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몰지각한 학생과 언론이 나라 망친다"
연재 30/1964년 박정희는 무책임한 폭로에 화가 났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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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1964년 4월14일 밤 진해 별장으로 김종필 의장을 불렀다. 김 의장은 예춘호 부총무를 데리고 갔다. 박 대통령은 엄민영 내무장관을 합석시킨 가운데 時局(시국) 수습책을 논의했다. 이어서 김 의장과 두 시간 동안 요담했다.
  
  다음날 박 대통령은 특별성명을 통해서 국정 쇄신책을 발표했다. ‘중앙정보부의 기구를 축소하여 지방의 지부를 없애고 본부기구도 국가안전보장회의 산하에 두며 남게 되는 예산은 增産(증산)을 위해 전용키로 한다. 공화당도 당 기구를 축소하되 지구당 위원장은 국회의원이어야 하며 원내중심으로 운영한다. 과감한 행정개혁으로 기구의 간소화와 능률화를 기한다’ 등등.
  
  이날 국회특별조사위원회는 박정희 정권이 일본으로부터 1억 3000만 달러의 자금을 받아 선거에 썼다고 주장한 김준연(자민당) 의원을 불러 조사했다. 김 의원은 “장택상(자유당 시대 국무총리) 씨로부터 그런 정보를 들었다”고 했다. 장 씨는 이에 대해 “그런 풍설의 眞假(진가)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일 뿐 단정을 한 것도,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고 했다.
  
  김준연의 거짓말을 대서특필했던 어느 신문도 그를 제대로 비판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우리 언론을 ‘정부에는 가혹하고 야당과 학생에게는 아부하는 존재’로 보기 시작한다.
  
  야당은 김준연 의원에 대한 구속동의안에 대해서도 단상점거로 표결을 못 하게 했고, 언론은 일제히 정부를 비난하고 나섰다. 4·19 의거 4주년 기념일을 계기로 하여 대학생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고, 언론과 야당의 일방적인 정부 비판은 가열되었다.
  
  朴正熙 대통령은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던 1964년 4월21일 국무총리 이하 全국무위원들에게 보내는 훈령을 통해서 「일부 沒知覺(몰지각)한」 학생들과 이들을 선동한다고 그가 믿었던 언론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직설적으로 드러냈다. 朴 대통령은 「일부 몰지각한」이란 말을 그 뒤 자주 사용하는데, 다수 학생은 선량하다는 전제를 깐 말이다. 반대 세력을 「일부」라고 축소, 고립시키려는 의도이다.
  
  〈민정에 들어 아직 일천한 때, 다시 지난 수주간의 연달은 학생 데모 사건들은 민심을 극히 불안케 하고 있을 뿐더러, 법질서를 파괴하고 사회적 혼란을 자아내게 하고 있습니다. 헌정의 기초를 확고히 하여야 할 民政 초기의 이 중대한 시기에 있어서 이러한 양상은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으며, 이 상태의 연속 방치는 무법과 방종의 고질적 병폐를 면치 못하게 할 것이며, 나아가 민주질서를 파괴하고, 기초의 대본마저, 흔들리게 할 우려조차 금할 수 없습니다.
  
  정녕 이러한 사태의 책임은 단지 일부 학생들의 몰지각한 행동에만 돌릴 것이 아니라, 정부의 우유부단한 시책적 결함에 그 태반의 책임이 있다고 自省(자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시점에서 시정의 일대쇄신을 기하지 못할진댄, 이 난국을 수습하고, 침체된 사회 양상을 匡正(광정)하기란 무망한 것이라 미리 단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 사회적 諸침체와 혼돈의 요인이 되고 있는 다음 몇 가지 사항을 강조하오니, 각 국무위원은 혼연일체가 되어 그 문제의 시정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요망하는 바입니다.
  
  1. 대책과 태세의 완비
  정부의 소신과 신념은 항상 확고한 대책과 완비된 태세에서 우러나오는 것인 바, 정부는 항시 그 날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예측할 수 있는 모든 대책을 미리 강구하고, 何時라도 대응할 수 있는 임기응변의 태세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全국무위원이 혼연일체가 된 擧閣的(거각적) 대책과 태세만 완비된다면 여하한 난국도 선처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을 굳게 가져야 할 것입니다.
  
