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울 밤, 청와대 담벼락까지 접근하다
연재 42/1968년 1.21 사건의 현장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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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월 21일 밤 10시 5분경, 청와대가 지척인 자하문 내리막길에서 두 형사는 무장 공비의 대열 맨 뒤에 걸어가던 부대장 격인 金春植(김춘식)과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김춘식은 박 형사에게 “당신 경상도 말씬데, 고향이 어디요?” 하고 물었다. 박 형사가 “대구인데요”라고 대답하자 그는 “우리 친척집도 대구인데…”라며 말을 흐렸다.
  
  박 형사는 이들과 농담까지 주고받으며 시간을 끌어보려 했으나 기다리던 증원 부대는 오지 않았다. 입 안이 바싹바싹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괴한들은 자하문 고개를 넘어 오는 원효여객 60번 버스를 세웠다.
  
  박태안 씨의 회고.
  
  “무장 공비가 분명한데 그 자리에서 놓칠 수 없었습니다. ‘한 명이라도 못 잡으면 우리는 죽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공비들은 이미 7∼8명이 버스에 올라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극성스럽게 저지하기 시작하자 대장인 듯한 자가 부하들에게 내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두 명이 이들을 다 상대할 수는 없고, 미치겠더라고요. 하지만 그때까지 공비들의 목표가 청와대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버스에서의 시비가 끝나자 대열은 다시 움직였다. 경복고등학교 후문을 지나 청와대로 꺾어지는 커브쯤에서 맨 뒤에 가던 김춘식에게 박 형사가 끈질기게 말을 붙이는 바람에 김춘식은 어느 새 대열과 7∼8m 떨어지게 되었다. 박 형사는 속으로 ‘이놈 한 놈만이라도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밤 10시 10분.
  
  박 형사는 길이 꺾어지는 쪽으로 공비들이 빠지면 연락을 받고 달려올 증원 부대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장 공비들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이르자 정 형사와 함께 승강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헤드라이트 불빛이 길 아래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프차는 괴한들의 대열 앞에 멈춰 섰다. 전진하던 대열도 멈칫했다. 헤드라이트가 이들의 몰골을 기괴하게 비추고 있는 동안 차에서 당당한 체구의 사나이가 내렸다. 崔圭植(최규식) 종로경찰서 서장이었다.
  
  “나는 종로경찰서장이오. 소속을 밝혀야지요. 외투 안에는 뭐가 들었소?”
  
  “아무 것도 아니오. 우리는 CIC 사령부가 있는 효자동으로 가는 길이오.”
  
  “여기는 내 담당 구역입니다. 신분을 밝히지 않고는 아무도 못 지나가오.”
  
  2조 조장 김신조는 대열 중간에 서 있다가 지프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추는 가운데 최규식 서장이 권총을 뽑아들고 저지하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남침 후 처음으로 당황했다고 한다. 공비들의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졌을 때 최규식 서장 뒤로 시내버스 한 대가 올라오다 길을 가로막은 지프차 뒤로 멈춰 섰다. 공비들은 버스를 국군의 지원 병력인 줄로 착각했다.
  
  잠시 후 또 한 대의 버스가 커브를 돌아 나오다 앞 차량이 멈춰 서 있자 급정거를 했다. 공비들은 연이어 두 대의 차량이 도착한 것을 목격하고는 외투 속의 총과 수류탄을 더듬었다.
  
  그 순간 최규식 서장과 시비가 붙었던 공비가 외투 속에서 총을 꺼내 최 서장의 가슴을 향해 연발 사격을 가했다.
  
  “드르륵, 드르륵.”
  
  “국방군 출동이닷!”
  
  1·21 사태의 첫 희생자가 된 당시 36세의 최규식 서장은 가슴에 세 발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밤 10시 15분경이었다.
  
