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왜 자신의 傳記를 판금조치했나?
徐廷柱시인의 「雩南 李承晩傳」이야기.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故 金溶植 외무장관의 회고록 '새벽의 약속'(김영사, 1993년)엔 이런 대목이 있다. 1955년 그가 일본 주재 한국 대표부의 대표로 있을 때 진해에서 휴양중이던 李承晩 대통령을 찾아가 업무보고를 했다고 한다. 대통령은 金 대표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이를 구술시킨 후 늦여름의 조용한 진해만을 내려다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자네, 내가 무엇을 기도하는 줄 아는가?'
   李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늘 하나님께, 우리 민족도 다른 민족들 못지 않게 잘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런 기회가 올 때에 나로 하여금 알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네'
  
   '각하, 언제쯤 우리도 남부럽잖게 살 수 있겠습니까?'
   '한 30년 걸릴 걸세. 그때까지는 지금처럼 바쁘게 지내야 할 걸세'
  
   金 전 장관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85, 86년에 李 대통령의 예언을 회상하면서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고 했다.
   <86년도의 아시안 게임이 서울의 잠실에서 개최될 때, 관람석의 한 모퉁이에서 나는 30년 전 李 대통령이 한 말을 회상하였다>
  
   李承晩 대통령은 독립투사 시절부터 한국인의 저력을 확신했다. 한국인으로선 최초의 박사였고, 미국의 一流대학 3개(조지 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세튼 대학)를 다닌 그는 엘리트 의식에 함몰되지 않고 민족의 고민과 꿈을 항상 자신의 것으로 느끼면서 살았다.
  
   그는 한국인의 우수한 잠재력을 살리는 길은 언론과 학교를 통한 교육과 각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독립투쟁을 항상 언론과 학교를 통해서 했다. 그는 자신을 민족의 교육자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민중도 자신들에 대한 李承晩 대통평의 이런 호감과 기대를 알고 반응했다. 그에 대한 지식인들의 바판은 거셌으나 국민들의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이 民心이 그를 建國의 지도자로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李承晩과 국민 사이의 義理관계인 것이다. 1945년 직후 지식인들이 하자는대로 했으면 한국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이승만의 위대성을 알아본 대중의 지혜가 지금도 한국을 살리고 있는 原動力이다.
  -------------------
  
   李承晩이 판매금지 시킨 이유
  
   우리나라의 가장 거대한 인물에 대해 가장 위대한 문장가가 쓴 傳記는 가장 널리 알려지지 않은 책이 되고말았다. 대시인 徐廷柱의 「雩南 李承晩傳」이 그 책이다. 이 책은 1947년 아직 대한민국이 출범하기 전에 徐廷柱씨가 「전기의 집필자로 위촉되어 매주 두 차례씩 (雩南을) 만나뵙고 그분 생애의 이야기들을 그분에게서 직접 口授(구수)받아 노트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쓰여졌다는 점에서 다른 전기와 크게 다르다. 「李承晩이 말한 李承晩의 생애」란 밀도와 實感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정보가치는 매우 무겁다. 더구나 大詩人의 안목에 잡힌 巨人의 초상이란 점에서 이 散文의 깊이는 남다르다. 재미있는 것은 이 傳記는 출간되자말자 李承晩대통령의 지시로 판매금지가 되고말았다는 점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1949년 여름에 三八社에서 출판된 徐廷柱 著의 전기를 받아보고는 경무대에 근무하던 金珖燮시인에게 한 마디했다고 한다.
   『徐廷柱는 그래 얼마만큼이나 되는 시인인가?』
   『좋은 시인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저의 집 어른도 못 모시어 봤나?』
   徐廷柱씨는 「서양에서 반세기 이상을 사시며 공부도 많이 하신 우남 선생이시니 잘 이해해주실 걸로 알고 이분의 이름 밑이나 딴 누구의 이름 밑에서도 두루 존칭 붙이는 걸 생략했던 것인데, 이분의 이 나라 사람으로서의 전통적인 마음에 거슬렸던 것이리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李대통령은 특히 아버지 李敬善의 이름에 경칭을 생략한 데 대하여 대단히 화가 나서 직접 경찰에 지시하여 서점에 깔린 책들도 압수해버렸다.
  
