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게재/CIA의 死鬪 - “빈 라덴이 핵무기를 손에 넣기 전에…”
美 CIA 국장의 9.11 手記 3 - 폭풍의 한복판에서
核을 파는 칸 박사, 核을 찾는 알 카에다, 이들을 쫓는 CIA의 숨 막히는 숨바꼭질

조지테닛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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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密命: “무샤라프 대통령을 만나 파키스탄의 ‘죽음의 상인들’을 정리하라!”
 ● 오사마 빈 라덴은 이미 핵물질을 입수했을 가능성 있어.
 ● 푸틴은 부시 대통령에게 러시아의 핵물질이 누출되었을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 리비아의 카다피, 核(핵)을 포기하고 문을 열다!
압둘 칸 박사, 조지 테닛 CIA국장,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 오사마 빈 라덴, 카다피의 아들 샤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 (왼쪽부터)
〈편집자 注(주): 9·11 테러 前後(전후)에 미국 CIA 국장을 지낸 조지 테닛이 최근에 쓴 회고록 ‘폭풍의 한복판에서’에서 9월호에 이어 두 번째로 뽑은 부분은 北核(북핵)문제와 관련이 있다. 9·11 테러를 일으킨 알 카에다의 두목 오사마 빈 라덴이 핵무기 입수 또는 개발에 집념을 불태워 왔다는 사실, 파키스탄의 핵개발 기술이 알 카에다로 넘어가는 것을 저지했고, 우라늄 농축 기술과 시설은 이미 북한 등에 넘어갔다는 사실, 蘇聯(소련) 해체시기에 핵물질이 유출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푸틴 전 러시아 대통령의 암시 등 고급 정보가 많다.
  2002년 가을 북한당국은 訪北(방북)한 미국 대표단에게 농축우라늄 방식에 의한 핵무기 개발 계획을 실토하여 北核(북핵) 위기를 촉발시켰다. 이때 미국 대표단이 북한측에 들이댄 자료가 조지 테닛의 CIA가 수집한 파키스탄 칸 박사의 북한 커넥션 관련 정보철이었을 것이다.
  북한은 1990년 무렵 무너지고 있던 소련으로부터 30kg 이상의 핵폭탄 원료물질(플루토늄이나 우라늄)을 밀수입하여 보관하고 있다는 첩보가 유력하게 돌고 있다. 북한은 이 핵물질에 대해선 6자회담에 신고하지 않았다. 조지 테닛에 따르면 푸틴 전 러시아 대통령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추궁성 질문에 대해 답변하면서 “내 임기중은 안전하다”고만 말했다고 한다. 옐친 및 고르바초프 시절의 핵물질 관리에 대해선 보증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조지 테닛의 회고록 국내 판권은 조갑제닷컴이 갖고 있다.〉
  
  

  
  “무슬림 방어를 위해 무기를 획득하는 것은 종교적인 의무다. 만약 실제로 그런 무기를 획득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준 데 대해서 신에게 감사할 것이다.” 〈1998년 12월 24일자 타임誌(지). “알 카에다가 핵무기나 화학무기를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오사마 빈 라덴의 답변〉
  
  알 카에다가 화학무기에 매료되기 시작한 것은 1995년 옴진리교라고 부르는 종교적 광신도들이 일본 도쿄의 지하철에서 사린 가스를 살포한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공격으로 12명이 사망했는데, 가스 살포가 계획대로 되었더라면 사망자 수는 훨씬 늘어났을 것이다.
  
  알 카에다의 지도부는 감명을 받았고 그 공격이 자기들의 야망을 성취하는 또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돌이켜 보면, 이 도쿄 공격은 2004년 3월 11일 마드리드, 2005년 7월 7일 런던에서 감행된 공격에서 드러난 것처럼 지하철과 철도시설에 대한 알 카에다의 관심을 예고했다. 2003년 가을에 계획됐던 뉴욕시 지하철에 대한 공격은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더 나은 목표’를 위해 중지시켰다).
  
알 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

  2001년 2월, 뉴욕의 美(미)연방 남부지방법원에서 오사마 빈 라덴은 궐석으로, 다른 사람들은 출석한 가운데 1998년에 있었던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대사관 폭파에 개입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여기서 알 카에다가 WMD(대량살상무기)를 입수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 재판에 나온 주요 증인의 하나인 자말 아마드 알파들은, 1993년에 빈 라덴이 수단에서 일종의 核(핵)장치에 사용하기 위해 우라늄을 입수하는 일을 도와주었다고 말했다. 알파들의 증언에 의하면 알 카에다는 중량 미상의 우라늄을 입수하는 代價(대가)로 1500만 달러를 지불하려 했다는 것이다.
  
  알 카에다로서는 사기꾼에게 걸려들었던 최초의 경험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제의는 진짜일 수도 있다. 우리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 그룹이 1990년대 초에 적극적으로 핵물질을 입수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핵분열 물질을 입수하기 위해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지 하고, 얼마든지 돈을 지불하려고 했다. 그 같은 확고한 결의에 대한 확실하고도 유일한 대책은 그 테러리스트들이 핵분열 물질을 입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거하는 데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는 것이다.
  
  1998년 WMD에 대한 종교적 의무를 언급한 빈 라덴의 발언은 진공상태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해는 파키스탄이 처음 핵실험을 한 해였다. 빈 라덴의 꿈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기술과 물질이 그의 아프가니스탄 聖域(성역)에서는 바로 국경 너머에 있었다.
  
  우리는 1998년에 한 정보기관으로부터 빈 라덴이 密使(밀사)를 보내 파키스탄 핵물리학자 A. Q. 칸의 조직망과 접촉하려 했다는 단편적인 첩보를 받았다. 칸 박사는 수십 년 동안에 걸쳐 불량국가들에 판매하기 위해 핵능력 공급망을 만들었다. 이 정보에 의하면 칸은 빈 라덴의 간청을 몇 차례 거절했다고 하는데,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수상한 복지단체 UTN
  
  9·11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 한 우방 정보기관은, 우마 타미르-에-나우(UTN)라고 불리는 파키스탄의 한 비정부기구(NGO)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사회복지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는 첩보를 알려 주었다. 이 첩보는 UTN이 다른 목적도 가지고 있다고 示唆(시사)했다. 그들은 알 카에다가 화학, 생물학, 핵물리학 계획을 추진하는 것을 돕기 위해 기술을 제공하려 한다는 것이다(NGO는 합법적으로 기술과 물자 및 돈을 거래할 수 있기 때문에 테러리스트 조직을 은폐하는 데 편리한 도구가 될 수 있다).
  
  UTN의 지도부는 은퇴한 파키스탄의 핵물리학자, 軍(군)장교, 엔지니어 및 기술자들로 구성되었다. 그 설립자이고 의장인 술탄 바시루단 마무드는 파키스탄 원자력위원회의 核(핵)발전국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1987년 그는 〈최후의 심판과 死後(사후)의 생활: 성경 코란으로 본 우주의 궁극적 신앙〉이란 책을 발간했다. 지하드(聖戰)에서 과학의 역할을 다룬 그의 왜곡된 생각을 담은 책이었다.
  
