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존슨 회담과 월남파병
연재 34/박 대통령은 서양식 분위기가 싫어 무도회에서 나와 버렸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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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5월16일 오후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수행원들은 존슨 미국 대통령이 보내준 대통령 전용기 보잉 707에 몸을 실었다. 박정희는 외국 대통령으로부터 비행기를 얻어 타야 하는 자신의 입장을 의식이라도 한 듯 김포공항에서의 출발인사에서 자주, 자립을 강조했다.
  
  “다시는 빈곤과 굴욕이 없는 자주, 자립의 역량을 배양해야겠습니다. 이 기회에 한 가지 소신을 밝혀둘 것은 우리가 공짜라는 무상원조에만 지나치게 기대고 살아왔던 부끄럽고 낡은 과거로부터 크게 한 걸음 나아가 떳떳하게 빌려 쓰는 장기차관 도입 등의 호혜적인 국제협력에도 큰 노력과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서울을 떠난 지 한 시간이 지나 전용기가 일본 상공을 날고 있을 때 박정희-육영수 부부는 機內 전화로 청와대를 불렀다. 육영수 여사와 큰딸 근혜 양 사이엔 이런 대화가 오갔다.
  
  “근혜니? 지금 무엇들 하고 있지?”
  
  “지만이와 근영이 데리고 놀고 있어요. 어머니, 거기가 어디예요.”
  
  “지금 막 일본 상공을 날고 있다. 잡음이 많은데 어머니 말이 잘 들리니?”
  
  “예, 잘 들려요. 어머니, 비행기 멀미하지 않으셔요?”
  
  “괜찮아. 높이 떠서 참 편안해. 할머니께도 걱정 마시라고 여쭙고,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안 계시는 동안 동생들 잘 보살펴라.”
  
  약 여덟 시간의 야간비행으로 북태평양을 횡단한 비행기는 16일 새벽 2시(현지 시각)에 알래스카의 엘멘도르프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일곱 시간의 비행 끝에 워싱턴 근교의 랭글리 공군기지에 도착한 것은 현지 시간으로 16일 오후 5시였다. 윌리엄스버그 시장, 기지 사령관 등이 마중 나왔다. 박정희 일행은 영국 식민지 시대의 古都(고도) 윌리엄스버그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다음날 오전 박 대통령 일행은 헬리콥터 편으로 백악관으로 향했다. 존슨 대통령의 영접은 각별했다. 두 대통령은 백악관 뜰에서 환영식을 마친 뒤 큰 리무진에 同乘(동승)했다. 두 대통령의 차량 행렬은 백악관을 출발, 펜실베이니아 대로를 거쳐 영빈관인 블레어 하우스에 이르는 카 퍼레이드를 벌였다. 존슨 대통령은 박 대통령을 숙소까지 바래다 준 셈이다. 1961년 11월의 첫 방미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깍듯한 國賓(국빈) 대접이었다.
  
  1965년 5월 17일 오후 5시로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 한 시간 전에 백악관 안보회의는 존슨 대통령에게 회담 준비 자료로 3페이지짜리 메모를 전했다. 지금은 비밀 해제된 이 문건의 요지는 이러했다.
  
  <박 대통령은 미국이 한국을 계속 지원하고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에도 한국을 일본의 통제권 안으로 밀어 넣지 않는다는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 보장을 얻게 되면 그는 한일 국교정상화 협정을 비준하는 데 필요한 국민의 지지를 얻는 문제에서 유리해질 것이다. 박 대통령은 농촌 출신인데 부끄럼을 타면서도 아주 영리한 사람이다. 그는 키가 작은 데 대해 콤플렉스를 갖고 있어 처음 만나면 공식적이고 딱딱하다. 그러나 기분이 편해지면 상대방의 솔직한 태도에 잘 반응한다. 그의 한 가지 취미는 승마이다.
  