  2. 법질서의 유지
  강력한 정치가 국민의 여망인 바, 이 강력한 정치란, 만인이 법 앞에 공평하고, 또 법을 지키게 하는 질서의 유지에 그 요체가 있는 것입니다. 불법적 데모가 사회적 만성으로 고질화되고, 무법행동이 날뛰는 사회분위기 속에서는 강력한 정치는 차치하고서라도 정부의 존재조차 의문시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정부는 더욱 비상한 각오로써 불법데모, 치안교란자들은 철저히 단속하여 사회안정과 법질서 유지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문교방침의 재검토
  학원의 자유가 무제한 방종의 개념으로 착각하고, 또 학생이 스스로 헌법과 정부 위에 위치하는 양, 정부의 명령이나 교학자의 지시도 듣지 않는, 오늘의 학생 기풍은 확실히 국가장래를 위하여 극히 염려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학교가 학생을 선도하지 못할진댄, 학교의 존재가치는 무의미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으며, 학원의 질서를 바로잡고, 학풍의 쇄신을 기하기 위하여 문교정책에 전반적 재검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학교 책임자는 그 학생들의 불법데모 등 범법을 막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며, 그 노력을 다하지 못했을 때에는 학교당국자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며, 또 범법 학생은 퇴학처분 등 응분의 조치를 취하는 엄한 교칙으로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학생들에 대한 조치를 게을리할 때에는 그 학교 책임자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등, 학교에 대한 정부감독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문교정책이 너무나 현실을 도외시한 이상론에 기초를 두었음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언론대책
  자유와 책임을 그 어디보다도 강조해야 할 곳은 바로 언론기관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정부가 언론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해 주면서도, 그 책임의 강조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파행적 언론창달의 시책이라 아니할 수 없으며, 이러한 상태의 방치는 건전한 민주주의의 성장을 크게 저해하게 될 것입니다. 정부는 앞으로도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들에 대하여 냉엄히 그 책임을 추궁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며, 이는 정부에 부하된 임무임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金泳三 민정당 대변인은 ‘여러 가지 면으로 독재체제를 강화해온 정부는 국민들의 정당한 의사표시를 억압하지 말라’고 반박했다.
  
  서울대 문리대 강사 池明觀은 <조선일보> 1면에 기고한 ‘街頭(가두)로 끌어낸 건 누구인가’란 제하의 기고문에서 학생들의 시위를 옹호하고 ‘학교 당국이나 교수단이 할 수 있는 일은 학생들과 함께 오늘 이 나라의 실정과 부패를 우려하는 것이다’고 했다.
  
  문제는 당시의 박정희 정권은 독재 정권이 아니라 ‘공정한 선거’를 통해서 구성된 ‘국민의 정부’였다는 점이다. 이런 合憲(합헌) 정부의 외교정책에 반대한 대학생들의 불법 폭력 시위에 대해서 대다수 지식인, 언론, 야당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기준인 法治의 원칙을 부인하고 ‘애국심’, ‘정의감’, ‘독재에 대한 저항’이란 다른 기준을 가지고 나와 시위를 옹호하고 박정희 정부에 모든 책임을 떠넘겼다. 그동안 박정희 정부의 非민주적인 처사는 수없이 지적되었지만 반대자들의 이런 非법치적인 사고방식은 제대로 비판된 적이 한 번도 없다.
  
  
  1964년 5월 23일 박 대통령은 호남 지역 시찰 중 기자들의 서면질문에 답변하면서 이런 표현을 했다.
  
  <이러한 정국의 불안은 근본적으로 일부 정치인들의 무궤도한 언동,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선동, 일부 학생들의 불법적 행동, 그리고 정부의 지나친 관용에 연유되었다고 본다>
  
  박 대통령은 항상 ‘일부’란 말을 사용하여 反정부 세력이 건전한 국민 대다수를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했다. 그는 정치적 언어가 가진 심리적·전략적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대다수 신문들은 언론을 건드린 대통령에게 거세게 반발했다. <조선일보> 5월 26일 자는 ‘정국불안은 과연 선동 때문인가-일부 언론의 책임을 따져본다’란 紙上(지상)토론 기획을 마련했다. 토론자로 등장한 홍종인(신문연구소 소장), 張俊河(<사상계> 사장), 韓格晩(한격만·한국 신문윤리위원회 위원장)은 모두 언론을 옹호하고 대통령을 비판했으므로 찬반 토론이 되지 않았다.
  
  특히 張俊河의 기고문은 요사이 신문에도 싣기 어려울 정도의 격렬한 대통령 비판이었다. 일부를 인용한다.
  
  <대통령 박정희 씨! 당신이 그렇게도 거짓말과 실정을 거듭하였으면서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 당신들 집권자들의 부정과 부패가 그렇게 창일하였으면서도 계속 집권할 수 있는 것, 민생이 이렇게까지 파탄에 빠졌는데도 아직 당신들이 큰소리칠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한국 언론이 당신들을 길러 준 덕이 아닌가요. 당신들과 情死(정사)를 할 것 같던 한국 언론은 소용돌이치는 국민의 원성과 압력에 못 이겨 이제 깊은 악몽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여보시오, 접대부의 치맛자락 같은 붓글을 휘둘러가며 당신을 도와, 당신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 한국의 언론이 아니겠소. 고마운 줄이나 아시오! 그 청렴하다고 소문이 높던, 그 강직하다고 定評(정평)이 있던, 그 육군소장 박정희 씨라면 오늘의 이 사태를 正視(정시)하며 무엇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요. 슬픕니다. 오늘에 그때 당신 같은 용기를 가진 그런 사나이가 없음이…>
  
