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김대중 정부는 정책실수를 형사범으로 다뤄 前 정부의 경제팀을 구속수사했으나 국가적 보고서도 내지 않았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1997년 外換위기는 IMF 관리체제를 불렀다. 한국은 일종의 경제식민지가 된 셈이었다. IMF가 구제금융 지원의 代價로 한국에 강요한 각종 개혁은 우리가 스스로 했어야 했던 것들이었다. 요사이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기상황은 11년 전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번 사태는 外因性이다. 그럼에도 과거 사례에서 참고할 만한 것들이 있다.
  
  
  1. 金泳三 정부 들어서 무역赤子가 누적되었다.
  2. 세계화를 구호로 삼아 OECD에 가입했다. 선진국 수준에 맞춘다고 금융을 개방해놓고는 감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3. 특히 외환거래의 경험과 실력이 부족한 종합금융회사들이 해외에서 활동하는 것을 방치하였다. 종합금융회사가 투자했던 동남아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綜金社가 부도로 몰리고 이것이 외화부족 사태를 촉발했다.
  4. 不實해진 起亞 자동차의 처리를 정부가 제대로 하지 못해 국제적 신용이 떨어졌다. 정치, 사회단체의 압력으로 정부가 흔들렸다.
  5. 대통령 선거의 해에 與野가 모두 정략적 계산으로 경제문제를 다뤘다.
  6. 김영삼 대통령은 경제에 무지하고 관심도 약했다.
  7. 한국에 외화를 빌려주었던 외국측이 만기연장을 거부하고 대출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8. 한국은행은 환율 방어에 외화를 투입하여 부족사태를 가중시켰다.
  9. 정부가 신용회복을 위해 내어놓은 금융개혁안이 야당과 노조 등의 반대로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10. 韓日관계가 나빴다. 일본의 중앙은행은 한국에 대한 외화 지원을 거부하였다. 정부는 IMF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1. 김영삼 대통령은 IMF측과 협상을 벌이는 경제팀을 교체했다.
  12. 교체과정에서 인수인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신임 경제 부총리가 IMF로 가지 않겠다는 발표를 했다가 취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13. 김대중 대통령 후보는 IMF측과 재협상을 요구하여 혼란을 불렀다.
  14. 김대중 정부는 정책실수를 범한 경제팀을 구속수사하여 정치적 보복이란 비판을 받았다. 법원이 직무유기 부분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했다.
  15. 外換위기에 대한 국가적 조사도 없었다.
  ********************************************
  
  
  
  
  
  
  
  
  
  
  
   ● 외환위기 10년의 반성/IMF 사태의 내막
   -대통령은 없었다! 그는 '정치적 불구' 상태였다.
  
   올해는 한국경제가 외환위기를 맞아 IMF 관리체제로 넘어간 사건이 난 지 11년이 되는 해이다. 지금 덮치고 있는 미국發 금융위기의 波高는 그때보다 더 높다. 11년 전보다 한국은, 관료들은, 정치인들은 얼마나 달라질 것일까? 아니면 그대로인가? 1998년 3월호, 4월호 月刊朝鮮에 조갑제, 부지영 기자가 쓴 實錄을 다시 싣는다.
  
   ==================================================================
  
   다큐멘터리·운명의 15일간 金泳三, 姜慶植, 金仁浩, 李經植의 幕後행적 정밀추적
  
   1997년 11월7일 청와대 대책회의에서 IMF건 최초 거론
   11월8일 오전, 대통령에게 최초 보고
   11월10일 저녁, 대통령이 한은 총재에게 전화
   11월14일 경제팀, 대통령에게 'IMF로 갈 수밖에 없다'
   11월16일 캉드쉬 총재 비밀리 서울서 회담
   11월19일 경제팀 경질. 인수인계 과정에서 IMF 협상 실종
   11월21일 임창렬 부총리, IMF건 공식발표
  
   -외환보유고 폭락 최초 시점은 11월3일
   -18일간 외환 방어에 50억 달러 투입
   -재협상 논쟁 때 가용 외환보유고 겨우 60억 달러
   -대통령 선거 투표 직전 국가부도 날 뻔
   -강경식 부총리, 대통령 긴급 명령권도 한때 고려
  
   한국경제가 국가부도를 향해서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을 때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과 경제팀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김영삼 대통령은 강경식 경제팀에 모든 것을 맡겨놓고 구경만 하는 입장을 유지하였다. 그는 경제팀에게 '내 임기 중에 IMF로 가서는 안된다'는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이 위기를 국가전체의 위기로 인식한 흔적이 없고 경제팀의 보고에 대해서는 어떤 본질적인 질문이나 이견도, 토론도 없었다. 그리고 진지한 고뇌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6·25동란 이후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재산상의 피해를 안겨다 준 이 사태의 핵심은 대통령이 국정의 중심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국정의 주도권을 잡고서 이 중대사태를 국가적 문제로 만들어 정치권과 국민의 협조를 구할 만한 지식과 용기, 그리고 관심을 상실한 '정치적 불구' 상태였다. 경제팀이 하자는 것을 막지도 돕지도 않음으로써 김영삼 대통령은 끝까지 국외자로 머물렀다. IMF협상이 막후에서 시작된 시점에서 경제팀을 교체함으로써 인수인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신경제팀은 그때 진행되고 있던 IMF협상 자체를 부인하는 발표를 했다. 이런 만화 같은 사건은 지리멸렬해버린 김영삼 리더십의 나상(裸像)이었다.
  
  
   11월7일 : 청와대 경제수석실 회의
  
   <11월7알 금요일, 외환보유고 285.7억 달러, 종합주가지수 515.6>
   1997년 11월7일 금요일 오후 4시 반, 청와대 경제수석실, 김인호(金仁浩) 경제수석은 윤진식(尹鎭植) 청와대 조세금융 비서관과 함께 최연종(崔然宗) 한은(韓銀) 부총재 이하 실무진, 재경원의 윤증현(尹增鉉) 금융정책실장 이하 관계자들을 비상소집해,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긴급회의를 주재했다. 10월23일 홍콩 증시(證市)가 폭락한 이후, 외국인 투자자들이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바꾸어 빠져나가고 하루가 멀다 하고 동남아의 외환위기가 한국의 외환위기를 부를 수 있다는 외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10월28일 국제적인 증권사 모건 스탠리는 이런 긴급전문을 타전했다고 보도되었다. 「긴급: 아시아 지역에서 투자된 자금을 회수하라. 현 단계에서 설사 손해를 보고 있더라도 즉시 팔아치우고 빠져 나오라」
  
   정부는 10월29일 채권시장 개방 및 현금차관 도입확대 조치로 투자심리를 안정시키려는 대책을 발표했지만, 빠져나가는 외국인 투자자들을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다음날까지 이어진 후속 조치도 이어지는 해태(11월1일)와 뉴코아(11월4일) 등 대기업의 부도 속에서 별효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11월3일엔 외국인 투자한도가 확대됐으나 기대했던 것과는 완전히 거꾸로, 세계적인 미국의 신용평가회사 무디스와 S&P(스탠다드 앤 푸어스)社는 한국의 신용등급을 오히려 하향 조정했다. 11월5일 뉴욕 월스트리트에 큰 영향을 끼치는 세계적인 경제전문 뉴스공급 통신사인 블룸버그(본사 뉴욕)와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이 거의 동시에 한국 외환보유고에 대해 의구심을 부채질하는 보도를 했다.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알고 보면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적을지 모른다」, 「선물환 투자 많아 순 외환보유고는 바닥이다」는 식의 보도였다. 이때만 해도 10월 말 기준으로 계산할 때 돌아올 선물환은 연말까지 9억 달러에 불과한 상태였다. 『연말까지 한국의 외채 만기물이 800억 달러』라는 월스트리트의 주장도 같은 수준이었다. 6일에는 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이 한국이 IMF(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보도를 했다. 김인호 수석은 다급해지고 있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재경원과 한은이 각각 대책을 마련하여 7일 오후 4시에 수석실에 모이도록 지시한 것이다. 참석자는 비밀 유지를 위해 극소수로 제한했다. 김(金)수석이 회의를 주재하게 된 것은 강경식(姜慶植) 부총리가 1998년도 예산과 금융개혁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회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의를 시작하기 직전 엄낙용(嚴洛溶) 재경원 차관보가 다른 회의를 끝내고 나가면서 김인호 수석의 귀에 살짝 이렇게 말했다. 『일본을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부총리에게도 보고를 했습니다』 『응? 일본은 왜?』 『일본에 여러 가지 협조를 부탁하러 가봐야겠습니다』 『아 그래』갑자기 엄차관보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그런데 말이죠. IMF에 가면 정말 괴롭습니다』 김인호 수석은 내심을 들킨 것처럼 깜짝 놀랐다. 그의 머릿속에서도 「IMF」라는 글자가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예정보다 조금 늦은 오후 4시 반. 청와대 수석실에서 회의가 시작됐다. 회의 분위기는 암울했다.
  
   국가부도를 경고한 비밀보고서
  
   이날 회의에서 논의된 자료가 하나있다. 기자가 입수한 「외화유동성 사정과 대응방안」이라는 이 한국은행 자료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중요부분을 발췌한다.
  
   <외화보유고 급감: 10월30일부터 11월6일까지 환율 안정을 위해 총23.3억 달러(선물환 1.5억 달러 포함)를 외환시장에 공급했다. 따라서 1997년 11월7일 기준으로 계상한 외환보유고는 10월말의 305.1억 달러에서 약 285억 달러 수준으로 급감했다. 이 때문에 금융기관 해외점포 예치금 및 기매도(旣賣渡) 선물환 결제 자금을 제외한 가용외화 보유액은 11월7일 현재 불과 148억 달러로 전년 말에 비해 146억 달러가 감소했다. 현재의 가용외환 보유액은 약 1.2개월간의 수입대금 충당 수준이다. 통상 적정 수준으로 인식되고 있는 3개월간 수입대금의 절반밖에 안 되는 실정이다(中略).
  
   따라서 11월 말 외환보유고는 앞으로 외환시장 개입규모를 10억 달러 이내로 억제하더라도 약 275억 달러(可用 외환 보유고는 140억 달러)로 감소될 전망이다(中略). 특히 산업 및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과 신한 및 한일 등 우량 은행의 만기 도래 CP(기업어음) 재발행이 곤란해짐으로써 이들 은행의 여타 은행에 대한 외화자금 지원 여력이 거의 소멸될 뿐 아니라 자체 자금 조달에도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당행(한국은행)이 금융기관에 대해 외화자금을 지원해주지 못할 경우 디폴트(Default: 채무불이행에 의한 국가부도) 상황 발생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中略). 이 때문에 최소한 경제활동에 필수 불가결한 수입대금 정도의 외환 보유고가 필요하다(下略)>
  
   「선물환(先物換)」은 통칭 「포워드(Forward)」라고 말한다. 외환의 거래는 먼저 이뤄졌지만 실제의 외환 결제는 나중에 하는 일종의 외상 거래이다. 이 보고서에 나타난 한국 외환보유고의 기준점으로 인용된 「3개월간 수입 대금」은 특히 중요한 개념이다. 업계의 한 소식통은 『이미 기아 사태가 나던 7,8월부터 우리 대기업들이 외국에서 수주한 물량에 대해 한국계 은행이 아닌 제3자 즉 외국은행의 보증을 서오라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고 했다. 한국은행의 이 보고서는, 상황이 계속 악화되면 11월 말 이후에는 수입 물자에 대해 달러가 없어 결제를 해주지 못하는 상황이 올 가능성이 있다는, 즉 국가부도 상황이 올 수 있다는 확고한 결론을 정부 차원에서 내린 최초의 경고였다. 이 보고서는 또한 외환업무 관련 공직자들이 그 시점에서 파국적 상황의 도래를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그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11월7일의 회의」가 이루어진 것임을 말해준다. 이 회의가 있었다는 사실은 시장에 주는 악영향을 막기 위해 비밀에 부쳐졌다.
  
   IMF를 첫 거론
  
  
  
   이 보고서는 계속된다. <해외 차입 여건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어 이제 더 이상 신규 채권발행이 어렵다…. 은행들의 크레디트 라인(Credit Line: 일종의 대출한도) 축소로 일부 종금사(綜金社)가 당일 결제 자금을 한은의 지원에 의존하거나 외환시장에서 외화매입(1일 약 1억 달러)에 의해 충당하기 시작함으로써 외환시장 교란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재의 외환 사정이 우리의 자력만으로써는 해결하기 어려운 위기사항이라고 보아야 하며 국제금융기관(IMF)과의 협의에 약 3개월이 걸리는 점을 감안할 때 (IMF와의) 협의를 시작해야 하며 외환집중제를 다시 실시하는 등 응급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지표상으로 본다면 환율이 오르기 시작한 것은 1997년 10월27일쯤이지만 외환보유고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11월3일 월요일」부터 였다.
  
   11월3, 4일 연 이틀간 롤 오버 비율(Roll-Over 비율: 상환만기가 된 외채의 만기를 연장하는 비율)이 뚝 떨어졌다. 한은 자료를 보면 10월말까지만 해도 만기연장 비율은 86.5%였다. 이것이 11월3일부터 연장이 거의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11월3일은 한국의 「블랙 먼데이(Black Monday)」였다. 이 같은 상황은 비밀에 부쳐졌다. 11월4일자 주요신문들의 1면 머리기사는 「DJP체제 공식 출범」이었고, 김현철(金賢哲)씨 석방이 그 다음이었다. 경제면도 부동산-벤처기업 등 다소 한가한 뉴스로 채워졌다. 올라가는 환율을 시장에 맡겨야 하느냐 아니면 보유외환의 방출로 안정시켜야 하는가를 두고 이견이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한계가 뻔한 외환 보유고를 갖고 할 수 있는 일도 뻔한 것이었다.
  
   정부는 달러 당(當) 960원대에서 한 번, 1000원을 육박하는 시점에서 한 번, 한은 보유고를 풀고 재경원이 환투기를 경고하는 행정 지도방식으로 환율의 안정을 시도했으나, 초점은 이미 환율문제가 아니라 무섭게 빠져나가는 외환의 확보라는 문제로 옮아가고 있었다. 7일 회의에서는 여러 이야기가 나왔다. 금융개혁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노력하고 외환 통제를 강화하기로 하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국가부도를 막기 위해 다른 나라와의 협의를 거쳐 국책은행의 자금원을 확보하는 이른바 백업 퍼실리티(Backup Facility) 방안, 정부자산을 담보로 하여 해외시장에서 채권을 발행하는 ABS(Asset Backed Securities)도 구체적으로 논의됐다. 회의의 결론은 이 모든 대책을 다하고도 안될 때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것도 검토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11월7일 회의 참석자의 증언
  
   『윤증현(尹增鉉) 재경원 금융정책실장과 최연종 한은 부총재의 자료에 IMF에 가는 문제가 함께 들어 있었다. IMF에 가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 것은 아니고 다른 것 다 해보고 나서 안되면 가자는 것이었다. 있을 수 있는 대책이 다 나열되었는데 상황이 워낙 나쁘게 돌아가니까 이 IMF건도 검토되어야 한다는 식이었다. IMF로 가는 문제가 이렇게 경제팀의 고위층에 보고되고 논의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한국계 금융기관에 대한 외채의 상환만기 연장이 시작된 것인데 그런 사태가 오면 버틸 수 있는 나라는 달러의 전주(錢主)인 미국이면 모를까 이 세계 어디에도 없다.』 강경식(姜慶植) 부총리도 『롤오버가 되지 않아 외환보유고의 일부가 가용재원이 안 되는 것으로 묶였다는 사실을 11월7일을 전후하여 깨닫게 되었으며 그것이 바로 IMF로 가지 않을 수가 없겠구나 하고 마음을 기울이게 된 동기 중의 하나였다』고 최근 그의 측근에게 말했다. 이날의 심각한 회의와는 아랑곳없이 8일자 조간신문들의 주요 면은 김영삼 대통령의 신한국당 탈당과 신한국-민주당의 합당 선언 등 정치 기사로 거의 채워졌다. IMF 신청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보도를 한 외신들과 블룸버그 통신에 대해서 한국정부의 항의문이 전달됐다는 기사가 작게 실렸다.
  