  월남 정부는 추가적인 한국군 파견을 요청하고 있다. 우리는 한일 국교정상화와 관련하여 도전을 받고 있는 박 대통령이 그 난관을 극복하기 전에는 이 월남파병 문제를 의논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 측은 이번 방미 기간에 추가 파병의 대가로서 추가 원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탐색전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므로 이 시점에서는 우리가 나서서 구체적 논의를 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백악관 서재에서 열린 제1차 한미 정상회담에는 두 대통령이 통역만을 데리고 대좌했다. 이 대화록은 비밀분류에서 해제, 공개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박-존슨 두 대통령의 발언들을 대화체로 재구성하면 대강 이러했다.
  
  존슨: “우리는 한국에 대해선 가능한 모든 원조 수단을 동원할 작정입니다. 주한미군은 그대로 주둔시키겠습니다. 어떤 병력 감축안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병력을 조정해야 할 일이 생기면 각하께 먼저 알려드리고 사전에 충분히 상의하겠습니다.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다행입니다. 이는 오로지 각하의 지도력 덕분이라고 믿습니다. 한일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월남에서 양국이 서로 협력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박정희: “한일회담은 오는 6월 초나 중순까지는 마무리 될 것입니다. 협상을 방해하려는 무책임한 세력이 있지만 우리는 적극적인 대국민 홍보 등 다각적인 방법으로써 일본과의 합의에 도달하고야 말 것입니다.”
  
  존슨: “요사이는 외국에 대한 원조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키는 것이 더욱 어렵게 되고 있습니다. 다행히 한국이 월남에 2,000명의 병력을 보낸 것이 의회를 설득하는 데 좋은 역할을 했습니다. 각하께서는 월남에 한국군을 추가로 파견할 수 있습니까.”
  
  박정희: “그 문제는 좀더 연구 검토해봐야 하겠습니다. 국민들 사이에는 너무 많은 병력을 월남에 파견하게 되면 휴전선 방어력이 약화되고 북한의 모험을 유발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월남에 병력을 增派(증파)할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또 다시 “1개 사단을 보낼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면 전쟁수행에 큰 도움이 되겠는데요…”라고 박정희 대통령을 몰아세웠다.
  
  박정희: “한국이 월남전에 병력을 증파할 수 있다는 것은 나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연구해보아야 합니다. 이 시점에서는 결정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존슨: “우리는 한국에 필수적인 물건의 수입, 개발차관, 기술 원조, 그리고 평화 목적의 식량지원에 대해서 돈을 대겠습니다. 한국에 대한 미국 측의 인상이 지금처럼 좋았던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로스토 박사도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경제 분야에서 큰 발전이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박정희: “주한미군의 철수에 대해서 워싱턴으로부터 아무런 말들이 나오지 않기를 정말 바랍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국민들이 불안해하므로 우리가 월남을 돕기가 매우 곤란합니다.”
  
  존슨: “한국의 안보는 충분한 병력과 예산으로써 보장될 것입니다. 아무리 적은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다 하더라도 반드시 각하와 사전에 의논한 다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호주, 필리핀, 뉴질랜드도 월남을 원조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월남에서 우리가 이기기 위해서는 여러 나라들로부터 7만에서 8만 명 사이의 병력이 파견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브라운 대사가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주한미군의 지위에 관한 행정협정은 독일의 예를 따를까 합니다. 그러나 각하의 이번 방문 기간 중에 그 협상이 결론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박정희: “이 협상은 너무 오래 끌고 있습니다. 많은 국민들, 특히 야당은 불만이 많습니다. 각하께서 빨리 결론을 내리라고 지시해주셨으면 합니다. 1967년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마지막 연도입니다. 우리는 곧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할 생각입니다. 한국은 미국의 계속적인 원조를 필요로 합니다.”
  
  존슨: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약 1,000억 달러의 대외원조를 했고 16만 명의 장병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몇 나라들이 행동하는 것을 보면 의회로부터 원조허가를 받아내기가 매우 어렵게 보입니다. 예컨대 수카르노가 미국 공보원의 도서관들을 불태웠을 때 의회 인사들은 인도네시아에 대한 원조를 전면적으로 중단시키려 했습니다. 한국이 월남을 지원한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현명한 조치였습니다. 한국의 월남파병은 다른 나라에도 자극이 되어 호주와 뉴질랜드 같은 나라들이 월남 지원에 동참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이 월남에 1개 사단을 증파해 주시기를 거듭 희망하는 바입니다.”
  