  알 카에다에 WMD 능력을 제공하려던 그룹의 지도자가 이 책에서 강조한 기본적인 메시지는, 어느 날 핵의 대재앙으로 세계가 불의 심판을 받아 코란의 예언이 실현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CIA 운영부장에게 지시해 全(전) 세계의 모든 우리 연락처에 알 카에다와 기타 테러리스트 그룹에 기술을 제공하려 하는 WMD 관련 인물과 조직에 관해서 가능한 한 무엇이든지 찾아내도록 했다.
  
  우리는 우방국에만 그런 질문을 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리비아에도 물었고, 그들이 UTN의 핵기술 판매제의를 일축했다고 확인했다. CTC(CIA의 對테러 본부)의 부책임자 벤 봉크는 리비아의 정보기관 책임자 무사 쿠사와 비밀리에 만나 이 나라와 알 카에다 간의 친밀한 관계로부터 무슨 정보든 얻어 내려고 했다. 대화 도중 봉크는 쿠사에게 UTN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쿠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우리에게 핵무기를 팔려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거절했습니다.”
  
  이 첩보는 UTN이 리비아에 접촉하면서 화학, 생물학 및 핵관련 기술을 제공하려 했다는 다른 정보기관의 보고와 일치했다. 쿠사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리비아가 UTN을 필요로 하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다른 WMD 용역 공급자를 통해 파키스탄의 A. Q. 칸 박사와 연결되어 있었다.
  
  CIA는 UTN에 관한 첩보를 파키스탄 정보기관에 보냈고, 그들은 즉각 7명의 理事(이사)를 잡아들여 訊問(신문)했다.
  
  UTN 관계자들은 모두 잘못한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파키스탄 당국은 그들을 적절하게 격리해서 신문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매일 조사를 받은 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파키스탄 정보기관은 UTN 관계자들을 사회적 지위에 맞게 정중하게 대우했다. 그들은 파키스탄에 커다란 공헌을 한 과학자로 대접을 받고 있었다.
  
  
  파키스탄行 비행기에 오르다
  
  한 서방 정보기관은 2001년 가을 놀라운 첩보를 알려주었다. 한 정보원에 의하면 9·11공격이 일어나기 몇 주 전인 2001년 8월 UTN 관계자인 마무드와 마지드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오사마 빈 라덴과 아이만 알자와히리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캠프 파이어에 둘러앉아서 알 카에다가 핵장치를 만드는 방법을 토의했다. CIA는 파키스탄에 압력을 넣어 이 새 첩보를 가지고 마무드와 마지드를 조사해 달라고 했다. 우리는 리비아의 첩보도 내놓았고, 다른 정보기관이 수집한 새로운 첩보도 전달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9·11공격이 일어났고, 우리는 추적을 늦출 수 없었다. 파키스탄의 지지부진한 진전을 그냥 두고 보기에는 위험이 너무 컸다. 2001년 11월 말, 나는 부시 대통령과 체니 부통령 그리고 라이스 안보보좌관에게 최신 정보와 우리의 우려를 브리핑하고, 대통령의 개입 없이는 이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WMD 책임자인 롤프 모와트-라르슨과 수석 WMD 테러분석관 케빈 K를 데리고 갔다. 그 후 이어진 대화에서 부통령은 “알 카에다가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케빈은 대답했다.
  
  “알 카에다의 핵계획을 전통적인 분석평가로 보면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이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부통령은 “만약 1%라도 그들이 핵을 보유할 확률이 있다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추적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다음날 파키스탄으로 가서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우리의 우려를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우리는 UTN의 알 카에다 지원이 어느 정도 진전되었는지 몰랐지만, 파키스탄의 핵전문가와 알 카에다의 지도자들이 캠프 파이어 앞에서 핵무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 중대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롤프, 케빈과 함께 한때 대통령 전용기였던 美(미) 공군의 707기를 타고 파키스탄으로 갔다. 나는 잠 못 이룬 긴 비행시간 동안 이야기할 내용을, 본부에서 보내온 최신 자료를 인용하며, 노란색 종이 철에 적어 놓았다. 나는 무샤라프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모든 것을 투명하게 제시하여 그가 필요한 결정을 내리고 우리 우려를 해소시키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었다.
  
  
  긴장한 무샤라프 대통령
  
2001년 10월 파월 美 국무장관과 만나 ‘테러와의 전쟁’에 대해 논의하는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

  우리는 한밤중에 도착했다.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파키스탄에 있는 우리 고위 요원과 계획을 검토하고, 내가 파키스탄을 떠난 다음 그가 파키스탄 정보국과 취할 다음 단계에 관해 토의했다. 우리는 무샤라프의 협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고위 요원은 무샤라프가 긴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하루 전날 통보받은 이 이례적인 방문의 성격을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중무장한 모터케이드 편으로 대통령궁까지 짧지만 긴장된 드라이브를 했다.
  
  나는 몇 마디 의례적인 인사를 한 다음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미국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대단히 중대한 첩보를 가지고 왔다고 설명했다. 나는 오사마 빈 라덴 및 알자와히리와 UTN 지도자들 사이에 있었던 캠프 파이어 모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통령 각하, 파키스탄이 빈 라덴의 핵무기 입수를 돕고 있는 과학자들을 양성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알려질 경우, 미국에서 터져 나올 분노를 상상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장치가 사용될 경우 미국 국민의 분노는 누구든 알 카에다를 도와 준 사람에게 집중될 것입니다.”
  
  무샤라프는 신중하게 내 말을 검토했지만, 우리가 예상했던 반응이 나왔다.
  
  “그러나 테닛 부장, 그 사람들은 지금 동굴 속에 숨어 있습니다. 설사 그들이 그런 무기를 보유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우리 전문가들은 그것이 그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먼 곳에 있다고 확언해 주었습니다.”
  
  나는 그의 보좌관들 중에는 ‘죽음의 核商人(핵상인)’ A. Q. 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시점에서 토의 주제를 칸 쪽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 문제는 다음에 토의할 수 있었다. 당면 과제는 UTN이었고, 칸은 다른 문제였다.
  
  
  “우리가 이미 그 물질을 가지고 있다면?”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나는 파키스탄 정부가 신속하게 시행해야 할 일련의 긴급조치 항목을 열거했다. 나는 파키스탄 군부 안에 있는 특정 그룹과 정보기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UTN에 대한 더 철저한 조사와 함께 파키스탄은 면밀하게 핵물질의 在庫(재고)조사를 할 시기가 되었다고 건의했다. 나는 대통령에게 “우리가 각하를 믿을 수 있다고 부시 대통령에게 보고해도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내가 워싱턴으로 돌아간 뒤 무샤라프 대통령이 약속을 지켰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파키스탄 당국은 UTN 지도부에 대한 訊問(신문)을 강화했다. 그들은 우리가 전달한 모든 단서를 철저하게 조사했다. 미국 전문가 팀이 도착하자 그들은 UTN의 핵심간부들에게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했고, 결국 자백을 받아냈다.
  
  마무드는 2001년 8월 오사마 빈 라덴과의 회담에 관해 우리가 들었던 것을 전부 확인했고, 알 카에다 지도자들에게 제공했던 폭탄의 설계도까지 간단히 그려 내놓았다. 그는 조사관들에게 무기를 만들기 위한 실제적인 문제도 토의했다고 말했다. 그는 빈 라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필요한 핵분열 물질을 입수하는 것입니다.”
  