   글쓰는 사람이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이가 있으니 자신의 글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저지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럼에도 徐廷柱는 이 전기의 재간행(1995년)에 붙인 서문에서「나는 내 일생에서 나를 낳게 하신 내 親父 외에 두 분의 정신적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왔다」면서 「한 분은 내 교육을 바로 이끌어주신 朴漢永 스님이시고 다른 한분은 徹天(철천)의 民族自主獨立魂을 각성시켜주신 우남 이승만 어른 바로 그분이시다」라고 썼다.
  
   가장 朝鮮的인 사람
  
   기자는 徐廷柱씨의 初版自序(초판자서)의 첫 문장을 명문으로 꼽는다.
  
   <여기 그의 70여의 생애를 한 거찬 意志로써만 貫徹하였고, 또 관철하면서 있는 한 朝鮮사람이 있다. 舊한국 말엽으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한 世紀에 가까운 이 민족의 변화 많은 세월 속에 있어, 아마 그는 누구보다도 조선사람으로서 변화하지 않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一生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또 한 사람의 일생쯤 소비된대도 아까울 게 없다. 그만큼 그는 저 뭇 묏부리와 丘陵들을 대표할 수 있는, 뛰어난 한 峻嶺이 되기 때문이다>
  
   약40년간 미국생활을 했고 미국의 일류대학들만 골라서 공부를 했지만 李承晩의 魂은 가장 조선적인 조선사람의 것으로 남아 있더란 徐廷柱의 이 말은 인간 李承晩을 논할 때 결론으로 삼을 만하다.
  
   徐廷柱씨가 왜 이런 결론에 이르렀는가에 대해서는 1995년3월호에 그가 쓴 글(雩南과 나)이 답해준다. 이 글에 따르면 李承晩은 매주 찾아오는 徐廷柱에게 가끔 漢詩를 읊어주곤 했는데 어느 날 『자네는 시인이라면서?』라고 하더니 베개 옆에 놓아두었던 빛 좋은 사과를 한 개 건네주면서 『이거나 하나 먹어보게』라고 권한 뒤 미국 망명 시절에 쓴 漢詩를 들려주더라고 한다.
  
   일신범범수천간(一身泛泛水天間)
   만리태양기왕환(萬里太洋幾往還)
   도처심상형승지(到處尋常形勝地)
   몽혼장재한남산(夢魂長在漢南山)
   (하늘과 물 사이를 이 한 몸이 흘러서/그 끝없는 바다를 얼마나 여러번 오갔나/닿는 곳곳에는 명승지도 많데만/내 꿈의 보금자리는 서울 남산뿐)
  
   李承晩의 시낭송을 듣던 徐廷柱 시인은 순간, 「 내 가슴 속이 문득 복받쳐오르며, 저절로 두 눈에선 눈물방울이 맺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기 누워계신 이 영감님이 쇠약해져 들어가던 李朝 말기부터 이 나라 자주독립운동의 대표자로서 3·1운동 직후에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맨 처음 대통령이시다. 그 뒤 다 늙은 할아버지가 되어 귀국하시도록까지 오직 이 민족의 해방만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다니시면서도 마지막까지 그 가슴속에 못박아 가지고 다녔던 그 한남산! 그 한남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徐廷柱씨의 속에서도 어느 사이인지 그를 한 민족의 아버지로서 확인하는 『아버지!』하는 감동이 안 솟아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李承晩은 광복된 뒤 돌아와 추억의 남산을 찾아 이런 漢詩를 남겼다.
   도원고구산여연(桃源故舊散如煙)
   분주풍진오십년(奔走風塵五十年)
   백수귀래상해변(白首歸來桑海變)
   사향휘루고사전(斜向揮淚故祠前)
   (복삿골의 옛벗들 연기처럼 흩어져/어수선히 지나간 오십년이여/모두 변한 터전에 흰머리로 돌아와/옛 사당 앞 비낀 햇살에 눈물 뿌리다니)
  