  국회는 5월 27일 야당이 제출한 국방장관과 내무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표결에 부쳤다. 이번에는 공화당에서 이탈표가 없이 큰 표차로 부결되었다. 이 결과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나온 공화당의 한 원내 간부는 기자들에게 “하마터면 총재를 잃을 뻔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번 표결에도 공화당에서 반란표가 나오면 공화당 총재직을 내어놓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 며칠 전 일요일 박 대통령은 쉬고 있던 朴相吉 대통령 대변인 집에 전화를 걸었다. 박정희의 대표저작인 《국가와 혁명과 나》의 정리자인 박상길은 5월 초에 대변인으로 발탁되었었다. 박 대변인의 어린 딸이 박 대통령이 직접 건 전화를 받아 혀 짧은 말을 몇 마디 하더니 “아빠 대통령이래, 전화 받아”라고 했다. 전화기를 나꿔챈 박상길에게 대통령은 “뭘 하고 있소?”하고 물었다.
  
  “그냥 쉬고 있습니다.”
  
  “별일 없으면 지금 좀 들어오시오.”
  
  음산한 정세가 온 누리를 덮고 있는 일요일의 그 너른 대통령 관저는 본관 전체를 통틀어 현관의 경호관 한두 사람 외에는 일직자도 눈에 띄지 않는 썰렁한 분위기였다. 박상길이 긴 복도를 지나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섰다. 박 대통령은 넓은 바깥 정원을 멀거니 내다보고 있더니 이쪽으로 돌아서 무겁게 소파에 앉았다. 담배에 불을 당긴 그는 몇 모금 빨고는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면서 탁상 아래를 응시한 채 침묵했다. 노크 소리가 나고 이후락 비서실장이 들어와 박상길 맞은편에 앉았다. 박 대통령은 자세를 고쳐 잡더니 입을 뗐다.
  
  “나 공화당 총재직을 그만두기로 하였소. 대변인은 즉각 성명서를 써오도록 하시오.”
  
  李厚洛 비서실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박상길 씀 《나와 제3·4공화국》에서 인용).
  
  “각하, 참 잘하셨습니다. 진작 그렇게 하실 일입니다. 각하는 3,000만 국민의 대통령이지 공화당만의 대통령이 아니십니다.”
  
  이후락과 생각이 달랐던 박상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각하, 쓰기는 쓰겠습니다. 그런데 총재직 사임 성명이 아니라 대통령 사임 성명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각하는 공화당 공천으로, 공화당 총재로서 대통령이 되신 것 아닙니까. 그런 총재직을 사임한다면 정당정치, 의회정치도 그만두시는 게 아닙니까. 싸우는 군단장이 전투는 계속하되 군단장은 사임하겠다, 이게 되겠습니까.
  
  차라리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가 이런 뜻으로 혁명을 했고 대통령이 되어 이러이러하게 국가를 바로잡아 보려고 있는 애를 다 써 보았는데 이런저런 장애 때문에 이대로는 도저히 이 자리를 감당할 수 없어 물러가겠노라’ 하시면 국민들이 그대로 받아주든지 아니면 그럴 수 없다고 하면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무슨 반응이 있지 않겠습니까. 받아주면 깨끗이 물러나시고, 그렇지 않으면 불란서의 드골처럼 비상대권을 요구해보시든지 무슨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박 대통령은 박상길의 눈을 뚫어지게 쏘아보며 묵묵히 듣고 있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알았소. 당장 그 드골헌법을 정리해서 내게 가져오도록 하시오.”
  
  의외로 일은 싱겁게 끝났다. 며칠 뒤 박상길은 드골헌법을 분석한 자료를 가지고 부름만 기다리고 있다가 집무시간이 파할 무렵 슬그머니 대통령 집무실에 들렀다. 박 대통령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朴 대통령은 학생 데모보다도 敵前(적전) 분열 현상을 보이는 공화당 내분에 더 시달리고 있었다. 1964년 5월 30일부터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들과 언론의 응원 속에서 학생들의 단식 농성이 시작되어 다시 정국이 뒤숭숭해지는 가운데 일요일인 5월 31일에는 김종필 의장의 퇴진을 주장하는 장경순 국회 부의장 등 공화당 내 비주류 측 인사들과 김 의장의 유임을 건의하는 주류 측 인사들이 번갈아 청와대를 찾아와 대통령을 괴롭혔다.
  
  당내 反김종필 세력의 보스는 金成坤 의원, 張坰淳 부의장, 그리고 李孝祥 국회의장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김종필은 6월 1일 박 대통령을 찾아가 사표를 제출했으나 되돌려졌다.
  
