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병 환자들을 싹 쓸어버리겠다"
연재 38/대통령과 장인, 대통령과 조카사위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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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의 죽음
  
  1965년 12월 26일 오전,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의 친인척 관리를 主(주)임무로 해 오던 權尙河(권상하) 청와대 정보비서관(대구사범 동기생)으로부터 장인 陸鍾寬(육종관)의 부음을 받았다.
  
  72세에 죽은 육종관은 1893년 충북 옥천의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미곡 도매상, 금광, 인삼 가공업 등을 통해 번 돈으로 충북 옥천 교동의 古家(고가)와 과수원 등을 구입해 대지 3,000평의 대저택에서 살았다. 16세 때 李慶齡(이경령)을 아내로 맞이하여 陸仁順(육인순·洪世杓 전 외환은행장의 母), 陸仁修(육인수·전 국회의원), 육영수, 육예수를 낳았다. 그는 또 다섯 명의 소실을 두어 모두 22명의 자손을 보았다.
  
  박정희는, 육영수의 결혼에 반대하는 장인과 헤어진 장모를 모시고 가난 속에서 갖은 고생을 다 했지만 돈 많은 장인에게 손 한 번 벌린 적이 없었다.
  
  이경령도 먹을 것이 없어 맹물에 국수만 말아 먹거나 얼음장 같은 방에서 겨울을 나야 할 때조차 남편 육종관의 도움을 청한 적이 없었다. 이경령으로서는 여러 명의 소실들로 인해 가슴앓이를 해야 했던 기억들이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고, 육영수로서는 친어머니보다 소실들에게 더 많은 정성을 쏟았던 아버지에 대한 감정과 자신의 결혼을 반대한 기억들이 현실의 고통보다 더 컸을 것이다.
  
  박정희도 육종관이 실리적인 시각으로만 자신을 평가한 데 대한 오기가 있었다. 사위만큼이나 자존심이 강했던 육종관은 사위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기뻐하거나 자랑하고 다닌 적이 없었다. 다만 소실의 자녀들에게는 가끔씩 “청와대에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그 잔디와 정원이 그렇게 좋다던데…”하고 말했다. 정원 가꾸기에 상당한 재주가 있었던 육종관은 청와대 정원이 몹시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육영수는 청와대에서 모시고 살던 어머니와 서울에 기거하는 아버지를 화해시키려고 몇 번씩이나 어머니 이경령을 설득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이경령은 “내가 그 늙은이 만나면 속이 터져서…”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했다고 한다.
  
  당시 박 대통령과의 친분을 거론하며 사기 행각을 벌인 사건들이 많았다. 경찰, 군 수사기관, 정보부 등에서 보고된 자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7,000여 명이 박 대통령과의 친분을 주장하고 있었다. 친인척 관계와 동향 관계에서부터 구미보통학교 동창, 대구사범학교 동창,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의 제자·학부형, 만주 군관학교 동기생, 일본 육사 동기생, 국군 장교 시절의 상하 관계 등 각양각색이었다.
  
  하루는 박 대통령이 권상하 비서관을 부르더니 “자네, 나를 잘 안다고 팔고 다니는 놈들을 전부 조사해”라고 지시했다. 권 비서관은 한 달 동안 이 명단을 취합해 道(도)별로 정리한 다음 대통령 집무실로 들고 들어갔다.
  
  박정희는 7,000여 명의 명단을 전부 확인하면서 “이 사람은 잘 안다”, “이 사람은 전혀 기억이 없다”는 식으로 구분해 주었다. 잘 안다는 사람이 500여 명. 이들 중 親族(친족)인 고령 박 씨 일가, 外族(외족)인 수원 백 씨 일가 및 妻族(처족)인 육종관 씨 일가에 대한 집중 감시를 명령했다.
  
  이른바 ‘대통령 친인척 경호 임무’는 해당 지역 경찰서 정보과에서 전담하게 되어 박 대통령이 사망할 때까지 계속됐다. 육종관에 대한 감시도 물론 포함되어 있었다.
  
  이 무렵 육종관은 소실 중 한 명과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 매일 아침 형사가 집 앞에 나타났다. 여름날 대문을 열어두면 형사는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있곤 했다. 외출할 때면 어김없이 뒤를 따라다녔다. 육종관은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참다못한 육종관은 조카 宋在寬(송재관)을 불러 “너희 외숙모한테 얘기 좀 해. 내가 뭐 독립운동할 것도 아닌데 왜 맨날 형사가 따라 붙냐. 사위가 대통령이면 대통령이지 내가 왜 이렇게 고생해야 되냐 말이다”라며 항변했다.
  