  1965년 5월 17일의 제1차 한미 정상회담은 30분 만에 끝났다. 존슨 대통령은 백악관 서재에서 나와 박 대통령을 안내하여 백악관의 장미정원을 거닐면서 환담했다. 존슨 대통령은 수행한 한국기자들을 불러들여 함께 산책하자고 권했다. 존슨은 애견 두 마리를 끌고 나와 한 마리의 줄을 박 대통령에게 주었다. 이 개는 박 대통령을 따라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몇 걸음을 질질 끌어보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개의 두 앞다리를 들어올려 손으로 잡고 걸음마를 시켰다. 기자들이 소리 내어 웃자 개도 긴장이 풀렸는지 동행하게 되었다. 나중에 박 대통령 밑에서 청와대 대변인과 문공부 장관을 지내게 되는 金聖鎭은 당시 <동양통신> 워싱턴 특파원으로서 현장에 있었다.
  
  “존슨 대통령은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박 대통령을 즐겁게 해주려고 무척 애쓰는 것이었습니다. 월남에 전투사단을 파견하도록 박 대통령을 설득해야 하는 다급한 입장에 있었던 존슨은 산책이 끝나자 대통령 일행을 안내하면서 백악관 내부를 돌아다녔고 자상한 설명을 곁들였습니다.”
  
  존슨은 어느 방에 놓여 있던 화첩을 들어 박대통령에게 한 장씩 펼쳐 보이면서 말했다.
  
  “우리 언론이 나를 어떻게 만들어놓았는지 한번 보십시오.”
  
  시사 만화가들이 존슨을 웃음거리로 만든 장면들을 본 박 대통령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한국 기자들과 수행원들에게 “여기 좀 봐, 이렇게 그렸네”라고 했다.
  
  金聖鎭 당시 기자에 따르면 미국은 박 대통령이 승마를 즐긴다는 사실을 알아두고는 존슨과 나란히 말을 타는 장면을 연출하려 계획했다고 한다. 이 계획은 청와대 측에서 “우리 각하는 1년 전부터 승마를 그만두셨고 승마를 할 경우 너무 피곤해 하실 것 같다”고 해서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이날 저녁 백악관 연회실에선 존슨 대통령이 주최한 박 대통령 환영 만찬이 있었다. 150명의 인사들이 초청되었다. 한국 기자들은 만찬 이후에 있을 음악회와 무도회에 초대되었다. 야회복을 준비해오지 않았던 기자들은 옷 빌려주는 가게를 찾아가 한 벌에 12달러씩 주고 옷을 빌렸다.
  
  무도회가 시작되자 존슨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에게 다가가 춤을 추자고 했다. 당황한 육영수는 남편보다는 한 자(尺)가 더 큰 존슨 대통령에 매달려 1분쯤 느린 왈츠를 추었다. 존슨 대통령은 자기 부인을 朴 대통령에게 보내 춤을 추라고 시켰다. 춤을 출 줄 모르는 박정희는 이 프러포즈를 거절하는 결례를 범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朴 대통령은 피로하다면서 아내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가버렸다. 주빈이 갑자기 사라지니 분위기가 이상해질 수밖에. 현관까지 朴 대통령 부부를 전송하고 돌아온 존슨 대통령은 썰렁해진 무도장의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딸 린다 양을 불러 스케이팅 왈츠를 추면서 손님들에게 동참을 권했다.
  
  1965년 5월 18일의 일정도 여덟 군데를 도는 시간표로 박정희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 직속의 국가안보회의 간부 제임스 C. 톰슨은 제1차 정상회담을 분석하여 이날 존슨 대통령에게 참고용 메모를 올렸는데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우리 측 통역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각하께서 박 대통령에게 발언할 기회를 충분히 주었으나 박 대통령은 극도로 부끄럼을 타는 사람이므로 오늘 회담할 때도 그에게 다시 한 번 지난 회담 때 그냥 넘겨버린 어떤 의제가 있다면 기탄 없이 이야기를 해보라고 격려해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제2차 정상회담은 이날 오후 5시 양쪽 장관과 보좌관들이 배석한 가운데 백악관에서 열렸다. 존슨 대통령은 먼저 이날 정오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한 박 대통령의 연설이 훌륭했다고 축하했다. 그는 이어서 지난 봄 중서부를 강타한 허리케인의 희생자들을 돕기 위하여 한국 국민들이 보내준 성금에 대해서 감사했다.
  