   11월8일 : 강경식(姜慶植)의 반응
  
   <11월8일(토), 외환보유고 285.9억 달러. 종합주가지수 495.7>
   김인호 대통령 경제수석은 7일 회의에서 논의된 사안이 중대한 만큼, 시간이 얼마 없다고 느꼈다. 바로 다음날 아침, 국회대책 때문에 7일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강(姜)부총리와 모처에서 조찬을 했다. 회의내용과 협의 결과를 설명하고 대응방안을 협의했다. 강경식 부총리는 의외로 순순히 『IMF로 가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강(姜)부총리는 『대통령 선거 전후의 정치적 변혁기에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많은 개혁과제들을 추진해 나가기 위해서는 IMF로 가는 것이 바람직스러운 면도 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대통령과 정치권이 대통령 선거에 휘말려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는 차라리 IMF의 힘을 빌러 국내의 개혁과제를 밀고 나가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강(姜)부총리가 갖고 있던 지론은 「금융은 신용이고 신용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한국 정부가 스스로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해결할 의지와 역량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고서는 정부가 외채상환을 보증하겠다는 말조차 먹혀들지 않고 있지 않은가. 정부로서는 금융개혁법 통과를 위해서 최대한 노력을 계속하고 국제금융계가 요구하는 강력한 안정대책을 내놓음으로써 신뢰를 회복, 단기외채의 만기연장률을 높이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대책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야당의원들이나 일부 언론이 그저 재경원에 유리한 내용의 금융개혁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위협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 당시 강경식 부총리의 심정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개혁은 경제가 어려울 때 가능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미국, 영국, 일본은 물론 요즈음 개혁성공 사례로 흔히 이야기되는 뉴질랜드까지도 결국은 벼랑에 몰려서야 개혁의 필요성을, 반대자들에게 설득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IMF로 가는 것이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강부총리와 김수석은 『IMF로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고 동의하면서도 재경원 금융실로 하여금 IMF 이외에 가능한 모든 대안(代案)을 검토시킨 후 다음날(9일) 저녁에 다시 모여 의논하기로 했다. 재경원 측은 색다른 발상을 하고 있었다. ABS, 즉 정부가 보증하는 채권을 해외시장에서 약 100억 달러 발행하면 굳이 IMF 구제금융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계산이었다. 姜 부총리도 이 발상에 상당히 미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IMF 사태 10년 기념 실록 연재(2)
   '각하 이래 가지고는 큰 일 납니다. 국가부도가 납니다'
  
   대통령에게 최초보고
  
   지금에 와서 왜 더 일찍 IMF에 가는 문제를 결정하지 않아서 협상을 어렵게 만들었느냐는 비판에 대해서, 姜慶植 전 부총리와 金仁浩 전 경제수석은 이렇게 입장을 정리하고 있는 것 같다.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IMF의 지원을 받고 그 관리하에 놓인다는 것이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알고 있는 터에, 이를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IMF에 가지 않고 해결할 길이 없는가 하고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는 과정에서도, IMF로 가게될 경우의 협상에 시간이 3개월 정도 걸린다는 관례를 감안하여 최단시일 내에 결말을 지을 수 있도록 사전 정지 작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한편 김인호 경제수석은 이날(8일) 오전 전날 밤의 대책회의에 대해 대통령에게 그 내용을 간략하게 처음으로 보고했다. 「IMF로 가는 문제를 검토하겠다」는 보고에 대해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나도 그렇게 이야기를 들었는데 잘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다. 이날 재경원은 1백억 달러 규모의 ABS 발행 등 마지막 대안들을 검토했다.
  
   이날 오전 김영삼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서 중계된 이날의 담화는 「김대통령의 측근참모들과 김현철 인맥이 국민신당의 이인제 후보를 비밀리에 지원하고 있다」는 신한국당과 국민회의의 공세에 대해서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김대통령은 『허위사실 등이 유포되는 선거풍토를 정화하기 위해서 정부의 권한을 총동원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이틀 뒤에는 국무회의, 14일엔 검사장회의를 소집하여 자신의 이런 뜻을 전달했다. 이 특별담화는 당시 김대통령의 관심이 무너지는 외환시장이 아니라 대통령 선거와 자신의 명예보호에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증거이다. 김대통령은 이 결정적인 시기에 외환위기와 관련해서는 국민들에게 한 마디의 설득이나 해명도 하지 않았고 「정부의 권한을 총동원」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는 국가경제가 아닌 개인적이 명예보호를 위해서 정부의 힘을 총동원하려고 하고 있었다
  
   11월9일 : 확대회의(휴일이므로 지표 없음)
  
   일요일인 11월9일 밤7시. 시내 모처. 전날의 약속대로 재경원의 검토내용을 갖고 강부총리와 김수석, 윤증현 재경원 금융정책실장이 저녁을 하면서 대책을 협의했다. 금융개혁법안의 통과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종합대책(강부총리와 김수석이 경질된 11월19일에 임창렬 신임 부총리에 의해서 발표된 내용)을 마련하여 법안통과와 동시에 발표하며,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문제를 계속 검토한다는 줄기에 합의했다. 이들은 IMF 문제는 그 정치·사회적 파장을 감안하여 최종결정이 날 때까지는 공개적으로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식사 전후로 예정된, 여러 사람들이 참석하는 회의에서는 보안을 위해 공개적으로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로 했다.
  
   밤 9시 인터컨티넨탈호텔. 이 회의에는 이경식(李經植) 한은 총재와 이영탁(李永鐸)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윤진식 금융비서관도 자리를 함께 했다. 이 회의는 「문제의 핵심이 한국 금융기관의 신인도, 더 나아가서는 이들 금융기관을 정상화하기 위한 정부의 금융개혁 의지와 능력에 대한 국제금융 사회의 불신에 있으므로 종합적인 금융안정대책을 마련하여 금융개혁법의 국회 통과와 동시에 발표한 후 시장의 움직임을 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한 가지 관계자들의 기억과 증언이 엇갈리고 있는 쟁점은 윤진식 비서관이 9일 대통령과 독대(獨對)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부분이다. 보도에 의하면 윤비서관은 이날(9일) 대통령을 독대하고 IMF 구제금융을 속히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했으며 12일 날 다시 대통령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김인호 수석은 윤비서관이 자신에게 「대통령과의 독대 자리가 두 번인 것은 사실이나, 대통령을 처음 뵌 것은 12일이며, 두 번째는 강부총리와 김수석이 경질된 다음이었다」고 해명했다고 말하고 있다.
  
   다른 쟁점은 윤비서관이 『2일과 6일 대책회의에서 강부총리에게 IMF로 가야 한다』고 했는데, 강부총리가 이를 묵살하고 금융개혁법안 통과만 강조했다고 주장했다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서도 김인호 전 수석은 『윤진식 비서관이 9일의 대책회의를 오해한 것이 아니었나』하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윤비서관은 IMF건이 거론된 11월7일의 대책회의 후 여러 번 김수석에게 빨리 「IMF에 구제금융신청」으로 가야 한다고 건의했는데 김수석은 이때마다 『의미는 알겠지만 재경원이 추진하고 있는 안도 있고 하니, 재경원안을 살펴보고 만일 의심나는 점이 있으면 잘 챙겨보라』고 주문했다는 것이다. 윤비서관은 9일 밤 9시 회의에 관해서는, 『강경식 부총리에게 「IMF로 가야 합니다」라고 했더니 부총리는 「IMF 이야기는 하지도 말라」고 했다』고 김수석에게 말했다.
  
   김 전 수석은, 7일 회의에 참석한 윤비서관이 그 뒤 이틀간 회의에는 불참했으므로, 9일 밤의 상황을 『강부총리가 IMF로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로 오해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김(金)수석은, 9일 밤 7시 회의에서 부총리와 경제수석 간에 큰 줄기에 대한 합의한 상태였고 밤 9시 회의에서는 IMF건을 보안(保安)하기로 한 것이 윤비서관의 오해를 부른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윤비서관(현 세무대학장)은 이런 쟁점들에 대해 『청문회를 통해 밝히겠다』고 했다. 어쨌든 9일 밤의 두 차례 회의에서 경제정책 사령탑이 내린 대체적인 결론은, 참석자들에 따라 보는 입장의 차이는 다소 이지만, 금융개혁법안의 조기처리, 종합적인 금융안정 대책 마련, ABS 등 다른 대안 강구 등의 방법으로 추진하되, 이런 방법들이 여의치 않으면 IMF로 갈 수밖에 없으니 이것도 함께 준비하자는 선이었다. 이같은 내용을 다음날 오전 대통령에게 강부총리가 보고하기로 하고 일행은 헤어졌다. 이날 IMF와 사전 접촉을 시작하기 위해 엄낙용 재경원 제2차관보가 스탠리 피셔 IMF 부총재와 통화했다.
  
   11월10일: 대통령에 대한 공식보고
  
   <11월10일(월), 외환보유고 279.1억 달러, 달러환율 1000원대 돌파. 종합주가지수 525.3>
   10일자 신문들은 「김대중 후보 35.7% 이인제 28.0% 이회창 21.4%」의 순 으로 나타난 당시의 대통령 선거 여론조사를 머릿기사로 다뤘다. 재경원이 금융개혁법을 통과시킨 뒤 금융시장 안정책을 발표할 것이라는 기사가 1면에 조그맣게 실렸고, 경제면에서는 15억 달러의 CP가 만기연장이 안되고 있다는 기사가 「서울 외환시장 초비상」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10일 아침 10시,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강부총리가 청와대에 도착했다. 배석자는 여느 때처럼 김인호 수석이었다. 강부총리는 9일 밤의 회의 내용에서 나온 결론대로 진행 중인 금융개혁법안 등 전반적인 외환위기 대책을, 제목만 열거된 한 페이지의 메모를 들고 들어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간단한 메모로 보고한 것은 전날 회의가 너무 늦게 끝나 실무자들이 정식보고서를 작성할 시간이 없었던 데다 사안이 중대했던 만큼 형식을 갖춘 보고서를 작성하게 되면 타이피스트나 서류전달 과정을 통해서 보안이 누설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고려한 때문이었다. 대통령과 마주한 이 자리에서 강부총리는 금융개혁법안 처리와 종합금융안정정책, ABS 대안(代案) 등 그 동안의 협의 내용을 설명하고, 『이런 방안들이 안되면 IMF에 가는 가능성도 검토되어야 합니다』고 말했다. 부총리로부터 대통령에게 IMF 문제가 정책적으로 보고된 최초의 순간이었다(그 이틀 전에 김인호 수석이 IMF 문제가 검토 중이라는 보고는 대통령에게 했다). 강부총리는 부실채권 정리와 일부 종금사의 정리를 포함하는 종합적인 금융시장 안정대책을 주로 강조했다. 그는 또 환율대책과 관련해서 우리나라 금융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IMF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수적이므로 IMF와 정식으로 접촉을 시작하겠다고 보고했다.
  
   이 자리에서 강부총리는 『기아 문제도 처리해보니까, 국내적으로는 잘 처리한 것 같은데 국제적으로는 잘 안 먹혀 들어갑니다』라는 말도 했고, 『앞으로의 정치 일정을 감안했을 때 IMF로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는 취지의 이야기도 했다. 대통령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저 『알았다』는 식으로 강부총리의 보고를 듣고, 별다른 「말씀」이나 지시사항은 없었다. 강부총리는 대통령의 태도를 보고 「아마도 여러 경로를 통해 IMF로 가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듣고 계신 것 같다」고 느꼈다. 한편으로는 김영삼 대통령이 IMF로 간 뒤에 겪게 될 어려움과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었다. 보고를 끝낸 강경식, 김인호 두 사람은 대통령 집무실을 나왔다. 통상 부총리가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나면 곧바로 청와대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 옆 대기실에서 보고에 배석했던 경제수석과 차를 한 잔 마시면서 그날의 보고결과를 정리해보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점검하는 것이 통례였다.
  
   두 사람은 「좌우간 IMF로 가는 것이 완전히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캉드쉬 IMF 총재를 빨리 만나서 협의해야겠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문제는 어디서 만나야 되는가하는 것이었다. 부총리와 캉드쉬가 만난다는 것이 알려지면 외환시장 등 여러 부문에 심각한 파장을 부를 수 있어 방법이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직접 나갔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당장 또 언론에서 알테고 그렇다고 캉드쉬를 불러오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눈에 안 뜨이게 불러오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어떻게 해야 되나, 군용기라도 타고 나갈까』 두 사람 사이에서는 이런 이야기까지 오갔다. 두 사람은 그때 동남아에 있던 캉드쉬와 빠른 시일 내에 그것도 비밀리에 접촉할 방법을 논의하고 헤어졌다.
  
   대통령-韓銀 총재 통화
  
   10일 밤 9시30분쯤(李經植 총재의 기억) 한국은행 이경식 총재의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집에 있을 때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드는 이(李)총재는, 이날 퇴근 후 최근의 경제위기에서 오는 압박감을 풀기 위해 스카치 양주를 한 두 잔 마시고 막 잠에 들려는 찰라였다. 전화는 이(李)총재의 부인이 받았다. 전화를 받은 후 부인은 황급히 이 총재를 깨웠다. 『「어른」께서 전화하셨어요』 이총재는 1993년 12월 경제 부총리직에서 그만두고 나서는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전화를 받은 것이 두 번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한 번은 다른 자리를 제의할 때 대통령이 건 전화였고, 다른 한 번은 한은 총재직을 제의할 때 준 전화였다. 대통령은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이총재, 「경제」가 이래 가지고 되는 거야?』
  
   李총재는 무너지는 외환시장의 일선에 선 입장에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다그치듯 물어온 대통령의 전화에 李총재는 다소 격앙된 어조로 대답했다. 『각하 이래 가지고는 큰일납니다』 『응?』 대통령의 놀란 듯한 목소리가 전화기 저편에서 울렸다. 그러나 李총재는 당시 『「경제」가 이래 가지고 되는 거야』로 시작된 대통령의 물음에서 위기의 핵심인 외환보유고의 심각성보다는 주식시장 등 경제 전반에 대해 대통령이 걱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 李총재가 말했다. 『각하 이래 가지고는 큰일납니다. 국가부도 납니다. 외환이 바닥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에하노(어떻게 하나)? 얼마나 버틸 수 있노?』 『잘해야 한달 정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어떻게 하노?』 『IMF에 가야지요』 『응?』 이총재는 계속 말을 이었다. 『IMF에서 돈 꾸는 것 사실 그리 대단한 일 아니지 않습니까. 제일은행이 다른 은행에서 돈이 잠시 부족해 돈 꾸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면 가면 될 것이지 왜 안가노?』
  
   『내가 가는 것을 결정하는 결정권자(부총리를 의미)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내일 김인호 수석 불러서 「외환 사정이 나쁘다는데 어떻게 할래」하고 강하게 말씀하십시오』 『알았다』이경식 총재는 재경원이 다른 대안을 검토하느라 시간을 잡아먹고 있다고 판단하고, 하루빨리 IMF 구제금융 쪽으로 상황을 몰아가야 한다는 절박감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이 통화내용이다. 이경식 총재와의 전화를 통해서 김영삼 대통령이 외환위기의 실상을 처음 알았다는 식으로 보도한 언론사도 있지만 이미 밝혀진 대로 대통령-이경식 통화는 김인호, 강경식 두 사람이 대통령에게 IMF건을 보고한 뒤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경식 총재의 느낌이 말해주듯 대통령은 외환위기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증권시장 같은 정치적이고 대중적인 경제 문제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거의 같은 시각, 강부총리도 모스크바에 가 있던 피셔 IMF 수석 부총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피셔는 단도직입적으로 『동남아를 순방 중인 캉드쉬 총재를 만나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IMF가 한국의 사정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강부총리는 다른 방안들을 검토하고 있었기 때문에 확답을 피한 채 피셔가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에 다시 전화를 하겠노라고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날 달러 환율이 처음으로 1000원대를 돌파했다는 기사가 신문 1면의 머릿기사로 실렸다. 이들 기사는 그러나 「환율앙등이 미치는 영향, 환율 어디까지 오를까」정도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문제는 환율이 아니라 바닥 나고 있던 외환보유고였다.
  
