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혁명을 막은 李承晩의 승부수
해방50년 한국인의 50대 성취 - 1949년 농지개혁법 제정

金聖昊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6·25 발발 3개월 전에 시행된 농지개혁은 全농지의 92%를 자작화하였고,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결정적 토대로서 작용하였다.

  자료/李承晩의 농지개혁-金日成의 의표를 찌른 한판 승부
   글/金聖昊(한국농촌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공산당이면 무조건 蛇蝎視하던 李대통령이 공산당 출신의 曺奉岩을 제1대 농림부 장관으로 발탁한 것은 바로 한민당을 제압하기 위한 말 없는 포석이었다. 이런 경우가 ‘人事는 곧 萬事’이다. 그리고 한민당측의 지연술책을 눈치 챈 李대통령은 6·15 발발 3개월 전에 농림부에 대해 비록 관계법령이 마련되지 않아 “추진상 곤란이 없지 않으나 만난을 배제하고 단행하라”(‘농지개혁지침’ 1950년 4월)고 엄명을 내렸다. 당시의 문서를 보면 시행령 공포 전인 3월24일에 이미 농지 분배 절차가 완료되어 4월10일부터 농지분배 통지서(조선일보, 1950년 4월26일)가 발급되었다.
  
  李대통령의 분명한 월권이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더라면 金日成에게 인민혁명의 기회를 주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李대통령의 초법적인 지령은 개혁을 지연시켜 온 한민당과 金日成의 의표를 찌른 한판 승부였다.
  
  정부의 분배면적은 소작지 145만 정보의 절반도 못되는 60만 정보여서 농지개혁을 모두 실패라고 비난해왔다. 그러나 未분배된 소작지는 지주들이 임의로 처분했으며 그 처분地價도 정부의 분배地價(평년 수확량의 1.5배)와 거의 비등한 수준이었다. 결론적이지만 정부 분배에 의하든 지주의 임의처분에 의하든 自作化되었음에는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이 결과 全농지의 92%가 自作化되었다. 이 성과는 일본과 대만의 개혁실적을 능가한다. 농민들이 “李대통령 덕분에 쌀밥 먹게 되었다”고 좋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有償개혁이었더라도 소작 地主制는 철폐되었다. 남한 학자들은 남한의 농지개혁이 有償이었다는 이유에서 북한측 개혁보다 못한 것처럼 여겨 왔지만 실은 북한의 토지개혁은 농민에게 소작권만을 주었기 때문에 無償이었던 것이다. 진상을 알아야 한다.
  
  6·25 남침으로 부산으로 피란간 정부가 피란地主의 생계대책으로 地價증권의 매매를 허용하자 부산 광복동 거리는 하루아침에 ‘증권거리’로 변모했다. “증권사려”를 외쳐대는 증권행상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하나뿐이던 증권회사가 14개로 늘었다.
  
  생활난에 쪼들린 지주들의 증권투매로 그 값은 액면가액의 4분의 1로 폭락했다. 북한의 지주층은 金日成의 숙청으로 몰락했지만 남한의 지주층은 6·25로 몰락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귀속재산(각종 산업시설)의 拂下에 地價증권을 사용하면 액면가액 전부가 인정되었다. 이에 따라 사업가들은 폭락한 地價증권을 차곡차곡 사 모았다. 地價증권은 地主들에게는 휴지에 불과했지만 자본가들에게는 사업자금을 마련한 황금의 계란이었다. 이것이 바로 토지자본의 산업화였고 또한 일본인 소유의 귀속시설을 한국인 소유로 전환시킨 이전 과정이었다. 동시에 자본주의 경제를 출범시킴에 필수불가결인 자본의 원시축적 과정이었다. 부산 광복동이야말로 한국 자본주의의 제1번지였고 그 탄생지였다. 한국 자본주의는 식민지 경제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라 戰亂의 격동 속에서 自作農 체제와 함께 태어난 쌍둥이였다.
  (출처: 月刊朝鮮 2005년 1월호 별책부록)
  
[ 2008-11-19, 18:3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코나스넷  |  리버티헤럴드  |  뉴데일리  |  뉴스파인더  |  뉴포커스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