  빈 라덴은 대답했다.
  
  “우리가 이미 그 물질을 가지고 있다면?”
  
  그 대답에 마무드는 놀랐다. 그는 빈 라덴의 말이 단순한 가정적 反問(반문)이었는지, 아니면 그가 이미 다른 곳에서 구해 놓은 핵분열 물질과 부품을 사용할 설계도를 구하고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이름을 알 수 없는 고위 알 카에다 지도자가 방문자들에게 일종의 핵물질이나 방사능 물질을 담았을 가능성이 있는 통을 하나 보여 주었는데, 이 부분의 설명은 모호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우리는 모든 단서와 자료를 검토해서 UTN이 WMD를 알 카에다에게 제공했는지 판단하려고 했다. 우리는 중요한 단서를 많이 추적했다. 그 결과 우리는 알 카에다와 거래하려고 했던 이 조직을 초기에 와해시켰다. 그때는 우리가 몰랐고, 지금 알고 있는 것은 UTN과 같은 조직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옛 蘇聯(소련)에서 유출된 핵물질의 안전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었다. 우리가 러시아에 핵물질이 행방불명되지 않게 보장해 달라고 요청할 때마다 그들은 모든 것이 “통제중”이라고 마지못해 대답했다.
  
  9·11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푸틴 대통령을 만난 부시 대통령이 직접 UTN에 대한 브리핑을 하고 러시아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물질의 소재를 확인할 수 있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푸틴의 답변: “내 임기중엔 안전”
  
  푸틴은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쓰면서 “모든 것을 확인하여 내가 직접 감시할 수 있을 것임을 자신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전 옐친 정권의 기간에 대해서는 보장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의도적인 모호한 대답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해체 이후 처음 몇 년 동안 생긴 밀반출 사건에 대해서 특별하고 면밀한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2002년 말에서 2003년 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사우디 아라비아에 있는 알 카에다 지도층이 3개의 러시아製(제) 핵장치를 구입하기 위한 협상을 하고 있다는 신뢰성 있는 보고를 많이 받았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알 카에다 책임자 아부 바크르는 그 제의를 이란에 있는 알 카에다 지도부에 직접 전달했는데, 그곳에서 사이프 알아델과 압델 알아지즈 알마스리( 알 카에다의 ‘핵 책임자’라고 지목된 사람)는 이란 당국에 의해 느슨한 가택연금 형식으로 억류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알 카에다 지도부는 1990년대 초 핵 시장에 진입하려던 노력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 것이 틀림없었다. 사이프 알아델은 아부 바크르에게, 그런 무기를 입수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비싼 가격이라도 지불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아부 바크르에게, 과거에 알 카에다가 사기를 당한 일이 있었던 만큼 구입하기 전 파키스탄 과학자들을 사우디 아라비아로 데려와서 물품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나는 알 카에다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핵부품을 구입하기 위한 협상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즉시 사우디 아라비아의 駐美(주미)대사 반다르 왕자와 접촉하고 우리가 가진 자세한 자료를 주었다.
  
  이런 위협적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사람들이 흔히 그런 것처럼 반다르는 믿지 않았다. 나는 반다르에게 말했다.
  
  “비록 그들이 사우디 지도층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 나라의 중요한 석유 유통시설 한복판에서 핵무기가 폭발한다면 당신과 우리나라의 경제는 큰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증대되고 있는 위협의 실상에 큰 충격을 받은 반다르는 사우디 왕국 내에 있는 알 카에다를 추적해서 체포하도록 정부를 설득하기로 동의했다. 그것은 사우디 아라비아가 극단주의자의 위협을 자신의 생존에 영향을 주는 문제로 다루기 시작한 전환점이 됐다.
  
  2003년의 봄에서 여름에 이르기까지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는 전례가 없던 규모로 CIA의 지원을 받으면서 일련의 대대적인 先制(선제)작전을 감행하여 사우디 왕국 내에서 많은 테러리스트 공격을 좌절시켰고, 그 과정에서 사우디 아라비아 안에 있던 알 카에다 지도부가 붕괴됐다.
  
  
  러시아 정보기관의 비협조적 자세
  
  나는 2003년 이른 여름,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한창 단속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관계 책임자를 부시 대통령과 콘돌리자 라이스가 참석한 회의에 데리고 가서 러시아製(제) 핵장치 건에 대하여 설명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걱정을 했다. 그는 러시아가 테러리즘에 대한 전쟁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러시아가 체첸 문제에 정신이 팔려 있고, 테러리즘에 대한 全(전)세계적 전쟁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망한 대통령은 콘돌리자 라이스에게 러시아가 싸움에 나서도록 하고 현재의 위협을 완전히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러시아 국방장관 이바노프에게 전화를 걸어 부시 대통령의 우려를 설명하고, 각자의 정보기관이 WMD 위협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한다는 보장을 받도록 하자고 건의했다.
  
  국방장관 이바노프는 우리의 우려를 이해하고 즉시 CIA 대표를 모스크바에서 만나보겠다고 말했다. 나는 담당자인 롤프에게 모스크바로 가서 러시아 정보당국과 회의를 하라고 지시했다. 롤프는 모스크바에 있는 낡은 KGB 본부 회의실에 걸린 前(전) KGB 책임자 안드로포프의 초상화 아래서 “冷戰(냉전)시기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방식으로 협동하여 일을 하자”고 러시아 측에 역설했다. 양측은 두 나라의 국가안보상 이익이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밀접하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그 뒤 고위급의 압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WMD 위협을 다루는 데 필요한 긴밀하고도 구체적인 협조 방안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최종적인 분석에서는 아직도 스파이 對(대) 스파이의 게임이 되었다. 양측은 그런 문제에서 해결점을 찾기에는 오랫동안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다.
  
  러시아인들은 자세히 기록하면서 우리가 공유하려고 했던 첩보에 관해 날카로운 질문을 했다. 그러나 우리가 질문을 하기 시작하자 그 대화는 어색해졌다. 러시아인들은 옛 蘇聯(소련)으로부터 사라진 물질에 관해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관해 해명할 수 없었다. 그들은 알 카에다와 협조한 것으로 보도된 前(전) 소련과학자의 이름도 확인해 주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핵시설과 핵무기의 안전에 관한 문제는 토의하기를 거절했다.
  
  실망한 채 워싱턴으로 돌아온 롤프는 나에게 그런 민감한 국내적 보안문제에 대해서 러시아로부터 더 이상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정보 상호교류의 질을 향상시키려면 근본적인 정책전환이 있어야 했다. 내가 은퇴할 무렵에는 그 다리를 넘어가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버섯구름 하나면 역사를 바꿀 수 있다”
  
이라크 무장단체인 ‘일신교와 성전’의 지도자 알 자르카위. 2004년 인터넷을 통해 미국인 닉 버그 참수 살해 장면을 공개했고, 김선일 피살사건 등도 그가 지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6년 6월, 그는 미군 특수부대와 요르단군 합동공습으로 사망했다.

