이 상존해 있는 현 상황하에서는 한반도 전쟁위협 억제와 동북아의 안정을 위해, 본인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원치 않고 있으며, 지금도 그를 논의할 시기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작전권 문제는 연례 국방장관 회담시(SCM) 한미연합 전력의 효과적 운영차원에서 검토되고 있는데, 현재로서는 그 기본적 형태를 바꿀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동 문제들은 북한의 태도, 소련의 극동군사력 추이 등 전반적 군사정세를 감안, 앞으로 양국간에 긴밀한 협의를 통해 신축성 있게 대처해 나가야 할 문제라 생각합니다.
  
  레이건 : 그러면 오찬장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진행토록 하겠습니다.
  
  (오찬장으로 이동)
  
  대통령 : 주한미군 이야기를 하다 중단되었는데... 현재 한·미 양군은 연합사 지휘하에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안심하셔도 될 것입니다.
  
  이와 관련 한 가지 문제점은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군사시설의 교외이전 문제입니다. 서울의 인구집중으로 군사시설이 시내에 위치한다는 것은 군사적 편의면에서도 문제가 있으므로 한국군 사령부와 시설들의 이전이 오래 전부터 검토되어왔고, 이와 관련 주한미군시설의 이전문제도 한·미 양 관계당사기관간에 협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시설을 일시에 옮긴다는 것은 어려우며, 쉬운 것부터 하나씩 처리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서울시내에 위치한 미군 골프장도 교외에 더욱 편리한 곳으로 옮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계속 협의하여 좋은 결과 있기를 희망합니다.
  칼루치 : 한국입장 이해하며, 협조하겠습니다. 추가 경비가 소요되지 않으면서 유사한 시설을 가질 수 있다면(similar facilities at no extra cost)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말씀하신 미군 골프장 이전도 5개년 계획을 검토하고 있는 바, 골프장내의 여러 가지 다른 군사시설의 이전 문제만 해결된다면 옮길 수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 : 올림픽을 계기로 한·미간 사소한 감정상 마찰이 있었고, 미국 언론에서도 한국내 反美감정의 확산을 우려하는 질문을 받은 바 있습니다.
  
  올림픽기간중 미국의 주관방송인 NBC의 보도와 관련 약간 잡음이 있었으나, 예컨대 권투경기장 소요 같은 것은 한·미간 국민감정 차원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큰 잔치에 많은 손님이 오게 되면 그 와중에서 친구, 형제간에도 말다툼이 있게 되는 것으로 어느 면에서는 부부간의 사랑싸움과도 같은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도 그런 점이 마음에 걸렸던지 장애자올림픽 개막식 때는 미국 선수단 입장 시 가장 큰 박수환호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는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와는 별도로 한국내 학생 등 젊은 층에 反美감정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한 反美감정의 원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북한의 선전공작에 영향을 받은 일부 좌익분자로서, 그 숫자는 적지만 반미 주의자들입니다. 둘째는 감상적이고, 이상론에 치우친 젊은층 중에서 한·미 관계의 실상을 이해 못하고, 아직도 한·미 관계가 수직관계로 우리가 미국에 예속되어 있다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홍보교육을 통하여 해소될 수 있고, 전자는 자유민주의 발전과 경제의 향상으로 좌익세력의 약화와 흡수가 가능해질 것으로 크게 염려할 사태는 아닙니다.
  
  레이건 : 본인도 그 문제를 언급하려는 참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는 직접 침략(outright attack)보다는 간접침투(subversion)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고르바초프와 회담시 그가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본인도 일부러 러시아의 속담 '신뢰하되 확인하라'(trust but verify)을 자주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간접 침략전술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 : 아주 적절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공산주의 침투와 북한의 직접, 간접 침략에 가장 큰 고통을 겪어 왔습니다. 최근에는 랑군 사건, KAL기 폭파사건 등이 있었고, 침투간첩에 의한 살인, 파괴행위도 겪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에 대하여는'신뢰하되 확인하라'는 속담이 좋은 교훈입니다.
  
  레이건 : 본인은 다 잘 아시는대로 2차대전 후 영화계에 종사하였는데, 그 당시 재향군인회와 정치행동단체들에 공산당이 침투되어 활약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공산당 전위조직들에서 손을 떼고, 지원을 중지하자 그들도 활동의 근거를 잃고 그 영향력도 소멸되어 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레이건 : 우방으로 맹방으로 계속 공동보조를 취해 나갈 것입니다. 어느덧 시간이 다 된 듯하고, 각하의 다른 일정도 있으신 듯하여 회담을 종료해야 될 듯합니다.
  
