弔辭/朴正熙가 李承晩에게
연재 35/"역사의 어린 양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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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의 죽음
  
  식민지와 지배국 사이로 맺어졌던 한일관계가 대등한 주권국가 사이로 새 장을 연 1965년 6월 22일 서울 시내는 1만여 명의 학생들과 야당인사들이 참여한 ‘굴욕외교 규탄 시위’로 최루탄·곤봉·삐라가 난무하는 수라장으로 변했다.
  
  다음날 밤 8시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라디오 및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연설에서 금속성 목소리로 특별담화를 읽어 내려갔다. 이 담화문은 박 대통령의 대일관을 잘 보여준다. 그는 패배주의적인 대일관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소신을 강한 어투로 표현했다.
  
  “나는 우리 국민 일부 중에 한일교섭의 결과가 굴욕적이니 저자세니 심지어 매국적이라고까지 극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들의 주장이 정부를 편달하고 정부가 하는 교섭의 입장을 강화하는 데 도움도 될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이것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 진심으로 우리가 또 다시 일본의 침략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경제적으로 예속이 될까 걱정을 한 데서 나온 것이라면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어찌하여 그들은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을 집어먹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비굴한 생각, 이것이 바로 굴욕적인 자세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일본 사람하고 맞서면 언제든지 우리가 먹힌다’는 이 열등의식부터 우리는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근대화 작업을 좀먹는 암적인 요소는 우리들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패배주의와 열등의식 및 퇴영적인 소극주의,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이 기회에 일본 국민들에게도 한마디 밝혀둘 일이 있습니다. 과거 일본이 저지른 죄과들이 오늘의 일본 국민이나 오늘의 세대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역시 믿을 수 없는 국민이다’ 하는 對日(대일) 불신 감정이 우리 국민들 가슴속에 또 다시 싹트기 시작한다면 이번에 체결된 모든 협정은 아무런 의의를 지니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이 기회에 거듭 밝혀두는 바입니다.”
  
  도쿄에서 조인식을 마친 다음날 귀국한 이동원 외무장관은 역사적 문서를 들고 청와대로 들어갔다. 박 대통령은 두 손을 서류에 얹고는 흐뭇한 표정으로 한동안 들여다보다가 독백처럼 말하더란 것이다.
  
  “대체 이 서류 몇 개를 가져오는 데 몇 년이 걸린 건가….”
  
  연하구 외무부 아주국장이 “자유당 시절부터 햇수로 15년입니다”라고 했다.
  
  “15년이라, 그것 참, 그렇지만 앞으로 150년이건 1500년이건 잘 돼야 할 텐데….”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의 마우나라니 靜養院(정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양자 李仁秀(이인수), 재미동포 崔伯烈(최백렬)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했다. 향년 90세. 의식을 잃은 지 1년이 넘은 그는 큰 숨을 한번 몰아쉬고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유언을 남길 처지가 아니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눈물을 닦으면서 이인수에게 “절대로 남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말라”라고 당부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늘 들고 다니던 팬암 항공사 상호가 찍힌 낡은 쇼핑백에 성경과 찬송가를 담아 들고는 병실을 나섰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위문한 정부 요인은 이동원 외무장관이었다. 그는 넉 달 전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정양원을 찾았다. 이 전 대통령은 사람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 채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누워 있었고, 간호사를 고용할 돈도 없던 프란체스카 여사가 소파를 침대처럼 쓰면서 옆에서 看病(간병)하고 있었다고 한다.
  
  李 장관이 돌아와 박 대통령에게 이승만의 처지를 전하면서 “프란체스카 여사의 부탁입니다만, 머지않아 돌아가시게 될 터인데 고국에서 묻힐 수 있게 해달라고 합디다”라고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묵묵부답이었다.
  
  7월 21일 호놀룰루 한인 기독교회의 영결식장에서 말년의 이승만과 가장 가깝게 지냈던 미국인 친구 보스윅은 故人(고인)을 덮은 베일을 걷어낸 뒤 이마를 만지면서 울부짖듯이 말했다고 한다(이인수 증언).
  
  “나는 자네를 알아, 나는 자네를 알아.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가 잘 안다네. 이 친구야, 그 일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자네가 그토록 비난을 받고 살아왔다는 것을 내가 잘 안다네, 이 친구야….”
  
  한 시간 가량 걸린 영결 예배가 끝나자 영구차는 하와이 경찰의 경호를 받으면서 히컴 공군기지로 향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살아서 귀국하는 것을 막았던 박정희 정부는 죽어서 귀국하는 것은 허용했다.
  
  국내에서는 장례 절차를 두고 논란이 빚어졌다. 국장, 국민장, 사회장, 또는 가족장, 어느 쪽으로 할 것인가.
  
  4·19 혁명 직후 하야한 이승만의 뒤를 이어 과도정부를 이끌었던 허정 전 수반은 “무엇보다도 아쉬웠던 것은 정부가 이 박사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아 그분이 고국에서 눈을 감지 못했다는 점이다”라고 말하면서 “장례식이나마 국장으로 했으면 한다”고 했다.
  
