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게재/미국은 왜 수렁에 빠졌는가
美 CIA 국장의 9.11 手記 3 - 폭풍의 한복판에서
미국은 왜 이라크戰에서 실패했는가? 전쟁은 승리… 그러나 이라크 미래까지 직접 설계하려다 수렁에 빠져

조지테닛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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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戰後 再建 계획 不在 CIA의 경고 무시하고 국방부 독주
 ● 수니파 제거와 바트黨 전력자들에 대한 무차별 숙청, 20%에 달하는 이라크 중심세력을 새 나라 건설에서 소외시켜
 ● 수니파 출신이면 장교는 물론 일반 사병까지 징벌하겠다는 ‘CPA포고령 2호’는 叛軍 양산
불타는 미군 차량 앞에서 로켓포를 들고 포즈를 취한 이라크 반군들. 미국의 이라크軍 해산은 많은 이라크군 장병들을 반군으로 내몰았다.
月刊朝鮮은 9, 10월호에 이어 세 번째로 9·11 테러 前後(전후)에 美(미)CIA국장을 지냈던 조지 테닛의 회고록 <폭풍의 한복판에서>를 발췌 게재한다. 이번호 내용은 미국의 이라크 점령 정책이 왜 실패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2003년 이라크전 당시 미국 정부에는 對(대)이라크戰(전) 승리에 대한 확신은 있었지만, 이라크 점령 및 재건 정책은 없었다. 국무부·NSC(국가안전보장회의)·CIA는 이라크의 다양한 부족과 분파 및 이익단체를 대표하는 이라크인들의 의사를 수렴하는 정치체제의 수립을 희망했지만, 국방부와 체니 부통령은 미국이 통제할 수 있는 인사들로 새 정부를 구성하기를 원했다.
  
  CPA(연합임시행정처)를 맡게 된 브레머는 국방부를 등에 업고 사담 후세인 정권 하에서 봉직했던 바트당원들을 공직에서 추방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여기에는 고위 공직자들은 물론 기술관료, 교사, 중령 이하의 장교와 사병들까지 포함됐다. 이 조치로 이라크 재건에 기여할 수 있었던 수많은 이라크인들이 새 체제로부터 소외되었고, 그들 중 상당수는 叛軍(반군)에 합류했다.
  
  미국이 오늘날 이라크에서 겪고 있는 곤란은 이라크인들이 스스로의 미래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경시하고 미국이 이라크의 미래를 인도할 수 있다는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이 이라크에서 겪은 실패는 장차 북한에서 金正日 체제가 무너졌을 때, 우리에게 他山之石(타산지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지 테닛의 회고록 국내 판권은 조갑제닷컴이 갖고 있다.
  

  내가 처음 이라크에 간 것은 제리 브레머가 2003년 5월의 세 번째 주에 CPA(연합임시행정처)의 책임자로 임명되던 무렵이었다. 나는 제리와 함께 헬기를 타고 바그다드 상공을 날았다. 그때는 대낮이었다. 헬기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나는 비행 도중 밖을 내다보았다. 나는 날아가면서 미군의 작전이 얼마나 정밀했는지 알 수 있었다. 거대한 융단폭격의 흔적은 없었고, 목표로 삼은 것은 모두 명중했다.
  
  외국 군대가 수도를 침공해서 그 나라의 장기집권 독재자를 제거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지상의 상황은 놀라울 정도로 자유로웠다. 사람들은 밖에 나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바그다드에 있는 우리 스테이션도 낙관적 분위기였다. 그들의 절반가량은 방금 훈련을 마친 젊은 남녀들이었고, 노련한 프로와 은퇴를 했다가 다시 계약직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나는 全(전) 세계의 기묘한 곳에서 온 베테랑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지금 그들은 바그다드에서 새로운 민주국가를 발족시키는 일을 도우려 하고 있었다.
  
  2004년 2월, 내가 다시 이라크에 갔을 때 상황은 극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우리는 밤중에 바그다드로 들어갔다. 낮에는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태운 C-17 수송기는 급강하하여 신속하게 활주로를 이동하는 완전 전투착륙을 했다. 나는 방탄복에 헬멧을 쓰고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低空(저공)으로 녹색지역(안전지대)으로 날아 들어가 불이 켜져 있지 않아 어두운 아스팔트 駐機場(주기장)에 멈추었다. 나는 그저 노련한 비행 솜씨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캄캄한 밤중에 헬멧을 쓰고 날게 되면 입술이 절로 오므라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무렵 이라크의 CIA 규모는 상당히 컸다. 바그다드의 CIA 책임자가 많은 요원들을 불러 모아놓고 있었다. 모두 방탄복을 입고 왔다. 내 생애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긴장한 모습으로 한곳에 모인 것은 처음 보았다. 나는 서너 시간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그곳에 머물렀다가 자리를 떠났다. 나는 다음날 다른 곳을 방문해야 했고, 2004년 초의 바그다드에선 밤에만 비행할 수 있었다.
  