  총성이 나기 무섭게 공비들이 일제히 버스를 향해 사격을 가하면서 세 발의 수류탄이 작렬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청운중학교 3학년 金亨基(김형기·17) 군과 회사원 洪裕敬(홍유경·29) 씨가 수류탄 파편을 맞아 그 자리에서 숨지고 버스 차장 金貞子(김정자·18세) 양은 오른팔에 관통상을 입었다. 버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뛰어 내렸다. 어둠 속에서 공비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국군인 줄 알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대열 뒤에서 부대장 김춘식과 말을 걸었던 두 형사가 김춘식을 쓰러뜨렸다. 박 형사는 오른손으로 김춘식의 목을 죄면서 왼손으로는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을 들고 머리를 내려쳤다. 졸지에 돌멩이로 머리를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의식을 잃은 김춘식을 박 형사는 손목에 수갑을 채워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멀리서 동료가 경찰에 의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공비들은 도망가면서 두 형사를 향해 총을 쏘았다. 정종수 형사가 쓰러졌고 박태안 형사는 왼쪽 귀 위로 총알이 스쳐 지나갔다(정 형사는 며칠 후 병원에서 숨졌다). 경복고 후문 일대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총성이 퍼지자 청와대 외곽을 경비하던 수경사 30대대(대대장 전두환 중령) 병력들이 즉시 달려오기 시작했다.
  
  김신조 목사의 회고.
  
  “한 명이 쓰러지는 걸 보고는 ‘틀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휘부가 무너졌다고 판단하는 순간 휴전선에서 청와대까지 내려왔다는 자부심이고 뭐고 다 없어졌고 동료들이 순식간에 흩어지는 겁니다. 청와대고 작전이고 없었어요. 불과 5분 정도 교전한 것 같은데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던 겁니다. 일부는 오던 길을 거슬러 세검정 쪽으로 튀었고 일부는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을 탔고, 저는 경복고등학교 뒷담을 넘었지요. 인왕산을 타고 북으로 가려고 말입니다.”
  
  인민군 소위 김신조는 동료들이 많이 택하지 않은 루트를 골랐다. 자하문을 넘어 세검정 쪽으로 도망가려던 공비들은 뒤따라 내려오던 시내버스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그러나 승객들이 미리 대피한 상태여서 피해는 없었다. 이들은 세검정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두 대의 버스에도 수류탄과 기총소사를 해대며 도망쳤다. 밤 10시 30분경이었다.
  
  야간에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심장부 부근까지 침투한 것은 성공했지만, 무고한 양민을 학살해가며 유격전을 벌인 것만큼 어리석은 비정규전 사례도 없을 것이다.
  
  밤 10시 40분경 세검정 길과 북악산 일대는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30대대 병력들이 투입되어 총격전으로 이어졌다. 30대대 병력이 현장에 투입될 무렵, 경복궁 옆에 주둔하던 30대대 연병장에서는 대대장 전두환 중령과 작전주임 張世東(장세동) 소령의 지휘하에 81mm박격포 10여 문에서 조명탄이 날아올랐다. 조명탄은 밤새도록 세검정과 북악산 일대를 대낮같이 밝혔다.
  
  
  1968년 1월 21일 밤 10시 15분부터 30분 사이 총성이 여러 차례 울린 시각, 박정희 대통령은 감기약을 먹고 잠을 자다 깨어났다. 박종규 경호실장이 제일 먼저 달려왔고, 최우근 수경사 사령관이 그 뒤를 따라 들어와 상황을 보고했다.
  
  비슷한 시각, 김성은 국방부 장관도 총성을 듣고 국방부에 비상전화를 걸었다. 청와대 부근에서 교전 중이란 보고를 받은 김 장관은 즉시 차를 타고 청와대로 달려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점퍼 차림으로 집무실로 내려와 있었다. 김 장관이 보니 박 대통령은 경황이 없는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김 장관, 내가 감기에 걸려 약을 먹고 자다가 일어났는데 말이야. 거 참, 이놈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올 줄 누가 생각이라도 했겠소? 고약한 놈들, 뭐 못하는 짓이 없구먼. 그렇게 파괴하더니 결국 여기까지 쳐들어왔구먼.”
  
