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부들, 西獨에 가다!
朴正熙 서거 30주년 기념 연재 29/간호부들도 가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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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들 西獨에 가다
  
  1963~1965년은 박정희가 정치 혼란에 휘말리면서도 방향감각을 놓치지 않고 국가의 진로를 대외지향으로 확실하게 잡은 시기였다. 서독에 광원·간호사 파견, 南美(남미) 이민, 월남파병, 원양어장 개척, ‘現代(현대) 건설’의 해외진출, 한일 국교정상화, 수출입국 정책이 모두 이 기간에 추진되었다. 국토분단으로 반쪽을 잃은 한국은 해외로, 세계로 나아가서 드넓은 민족의 활동공간을 확보하게 된다. 조선조 이후 사라졌던 우리 민족의 野性(야성)과 해양 정신이 되살아나는 계기를 잡은 것이다.
  
  이기홍은 이승만 정부 시절에 부흥부(경제기획원의 전신)의 기획국장으로 있으면서 경제개발 계획 수립에 참여하였다. 그는 1962년 3월 서독 주재 한국 대사관에 경제기획원 주재관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군사정부는 해외에 인력을 수출하기 위하여 여러나라의 한국 대사관에 訓令(훈령)을 내려놓고 있었다. 이기홍 주재관(뒤에 경제기획원 차관보 역임)과 金泰卿(김태경) 보좌관은 루르 탄광지대에 주목했다. 이곳에서는 ‘가스트 아바이터(直譯하면 ‘손님 일꾼’)’라고 불리는 이탈리아, 터키, 스페인, 일본 광부들이 일하고 있었다. 이기홍은 체구가 작은 일본 광부가 일할 수 있다면 한국 광부들도 못 할 게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더구나 일본 광부들은 본국에서 경제사정이 好轉(호전)되자 在獨(재독) 노동에 흥미를 잃고 돌아가는 추세였다.
  
  이기홍 주재관은 루르 지방의 탄광회사들을 방문하여 그들의 생각을 떠보았다. 회사들은 한국 광부들을 받아들이겠다면서도 노동청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 김 두 사람은 노동청의 케퍼비츠 노동정책국장을 찾아갔다. 독일어에 능통한 김태경 사무관이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가난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부지런합니다. 우리 광부들은 또 군복무 경험이 있어 잘 훈련되고 단체생활에 익숙합니다.”
  
  케퍼비츠 국장의 표정이 동정적으로 변하더니 선뜻 수락했다. 이기홍은 의기양양하게 한국 대사관으로 돌아와 대사에게 보고했다.
  
  <대사는 왜 그런 일을 하고 다니느냐고 버럭 역정을 냈다. 노무자들이 독일에 오면 골치가 아프다는 것이다. 당시는 단 1달러의 외화도 벌어야 한다고 박 의장의 진두지휘 하에 온 국민이 총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박 의장이 혁명정부 지도자로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불쌍해 보였고 고독해 보였다. 나는 경제기획원에 이 사안을 보고하고 추진키로 했다>(이기홍 회고록 《경제 근대화의 숨은 이야기》)
  
  1963년 여름 김종필 전 정보부장이 ‘自意半 他意半’의 외유 도중 서독을 방문했다. 그는 중앙정보부 소속으로서 한국 대사관에 파견 나와 있던 육사 8기 동기생인 윤흥정 참사관 및 김태경 사무관과 함께 루르 지방의 한 탄광 막장까지 들어가 보았다. 대사관으로 돌아온 김종필은 “본국에서 수속을 빨리 해주지 않아 광부들 도착이 늦어지고 있다”는 김태경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바로 서울의 박 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종필이 “서독이 우리 광부 쭛쭛쭛명을 받아들이겠다는데 국내에서 제때에 일을 처리하지 않고 있으니 각하께서 선처해주십시오”란 요지의 건의를 했다. 김태경이 옆에서 듣고 있으니 박 의장은 “쭛쭛쭛명이 아니고 쭛쭛쭛명이야”라고 바로잡아 주는 것이 이 일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1963년 8월 8일 경제기획원장 원용석은 ‘우리나라 노동자 1,500명을 루르 탄광지대에 파견키로 서독 정부와 합의되어 우선 1차로 500명을 뽑아 연내에 파견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기획원은 수일 내로 전국에 公募(공모) 공고를 내겠다면서 근무조건을 공개했다.
  