  “한국 국민들에게 전해주십시오. 그 돈은 한국전에 참가했던 군인들 중 피해가족들을 위해서 쓰겠다고요.”
  
  존슨 대통령은 전날 밤의 만찬에 대해서도 듣기 좋은 말만 했다.
  
  “어제 만찬장은 빈 자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늘 많은 손님들이 나와 집사람에게 각하와 자리를 함께한 것을 영광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먼 길을 와서 자리를 빛내준 것이 참으로 뿌듯합니다.”
  
  존슨 대통령은 박 대통령에게 “어제 우리는 양국 간에 논의할 이야기를 전부 다한 것 같습니다. 각하께서 提起(제기)하시고자 하는 의제가 더 있으면 서슴없이 말씀해주십시오. 무슨 주제든지 좋습니다. 나는 러스크 장관과 함께 간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면서 도미니카 공화국의 정부군과 반란군이 무력충돌을 일으키지 않도록 제지하는 데 골몰했습니다”라고 했다.
  
  박정희: “오늘 나는 맥나마라 국방장관과 조찬을 하면서 軍援移管(군원이관) 문제에 대해서 의논했는데 각하께서 이를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존슨: “내년에 정부가 30억 달러 규모의 군사·경제 원조 예산을 확보할 수 있을지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 이처럼 불명확한 상태에서 외국의 지도자들이 방문하면 만나서 원조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이것이 싫어서 그들의 訪美를 연기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박정희: “한국은 60만 명의 잘 훈련된 군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병력은 공산주의와 대항해 싸우는 미군의 일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군대는 미군과 함께 공산주의와 싸울 것이며 동시에 미국의 지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존슨: “각하의 그런 다짐은 매우 감동적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어서 아프리카에서 한미 양국이 협조하여 외교활동을 강화했으면 한다는 뜻을 말했다.
  
  “아프리카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지만 그들도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박 대통령은 이즈음 북한이 아프리카 외교를 강화하고 있는 것에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존슨은 “연구해보겠다”고 답했다. 배석하고 있던 金聖恩 국방장관이 존슨에게 말했다.
  
  “한국군 장병들의 월급이 너무 적어 사기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각하께서는 한국군이 미군의 일부란 인식하에 선처해 주시기 바랍니다.”
  
  존슨은 “우리 의회도 미군의 월급 인상을 요청하고 있으나 예산의 한계 때문에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박정희는 이어서 “공동성명에 포함될 각하의 ‘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 건립 제안’에 대해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했다.
  
  존슨은 “각하나 나나 똑같이 교편을 잡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과학교육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도움이 된다면 내 과학고문을 한국에 파견하겠습니다. 동의하신다면 이 대목을 공동성명에 넣도록 합시다”라고 했다. 이 연구소는 나중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로 결실된다.
  
  배석하고 있던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는 “공동성명 5페이지에 있는 문장에서 ‘매년(annual)’이란 단어를 삭제하고 ‘적절한(applicable)’으로 대체할 수 없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문제의 문장은 ‘(미국이 약속한 1억 5,000만 달러의) 개발차관은 매년 의회의 승인을 받아서 지급될 것이다’는 내용이었다. 장기영 부총리는 그런 제약 내용이 공개되면 1억 5,000만 달러 차관이 조건부란 인상을 줄까봐 ‘매년’이란 단어를 떼버리자고 했던 것이다. 존슨은 ‘매년’만을 그냥 떼버리도록 양해하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의회와 언론에 대해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대외원조가 매년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옆에 있던 이후락 비서실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도 그러한 법적 절차를 잘 알고 있습니다. 미국이 이런 식으로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으므로 우리는 이 원조를 善用(선용)하여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내가 가는 곳마다 오늘과 같은 공동성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표를 많이 얻겠소”라고 하더니 배석한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와 김현철 주미 한국대사에게 “덧붙일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두 사람 모두 “없다”고 하자 존슨은 박 대통령에게 “오늘 저녁 7시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다른 일정 때문에 조금 늦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제 2차 정상회담을 끝냈다.
  朴 대통령은 다음날 뉴욕에서 자동차로 약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웨스트포인트의 육군사관학교를 미 공군 특별기를 타고 찾아갔다.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 그리고 조선경비사관학교 등 3국의 육사를 모두 졸업한 경력을 가진 박 대통령은 군사문화에 익숙한 체질 때문인지 이 방문을 아주 즐겼다. 의장대 사열을 받기 직전 이곳에 사는 것으로 보이는 동포 여성 한 사람이 박 대통령을 붙들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박 대통령은 생도들을 앞에 두고 짤막한 연설을 했다.
  