   11월11일 대통령의 채근
  
   <11월11일(화), 외환보유고 279.3억 달러. 종합주가지수 522.1>
   11일 점심 때 김인호 경제수석은 대통령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대통령과 수석간에는 직통전화가 있어 수시로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전화를 받게 되어 있다. 『홍재형(洪在馨) 전 부총리가 전화를 해와서 IMF에 가야 한다고 하던데 그 IMF 문제 어떻게 되고 있노?』 김수석은 그 동안의 경과를 다시 보고했다. 『어제 부총리가 보고한 것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어제 보고 드린 대로 부총리, 한은 총재 등과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습니다. IMF로 가는 문제는 단순히 경제 문제에서 그칠 수가 없으며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안이므로 부총리의 판단을 기다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총리가 여러 가지를 감안해서 결정한 후 건의하면 이를 받아 각하께서 결정하는 모습을 취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 이후에도 김수석은 『IMF 문제가 어떻게 되어 가냐』는 대통령의 채근을 몇 번 받았다.
  
   김인호 수석은 김대통령이 IMF로 가는 문제에 대해서 그 정치적 파장을 좀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가졌다고 한다 경제정책을 책임진 입장에서는 IMF로 가기 전에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보아야 하는데 외부인사들은 다른 입장에서 빨리 가야 한다고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는 있을 것이고 이런 건의에 대해서 대통령은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여러 가지를 고민하느라 김수석은 이날밤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이날 저녁에 발행된 12일자 조간의 머릿기사는 부실은행과 종금사에 대해서 정부가 지원하기로 했다는 것,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이 아들 김현철(金賢哲) 인맥을 동원하여 이인제(李仁濟) 후보의 국민신당을 지원하고 있다는 신한국당과 국민회의의 공세와 관련된 기사였다. 언론과 정치권은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는 외환시장과 덮쳐오는 대란(大亂)을 아직은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김영삼 대통령도 외환위기보다는 자신을 연루시킨 두 당의 정치공세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1월12일: 캉드쉬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
  
   <11월12일(수), 외환보유고 2백67억 달러, 종합주가지수 5백17.5>
   김인호 수석은 12일 새벽 姜부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의 어제 이야기를 자세히 전달했다. 『대통령께서 이런 요지의 말씀을 하시는데 홍재형 전 부총리 등 여러 채널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IMF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참고하시지요.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인호 수석이 강부총리와 새벽 통화를 하고 출근한 직후인 아침 8시 반 청와대. 통상적인 보고를 하러 들어간 김수석은 다시 대통령으로부터 『IMF건은 어떻게 되어 가는가』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대답은 이전과 같을 수밖에 없었다. 김수석은 그 이후로 매일 한 번 정도 『IMF건은 어떻게 되고 있나』하는 대통령의 채근을 받았다. 김대통령은 한 번 독촉을 시작하면 결론을 낼 때까지 줄곧 하는 식이다.
  
   김수석은 『빨리 결론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기대했던 일본의 협조는 어렵다는 소식이었고 다른 좋은 뉴스도 없었다. 오후4시쯤 다른 일정을 취소한 김수석은 여의도에서 강부총리를 만났다. 두 사람은 캉드쉬를 어떻게 비밀로 만나는 것이 좋을지 논의하고, 금융안정종합대책, 금융개혁법안 처리를 조속히 마무리하기 위한 방안을 협의한 후 헤어졌다. 경제수석실의 윤진식 비서관은 이 날 김대통령을 단독으로 만나 IMF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직보(直報)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 말을 들은 김인호씨는 『IMF건은 아직 최종결정이 내려지지 않아서 귀하에게 이야기를 못한 것인지 대강은 짐작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특히 재경원이 ABS안을 심층적으로 검토하도록 한 것은 그것이 안되면 IMF로 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는데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는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윤씨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고 답하더란 것이다.
  
  
   IMF 사태 10년 기념 실록 연재(3)
   -강을 건너면서 말을 바꾼 김영삼. 姜慶植 부총리와 金仁浩 수석 경질.
  
   11월13일: 다른 대안(代案)에의 미련
  
   <11월13일(목), 외환보유고 264.7억 달러. 종합주가지수 519.5>
   김인호 수석은 7일의 외환관리 비밀회의 후 일주일도 안돼 끝없이 빠져나가는 외환보유고와 폭락만 하고 있는 증시(證市)상황을 점검하면서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무너지는 것은 비단 외환보유고뿐만이 아니었다. IMF로 가지 않고 이 상황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대안으로 기대를 걸고 있던 것들도 하나씩 나가떨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즈음 기대했던 일본으로부터도 사실상 「안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강만수(姜萬洙) 재경원 차관의 증언. 『홍콩주가의 대 폭락 사태로 일본은행이 자금을 회수해가기 시작한 것이 큰 일이었다. 일본도 사정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9월 말 일본계 은행들이 상반기 결산을 위해서 회수해간 자금들은 결산이 끝났는데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한국은행에서 IMF 자금을 끌어쓰자는 이야기가 나올 때만 해도 우리가 언제가 끌어쓸 수 있는 55억 달러의 SDR(Speical Drawing Rights: IMF의 특별인출권)을 쓰자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가 나온 것도 11월7일이었다. 정부는 당시 일본 중앙은행으로부터 100억 달러 규모의 국가간 보조금융, 즉 백업 퍼실리티(BackUp Facility)와 국제금융기관으로부터의 협조융자 등 100∼200억 달러를 끌어들이려고 했다. 이 두 가지만 되면 IMF에 안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처음에는 될 것 같았으나 일본과의 협조는 될 듯 말 듯하다 안됐다. 일본도 내부사정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관계자의 증언. 『정부는 10월 말 가용보유고 204억 달러에, 일본 중앙은행과의 스왑(Swap: 백업 퍼실리티와 비슷한 개념으로 나라간의 보조 금융) 100억 달러, 컨소시엄 론(Consortium Loan) 100억 달러, IMF에서 빌려오는 돈 55억 달러가 성사될 경우 모두 460억 달러의 외환을 보유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외환보유고 확충에 총력을 기울였다. 반면 윤진식 비서관 등 일부에서는 「컨소시엄 론은 안전하지 못하다 확실하게 하려면 IMF에 가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당시엔 IMF에서 빌려오는 돈은 우리가 빌리려고 하는 돈 중에서 일부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IMF에 완전히 묶이지 않는 방법을 먼저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13일 시점에서 외환보유고를 계속 방어할 수 있는 힘은 우리 정부 손에 남아 있지 않았다. 정책팀에서는 「IMF로 가서 많은 외환은 확보해 놓으면, 국제신인도가 회복되어 외환이 빠져나가는 일은 없겠지」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 시점에서 왜 경제팀이 국민들과 정치권에 실상을 제대로 알려 협조를 구하지 않았나 하는 의문에 제기된다. 그들은 IMF로 갈 수밖에 없다는 상황이 밖으로 알려지면 외환시장의 혼란과 주식시장의 폭락은 불을 보듯 뻔한 상태이므로 비밀리에 IMF와의 협의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왜 이 중대한 문제를 경제팀의 수준에서 붙들고 있었던가. 자력(自力)으로는 풀기 어려운 수학문제가 있는데 왜 선배와 선생님을 동원하지 않았나. 즉, 대통령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리고 정치권에 협조를 당부하여 경제팀만이 아니라 정부와 국가의 힘을 총동원하는 방법을 없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당시 경제팀의 곤혹스러운 반응을 우리가 해석한다면 이러하다. 『대통령은 외환위기를 비롯하여 경제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취약한 분이고 정치권은 대통령 선거에 빠져들어 국익 차원의 판단이 마비된 상태였다.』
  
   13일 점심: 이총재-김수석 협의
  
   13일 오전 김인호 경제수석은 비서를 통해서 금융통화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던 이경식 한은 총재와 점심을 하자고 연락했다. 중요한 일이니 웬만한 다른 약속은 취소하고 식사를 하면서 논의하자는 것이 김수석의 제안이었다. 김수석은 저녁에 부총리와 대책회의를 하기로 약속을 해 놓았으니 사전에 한은 측과 조율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점심식사 자리의 대화는 무거웠다.
  
   김수석: 『상황을 어떻게 봅니까』
   이총재: 『아주 힘든 상황입니다. 일주일 전(7일)보다 더욱 어렵습니다』
   김수석: 『IMF로 가는 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총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김수석: 『다른 대안은 없습니까. 재경원의 대안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이총재: 『재경원 쪽에서는 자꾸 외환사정을 모르고 그러는데 백업 퍼실리티나 각국 신디케이트 론을 추진하려면 몇 달씩 걸리는데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으며, 다른 안들도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외환보유고와 외환출입을 매일 체크하는 우리(한은) 입장에서는, 외환보유고의 이상(異常)적인 감소가 너무 가파르니까 더 긴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이때 김수석은 홍재형 전 부총리가 자신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라는 대통령의 말을 떠올렸다. 김수석은 이총재에게 넌지시 물었다.
   김수석: 『대통령께서 IMF에 대해 홍재형 부총리의 건의 이야기를 하시던데, 혹시 이총재께서는 무슨 말씀을 드린 것이 있습니까』
   이총재: 『아, 대통령께서 전화로 물어오셨기에 IMF로 가는 것이 불가피한 것 같다는 말씀은 드렸습니다』
   김수석은 『언제였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김수석은 이 자리에서는 주로 듣는 입장이었다. 이총재와 점심을 하고 돌아온 김수석은 이날 오후 대통령에게 다시 보고를 하러 들어갔다. 『오늘 밤 부총리, 한은 총재와 다같이 논의를 하고 아예 결론을 내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는 부총리께서 들어와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심야회의의 결론
  
   김수석은 대통령이 뭔가 부총리에게 대해서 불만스러운 점을 가진 것 같다고 느끼고 있던 터라, 『내일 보고에는 한은 이(李)총재도 같이 와서 보고토록 하겠습니다』고 덧붙였다. 이날 밤 6시30분 르네상스 호텔. 강경식 부총리, 김인호 경제수석과 한은 이경식 총재가 재경원과 한은의 관련참모들을 데리고 모였다. 이들은 저녁을 먹고 재경원의 유재한(柳在韓)과장(산업금융담당관)의 브리핑을 들었다. 재경원 쪽에서 검토해오던 정부가 보증하는 해외채권, 즉 ABS실행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내려졌다. 사실상 마지막 대안이 물 건너간 것이었다. 『ABS가 안되면 다른 대안들은 백업 퍼실리티로 다른 나라들로부터 빌어오는 수밖에 없는데 지금의 외환상황으로는 그것만으로도 부족할 것이 확실시된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재경원 실무진들도 동의했다. 실무진을 우선 보내고 난 뒤, 부총리 한은총재 김수석 윤실장만 남아 다음날 대통령에게 들고 갈 보고내용을 협의했다. 결론은 「IMF로 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금융개혁법안과 종합안정 대책 등 그 동안 추진해온 것들은 추진하되 동시에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로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다른 부분들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이거나 해석을 달리하고 있는 이들도, 이날의 회의 결과에 대해서는 모두가 「IMF 구제금융으로 가기로 합의했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논의가 마무리된 후 김수석은 『내일 아침의 보고 때는 두 분이 같이 들어오시는 게 좋겠습니다』고 말했다. 김수석은 강부총리가 어떻게 생각할 지 몰라, 대통령에게 이미 「두 사람」을 같이 들어오도록 하겠다고 보고한 사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이날 언론은 전경련이 경제난 타개를 위해 금융실명제 유보를 촉구했다는 내용과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급상승하고 있다는 여론조사를 중점적으로 보도했다. 한국 금융위기에의 대응방안으로 환율의 변동폭을 넓혀야 한다는 미국 하버드대학 제프리 삭스 교수의 글도 눈에 띄었다.
  
   11월 14일: 『문민경제는 끝났습니다』
  
   <11월14일(금), 외환보유고 264.4억 달러. 종합주가지수 520회복> 11월14일 아침 8시10분, 청와대 본관 대통령 집무실, 강경식 부총리, 이경식 한은 총재, 김용태(金瑢泰) 비서실장, 김인호 경제수석은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모였다. 원래 이 시간은 비서실장의 시간대이다. 사안이 중대하여 대통령이 출근하자마자 바로 비서실장을 따라 들어가 보고할 수 있도록 양해를 얻어두었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대부분 출근하기 전이라 보안에도 용이하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강부총리가 간단한 메모만을 놓고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보고 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다. 금융개혁법안의 처리와 종합안정대책의 수립 및 발표, 일본·미국·유럽에서 200억 달러 정도를 빌려오는 과제, 그리고 이것들이 안되면 「IMF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대통령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김대통령은 평소에도 경제관련 보고에 대해서는 별다른 질문이나 이견을 보인적이 없었다. 이날도 대통령의 반응은 『그대로 해』하는 식이었다. 강부총리는 틈틈이 그날 그날의 메모를 컴퓨터에 입력을 해 놓은 습관이 있는데, 이날의 메모는 「대통령의 결심이 확고했다」였다. 이경식 한은 총재도 대통령의 다른 반응은 기억에 없고 대통령이 『IMF로 가라』고 강하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수석의 기억도 유사하다. 이총재는 이날부터 IMF 협상이 타결되던 시점까지 열흘정도 대통령이 이틀에 한 번 꼴로 자신의 집 아니면 사무실로 전화를 해 상황을 물었다고 했다. 평소 직설적인 표현을 즐겨 쓰는 강부총리는 이날 자신의 의견을 사족처럼 덧붙였다고 한다.
  
   『IMF로 가는 문제로까지 발전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것을 하면 아마도 언론은 「문민경제의 IMF에 의한 마감」으로 보도할 것입니다. 지금 대통령 선거를 한달 앞두고 있는데 특히 정치권은 그렇게 평가할 것입니다. 그 동안 각하가 아무리 잘한 것이 있더라도 문민경제는 IMF 구제금융으로 끝났다고 평가할 것입니다』 이 같은 강부총리의 이야기에 대통령의 반응은 『IMF로 가라』는 것이 전부였다고 참석자들은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김영삼 대통령이 『IMF로 가야 합니다』라는 아래로부터의 건의에 대해서 『꼭 내 임기 중에 가야 하느냐』고 제동을 걸었다는 항간(巷間)의 설은 부정된다.
  
   대통령인가, 구경꾼인가
  
   김영삼 대통령은 IMF에 간다는 의미와 그 후유증에 대해서 예상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런 결심을 했을까. 경제팀은 대통령에게 그런 정보를 충분히 전달하여 판단에 도움이 되도록 했을까. 경제부총리 중심제가 아닌 대통령 중심제 아래에서 이런 큰 문제에 대해서 대통령이 아무런 질문이나 이견을 제시하지 않고 한 마디로 간단하게 재가를 하는 것을 상식적으로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을까. IMF로 가는 문제에 대해서 대통령과 참모, 그리고 장관들 사이에서 아무런 토론이 없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대통령과 경제팀의 대화는 보고와 접수로 끝나고 있다. 아무런 지적(知的)인 충돌과 토론이 없다. 대통령의 고뇌도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나라의 경제가 내려앉고 있는 바로 그 상황의 중심에 있어야 할 대통령이 구경꾼 역할밖에 못하고 있었다는 그 적나라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이번 사태의 핵심적인 진실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 영향이 한 세대나 갈지도 모르는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대통령은 실종상태였다는 얘기이다.
  