   기자는 1996-97년간 보스턴 근교의 하버드 대학에서 머물면서 李承晩이 이곳 대학원을 다닐 때 하숙했던 집(在美동포가 살고 있다)에 가 보았다. 기자는 徐廷柱씨가 가졌던 경탄의 수수께끼를 풀고싶었다. 李承晩은 미국에서 살면서 어떻게 조선인의 魂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을까, 그는 미국인들에 대한 열등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기자의 결론은 다음 세 가지였다. 李承晩의 타고난 인간의 그릇, 미국의 일류대학(조지 워싱턴 대학-하버드 대학-프린세턴 대학)을 다닌 학력, 그리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詩心이 그를 으뜸 가는 조선인으로 남아 있게 하였던 것이리라. 反面에 徐載弼은 미국 생활속으로 들어가 정착하면서 점차 조국과 멀어져갔고 한국어도 서툴게 되어갔다. 徐廷柱의 傳記에 李承晩과 서재필을 비교한 아주 상징적인 장면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서재필과 이승만
  
   갑신정변의 실패 뒤 미국으로 망명했던 徐載弼이 일시 귀국하여 協成會 모임에서 강의할 때였다. 서재필이 토론 도중에 문득 생각난듯이 청중들에게 박수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여러분은 아직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남이 연설할 때 잘하면 손바닥을 마주 때려 박수라는 것을 하는 법이오. 여러분도 잘 한다고 생각되거든 그렇게 해보시오』
   그러나 이때 이승만에게는 『아무리 미국이 좋다 하여도 이런 것까지는 흉내낼 필요가 없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또 한번 徐박사를 고쳐보면서 『자, 그럼 우리 박수 합시다』라고 큰소리를 내어버렸다. 李承晩은 못마땅한 생각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를 두고 徐廷柱씨는 傳記에서 「이 두 사람의 그 뒤의 생애는 『손뼉을 칠 수 있는 사람』과 『칠 수 없는 사람』의 사이와 같은 차이가 없지 않았다」고 썼다.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웁스!(oops!)』라는 말은 어색하여 『아!』라고 하고 아무리 일본어를 잘해도 『하이』라는 말은 입에서 잘 떨어지지 않는 것, 한국인의 습관과 미풍양속에 대한 본능적인 집착, 이런 토착성을 李承晩은 끝까지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인의 혼을 가장 순수하게 유지할 수 있었으리라. 이 土種 조선인됨에서 李承晩의 무서운 주체성이 우러나온 것이다.
  
   대전환: 守舊에서 開化로
  
   徐廷柱씨의 전기는 李承晩의 생애의 매듭이 된 가장 극적인 장면들을 정확히 잡아낸다. 李承晩이 여섯 살 때(그 때 그의 이름은 承龍) 천연두를 앓은 후유증으로 눈이 먼 적이 있었다. 이 소년의 눈을 틔어준 것은 서울 진고개의 일본인 의사였다. 이 병원으로 업혀 들어간 이승만 소년은 이제껏 맡아보지 못했던 쌩긋한 내음새에 코를 찡그리고는 『왜내 난다. 가자』라고 했다고 한다. 「왜(倭)내」는 李承晩이 처음으로 접한 개화의 문명이었다.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守舊세력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여러번 낙방하면서도 과거시험에 매달리던 그가 1894년의 갑오경장으로 科擧가 폐지되자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서당 친구 신긍우의 권유로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개화파의 길을 걷게 되는 대전환이다. 이때 이승만은 이미 결혼한 나이 스물의 청년이었다. 李承晩의 급제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으면서 無爲徒食하던 아버지 李敬善은 낙담한다.
  
