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마르코스의 라이벌 의식
연재 40/한 사람은 나라를 망쳤고 다른 사람은 일으켰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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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
  
  1966년 10월 23일 일요일 정오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홍콩을 출발, 오후 3시 30분 마닐라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동체에 성조기 마크가 선명하게 그려진 노스웨스트항공사의 전세기는 조종석 창문에 걸어둔 작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환영 행사장 앞 붉은 양탄자 앞에 멈추어 섰다. 페르디난드 에드랄린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과 나르시소 라모스 외상 등 필리핀 정부 요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양수 주필리핀 대사와 필리핀 외무성 의전실장이 기내로 올라가 박 대통령에게 인사를 한 뒤 환영 행사 일정에 관한 보고를 했다.
  
  박 대통령이 의전실장의 안내를 받으며 계단을 내려오자 150여 명의 교포들이 환영했다. 계단을 내려온 박 대통령과 마르코스 대통령이 악수를 나누며 포옹을 했다. 뒤따라 내려오던 이동원 외무부 장관은 두 사람의 포옹 장면을 보고 “저렇게 닮았을 수가…” 하며 놀랐다고 한다.
  
  <물론 이목구비 하나하나까지 복사판은 아니었으나 마르코스의 분위기는 영락없는 박 대통령이었다. 까무잡잡한 얼굴, 날카로운 눈매에 작은 키, 아담한 체구, 게다가 카랑카랑한 목소리까지 내겐 분간 못 할 혼란이었다. 특히 도도하고 당당하게 걷는 걸음걸이는, 뒷모습이라면 누구든 쌍둥이라 할 정도였다>(이동원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에서).
  
  박정희와 마르코스의 닮은 점에 대해서는 당시 외교가의 화제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외모에서만 닮은 것이 아니었다. 1917년생으로 같은 己巳生(기사생·뱀띠)인 것은 물론, 그때까지의 인생역정 또한 비슷했다.
  
  필리핀은 300년 이상 스페인의 식민 통치를 거쳐 19세기 말부터 40여 년간 미국의 지배를 받아온 나라이다. 미국의 식민시대에 마닐라에서 태어난 마르코스는 필리핀 법대에 재학 중 국회의원 말룬 다산의 암살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무죄를 주장해 1940년 석방됐다. 필리핀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자 루손 섬 북쪽에서 게릴라 지도자로 활동하다 일본군 포로가 되기도 했다. 맥아더가 필리핀을 재수복한 뒤 마르코스는 미국으로부터 최고 명예훈장을 받는 등 종전할 때까지 도합 27개의 훈장을 받은 군인으로 명성이 높았다.
  
  종전 후인 1949년 마르코스는 루손 섬에서 하원선거에 출마해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되는 기록을 세웠다. 1959년 상원에 진출할 때에도 전국 최연소 최다득표라는 기록을 세웠고, 이어서 상원의장에 출마해 최연소 의장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마르코스는 1965년 11월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 출마, 당선됨으로써 국가 지도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마르코스는 필리핀의 경제적 위기 극복과 국내 질서의 회복에 노력하면서 미·일 등 선진 우방국들과의 관계 설정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1969년에 대통령으로 재선, 1973년에는 3선 개헌을 위해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개헌을 추진했다.
  
  1966년 당시 한국의 1인당 GNP가 130.8달러였을 때 필리핀은 269달러로 동남아시아에서 선두 그룹에 들어 있었다.
  
  마르코스는 필리핀을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가는 부강한 국가로 이룩하겠다는 꿈과 패기와 긍지를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 지도자들과의 경쟁의식도 강했다.
  
  육군 소장으로서 최고회의 외교국방위원장을 역임했던 柳陽洙는 월남참전 7개국 정상회담이 열리던 무렵엔 4년째 필리핀 대사로 근무 중이었다. 그는 마르코스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1966년 초 박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외교를 준비할 때 저는 필리핀 정부에 박 대통령을 초청해줄 수 있느냐고 타진했지만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마르코스, 박정희 두 지도자 간의 경쟁 관계가 형성되면서 한국이 먼저 월남에 전투병력을 파병했다는 사실이 마르코스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미국에 대한 마르코스의 입장은 한국과 조금 달랐습니다.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미국으로부터 긴밀한 원조가 필요했지만 48년간 필리핀의 植民母國(식민모국)이 미국이었기에 부담도 컸습니다. 필리핀에선 미국 식민시대의 독립운동가들을 찬양하면서 반미 분위기가 일상화되어 있었습니다. 역대 필리핀 대통령들이 미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노력을 해온 만큼 마르코스도 필리핀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부인 이멜다도 필리핀 문화부흥운동에 앞장서고 있을 때였지요.
  