  2003년 여름, 소량의 고농축우라늄(HEU)을 가지고 그루지야에서 아르메니아로 국경을 넘어가려던 한 사람이 체포됐다. 압수된 물질의 양은 핵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에 훨씬 미치지 못했지만, 우리는 조직범죄단, 밀수조직망, 그리고 핵시설 내의 부패관리가 합동하여 그런 상품에 대해서 현금으로 지불하려는 고객을 찾으려고 노력 중이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비록 이 기도는 무산되었지만, 한 테러리스트 그룹이 핵장치를 제조하기에 충분한 물질을 구입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우리는 핵장치 음모 이외에도 빈 라덴과 그의 보좌관들이 생물학 및 화학무기를 입수하려던 노력에 대해서 가능한 모든 정보를 얻으려고 열심히 일했다.
  
  알 카에다의 고위 추종자인 아부 무삽 알 자르카위는 2002년 5월부터 2003년 초까지 북부 이라크의 쿠르말 마을에서 화학 및 독극물 연구실과 훈련시설을 운영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알 자르카위는 쿠르말에서 그가 개발한 청산가리의 치사(致死) 능력을 무고한 동료에게 시험해서 惡名(악명)을 확립했다. 그 독물은 효과가 있었고, 영문을 몰랐던 동료는 고통스럽게 죽었다.
  
  알 자르카위는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에 지하드주의자를 위한 훈련캠프를 운영하고 있을 때부터 함께 있던 부하들을 이라크로 데리고 왔다. 그는 알제리인, 모로코인, 파키스탄인, 시리아인, 그리고 全(전)유럽의 기타 아랍 극단주의자들과 연계할 수 있었다. 우리는 몇 달 동안 꾸준히 그 연결망을 분석한 결과 30개국 이상에 존재하는 알 자르카위 테러리스트 세포망을 확인했다.
  
  유럽에 기지를 둔 이 조직망을 조직적으로 파괴한 것은 9·11 이후 테러리즘에 대한 전쟁에서 거둔 위대한 성공의 하나였다. 20개가 넘는 나라로 구성된 全(전) 세계적 연합체가 실시간으로 서로 정보와 첩보를 교환했다. 수많은 공작원과 스파이가 체포되었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음모가 분쇄되었고, 무엇보다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우리는 대통령, 부통령, 그리고 다른 고위 행정부 관리들에게 끊임없이 우리의 대응과정을 알려 주었다.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침공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쿠르말에 있는 알 자르카위의 캠프가 미군의 폭격을 받았다. 우리는 그 캠프에서 독극물과 독소가 그곳에서 생산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법의학적 표본과 신뢰할 만한 人的(인적) 정보를 얻었다.
  
  알 자르카위의 운명에 대해서는 그가 바그다드로 도망했으며, 그곳에서 미군에 대한 저항을 지휘할 계획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알 자르카위는 2006년 중반에 죽을 때까지 그 저항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WMD를 입수하려는 알 카에다의 모든 노력 중 핵심적인 것은 핵무기다. 나는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공작원들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목표가 바로 핵무기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들이 자동차나 트럭, 기차, 항공기를 폭파하면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 있으나 만약 버섯구름을 일으킬 수 있다면 역사를 만들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알 카에다가 초대강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고, 미국의 경제를 파괴하고 모든 미국인의 가정에 죽음을 가져다 주겠다는 빈 라덴의 위협을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테러리스트들은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있다. 월드트레이드센터를 공격하는 첫 계획은 쌍둥이 타워가 붕괴되기 10년 전에 작성됐다.
  
  내 임기 중 있었던 두 개의 성공적인 작전은 약간의 긍정적인 대중적 관심을 끌었다. 파키스탄 A. Q. 칸의 核(핵)확산조직망 해체와 리비아의 WMD 계획 제거는 미국의 정보기관이 할 수 있고, 반드시 해야 하는 고전적인 활동의 사례다. A. Q. 칸의 核확산조직망 해체는 내가 CIA 부장으로 7년간 근무하는 동안 줄곧 집중했던 계획이다. 이 조직에 대한 우리의 노력은 CIA에서 가장 엄격하게 비밀을 지켰던 사례의 하나다. 나는 진전 상황에 대해 대통령에게만 보고를 했다.
  
  
  압둘 칸의 核확산 조직망 해체작전
  
1998년 5월 파키스탄의 핵실험 성공소식에 환호하는 파키스탄인들.

  冶金(야금)전문가인 압둘 콰디르 칸은 파키스탄에서 핵무기 계획의 아버지였다. A. Q. 칸으로 알려지게 된 그는 유럽에서 공부했고, 1972년 벨기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네덜란드의 핵에너지 업계에서 일하다가 1976년 파키스탄으로 돌아오기 직전에 최초의 핵실험을 한 인도와 경쟁하는 조국을 도왔다. 칸은 유럽 회사로부터 파키스탄이 핵시대에 뛰어들게 만든 청사진과 정보를 훔쳤던 것이다(칸은 1972년 벨기에 법정의 궐석재판에서 핵스파이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2년 후 기술적인 문제로 이 판결은 번복됐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칸은 공격적으로 우라늄 농축 계획을 추진했다. 파키스탄 내에서 그에 대한 존경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에 결국 그 연구시설은 그의 이름을 따서 칸 연구소(KRL)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979년, 미국은 파키스탄에 대해 무기급 우라늄을 생산하려 한다는 우려 때문에 군사 및 경제원조를 중단했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파키스탄이 독자적으로 폭탄을 만들기에 충분한 핵분열 물질 제조에 성공했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칸이 파키스탄 국경 너머로 그의 치명적인 기술을 수출하고 있다는 소문과 단편적인 첩보가 있었다. 그의 국제적인 접촉 범위는 중국, 북한, 그리고 무슬림 세계까지 미치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핵기술과 물질을 다른 군사장비와 바꾸고 있다는 示唆(시사)도 있었다. 예를 들면 탄도미사일 기술 이전을 받는 代價(대가)로 북한에 우라늄 농축 기술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그가 파키스탄 정부의 요청이나 지원을 받아서 어디까지 일을 했고, 그 범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기가 무척 어렵다. 칸은 봉급이 얼마 되지 않는 정부의 피고용자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의 帝國(제국)은 극적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영국 정보기관의 도움
  
  CIA는 핵 확산활동 조직에 침투하려는 엄청난 노력의 결과로 그들의 거래 규모를 알게 됐지만, 이런 종류의 조직망을 조사할 때는 긴장이 있었다. 核(핵)확산에 관해서 어떤 단편적인 정보를 발견하면 본능적으로 즉시 행동을 하려는 충동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런 충동을 억제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거기서부터 나오는 실마리를 추적하여 작전을 시작했을 때 그 조직망의 뿌리와 가지 모두 제거할 수 있다. 頂上部(정상부)만 뽑아 버리면 다시 살아나 성장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말, 이 임무를 맡고 있던 CIA의 對확산부(CPD)는 한 노련한 직원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는 어렸을 때 히로시마 폭격에 관한 책을 읽고 핵폭탄이 가져올 수 있는 참화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책은 7만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을 죽인 13kt짜리 ‘리틀보이’ 폭탄에서 나온 폭풍이 어떻게 세 사람을 태워 그들의 그림자를 벽에 남겨 놓았는지를 묘사했다. 사람들은 그대로 증발해 버렸던 것이다. 그 정신적 影像(영상)은 그 직원의 의식 속에 각인됐고, 그가 나중에 핵무기가 나쁜 사람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일에 참여하는 동기가 됐다.
  