  청와대에서 기거하던 이경령은 남편의 하소연을 전해들은 뒤 사위에게 말해 곧 바로 육종관에 대한 경호 겸 감시는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 육종관은 폐암 진단을 받고 메디컬센터에 입원, 수술을 받은 뒤 퇴원했다.
  
  1965년 가을 육종관은 다시 폐암이 악화되어 메디컬센터에 입원하고 있었다. 산소마스크를 쓴 채 말을 거의 할 수 없는 상태로 누워 손짓만 할 정도였다. 육영수는 비서로 있던 조카 洪晶子(홍정자)와 가끔 문병을 갔다. 박 대통령도 늦은 밤 아무도 몰래 육영수와 함께 문병을 다녀왔다고 한다. 12월 초, 육인수 의원은 자택 사랑방에 희망이 없는 아버지를 모셨다.
  
  이경령은 육영수를 앞세워 병문안을 왔지만 사실상 임종이었다. 육종관은 의식이 거의 없었다. 육영수는 “어머님, 아버님이 마지막이신데요, 살아 계실 때 두 분이 나란히 계신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 두세요”라고 했다. 마지못한 이경령은 침대 곁에 서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육종관은 의식 없이 누운 채 촬영을 했다. 12월 중순엔 박 대통령이 육영수와 함께 문병했다.
  
  12월30일 새벽에 李錫濟(이석제) 총무처 장관은 박 대통령과 함께 발인식에 참석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박정희는 표정도 없이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장인과 대통령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던 이 장관은 ‘끝까지 자존심으로 버티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날 저녁 대통령을 만난 이석제 장관이 “하관식에 다녀 왔습니다. 장례식은 잘 끝났습니다”라고 보고하자 박 대통령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영감에게 밉보였어.”
  
  
  대통령병 환자
  
  
  1966년, 틈새가 벌어지던 박정희-김종필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어떤 酒席(주석)에 대한 흥미 있는 기록이 있다.
  
  1월 초 김종필 의장은 박 대통령을 청구동 자택으로 모시고 저녁식사를 대접하게 됐다. 초대받은 사람 가운데는 朴相吉(박상길) 총무처 차관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 시절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의 정리자이자 청와대 대변인 출신인 박상길은 이즈음 김종필의 원고를 교열해주고 있었다. 책명을 《조국과 민족과 역사를 위하여》로 결정하고 편집을 끝낸 뒤 인쇄소로 넘긴 순간 갑자기 김종필 쪽에서 연락이 왔다. 인쇄 보류를 요청해온 것이다. 저서 출판은 야심을 너무 일찍 드러내는 일이라는 우려에서 출판을 보류키로 한 것 같았다.
  
  사전 통고에 따르면 청구동의 저녁식사 자리에는 박 대통령도 나온다는 것이었다. 박상길은 직감적으로 단순을 빙자한 단순치 않은 모임이란 생각을 했다. 참석을 하고 보니 아래층 내실에 상을 차렸는데 과연 모인 면면들의 짜임은 묘한 데가 있었다(박상길 회고록 《나와 제3·4공화국》에서 인용).
  
  주빈은 대통령이고 주인은 김 의장인데 일반 초청객은 嚴敏永(엄민영) 내무장관과 박상길이 이색적인 존재이고, 나머지는 김종필 핵심 측근으로 분류되는 너댓 명이었다.
  
  얼마 안 되어 밖이 소란해지면서 박 대통령이 들어섰다. 이윽고 주안상이 들어오고 술이 몇 순배 돌았다. 분위기는 어딘가 모르게 어금니가 맞지 않았다.
  
  밖에서 들으면 談論風發(담론풍발)이었으나 좌석의 공기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김종필 측근 쪽에서도 분위기가 어색함을 의식하였던지 박 대통령이 한 달 전에 지시한 공무원의 요정 출입 금지 조치를 화제로 올렸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박 대통령이 응수했다.
  
  “무조건 금지, 엄벌, 단속한다고만 되는 게 아닙니다. 왜 일들을 그렇게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 자네들 말대로라면 마실 테면 마셔라 하고 무조건 맡겨두라 그런 이야기지?”
  