  “저도 놀랐습니다, 각하. 괴뢰군 놈들이 신이 아닌 이상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여기까지 오겠습니까.”
  
  두 사람은 전쟁을 겪은 군인 출신이어서 그런지 수행하던 경호원들이 보아도 무척 대담했다고 한다. 청와대 밖 하늘은 수경사 30대대에서 쏘아올린 조명탄으로 훤하게 밝아 있었다. 尹必鏞(윤필용) 방첩대장은 김성은 국방부 장관에게 戰果(전과)와 피해 상황을 수시로 보고했다. 자하문에서 최초 총격전이 벌어져 종로경찰서장이 피격당해 순직했으며, 한 명은 생포했고 현재 청와대 외곽으로 몰아내며 추적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최규식 총경이?” 하며 몹시 안타까워했다.
  
  최규식 총경은 연세대학교 정치학과 재학 중 6·25를 만나 육군종합학교 31기생으로 임관했다. 5·16 당시 소령으로 복무 중 혁명정부로부터 충청북도 경찰서 정보과장으로 발령받아 경찰에 투신하게 되었고, 능력을 인정받아 부산 시경 정보과장을 거쳐 1966년 8월 용산경찰서 서장으로 승진했다. 1년 뒤인 1967년 10월 27일 종로경찰서장으로 발령받아 근무 중 참변을 당했다.
  
  최규식 총경의 순직을 가슴 아파한 또 한 사람은 2층 부속실에서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 앉아 있던 육영수 여사였다. 이날 밤, 경호실에서 등화관제를 요구해 제2부속실의 홍정자(육영수의 조카) 비서관은 불도 켜지 않은 2층 복도를 오가며 육 여사의 심부름을 했다. 총성으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육영수는 극도의 침착성을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5·16 혁명하던 날 이모님 인상과 참 비슷했어요. 총성이 나자 어느 새 옷(한복)을 갈아입고 서재 겸 집무실이던 방으로 가셔서 촛불을 켰지요. 경호관들이 오가면서 소식을 전해주었는데 최규식 총경이 순직했다는 말을 들었던 겁니다.”
  
  최규식 총경이 용산경찰서장에서 종로경찰서장으로 1년 만에 부임하게 된 것은 육영수 여사의 칭찬이 주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실했던 최 총경은 부산 시경 정보과장으로 근무하면서 동아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부산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던 중 용산서장으로 발령받아 상경했다.
  
  육영수 여사는 해외 순방이나 큰 행사 때마다 깔끔한 복장에 절도 있는 행동으로 일선 경찰들을 지휘하는 최 총경의 모습을 눈여겨 보았다고 한다. 그 후 관내에 청와대가 포함된 종로경찰서장으로 발령받게 하는 데 힘이 되었다는 것이다.
  
  미망인 劉貞和(유정화) 씨에 따르면 남편 최 총경은 서울 용산으로 올라와서도 공부를 계속했고, 종로경찰서 서장으로 발령받은 뒤로는 너무 바빠 부산대학교 교수들이 상경해서 논문 지도를 했다고 한다. 1968년 1월 12일 최규식 총경은 부산대학교로부터 논문이 최종 통과되어 석사학위를 받게 되었다는 축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9일 뒤 자하문 언덕에서 무장 공비가 쏜 총탄에 숨을 거두었다. 미망인 유 여사는 그해 2월 26일 부산대학교 총장의 초청으로 남편을 대신해 졸업식장에 참석, 학위를 받았다.
  
  육 여사의 조카 홍정자 비서관의 회고.
  
  “그날 밤 이모님은 눈물을 참 많이 흘렸어요. 아무에게도 말하지는 않았지만, 최 총경의 죽음이 마치 자기로 인해 벌어진 것은 아닌지 자책하는 듯이 슬퍼했지요. 새벽 2시쯤 되자 ‘전화를 해야겠는데 뭐라고 해야 하나’라며 수화기에 손을 얹고 몇 번이나 주저하다가 종로경찰서에 전화를 하셨어요. 그리고 유가족들에게 애도를 표한다는 말씀을 꼭 전해달라고 하시면서 울먹이셨지요.”
  
