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언론 비판
연재 31/"우리나라 신문은 지난 15년간 선의이건 악의이건 너무나 많이 국민들을 자극했고, 선동적인 言辭(언사)를 써왔습니다."

조갑제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1964년 6월2일 새벽, 계엄령 선포 전야. 박정희 대통령은 공화당의 전 총재 鄭求瑛 의원을 청와대로 불렀다. 새벽 2시였다. 그는 원로로서 존경해온 鄭 의원에게 ‘내일 계엄령을 선포하겠다’면서 자신의 불만을 털어놓았다.
  
  “오늘의 사태는 야당과 지식인, 그리고 언론의 무책임한 선동 탓입니다. 학생들은 4·19 혁명의 경험 때문인지 저희들만이 애국자이고 가장 올바른 판단을 하는 양 자만하고 있어요. 이런 버릇을 고쳐놓아야 합니다. 아주 엄하게 다스리겠습니다. 나는 국민이 참여한 선거를 통 해 당선된 대통령입니다. 그런 대통령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줄 작정입니다. 공화당은 그동안 이런 학생시위와 야당의 한일회담 반대 운동에 대해서 미온적으로 대처했습니다. 계엄기간 중에 여러 가지 정치적 조치를 취할 생각입니다. 계엄령을 펴야 할 혼란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적 보완조치를 취할 생각입니다. 이제는 혼란이 일어난다 해도 계엄령을 펼 필요가 없도록 안전판을 마련해야겠습니다. 그러니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학생들의 버릇을 고쳐놓겠다’고 다짐하는 박정희에게 鄭求瑛 공화당 의원은 “정부와 여당의 잘못도 있으니 이 기회에 과감한 시정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취지의 건의를 드렸지만 박정희는 ‘별로 찬성하는 기색은 아니었다’고 한다(《鄭求瑛 회고록-실패한 도전》에서 인용). 한두 달 전까지만 해도 박 대통령은 반대 세력을 설득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수용하려고 애쓰는 자세였으나 이날 밤은 힘으로 대처하려는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정구영은 ‘그날 내가 한 이야기는 구름 잡는 정치지 현실정치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은 얘기를 했었다고 생각된다’고 회고했다.
  
  6·3 사태를 전후한 시기에 박 대통령은 1년 전 민정이양 때에 이어 또 다시 한국정치의 분열상과 지식인의 短見(단견)에 절망하면서 고독 속에서 자신의 확신을 더욱 다지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사석에서 수없이 “接長(접장)들과 학생들, 그리고 기자들 때문에 나라가 안 된다”는 불만을 털어놓으면서 “이런 풍토에서는 민주주의는 안 된다. 내가 욕을 먹더라도…” 라고 말하고 있었다.
  
  1964년 6월 3일 하우스 유엔군 사령관이 미 합참에 보고한 박정희 대통령과의 협의 내용은 이러했다.
  
  <상부의 사전 지침에 따라 나는 한국군 2개 사단을 계엄부대로 동원하는 것에 동의했다. 단 포병은 동원대상에서 제외한다. 버거 대사는, ‘박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현재의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계엄령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정부 측의 잘못도 바로잡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도 1960년의 계엄령 선포와 이번의 계엄령은 다르다고 말했다. 나는, 1960년의 계엄령은 이미 유혈 사태가 벌어져 있는 상태에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군이 동원되었으므로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계엄군이 직접 학생들과 대결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우려되는 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안정을 위한 중요한 요소는 군대와 국민들 사이의 신뢰관계인데 이 兩者(양자)가 이번 사태로 멀어지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는 또 박 대통령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으로서 1960년의 이승만에 비교해서 다수의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음을 지적하고, 계엄령 선포가 과연 필요한가 하는 논쟁을 군부 안에서 벌이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란 의견을 개진했다>
  
  미국 측이 박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이유는 한일회담의 성사를 지원하기 위함이었다. 새뮤얼 버거 주한 미국대사는 한 달 전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지도자인 민정당의 윤보선 의원을 찾아가 미국 측의 불만을 전달한 적도 있었다.
  