  대통령 : 시간은 되었으나, 일어나기가 섭섭합니다. 한국은 각하와 미국 정부를 신뢰합니다. 배석한 칼루치 국방장관도 동감이겠지만, 우리 양국간 안보협력은 대단히 만족스러운 상태이고, 한국의 경제성장과 민주발전도 계속 진척되고 있습니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으로 우리는 더욱 가까운 맹방으로 서로를 보다 잘 도울 수 있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각하의 계속 건안하심을 빌며, 욕심 같아서는 재임중 꼭 한번 더 방한해 주시기를 원하나, 불연이면 大任 마치신 후라도 꼭 영부인과 함께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레이건 : 각하를 작별하려니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을 방문하여 비무장지대에 갔을 때, 어느 젊은 병사가 나에게 똑바른 자세로 경례를 하면서, '우리는 자유의 최전방(frontier of freedom)을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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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케시다 면담(1992년 3월30일)
  
  
  나는 다케시다 노보루(竹下 登) 전 수상을 만나면 마음이 편했다. 그는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 가운데서 한국을 위해서 여러 모로 일했다. 그는 독도를 자신들의 관할지라고 생각하는 시마네 출신이면서도 특별히 親韓的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1992년 3월30일 오후에 청와대를 예방한 그는 한일의원 연맹 회장 자격이었다. 박태준(朴泰俊) 한국측 회장이 배석했다. 나는 신축한 본관 건물을 자랑했다. 다케시다 회장은 이런 말을 했다.
  
  '먼저 양국가 무역, 기술이전문제에 대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4월 2일부터 고급 실무자레벨의 회의가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회의는 1차 회의이니까 상호 문제제기의 회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일본의 경제계가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나중에 나의 외교일정을 말씀드리겠지만 일련의 내 임무가 끝나면 일본의 경제계 사람을 한사람 한사람 만나서 한국의 국제경쟁력강화를 위해 일본의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설득할 생각입니다. 이제 총리도 그만 두고 나이 70이 다된 나의 여생의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힘쓸 생각입니다.'
  
  다음에 그는 예민한 천황의 방한 문제를 이야기했다.
  
  '4월초에 중국의 강택민 총서기가 방일(訪日)하게 되어 있는데, 일․중 국교 정상화 20주년이기도 하여서 아마도 천황의 방중(訪中)을 요청해 오지 않을까 예상됩니다. 그때 일본정부로서는 노(NO)라고는 못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어떻게 대답할지 정부가 결정을 안했더라도, 일․한의원연맹 회장으로서는 이러한 상황을 사전에 귀국에 보고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각하도 주지하다시피 천황의 문제는 내가 말할 성질의 것은 아니나, 적어도 박회장에게는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는 상호 언론에는 통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강택민 총서기가 일본에 오면 다케시다 회장이 만나서, 북한의 핵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의 이해를 구하여 우리와 공동보조를 취하도록 부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다케시다 회장은 '작년에 한국이 UN에 가입하려고 했을 때, 그 직전에 내가 중국에 가서 중국측이 한국의 가입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도록 개인자격으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측도 나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귀를 빌려준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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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께시다’ 前 日本 首相
  
  1. 姓 名 : 다께시다 노보루(竹下 登)
  2. 日時 및 場所 : 1992年 3月 30日(月) 16:30 - 17:19, 接見室
  3. 陪 席 :
   가. 日本側 : 야나이 켄이치(柳 健一) 駐韓大使
   나. 我 側 : 박태준 韓日議員聯盟 會長
   정해창 秘書室長
   김종휘 外交安保 首席秘書官
   김상배 韓日議員聯盟涉外室長(通譯)
  4. 人的事項
   가. 生年月日 : 1924年 2月 26日(68歲)
   나. 學 歷 : 와세다大 商學部 卒
   다. 經 歷 : 58 衆議院 當選(以後 12選)
   71 官房長官(사또內閣)
   72 自民黨 副幹事長
   76 建設相(미끼內閣)
   79 大藏相(오히라內閣)
   82 大藏相(나까소네內閣)
   86 自民黨 幹事長
   87.11-89.6 首相
   * 90.3.5 日․韓議聯 會長 就任(후꾸다 前首相의 後任)
   라. 訪韓記錄 : 85. 8 第13次 韓․日 閣僚會議 參席
   85. 9 INF 서울總會 參席
   88. 2 大統領 就任式 參席
   88. 9 올림픽 開幕式 參席
   90. 4 日․韓議聯 會長 就任 人事次
   91. 8 韓․日議聯 合同總會 參席
  5. 對話內容
  
  다께시다 : 이 건물에는 처음입니다.
  
  대통령 : 작년 8월에 뵙고, 벌써 해가 바뀌었는데, 건강한 모습을 뵈니 기쁩니다. 이 건물은 한국의 고전적 문화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디자인도 그렇고, 재료도 모두 국산으로 되어 있습니다. 처음 본 감상이 어떻습니까?
  