  반면 필리핀 내부의 인민공산당들은 중공으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아 마르코스의 발목을 잡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마르코스는 미국의 월남전 지원 요청에 응했지만 병참과 군수부대 위주의 지원에 그쳤지요. 6·25 당시 미군을 제외한 참전국 중 가장 먼저 전투병력을 한국에 파병한 필리핀은 우리에 대해 우월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월남에 전투병력을 파병했다는 사실이 마르코스에게 충격적이었습니다. 월남파병을 통해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아낸다는 점도 마르코스에게는 아픈 곳을 찔리는 듯한 느낌이었을 겁니다. 제가 대사로서 마르코스 대통령을 만나면 표현은 하지 않지만 분명 뭔가 샘을 내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지요.”
  
  월남참전 7개국 정상회담은 당시 이동원 외무장관의 구상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1966년 초가 되니 동아시아에는 월남참전을 주제로 국가별 서열이 정해졌습니다. 한국이 4만 2,500명의 병력을 파병해 선두였고 오스트레일리아 4,500명, 필리핀 2,000명, 뉴질랜드 150명이었으며 태국은 17명에 불과했습니다. 1966년 6월 14일 아스팍(ASPAC·아시아 태평양협의회)이 서울에서 열렸을 때 월남참전국 대표들에게 우리끼리 한 번 모이자는 의견을 내어 만장일치로 찬성을 얻어냈습니다. 일종의 월남참전국 모임을 만든 것이지요.”
  
  頂上회담은 참전 각국에게 공통되는 여러 가지 정치적 이익을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하는 나라가 없었다. 이 모임을 주도할 국가는 한국이어야 한다는 데에도 이의가 없었다. 그런데 일주일쯤 뒤 라모스 필리핀 외상이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마르코스가 이 회의는 필리핀이 주최해야 한다고 우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동원 장관은 서울에서 열릴 것에 대비해 준비를 하다 라모스 필리핀 외상으로부터 미안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직후 미 국무성의 번디 차관보가 급히 내한했다.
  
  “번디가 부랴부랴 찾아온 것은 필리핀의 입장을 살려주자는 설득을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미국에게 한국은 믿을 수 있는 우방이었던 반면, 필리핀은 겉으로는 미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뒤돌아서서는 반미적인 발언을 하고 있어 이번 기회에 마르코스를 달래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졸지에 주최국이 바뀌자 박정희 대통령은 평소 하지 않던 심한 욕설까지 하며 화를 냈다고 한다.
  
  “마르코스, 이 나쁜 자식. 윤리도 도의도 없는 놈. 이거 우리가 제창했는데 날치기 아닌가.”
  
  회담은 결국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열리는 것으로 하되 회담 성명서는 한국 외무부에서 작성한 내용을 선택하기로 미국과 합의함으로써 이 문제는 일단락됐다.
  
  심술
  
  1966년 10월 23일 오후 4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필리핀 공항에서 의전행사를 마치고 숙소인 마닐라 호텔에 도착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미국, 월남, 태국 등 각국 정상들도 같은 호텔에 들었다. 박 대통령에게 배정된 방은 566호실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맥아더가 숙소로 사용했다는 방인데 여느 정상들의 방보다 작았다. 존슨 대통령을 수행한 러스크 미 국무장관의 방보다 더 작았다.
  
  이동원 장관은 마르코스의 의도적인 ‘한국 무시’라 느꼈다고 한다. 수행원들이 분개하자 박 대통령은 “괜찮아. 방이 크면 어떻고 작으면 어떤가. 난 오히려 작은 방이 더 정이 붙는데. 신경 쓰지 말게”라고 대범하게 말했다. 마르코스의 심술은 다음날에도 계속됐다.
  
  1966년 10월 24일 월요일은 공교롭게도 국제연합(UN)의 날이기도 했다. 참전국 대사들이 합의하여 마련한 정상회담 순서는 첫날 국회의사당에서 개회식을 가진 뒤 대통령 관저인 말라카낭 宮(궁) 대회의실에서 1, 2차 본회의를 비공개로 갖기로 결정했다.
  