  김성은 국방장관과 김종오 합참의장은 6월 3일 저녁 7시쯤 청와대에서 중앙청으로 건너와 국무회의에 참석했다. 김 장관은 박 대통령의 결심을 전했고 정일권 총리 등 장관들은 계엄령 선포안에 副署(부서)했다.
  
  박 대통령은 노석찬 공보차관의 발표를 통해 6월3일 오후 8시를 기해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사령관에 민기식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음을 알렸다. 민 대장은 포고령을 발표, 일체의 집회를 금지시키고 언론 출판의 검열과 서울 시내 각급 학교의 무기 휴교, 그리고 통행금지 개시 시간을 자정에서 밤 9시로 당기는 조치를 취했다.
  
  박 대통령은 박상길 대변인을 통해 계엄령 선포에 즈음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는 ‘나와 이 정부가 참을 대로 참다가 이 마지못한 결단을 내리게 된 것을 먼저 밝혀둔다’면서 ‘지금 그들 일부 沒知覺(몰지각)한 학생들에게는 헌법도 없고 국회도 없고 정부도 없다’고 개탄했다.
  
  ‘合憲 정부에 대하여 전면적인 부정으로 도전함으로써 어려운 여건 하에서나마 경제적 난관과 民生문제를 타개하려는 정부의 행정기능마저 마비케 하고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위신을 추락시킨 일은 묵과할 수 없다.’
  
  6사단, 28사단으로 구성된 계엄군은 6월4일 서울로 진입하여 수도 경비사령부 병력과 함께 시내의 요소를 장악했다. 학생시위는 간단하게 진압되었다. 무엇보다도 대다수 국민들이 난동화된 시위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한일 국교정상화의 불가피성에 공감하고 있었고, 박정희 정권을 독재정부로 보지 않고 있었다. 학생들은 야당과 언론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나 계엄령으로 언론과 야당이 무력화된 마당에 강력한 정부의 물리력을 견딜 수 없었다.
  
  계엄령 선포로 박정희는 취임 이후 다섯 달 동안 守勢(수세)로 몰리던 상황을 일거에 반전시키고 야당·언론·학생들을 압박할 수 있는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6월 4일 아침 계엄 지휘관 회의에서 이미 김종필 퇴진 문제가 제기 되었다. 김성은 국방장관과 민기식 육군참모총장 및 金桂元(김계원, 뒤에 육군 참모총장·정보부장·대통령 비서실장 역임) 장군이 청와대로 올라가 박 대통령에게 군부의 의견을 전달했다.
  
  박 대통령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면서 “누가 김 의장을 만나 군의 뜻이 이러하니 잠시 외국에 나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하지”라고 했다.
  
  서울로 들어온 계엄부대인 6사단의 김재규 사단장이 공화당 이만섭 의원을 지휘소가 있는 덕수궁으로 부른 것은 이 계엄회의 직후였다. 김재규 준장은 이만섭이 다닌 대구 대륜중학교의 체육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김 사단장은 이 의원을 데리고 덕수궁 뜰에 서 있는 앰뷸런스 안으로 들어갔다. 盜聽(도청)을 피하려는 행동이었다.
  
  “지금 계엄군의 공기가 좋지 않아요. 학생 시위는 진압했지만 이번 기회에 문제가 있는 정치인들을 정리하자는 여론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 대상은 4대 의혹사건을 일으킨 김종필, 박 대통령이 일본 돈을 받았다고 허위 선전을 한 김준연 등이오. 군의 분위기가 이러하니 이 의원이 각하께 잘 말씀을 드려 김종필 의장이 공직에서 물러나도록 하는 것이 사태 수습에 도움이 될 것이오. 이런 말을 대통령 각하께 전할 사람은 이 의원밖에 없을 것 같아 이렇게 부른 것이오.”
  
  이만섭 의원은 박 대통령 직계로 분류되고 있었는데 김종필 의장과도 관계가 좋았다. 그는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전하기 전에 김 의장에게 귀띔을 해야겠다고 그의 행방을 찾았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저녁 무렵에야 김 의장이 민기식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공관에 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만섭이 그곳에 가 보니 민기식, 김종필 외에 김성은 국방장관과 金鍾甲(김종갑) 국회 국방위원장도 와 있었다.
  