  그 10개월 동안 이라크는 미국 정부가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해 버렸다. 어떻게 그런 상황이 되었을까? 돌이켜보면, 느린 속도로 再生(재생)되는 차량 충돌 같은 일련의 결정을 통해서였다.
  
  
  국방부와 체니 부통령, 통제 가능한 지도자 원해
  
美국방부가 이라크 지도자로 지원한 아메드 찰라비.

  사실 그 문제는 전쟁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다. 침공이 시작되기 전, 그 뒤에 해야 하는 실제적인 再建(재건)에 관해서는 거의 계획이 없었다. 그러나 이라크의 정치적 재건에 대해서는 때로 기관들 사이에 最高位(최고위) 수준에서 열띤 토의가 있었다. 이 나라를 관리하는 문제, 자신들의 정치적 장래를 결정할 때 이라크인들의 역할 같은 것이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과 딕 체니 부통령은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가끔 직접 이 토의에 참가했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차관이나 차관보 급의 관리들도 각자의 기관을 대표해서 참석했다. 존 맥라플린과 우리의 이라크 담당 ‘공작부장’이었던 고위 CIA 공작담당관 홉 그레니어가 교대를 하면서 그 토의에 참석했다.
  
  그 토의는 대체로 일반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국무부, CIA, NSC(국가안전보장회의)는 이 나라의 많은 부족, 분파 및 이익단체를 대표하는 이라크인들이 모여 일종의 制憲議會(제헌의회)를 구성해서 자문위원회와 일단의 각료를 선정하여 통치하도록 하는 포괄적이고 투명한 방식을 좋아했다. 아무도 제퍼슨식 민주주의를 즉각 도입하자고 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라크인들이 장차 민주적인 이라크의 진정한 지도자를 빨리 찾아서 합법성을 부여하는 과정에 참가하도록 격려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부통령과 국방부의 민간인들은 전혀 다른 방식을 주장했다. 그들은 미국이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통제는 할 수 없는 정치적 과정으로 모험을 하기보다는, 이라크인들의 세력을 제한하고 참여할 이라크인을 직접 고를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것은 사실상 아메드 찰라비와 소수의 다른 長期(장기)망명 중인 在野(재야) 인사, 그리고 쿠르드 자치구의 지도자들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런 접근방식의 차이는 명확했고 현저하게 대조되었다. 부통령 자신도 그 딜레마를 ‘통제와 합법성’간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다우 페이드는 “이라크 망명자들이 스스로 합법성을 얻도록 할 필요는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는 우리가 그들에게 경제원조와 미국의 훌륭한 통치를 통해 합법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정치적 통제는 피지배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의견은 일치되지 못했고 명확한 계획도 마련되지 못했다. 그러나 2003년 1월 부시 대통령은 국가안보 대통령 지시(NSPD) 24호에 서명하여 국방부에 전쟁 후 이라크에 대한 전체적이고도 완전한 소유권을 부여했다. 당시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결국 이 NSPD 24호는 이런 중대한 문제에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고 戰後(전후) 재건의 방향을 설정하는 결과가 되었다.
  
  
  아프간 모델 적용 時 병력 13만9000명 예상
  
이라크 전쟁을 지휘한 토미 프랭크스 美 중부사령관.

  이 모든 과정에서 아메드 찰라비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있었지만 그의 존재에 대해서는 인정하거나 설명이 거의 없었다. 침공이 시작되기 몇 달 전부터, 그리고 그 후에도 부통령과 국방부를 대표하는 관리들은 찰라비를 침공 후 이라크의 지도자로 앉히려는 엷은 베일에 싸인 아이디어를 계속해서 들고 나왔다.
  
  침공 직전에는 그런 노력이 제안의 형식으로 변해서 망명자와 쿠르드족 지도자로 구성된 이라크 ‘망명정부’를 수립하자는 주장이 끈질기게 나왔다. 이 망명정부는 바그다드가 함락되면 새로운 정부로 수립되도록 되어 있었다.
  
  CIA 동료들은 기가 막혀 했다. 그레니어가 후에 회상했던 것처럼, 국방부와 부통령의 참모들은 러시아군이 기존 정부를 축출하고 모스크바에서 데려온 바브라크 카르말을 지도자로 앉혔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비슷한 일을 하려는 것과 같았다.
  