  이 임무를 위해 일하는 소규모 팀은 재래식 정보수집 기술로는 核(핵)확산조직망에 침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보안상의 고려 때문에 우리가 사용한 기술을 설명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흔히 있었던 것처럼 영국 정보기관의 동료들이 우리를 도왔는데 그것은 이 목표에 대한 작전에서 대단히 중요했다.
  
  우리는 파키스탄에서 유럽, 중동, 아시아로 확장되어 있는 칸의 숨겨진 조직망을 발견했다. 우리는 이 조직의 그림을 맞추어서 그 자회사, 과학자, 위장 회사, 대리점, 금융, 그리고 제조공장을 찾아냈다.
  
  우리가 이 작전에서 알아낸 것은 엄청났다. 우리는 칸이 그의 고객에게 불법적인 우라늄 원심분리기 같은 것을 제공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A. Q. 칸은 북한, 이란, 남아프리카에까지 걸친 핵확산 기도의 배후 주모자였다. 우리는 부시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우리 직원 중 한 사람이 부시 대통령에게, 방금 입수한 우라늄 농축과 핵무기 설계도에 관한 첩보만 가지고도 CIA는 독자적인 핵보유 단체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핵폭탄 설계도를 팔다
  
  2003년 중반, 우리는 칸의 조직망이 고객을 위해 우라늄 농축장비를 생산하고 있던 곳에 대해서 상당한 정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그곳에 대한 행동을 검토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칸의 계획을 잠정적으로 후퇴시킬 수는 있지만 다른 곳에서 다시 솟아나는 것은 막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대담한 해결책을 마련했다.
  
  우리가 알아낸 것은 칸과 그의 동료들이 우라늄을 농축하는 원심분리기 청사진뿐만 아니라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훔친 核(핵)설계도까지 팔았다는 사실이다. 이 조직망은 핵폭탄 제조용 농축우라늄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원심분리 과정에서 사용되는 가스인 6불화우라늄도 팔았다.
  
  칸과 그의 동료들은 이란, 리비아, 북한에 파키스탄의 舊型(구형) 원심분리기는 물론 좀더 신형이고 효율적인 모델도 팔았다. 이 조직망은 또 이 나라들에 원심분리기의 부품, 어떤 경우에는 완성품을 팔았다.
  
  칸과 그의 동료들은 말레이시아에 있는 공장을 사용해서 주요 장비를 생산했다. 다른 부품은 유럽, 중동, 아프리카에 있는 조직망의 공작원들이 입수했다. 칸의 대리자인 B. S. A. 타히르는 두바이에서 컴퓨터 사업을 하면서 그것을 칸의 조직망을 위한 위장회사로 사용했고, 이 조직망의 재정책임자로서 돈세탁을 했다.
  
  우리는 칸과 그의 협조자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고 행동할 단계에 도달했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칸의 거래를 그의 정부가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또 지원을 받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알아내는 일이 우리 임무였다.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대통령은 9·11 이후 영웅적인 결단으로 우리들이 알 카에다 및 탈레반과 싸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제 나는 파키스탄을 핵국가로 만들고 自國(자국)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을 조사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요청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뉴욕 호텔서 무샤라프에 들이대다
  
파키스탄 핵개발의 아버지로 국제적 핵 밀매망을 구축했던 압둘 칸 박사.

  이런 이야기는 전화로 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는 자리에서 그런 요청을 할 수도 없다. 그러던 중 무샤라프가 UN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으로 오게 되어 나는 2003년 9월 24일 단독면담을 요청했다. 우리는 그의 호텔 방에서 만났다. 그것은 우리 정보기관들이 ‘포 아이즈(4개의 눈)’라고 부르는 두 사람만의 회담이었다. 수행원도 없었고, 기록자도 없었다.
  
  나는 테러리즘에 대한 전쟁에서 그가 용기 있게 지원해 준 데 감사하는 말로 시작하면서 몇 가지 나쁜 소식을 전하겠다고 말했다.
  
  “A. Q. 칸이 각하의 조국을 배반하고 있습니다. 그는 貴國(귀국)의 가장 민감한 비밀을 훔쳐내서 최고 입찰자에게 팔았습니다. 칸은 핵무기 비밀을 훔쳤습니다. 우리는 관련 자료들을 그에게서 훔쳤기 때문에 전모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서류가방에서 칸이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훔친 핵폭탄 설계도의 청사진과 도표를 꺼냈다. 나는 핵물리학자는 아니었고, 무샤라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지만, 나의 팀으로부터 충분한 브리핑을 받았기 때문에 그 도표에 그려놓은 표지를 지적하면서 그 설계도가 뉴욕의 호텔방이 아니라 이슬라마바드의 금고 속에 있어야 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나는 파키스탄의 P1원심분리기 설계도 청사진을 꺼내 보여 주면서 그가 그것을 이란에 팔았다고 말했다. 나는 차세대 P2 원심분리기 설계도를 보여 주고 그것도 몇 나라에 팔았다고 말했다. 나는 쉴 틈을 주지 않고 또 한 장의 문서를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보여 주면서 칸이 리비아에 판 우라늄 처리공장의 설계도라고 말했다. 문제의 규모나 범위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무샤라프는 나중에 그것이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동안 가장 당혹스러운 순간이었다고 말했지만, 그때는 아무런 감정도 보여 주지 않았다. 나는 그가 침착한 사람이고, 모든 이야기를 경청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가 칸의 해외여행을 제한하려고 했던 2001년 3월 이후 그에 관해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 제한에도 불구하고 칸이 여행한 수십 개국의 긴 명단을 보여 주었다. 우리가 이야기를 하고 있던 때도 칸은 해외에서 세일즈 여행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대통령 각하, 만약 리비아나 이란 같은 나라, 또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알 카에다 같은 조직이 실제로 작동하는 핵장치를 입수하게 된다면, 그리고 세계가 그것이 당신의 나라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결과는 파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파키스탄과 미국이 공동으로 칸의 부패 전모를 밝혀내고 그런 일에 영원히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몇 가지 단계를 제시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고맙다고 하면서 자기가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압둘 칸 無力化되다
  
이라크 바그다드 캠프 빅토리 기지에 주둔하는 미군 병사들이 2007년 7월 7일 바그다드 시내 순찰에 나서기 전 원을 그린 채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파키스탄으로 돌아간 지 얼마 안 되어 알 카에다가 주동한 암살기도를 두 번이나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12월이 되자 칸 연구소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2004년 1월 25일 파키스탄 수사당국은 칸이 수천만 달러를 받고 이란의 핵개발 계획에 불법으로 기술 원조를 했다고 발표했다. 6일 후 칸은 무샤라프의 과학고문직에서 해임되어 조사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2월 초, 파키스탄 정부는 칸이 이란, 리비아, 북한에 핵무기 개발 계획을 돕기 위한 설계와 장비를 지원했음을 시인하는 자백서에 서명했다고 발표했다.
  