  다께시다 : 국산이라는 점에 매력이 있습니다. 일본의 대표적 건물로 동경의 영빈관이 있는데 이것은 국산이 아닙니다.
  
  대통령 : 여러 가지 분야에서 세계의 첨단을 가는 일본이니까 국산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나 우리는 아직 뒤떨어진 나라니까 국산을 아낍니다.
  
  다께시다 : 요즈음 일본 사람들이 미국사람들에게 잘 쓰는 말에ꡒ옛날에 일본사람들은 좋은 물건이니까 국산품을 쓰자고 하였으나 지금은 좋은 물건이니까 일본제를 사라고 한다ꡓ는 말이 있는데 그러면 미국사람들은ꡒ말은 옳은 말이나 그래도 일본제 자동차는 제한하기를 희망한다ꡓ고 합니다.
  
  대통령 각하께서 이렇게 예방의 기회를 주신데 대해 감사합니다. 지난번에 미야자와총리가 취임 후 첫 방문국으로 한국에 온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그후 약속된 제반사항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당연히 정부간은 물론 일한 의원연맹으로서도 해야 할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고, 박태준 회장과 그 점에 관해 상의하기 위해 방한하려 하였으나, 귀국의 선거 때문에 늦어 이번에 방한하였는데 대통령각하께서 만나자고 하여 이렇게 뵙게 되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대통령 : 양국간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기쁠 때나, 궂을 때나, 언제나 양국간의 우의와 친선을 위해 관심을 갖고 실천해 오신 다께시다 선생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지금 미야자와 총리의 방한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때도 다께시다 선생의 우정을 마음에 새기면서 진지하게 솔직하게 논의하여 좋은 합의를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미야자와총리에게도 감사하고 있으나 뒤에서 이바지하신 다께시다 선생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다께시다 : 말씀 감사합니다. 먼저 양국가 무역, 기술이전문제에 대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4월 2일부터 고급 실무자레벨의 회의가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회의는 1차 회의이니까 상호 문제제기의 회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일본의 경제계가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나중에 나의 외교일정을 말씀드리겠지만 일련의 내 임무가 끝나면 일본의 경제계 사람을 한사람 한사람 만나서 한국의 국제경쟁력강화를 위해 일본의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설득할 생각입니다. 이제 총리도 그만 두고 나이 70이 다된 나의 여생의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힘쓸 생각입니다.
  
  대통령 : 감사합니다. 이제 말씀을 들으니까 옛날 일이 하나 생각납니다. 올림픽 때 일본의 우리 교포들이 올림픽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여 고국에 송금하려 하였습니다. 그 때는 지금보다 어려운 때였는데도 모처럼 모은 기금이지만, 일본의 법으로는 세금을 내야 하였고, 세금을 내게 되면 그만큼 성과가 적어질 형편이었습니다. 이 어려운 문제를 다께시다 회장의 강한 의지로 행정법규등을 무릅쓰고 세금 없이 송금할 수 있도록 실천해 준 데 감사하고 있습니다.
  
  양국간의 경제적 문제를 원리대로만 하려고 한다면 안될 사항이 있을 것입니다. 역시 형제간에는 나이 많은 형이 양보하고 친구 입장에서는 여유 있는 쪽이 양보해서 해결하려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미야자와 총리에게도 그러한 이야기를 한 바 있는데, 이제 다께시다 회장이 먼저 그러한 뜻으로 이야기하니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 우리 선거에서 실패한 제1원인이 경제실패라고 하고 그중에서도 대일무역 역조문제가 강조되어 많은 표를 잃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회장의 협조로 무역역조가 시정되어, 이 다음 대통령선거에서는 잃었던 표를 회복하였으면 합니다.
  
  다께시다 : 다음으로 일․북한 회담문제인데, 한마디로 말해 각하의 5원칙을 기조로 해서 진행할 것이며, 북한의 핵사찰문제에 있어서는 중국에 대해서도 당연히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다할 생각입니다.
  
  대통령 : 일․북한관계나 북한의 핵문제에 대해 내가 재론할 여지도 없게 이해가 깊으시고 분명한 일본의 입장을 표명해 준데 감사합니다. 북한은 6.15이후 오늘날까지 많은 도발을 하여 왔고 테러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북한의 군사적 모험의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핵문제는 지금 세계 제1의 문제로 대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핵문제 해결 없이는 남․북한관계에 진전이 있을 수 없다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 뿐 아니라 일본이 지원하고, 또 중국, 소련등 여러 나라가 일치단결해서 해결하기를 희망합니다. 핵문제 해결은 북한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북한을 불행해서 구출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나 일본이 노력해서 좋은 결실을 맺기를 바랍니다.
  