  전쟁이 시작되기 3개월 전에 열렸던 한 NSC 회의에서 부시 대통령은 토미 프랭크스 장군에게 후방 지역에서 치안이나 법과 질서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느냐고 질문했다. 프랭크스는 대통령에게 대답했다.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저는 모든 도시와 마을에 首長(수장)으로 임명할 수 있는 미국인 공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것이 중부사령부(CENTCOM)의 초기 계획이었는지 아닌지 나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미군은 이라크군을 패배시킬 수 있는 충분한 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에릭 신세키 장군이 예언했던 것처럼 평화를 유지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다.
  
  이라크전쟁이 시작되기 전 NSC 직원들은 戰後(전후) 이라크를 안정시키는 데 필요한 병력을 추산했다. 그 결과는 아프가니스탄 모델일 경우 13만9000명, 보스니아 모델일 경우 36만명 이상, 코소보 모델에서는 50만명 약간 미만으로 나타났다. 이라크는 어느 경우에 해당될까? 전쟁 전략가들은 이라크에 들어갔을 때 아프가니스탄 모델일 것이라고 잘못 판단했다. 그 이래 우리는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모하메드 제퍼슨’은 어디에?
  
잘 칼릴리자드.

  이라크에서 戰後(전후) 문제를 담당했던 국방부 책임자는 제이 가너 중장이었다. 침공이 있기 몇 달 전 그 자리에 임명된 가너 장군은 쿠웨이트로 파견되어 자기 팀을 조직했다. 가너와 그의 팀이 새로 창설된 재건인도지원처(ORHA)의 임무를 시작하기 위해 4월 18일 이라크에 도착했을 때, 그들 앞에 놓인 과제는 너무나 엄청나고 事前(사전)에 수립된 계획은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ORHA는 사담이 내버린 한 궁전에 사무실을 차렸으나 적절한 통신시설이나 아랍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라크인 협조자나 그들에 대한 이해도 없었다. 가너는 어려운 임무를 해낼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권한은 없이 책임만 가지고 있었고, 열악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CIA는 이 나라가 돌아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이라크 기술관료들과 고위 미군관계자들이 함께 자리를 할 수 있는 모임을 주선했다. 그러나 금방 문제가 생겼다.
  
  ORHA는 우리가 모으고 있던 그 그룹에 바트당 당원이 포함되어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 그들도 참가하고 있었다.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에서는 바트당에 가입하지 않고는 승진할 수 없었다. 새로 등장한 東(동)유럽의 민주국가 정부에 前(전) 공산당원도 어쩔 수 없이 포함된 것처럼, 바그다드의 유능한 관료 그룹에는 바트당 당원을 포함시켜야 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지만,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 새로운 ORHA에는 그렇지 않은 것이 분명해졌다. 그것은 그 뒤에 따라올 더 심각한 문제의 前兆(전조)였다.
  
  미국이 이라크 임시정부를 구성할 후보자들을 찾기 시작했을 때 비슷한 문제가 생겼다. 미국 관리들은 한 CIA 직원이 표현한 것처럼 이라크에서 제퍼슨식 민주주의를 발족시키기 위해 ‘모하메드 제퍼슨’을 계속 찾고 있었다. 문제는 그런 요건에 꼭 맞는 사람은 오래 전에 사담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이었다.
  
  2003년 봄, 제이 가너는 NSC의 고참 책임자 잘 칼릴리자드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세력 분포 상황을 알아내고 그것을 활용하기 위해 이라크에서 지역회의를 개최하는 과정을 시작했다.
  
  그와 동행했던 CIA 직원들의 말에 의하면 칼릴리자드는 이라크인들이 스스로 합법성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고유의 위험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런 과정은, 지도는 할 수 있지만 통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그것이 우리가 설교하고 있던 민주주의 본질이었다. 이라크인들이, 그 정치적 과정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이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이 나라 미래의 안정을 위해서 중요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라크인들이 스스로 합법성을 찾도록 하는 이 어려운 과정은 갑자기 중단되었다. 잘 칼릴리자드와 가너는 물러났다.
  
  미국 정부가 배후에서 조종한다는 생각은 독일 점령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미국은 발밑에 굴복한 나라를 사실상 마음대로 다시 만들 수 있었다. 미국은 바트당을 완전히 없애 버리려고 했다. 폴 울포위츠와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따르면 ‘바트당’은 ‘나치’와 똑같다는 것이다. 얼마 안 가서 우리와 이라크인들은 미국의 침공이 그들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바꾸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제리 브레머의 등장
  
  2003년 5월 초, 콜린 파월이 전화를 걸어 제리 브레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브레머가 국무부에서 對(대)테러과 책임자로 있었던 강인한 성격의 전직 대사라는 말은 듣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그에 관해 나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콜린은 행정부에서 브레머를 제이 가너 후임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며칠 후인 5월 6일, 백악관은 그것을 공식으로 발표했다. 브레머는 이라크의 하부구조를 재건하고 새로운 정부수립을 돕는 작업의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브레머는 대통령 特使(특사)였지만 국방부 장관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의 조직에는 합동임시행정처(CPA)라는 이름이 붙었다. CPA가 발족하자 콘돌리자 라이스는 전후 계획문제를 다루기 위해 설치했던 기관간 협력위원회를 폐쇄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한 백악관 관리가 나에게 말했다.
  