   밤 12시가 가까워지자 청와대로 속속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청와대 쪽에서는 이후락 비서실장, 金詩珍(김시진) 정보비서관 등이, 정부 쪽에서는 정일권 국무총리, 洪鍾哲(홍종철) 공보부 장관, 신직수 검찰총장, 김현옥 서울시장, 李洛善(이낙선) 국세청장 등이 달려왔다. 각료들은 박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던 중 “총성이 난 이상 시민의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진상 발표를 신속히 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다음날 아침 6시에 평소와 다름없이 일어난 박 대통령은 라디오를 켰으나 사건은 여전히 보도되지 않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申範植(신범직) 청와대 대변인을 불러 “왜 방송이 늦어지고 있나”면서 “중계방송 하다시피 소상하게 보도해서 국민의 불안을 덜어주고 간첩 수색에 국민의 협조를 얻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보도관제는 22일 오전 7시를 기해 해제됐다.
  
  
  자하문 부근에서 교전이 있기 직전인 1월 21일 오후 10시 10분경, 蔡元植(채원식) 치안국장실 무전기로 긴급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다.
  
  ‘세검정 고갯길에서 이상한 옷차림의 군인 30여 명이 술에 취해 청운동 쪽으로 내려가고 있음.’
  
  채 국장이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교전이 끝난 뒤였고 도로에는 수류탄으로 반파된 버스가 팽개쳐져 있었다. 길바닥엔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의 시체와 아직 숨이 붙은 정종수 형사가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박태안 형사는 생포한 김춘식을 지키고 있었다. 채 국장은 박 형사와 생포 공비를 차에 태워 근처 효자동 파출소로 데려 갔다가 다시 채 국장 차로 치안국으로 이동했다. 시간은 21일 밤 11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뒤로 젖힌 양손에 수갑이 채워진 김춘식은 머리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소매 없는 등산용 조끼를 입고 양 옆구리에도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조끼 앞가슴엔 작은 주머니 같은 것을 만들어 위아래 두 줄로 네 발씩 모두 여덟 개의 수류탄을 넣고 흔들리지 않게 실로 누벼놓았다.
  
  채원식 국장은 김의 허리에 찬 권총을 뽑아내고 양 옆구리의 주머니에서 휴대용 식량과 주머니칼을 찾아냈다. 채 국장은 칼날에 쓰인 글을 보더니 곁에 서 있던 박 형사에게 보여주었다. ‘Made in Japan’이라고 씌어 있었다. 직원들은 채 국장의 무장해제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박 형사도 채 국장을 돕기 위해 김이 입은 조끼 양옆의 매듭을 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채 국장이 소리쳤다.
  
  “엎드려!”
  
  몇 초 후 ‘꽝!’하는 폭음과 함께 김춘식의 복부는 산산조각이 나고 치안국 복도는 피범벅으로 변했다.
  
  박태안 씨의 회고.
  
  “그때 채 국장은 조끼 윗줄의 수류탄 네 발을 모두 제거하고 아래쪽의 수류탄 세 번째 것을 제거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수류탄은 낚싯줄같이 가는 선으로 네 번째 수류탄 안전핀을 물고 있었던 것을 몰랐던 겁니다. 채 국장이 세 번째 수류탄을 제거하는 순간 네 번째 수류탄 안전핀이 뽑혀 올라온 것이죠.”
  
  채 국장은 안전핀이 뽑힌 채 조끼에 달려 있는 수류탄을 보면서 공비를 복도 한쪽으로 힘껏 밀치며 소리를 질렀다. 이 때문에 무장해제를 지켜보던 직원들과 박 형사는 파편상도 입지 않았다. 대신 복도와 수사과장실 유리창이 박살나면서 벽면 전체가 피범벅이 됐다. 생포된 간첩이 爆死(폭사)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채 국장은 차를 타고 나와 종로경찰서를 들러 직원들을 격려하고 치안국 감찰계장 金德中(김덕중) 총경을 임시 종로경찰서장으로 임명했다. 자정 무렵 채원식 치안국장은 청와대 정문을 지나고 있었다. 이 시간에 정일권 국무총리, 李澔(이호) 내무부 장관 등과 군 장성들이 속속 청와대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늘에선 수경사 30대대에서 쏘아 올린 조명탄이 누런 연기를 흘리며 빛을 발하는 가운데 화약 냄새가 청와대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채 국장은 청와대를 지나 세검정 쪽으로 차를 몰게 했다.
  