   이날 보고자들은 한편으로는 혹시 마지막 순간에 김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접근해서 반대하면 큰일인데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이 『IMF로 가라』고 말해 그만큼 부담을 던 기분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보고를 마치고 나온 다음에도 IMF 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대통령께서 정말 알고 있는 건가라는 의문이 남을 정도였지만. 이날 대통령에게 보고 후 바로 강부총리는 방콕에 와 있던 캉드쉬와 접촉할 것을 김기환(金基桓) 대사에게 지시했다. 김기환 대사도 방콕에 머물고 있었다. 김대사는 비밀리에 캉드쉬를 만난 자리에서 금융시장 안정책과 금융개혁법의 추진상황을 상세히 설명한 뒤 유동성 부족의 해소를 위한 도움을 요청했다. 김대사는 동시에 IMF와 구제금융 협의를 시작하겠다는 정부의 뜻을 전달했다. 귀국 길에 비밀리에 서울에 들려줄 것도 부탁했다.
  
   이날 언론은 여전히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사정과 다소 동떨어진 편집을 하고 있었다. 대학 특차 선발 등 1998학년도 대학 모집요강 확정 기사, 금융개혁법안을 둘러싸고 재경위에서 여당 측 의원의 자격 시비가 일어나 표결을 하지 못했다는 내용, 대통령 후보자들의 TV토론, 종금업계의 부실관련 기사 등등. 이날 한국은행, 증권-보험감독원 직원들은 금융개혁법안의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서 국회에서 농성을 벌였다. 세 명의 전직 한은 총재들도 이들 편을 드는 기자회견을 했다. 주요 쟁점은 금융감독원을 재경원 장관 아래에 두는 데 대한 찬반이었다. 강경식 의원은 요사이 『이 금융개혁안은 재경원의 기득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었고 내부의 반발을 누르고 입안한 것이었는데도 이를 언론이 한은과 재경원 사이의 밥그릇싸움으로 몰고 감으로써 한은 노조와 정부 기관을 동격으로 대접했다. 이런 것이 정부의 사태해결능력을 빼는 일이었다』로 말하고 있다.
  
   11월15일: 300억 달러를 빌리자
  
   <11월15일(토), 외환보유고 264.3억 달러로 3일째 안정, 종합주가 519.4선 유지>
   외환 위기상황에 대한 경제팀의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 지 1주일이 지난 15일 외환시장과 증권시장은 오랜만에 안정세를 보였다. 물론 크고 작은 공방이 겹친 그런 불안 속의 답보상태였다. 이날 밤 9시 인터컨티넨탈호텔. 강(姜)부총리와 김(金)경제수석, 이실장, 엄낙용 제2차관보 등 참모를 대동하고 비밀전략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김기환 대사가 처음으로 배석했다. 보안 유지를 위해 참석 인원을 최소한으로 제한한 회의였다. 윤진식 비서관은 이날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중요 회의들이 새벽 아니면 토요일, 일요일 오후에 많이 이루어진 것은 참석자들이 맡은 일들을 하고 나서 비밀리에 모여 회의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날 회의에서는 먼저 「IMF 캉드쉬 총재 서울 비밀 입국 작전」이 논의되었다.
  
   공항과 호텔에서의 보안 유지를 위해 캉드쉬 총재에게 평상복을 입게 하고 공항에선 귀빈실이나 의전실 대신 통상 출입구를 이용할 것, 김우석(金宇錫) 국제금융증권 심의관이 혼자 공항에 나가 그를 모셔오는 방안이 구체적으로 논의됐다. 그가 한국을 방문했다는 사실 자체가 국제적인 파장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에 보안은 필수적이었다. 이날 회의의 초점은 IMF에 요구할 구제금융의 규모. 며칠 전까지만 해도 외국에서 200억 달러 정도를 빌려온다는 안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IMF로부터 빌려오는 돈은 50억 달러 수준이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날은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1주일 사이에 외환보유고는 20억 달러 이상 빠져나갔고 가용 외환보유고도 7일 수준보다 40억 달러 정도 줄어든 상태였다. 이 속도면 3∼4주도 넘기지 못하고 국가부도 사태를 맞아야 할 것이다.
  
   IMF 협상에 3개월 정도가 소요되는 점을 감안하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김인호 수석은 200억 달러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경식 총재가 『300억 달러로 하자』고 제안했다. 참석자들은 좀 많지 않느냐는 반응이었다. 이총재는 『이왕 하는 김에 넉넉하게 해놓자. 일종의 크레디트 라인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IMF로 가면 바로 상환만기연장 등 상업베이스의 금융이 재개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외화를 많이 빌려놓을수록 시장은 빨리 안정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 IMF 구제금융액이나 은행의 크레이트 라인(대출한도)은 「마이너스 통장」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하면 설사 과다한 카드 사용대금으로 월급이 들어오는 날보다 앞서 통장이 마이너스 부도처리하지 않고 대신 카드회사에 지급해준다. 300억 달러를 빌려준다는 것은 IMF가 이 정도를 마이너스 통장처럼 관리해 주겠다는 이야기가 된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듯이 한꺼번에 300억 달러의 돈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캉드쉬 IMF 총재, 나이스 아태 담당관, 그리고 보좌관이 들어오기로 했기 때문에 한국 측 참석범위도 부총리, 한은 총재, 엄낙용 차관보와 담당국장으로 했다. IMF 구제금융신청 계획이 구체적으로 진행 중이던 이날 신문은 재경원과 한은이 금융개혁법 처리를 둘러싸고 「경제불황을 유발시킨 주범끼리」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다고 크게 보도했다.
  
   11월16일: 손가락 세 개
  
   일요일인 16일은 기자들의 추적을 걱정하지 않고 움직이기 좋은 시간이었다. 이날 저녁 6시30분 인터컨티넨탈호텔. 캉드쉬는 비밀리에 서울 잠입에 성공했다. 캉드쉬 일행 3명과 강(姜)부총리, 이(李)한은 총재 등 우리측 관계자와의 협상이 시작됐다. 김인호 수석은 나중에 결과를 통고 받기로 하고 서울시내 자택에서 대기 중이었다. 캉드쉬의 첫 질문은 외환보유고의 실태였다. 이경식 한은 총재가 설명했다. 이때는 이미 단기외채의 만기연장률(롤 오버)이 급격히 떨어져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외환보유고는 260억 달러를 약간 상회하는 수준. 그나마 국내은행이 외국지점에 맡겨놓은 돈을 제외한 가용 외환보유고는 170억 달러 남짓했다. 「선물환대금」까지 이 외환보유고에서 제외한다면 더 내려가게 되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IMF 측과 한국 측은 바로 IMF건의 추진 일정과 절차에 대한 논의에 들어갔다.
  
   이 자리에 있었던 이경식 총재의 증언. 『당시 외환보유고에 대한 외신들의 의심 등 여러 가지 억측이 있었으므로 우리는 자료를 공개했습니다. IMF측도 우리의 「억울하면서도 다급한」형편이 어떤지 바로 이해했습니다. 나는 회의를 시작하자마자 다짜고짜 「IMF 측에서 돈을 내놓아야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뭐 앞 뒤 생각할 틈도 없이 떠오르는 단어대로 「당신 호주머니에서 돈 좀 빌려야겠다(I need the money from your pocket)」이라는 엉터리 영어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습니다. 상황이 그만큼 급했습니다.』 설명을 듣고난 캉드쉬는 『그럼 대체 얼마나 필요하느냐』고 물어왔다. 이총재는 대답대신 급한 김에 손가락 3개를 펴서 『이만큼 필요하다』고 답했다. 다시 캉드쉬가 물었다. 『30억 달러요?』 이경식 총재가 답했다. 『아니오. 300억 달러요.』 그렇게 해서 지원금액은 15일 한국 측 대책 회의에서 결정한 대로 300억 달러로 확정했다. 한국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캉드쉬가 먼저 물어왔다. 『그럼 대통령 선거 전(前)에라도 할 겁니까』 이경식 총재는 어떤 영어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여유 있게 할 형편은 아니다』라고 다급함을 설명했다.
  
   대통령 후보들의 전원 동의 문제
  
   「대통령 선거」라는 단어가 나오면서 잘 풀리는 것 같던 논의가 조금씩 엇갈리기 시작했다. 캉드쉬는 돌연 『그렇다면 「대통령 당선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내걸었다. 대선 전(大選 前)이라면 대통령 당선자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유력 대통령 후보 전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뜻이 된다. IMF 논의 자체를 비밀에 부쳐온 한국 측으로서는 정치적으로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강부총리는 『이 문제는 우리에게 맡겨달라』고 말했다. 한국 측은 금융개혁법의 국회 통과와 동시에 강도 높은 금융시장 안정대책을 발표하는 것은 물론이고 소신 있게 개혁을 주도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IMF측은 이 같은 한국 정부의 개혁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모양으로 일을 추진해 나간다는 데 동의했다. 이날 회의는 9시가 넘어 끝났다. 밤 10시 가까이, 시내 집에서 대기 중이던 김인호 수석은 강경식 부총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가 지금 국회로 가는 길인데 이동 중이라서 자세한 이야기는 못하겠다. 그러나 회담은 우호적으로 끝났다. 자세한 이야기는 엄차관보에게 전화해서 들어달라』는 요지였다. 김인호 수석은 바로 엄차관보에게 전화를 해서 『오늘 회담 결과를 새벽까지 정리해서 아침에 들고 와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일요일이었지만 재경위(財經委)와 예결위(豫決委)가 동시에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어 부총리는 국회에 매달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사안은 다음날 아침 김인호 수석이 대통령에게 보고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날에도 언론은 대통령 선거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특히 이회창(李會昌)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2위로 올라선 것이 머릿기사였다. 「부실 종금사 외환 업무 정지 등 금융 대책 주내 발표」도 크게 보도되었다.
  
   11월17일: 김영삼 대통령-『다행이다』
  
   <11월17일(월). 외환보유고 260억(가용 163억) 달러. 종합주가 497>
   11월 17일 아침 7시 재경원의 한 과장이 16일 밤 IMF 측과 나눈 비밀 협의 사항을 정리한 보고서를 들고 김인호 경제수석실로 왔다. 김인호 수석은 대통령에게 그 내용을 보고했다. 이 자료는 IMF와의 협의와 관련된 유일한 정부 문건일 것이다. 경제팀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문건을 만들지 않고 IMF와 접촉했기 때문이다. 「캉드쉬 IMF 총재와의 면담결과」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취지로 되어 있다.
  
   <한국경제가 전반적으로 건실함에도 불구하고 외환위기를 맞은 것과 관련하여 IMF는 앞으로 한국 외환시장의 안정을 위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특히 IMF는 한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금융시장과 증권시장의 개방과 개혁이 매우 중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한국정부의 개혁의지를 계속 지원할 것이다. 그 협력 방법으로 IMF의 금융전문가를 다음주 중 한국에 비밀리에 파견, 한국의 외환보유 사정을 살펴보고 구체적인 지원책을 강구할 것이며, 이 같은 IMF와의 협의진행과 관련된 논의에 대한 발표시점은 한국정부의 판단에 맡긴다. 또 IMF는 이 같은 IMF의 지원에는 대통령 당선자의 확고한 지지가 필수적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들은 지원의 규모가 현재 혼란 속에 있는 시장을 진정시킬 만큼의 큰 규모이어야 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한은 총재는 300억 달러의 지원선을 제시했다. 한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금융개혁법안의 통과도 IMF의 지원에 있어 필수적 요소이다. IMF는 금주 중 발표할 종합금융대책에 대해서도 절대적 지지를 약속한다. 이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서는 중요 국과의 협력도 긴요하다는 점에 양측은 의견을 같이했다. 일본은 최대한 적극 지원할 것으로 사료되나, 미국의 경우 직접 지원은 재정상 힘들고 IMF를 통한 지원은 아끼지 않을 것이다>
  
   이런 보고를 듣고서 김영삼 대통령은 『잘됐다. 다행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김인호 수석은 회담 진행과정에 대한 더 상세한 보고를 위해서 『강부총리로 하여금 다시 보고토록 하겠다』고 말하고 물러 나왔다. 그러나 국회일정에 매여 있던 강부총리와 대통령의 면담시간을 서로 맞추기가 힘들었다. 김인호 수석은 다시 강부총리와 통화를 했다.
  
   강부총리: 『김수석, 보고 잘 됐습니까?』
   김수석: 『보내주신 자료와 그 동안 말씀해주신 것은 다 보고했습니다.』
   강부총리: 『그러면 됐지요. 따로 보고할 것 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이날 대통령과 부총리의 면담은 이뤄지지 않았다. 캉드쉬와의 협상 과정에서 중요하게 부각된 개념이 몇 개 있었다. 그중 하나는 가용외환보유고이고 다른 하나는 금융개혁법안의 통과여부였다.
  
   가용 외환보유고의 정체
  
   11월7일 보고서의 도표에 나와 있듯이 가용 외환 보유고라는 개념은 평상시에는 별로 소용이 없는 개념이다. 현금 보유가 많은 상태라면 카드 사용대금이 많더라도 통장입금액에 대해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선물환(先物換)이란 먼저 외환을 거래하고 나중에 결제하는 외상이라 보면 이해하기 쉽다. 문제는 이 선물환의 규모보다 훨씬 큰 우리 은행들의 해외점포 예치금이었다. 이것은 각 은행의 해외지점이 빚을 갚거나 현재 계정상 부도를 내지 않기 위해, 해외에 예치해야 하는 외환이다. 이것이 한국의 해외신인도가 추락하면서 급증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해외에 잡혀 있는 돈이었다. 해외에서 누군가가 돈을 찾아가면 그만큼은 국내은행이 해외지점에 송금을 해야하고, 그만큼의 외환은 국내에서 외환방어를 위해서는 「움직일 수 없는」, 즉 「있어도 쓸 수 없는 외환」으로 변해버리는 것이었다.
  
   결국 이 선물환과 해외 예치금을 제외한 금액이 가용 외환보유고가 되는 셈이다. 입수자료에 나타난 도표에서 보듯, 1996년 말의 외환보유고는 332억 달러였으며 해외점포예치금이 35억 달러로 가용 외환보유고는 294억 달러였다. 외환위기가 진행 중이던 1997년 11월7일의 경우, 해외점포예치금이 76.9억 달러로 늘었다. 1996년 말과 비교한다면 외환보유고는 총액 기준으로 47억 달러가 적은 데다가 가용 외환보유고 기준으로는 146억 달러가 적은 것이었다. 이 자료에서 알 수 있듯이, 한은의 입장에서 외환보유 상황을 몰랐니 언제 알았느니 하는 논쟁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관계자들은 말하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렸고 대통령을 포함한 최고 의사결정자들이 어떻게 대응했느냐인 것이다. 이 가용외환보유고가 바닥나고 있는 11월 중순의 상황에서 IMF 협상팀의 입장은 다급했다. 그래도 그 뒤 12월 초보다는 여유가 있는 시점이었다.
  