  金泳三 민중당(민정당과 민주당이 합당하여 만든 야당) 대변인은 “적잖은 정치적 과오가 있긴 하지만 평생을 조국의 독립투쟁에 몸바쳐왔으며,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는 것을 감안하여 전 국민과 더불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했다.
  
  4월 혁명동지회 등 일부 단체에선 국장, 국민장, 사회장 그 어느 것도 안 된다면서 반발하기 시작한다.
  
  애도 人波
  
  1965년 7월 20일 오후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李承晩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결정했다. 李錫濟 총무처 장관이 장례준비소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李 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니 박 대통령은 “하여튼 정부로서 최선을 다해 도와주기 바라오”라며 간단하게 언급했다. 이 장관은 평소 박 대통령의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배려가 각별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당시 이 박사의 귀국을 박 대통령이 막은 것이 아니냐 하는 점인데, 그것은 당시 상황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이 박사 말년에 벌어진 부정선거와 4·19 등 失政(실정)의 여파가 정부에 큰 짐이 되고 있었습니다. 언론들도 국장에 절대 반대 입장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모셨던 張澤相(장택상), 李範奭(이범석), 卞榮泰(변영태) 전 총리 등과 任興淳(임흥순) 전 서울시장 등은 國葬(국장)을 고집했고, 4월 혁명동지회원들은 국장이든 國民葬(국민장)이든 社會葬(사회장)이든 결사반대한다며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대다수 언론들도 4월 혁명동지회와 비슷한 태도로 사설을 쓰곤 했다.
  
  李錫濟 장관은 국장으로 할 경우 반대여론이 드셀 것을 고려해서 국민장으로 하되 격식은 국장으로 하는 것이 정부로서 최선을 다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7월 23일 오후 3시, 이승만의 유해를 실은 미 공군 수송기가 ‘고향생각’이 연주되는 가운데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하와이에서 과로로 입원, 서울로 오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효상 국회의장, 조진만 대법원장, 정일권 국무총리 등 3부 요인들을 데리고 공항으로 나가 5년 1개월 24일 만에 돌아오는 건국 대통령의 유해를 맞았다.
  
  윤치영(이승만 정부에서 내무부 장관 역임) 서울 시장이 정일권 총리와 함께 비행기에 올라왔다. 윤 시장은 국민장을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양자 이인수에게 설명하려 했다. 그런 윤 시장이 매정하게 보이기만 했던 喪主(상주) 이인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유해를 따라 차에 올랐다.
  
  영구차와 그 뒤를 따르는 세단의 행렬이 김포가도를 출발했다. 연도에는 많은 시민들이 나와 죽어서 돌아온 건국 대통령을 맞았다. 한국 부인회 소속 회원들이 검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나와 꽃다발을 들고 이 박사의 유해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차량 행렬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윤치영 시장은 차 안에서도 국민장을 수락하라고 이인수를 설득하다 이화장까지 따라 들어갔다. 문중 사람들은 상복을 갖춰 입고 길가에 나와 서 있었고 4·19 부상동지회원들은 ‘자유당 원흉들 사과하라. 이 박사 유해 못 들어온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이화장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李 박사의 문중 사람들은 정부의 국민장 결정이 건국 대통령에 대한 홀대라고 생각했고, 4월 혁명동지회 등은 국민장이 너무 과분한 조치라며 정부를 규탄하면서 사흘째 농성 중이었다.
  
  이날 밤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아버님은 자신의 死後(사후) 간소한 장례를 원하셨다”면서 정부가 결정한 국민장을 거부할 뜻을 비쳤다. 박 대통령은 舊자유당 인사들이 국민장에 불만을 품고 국장을 요구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는 “정부가 국민장으로 양해했으면 고맙게 생각할 일이지… 개인장으로 지내겠다면 내버려두라”고 역정을 냈다고 보도되었다.
  
  李錫濟 씨는 이를 부인했다.
  
  “박 대통령은 그런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닙니다. 언론들이 비판적으로 보도하려는 성향이 강해서 만들어진 말로 알고 있습니다. 유족들과 정부 측 사이에는 사소한 장례 절차에 대한 논란이 더 많았습니다. 이 장례식은 철두철미하게 정부의 지도·배려하에 치러졌습니다.”
  
  7월 27일 아침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유해는 이화장을 떠나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올렸다. 국립묘지로 運柩(운구)될 때 수십만 시민들이 연도에 몰려나와 애도를 표했다. 대중의 반응은 언론의 비판적 論調(논조)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이 장관은 이날 아침 서울 시청 옥상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이석제는 ‘이래 가지고는 장례 행렬이 제대로 지나갈 수 있을까’하고 걱정했다. 정부가 동원한 인파도 아닌데 시민들은 한결같이 건국 대통령에 대한 존경과 애도의 염을 품고서 거리로 모여 나온 듯했다. 이석제 씨는 6·25 당시 중대장으로 전선에서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길 때가 떠올랐다고 한다.
  