  경찰과 공비들의 격전이 있은 직후 신문·통신·방송사 기자들도 취재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한 시간여가 지나는 동안 사방으로 튀어 달아난 공비들로부터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이 되자 자정 무렵 각 언론사는 현장 취재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기자들을 철수시켰다.
  
  곳곳에 군인과 경찰들이 검문을 하는 중에 중앙일보 孫石柱(손석주) 사회부 기자와 張洪根(장홍근) 사진부 기자는 만하장(現 올림피아 호텔) 부근에 신문사 깃발을 단 지프차를 세워 두고 검문소 통과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지프에 무전기가 없어 본사로부터 철수 지시를 받지 못한 채 현장에 남아 있던 중이었다. 군인들은 검문소를 통과하려는 손·홍 두 기자에게 “죽고 싶으냐”며 위협해 시비가 일었다.
  
  채원식 치안국장은 순찰 중 무전을 통해 파주 부근에서 교전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출발을 서두르는 순간에 군인들과 시비가 붙은 두 기자를 발견했다. 채원식 국장은 현장을 기록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들을 불렀다.
  
  “어이! 기자. 이리 와!”
  
  “아, 채 국장님 아니십니까. 중앙일보 사회부 손석주 기잡니다.”
  
  “당신, 나하고 파주에 갈 수 있겠어? 교전 중이라는데도?”
  
  “당연히 가야죠.”
  
  타라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두 기자는 차에 오를 준비부터 했다. 이들을 태운 채 국장의 차가 구파발을 지나 경기도 벽제 부근에 도착했을 때 채 국장의 차량 무전기에서 보고가 들어왔다.
  
  “한 놈 잡았습니다. 홍제동 파출소로 연행 중입니다.”
  
  즉시 서울로 차를 돌렸다. 당시 홍제동 파출소는 30사단(사단장 허준 준장)의 임시 작전 지휘본부가 설치된 곳이었다. 시간은 22일 새벽 3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채 국장과 두 기자가 파출소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30사단 군인들이 민가 부근에서 생포한 공비 한 명을 파출소로 끌고 들어왔다. 여러 사람이 공비의 허리춤과 윗옷을 잡고 있었기에 국방색 군복 상의는 몇 군데 단추가 떨어져 나가고 검은 목면 바지는 앞 단추가 열린 채 무릎까지 흘러내린 상태였다. 사진부 장 기자가 플래시를 터뜨리며 몇 장을 찍은 뒤 밖으로 튀어 나갔다. 군에 의한 보도관제가 심한 때여서 언제 필름을 빼앗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몇 평 안 되는 파출소는 일순간 사람들로 붐볐다. 소속을 알 수 없는 군인, 경찰, 중정 요원들로 복작거렸다.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상황에서 손 기자가 공비에게 고압적인 자세로 말을 걸었다.
  
  ―너, 이름이 뭐야. 나이는?
  
  “김신조다. 스물일곱 살이다.”
  
  ―주소와 계급은?
  
  “군관(장교)이고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 청암동 3반에 가족이 살고 있다.”
  
  ―남파 목적이 뭐야?
  
  “청와대를 까러 왔다. 21일 밤 8시에 공격을 개시해 5분 만에 끝낸 후 청와대 차를 뺏어 타고 문산 방면으로 도망하기로 했다. 이것이 잘 안되면 비봉 쪽으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지휘자의 잘못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몇 명이 왔어?
  