  6월 2일 서울시내 대학생들 수천 명이 세종로로 몰려와 反정부 시위를 벌이면서 경찰과 충돌하여 부상자들이 속출했다. 이들은 박 대통령의 下野(하야)를 요구했다. 이날 박 대통령은 朴相吉 대변인을 집무실로 불렀다.
  
  “이걸 발표하시오.”
  
  그가 던져준 문건은 朴 대통령의 자필이었다. 제목은 ‘현 시국에 관한 대통령 특별교서’였다. 박 대변인은 빠르게 소리 없이 읽어 내려갔다. 도입부부터가 비장했다.
  
  ‘본인과 정부는 그간 막대한 희생을 감내하면서 진정한 재야의 소리와 民意(민의)를 듣고 건설적인 공통의 광장을 마련해보고자 최후의 선까지 인내하여 왔다. 그러나 학생 데모는 신성한 4·19 정신에서 멀리 이탈하여 기점을 잃은 난동으로 타락해가고 있다.’
  
  ‘일부 이유 있는 데모라 하더라도 개인이나 국가가 일을 할 수 없는 장해가 된대서야 먼저 이를 저지 않고서는 다른 무슨 일도 할 수 없다.’
  
  ‘한국은 광대한 赤色(적색)대륙의 一端(일단)에 위치하고 있고, 이 地勢上(지세상)의 불리를 극복하기 위한 자유진영과의 연결의 공고성 및 국가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 있는 경제 건설에 따르는 근대화 작업을 위하여 이 현안(필자 註-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의 결정적인 타결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국가 간 외교 타협의 목적은 최대한의 이익과 조건을 마련함에 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또한 時利(시리)를 얻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외 정세는 늦으면 늦을수록 우리에게 유리할 것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한일회담의 타결은 그 자체에서 얻은 利(이)도 이려니와 여기에 부수되는, 세계의 각 우방으로 통하는 경제적 지원의 길이 틔어질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양국 간의 타결에서 얻어지는 금액은 단 한 푼도 낭비됨이 없이 오직 국가경제 재건에 쓰일 것임을 단언한다.’
  
  박상길을 얼어붙게 만든 것은 이 발표문의 마지막 구절이었다.
  
  ‘끝으로 본인이 이 기회에 내외 동포에게 명백히 천명코자 하는 바는 이같은 현안의 종결과 이에서 오는 조국의 안전 및 국가 근대화의 기초가 확립된다고 하면 본인은 민주정치의 진보를 위하여 차기 선거에 출마치 아니하고, 일차 임기만으로 조국에의 봉사를 끝마칠 결심임을 내외에 밝히는 바이다.’
  
  朴相吉은 내용이 너무 엄청나 말도 붙이지 못하고 물러나 발표 절차를 진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재출마를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그 발표문도 혼자서 썼으니 아무도 번의시킬 수 없으리라고 朴相吉은 생각했다.
  
  그런데 6월 2일의 학생시위로 사태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정일권 국무총리는 국무회의에서 계엄령 선포 문제를 의논했다고 기자들에게 말하고 “내일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이 문제가 다시 논의될 것”이라고 했다.
  
  2일의 학생시위를 보도한 신문들은 객관보도와는 거리가 먼 檄文(격문) 같은 제목과 지면 구성을 보였다.
  
  ‘화요일에 비가 내렸다…. 학생은 외쳤다…. 硝煙(초연) 속에 돌팔매 날고’, ‘단식 데모…. 또 노한 대학가’식의 제목 밑에는 이런 기사도 보였다.
  
  <“내 아들 못 잡아간다.” 눈물로 흠뻑 젖은 어머니의 목 메인 소리에 경찰이 어머니의 팔을 잡아끌자 아들은 “어머니 못 잡아간다”고 부둥켜안았다. 어머니는 곤봉 속으로 뛰어들었다>
  
  단식 중인 서울대학생이 투고한 선동적인 詩(시)도 사회면에 그대로 실렸다. 언론은 상황을 4·19 직전, 일종의 혁명전야로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이것은 誤判(오판)이었다.
  
  군부와 다수 국민들은 박 정권을 지지하고 있었고, 박정희는 자기 정당성에 대한 확신과 무력으로 폭력 시위를 누르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6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은 박상길에게 전화를 걸어 “어제 그 문건의 발표를 보류하시오”라고 말했다. 하루 사이 역사가 달라진 것이다. 박 대변인은 박 대통령이 생각을 바꾸도록 설득한 것은 전 내무장관 엄민영이었다고 짐작할 뿐이었다. ‘역사적 문건’이 될 뻔했던 이 특별교서문은 몇년 전 작고한 박상길 씨가 보관하고 있었다.
  
  
  
  
  
  
  
[ 2009-03-17, 10:0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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