  박 대통령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어색함을 호도코자 하는 데서 술만 순배가 빨라져 박정희는 상당히 술이 올랐고 다른 사람들도 욕구불만 탓인지 정도를 넘고 있었다.
  
  공무원 요정 출입 금지란 화제는 어느덧 본격적인 토론 주제가 되어버렸다. 대통령, 엄민영, 박상길이 한편이고, 김종필 측근은 공격 진영으로 편가름이 됐다. 엄민영은 이 문제의 단속 부서 책임자, 박상길은 주관 부서의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박상길은 집중 포화의 표적이 되고 있는 박 대통령을 변호할 겸 화해도 붙일 겸해서 끼어들었다.
  
  “여러분들 말씀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사실 겉으로 단속을 강화하면 지하로 숨어 비밀요정으로 빠지고 말씀대로 버려두면 아예 난장판이 되고 그러니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나가다 보면 안 하는 것보다 나은 정도의 효과가 있을 것 아닌가, 하는 것이 각하의 생각이십니다.”
  
  그러나 왁자지껄 떠들 뿐 박상길의 말은 먹혀들지 않았다. 엄민영은 원만한 성격 그대로 하하하 웃으면서 얼버무리려 했으나 잠자코 있는 박 대통령의 기색을 엿보니 무슨 일인가 터질 것 같았다. 역시 민감한 김종필이 박상길에게 다가와서 귓속말로 빨리 각하를 모셔가 달라고 당부했다.
  
  박상길은 기회를 엿본 끝에 “각하, 시간이 늦었습니다. 이만 일어나시지요”라고 권했다.
  
  “아니오. 내 좀 여기서 볼일이 있소. 이 집 안방엔가 어디에 니폰도(日本刀)가 있을 터인데 그걸 좀 가져와야겠소.”
  
  박상길은 급히 박 대통령 곁으로 다가가 단단히 부여안고 밖으로 모셨다.
  
  “내가 니폰도로 이 쓸개 빠진 자들의 목을 댕강댕강 치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소.”
  
  간신히 박 대통령을 차에 싣고 출발했다. 뒷자리에선 박상길이 박 대통령을 부축하고 운전석 옆자리에는 경호관이 앉았다. 차가 대연각 호텔 앞까지 오니 박 대통령이 명동 입구 쪽에 차를 세우라고 명했다.
  
  “내 이 안쪽에 아는 데가 한 곳 있는데 거기 가서 둘이서 술 딱 한 잔만 더하고 갑시다.”
  
  억지로 차를 청와대로 몰게 하는데 이번엔 앞자리의 등 받침대 위에 구둣발을 올려 뻗치고는 경호원의 뒤통수를 톡톡 치면서 ‘왜 차를 안 세우느냐’고 투정을 부렸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몸을 꼭 껴안고 있는 박상길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아당기더니 두서너 번 박치기를 했다.
  
  청와대 본관에 들어서서 복도를 지나 2층 내실로 모시려고 하는데 陸英修(육영수) 여사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지금이 대체 몇 시인데 어쩌다 이 모양이 되셨어요”라고 짜증을 냈다.
  
  박 대통령이 비서관의 도움으로 내실로 모셔지고 나서야 박상길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데 돌연 쾅하고 문이 열리더니 박 대통령이 다시 뛰쳐나왔다. 느닷없이 권총을 찾는다.
  
  “내 권총으로 그 쓸개 빠진 대통령병 환자놈들을 확 쓸기 전에는 잠을 못 잔다!”
  
  다시 한 바탕의 소란 끝에 박 대통령이 잠든 것을 확인한 연후에 박상길은 집으로 돌아갔다. 식은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박상길은 회고록에 ‘그날 저녁의 청구동 작전은 실패였다’고 썼다.
  
  <모두들 꾹 참고 차분하게 화제와 분위기를 이끌었다면 그 같은 역효과는 없을 성싶었다. 대통령이 먼저 대통령 환자라고 소리 지르신 터에 어찌 정상적인 정치가 두 분 사이에 건재할 수 있었겠는가. 내 개인의 견해로도 김 의장 쪽이 ‘왜 그리 서두는 것일까’ 하는 회의가 항상 머릿속에서 떠날 수 없었다>
  
  
[ 2009-03-22, 20:1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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