  “31명이 국군 복장을 하고 왔는데, 1명은 대위, 2명은 중위, 3명은 소위 계급장을 달고 나머지는 사병 복장을 하고 넘어왔다.”
  
  ―넘어 온 게 언제야?
  
  “16일 평양에서 출발했다.”
  
  ―무기는?
  
  “수류탄, 장총, 권총이다. 1인당 수류탄 열 개와 탄알 300개씩을 가져왔다. 우리는 결사대 훈련을 받았으며 모두 군관(장교)이다.”
  
  ―현재 기분은?
  
  “모든 것이 끝났다. 이젠 겁도 안 난다.”
  
  손 기자는 김신조의 윗옷 윗주머니에서 ‘지식인들이여 언론 출판의 활동을 위해 싸우라’는 내용의 삐라를 발견했다. 잠시 후 김신조는 앰뷸런스에 실려 방첩대로 끌려갔다.
  
  전쟁 준비에 돌입!
  김신조가 체포된 곳은 자하문 밖 인왕산 기슭에서였다. 1월 22일 새벽 1시 30분경, 자하문 밖 세검정 부근에서 잠복 근무를 하던 30사단 공병대 소속 車章錫(차장석) 이병은 세검천 위쪽 인왕산 기슭에서 계곡 쪽으로 살금살금 기어 내려오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M1 소총 자물쇠를 푼 차 이병은 검은 그림자를 조준하려 애썼다. 야간 사격은 총열 끝에 붙은 가늠쇠도 잘 보이지 않아 빗나가기 일쑤다. 차 이병의 사격도 빗나갔다. 괴한은 세검천 변 외딴 집 옆에 있는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두 시간 반 전에 경복고등학교 담장을 넘어 도망쳤던 인민군 소위 김신조였다.
  
  “한 놈 나타났다!”
  
  소대장 朴源造(박원조) 소위와 소대원들이 달려와 포위망을 쳤다. 박 소위가 플래시로 바위 쪽을 비춰보니 짚단 더미 사이로 사람 그림자 비슷한 것이 보였다. 誰何(수하)를 위한 암구호를 외쳤다.
  
  “피아노.”
  
  “……”
  
  “피아노”
  
  “……”
  
  대꾸가 없자 병사들이 바위 주변에 위협 사격을 가했다. 순찰 중이던 周喜俊(주희준) 소령이 트럭을 끌고 와 헤드라이트로 괴한이 숨은 바위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괴한은 그때서야 짚더미를 헤치고 어정쩡하게 두 손을 들고 일어났다.
  
  “두 손을 높이 들어! 안 그러면 쏜다!”
  
  괴한은 주먹 쥔 왼손 안에 가지고 있던 수류탄을 땅에 떨어뜨렸다. 안전핀이 빠진 채 땅바닥을 구르던 수류탄은 군인들과 괴한을 초긴장 속으로 몰았다. 그런데 몇 초가 지나도 수류탄이 터지지 않았다. 불발탄임을 감지한 한 병사가 뛰어나가 수류탄을 차버리고 괴한을 생포했다. 현장에서 몸수색을 한 결과 괴한의 소지품이 쏟아져 나왔다. 참깨 섞은 엿 두 개, 말린 오징어 한 마리, 아스피린, 소화제, 페니실린, 각성제 등의 약품과 30cm짜리 파이프를 가지고 있었다. 물이나 흙 속에 몸을 은폐할 때 숨을 쉬기 위한 호흡용 파이프였다.
  
  나머지 공비들 중 일부는 세검정 부근 민가 쪽으로 튀었다. 21일 밤 11시경 홍제동 쪽으로 달아나던 공비 한 명은 지붕을 타고 도망가다 지붕이 내려앉아 그 집 부엌으로 떨어졌다. 잠을 자던 李翔來(이상래·당시 65세)씨와 아들 容瑄(용선·당시 31세) 씨 등 가족 5명이 “도둑이야”라고 소리치며 뛰어나가 몽둥이로 괴한에게 달려들었다. 이들이 괴한과 몸싸움을 하던 도중 괴한의 몸에서 수류탄이 떨어져 나와 가족들은 비로소 무장 공비임을 알게 됐다.
  