  “적군에게 포위되고 식량조달이 안 돼 사기가 뚝 떨어져 있을 때에도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결사적으로 싸워 달라’는 李 대통령의 육성 한마디가 군인들에게 다시 일어나 싸울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이날 연도에 나온 일반 시민들도 이 분의 말년에 失政(실정)은 있었지만 이 박사는 독립운동을 하시고, 광복 직후 좌익들이 사람들을 구름같이 끌어 모으며 혼란을 조성하고 있을 때 홀로 그 상황을 타개하고 자유 대한민국을 건국하신 분이란 점을 고맙게 여기는 진지한 표정이었습니다.”
  
  巨人을 보내는 巨人의 弔辭
  
  1965년 7월 27일 오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유해를 실은 영구차는 서울 시내를 가로질러 제 1한강교를 건넌 뒤 국립묘지에 도착했다. 국립묘지에 안장되기 전에 간단한 영결식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弔辭(조사)는 정일권 국무총리가 代讀(대독)했다.
  
  독립·건국의 거인을 조국 근대화의 거인이 격조 높은 문장으로써 평가하고 애도하면서 역사의 장으로 떠나보내는 이 弔辭는 이승만을 ‘독립운동의 元勳(원훈)이요 건국 대통령’으로 지칭하면서 시작된다.
  
  <돌아보건대 한마디로 끊어 파란만장의 기구한 일생이었습니다. 과연 역사를 헤치고 나타나 자기 몸소 역사를 짓고 또 역사 위에 숱한 교훈을 남기고 가신 조국 근대의 상징적 존재로서의 박사께서는 이제 모든 榮辱(영욕)의 塵世因緣(진세인연)을 끊어버리고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생전의 一動一靜(일동일정)이 凡人庸夫(범인용부)와 같지 아니하여 실로 조국의 명암과 민족의 安危(안위)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던 세기적 인물이었으므로 박사의 최후조차 우리들에게 주는 충격이 이같이 심대한 것임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일찍이 대한제국이 기울어가는 것을 보고 용감히 뛰쳐나와 조국의 개화와 반제국주의 투쟁을 감행하던 날, 몸을 鐵鎖(철쇄)로 묶고 발길을 荊棘(형극)으로 가로막던 것은 오히려 선구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의 특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에 쫓겨 해외의 망명생활 30여 星霜(성상)에 문자 그대로 혹은 바람을 씹고 이슬 위에 잠자면서 동분서주로 쉴 날이 없었고 또 혹은 섶 위에 누워 쓸개를 씹으면서 조국광복을 맹서하고 원하던 것도 그 또한 혁명아만이 맛볼 수 있는 명예로운 향연이었던 것입니다.
  
  (중략) 그러나 집권 12년의 종말에 이르러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이른바 정치적 과오로 인하여 살아서 역사의 심판을 받았던 그 쓰라린 기록이야말로 박사의 현명을 어지럽게 한 간신배들의 가증한 소치였을망정 究竟(구경)에는 박사의 일생에 씻지 못할 오점이 되었던 것을 통탄해마지 못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헤아려보면 그것이 결코 박사의 민족을 위한 생애 중에 어느 일부분일망정 전체가 아닌 것이요, 또 외부적인 실정 책임으로써 박사의 내면적인 애국정신을 말살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또 일찍이 말씀하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귀국 第一聲(제일성)은 오늘날 오히려 이 나라 국민들에게 들려주시는 최후의 유언과 같이 받아들여져 민족사활의 箴言(잠언)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어쨌든 박사께서는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세기적 비극의 주인공이었던 것을 헤아리면 衷心(충심)으로 뜨거운 눈물을 같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마는 그보다는 조국 헌정사상에 최후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어린 양’의 존재가 되심으로써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위인’이란 거룩한 명예를 되살리시고 민족적으로는 다시 이 땅에 4·19나 5·16과 같은 역사적 고민이 나타나지 않도록 보살피시어 자주독립의 정신과 반공투쟁을 위한 선구자로서 길이 길잡이가 되어주시기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말미암아 박사로 하여금 그토록 寤寐不忘(오매불망)하시던 고국 땅에서 임종하실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드리지 못하고 이역의 쓸쓸한 海濱(해빈)에서 고독하게 최후를 마치게 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중략) 생전에 손수 創軍(창군)하시고 또 그들로써 공산 침략을 격파하여 세계에 이름을 날렸던 그 국군장병들의 英靈(영령)과 함께 길이 이 나라의 護國神(호국신)이 되셔서 민족의 多難(다난)한 앞길을 열어주시는 힘이 되실 것을 믿고 삼가 두 손을 모아 명복을 비는 동시에 유가족 위에도 신의 가호가 같이 하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언론의 난
[ 2009-03-21, 17:40 ] 조회수 : 8489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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