   선거에 정신없는 국회
  
   또 다른 문제는 IMF측과 약속한 「금융개혁법안」의 처리였다. 11월17일이야말로 정치권과 경제팀의 마지막 실랑이가 계속된 하루였다. 캉드쉬에게 금융법안 처리를 약속하고 IMF 또한 지원의 전제조건처럼 강조한 이 사안에 대해 경제팀으로서는 화급하기가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진행되고 있던 IMF와의 비밀 협상까지 모조리 공개하여 정치권의 이해를 구할 수도 없다는 것이 당시의 상황판단이었다. 결국 강부총리 이하 경제팀은 각 당을 돌아다니면서 『제발 금융개혁법인을 처리해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큰 위기가 올지도 모릅니다』, 『내 자리를 걸겠다』고 사정을 했다. 강부총리가 한 야당을 방문한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하자 『부총리가 사임 의사를 비쳤다』는 기사로 되어 나오기도 했다. 당시 야당과 언론은 대체로 「금융개혁법안은 재경원과 한은의 밥그릇 싸움」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모든 정당이 대통령 선거에 대한 유불리(有不利)를 기준으로 하여 사안을 판단하고 있을 때였다. 처음부터 법안처리에 반대하던 국민회의는 물론 한나라당 조차 마지막에는 소극적 자세로 돌았다. 한은(韓銀) 노조가 맹렬히 반대하고 있는 법안에 찬성할 경우 득표율 1%의 싸움으로 치닫고 있던 막판 대통령 선거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했던 것이다. 강부총리는 여야의 중진의원들을 직접 찾아가 호소했지만 아무도 총대를 메지 않으려고 했다. 한보사건과 김현철씨 구속 이후 정치적으로 무력해진 김영삼 대통령도 이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다. 국가 이익이란 대전제를 앞세워 정치권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에 뛰어든 국회 의원들이 거의 국회를 비우고 있던 당시, 야당 국회의원들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면 신한국당도 표를 의식하여 단독처리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17일 정부는 고갈되는 외환보유고 때문에 사실상 환율 방어를 포기했다. 관계자들은 IMF와 비밀 협의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외환을 쓰는 것은 부질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IMF 구제금융 계획을 알 리가 없는 외환시장은 이날부터 환율이 연일 상한가까지 폭등하는 마비현상을 빚기 시작했다. 주가는 외국인들의 투매가 이어지며 500선이 붕괴됐다. 이날 저녁에 나온 18일자 가판 신문은 대통령 후보들의 합동토론회 기사로 채워져 있었다. 「한국의 IMF 구제금융 신청 가능성」을 보도하던 외신은 『IMF가 한국에 지원을 제의했으나 정부에선 공식적으로 거절했다』고 전하고 있었다.
  
   11월18일: 마지막 기대는 무너지고
  
   <11월18일(화), 외환보유고 252억(가용 158억)달러, 환율 1012.8원, 종합주가 494로 하락>
   11월18일 국회에서는 17일에 이어 금융개혁법안에 대한 정치권의 반대를 뚫고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강경식 경제팀의 마지막 시도가 계속됐다. 김인호 수석은 이날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만나 IMF 구제금융 지원요청여부와 관련 『현재 정부와 IMF 사이에서 구체적으로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것은 전혀 없다』고 부인했다. 이 같은 공개적 부인(否認)이라는 연막 뒤에서 IMF 준비작업은 진행되고 있었다. 강부총리는 18일 오후 국회일정 중 시간을 내서 일본 미츠즈카(三塚博) 대장성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부총리는 미츠즈카에게 캉드쉬와의 접촉 내용을 통보하고 일본의 협조를 부탁했다. 두 사람은 자세한 내용의 협의를 실무선에 맡기기로 하고 나머지는 12월초 말레이시아에서 있을 아시아 재무장관 모임에서 같이 만나 더 협의하기로 했다.
  
   미츠즈카는 그 전부터 말레이시아 회의 참석 여부에 관해 보조를 같이 하자고 제안해왔기 때문에 이 때 같이 참석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강부총리는, 개별 지원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명한 일본이었지만 IMF를 통한 자금 지원에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왔기에 이를 못박아 두자는 의도로 전화통화를 한 것이었다. 미국의 루빈 재무장관에게도 19일 오전 9시30분에 전화를 하기로 미리 연락을 취해두었다. 강부총리 팀이 전력(全力)을 쏟았던 금융개혁법안의 국회통과는 이날 끝장이 났다. 국회 재경위(財經委)는 이날 오전 전체회의를 속개하고 금융개혁법안에 대해 최종적으로 논의하려했으나 법안을 다루지도 못한 채 회의를 끝냈다. 법안통과에 찬성입장을 보이던 신한국당조차 『자칫 노동법 사태 같은 일이 생기면 선거는 끝난다』고 입장을 바꾸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도 『신한국당에서 우리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데 말려들면 안된다』며 틀었다. 경제팀으로서는 대통령 재가까지 받은 일괄 대책 중 날개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환율 변동폭 확대
  
   강부총리를 비롯한 경제팀은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여의도 기술신용보증기금 사무실에서 19일 새벽까지 다음날에 발표할 금융안정대책을 손질했다. 김인호 경제수석은 조금 늦게 참석했다. 강경식 팀이 그 동안 수도 없이 국제사회를 향해서 큰 소리 쳤던 금융개혁법 통과가 수포로 돌아감으로써 김영삼 정부의 대외(對外)신인도가 급락(急落)할 것은 뻔한 상황이었다. 이제는 IMF 구제금융 지원 요청 사실과 금융안정대책의 발표를 한시도 미룰 수 없게 되었다. 여의도를 대책회의 장소로 이용한 것도 과천청사로 왔다 갔다 할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날 밤 회의에서 논의된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가 그 동안 유지해온 환율변동폭 제한(일명: 외환밴드)을 풀 것이냐 말 것이냐였다. 아예 이번 기회에 없애버리자는 의견이 나왔다. 재경원 측에서는 한번 환율 변동폭을 철폐해 버리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논란 끝에 일단 15%선으로 환율 변동폭을 크게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참석자들은 이 방안을 「외환시장에 대한 정면 돌파 안」이라고 불렀다. 15%이상 환율이 오른 적은 없기 때문에, 이 결정은 사실상 환율 변동폭 제한의 철폐를 의미했다.
  
   강(姜)경제팀에게 있어 IMF 구제금융 신청 안은 기본적으로 금융권 구조조정계획과 금융개혁법안을 뒷받침하는 성격의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금융개혁법안의 국회 처리가 끝나고 IMF에 가는 것을 발표하는 모양새가 좋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의 전제는 IMF 구제금융 지원요청과 「동시에」 환율변동폭 제한을 푼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외환보유고를 소비해가면서 외환시장에 개입하지 않고 IMF로부터의 지원금을 뒷심으로 잡고 『우리는 IMF로부터 충분한 외환보유고를 확보했다. 환율변동폭도 없앴으니 이젠 더 환율이 오를 것이라고 기대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메시지를 시장에 띄우기 위한 것이었다. 세계의 외환 딜러들이, 『IMF 지원으로 외환보유고가 충분해진 만큼 이제는 싸움을 붙어봐야 소용이 없다』고 판단토록 유도하려는 정책이었다.
  
   11월 들어 1일부터 18일까지 정부가 환율 방어에 사용한 액수는 약 50억 달러 수준이었다. 한보 때 외환 방어를 위해 사용한 40억 달러보다는 많지만, 가용 외환보유고가 아직은 158억 달러가 남아 있고 여기에 IMF 구제금융 300억 달러를 합치면 약 450억 달러가 넘는 외환보유의 효과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경제수뇌부의 상황 판단이었다. 이 심야회의에서는 「IMF의 구제금융을 받기로 했다」는 부분만은 보안상의 이유로 발표문 본문에는 넣지 않고 기자들의 질문에 부총리가 답변하는 형식이, 일반에게 주는 충격이 크다는 점도 고려됐다. 같은 이유에서 기자들 질문에 대한 예상 답변지도 만들지 않았다. 발표시간은 19일 오후 증시(證市) 폐장 직후로 잡았다.
  
   김인호, 사표를 맡겨놓고…
  
   이날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청와대를 나오기 전에 김인호 수석은 김용태(金瑢泰) 비서실장에게 사표를 맡겨놓았다. 경제가 안 좋을 때면 경제팀은 항상 사표를 품에 지니고 다닌다. 김수석은 국회에서 금융개혁 법안의 통과가 무산된 직후이고 다음날은 중요한 종합대책 발표도 있어 또 한 번 대통령의 신임을 확인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김인호 수석은 심야호의에서 만난 강부총리에게도 『저는 사표를 냈습니다』고 했다. 이미 두 사람은 10월29일 경제 종합 대책 보고시에도 경제 상황이 나빠서 대통령이 몹시 언짢아하는 것을 보고 사표를 낸 적이 있다. 김인호 수석은 대통령에게 『하느라고 했습니다만 죄송합니다. 사표를 실장에게 맡겨놓겠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사표는 「10월29일자」였다.
  
   강부총리도 이날 보고 후 『사표를 비서실장에게 맡겨 놓겠다』고 말하고, 김용태 실장에게 맡겼었다. 다만 경제팀장인 부총리가 예산국회 중 경질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사직일자(日字)만은 국회가 끝나는 「11월20일자」로 적었다. 이 두 장의 사표는 이틀만에 『힘내서 열심히 해보라』는 전언(傳言)과 함께 돌아왔었다. 언론은 이날 비로소 한국이 IMF 자금을 빌려야 할 위기에 처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금융위기의 실태 및 IMF 지원을 받는 경우와 받지 않는 경우의 득실을 따지는 특집도 대대적으로 다뤘다. 금융개혁관련 법안 통과가 무산됐다는 사실은 1면 국회기사 중 한 줄 정도의 언급에 그쳤다. 한국의 외환위기가 시작된 「블랙 먼데이」 11월3일부터 따지면 15일, 7일의 청와대 비밀회의로부터는 11일 만에 우리 언론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11월19일: 『분위기가 나빠서…』
  
   <11월19일(수), 외환보유고 248억(가용 142억) 달러. 환율 달러 당 1035.5원으로 사상 최고치 또 갱신. 종합주가 502.6>
   11월19일 아침 8시.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강부총리와 김수석은 전날 대통령께 보고하는 시간을 미리 잡아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예의 비서실장 시간을 또 빌릴 수밖에 없었다. 금융개혁법안은 무산되었지만 18일 밤에 짠 금융 및 외환시장 안정대책이 이날 IMF 구제금융 신청 사실과 함께 발표되면, 그래도 차선책(次善策)으로서 「선방(善防)」은 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었다. 실제로도 약 50억 달러의 시장개입 덕분으로 환율을 달러 당 1100원대 이하의 선에서 잡아 놓고 있던 때였다. 이 발표안을 보고하기 위해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간 강부총리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보통 때 같으면 집무실에 들어서면 일어서서 인사를 받던 대통령이 이날만은 앉아서 인사를 받는 것이었다. 김인호 수석은 이 상황에 대해 별다른 기억이 없다. 강부총리는 18일 밤 논의한 종합대책을 대통령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오늘 그 동안 준비했던 대로 금융기관 구조조정과 외환대책을 IMF에 가기로 한 것과 함께 동시에 발표합니다. 그러나 IMF에 가는 문제만은 예민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발표원안에는 넣지 않고 기자질문에 대한 답변형식으로 공식 발표하겠습니다』 대통령은 『좋다』고 말했다. 다시 강부총리의 보고가 이어졌다. 『어제 일본의 미츠즈카와도 통화했습니다. IMF로 간다는 것을 일본측에도 설명을 했습니다. IMF로 가더라도 결국 IMF에 지원금을 많이 내고 있는 일본이 가장 큰 전주(錢主)가 되어야 하니까 일본의 적극적 협조와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오늘 각하에게 보고하고는 바로 미국 재무장관 루빈과 통화를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루빈에게도 이런 상황을 설명하겠습니다. 12월 초에 말레이시아에서 있을 아시아 재무장관 모임에 IMF 총재와 관련국 재무장관들이 다 오기 때문에, 여기서도 이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하겠습니다』
  
   이렇게 보고하는 중인데 대통령이 알 듯 말 듯 『분위기가 좀 나빠서…』라는 말을 불쑥 꺼냈다. 김인호 수석은 그때 이미 어느 정도는 감을 잡고 있었다. 그 전날 사표를 제출했을 때도 여느 때 같으면 한 한마디쯤 있었을 김용태 비서실장이 아무말없이 사표를 받아 책상서랍 속에 넣었던 것이다. 김용태 비서실장은 그 동안 국회 일로 바빴고 고생했으니 약속 없는 수석들과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김수석에게 제의했다. 이들은 「고생하는 경제수석 위로연」으로 늦게까지 술을 마신 터였다. 김수석에게는 사실상의 송별연이었던 셈이다. 18일 밤 여의도 대책회의에 김수석이 늦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불쑥 던진 『분위기가 좀 나빠서…』라는 말은 경질의사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도, 강부총리도, 공식보고와 알 듯 말 듯 한 대화를 교환했을 뿐, 보고를 끝낸 두 사람은 자리를 물러나왔다.
  
   실종된 「IMF에 간다는 발표」
  
   집무실을 나온 뒤 대기실에서 김인호 수석이 물었다. 『아니, 사표 안내십니까』 姜부총리는 김수석에게 『사표는 여기 있으니 비서실장에게 전달해 주시오』라고 말했다. 마침 이때 김용태 비서실장이 들어왔다. 김수석은 김실장에게 『우리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실장은 김수석의 이야기를 듣고 『분위기상 사표가 수리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했다. 두 사람은 『아 그래요. 그러면 수리하시죠. 각하께 여쭤주시죠』라고 부탁했다. 김용태 비서실장은 『잠깐 기다리고 계시지요. 제가 각하께 여쭙겠습니다』라며 사표를 받아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대통령실에서 나온 김용태 실장은 『수리입니다』라고 통고했다. 姜부총리는 『아, 그럼 루빈에게 뭐라고 이야기해야 하지?』라는 반응을 보였다.
  
   IMF 지원을 위해 이날 오전으로 예약해 두었던 미국 루빈 재무장관과의 통화가 마음에 걸렸다. 김인호 수석은 『잘못하다가는 인사도 못하고 헤어지겠습니다. 들어가서 인사나 하지요』라며 姜부총리와 함께 다시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선 채로 『그 동안 잘 모시지 못해 죄송하다』며 작별인사를 했다. 대통령은 『수고했다. 그런데 아까도 말했지만 분위기도 안 좋고 해서…』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강을 건너는 중에 말을 바꾸어 타는 형국이 된 경제팀 경질과정에서 「IMF 구제금융 지원요청 발표」라는 중대사안이 공중에 떠버리는 희한한 사태가 발생한다.
  
   인수인계의 허점
  
   통상 한국 관료들의 풍토는 해임되면 전직 장관은 빨리 짐 싸서 떠나고, 신임 장관은 선임자가 떠난 빈방에 들어와 바로 일을 시작한다. 얼굴을 서로 못 보는 경우가 허다하니 인수인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IMF 구제금융과 관련된 대책을 밤새워 강구하고 관계기관 협의를 거쳐 확정한 다음 대통령 재가까지 받고 나서 「의외로」 해임된 상태였기에 두 사람은 당황했다. 두 사람은 『금융종합대책 이건 어떻게 하지요? 후임자는 누구입니까』라고 김용태 실장에게 물었다. 김용태 실장은 『후임자는 저도 모릅니다』라고 했다. 강부총리는 『그러면 오늘 발표는 하루 정도 연기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새로 들어오는 사람이 발표해야 하는데』라고 말하더니 전화로 재경원 장관 비서실에 『오늘 발표계획을 취소하라』고 지시했다. 기자들에게도 통보되었다.
  
   김인호씨와 강경식 의원은 짐을 쌌고, 신임 경제팀과는 어떤 형태의 직접적인 인수인계도 없었다. 그런데 취소되었던 금융종합대책 발표는 19일 오후 원래의 계획대로 증시(證市) 폐장 후인 5시30분쯤, 신임 임창렬(林昌烈) 부총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임창렬 부총리가 발표한 것은 전날 밤에 만든 금융안정대책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이날 아침 경제팀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안과 두 가지 점이 달랐다. 환율변동폭 제한이 당초 안이던 15%에서 10%로 축소된 점과, 기자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꼭」 넣기로 한 「IMF에 가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빠져버린 것이다. 환율 변동폭 확대 정책은, 그 이후의 전개처럼 환율을 더 올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환율상승을 잡기 위한 것이었다. IMF 구제금융이라는 든든한 뒷받침을 받기로 했다고 발표하면서, 환율변동폭 제한을 풀어 외환거래상 자유를 준다고 해야 시장(市場)이 「이제는 더 이상 안오르겠구나」하는 반응을 보이면서 제품에 안정이 되도록 유도하려는 그런 정책이었다.
  