  오전 9시, 필리핀 국회의사당 단상에는 오른편에서부터 오스트레일리아의 헤롤드 홀트 총리, 대한민국의 박정희 대통령, 뉴질랜드의 커드 홀리오크 총리,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 태국의 타놈 키티카초른 총리,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 월남공화국의 구엔 반 티우 의장과 구엔 카오 키 총리가 앉았다.
  
  의사당에는 7개국 대표단원 약 200명과 외교단, 필리핀 국회의원, 각종 단체 대표 등 200여 명, 세계 주요 신문·라디오·텔레비전 기자와 보도진 400여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남아시아 사상 최대의 국제회의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柳陽洙 駐필리핀 대사의 회고.
  
  “사전에 참전국 대사들끼리 모여 시간표를 짜면서 개회사는 주최국 정상인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이 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다만 主戰國(주전국)인 월남과 미국에 비해 필리핀의 입장이 미묘할 것이라는 점을 두고 대사들끼리 토론한 끝에 형식적인 개회사를 하도록 10분으로 짧게 잡아두었습니다. 그런데 개회식에서부터 문제가 생긴 겁니다.”
  
  태국 총리의 사회로 개회 선언이 있은 뒤 뉴질랜드 총리의 제의로 주최국인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이 만장일치로 이번 회의의 의장이 됐다. 의장의 개회사 순서가 됐다. 동시통역으로 진행되는 이 회의에서 마르코스는 스페인 억양이 강한 영어 연설을 유창하게 시작했다. 그는 사전에 합의한 대로 참가국 정상들을 환영한다는 대목에서 연설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런데 그의 연설은 브레이크가 없었다. 10분에 걸친 환영사에 이어 난데없이 평화론으로 이어졌다.
  
  “평화와 자유는 모든 인류의 권리이며 소망입니다. 평화와 자유가 없는 곳에 인류의 번영과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단상의 수뇌들은 월남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자는 목적에서 참석했다가 갑자기 평화론이 나오자 표정이 굳어졌다. 마르코스는 연설을 멈추지 않았다.
  
  “동남아 국민들은 평화와 자유를 박탈당하고 어두운 삶을 강요당한 쓰라린 역사의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월남에서는 야만적인 전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부도덕한 파괴와 살인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개전은 케네디가 했지만 뒤처리는 존슨의 몫이 된 월남전. 존슨은 월맹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군사적 압박이 필요했고 그만큼 아시아 우방의 결속된 참전이 요구됐다. 그런데 마르코스가 평화론을 주창한 것이다.
  
  청중을 향해 앉아 있던 존슨 대통령이 갑자기 의자를 돌리더니 단상의 마르코스를 향해 앉았다. 그리고는 보통 사람의 얼굴만큼 큰 손을 번쩍 들더니 마르코스를 향해 박수를 쳤다.
  
  “이것은 인류 문명의 파괴이며 인간 양심에 대한 반역이고 신의 섭리에 대한 죄악입니다.”
  
  존슨 대통령은 더욱 열렬히 박수를 쳤다. 청중들은 마르코스와 존슨을 번갈아 보며 침을 삼켰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있던 박정희 대통령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졌다.
  
  단상 아래에서 지켜보던 柳陽洙 대사의 회고.
  
  “저를 포함해 단상 밑에서 보고 있던 참전국 외교관들은 경악하는 중이었습니다. 존슨은 마르코스를 향해 앉아서 ‘평화’라는 단어만 나오면 박수를 쳐댔습니다. 그것은 칭찬이 아니라 怒氣(노기)의 표현이었습니다. 마르코스는 10분 예정인 환영사를 무려 30분이나 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존슨은 혼자서 수십 번이나 박수를 쳤던 겁니다.”
  
  기이한 개회사에서 마르코스는 평화와 자유를 외쳤지만 그것을 지키기 위한 방안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마르코스와 존슨의 대결은 이날 오후에 열리는 2차 본회의장으로 옮겨갔다.
  
  오전에 개회식이 끝난 뒤 대통령宮에서 열린 제1차 본회의에서는 월남 총리 구엔 카오 키의 월남 현황 설명이 있었고 웨스트모어랜드 주월미군 사령관의 월남전 전황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오후 4시부터 열린 제2차 본회의는 각국 원수의 연설로 진행됐다.
  