  <3년 동안 탄광에 근무하는 한편 기술훈련을 받는다. 월급은 162달러 50센트(650독일 마르크). 중학 졸업 이상의 학력소지자로서 20세 이상 30세 미만>
  
  지원자수는 2,800여 명인데 1,600여 명이 신체조건으로 失格(실격)했고 나머지 1,200명 가운데 약 500명은 광산에 근무한 적도 없으면서 허위 경력증명서를 냈다가 들통이 났다. 대졸 및 고졸 학력자가 태반이었다. 1차 시험을 거쳐 9월 28일에 최종합격자 367명의 이름이 발표되었다. 신문들은 사법시험 합격자를 발표하듯이 사회면에 합격자 이름을 실었다.
  
  <조선일보>는 이기양 기자를 서독 뒤스부르크에 특파하여 ‘한국 광부들을 기다리는 서독 광산촌’을 소개했다. 기사 제목들은 외국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었던 시절의 독자들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었다.
  
  <호텔 부럽지 않은 숙소 / 방마다 독서실에 오락시설까지 갖추어 / 돈과 맥주와 아가씨와 / 二週年暇(이주연가) 땐 파리에서 데이트도 / 지하 800m서 콜라가 水道(수도)처럼 / 라인강변 처녀, 동양 총각 좋아 / 민간외교 역할, 코리아 자랑해야>
  
  학력이 높아 ‘인테리 광부들’, ‘紳士(신사) 광부들’로 불린 우리 광부들은 派獨(파독)에 앞서 20일간의 강훈련에 들어갔다.
  
  
  간호사 派獨
  
  파독 광부로 선발된 사람들 가운데는 광부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낮에는 석탄공사 장성광업소 갱내에 들어가 採炭(채탄) 작업을 실습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독일어를 배웠다. 파독 광부 1진 123명은 1963년 12월 21일 에어 프랑스편으로 서독을 향해서 떠났다.
  
  공항에서는 해외취업자와 가족의 이별이 있었다. 부산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광부를 지원한 우동천(당시 29세)의 아내 조영희(당시 26세)는 “3년간 헤어져 살게 되어 고달프지만 남편을 위해 희망을 안고 기다리겠다”면서 눈물을 삼키고 웃음을 보냈다. 이런 장면은 개발연대의 공항과 항구에서 곧 익숙한 풍경이 될 터였다. 이 날짜 <조선일보> 社說(사설)은 이렇게 당부했다.
  
  <(우리 광부들의 서독행은) 실업문제의 해결이란 점에서 우선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배울 점도 많을 것이다. 비록 갱내에서만 작업한다 하더라도 3년간이나 눈여겨보노라면 습득할 것이 많겠다. 이들이 3년간의 복무기간을 끝내고 돌아오면 국내에서 모범 工員(공원)으로서 석탄개발에 이바지하는 바 적지 않을 것이다.
  
  또 독일인은 근면한 국민으로서 세계에 알려져 있다. 서독 경제부흥의 기적을 가져온 첫째 원인도 이 근면에 있다고 하는데 그들과 같이 일을 하게 되면 배우는 것이 많을 것이다. 먼저 간 사람들이 성심껏 일을 하여 능률을 올리면 신용을 얻어서 계속해서 한국에 인원을 요청하게 되겠지만 한국 사람은 못쓰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면 후진에게 길을 막게 될 터이니 먼저 가는 책임이 크다는 것을 충분히 자각해야겠다>
  
  해가 바뀌어 1964년 2월 21일자 <조선일보>는 ‘한국 광부는 우수하다 / 라인강변에서 온 봄소식’을 전했다. 광부들이 노동청장 앞으로 보낸 편지를 소개한 기사. 광부 吳學峯(오학봉) 등 3명은 ‘지난 7일에 시행 된 여러 가지 지하 시험에서 우리 광부 250명은 한 사람의 탈락자도 없이 전원 합격했다’고 전했다. 그들은 서독의 너그러운 근로조건에 감탄하기도 했다.
  