   이날 임창렬 부총리의 발표에서는 IMF 구제금융 신청이라는 밑천은 빠져버렸으니 오히려 시장을 자극할 만한 것이었다. 임창렬 부총리는 기자의 질문에 『IMF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고 딱 잘라 말해버린 것이었다. IMF측에서도 의아하게 생각하여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어오기 시작했다. 임(林)부총리가 「IMF건」을 발표 땐 뺀 과정을 요약하면 이렇다. 임부총리는 취임 첫날인 이날 오후 2시 경제장관회의에 IMF안을 상정했다. 경제장관들 간에도 IMF건은 이견이 많아 40여 분간 격론이 벌어졌다. 찬반론이 팽팽해지자 임(林)부총리가 『잠시 유보해두자』고 제의, 이날 오후 5시30분 발표 후의 기자질문에 그런 대답을 한 것이었다. 임부총리는 이틀 후에 「IMF에 구제금융신청」을 발표하게 된다. 임부총리는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왜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일까. 대통령 재가가 난 사안임에도 임부총리는 왜 이 사안을 취임 첫날 경제장관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논의했을까. 이 과정에서 임부총리는 과연 어떤 정보를 갖고 있었으며 어떤 판단을 했던 것일까.
  
   이런 의문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임부총리는 2월12일 현재 『아무 할 말이 없다』는 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이 극비로 취급되어 서류상으로 남아 있지 않을 경우, 당사자간의 인수인계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한국 관료들의 풍토상 후임자는 이 극비사항을 파악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관례야 어떻든 이런 식의 허술한 직무 인수인계는 구멍가게를 사고 팔 때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도 당선자 시절에 노태우 대통령을 한 번도 만나지 않고서 정부를 인수받았다. 강경식 전 부총리나 김인호 전 수석 측에서는 임창렬 부총리가 IMF로 가기로 한 대통령과 경제팀의 결정을 몰랐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김인호씨는 확실한 시점은 기억에 없으나 청와대에서 개인적으로 임(林) 당시 통산부 장관에게 『IMF로 가기로 했다』고 귀띔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업무에 대한 인수인계 과정이 당사자 사이에서는 없었지만, 후임자는 하부 조직으로부터 당연히 업무보고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때 막후에서 진행 중이던 IMF 비밀협상 내용을 몰랐다는 것인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애매한 것이 있으면 후임자가 전임자에게 물어오는 것이 순서라는 것이다. 20일자 조간 신문들은 19일 오후 신임 임창렬 경제팀이 발표한 금융안정대책과 경제팀 경질, 이날 전국적으로 실시된 대학 수능시험이 전해보다 쉬웠다는 뉴스를 중요하게 다뤘다. 국가부도 위기상황에 한 발짝씩 다가서고 있던 나라로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사건들이 뒤죽박죽 엉켜버린 그런 하루였다.
  
   11월20일: 둑이 터지다
  
   <11월20일(목), 외환보유고 239.9억(가용 131억달러)로 급감. 환율 1139원 사상 최대치 갱신 3일째, 종합주가 488.4로 폭락>
   11월20일 오전 한은(韓銀) 총재실. 이경식 총재는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IMF 구제금융을 하루라도 빨리 받아야 한다고 주장해온 이경식 총재는 갑자기 이뤄진 19일 경제팀 수뇌 경질과, 이로 인한 「IMF 구제금융안 실종사건」으로 아찔하기까지 했다. 해외의 국내은행 차입금을 제외한 가용외환보유고는 이날 131억 달러로서 선물환 등 다른 요소를 감안할 때, 마지막 위험수위를 넘고 있었다. 게다가 환율폭등과 함께 외환보유고는 하루에 약10억 달러 이상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19일 하루만도 가용외화 기준 16억 달러가 빠져나갔고, 20일에도 11억 달러가 외환보유고에서 없어졌다. 시장은 「IMF 구제금융신청」이라는 「돈주머니」를 달지 않고 환율변동폭만 사실상 철폐한 19일의 정부발표에 대해, 정책의도와는 정반대로 천장까지 치고 올라오는 반응을 보였다. 하루 환율 인상폭이 100원에 육박했다. 시장은 『한국 정부가 외환보유고가 바닥나는 것을 감추기 위해 더 강공책으로 나오고 있다』고 해석한 것 같았다.
  
   이경식 총재는 이대로 라면 열흘전인 10일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약 한달 정도 버틸 수 있다』라고 한 것보다 더 빨리 국가부도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은 측과 금융 전문가들은 이 때 임창렬 부총리가 『외환사정을 잘 몰랐고 IMF에 가기로 한 것에 대해 제대로 밑으로부터 브리핑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하고 추측했다. 19일 이전에는 환율을 외환개입으로 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환율방어에 11월1일부터 이날까지 약 50억 달러가 소요되었다. 가용외환 보유고 기준, 하루평균 약 2∼3억 달러의 외환이 빠져나갔다. 이것이 환율변동폭 제한을 10%로 푼 탓으로 둑이 무너진 것처럼 외환의 한국 탈출이 가속화되었다. 특별한 상황변동이 없다면 가용 외환보유고 기준으로 이날로부터 12일∼13일 이내에 한국은 국가부도상황을 맞게 되어 버린 것이다.
  
   『각하에게 물어봐』
  
   이경식 총재는 속이 탔다. 이(李)총재로서는 대통령을 설득하고 강부총리와 IMF까지 끌어들여 일을 만들어 놓은 것인데 신임 경제팀의 예상치 못한 발표로 다 해놓은 밥에 이상한 것이 빠져버린 격이었다. 『이대로 라면 300억 달러를 IMF로부터 빌려와도 모자라는데…』 20일 오전 시장상황을 보고 받은 이경식 총재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뒤집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경식 총재는 윤진식 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영섭(金永燮) 신임 경제수석이 들어오거든 「이 결정(IMF건)에 대해서 각하에게 물어 보라」고 전하라』이총재는 전화상이므로 상황만 간단히 설명하고 『꼭 이것(IMF로 가는 것)만은 각하에게 여쭈어보고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경식 총재는 윤비서관 이외에도 다른 청와대의 모(某)인사에게 전화를 걸어 같은 뜻을 전했다.
  
   이경식 총재의 입장에서 임창렬 신임 부총리는 같이 일해본 적도 없고 잘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야기하기가 껄끄러웠다. 이총재는 이후 김영섭 신임 경제수석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직접 전달했다. 이외에도 이총재는 19일부터 20일에 걸쳐 관계 요로에 「수없이」전화를 걸어 신임 부총리의 발표 내용을 뒤집기 위한 로비를 벌였다. 이경식 총재는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자신이 윤비서관에게 이 같은 요지의 전화를 한 최초의 시점이 19일일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강-김 두 사람의 경질로 혹시 그 동안 비밀협상을 추진해온 IMF가 물 건너 간다면 큰 일이라고 생각해 19일에도 비슷한 뜻의 전화를 걸어「여러 곳에」했다는 것이다.
  
   20일 오후, 이총재가 우려한 대로 임창렬 부총리의 발표에 깜짝 놀라, IMF와 미국의 관계자들이 한은 총재실로 달려왔다. 오후3시 한은 총재실. 가이드너 미(美) 재무부 차관보와 트루먼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국제금융국장이 이경식 총재를 방문했다. 오후 4시에는 IMF의 수석부총재인 피셔가 방문했다. 이들의 관심사항은 간단했다. 『한국의 외환보유고 사정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고 싶다. 임(林)부총리가 10일 IMF의 지원을 안 받는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것인가. 전임 강부총리팀이 IMF와 그 동안 논의하던 것은 어떻게 되는가. 정말 IMF의 도움 없이 사태 해결이 가능한가』
  
   이총재는 우선 외환보유고와 관련, 『캉드쉬 총재와 논의했던 16일보다 더욱 상황이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따라서 지금은 캉드쉬 총재에게 이야기한 300억 달러보다 더 많은 400억 달러 정도까지 필요하다고 했다. 피셔 부총재는 『신임 임장관이 IMF에 안 간다는데, 무슨 이야기냐』고 강한 불신감을 표명했다. 이경식 총재는 『한국은 반드시 IMF의 구제금융을 받을 것이다. IMF로 갈 수밖에 없으니까 가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하자』고 피셔를 설득했다. 이총재는 다시『대통령이 강하게 지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일까지는 신경제팀의 정책이 바뀔 것이다. 그러니 바뀌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하자』고 설득했다. 「대통령」이라는 말이 나온 다음에야 피셔는 겨우 이해한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다시 IMF에 가는 것으로…
  
   20일 저녁 7시쯤(이총재의 기억) 롯데호텔. 이경식 총재는 신임 김영섭(金永燮) 경제수석으로부터 만나자는 제의를 받고 나갔다. 『이야기 들었나』하고 이총재가 물었다. 김영섭 수석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이총재는 이 자리에서 다시 IMF안을 강조했다. 그 동안 진행된 비밀협상의 과정과 대통령 재가를 받기까지의 상황, 이날의 외환보유고 등 IMF 구제금융을 하루빨리 받지 않으면 국가가 부도날 것이라는 것을 설명했다.
   『지금의 외환사정으로 볼 때 이것은 「말이 필요 없는 사안」이다.』
   상황설명을 듣고 난 김수석은 이렇게 입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재차) IMF와 의논하는 형태를 취해야 될까요?』 이경식 총재가 답했다.
   『물론이지.』
  
   두 사람이 이런 대화를 논의하던 롯데호텔의 다른 방에서 저녁7시쯤 임창렬 부총리와 피셔 IMF 수석부총재 간의 회담이 성사되어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대통령의 의사가 확인되어 긴급하게 만든 회담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그동안 강(姜)경제팀이 IMF측과 협의해 온 내용과, 피셔 부총재가 새롭게 제시하는 안건들을 비교해가면서 협상을 진행해야만 했다.
  
   임부총리는 이 때문에 한편으로는 피셔 부총재와 협상을 진행하면서 그 동안의 비밀협상 과정에 참석했던 이경식 한은 총재와 옆방에서 따로 만나 전후사정을 설명 듣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이총재는 말했다. 피셔와 임(林)부총리는 한국이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것으로 재차 결론을 내렸으며, 양측은 구체적인 조건 협의에 들어갔다. 피셔와의 회담이 끝난 후인 이날 밤 9시, 같은 롯데호텔에서 정식으로 IMF로 가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임부총리와 신임 김수석, 이한은 총재등 세 사람은 19일 인사 이후 처음으로 정식 상견례를 했다. 상황이 급하다 보니 협상을 우선한 결과였다. 갑작스런 인사(人事)로 인해 IMF관련업무가 전혀 인수 인계되지 않음으로써 캉드쉬 IMF 총재와 합의한 16일 밤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 4일이라는 아까운 시간이 허비된 것이다. 이런 막후(幕後)의 소동을 알 길이 없는 20일 저녁 발간의 21일자 조간 신문들에는 고영복 서울대 교수 간첩사건과 19일 발표된 금융안정대책에 대한 투자자들의 반응이 주요기사로 실렸다.
  
   11월21일: 이틀이 허비된 공식 발표
  
   <11월21일(금), 외환보유고 237.8억(가용 127억)달러. 환율 1076원. 종합주가 506.1>
   21일 오전 10시.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비상경제대책 자문회의에서도 이미 1주일 전인 14일 아침 대통령에게 보고된 「IMF 지원요청 필요」가 거의 유사한 형태로 재연됐다. 이날 IMF 신청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결론을 재확인한 임창렬 부총리는 피셔 부총재와의 면담내용을 포함해 청와대에 보고서를 만들도록 실무자들에게 지시했다. 임부총리는 보안을 위해 오후 3시의 기자회견에서는 『2∼3일 후 정부의 방침을 결정하겠다』고 연막을 쳤다. 거의 같은 시각 김영섭 수석도 청와대 기자들에게 『정부 방침이 아직 결정된 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임부총리는 오후 6시쯤 『밤 10시에 1청사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갖겠다』고 예고했으며, 밤 10시20분쯤 심야 기자회견을 가졌다.
  
   IMF측과의 협의를 거의 마무리하고도 심야 기자회견을 갖게 된 것은 국내에서 대선(大選) 후보들의 사전동의를 받는 「격식」을 갖추기 위해서였다. 말로는 「격식」이라고 기자들에게 설명했지만 실은 16일의 강(姜)부총리-캉드쉬 회담 때부터 IMF가 계속 요구하고 나온 「중대현안」이었다. 이때가 워싱턴은 금요일 아침이어서 IMF 임원들의 출근시간과 맞아 떨어지고 뉴욕 금융시장에서 좋은 반응이 나타나기를 기대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임부총리가 직접 강 전 부총리의 협상 상대였던 캉드쉬 IMF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자금 지원을 공식 요청하는 절차도 밟아야 했다. 이 이후의 상황들은 대부분 공개되어 상세히 보도되었으므로 일일 추적기(追跡記)는 이 정도 선에서 일단 접어두자.
  
   재협상론 때 가용 외환보유고는 60억 달러
  
   한국 경제를 강타한 IMF 사태라는 악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이후 환율은 계속 치솟아 한달 뒤 1500원대에서 겨우 안정을 찾게 되었고, IMF의 구제금융에도 불구하고 외환보유고가 빠져나가는 상황은 중단되지 않았다. IMF 구제금융 지원요청이 발표된 후 공개적으로 IMF 협상이 진행되고 한국의 대표들이 외국으로 날아가 돈을 꾸러 다니던 11월 말과 12월 초 사이 IMF가 비밀협상을 통해 줄곧 강조해오던 「대통령 당선자의 확고한 지지」라는 쟁점이, 당시 1위를 달리던 김대중 후보진영의 재협상발언으로 대선(大選)쟁점으로까지 발전했다.
  
   12월4일 국민회의는 집권하면 12월3일 타결된 IMF 구제협상안 중 경제성장률 등 일부 조항에 대해 「추가협상」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김원길(金元吉) 국민회의 정책위의장은 이날 『IMF 협상의 기본 틀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나 태국, 멕시코 등 다른 국가에 비해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며 『집권하면 경제주권 침해 요소가 있는 일부 조항에 대해 강력하게 추가 협상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동영(鄭東泳) 대변인도 성명을 통해 「경제성장률 3%억제」와 「자본투자 자유화」 등 2개 조항에 대한 재협상 의지를 밝혔다. 김대중 대통령 후보 자신도 12월7일 TV 토론회에서 이회창 후보와 IMF 각서 논쟁을 벌이면서까지 「재협상론」을 펼쳤다. 김(金)후보는 『나는 각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우리(후보)들에게 각서를 요구하는 자세가 무리』,『나는 서명 대신 대통령에게 책임 추궁하고 필요하면 재협상하겠다고 한 것이다. IMF 부총재도 재 협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는 발언을 했다. 여기에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중요한 사실을 밝혀주는 또 하나의 자료가 있다. 국민회의에서 IMF 재협상론을 발표한 12월4일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대체 어떤 상태였을까. 우리는 이 자료에서 이날의 한국의 외환보유고(가용 외환보유고 포함)를 확인할 수 있었다.
  