  칸은 2월 4일 파키스탄의 텔레비전에 나와서 영어로 3분간 연설했다.
  
  “나는 내 행동에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지고 여러분의 용서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는 깊은 슬픔과 번민, 유감을 표시하면서 자기 행동은 선의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판단 착오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전적으로 자기 책임이라고 말했다.
  
  “정부로부터는 이 활동에 대해 절대로 어떤 종류의 허가도 받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무샤라프는 그를 사면했지만 무기한 가택연금 상태로 두었다. 우리는 칸이 재판을 받고 미국 및 국제원자력기구(IAEA) 조사관들이 그의 거래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래도 그 결과는 중요한 승리라고 할 수 있었다.
  
  새로운 핵확산의 세계에서는 턴키방식의 핵무기 계획을 최고입찰자에게 팔 능력을 가진 어둠의 조직이 등장하고 있다. 은행가, 법률가, 과학자, 그리고 사업가들의 조직망은 핵무기 생산에 필요한 설계도, 원자재 및 제조능력을 입수하려는 사람들에게 원 스톱 쇼핑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칸의 도움이 있으면 작은 후진국도 핵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
  
  우리 정보요원들의 조그만 그룹은 동맹국인 영국과 긴밀하게 협조하면서 거의 10년간이나 칸의 조직망을 인내심을 가지고 추적했다. 그들은 훌륭한 성공을 거두었다. 나는 CIA 국장 임기가 끝나기 전날 그 조그만 사무실로 내려가서 그 임무를 지휘했던 직원과 팀 전체에게 메달을 달아 주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칸과 같은 조직망이 탐지되지 않은 채 활동하면서 현금을 지급하겠다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그 치명적인 정보와 물품을 팔겠다고 제의하는 일이 얼마나 많으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장에서는 1000만 달러만 있으면 독자적인 核(핵)세력이 될 수 있다.
  
  
  CIA, 99년부터 리비아와 비밀접촉
  
  칸의 조직망은 또 하나의 정보전의 성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이 활동한 결과 오랫동안 불량국가로 있던 리비아는 총 한 방 쏘지 않고 대량살상무기계획을 포기했다.
  
  CIA는 1999년 이래 고위 리비아 관리들과 비밀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노력은 테러리즘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고, 다양한 이슬람 테러리스트 그룹에 관해 리비아로부터 알아낼 수 있는 것을 배우는 데 집중되고 있었다. 이 모임은 우리 영국의 동료들과 함께 진행되었고, 유럽의 몇개 도시에서 열렸다.
  
  리비아 대표단은 무아마르 알 카다피 대령의 정보책임자 무사 쿠사가 이끌었다. 그는 1978년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이었다. 우리가 활동해야 하는 초현실적 세계를 보여 주듯이 CIA 요원들은 1988년 12월 팬암 103편을 폭파해서 270명을 죽인 사건의 배후 주모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과 인사를 교환하는 상황이 됐다.
  
  이런 접촉은 스코틀랜드 법정이 한 리비아 정보요원에게 그 항공기 폭파에 가담했다고 유죄판결을 내리고, 다른 사람은 석방할 때까지 몇년 동안 계속되었다. 리비아의 스코틀랜드 재판 협조와 그 밖의 행동은 속임수가 분명했지만, 20년 넘게 이 나라가 추구해 온 테러리즘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려는 첫 신호로 해석될 수 있었다.
  
  9·11 공격 이후 카다피는 공개적으로 그 테러리스트 활동을 규탄하면서 “끔찍하다”고 말했고, 리비아 국민은 미국에 인도적 원조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발표했다. 그것은 흥미 있는 신호였다.
  
  우리는 9월 11일 이후 리비아와 몇 가지 테러리스트 추적 데이터를 교환했지만, 우리의 관심은 아프가니스탄 내 알 카에다의 추적에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그 접촉은 한동안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자 2003년 3월, 카다피의 특사가 영국 관리들과 비공식적으로 접촉했다. 그는 카다피가 WMD 계획을 포기할 생각을 하고 있으며, 만약 그렇게 한다면 서방 측이 리비아에 대한 제재를 완화하겠느냐고 물었다.
  
  영국의 한 고위 정보관리가 이라크 전쟁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 미국으로 날아왔다. 나는 그 다음날 그를 만났다. 5일 후 나는 캠프 데이비드에서 부시 대통령 및 영국 총리 블레어를 만났다. 블레어는 내 상대자인 리처드 디어러브와 함께 있었다.
  
  ‘스파이 중의 스파이’라는 리처드는 내가 함께 일해 본 정보기관 관리 중 가장 노련하고 재능있는 사람이었다. 매우 신중하고 정연한 그는 대서양 양쪽에 있는 두 정치 지도자들로부터 금방 신뢰를 얻었다.
  
  우리들은 이라크에 관한 이야기로 대부분 시간을 보냈지만, 카다피의 놀라운 제안을 토의했다. 당시는 이라크에 대한 침공을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전쟁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사담의 핵, 생물학 및 화학계획에 대한 우려 때문에 시작되었는데, 느닷없이 또 하나의 불량국가가 그들의 계획을 포기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나선 것이다.
  
  
  비밀 접촉장에 이스라엘 총리 등장
  
  우리는 카다피의 동기에 대해 토의했다. 리비아인들은 대단히 값비싼 WMD 획득 노력에서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들은 세계 안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리비아는 아랍과 아프리카 양쪽에서 奇人(기인)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이라크 주변에 배치된 15만명의 미군이 그의 심리에 주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동기가 무엇이든, 그것은 우리가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었다. 캠프 데이비드에서 돌아와 비밀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최고위 직원인 짐 패빗과 스티브 캐프스를 사무실로 불렀다. 리비아와의 접촉 통로를 설명해 주고 고위 수준에서 극도로 신중하게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말했다.
  
  패빗과 나는 이라크 ‘자유 작전’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완벽한 적임자인 스티브를 발견했다. 그는 내가 아는 가장 유능한 공작원 담당 요원이었다. 러시아어와 파르시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는 CIA가 지시한 가장 어려운 임무도 훌륭히 완수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그 임무를 주고 이라크 문제로 다시 돌아갔다.
  
  스티브와 그의 상대인 영국의 고위 정보관리는 각각 자기 소속 기관을 위해서 협조했다. 그들은 진정으로 WMD 계획을 포기하려고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리비아와의 회의를 마련했다.
  
  스티브와 그의 영국 동료는 4월 중순 한 유럽의 도시로 날아갔다. 처음에는 그들이 리비아의 정보책임자 무사 쿠사와 리비아의 외교관 푸아드 실트니를 호텔에서 만나 아침을 먹을 계획이었다. 스티브와 그의 동료는 그 호텔의 레스토랑 내부를 모두 바라볼 수 있는 테이블을 골랐다.
  
  약속시간 조금 전에 중동인의 모습을 한 젊은이 두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스티브는 그들이 보안 전문가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얼마 후 전 이스라엘 총리 에후드 바라크가 레스토랑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민감한 토의를 할 수 있는 조용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스티브가 그 이스라엘인을 계속 주목하고 있는 동안 영국인은 그 리비아인들을 데리고 호텔의 제일 위층에 있는 회의실로 갔다. 스티브도 곧 그들과 합류했다.
  