  다께시다 : 대통령각하의 말씀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다음으로 일본의 외교일정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4월초에 중국의 강택민 총서기가 방일하고, 중순에는 UN이 브라질에서 개최하기로 된 환경문제서미트를 준비하기 위한 현인회의가 내가 호스트가 되어 일본에서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5월에는 오키나와 반환 20주년 행사가 있습니다. 한편, 양국의원연맹도 금년이 20주년이 되는 해여서 박회장과 행사준비를 상의하고 있습니다.
  
  처음 말한 강택민 방일 때에는 일․중 국교 정상화 20주년이기도 하여서 아마도 천황의 방중을 요청해 오지 않을까 예상됩니다. 그때 일본정부로서는 NO라고는 못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어떻게 대답할지 정부가 결정을 안했더라도, 일․한의원연맹 회장으로서는 이러한 상황을 사전에 귀국에 보고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각하도 주지하다시피 천황의 문제는 내가 말할 성질의 것은 아니나, 적어도 박회장에게는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는 상호 언론에는 통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 :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 자신이 일본을 방문하였을때 천황께 편리한 시기에 방한해 주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일본으로서는 한국을 비롯 동북아 각국을 천황이 방문함으로써 한 차원 높게 친선관계를 고양시킬 수 있다면 바람직한 일일 것입니다. 따라서 중국을 먼저 방문하건, 한국을 먼저 방문하건 그 방문이 양국간의 친선을 한 차원 높이는데 바람직한 일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것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통령 : (통역을 듣고) 이야기가 좀 딱딱합니다(박태준 회장에게) 박회장이 내 뜻을 더 부드럽게 설명해 주십시오.
  
  박태준 : 여러 가지 정세나 환경이 천황이 방문하기에 무르익었다고 판단될 때 방문하는 것이 좋고 그러한 정세, 환경이 되도록 상호 노력하자는 뜻입니다. 그러한 정세나 환경에 대해서는 대통령각하의 뜻도 포함하여 나와 다께시다 회장이 수시 상의하도록 합시다.
  
  다께시다 : 잘 알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
  
  대통령 : 강택민 총서기가 일본에 오면 다께시다 회장이 만나서, 북한의 핵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의 이해를 구하여 우리와 공동보조를 취하도록 부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께시다 : 작년에 귀국이 UN에 가맹하려고 했을 때, 그 직전에 내가 중국에 가서 중국측이 한국의 가입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도록 내 개인자격으로 말한 것이 있습니다. 중국측도 나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귀를 빌려준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한․일간의 어업문제는 금후 계속해서 좋은 방향으로 진행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지난번에 러시아와 귀국과 맺은 어업협정은 순전히 경제적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외교문제의 밖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으로서는 북방영토문제가 걸려 있어 우려와 문제제기의 소리가 있습니다. 정부의 담당자가 귀국과 잘 상의하고 있으나, 나로서도 귀국의 이해와 협조를 부탁합니다.
  
  나도 옛날에 관방장관을 지낸 적이 있는데, 여기에 각하의 관방장관격인 비서실장과 외교를 담당하는 분도 나와 계신데, 이 분들과도 잘 이야기해서 협조를 바라고 싶습니다.
  
  대통령 : 그 문제에 대해서는 보고를 들은 바 있습니다. 미묘한 문제입니다. 다만 말씀대로 우리는 경제적인 이유에서 이 일을 진행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으로서는 북방 4도의 외교문제가 있으니 우리로서도 그 점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귀국의 입장을 손상시키지 않고 협력하기를 희망합니다.
  
  다께시다회장이 평소 힘쓰고 있는 양국간 연안어업의 협력도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박태준 : 우리 쪽에서 연수도 가고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께시다 : 내가 연안어업의 협력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일전에 오대사가 이런 농담을 하였습니다.「다께시다 회장은 한․일 양국에 걸쳐 양식어업을 크게 벌이실 모양인데 일본은 전파산업이 발전했으니까 그 전파를 이용해서 세계의 고기를 모두 한․일 양국연안에 모으고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떠냐?」라고 해서 나도 크게 웃은 적이 있습니다.
  
  대통령 : 매우 바쁜 때라 식사대접도 못해 미안합니다. 계절은 좋은 때여서 술이라도 한잔 나누고 싶으나 그렇게 못해 서운합니다. 다음에 그러한 기회가 있기를 희망합니다.
  
  다께시다 : 나도 술잔을 나눌 기회가 있기를 희망합니다.
  
  대통령 : 이번에 1석 모자라는 과반수를 얻어 국내 언론으로부터 크게 비판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무소속이 들어와 과반수는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이나 미국의 친구들은 이번 선거의 결과가 오히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꽃피고 있는 증거하고 격려 해 주었습니다.
  다께시다 : 내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 2007-11-30, 17:5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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