  “큰일 났습니다.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려면 영국에 물어봐야 합니다. CPA에서는 정치문제에 관한 보고가 없어요.”
  
  그러자 콘돌리자 라이스는 그 NSC 과정을 再開(재개)하라고 명령했다. 그 무렵 이미 군부와 바트당 해체에 대한 기본적인 결정이 내려져 있었다. CPA에 관해서 들어온 보고에는 이 기관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불안한 소식이었다. CPA는 우리가 성공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다. 적절한 정치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中東(중동)의 복잡한 방식에는 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라크에서 필요했던 것은 이 나라의 부족 동맹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아랍 전문가나 외무부 관리들이었고, 최소한 수니파와 시아파를 구분할 정도는 되어야 했다.
  
  그러나 CPA에 모인 사람들은 바그다드에 주식시장을 개설하고, 일률과세제도를 시험하고, 연구실에 민주적 자본주의의 다른 요소들을 도입해 보려고 애쓰던 사람들이었다. CPA가 일을 시작한 지 한두 달 뒤에 이라크에서 돌아온 한 우리 직원은 말했다.
  
  “국장님, 마치 대학원 세미나같이 돌아가더군요. 아무도 아랍말을 할 줄 몰랐고, 아랍에 와 보았던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브레머뿐이었습니다.”
  
  국무부는 그에 앞서 전후 이라크 문제 계획을 위해 전문가들의 팀을 구성했고, 리치 아미티지는 그들과 컴퓨터, 그리고 지역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80명의 아랍어 사용 가능자를 바그다드로 수송해서 임시 대사관을 설치하는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737기까지 준비했다.
  
  
  국방부의 독주
  
  그러나 국방부는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계획에는 럼즈펠드의 사람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을 잘못 처리했다고 생각하던 국무부는 포함되지 않았다. 국무부의 정치담당 차관보 마크 그로스맨이 몇 차례나 다우 페이드에게 이 문제를 제기했으나, 그때마다 페이드는 검토하겠다고 대답했다. 국방부의 관점에서는 머지않아 국무부 전문가팀이 덜레스나 앤드루 공군기지 활주로에서 바그다드로 수송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사담의 동상이 무너진 뒤 이라크 안의 치안상황은 남쪽까지 악화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당연히 나오는 질문은 미국의 정보기관이 이런 內亂(내란)의 가능성을 예측하지 못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인들이 ‘해방자의 영접’을 받으리라는 생각에 현혹당한 것일까? 그 대답은 이런 경우에 흔히 있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
  
  CIA는 연합군이 해방자로서 환영 받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사담에게 오랫동안 탄압을 받았던 남부의 시아파는 그를 제거한 누구든지 환영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연합군이 남부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기대한 무한정한 것이 아니었고,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 눈을 감은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동시에 ‘파멸적인 성공의 결과’라는 예언적인 제목을 붙인 문서를 작성했다. 우리의 분석은 사담이 사라진 데 대해서 이라크인들 사이에 안도감이 일겠지만 얼마 안 가서 오래된 라이벌 관계와 예부터 내려온 인종적 긴장이 떠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우리는 식량, 물, 전기, 직장 같은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을 제공할 능력이 있다고 과시할 필요가 있고, 한편으로 사담 治下(치하)에는 없었던 安心(안심)과 安全(안전)을 만들어 내야 했다.
  
  나는 여기서 계획이 틀어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CIA는 평화를 보장하는 계획이 있다는 가정하에 분석했다. 실제는 미군이 지상전에 투입되었을 때 그런 전략은 없었다. 그 각본은 전쟁이 시작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작성되지 않았다.
  
  2003년 1월 CIA 보고서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이라크가 분열될 가능성은 없지만, 사담 이후의 정부는 점령군이 막지 않으면 국내의 그룹들이 서로 폭력투쟁을 벌이게 될 가능성이 높은, 심각하게 분열된 사회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前(전) 정권의 무리들은 기존 테러리스트 조직과 연합하거나 단독으로 새로운 정부에 대해 게릴라전을 벌일 수 있다. 사담을 무력으로 축출한 후 처음 몇 달 동안 이라크의 안정은 부분적으로 어떤 것이든 통제를 하고 있는 임시정부와, 군 또는 민간인, 국내 또는 외국 세력에 대한 이라크인들의 전망과, 정부가 이 나라를 지배하는 행정 및 안전 과제를 수행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대부분의 이라크인들에게 있어서 최우선적인 과제는 평화, 질서, 안정, 그리고 식량과 주택 같은 기초적인 욕구다…. 미국의 주도에 의한 패배와 아랍 이라크의 점령은 정치적 이슬람 지지자를 급격히 증가시킬 것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의 이 지역 주민들에 대한 단결 호소는 광범위한 反響(반향)을 일으킬 수도 있다. 미국의 지배에 대한 공포와 광범위하게 번져 있는 신념 때문에 많은 분노한 젊은이들을 극단주의자들의 무리로 이끌 것이다.”
  