   「12월4일 외환보유고 149억 달러. 가용외환보유고 60.2억 달러」 그 일주일 전부터 한국의 가용 외환보유고는 50억 달러선까지 떨어지면서 사실상 국가 부도 상태와 다를 바 없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11월26일 외환보유고 242.2억 달러, 가용 외환보유고 93.7억 달러
   11월27일 외환보유고 242.1억 달러, 가용 외환보유고 93.6억 달러
   11월29일 외환보유고 244억 달러, 가용 외환보유고 72.6억 달러
   12월1일 외환보유고 245.1억 달러, 가용 외환보유고 66.9억 달러
   12월2일 외환보유고 239.5억 달러, 가용 외환보유고 63.3억 달러
   12월3일 외환보유고 146.3억 달러, 가용 외환보유고56.9억 달러
   12월4일 외환보유고 149.7억 달러, 가용 외환보유고 60.2억 달러
  
  
   강경식(姜慶植)의 차중(車中)토로
  
   이 숫자의 의미를 보다 자세히 알기 위해 다시 11월7일의 한은 보고서로 돌아가 보자. 당시 148억 달러의 가용 외환보유고는 한국의 수입대금 2개월 분(약 36일분)이었다. 이에 비하면 12월3일의 약 56억 달러, 12월4일의 60억 달러라는 가용 외환보유고는 약 14일분의 수입대금에 해당하는 것이다. 특히 한은 보고서에 나타난 선물환 총액 55억 달러와 비교하면 사실상 국가부도라고 할만큼 위험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진영이 「재협상」 방침을 발표한 것이었다. 하루빨리 외환이 돌아오고 IMF와 합의한 금액들이 지원되어야만 국가부도 위기도 넘기고, 하다못해 대통령 선거를 간신히 치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정치권에서는 여전히 IMF 재협상 공방을 하고 있었고, 이를 보고 있던 외국 투자자들은 IMF 구제금융 합의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한국 시장에서 철수해버린 것이었다.
  
   이 숫자들에서 나타난 당시 한국의 상황은 『언제 당장 국가 부도가 나도 별로 이상하지 않은 나라』(한은 소식통)로 전락해 있었다. 대선 후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외환이 바닥나 밤잠 못 잔다』고 말한 것도 『말로 표현하기도 싫을 정도로 엄청난 충격을 준 것이었다』고 관계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대통령 당선자의 이 발언은 김영삼 대통령 등 전임자들의 책임을 강조하는 솔직한 이야기였지만, 돈 빌려주는 입장에 선 외국 투자자들로 하여금 추가융자나 투자를 더욱 기피하는 반응을 보이게 했다. 여기서 제기할 수밖에 없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 하나 더 있다. 과연 우리의 외환보유고가 1997년11월에 처음 무너진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강경식 전 부총리는 지난 2월2일 재경원 변양균(卞良均) 국장 상가와 그의 차안에서 한 기자에게 『부임 때부터 한국은 국가부도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고 3개월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뉘앙스 차이를 줄이기 위해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
  
   『1997년3월에 취임했을 때 외환보유고가 얼마였는지 아는가. 280억 달러였다. 그때 국가가 부도나는 줄 알았다. 이후 부도를 내지 않으려고 환율인하를 비롯해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1996년에 경상수지적자가 이미 237억 달러에 달한 경제는 정상적인 경제가 아니었다.』
   『언제 누가 IMF에 가자고 보고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정책판단의 문제이고 그 판단의 책임은 모두 내가 진다.』
   『나는 IMF에 가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는데 이제 와서 IMF에 가게 한 장본인이고 일도 안하고 게으르다고 하니 답답하다.』
  
   -감사원으로부터 서면질의를 받았는가
   『아직 받지 못했다. 감사나 청문회를 통해 외환위기의 진실과 우리 경제의 발전방향이 상세히 드러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나 청문회는 반드시 해야 한다. 심정을 밝힌다는 것은 정확하지 않고 때가 되면 모든 사실을 다 밝히겠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기아 처리를 왜 그렇게 질질 끌었냐고 하는데 기아 처리를 그렇게 끌도록 한 게 누구인가. 당시 신문기사와 사설을 보라. 기아 문제는 부실기업의 문제이고 부실기업은 시장기능에 따라 처리되어야 한다. 시장기능에 따라 처리되지 못하도록 한 것이 누구인가?』
  
   -작년 11월 금융개혁법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외국의 시선이 모두 한국에 집중되어 있었다. 말만 하고 행동은 없다고 하는 상황에서 행동과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 애를 썼고 의원들에게 그렇게 설명했다. 원내총무들에게도 「표에 얽매이지 말라. 이것이 되지 않으면 나는 사표를 쓰겠다」고 했다. 당시에는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았고 캉드쉬와 협의가 끝난 상태이기 때문에 금융개혁법이 통과됐다고 하더라도 IMF에 안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가장 어리석었다고 생각하는 점은 IMF에 간 뒤에도 해결되지 않는 것을 IMF에 가지 않고 해결해 보려고 했던 점이다. 경제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가 IMF에 가려고 하겠는가. 한국경제는 IMF 자금 570억 달러가 들어오기로 한 뒤에 신인도가 더욱 나빠졌다. 이 점을 잘 알아야 한다.』
  
   -대통령이 기아 부도를 내지 말라고 했다고 하는데.
   『부도 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한보 때 이미 부도 위기로 몰려
  
   강경식 전 부총리가 침묵을 깨고 이런 말을 한 것은, 책임회피를 위한 변명처럼 들릴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당히 중립적인 관계자들조차 이 같은 강 전 부총리의 말이 자기변명만은 아니며, 「많은 일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강만수(姜萬洙) 재경원 차관의 증언(1998년 2월3일).
   『외환위기를 부른 가장 큰 문제점은 투명성 결여와 정치적 리더쉽의 결여였다. 20여 개 관련법이 국회를 통과하지 않았으며, 노동법 개정과 한보철강 뇌물사건도 그것이었다. 금융개혁법안을 올렸으나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다. 내가 통산부 차관으로 부임하니(부임일 1996년 12월24일) 우리 경제는 반돤섯?빼고는 이미 거덜난 상태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일본에 대한 수출은 9.1% 절하가 됐다. 그래서 김대통령이 나보고 국제수지 적자 해결을 위해 한번 일 해보라고 했다(재경원 차관 부임일 1997년 3월7일).』
  
   다시「11월7일」의 극비보고서로 돌아 가보자. 「은행별 크레디트 라인(Credit line: 대출한도) 축소현황」이라는 대목에는 6개 시중은행의 대출한도액 축소현황이 한보쇼크 때와 기아쇼크 때를 비교해서 나와 있다<도표>.
   즉 외환위기를 부른 결정적 요인으로 꼽히고 있는 기아사태 때, 6개 시중은행의 대출한도 축소액은 70.7억 달러였다. 「기아사태 3개월」보다 짧았던 2개월 동안의 한보사태로 줄어든 각 시중은행들의 대출한도액은 90.9억 달러였다. 실제로 외환보유고 붕괴를 의심받는 원인이 됐던 그 「선물환」(포워드)이라는 것 자체가 96년까지는 없었으며, 1997년1월 한보 사태 이후의 자금경색을 풀기 위해 도입된 것이었다.
  
   김석동(金錫東) 재경원 외화자금과장의 증언.
   『한보부도 사태 이후 한국의 은행들은 모두 부도가 날 상황이었다. 부도가 나는 것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부도사태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부도 나려는 것을 억지로 막아온 것이다. 11월 들어서 외환보유고가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매일 10억 달러씩 빠져나갔다. IMF 구제금융신청이 발표되자 20억 달러씩 빠져나가는데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나는 끝까지 IMF 구제금융을 신청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일본도 만약 구제금융을 신청한다고 하면 하루에 100억 달러씩 빠져나가 금세 외환보유고가 바닥 날 것이다.』 강부총리의 한 측근은 「강부총리 자신의 말」이라며 다시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일체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는 강부총리의 「육성」라는 점에서 이 또한 가감 없이 그대로 옮긴다.
  
   강경식(姜慶植)의 독백(獨白).
   『지난 10월 말 11월초에 단기외채의 만기 갱신이 되지 않으면서 시작된 외환위기의 조짐을 취임 초부터 감지하고 있었다면 거짓말이라는 소리밖에 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취임할 당시는 한참 국제수지와 환율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1993년에 4억 달러 정도의 흑자를 보이던 경상수지가 1994년 45억 달러, 1995년 89억 달러, 그리고 1996년에는 237억 달러라는 폭발적인 기세로 늘어나고, 그로 인해 외채가 1993년의 439억 달러에서 1996년 1047억 달러로 2배 이상 늘어나는 상황은 도저히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1997년 3월6일 오전 10시 내(강부총리)가 임명장을 받고 과천으로 가서 첫 1급 간부회의를 할 때부터 환율문제가 거론되었다. 국제수지 적자가 계속 급격히 늘어나는 상황에서는 환율이 올라가는 것이 당연한데, 1996년 말 달러 당 844원 수준에서 올라가기 시작한 환율을 1997년 1,2월 중에는 보유외환을 투입하면서 860원 선에서 막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우리는 한국의 형편없는 정치권을 믿는 잘못을 범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필요한 개혁을 위해서 일부 인사들이 내게 권해 검토했던 대통령 긴급명령권을 동원하는 등 정말 강경한 수단도 불사했을 것이다. 그런 강수를 쓰지 않고 설득에 의해 개혁의 필요성을 납득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보다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웬만큼 정치를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대선을 앞두고 표 앞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진다는 정치인들의 속성을 전혀 간파하지 못했다고 나 할까.』
   이제 감사도 진행되고 있고, 경제청문회도 곧 개시될 것이다. 우리의 「비(秘) 파일」에 들어있던 그간의 이야기들도 이제는 본격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논의될 것이다. 국가부도위기에서 경제 총 사령탑에 있었던 강경식 전 부총리, 김인호 전 경제수석, 이경식 한은 총재 등 3인의 책임문제는, 자신들의 정책판단에 많은 아쉬움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어느 누가 보아도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들이 모두 당사자들이기 때문에 이들의 이야기는 사후변명이나, 합리화를 위한 논리 짜 맞추기에 불과하다는 혹평을 받을 여지도 많다.
  
   김영삼(金泳三)의 결정적 책임
  
   그러나 이들 「3인의 당사자」이외에도 IMF의 「당사자」 명단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더 있다. 11월7일 보고서에 나온 위기상황들을 알고도 신속히 대응 못한 경제관료들.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IMF협상발표의 시기를 잃어버리고 협상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 신임 부총리와 그 경제팀. 국가부도 촌전(寸前)의 상황에서 나라가 부도가 나든 말든 표 몰이에만 열중한 정치권과 대선 후보들. 부도를 내놓고도 「국민기업」이란 위장 망 속에서 은행과 정부를 상대로 투쟁을 계속한 김선홍(金善弘) 회장 등 기아 경영진과 노조. 대안 없는 비판과 양시론 양비론에 익숙해져 있었던 언론 등.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의 책임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할 김영삼 대통령의 허세, 오만, 선동, 무능. 그 5년간의 축적.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경제부총리 8개월에 불과한 강경식 팀에 모든 책임을 지우고 『우리는 이제부터 깨끗해졌다』고 홀가분해하는 태도는 『우리가 일제 식민지가 된 것은 이완용 때문이었다』고 결정해버리는 수준일 것이다. 그런 자세로는 「제2의 갑오경장」인 IMF 사태는 모양만 다르게 되풀이될 것이다. 갑오경장과 이번 IMF 사태의 공통점은 「국가지도층이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힘으로 해결하는 능력이 없다」는 바로 이 점이다. 조선은 그리하여 일본의 힘을 빌어 갑오경장이란 근대화 개혁을 시도했으나 역사에는 공짜가 없어 그 대가로 식민지로 전락했다. 개혁이란 말을 그토록 사랑했던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부터 경제를 개혁했더라면 IMF 사태는 예방되었을 것이다.
  
   국제화, 세계화를 부르짖고 OECD에 가입하기 전에 그런 시장원리를 받아들일 만한 내부개혁과 체질을 강화했어야 했다. 그런 준비 없이, 그리고 철학도 없이 외친 세계화는 결국 일류국가의 논리에 이 나라를 알몸으로 내맡기는 일이었다. 이 나라는 경제부총리 중심제의 나라가 아니라 대통령중심제이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자기 몫의 책임을 지고 청문회에 나와서 진실을 밝히지 않는 한 작은 속죄양들만 많이 만들어내는 것으로 되어 6·25 동란 이후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재산상의 손실을 끼친 이번 사태는 아무런 교훈 없이 끝나고 말 것이다.
  
  
  
  
   ==================================================================
   '국내의사 말 안듣다가 IMF의사에 의해 수술'
   -姜慶植 전 재정경제부 장관 겸 부총리 인터뷰 <월간조선 1998년 3월호>
  
  
   『우리 엘리트들의 리더십이 문제』
  
   -강(姜)의원께서는 집권 말기의 허약해진 대통령을 믿고서 개혁을 해내려고 했다는 데 판단 착각을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왜 김영삼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개혁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해주도록 만들지 못했습니까.
  
   『대통령 중심제라고 해도 모든 것이 대통령의 리더십만 갖고는 안됩니다. 우리는 민주사회입니다. 개혁을 추진하는 정치세력이 국회 내에 있어야 합니다. 미국의 경우 획기적인 개혁을 추진한 세력은 깅그리치 하원의장을 중심으로 한 공화당이었습니다. 엘리트 집단이 문제의식을 갖고 국론을 그런 방향으로 결집시키고 끌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박정희·전두환 시대는 정부가 주도하던 시기였습니다. 노태우·김영삼 시대에는 민주화도 되고 웬만큼 살 만해 지니까 경제를 등한시하는 자만심도 가세하여 어줍지 않은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압도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집단 이기주의에 굴복하고 인기 위주의 정책을 편 지난 10년간 우리 경제는 구조적 모순을 누적시켜온 것입니다.
  
   당연히 망해야 할 기업과 은행을 정부 출자와 한은 특융이라는 편법으로 살려주기를 정부에 강요하고 이러한 조치가 불러올 도덕적 해이와 대외적 신뢰의 실추가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이해하지 못하는 풍토만 남은 것입니다. 이런 풍토가 IMF 사태의 원인인데 아직도 며칠 먼저 더 알았더라면 IMF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는 시각으로 접근하니 답답합니다.』
  
   -금융개혁법안이 통과 안된 것은 국민회의가 자민련의 반대가 있었다 해도 결국은 다수당인 한나라당의 책임이 아닙니까.
  
   『개혁법안의 처리에 대해서는 한나라당에게만 협조요청을 한 것이 아니고 국민회의에도 했고, 자민련에게도 했어요. 그러나 선거를 앞두고 있어 아무도 움직여 주지 않았습니다. 안 들어준 것은 그들이지만 설득못한 저에게 결과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이지요.』
  
   -이들 정치권과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어떤 점이 가장 큰 벽이라고 느끼셨는지요.
  
   『대통령 선거 기간에는 특정후보의 당선이라는 정치적 목표에 집착하고 나라 경제문제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잘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IMF를 몰고온 외환위기가 대통령 선거직전이 아니고 다른 때였으면 피할 수 있었으리라고 봅니까.
  