   <『새로 된 시험제도라는 것이 있기는 한 모양입니다마는···』
   승만은 자기의 침묵이 하도 딱하여 거의 억지로 한 마디 되뇌어 본다. 그러자 아버지의 소리는 한층 더 날카로와지며 『뭐? 시험제도라니? 그깐놈들에게 붙어서 그래 개화당이 돼? 어림도 없는 소리다. 선비는 죽어도 군색해선 안되느니라. 가령, 백이숙제같이 산채를 씹다가 죽을지언정, 어찌 그 까짓 왜놈배들에게 부동한단 말이냐? 그럴 리야 없겠지만, 꿈에라도 너는 그따위 시험제도 같은 건 생각지도 말고, 이 난세에 性命을 보존할 생각을 해라. 고르지 못한 때에 묻혀서 사는 것은 예로부터 있던 길이다. 알겠느냐?』>
  
   李承晩의 漢學 실력은 과거를 재수, 삼수, 四修하는 과정에서 쌓아올린 것이다. 배재학당에서 일단 서양문물에 접하자 말자 순식간에 李承晩은 가장 급진적인 개화파로 돌변한다. 漢字실력이 바탕이 된 덕분인지 선교사 부인으로부터 영어도 빨리 배웠다.
  
   1899년 만24세의 中樞院 議官 이승만은 고종을 李堈(이강)에게 讓位시키고 일본에 망명중이던 개화파 朴泳孝를 맞아들여 혁신내각을 수립한다는 일종의 쿠데타 계획에 관계했다가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질 처지까지 갔다. 그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救命운동으로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그 뒤 약6년간 한성감옥에서 생활. 이 獄中이야말로 그 뒤의 李承晩을 만들어낸 단련과 극기의 교육장이었다. 여기서 남긴 잡문, 詩, 번역문 등은 獄中雜記로 불리는데 최근 연세대 柳永益 교수에 의해 정리 발표되었다. 그 가운데는 142首의 漢詩가 있다. 秋夜不寐(추야불매)란 제목의 산문은 李承晩의 뛰어난 감수성을 엿보게 한다. 한문으로 쓰여진 이 글의 번역문은 이러하다.
  
   가을밤에 잠 못이루다
  
   <하루 종일 문을 닫고 앉았다 누웠다 하며 책을 본다. 저녁 종소리가 그치자마자 작은 창살에 어둠에 깃든다. 심부름하는 아이가 등에 불을 켜니 새어나오는 불빛이 희미하게 비친다. 모두가 잠자리에 드니 고요하기가 승방(僧房)에서 참선(參禪)에 들어간 스님과 같다.
  
   창살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니 뜰에 있는 나무가 침침하게 보인다. 약한 바람이 서서히 불어와 볼을 스쳐가니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호소나 하듯이 귓가에 요란하다. 어느 집에선가 시름에 잠긴 아낙네의 다듬이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고, 담장 너머에선 순시하는 야경꾼의 징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한다. 성긴 버들가지가 서늘함을 보내오고 그윽한 난초가 향기를 풍긴다.
  
   밤은 어찌하여 이리도 깊어가기만 하는가? 종소리 북소리 멀리서 들리는데 누구의 시름인가? 날은 추워지는데 편지는 늦어지고 임금의 교사(사면장)도 다소 더디나 보다. 작년이고 금년이고 백발은 늙어감을 재촉하니 남은 날이 며칠이던가? 황가(皇家)에 일은 많은데 이 한 몸 왕옥(王獄)에 갇혔구나. 그만 두어라. 말해도 미치지 못하리로다. 아! 명(命)이로다. 운수에 달렸구나.
  
   무릇 선비로서 혼란한 나라에 처한 자가 참으로 능통한 권도(權道)로 헤쳐나가지 못할 바에는 다만 자기 한 몸이라도 잘 가누어 기미(機微)를 살피고 변화에 대처해야 한다. 걱정해서 무엇하리오. 나도 이제부터 쉬리로다.>
  
  
[ 2008-07-23, 07:3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코나스넷  |  리버티헤럴드  |  뉴데일리  |  뉴스파인더  |  뉴포커스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