  자리가 정리되자 키가 크고 정장을 한 무사 쿠사는 리비아의 입장에 관해 준비해 온 긴 연설을 시작했다. 우리는 그 첫 회의에서는 어떤 미국의 문서도 주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스티브는 리비아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돌아오는 데 필요한 조처를 취하기 바란다는 부시 대통령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 첫 회담은 두 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약간의 토의가 있은 후 무사 쿠사는 사실상 리비아가 자기들이 서명한 모든 국제적인 무기통제조약을 위반했다는 것을 시인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리비아가 무기계획을 포기하려고 하며,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믿어 주어야 한다고 말한 뒤 우리에게 선의의 표시를 요청했다.
  
  스티브와 그의 영국 동료는 레이건 대통령의 유명한 ‘신뢰 그러나 검증’이라는 개념을 설명해 주고, 우리가 전문가를 리비아로 보내 리비아의 무기 보유 현황을 검증하고, 계획이 해체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두 나라 어느 쪽으로부터도 선의의 표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티브가 돌아오자 나는 그를 백악관으로 데려가서 대통령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비록 구체적인 것은 없었지만 우리는 진정한 돌파구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우리와 영국은 리비아에 가서 그들의 계획을 조사할 수 있는 WMD 전문가팀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카다피, 열변 뒤의 미소
  
카다피의 아들 사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

  리비아는 지연전술을 쓰기 시작했다. 그들은 외국인들에게 자기들의 무기계획을 조사하며 돌아다니게 할 태세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5월 중순 런던으로 날아가 영국의 정보국장을 만났다. 같은 달 말 스티브와 한 고위 영국 정보관계자가 리비아인들에게 유럽의 한 수도에서 만나자고 초청했다. 카다피의 아들 사이프 알 이슬람이 무사 쿠사와 함께 그 모임에 참석했다.
  
  사이프는 끈질긴 협상자의 역할을 시작하면서 스티브와 그의 영국인 동료에게 리비아가 어떤 조치를 취하기 전에 자기들이 우리에게서 기대하고 있는 것을 설명했다. 스티브와 그의 영국인 동료는 한동안 그가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말을 중단시켰다. 스티브는 말했다.
  
  “우리 요원들이 당신 나라에 가서 당신이 무기 저장량과 의도에 관해 우리에게 한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전에는 어떤 양보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돌아가서 당신 아버지에게 그렇게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리비아 측에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몇 달이 흘렀다. 8월에 다시 회담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카다피의 아들이 참석하지 않았다. 무사 쿠사는 스티브와 그의 영국인 동료에게 리비아로 와서 카다피를 직접 만나라고 초청했다. 부시 대통령은 우리에게 리비아의 의도에 관한 확실한 증명과 그들이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보기 전에는 아무런 약속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스티브와 그의 영국인 동료는 9월 초에 트리폴리로 날아갔다. 중동에서는 흔히 그런 것처럼 그 회담은 몇 번이나 연기되었다. 그들은 지중해 한 끝에 있는 호텔에서 기다렸다. 무사 쿠사는 카다피와 만나면 처음 몇 분 동안은 ‘약간 거칠 것’이라고 그들에게 경고했다.
  
  마침내 그들은 저녁 때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무사 쿠사는 직접 차를 몰아 그들을 카다피의 사무실로 데려갔다. 그는 가는 도중 한 곳을 가리키며 1986년 미국의 폭격으로 카다피의 양녀 한 명이 사망한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카다피의 커다란 사무실로 들어갔다. 개인컴퓨터가 설치된 커다란 책상 양쪽에 커다란 지구의가 하나씩 있었다(스티브는 카다피가 웹을 서핑하면서 외부세계의 진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카다피는 값비싼 이탈리아제 로퍼(簡便靴)를 신고, 아프리카의 지도가 인쇄된 번쩍거리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방문자들은 짤막한 소개를 한 후 의자에 앉았다. 무사 쿠사는 마치 무슨 일이 닥칠지 알고 있다는 듯 머리를 숙였다. 그의 통역이 종이철을 꺼냈다. 카다피는 즉시 큰 목소리로 서방 측, 특히 미국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면서 통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통역은 카다피가 쏟아 내는 아랍어를 따라가느라고 큰 고역을 치렀다.
  
  장광설이 17분가량 계속되었을 때 마치 그의 폭언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듯 무사 쿠사의 머리가 올라갔다. 카다피는 기운이 소진된 듯 처음으로 잠깐 말을 멈추더니 미소를 짓고 말했다.
  
  “반갑습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는 회담을 하기 시작했다.
  
  
  눈감아준 密輸
  
  그는 계속 과거를 깨끗이 지우고 싶다고 말했다. 모든 것이 토의 대상이 되었다. 리비아의 WMD 계획이 언급되자 카다피는 화를 내며 WMD 계획은 없다고 주장했다. ‘대량살상무기’가 정확히 무엇이냐에 대한 토의가 뒤따랐고, 그 다음 다른 의제로 나아갔다. 누군가가 “미국과 영국은 리비아의 무기시설을 검사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시 카다피는 화를 냈지만, 우리 측이 그것을 ‘검사’라는 말 대신 ‘방문’이라고 부른다면 큰 문제는 없으리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 회담은 2시간30분 동안 계속되었다. 회담은 카다피가 “무사 쿠사와 협의해서 하라”는 말을 한 것 이외에는 아무런 결론 없이 끝났다. 그러나 방문자들은 그 사무실을 나오면서 그 회담에 참석하지 않았던 카다피의 아들 사이프가 즉시 그들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은 사이프의 비치 하우스로 안내되었다. 그의 보좌관들이 거실의 家具(가구)를 꺼내서 지중해의 모래 위에 내다 놓은 것 같았다.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들은 늦은 만찬을 즐기면서 리비아 지도자의 아들에게 회담 내용을 알려 주었다.
  
  스티브가 돌아오자 나는 다시 그를 데리고 가서 대통령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나는 스티브가 상황을 과대 포장하거나 과소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대통령에게 자신의 판단을 이야기하면서 리비아인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지금 그런 거래를 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공포가 우리만큼 크다고 말했다. 만약 그들이 서방 측과 우호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우수한 자제들을 미국 대학에 보낼 수 있고, 메이저 석유회사를 유치하여 지금은 불가능한 경제적 번영을 촉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문제는 극비로 되어 있었다. 나는 콜린 파월에게 그 이야기를 해 주었고, 리치 아미티지와 국무부의 중동문제 담당자인 빌 번스에게도 설명해 주었다. 만약 이 노력이 궁극적으로 성공한다면 리비아와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작업은 그들의 일이 되기 때문이다.
  