  같은 보고서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오스만, 그 뒤 영국의 순서로 있었던 外勢(외세)의 이라크 점령으로 인해 이라크인들은 점령자들을 아주 혐오하고 있다. 궁극적인 권한을 非(비)이라크인 관리들에게 준 무기한의 군사적 점령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사담을 반대했던 이라크의 軍(군)장교들은 서방세력의 이라크 점령과 지배를 싫어할 것이고, 생각을 바꾸어 사담과 함께 싸울 動機(동기)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CIA, 이라크軍 부대 해체 늦추자고 건의
  
  우리는 다른 문서에서 “민주화 작업에는 많은 함정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군부대 해체는 전쟁 직후 바그다드의 치안문제 때문에 이라크가 군을 건설하기 시작할 준비가 될 때까지 늦출 필요가 있을 것이다”라고 제시했다.
  
  우리는 이렇게 경고했다.
  
  “미국의 전후 이라크정책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민족적·종교적 민감성, 특히 자치를 바라는 요구가 재건작업의 일부라고 설득하지 못하면 이라크인들은 소외감을 느낄 것이다. 이라크인들은 미국이나 서방에 이라크를 계속 의존시키려 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방해와 저항, 무장투쟁을 하게 될 것이다.”
  
  2003년 1월, ‘이라크는 민주화될 수 있을 것인가?’란 제목의 국가정보위원회 논문은 말했다.
  
  “이라크의 정치문화는 민주적 경험과는 동떨어진 규범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강력하고 장기적인 민주적 치료법에 저항할 수 있다.”
  
  2003년 3월, 우리는 “압도적인 승리 이후 미군의 장기 주둔에 대한 이라크인들의 인내심은 얼마 가지 않는다”고 경고하면서, “이라크의 많은 지역에서 인도적 상황은 며칠 안에 급속히 악화할 것이며, 많은 이라크인들은 연합군의 戰時(전시) 병참선을 인도적 원조로 전환시키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브레머, 바트당원 추방
  
2003년 5월 12일 바그다드 공항에 도착한 브레머 이라크 최고 행정관(가운데). 오른쪽은 제이 가너 이라크 재건인도지원처장.

  전후 이라크에 대한 우리의 분석은 先見之明(선견지명)이 있었다. CIA 분석관들에게 어려웠던 것은 이라크가 무엇을 할 것이냐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난관에 봉착했던 문제는 우리의 정부가 무슨 행동을 할지 예상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게임규칙을 모르면 분석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과연 우리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
  
  브레머는 나중에 백악관이 그의 임명을 발표하기 사흘 전, 그리고 바그다드로 가기 얼마 전, 국방부에서 다우 페이드를 만났다고 말했다. 그는 페이드가 “이라크에 도착하면 즉시 前(전) 바트당 당원들이 새 정부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리라”고 역설했다고 말했다. 브레머는 이라크에 도착한 지 나흘 뒤인 5월 16일 그대로 했다. 이날 아침 뉴욕타임스는 앞으로 닥칠 일을 암시하는 기사를 실었다. 브레머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인용되었다.
  
  “나는 곧 바트당원과 바트주의를 이라크에서 영원히 추방할 조치에 관한 명령을 발표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찾아내서 관직에서 추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할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기 몇 주일 전, 미국 고위 관리들은 사담과 수십 명의 하수인만 떠나면 갈등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그런 생각은 우리의 전쟁 목표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제 전쟁이 끝나가고 있는데 미국은 이라크의 관리 수천명을 적극적으로 제거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브레머는 그의 회고록에서 “그 명령이 이라크 인구의 1%에게만 영향을 미칠 것으로 추산했다”고 썼다. 이것은 우리가 그 조처를 지지했고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해석할 수 있지만, 우리의 의도는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교사 4만명 추방
  
  실제로 우리는 바트당 제거가 기정사실로 나타날 때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중요한 정책결정이었지만, 이 조치를 토의하기 위한 NSC 각료회의는 없었다. 브레머가 인용한 1%라는 숫자는 그가 그 명령을 내린 다음날에야 요청한 것이고, 그 숫자를 알게 된 다음에도 거기에 포함된 두 가지 배경을 무시했다.
  