  커다란 U자 형태의 원탁에 7개국 정상이 알파벳 순서대로 앉고, 각국 정상들 뒤로 수행 참모들이 앉았다.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의 사회로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어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기조연설을 시작했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신봉하는 세계 인류의 염원을 구현하고자 하는 사명감으로 이 회담에 임하고 있습니다. 이 회담을 통해 참전국들은 불의와 결연히 대결하며 정의를 위하여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란 것을 세계만방에 재천명함과 동시에 침략자들에게는 침략을 포기하게끔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박 대통령은 휴전 전에 외국 군대 철수 반대, 월맹의 베트콩에 대한 지원의 즉각 중지, 월남에서 월남공화국 외 정치권력 불인정, 휴전 후 월남의 독립 보장 등을 주장했다. 그의 발언은 참가국 정상 중 존슨을 만족시킨 유일한 내용임이 회의가 진행될수록 확연해져갔다.
  
  뉴질랜드에 이어 필리핀 순서가 되자 U자 테이블 중앙에 앉아 있던 마르코스는 예의 평화론을 개진했다. 여기서도 존슨은 의자를 돌려 앉은 뒤 다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U자형 테이블을 따라 순서가 바뀌면서 이윽고 존슨 미국 대통령의 차례가 됐다. 러스크 국무장관 등이 배석하고 그 뒤로는 10여 명의 참모와 수행원들이 앉아 있었다. 참모 한 사람이 존슨에게 준비된 연설문 원고를 전달했다.
  
  신랑 존슨, 신부 朴正熙
  
  참모로부터 원고를 전달받은 존슨 미 대통령은 원고를 책상 위에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마르코스를 향해 의자를 돌려놓고 앉더니 그를 노려보면서 즉석 연설을 시작했다.
  
  “평화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Freedom is not free). 책상 위에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더구나 예찬만으로 달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평화는 쟁취하는 것이며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가를 지불하기로 결심하고 행동함으로써만이 평화는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존슨은 마르코스를 향해 마치 교장 선생님이 학생에게 훈시하듯 기조연설을 시작했다. 마르코스 대통령과 필리핀 정부 각료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갔다. 아침에 있었던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의 평화론에 대한 반격이자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위압이었다.
  
  이날 박 대통령 수행원으로 참석했던 유양수 주필리핀 대사는 그의 회고록 《大使(대사)의 일기장》에서 ‘굵직한 존슨의 음성은 듣는 이의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장내는 기침소리 하나 없이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만 천천히 장내의 공기를 휘젓고 있었다’라고 당시 상황을 기록해두고 있다.
  
  존슨은 10여 분간에 걸친 훈시 같은 연설을 통해 참전 7개국 정상회담의 목적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월남전에 임하는 미국의 결의를 재천명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미국에 대들었다가 퉁바리맞은 마르코스를 지켜본 박정희는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첫날 저녁, 마르코스가 박 대통령의 숙소를 예방하고 돌아가자 이동원 장관에게 박 대통령은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이 장관, 저 친구 얼굴을 보니 알차게 생겼어. 분명히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야.”
  
  1966년 10월 24일 저녁엔 만찬이 열렸다. 각국 원수들이 검은 예복을 입고 참석한 반면 마르코스는 필리핀 전통의상인 흰 남방차림으로 만찬장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그는 박 대통령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행동을 많이 했다. 존슨 대통령이나 다른 외국 정상들 앞에서는 큰 손짓을 해가며 열심히 말하다가도 박 대통령과 마주치기만 하면 입을 꼭 다물곤 가벼운 목례나 악수 정도만 하곤 지나쳤다.
  
  이날 저녁 필리핀의 일간지들은 박 대통령의 월남파병을 비난하는 글을 싣고 ‘매파의 우두머리’, ‘전쟁을 부추기는 전쟁광’으로 묘사하며 보도했다. 약이 오른 김형욱 정보부장은 “저 새끼, 입만 살아서 입만 점점 커지니…”라며 마르코스를 노려보았다. 만찬장에서 신문 보도 내용을 보고받은 박 대통령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담배만 피워대고 있었다.
  