  2003년 가을, A. Q. 칸과 리비아 등 우리가 거둔 두 가지 성공에 관한 내용이 등장했다. 우리는 칸의 조직망에 대한 작전을 통해서 독일 船籍(선적)으로 되어 있는 BBC 차이나호가 원심분리기 부품을 싣고 리비아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 배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 후 이탈리아 항구 타란토로 항로를 바꾸도록 만들었다. 이 배는 10월 4일 그 항구에 도착했다. 검사관들은 積荷(적하)목록에 단순히 ‘중고 기계부품’이라고 되어 있는 40피트짜리 컨테이너에 정교하게 제작된 원심분리기 부품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美·英 검사팀, 리비아를 뒤지다
  
  우리는 그 선적화물을 가로챌 수 있었다는 사실에 쾌재를 불렀지만, 그때는 지나치게 문제를 확대하고 싶지 않았다. 이 사건을 이용해 리비아인들에게 우리가 그들의 계획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모든 WMD를 포기하도록 인센티브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고위 관리를 카다피에게 보내 그 압수 이야기가 신문에 나기 전에 알려 주었다. 리비아인들은 그 선적은 현재의 비밀협상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마련된 것이고, 그 담당자는 임박한 WMD 포기 결정을 모르고 있었다고 해명했다.
  
  미국 정부의 관리들 중에도 리비아와 진행 중인 막후협상에 대해서 알고 있는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비밀을 모르고 있던 한 저명인사는 그 압수사건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싶어 했다. 우리는 국무부의 군축담당 차관 존 볼턴이 그 사건을 대통령이 추진한 ‘핵확산저지계획’의 위대한 성공사례로 내세울 기자회견을 열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년 전에 시작된 이 계획은 불법적인 무기船積(선적)을 제한하기 위한 국제적 협조를 강화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BBC 차이나호의 나포는 그 계획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우리는 미국 관리들이 비록 옳지만 상투적인 리비아 규탄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카다피가 당혹한 나머지 모든 거래를 취소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우리가 추진 중인 노력을 알고 있는 국무부 관리 중 한 사람인 리치 아미티지에게 전화를 걸어 볼턴이 기자회견을 하지 않도록 부탁했다. 그 지시를 이해할 수 없었던 볼턴은 스티브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에게 직접 알려주지 않았다고 화를 냈다.
  
  리비아가 결국 검사팀이 자기 나라를 방문할 수 있도록 허용한 뒤 소수의 CIA 무기전문가가 미국에서 영국으로 날아가 그들의 영국인 동료를 태웠다. 10월 10일, 그들은 아무런 표지가 없는 비행기를 타고 트리폴리로 날아갔다.
  
  ‘미합중국’이란 표지가 붙은 제트기가 착륙하는 모습은 리비아인이나 우리 모두가 설명하기 힘든 일이었다. 착륙하기 직전 조종사는 스티브 캐프스에게 트리폴리 공항이 착륙을 허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것이 단순한 관료적 절차의 착오인지, 아니면 리비아가 다시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스티브는 의문이 있으면 무사 쿠사에게 물어보도록 관제탑에 말하라고 승무원에게 지시했다. 몇 분 안 되어 착륙허가가 나왔다. 스티브는 리비아 당국이 그들의 도착을 비밀로 하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행기가 터미널을 향해 접근하고 있을 때 창밖을 내다 본 스티브는 군악대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알고 보니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군악대는 다른 고위인사를 맞기 위해 나왔던 것이었다. CIA 비행기는 멀리 떨어진 곳에 멈추었다.
  
  이틀 동안은 별로 진전이 없었지만, 10월 21일 카다피는 스티브에게 단독으로 만나고 싶다는 요청을 했다. 카다피는 큰 사무실에 앉아 목소리를 높여 상투적인 연설을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말을 멈추고 WMD 계획을 포기하면 미국이 정말 약속을 이행할 것이냐고 물었다. 스티브는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대통령은 약속을 지키는 분입니다. 그러나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대통령은 아주 단호한 분이십니다.”
  
  카다피는 자기가 원하는 것은 과거 기록을 지우는 것이라고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자 우리는 다시 벽에 부딪혔다. 그래서 스티브와 그의 영국인 동료는 이미 여러 번 확증된 수법인 ‘짐싸기’ 전술을 사용했다. 그들은 무기검사 요원들에게 짐을 싸라고 지시하고, 비행기를 불러 그것을 실으라고 말했다. 무사 쿠사는 탄식을 했다.
  
  “당신들은 정말 골칫거리군요.”
  
  그는 실무자들에게 좀더 개방하라고 지시했다. 무기검사원들은 짐을 다시 풀었다.
  
  
  드디어 核개발 포기선언
  
2005년 12월, 리비아정부가 미국에 건넨 우라늄 농축을 위한 원심분리기 용기 앞에서 포즈를 취한 조지 테닛 CIA국장.

  느리긴 했지만 진전은 있었다. 리비아인들은 미국과 영국의 검사요원들에게 다양한 무기계획이 어디까지 진전되어 있는지 보여 주었다. 그들은 우리가 이미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도 모르고 여러 차례 무기계획의 일부를 숨기려고 시도했다. 그들이 스커드 B 미사일을 보여 주면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런데 스커드 C는 어디 있습니까?”
  
  고도의 독성을 가진 화학물질 저장시설에 안내되었을 때 우리 검사요원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비아가 치명적 화학물질을 보유한 것에 놀란 게 아니라, 그 물질을 커다란 플라스틱 병에 담아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비아인들의 유일한 안전대책은 그 시설에 들어갈 때 코를 잡는 것이었다. 검사요원들은 재빨리 뒷걸음쳐 나와서 완벽한 화학방호복을 착용한 뒤 창고에 다시 들어갔다.
  
  다양한 계획의 在庫(재고)조사를 하는 작업은 몇 달이나 걸렸다. 리비아인들은 핵문제에 대해서는 가장 비협조적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의 계획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2003년 11월 말, 스티브와 그의 영국인 동료는 무사 쿠사를 한 모임에 초청했다. 그들은 무사 쿠사에게 리비아가 원심분리기 시설을 구입한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리비아는 이제 되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계획에 대해서 털어놓기 시작했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그런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 우리는 칸의 조직망에 대한 작전 덕택으로 그들의 계획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상대방의 카드를 알면서 돈이 많이 걸린 포커를 하는 것과 같았다. 이 경우 그 상금은 카다피에게 궁극적으로 핵무기 능력을 줄 수 있었던 핵개발 계획을 완전히 그리고 평화적으로 해체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리비아인들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을 때도 있었다. 한번은 우리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들이 이 물건 값으로 A. Q. 칸에게 1000만 달러를 지불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동안 당혹해서 입을 열지 못했다.
  
  “1000만 달러라고요? 우리는 2000만 달러라고 생각했는데.”
  
  분명히 누군가가 떼돈을 벌었을 것이다.
  
  12월 중순이 되자 충분한 진전이 이루어졌고, 곧 그 거래를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조차도 신중하게 조정했다. 카다피가 먼저 리비아 국민들에게 WMD 계획을 포기했음을 발표하도록 했다. 그러면 블레어 총리가 이에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그 뒤에 부시 대통령이 논평을 하는 것이다. 시기는 긴밀한 협상 끝에 12월 19일로 결정되었다. 마지막 순간에 카다피가 늦추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는 걱정했다. 그는 이 거래를 취소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설명을 듣고 보니 아무 것도 아니었다. 리비아의 국가대표 축구팀 경기의 텔레비전 중계가 그날 밤 예정되어 있었다. 카다피는 대부분의 리비아인들이 아무런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대량파괴무기에 관한 발표로 그 중요한 경기의 중계를 중단시켜 분노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2008-11-11, 22:2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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