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아시아의 별' 李承晩 대통령"
마크 웨인 클라크 前 UN군 총사령관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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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웨인 클라크 전 UN군 총사령관.
제1·2차 세계대전, 6.25참전 용사인 마크 웨인 클라크(Mark Wayne Clark, 1896~1984) 전 UN군 총사령관은 1952년 9월 남북한 전체를 주머니처럼 감싸는 모양의 해상봉쇄선인 ‘클라크 라인’(NLL의 전신)을 선포, 공산군의 침략으로부터 수도 서울을 사수한 장본인이다.
  
  용장(勇將)·지장(智將)·덕장(德將)으로 평생 동안 한국과 미국 주도의 ‘한반도 자유통일’을 갈망했던 클라크 장군은 1896년 5월1일 뉴욕 주 메디슨에서 출생, 1917년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부상을 입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아이젠하워 장군의 휘하에서 부상령관으로 임명되어 비밀임무를 띠고 잠수함을 타고 알제리에 상륙, 프랑스 장성들과 전쟁 회의를 주도했다.
  
  다음해인 1943년 9월, 장군은 제5군 사령관으로 이탈리아 사례르노에 상륙해 이탈리아 해군의 항복을 받았다. 1944년 6월4일에는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 입성해 제2차 세계 대전을 촉발시킨 주축국의 수도를 함락시켰다.
  
  1945년 5월2일 그는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을 분쇄해 항복을 받아 내는 전공을 세웠다. 전쟁이 종결된 후에는 오스트리아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그리고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한 모스크바 외상회담, 런던 외상회담의 미 국무장관 차석 대표로 활약했다.
  
  특히 장군은 오스트리아에 주재 당시 수시로 서방측 점령지역간의 자유로운 통행을 위협한 소련군을 격퇴한 것으로 유명하다. 1946년 겨울, 소련군 장병들이 미군열차에 올라와 권총을 휘두르며 행패를 부리자, 참다못한 미군헌병이 소련군 장교를 사살한 사건이 있었다.
  
  소련군 당국은 문제의 헌병을 자신들이 처형하겠다며 한 달 반 동안 신병인도를 요구했지만, 클라크 장군은 완강하게 버텼다. 결국 소련은 미군 신병인도요구를 포기했다. 뿐만 아니라 소련군이 미군열차에 올라와 행패를 부리는 일도 사라졌다.
  
  소련이 비엔나와 오스트리아의 미국점령지역간을 오가는 미국 항공기의 운항을 위협했을 때(심지어는 클라크 장군이 탑승한 비행기까지도 소련군의 위협을 받은 일이 있었다) 장군은 열차사건에서 얻은 교훈을 십분 활용했다.
  
  그는 미국 비행기들을 무장시키고, 소련의 도발이 있을 경우 “가차 없이 응사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 사실을 소련 측에 통보했다. 소련비행기들을 두 번 다시 미국 비행기에 도발을 가해오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그는 이처럼 “공산주의자들은 벽에 부딪칠 때만 후퇴한다”(솔제니친의 명언)는 말을 몸소 실천했던 군인이었다.
  
  이후 해외 복무에서 국내 복무로 돌아온 장군은 제6군 사령관, 미 지상군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1952년, 그는 드디어 맥아더 원수, 리지웨이 대장에 이어 제3대 극동군 사령관 및 UN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당시 아이젠하워 정부의 방침에 따라 한국전쟁을 휴전으로 종결짓는 장본인이 된다. 그러나 장군은 자신이 ‘승리 없는 전쟁’의 ‘휴전’에 서명했다는 점에서 자신은 ‘미국 역사상 가장 불행한 군인’이라고 개탄했다.
  
  이 같은 이유로 휴전이 되던 그해 1953년 10월, 장군은 40여 년 간의 군대 생활을 마감하고 마침내 퇴역을 하게 된다. 이후 장군은 시타델(Citadel) 군사 아카데미 총장과 명예총장을 지내다가 88세 되던 1984년에 타계했다.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하고 한국민을 사랑했던 클라크 장군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가 UN군 총사령관 재임 중 그어놓은 남북한 서해해상경계선, 일명 북방한계선(NLL) 덕분에 수도 서울에 살고 있는 1천 만 서울시민들이 안전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클라크 장군의 아들 빌(Bill) 대위는 미 제9군단장 무어 장군의 부관이었으나 일선 소총 중대장으로 자원, 단장의 능선 전투 등에서 부상을 입고 소령으로 진급했다. 장군의 회고록은 ‘다뉴브에서 압록강까지’(From the Danube to the Yalu), ‘계산된 모험’ 등이 있다.
  