  첫째, 그 바트당원 중에는 통치의 책임을 다시 수행하게 될 경우 이라크가 필요로 하는 기술관료들이 많이 있었다.
  
  둘째, 이라크에서 브레머의 말대로 ‘추방’될 바트당원은 모두 그의 분노를 공유하게 될 형제와 자매, 삼촌과 사촌들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이라크에 있던 고위 CIA 직원과 다른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私的(사적)으로 그 조처에 반대하는 권고를 했고, 그 결정이 내려진 다음에도 계속 그렇게 했다. 한 고위 NSC 직원은 대통령에게 바트당 제거계획을 브리핑하면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 화해’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고 내게 말했다. 남아프리카인들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라크인 스스로 누가 손에 피를 많이 묻혔는지, 누구를 새로운 정부에 참여하도록 허용할 것인지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다.
  
  브레머는 그 작업을 이라크인의 손에 전부 넘겼다. 아메드 찰라비가 非(비)바트당化(화)위원회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그 결과 그 명령 수행은 훨씬 더 가혹한 것으로 변질되었다.
  
  우리는 곧 이라크인들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모든 교사가 바트당원이란 이유로 해임되었기 때문이다. 집마다 완전 무장되어 있는 나라에서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아이들과 교사들은 학교에 갈 수 없었으므로 거리에서 배회하게 되었다.
  
  나는 콘돌리자 라이스를 만나서 무차별적인 非바트당化 명령은 사담의 악당들을 一掃(일소)했지만, 단순히 직장을 위해서 바트당에 입당한 4만명의 교사까지 추방했다고 말했다.
  
  그 명령은 이라크인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그것은 이 나라에 남아 있던 작은 기초를 파괴하고 있었다. 그것은 많은 前(전) 바트당원들에게 저항에 가담하라고 설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콘돌리자는 “그 상황에 아주 실망했다”고 말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몇 달 후 대규모 저항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국가안보보좌관 차석인 봅 블랙윌이 단장으로 되어 있는 기관연락단이 필사적으로 反(반)정부 수니파 아랍인들과 접촉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非바트당화 명령의 취소 문제를 제기했다. 다우 페이드는 “그렇게 하면 전쟁의 모든 도덕적 정당성이 파괴된다”고 반박했다.
  
  
  “軍 해체는 저항세력에게 산소를 공급하는 격”
  
  브레머의 非바트당化 명령은 CPA 포고 1호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그보다 더 나쁜 CPA 포고 2호가 나왔다. 이 역시 워싱턴에서 정식으로 토의나 토론을 거치지 않았다. 최소한 나와 내 수석보좌관은 참석하지 않았다. 브레머는 5월 23일 이라크 육군의 해체를 명령했다.
  
  사실 이라크 육군, 특히 특별공화국수비대(SRG)와 특별보안기구(SSO)는 잔혹한 일을 많이 했다. 그러나 많은 이라크군 장교는 직업군인으로서 사담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은 새로운 이라크군의 핵심이 될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러나 CPA 포고령 2호는 전국 인구의 20%를 차지하고 있고, 육군에서 사실상 거의 모든 고위 직위에 있던 수니파에게 무차별 타격을 가했다. 이라크인들은 그들에게 통제권을 돌려주지 않는 한 무엇이든 만족하지 않았겠지만, 非바트당화 명령과 함께 이 두 번째 명령은 인구의 5분의 1과 이 나라 중심부의 대부분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NSC 관계자들은 포고령 2호에 중령 이하의 이라크 군인은 복귀 신청할 수 있는 방법이 포함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이라크 육군은 대부분 징병으로 입대해서 가족을 부양할 생각만 하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CPA 포고령 2호는 이들은 물론 군의 하부층을 구성하고 있는 시아파까지, 그들의 안식처를 지배하고 있던 자들과 함께 모두 징벌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포고령이 발표되었을 때 이 규정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일반 사병도 모두 브레머로부터 해고통지를 받은 셈이 되었다.
  
  당시 이라크에 남아 있던 제이 가너는 고위 CIA직원과 함께 브레머를 만나러 갔다. 그들은 “군 해체 명령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했다. 가너는 치안을 안정시키기 위해 前(전) 이라크군의 일부를 사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 직원은 브레머에게 그의 조치는 “저항세력에게 산소를 제공하는 격”이라고 말했다.
  
  CPA 포고령 2호를 지지하는 주장은 “육군이 사실상 해체되었으므로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지에 나가 있던 우리 요원은 육군의 대부분은 2주일 안에 다시 소집해서 유용한 목적에 투입할 수 있다고 추산했다.
  