  “역사상에는 동일한 연대에 대등한 무력이 등장하고 전쟁을 하는 것을 자주 보아왔습니다. 어느 쪽의 무력이 일시적으로 강대해지더라도 정의를 함께 하지 아니한 무력은 끝내 처참하게 패망했습니다. 이런 진리를 부정하고 오로지 폭력만으로써 인류를 제압할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자들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입니다. 폭력은, 스스로 부정할 수 있는 폭력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인은, 이런 면에서도 본인과 한국 국민이 계속하고 있는 반공 투쟁이, 끝내 승리할 것이라는 자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생도식당에서 생도들과 함께 한 식사가 끝나갈 무렵 학교 당국은 이곳을 방문하는 국가원수에게만 주는 특권 하나를 박 대통령에게 드리겠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오전에 운동장을 시찰하다가 20여 명의 사관 생도들이 罰(벌)로 특별훈련을 받고 있는 것을 목격한 기억이 났다. 박 대통령은 벌을 받고 있는 한 생도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었다.
  
  “나는 나에게 부여된 특권으로 지금 교정에서 벌을 받고 있는 생도들을 모두 사면하는 바입니다.”
  
  생도들은 함성을 올리면서 식탁을 꽝꽝 소리 나게 쳤다. 생도들은 박대통령이 웨스트포인트를 떠날 때는 모자를 일제히 벗어 하늘로 높이 던져 환송했다. 박 대통령은 며칠 뒤 <동양통신> 金聖鎭(김성진·뒤에 청와대 대변인 및 문공부 장관 역임) 워싱턴 특파원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미국 방문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 두 가지야. 하나는 푸른 숲, 다른 하나는 웨스트포인트에서 만난 생도들의 늠름한 모습과 젊은 기개야. 내가 미국에서 가져가고 싶은 것이 저 푸른 숲이야. 나라라는 것은 이렇게 푸르러야 미래가 있는 거야.”
  
  푸른 숲과 생도들의 기개를 높게 평가한 박정희도 당시 나이가 48세, 그를 수행한 참모들도 거의가 30대 후반, 40대 초반이었다. 패기 있는 지도층이 이끌던 젊은 한국이었다는 얘기이다.
  다음날(1965년 5월 22일) 아침 일찍 대통령 일행은 피츠버그의 존스 앤드 로린 철강회사를 방문했다. 군정 시절에 종합제철공장 건설을 시도하다가 좌절한 바 있었던 박 대통령은 부러운 표정으로 말없이 공장내부를 돌아보았다. 수행원들은 “단 한 개라도 좋으니 우리도 이런 공장을 가져보았으면 원이 없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피츠버그 공항을 오전 10시 20분에 출발한 특별기는 약 두 시간의 비행 끝에 플로리다 주의 우주기지인 케이프 케네디에 도착했다. 야자수 나무들이 서 있는 常夏(상하)의 평원 여기저기에는 금방 단추만 누르면 우주를 향해서 치솟을 것 같은 로켓들이 전신주처럼 여기저기에 박혀 있었다. 우주센터에서는 朴 대통령의 방문에 맞추어 아틀라스 장거리 로켓 발사 시험을 했다.
  
  로켓이 굉음을 내면서 아프리카 남단의 한 무인도를 목표로 솟아오르자 박 대통령은 뒷자리에 앉은 사람이 쓰던 쌍안경을 달라고 하여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이미 땅으로 내려왔지만 박 대통령은 쌍안경의 시야에서 로켓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쌍안경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아무 말이 없었다. 옆에 앉아 있던 김성진 <동양통신> 기자가 “소감이 어떻습니까”하고 물었다.
  