  10월 25일 오전에 박 대통령은 한국 기자들과 만났다. 전날 있었던 웨스트모어랜드 주월 미군사령관의 군사력 강화 필요성 주장과 관련해 박 대통령은 “우리가 있고 남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월남파병은 현재로서 충분하며 더 이상 증파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이날 오전 11시부터 제3차 본회의가 말라카낭 宮(궁) 소회의실에서 비공개로 속개됐다. 회의장은 전날의 씁쓸한 공기가 다 가시고 명랑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이날 회의는 예정에 없던 것이었다. 각국 정상들이 통역 한 명씩만 배석시킨 채 만나는 정상들만의 비밀회담이었다.
  
  참전 7개국 수행원들은 모두 대회의실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처음엔 사무적인 일로 움직이거나 무엇인가 대화를 나누거나 간밤의 숙취로 하품을 하는 등 각양각색의 행동을 하다가 시간이 점차 흘러가자 하나 둘씩 소회의실 문으로 시선을 두기 시작했다. 한두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궁금증이 더 퍼지더니 세 시간째부터는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회담은 오후 2시가 지나서야 끝났다. 소회의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행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향했다. 잠시 후 키가 큰 존슨 대통령과 키가 작은 박정희 대통령이 맨 먼저 나타났다. 존슨 대통령의 오른팔이 박 대통령의 왼팔을 끼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만면에 미소를 띠고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결혼 행진 같았다.
  
  존손은 장내를 향해 왼손을 들어 흔들기까지 했다.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두 頂上 뒤로 다른 수뇌들이 한두 명씩 떨어져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장내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당시 유양수 대사는 “우리가 국제무대에서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나 하는 감격이 터져 나왔다”고 회고했다.
  
  뒤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날 회담은 주로 존슨 대통령의 각국 정상에 대한 설득으로 시종했다고 한다. 필리핀은 약 2,200명으로 구성되는 필칵(Philcag)이라 불리는 공병과 의무 지원 이외에는 증원할 수 없다고 버텼다. ‘전투 임무는 절대 불가’란 입장을 취했다.
  
  존슨 대통령은 마르코스 대통령을 끈질기게 설득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존슨과 박정희에게 마르코스는 평화를 추구하되 대가는 지불하지 않겠다는 입장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존슨은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태국 세 나라로부터 상당한 규모의 원조와 병력을 증가시키겠다는 확답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존슨의 자랑이요, 모범 사례로 인용되곤 했다고 한다. 인구 대비 병력 파병 규모로 보나 파병 성격으로 보나 한국은 최선의 지원을 다하고 있는 국가로 소개됐다.
  
  이 때문에 이날 회담에서 한국의 증파 문제는 거론될 여지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존슨 대통령은 이 회담을 진행하면서 한국에 대한 고마움이 새삼 각별하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고마움의 표시로 존슨은 자신의 가슴에도 못 미치는 작은 키의 박 대통령과 팔짱을 끼고 혈맹의 유대를 과시한 것이었다.
  
  이날 오후에는 공동 성명서 채택과 선언문 검토를 위한 4차 회의가 진행됐다. 오후 6시 30분, 7개국 정상들은 월남 문제의 해결과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 간의 유대 강화 및 공동 번영을 위한 원칙들을 밝히는 공동 성명서, 공동 선언, 자유의 선언 3개 문서에 서명하고 이를 발표함으로써 마닐라 정상회담은 막을 내렸다.
  
  1966년 10월 26일 귀국 길에 오른 박 대통령 일행은 오후 4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李孝祥(이효상) 국회의장, 李相喆(이상철) 국회부의장, 정일권 국무총리, 3부 요인 등과 1,000여 명의 출영객이 기다리고 있었다. 육영수 여사도 아들 지만 군을 데리고 나와 機上(기상)으로 올라가 박 대통령을 영접했다. 육 여사가 “가셨던 일은 잘 되었어요? 고생 많으셨지요”라고 인사했고, 박 대통령은 웃음을 머금은 채 지만 군을 보듬어 안았다.
  
  박 대통령은 도착 성명을 통해 “세계사의 중심 무대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으로 옮겨지고 있으며 우리의 발걸음이 세계사에 크게 남겨지고 있습니다. 남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오던 우리도 이젠 이웃을 돕는 成年(성년)국가로 발전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그가 국군 의장대를 사열하는 동안 전투기들이 하늘에서 오색 연막을 뿌리며 가을 하늘을 화려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 2009-03-22, 20:3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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