   『평상시였다면 금융개혁법안만이 아니라 더 강력한 개혁이라도 강도 있게 추진했을 겁니다. 금융개혁법안은 무난하게 통과됐을 것이고요. 대선정국이기 때문에 표에만 정신이 팔려서 다른 문제가 잘 다뤄지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나라의 경우에도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임기 초에 개혁의 포석을 놓았어야 했을 강경식 의원이 임기 말에 기용된 것이 대통령의 인사 실패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도 비슷한 이야기는 들었는데요. 막상 임기 말에 실질적으로 일을 해보니까 정권 말기라는 제약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불난 집에 불끄러 들어왔다가 불도 못 끄고 불낸 사람으로 지목 받고 있어요. 한 예로 ㅁ?초기 같으면 기아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버틸 수 있었겠습니까?』
  
   『종금사 구조조정 못해 아쉽다』
  
   -종금사가 이번 IMF 사태의 또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왜 정부는 종금사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습니까. 야생마처럼 그냥 놓아둘 것이 아니라 돈의 흐름을 관찰하고 고삐를 쥘 수 있는 장치를 해두어야지, 우리 나라에서는 규제완화가 곧 방치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규제를 완화할수록 오히려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은 더 강화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대가를 지금 톡톡히 치르고 있지요. 한보 기아 사태로 연타를 맞은 제일은행과 부실 종금사들을 한은 특융과 정부 출자를 해주면서 구조조정을 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로서는 특혜요소를 거의 제거했기 때문에 도덕적 해이를 초래하지 않을 것이고 국제사회도 이해해 줄 것이라 착각했었습니다.』
  
   -재경원 실무선에서 종금사에 대한 규제방안으로 은행처럼 자기자본(BIS) 비율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서 건전성 지표를 만들려고 했는데요, 이에 대해 보고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종금사에 대한 다른 규제방안이나 조치도 안(案)으로서는 여러 개가 있을 수 있었겠지요. 아무리 좋은 안이 있더라도 대선(大選)을 앞둔 시점에는 그런 방안들이 채택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 같은 조치들은 대선(大選) 이후에나 가능했을 것으로 봤습니다.
  
   국제사회의 기준에 조금 다가가려는 우리의 개혁 조치들이 국제사회에서는 기준에 미흡하다고 야단맞고 국내에서는 당연한 도움을 거절한다고 해서 재계와 금융계로부터 미운 털이 박히게 된 꼴이었습니다. 이들의 불만이 정치권과 언론에 부정적으로 전이되고 그것이 적절치 않은 시기에 제가 물러나게 된 요인 중 하나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김영삼 정권시대에 종금사 허가를 남발했는데 그 배후에는 정치권의 로비와 비자금 거래가 있었다는 말들이 많습니다.
  
   『전혀 아는 바 없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좀더 서둘러 종금사에 대하여 과감한 조치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할 일을 못한 것이 어디 이것뿐이었겠습니까. 금융개혁법안만 해도 IMF에 의해 강요당하니까 그렇게 쉽게 통과시켜주면서 우리가 하려고 할 때는 왜 그렇게도 협조를 해주지 않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기아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기아를 삼성에 인수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갖거나, 검토한 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정부에서는 그런 것은 검토할 필요도 없는 사안이었고 그럴 입장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기아 문제를 빨리 해결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기아를 바로 부도 내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아를 제3자에게 넘기는 것이고, 셋째가 기아가 요구하는 대로 달라는 돈을 다 대주는 것이지요. 당시에 기아 문제를 빨리 해결하라고 했던 사회적 분위기는 이중에서 세 번째 것이었습니다.
  
   기아가 필요한 돈을 무한정 대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부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아직도 이전처럼 정부가 돈을 대주라고 하면 은행들이 자동적으로 돈을 대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WTO 체제 이후엔 정부가 그렇게 했다가는 보조금을 주었다고 해서 무역마찰로 몰매 맞기 십상입니다. 다른 한국 자동차의 수출 길까지 막히고 한국의 다른 수출 부문까지도 영향을 주는 것이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은 부도를 빨리 내든지 제3자 인수의 길이 남는데, 당시 이미 부도유예협약이란 제도가 있으므로 그 절차를 밟는 것이 순리라고 봤습니다.』
  
   『삼성과 음모했다는 증거 있으면 빨리 고발하라』
  
   -강의원께서도 삼성 자동차 공장을 부산에 세워달라고 요구한 적은 있지요.
  
   『삼성자동차가 공장 입지를 물색할 때 부산에 공장을 세워달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자동차 공장은 바다와 면해 있어야 하는데 이 같은 입지에 부산이 좋을 것이라고 설득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역 국회의원으로서의 활동이었습니다. 경제부총리에 이르고 3선 의원으로 지역 입지가 탄탄한 지금 무엇이 아쉬워 재벌의 앞잡이가 되어 정치적 장래를 망칠 모험을 하겠습니까. 누구라도 좋으니 내가 삼성과 유착되어 기아를 죽이려고 한 사실이 있다고 확인했으면 이제라도 빨리 저를 사직당국에 고발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삼성에 자동차공장 신설을 정부가 허가해준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정부에서 공장 허가해주고 말고 하는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기업에서 영리를 기준으로 하고 말고 하는 것이지요. 이제는 정부에서 신규 참입에 대해 된다 안 된다 규제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문제는 돈을 대줄 은행에서 판단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미국과 같은 데서나 가능한 이야기이고, 한국에서는 은행이 자율적 판단을 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삼성자동차 공장 신설이 우리 자동차산업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아직 이야기할 수 있는 시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업종이 자동차이니까 안되고 국내과잉이니까 안되고 이럴 수는 더더욱 없는 겁니다. 기업이 글로벌 전략을 갖고 한다면 하는 것이지요.』
  
   -일본은 기업들이 자율조정을 해서 중복투자를 피하는 지혜를 발휘합니다. 우리나라는 중복투자를 자율 조정하는 기업 윤리도 없고, 은행세계의 시장원리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에 의해서 결정된 삼성 자동차 신설은 결국 국가 재원의 낭비로 귀결된 것 아닙니까.
  
   『시장원리가 통하는 곳에서는 치열한 경쟁이 일시적으로는 낭비인 것처럼 보이지만 개혁도 경쟁도 없는 계획 경제의 낭비성을 구(舊) 소련의 예에서 볼 때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기업이 자기 책임으로 자기 돈으로 한다는데 된다 안 된다 이럴 수는 없는 겁니다. 기업 입장에서 자기가 망할 일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돈이 국내에서 부족하면 해외에서 자기들이 알아서 빌려오는 것이고 그런 것인데 이것 자체를 안 된다 이렇게 막을 수는 없는 겁니다. 일본의 경우에도 기업들이 기업윤리보다는 이윤추구를 위해 각자 알아서 협의해나가는 것일 뿐이라고 봅니다. 다만 교통정리를 금융기관들이 하지요.』
  
   -삼성 자동차에 대한 강의원의 시각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지금은 2004년도 아니고 1998년입니다. 삼성 자동차 설립 허가 당시에는 기업윤리에 관한 한 은행도 엉망이고 재벌도 엉망인데 국익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주체는 정부밖에 없었던 것이 아닙니까. 경쟁원리가 먹히지 않는 상황에서는 한시적으로 정부가 중복투자를 피할 수 있도록 조정해주어야지요.
  
   『삼성자동차 신설은 정부로서는 허가해줄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보면 「정부의 영향력」정도라고 판단할 수는 있겠는데, 이런 영향력조차도 이제는 정부가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법에 따라 해야 합니다.』
  
   『大馬不死 신화 깨는 게 힘들어』
  
   -앞서 강의원께서는 한국의 대외적 신인도를 떨어뜨린 첫 번째 실수는 부실은행과 종금사들에 대한 특융이라고 했는데, 두 번째 실책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합니까.
  
   『저의 두 번째 실책은 역시 기아의 법정관리를 신청하되 산업은행의 채권을 출자로 전환하기로 한 방침일 것입니다. 일반 기업이든 금융기관이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면 가차없이 처단하라는 것이 IMF의 요구이고 국제사회에서 당연히 요구되는 준거인데 국내의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고 기아를 살리는 방향 이외의 다른 대안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국내에서는 이 방침이 환영을 받았지만 국제적으로는 한국의 경제팀은 시장원리와 국제 기준을 존중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닌가 보다 하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본인의 능력과 경력도 출중하지만 지역정서도 고려하여 전북 출신의 진념(陣捻) 전 장관을 관리 책임자로 앉혀 국내에서는 환영받았으나 해외에서는 전직 장관이라고 해서 정부의 개입으로 해석되어 상당한 불신을 초래한 것 같습니다. 대마불사(大馬不死)신화가 너무 뿌리 깊기 때문에 대기업의 부도를 방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결정적인 신뢰 상실 요인은 금융개혁법의 국회통과 실패였지요. 정치적 고려 때문에 화급을 다투는 입법이 무산되는 나라를 누가 믿고 돈을 빌려주겠습니까?』
  
   『희생양 만들고 끝내면 도로아미타불』
  
   -금융개혁법안이 통과되었더라면 IMF에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금융은 신용이고 신용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면 한국 정부가 문제를 스스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해결할 역량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고서야 정부가 외채를 보증하겠다는 말까지도 의미 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마지막까지도 금융개혁법 통과와 국제금융계가 요구하는 강력한 대책을 내놓음으로써 신뢰를 회복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단기외채의 만기 연장률을 높이는 것 이외에 다른 대책이 있을 수가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판단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실제로 당시 상황에서 어떤 다른 대책이 있었는지 지금이라도 알고 싶습니다. 한국 정부와 금융기관을 믿지 못하고 돈을 빼 가는 데 다른 데서 돈을 새로 꾸어서 갚을 길도 없는 것이고 결국 돈을 회수하지 않고 다시 연장해주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는 길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정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일부 의원들과 일부 언론들은 그저 재경원-한은의 밥그릇 싸움에서 유리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위협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IMF 협상을 국치니 주권상실이라 하여 격앙된 감정으로 받아들인 여론, 유력한 대통령 후보의 재협상 발언, 국고가 텅비어 하루하루를 넘기고 있다는 너무 솔직했던 발언, 이 모든 것이 국제사회가 한국을 보는 시각에 악영향을 미친 것이지요.』
  
   -지금은 어쩌면 이 위기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여론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엄청난 기회지요. 이것을 살리지 못하면 안됩니다. 나라 전체가 써도 너무 많이 쓴 것입니다. 그것도 상당부분을 실력 이상으로 썼습니다. 장사가 잘 안 되는 기업에 돈을 빌려주게 되어 있는 우리 체제가 잘못된 것이지, 제대로 돈 빌려주는 체제를 새로 만들겠다는 IMF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IMF는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서라도 한국 경제의 회생을 위해 좋은 정책을 권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조금 한국의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도 발견됩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 스스로가 바뀌어야 합니다. 정치인, 정부, 금융, 언론 등등 이 사회의 공론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도 의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사고 방식을 바꾸어야 하는 겁니다. 엘리트가 정신 차려야 합니다. 이번 한국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우리나라 지도층 사람들이 초래한 위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개혁을 막고 낡은 틀을 고수(固守)하는 데 앞장섰으니까요. 100만 명 실업 시대라고 불안하게만 생각하는데 이것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사회보장의 충실화와 구조조정을 통해 풀어가야 합니다.
  
   그 동안 우리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 못했으니 이제는 고통스럽게 배울 따름이지요. 공부는 어차피 해야 하는 건데 IMF선생이 온 김에 지금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경제청문회나 외환특감에서 몇 명을 희생양으로 만들고 그것으로 되었다고 한다면 도로아미타불입니다. 금융시장이 개방된 앞으로는 언제든지 작년 11월과 같은 외환위기가 올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달러를 찍어내기만 하면 되는 미국을 빼고는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아시아의 외환위기를 아시아적 가치의 몰락으로 설명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일본 모델을 참고한 한국형 개발 모델의 한계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가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아시아적 가치의 패배라기 보다는 한국적 가치의 패배라고 보여집니다. 시장원리라는 외래사상을 자국(自國)의 실정과 수준에 맞게 점진적으로 받아들인 나라는 외환위기를 견디고 우리처럼 시장원리라는 말만 사대적으로 받아들여 선동적으로 써먹고는 시장원리가 정착할 만한 제도를 만들어 내는 데는 게으름을 피운 나라는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강(姜)의원께서는 어느 나라식의 시장원리를 주장하시는 겁니까.
  
   『저는 아시아적 가치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MIT크루그만 교수의 분석에 동의합니다. 시장원리는 간단한 것입니다.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것이지요. 저는 미국식 시장원리의 힘을 믿습니다. 말레이시아와 중국이 괜찮은 것은 투자환경을 좋게 만들어 해외차입보다도 직접투자에 주로 의존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바보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IMF로 가서도 해결 안 되는 문제들을 IMF에 가지 않고 어떻게든지 해결해보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IMF의 대한(對韓) 정책 중 고금리 유지 정책은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고금리 처방은 우리에게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도개혁을 하려고 해도 우리가 하면 시간을 두고 완급을 조절하면서 할 수 있는데 남이 들어와서 강제적으로 하니 그것이 안 되는 것이지요. 이제는 IMF를 보는 시각을 현실화해야 합니다. 우리 경제가 빨리 살아나도록 해줄 고마운 존재로 봐야 합니다. 우리가 병에 걸렸는데도 국내의사의 말은 안 듣다가 외국의사의 말을 들어야 고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요.』
  
   강경식의 神
  
   강경식 의원은 시장원리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한참 설명해갔다. 시장원리는 민주주의와 함께 지금 세계를 거의 통일한 신(神)이다. 이 신은 그리스-로마-히브류의 전통을 이어받은 앵글로색슨계통(系統)국가의 작품이자 일류국가의 논리이다. 이 시장원리는 인간이 개방된 시장에서 공정하게 경쟁하면 그 결과는 좋게 나타난다는 경험적 확신이다. 정부는 시장이 공정하고 개방되어 있도록 관리만 하여야 하고 직접 이 경기장에는 선수로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업과 개인이 선수이고 정부는 심판 또는 관리자가 된 것이다. 민주주의나 시장원리는 공정한 경쟁이 인간의 자율성을 극대화시킨다는 확신을 기초로 하고 있다. 작은 정부와 강력한 기업 및 소비자를 미덕으로 삼는 이 이념은 따라서 개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영미법(英美法)이 채택하고 있는 배심원 제도는 이런 시장원리를 재판에 적용한 경우이다. 배심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공정한 시합을 하고 재판장은 그 시합이 공정하게 진행되도록 관리하는 심판관 역할만 한다. 배심원들은 보통 사람들이지만 전문가인 재판장이 재판을 공정하게 진행시켜주기만 하면 아주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채택한 대륙법에서는 머리 좋은 재판장이 신의 대리인으로서 유무죄를 판단한다. 재판이든, 선거든, 시장이든 경쟁의 과정만 공정하면 그 결과는 저절로 좋게 나올 것이라는 이 무서운 신념은 그러나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한다. 오판(誤判)과 혼란과 시행착오를 「불가피한 필요악」으로 치부하여 견딜 수 있는 확신과 실력이 그 사회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역사의 일반원칙
  
   영국과 미국은 약 1000년에 이르는 민주화 과정을 통해서 그러한 시행착오를 거친 뒤에 만들어낸 두 가지 하느님-민주주의와 시장원리가 보편적 진리라고 자신 있게 지금 우리들에게 선교(宣敎)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영미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하느님을 믿으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요구에 저항하는 행동이 시장원리자들에게는 개혁을 반대하는 것으로 비쳐지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시장원리란 이 새로운 신을 소개하는 데 앞장서온 강경식 의원과 「강경식 스쿨」로 불리는 경제관료들은 IMF 사태를 맞고도 시장원리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있다. 시장원리는 그들에게 하나의 종교인 것이다. 요사이 그들이 겪고 있는 시련은 무신론자들에 의한 「박해」인 것이다. 조선조 선비들에게 주자학이란 외래사상이 종교가 되었듯이, 해방 후 우리 정치인들에게 민주주의가 종교가 되었듯이 우리는 지금 미국과 IMF라는 대형(大兄)이 모시고 들어온 시장원리라는 신상(神像)앞에서 움츠려 있다.
  
   기자는 강의원의 아파트를 나오면서, 주자학이든, 민주주의든, 시장원리든 외래이념을 종교화하여 극단적으로 추구하면 조국과 민중의 현실을 떠나 결과적으로는 사대주의로 귀결되고 만다는 우리 역사의 일반 원칙을 생각해보았다.
  
[ 2008-10-27, 08:4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코나스넷  |  리버티헤럴드  |  뉴데일리  |  뉴스파인더  |  뉴포커스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