  ‘지상작업을 하다가 손가락을 가볍게 다쳤는데도 公傷(공상)으로 취급하여 놀아도 임금을 다 주고 감기나 배탈에 걸려도 통상 임금의 80%를 받으면서 휴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광부의 파독 길을 뚫었던 이기홍(당시 경제기획원 차관보)에 따르면 “광산에서 일한 경험이 없는 대졸자들이 경험자보다도 독일 현지에서 더 잘 적응했다”고 한다.
  
  1960년 봄 재독 한국인 이종수 박사(본 의과대학 병원 외과의사)의 주선으로 베를린 감리교 부녀 선교회와 프랑크푸르트 감리교 병원이 한국 간호학생 두 명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62년부터 매년 20명 정도의 간호학생들이 훈련과 교육을 받기 위해서 독일에 파견되었다. 이종수 박사는 이 사업을 간호학생에서 간호조무사와 간호사로 확대하여 1968년까지 1,200여 명의 간호요원들을 서독에 취업시켰다.
  
  서독 마인츠 대학병원 소아과 의사 이수길 박사는 1964년 서독에서 간호사들의 수가 모자란다는 점에 착안하여 서독 간호사와 똑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한국 간호사의 취업을 주선했다. 1966년 128명의 간호사가 서독에 왔다.
  
  두 민간인에 의하여 시작된 간호사들의 서독 취업 사업은 1969년부터 정부가 해외개발공사를 통해 개입하여 1977년까지 1만 371명의 간호사가 서독에 취업하게 되었다. 1973년 현재 서독 전체 병원의 12.6%에 해당하는 452개 병원에 6,124명의 간호사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주한 독일대사 클라우스 폴러는 ‘보통 독일 사람들에게는 한국 간호사들과의 만남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의 첫 접촉이었으며 많은 경우 아시아인들과의 첫 접촉이었다’고 했다. ‘한국 간호사들의 유능함, 친절, 봉사정신은 독일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한국상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했다. 그는 또 ‘한국에 거주하는 독일인이 미국인 다음으로 많은 것도 간호사들을 매개로 하여 두 나라 관계가 밀접해졌기 때문이다’고 했다.
  
  한국 간호사들은 특히 ‘노인환자들에 대한 극진한 간호, 민첩한 업무처리’로서 좋은 평가를 받았고 독일 사람들로부터는 ‘질서와 준법정신, 근검절약, 신앙을 기초로 한 합리적이고 긍정적인 생활태도를 배웠다.’(홍익대학교 정해본 교수 <간호사 파독이 세계화에 끼친 영향>)
  
  연인원에서 파독 간호사 수는 광산근로자(8,395명)를 능가하게 된다. 몇 년 전 통계에 따르면 파독 간호사들 가운데 약 1,000명이 주로 독일남자와 국제결혼을 했다고 한다. 여성 취업과 해외 취업이란 2중의 벽을 넘은 한국 간호사들은 한민족의 핏줄 속에서 잠들어 있던 무서운 생존력과 적응력을 가장 먼저 자각시킨 이들이다. 간호사의 선진국 취업은 선망의 대상이 되어 여성 취업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고루한 선입견을 깨는 데 기여했다.
  
  1965년 독일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을 포함한 해외 취업자들이 국내로 송금한 외화는 상품수출액의 10.5%, 무역외 수입의 14.6%나 되었다. 1967년에 가면 월남파병에 따른 特需(특수)로 해외송금액이 상품 수출액의 36%, 무역외 수지의 31%를 차지하게 된다.
  
  5·16 군사혁명 직후 박정희 정권에게 맨 처음 차관을 제공해주기도 했던 서독과의 관계는 급속도로 발전되어 1964년 12월 박 대통령의 방독으로 이어지지만 김형욱의 정보부가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잘못 다루면서 양국 관계는 냉각된다.
  
  
  
  
  
  
  
  
  
  
  
  
  
  
  
  
  
  
  
  
[ 2009-03-15, 08:1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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