  참고로 한국전쟁 기간 동안의 미군 전사자는 다음과 같다. 총 병력동원 수 5백76만 4천1백43명, 전사자 3만 3천6백67명, 기타 사망 3천2백49명, 부상자 10만 3천2백84명이었다. (98년판 뉴욕타임스 발행 「WORLD ALMANAC」) 이렇게 지켜진 것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2] 클라크 장군이 본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은 사람을 다루는 데 있어 매우 능수능란했다. 특히 워싱턴에서 날아온 전문가들과 우리 사령부에 있는 전문가들 사이에 싸움을 붙이는 데 있어 능숙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또 주한 미 대사관과 미군 사이의 대립도 교묘히 유발시켰다.
  
  그는 또한 자기의 말을 잘 들어 주는 사람을 발견하는 데도 대단히 민감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기의 의견을 충분히 납득시켰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을 위한 미국인’을 끊임없이 찾고 있었던 것이다.
  
  공산주의에 반대해 싸우고 있는 한국으로 말미암아 자유진영이 얼마나 많은 영광과 이득을 얻고 있는가? 한국을 위해 미국은 모든 문제를 한국 측 요구에 양보해야 된다고 확신하는 미국인을 찾기에 이 박사는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주변에는 ‘한국을 위한 미국인들’이 많았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미국은 한국을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미국인들에 의해 용기를 얻었고 그 일을 추진해 갔다. 그런 관계로 이 대통령 자신이 미국의 정책에 반대해 독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큰 모험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중략)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을 통해, 아시아에서는 장개석 자유중국 총통과 인도의 네루 수상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른바 위대한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는 반공 및 비공산 아시아인들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이 대통령은 강인한 반공 투쟁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때로는 미국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주장을 내세우는 데 결코 비굴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이를 끝까지 관철시키는 데 어떠한 위협이나 난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받아 지도자로 추앙받게 된 분이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허수아비 지도자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아시아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강력한 지도자였으며 그에게는 빛이 있었다. 요컨대 그는 ‘아시아의 별’이이었던 것이다. 그는 매우 훌륭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군대는 날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반공주의자인 동시에 반식민주의자였다.
  
  그는 특히 수억의 아시아인들에게 아시아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심어 주었다. 이 대통령은 그것이 옳았든 옳지 못했든 간에 한국전쟁을 자신의 의사에 맞도록 열심히 구체화시켰다. 그는 그와 같이 자신의 목표를 향해 줄기차게 투쟁함으로써 극동의 강한 프라이드를 가져오게도 했다. 그는 우방의 압력이나 심지어 어떤 다른 강력한 위협에도 결코 굴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확신에 넘친 독자적인 길을 꿋꿋하게 걸었다. 나는 이런 이 대통령의 성향과 위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국가 원수 이하 급의 다른 아시아 인사들과 협상하게 함으로써 그의 명성을 손상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눈은 한국이라는 지역적인 한계를 넘어서 있었다. 그는 생존을 위하 대투쟁에 있어서 공산 아시아에 대항해 싸우는 전 자유 아시아를 영도하는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다. 적어도 그는 그런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살았던 것이다.
  
  아시아 국가들에 의한 ‘태평양 동맹’은 다년간에 걸쳐 이 대통령이 심취했던 관심사였다. 1949년 장개석 총통은 한국의 진해로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했을 때 이런 태평양 동맹 문제를 논의한 적이 있다. 그리고 1953년 휴전이 조인된 후에 이 대통령은 장 총통과 그 문제를 다시 협의하기 위해 대만을 방문했다.
  
  이 대통령은 언제나 모든 아시아인들에 의해서 적극적인 반공투쟁 계획이 실현되길 갈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계획이 실현되는 것과 동시에 명실상부한 아시아의 최고 지도자로서 군림하기를 원했다. 한국전쟁 과정에서와 같이 시기를 타는 지도자로서 머물고 싶은 이승만 대통령은 아니었던 것이다... (중략)
  
  공산주의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불변의 증오심, 침략자에 대항해 한사코 싸우도록 국민들을 고무하는 데 있어서 그가 보인 탁월한 영도력, 그리고 조국이 공산 폭군의 지배하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투쟁에서 어떠한 희생도 아끼지 않으려는 한국 국민과 이 대통령의 결연한 자세 등에 대해 우리는 깊은 존경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또 한 가지 반복해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한국에 있어서의 우리의 반공 전략이 과연 적절하고 효과적이었던가 하는 문제다. 나는 아직도 이를 확연히 판단할 수가 없다. 역사만이 이를 평가해 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대통령이 휴전에 반대하고, 한국의 이익뿐만이 아니라 전 자유세계의 이익을 위해서도 공산주의자들을 한국전에서 군사적으로 패망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선언한 것은 미국의 엉거주춤한 자세보다 더 정당하다는 것을 역사는 분명히 증명해 주리라고 믿는다.>>

  
  출처: 클라크 前 UN군 총사령관 회고록(제목: 「From the Danube to the Yalu」) 발췌
  프리존뉴스 김필재 기자 (spooner1@freezonenews.com)
  
  
[ 2008-08-26, 19:4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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