  브레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가너에게 “원한다면 그 문제를 국방장관에게 제기하겠지만, 이미 끝난 일이고 그 결정은 럼즈펠드보다 높은 수준에서 내려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叛軍이 된 前 이라크군 장병들
  
2003년 4월 미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전의를 다지는 이라크군. 이라크군 해산 후 이들 중 상당수는 반군이 됐다.

  누가 그런 결정을 내렸든지 前 이라크군 장병들의 반응은 빨랐다. 뉴욕타임스는 해고된 이라크군 병사들이 5월 25일 주동한 시위를 보도하면서 한 이라크 戰車(전차)운전병의 말을 인용했다.
  
  “미군 항공기는 우리에게 집에 머물러 있으라는 전단을 뿌렸습니다…. 그 전단은 우리 가족에게 아무런 피해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중령은 기자에게 불길한 말을 했다.
  
  “우리는 집에 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봉급을 주지 않아 우리 아이들을 고생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일부 육군장병에게는 봉급을 지급했고, 새로운 이라크군에 다시 입대신청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나, 중령 이상의 계급을 가진 장교는 영원히 再(재)입대가 금지되었다. 이라크군은 다른 비서방 군대와 마찬가지로 고위 장교의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점은 고려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이라크군의 중령은 미군의 중령과 같은 권한이나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두 개의 포고령이 발표된 후 우리는 백악관과 바그다드에서 열린 회의에서 그 명령으로 의도하지 않았던 부정적인 결과가 생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조치는 많은 보통 이라크인들에게 타격을 주었고, 빈곤자나 범죄자 또는 叛軍(반군)으로 전락하도록 만들었다. 한 우리 고위 직원은 영향을 받은 가족의 수까지 포함하면 수십만 명의 이라크인들이 非바트당화 명령 하나만으로 극한상황에 몰렸다고 추산했다. 결국 그중의 많은 사람들이 반군의 길을 택했다.
  
  국방부에 있던 일부 관리들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던 폭력이, 바트당원과 前 이라크군 요원을 이라크의 미래에서 제외한 것이 현명했다는 증명으로 생각했다.
  
  2004년 봄 백악관에서 열렸던 한 회의에서 우리 직원 한 명은 그 폭력을 뿌리 뽑을 즉석 아이디어를 내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CPA 포고령 2호를 취소하고 적극적으로 이전 군요원을 소집하는 운동을 벌여 입대시킨 후 이라크의 국경을 지키고 국내의 치안을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DIA(국방정보국)의 연락관으로 아메드 찰라비와 이라크 국민회의에 나가 있던 한 미 육군 대령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동의합니다. 그놈들을 모아서 사살해야 합니다.”
  
  
  이라크를 분열시킨 미국의 정책
  
울포위츠 前 美국방부 副장관.

  미국 정부가 취한 조치는 이라크 內(내) 다양한 파벌 사이에 쐐기를 박았다. 찰스 두엘퍼는 한 이라크 친구로부터 “전에는 이라크인들이 시아파나 수니파라는 기준으로 자신들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민주주의를 시행하는 방법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근거로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遠心力(원심력)이 작동했다. 우리가 내린 결정은 그들을 단결시키기보다는 분열시킨 결과가 되었다.
  
  울포위츠는 언젠가 이라크 방문 중 그곳에 있는 우리 고위 직원에게 말했다.
  
  “당신은 미국 정부의 정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책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정책을 성공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를 수집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더 큰 현실을 감춘 오만한 성명이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우리 정부가 무엇을 하려는지 모르고 있었다. 한 가지 확신하고 있던 것은 우리가 듣지 못하는 귀에 대고 경고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이라크 정보기관을 설립하는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어떤 정부든지 국민을 보호할 생각이 있으면 국내의 안전과 외부의 위협에 관한 첩보를 수집하는 조직이 있어야 한다. 이런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정보기관을 설립하려는 우리의 제의는 강력하고도 즉각적인 저항을 받았다.
  
  존 맥라플린은 次席(차석)회의를 통해 그런 기구를 설립하는 데 필요한 허가를 받으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나는 존을 오랫동안 알고 있었지만 그처럼 화가 난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한 차석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미국 정보기관이 전 세계에서 同格(동격)의 기구를 가지고 있지 못한 유일한 나라는 이라크다. 이라크에서 누가 그 폭력을 조종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이라크인에게 그것을 알아내도록 하는 것이다.”
  
  이 메시지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 같다.
  
  당시 CIA의 차석 공작담당관이었던 스티브 캐프스도 콘돌리자 라이스가 참석하고 있던 회의에서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라이스는 물었다.
  
  “당신들이 또 하나의 KGB를 만들지 않는다고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스티브는 대답했다.
  
  “그 첫 번째 것도 우리가 만든 것은 아닙니다.”
  