  
  박 대통령은 6월 26일 오전 계엄하의 국회에 나와 ‘시국수습에 관한 교서’를 발표했다. 회색 재건복에 색이 엷게 깔린 안경을 쓰고 나온 박 대통령은 약 30분간 연설문을 읽어 내려갔다. 박 대통령은 겸손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때로는 의욕의 과잉으로 무리한 시책을 강행한 나머지 다소간 민심과 유리된 바도 없지 않아 있었고 경험의 미흡으로 뜻 아닌 결과를 초래한 것도 있고 하여 한없이 自責(자책)의 心懷(심회)를 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결과적 책임은 모두 나에게 있는 것이며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정녕 나대로 성의를 다하여 한다는 일이 결과는 반대현상으로 나타났던 일도 있었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遁辭(둔사)도 변명도 아닙니다. 다만 솔직한 고백에 불과합니다>
  
  그는 먼저 학생들의 시위를 비판했다.
  
  <과연 이 나라는 누가 정치를 하는 것인지, 정부는 날마다 밤마다 학생 데모 막기에만 골몰하고 국민들은 불안의 도가니 속에서 한숨만 쉬고, 이것은 학장도, 교수도 막을 수 없다, 학부형도 學姉母(학자모)도 막을 수 없다, 게다가 정치인은 그것을 이용하고 있다, 어떤 국회의원은 그 데모가 국회의사당 앞에 오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다른 국회의원은 그것을 환영하고 있다, 이런 실정 하에서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안심하고 정부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박 대통령은 이어서 “그들이 자발적으로 학생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근본문제이기는 하지만 입법으로 이를 보호하고 규제할 필요가 없지 않다는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 언론을 猛攻(맹공)한다.
  
  <언론이 없는 시간부터 세상은 암흑천지가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세상에는 신문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소리도 있고, 이 사회의 혼란은 신문에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이런 소리가 다만 하나의 잠꼬대에 불과한 것이겠습니까. 우리나라 신문은 지난 15년간 선의이건 악의이건 너무나 많이 국민들을 자극했고, 선동적인 言辭(언사)를 써왔습니다. 이렇게 하여 경영상 수지는 맞추어왔을지 몰라도 국가사회에 유익한 일만 해왔다고 단언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보다도 더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저마다 속으로는 ‘신문이 너무 과하다. 신문이 이래서는 안 돼’라고 하면서도 아무도 감히 입을 벌려서 큰 소리로 그것을 시정하라고 외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자유를 수호할 의무가 있다면 타인의 자유나 타 기관의 자유를 침해하는 자유를 규제할 의무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진정한 언론의 육성과 조금도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박 대통령은 언론 자유를 규제하는 입법을 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이어서 그는 끝없는 정쟁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학생 데모나 무력으로 인하여 또 다시 정변이 일어나는 사태가 없어야 한다”면서 “다른 사람은 그런 말을 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을지 모르나 그럼으로써 더욱 평화적 정권 교체를 실천에 옮겨서 國基(국기)를 공고히 하여야 한다는 사명을 痛感(통감)하고 있다”고 했다.
  
  박정희는 또 “우리는 영원토록 外援(외원)에 의존할 수는 없다. 자립이 없다면 진정한 독립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혹자는 이것을 곡해하여 반공 태세를 문란하게 하고 있다”고 강조함으로써 학생들에 의해 火刑(화형)당했던 자신의 통치이념을 변호했다.
  
  “거리로 나가면, 그것이 이북방송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것에 분격하는 마음, 어찌 난동 군인만의 잘못이겠습니까. 군인이나 학생이나 공무원이나 정치인이나 위법자는 가차 없이 처단하라는 것이 국민의 소리인 줄 나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6·3 계엄령 선포 사흘 뒤 <동아일보>를 찾아가 당직기자에게 군과 관련한 보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공수부대원 8명을 구속하도록 지시했던 적이 있었다. 그는 이런 마당에 학생이라고 해서 聖域(성역)처럼 봐줄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 2009-03-17, 22:3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