  박 대통령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뭐, 남의 나라에서 쏘았는데 감상은 무슨 놈의 감상이야”하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었다. 합동취재기자단의 대표로서 취재 중이었던 김성진은 논평을 듣는 데는 실패했으나 박 대통령의 표정이라도 정확하게 관찰해 놓으려고 유심히 살폈다.
  
  “마치 좋은 장난감을 갖고 있는 옆집 아이를 시샘하는 어린아이의 표정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아하, 이 분은 보통 양반이 아니구나’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박 대통령은 뉴욕 시가지를 걸을 때도 골똘히 무엇을 생각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이 분은 자수성가한 사람답게 국가도 자주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굳게 믿는 분이로구나, 미국에까지 와서도 국가경영의 지표를 설정하려고 끊임없이 명상하는 분이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켓 발사 실험이 끝나고 일행이 버스에 오르자 기다리던 기자들이 “홍종철 장관, 뭐 발표없어요?”라고 소리쳤다. 홍종철 장관은 김성진 기자를 쳐다보았다. 김 기자는 “글쎄 말이야, 내가 대변인이라면 ‘우리 우방의 놀라운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류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면 안 될까”라고 했다.
  
  같은 버스에 동승했던 李厚洛 비서실장이 한 시간 뒤 “대통령 소감이 나왔습니다”하고 돌린 논평은 金聖鎭 기자가 버스 안에서 말한 내용과 흡사했다.
  
  다음날은 일요일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모처럼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케이프 케네디의 패트릭 공군기지에 숙소를 두고 있던 박 대통령은 이날 오전 수행기자들을 불러 아침식사를 함께 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즉석 기자회견을 했다. 한 기자가 “육영수 여사가 도처에서 격찬을 받았습니다”라고 하자 박 대통령은 싫지 않은 표정으로 “나보다도 인기가 좋았단 말이오?”라고 했다.
  
  박 대통령 부부는 근처에 사는 교포들을 초청하여 환담했다. 가수 孫詩響(손시향)도 끼어 있었고, ‘박정희’란 이름을 가진 여성이 미국인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기를 안고 와 자신의 성명을 밝히는 바람에 웃음이 터졌다.
  
  박 대통령은 오전에 시간이 남자 洪鍾哲 공보부 장관을 보내 혼자서 기사를 정리하고 있던 김성진 기자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김 기자, 심심한데 우리 드라이브나 합시다.”
  
  박 대통령은 전화기를 들더니 수행경호관에게 지시를 했다.
  
  “자동차 나오라고 해. 깃발은 커버를 씌워라. 이건 공식행사가 아니야.”
  
  잠시 후 세 사람은 리무진을 타고 바다가 넘실대는 남국풍의 해안을 달렸다. 운전석과 맞닿은 바로 뒷자리에는 김 기자, 홍 장관이 앉아 박 대통령과 마주 보게 되었다. 박 대통령은 워싱턴 특파원 생활을 오래 한 김성진에게 미국의 외교정책, 의회 사정, 언론 동향 등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었고 김 기자는 방미 소감을 물었다. 다음날 박 대통령은 헤어지는 김 기자를 부르더니 물었다.
  
  “미스터 김, 당신은 한국에 안 돌아오시오?”
  
  “저도 임기가 있습니다.”
  
  “언제 끝나나?”
  
  “내년이면 저도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오면 나한테 연락하시오.”
  
  김성진은 박 대통령의 이 말을 그냥 하는 이야기로 이해했다. 다음해 귀국한 김성진은 정치부장 대리로 있으면서 동남아 취재를 했다. 그 기사가 나간 뒤 청와대로부터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박 대통령은 김 기자를 보자마자 “당신 언제 왔어?”라고 했다.
  
  “온 지 오래됩니다.”
  
  “이 사람, 연락하라고 그랬잖아.”
  
  김성진은 ‘그런 걸 다 기억하고 있는 이런 양반 앞에서 허튼 소리를 했다가는 큰일이 나겠구나’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 2009-03-18, 22:0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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