  라이스의 말은 우리가 싸워야 했던 편견을 상징하고 있었다. 정책수립자들은 확고하지만 발표되지 않은 어떤 척도에 따라, 자기들에게 정치적으로 수용 가능하지 않은 사람들과 우리가 거래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들의 주장은 미국인들이 죽고 있고, 지하드주의자들이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으므로, 이에 대해 무언가를 할 능력이 있는 이라크인들을 활용할 방법을 생각해 낼 시기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무시당한 CIA
  
2004년 4월 바그다드 서쪽에 있는 이슬람 수니파 거주 도시인 팔루자 외곽에서 저항세력과 총격전을 벌이는 美해병대.

  우리는 전에도 그런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소련이 붕괴하고 서방세계가 동유럽을 인계받을 때, 우리는 이미 우리와 협조하고 있던 사람들을 기반으로 정보기관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공작원이 그런 기관에 침투할 가능성이 있었을까? 물론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런 사람들을 찾아서 제거할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았을까? 물론이다. 요컨대 정부가 작동하게 하려면 약간의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시일을 낭비한 뒤에야 우리는 이라크 정보국을 창설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동안 반군과 반정부 세력은 이미 귀중한 발판을 확보하고 있었다.
  
  마침내 이란·이라크전쟁의 영웅인 모하메드 샤와니 장군을 주축으로 전국의 모든 인종과 종교 및 부족 그룹에서 모집한 사람들로 구성된 기구를 창설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좀더 능숙한 정책을 시행하여 이라크의 전체 인구와 엘리트를 소외시키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시작 단계에서 좀더 현명했더라면, 사람들의 손에 돈이 들어가게 해서 안정적인 수입을 기대할 수 있도록 자금을 투입하는 방향으로 재건계획을 작성했더라면, 이라크인들이 미래에 대해 말뿐이 아니라 실질적인 역할, 즉 눈에 보이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더라면 오늘날 사정은 훨씬 좋아졌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우리는 옛날의 이라크로 절대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수니파는 그들이 한때 향유했던 특혜적인 지위를 다시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시아파의 세력 확대를 지원했지만, 수니파에게는 그런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한 나라가 전쟁의 시작을 결정하려면 군사적으로 적을 패배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전후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아주 명확한 게임 플랜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라크군을 패배시킬 수 있다는 데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미국 정부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조직된 통합적이고 공개적인 과정이다. 현장에서의 목적과 자원의 통합도 없었다.
  
  간단히 말해서 NSC는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 2003년 가을이 되자 우리의 정치적 및 경제적 전략이 효과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데이터는 입수할 수 있었고 추세는 명확했다. 미국의 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있었다. 나쁜 소식은 무시되었다. 결국은 정확한 것으로 판명된 CIA의 이라크 상황 예측 보고는 무시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대되고 있던 이라크 내 저항세력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조정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 많은 무력을 동원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도 군에 지나치게 무거운 짐이 부과되었다. 우리는 한 나라 전체를 복종시킬 수 없었다. 우리가 그곳에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非바트화 정책이나 군 해체 문제, 그리고 성공할 수도 있었던 정치전략적 실행과 관련된 결정에도 불구하고 큰 변화를 이룩하지는 못했다. 워싱턴의 방식으로 봉사를 하기 위해 1년이란 생활을 포기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명령계통의 일부로 봉사한 제리 브레머의 탓으로 돌리기는 쉬운 일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는 조작된 실패의 속죄양이었다.
  
  
  예고된 실패
  
  대통령은 충분한 보좌를 받지 못했다. NSC가 효과 없는 전후 전략에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제리 브레머와 난해한 철학적 대화를 할 시간이 아니다.
  
  NSC는 1947년 중요한 정책결정에 앞서 충분한 토의를 하고 개발을 하여 결정을 내리도록 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NSC가 그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 NSC는 브레이크를 밟고,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필요한 국방부나 그 밖의 모든 부서와의 토론을 강행시켜야 했으나 그것을 회피했다. NSC는 봅 블랙윌을 보내 브레머와 잡담을 나누게 하는 것으로, 오랜 세월을 통해 효과가 증명된 과정 대신 거의 실패가 확실한 방법을 선택했다.
  
  여기서 빠져 있는 중대한 요소는 우리를 도울 수 있었던 이라크 정부다. 우리는 그 대신 미국인이 이라크를 관리하도록 결정했다. 그것은 전 세계가 몇 년 동안 나치 독일과 싸웠던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동이라는 환경에서는 프랑스의 알제리 점령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효과가 없었다. 아랍인들에게는 그것이 해방에 반대되는 점령처럼 보였다. 우리는 이라크인들이 스스로의 미래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경시했다. 그 이후 우리는 계속 싸웠다.⊙
[ 2008-11-11, 22:3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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