  李씨 가족 중 한 명이 30여m 떨어진 홍제동 파출소에 신고했으나 경찰이 늑장 출동을 하는 바람에 공비와 격투를 벌이던 아들 용선 씨는 공비가 쏜 권총에 복부를 맞아 숨졌다. 신고를 받고도 즉시 출동하지 않은 홍제동 파출소장은 며칠 뒤 파면됐다.
  
  자하문 경복고등학교 후문 부근에서 첫 교전을 벌이고 학교 담을 뛰어넘은 공비는 김신조뿐 아니라 5명가량이 더 있었다. 이들은 몰려다니며 교장 사택으로 뛰어들어 마당에 수류탄을 던지는 바람에 집안의 유리창이 박살났다. 폭음소리에 놀라 달려 나온 수위 鄭四永(정사영·당시 45세) 씨에게 수류탄을 던져 살해했다.
  
  밤 11시 30분경에는 홍제동 파출소 앞 버스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여자가 유탄에 맞아 숨지는 등 이날 밤 우리 측은 최규식 서장과 민간인 6명 등 모두 7명이 사망했고, 박태안 형사 등 3명의 경찰관과 민간인 한 명이 부상했다.
  
  공비를 쫓던 수경사 30대대는 22일 오전 8시경 북악산에서 3명, 오전 11시쯤 다시 한 명의 공비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22일 오전까지 첫 교전에서 김춘식을 포함한 다섯 명의 공비를 사살하고 한 명(김신조)을 생포했다.
  
  1월 23일 오후 1시쯤 북한산에서 한 명의 공비가 사살된 이후 공비들은 서울 외곽으로 완전히 빠져나갔다. 이 무렵 생포된 김신조를 심문했던 방첩대에서는 ‘124군 부대’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김신조에게 북한 전역에 걸친 부대 위치와 김신조 자신이 훈련받은 부대의 위치 및 건물 요도를 그리게 했다. 김성은 당시 국방장관은 이 그림을 들고 본스틸 유엔군 사령관을 만났다. 첩보기를 띄워 항공 촬영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김 전 장관의 증언.
  
  “오산비행장에서 첩보기 SR-71이 이륙하더니 서해안에서 곧바로 북상하다가 평양 부근에 이르러 우회전하더군요. 그리고 원산까지 통과하는 데 정확히 3분이 걸립디다. 이렇게 해서 얻은 항공사진으로 김신조가 그린 건물과 비교를 해 봤는데 정확했습니다.”
  
  방첩대의 조사와는 별도로 공비 소탕에 나선 군경합동수색대는 1월 30일까지 31명의 공비 중 27명을 사살하고(자폭 포함) 김신조 한 명을 생포했으나, 우리 측도 민간인 7명이 사망했고, 이익수 대령 이하 23명의 장병이 전사했으며 부상자만도 52명이나 되는 등 큰 피해를 보았다. 행방이 묘연해진 공비 세 명 중 한 명은 2월 중순 경기도 양주군에서 시체로 발견됐고, 나머지 두 명은 월북한 것으로 판단해 작전을 종결지었다.
  
  북한의 동계 침투 작전이 청와대 앞에서 좌절된 이틀 뒤인 1월 23일 새벽(미국 시각 1월 22일)에는 한반도를 또 다른 긴장 속으로 몰아넣는 사건이 터졌다. 북한은 원산 앞 공해상에서 전파 감청 활동을 하던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를 4척의 무장 초계정과 2대의 미그 전투기를 동원해 원산항으로 납치하는 데 성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1·21 사태의 위기 국면을 극복하고 반격을 가하려던 한국의 입장을 잠시 유보시켰다. 공동의 피해자가 생겼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1월 23일 미국은 일본에서 월남으로 남진하던 핵 추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3척의 구축함을 동해로 회항시켜 원산만에 대기토록 명령했다. 1월 24일 딘 러스크 미 국무장관은 상원외교위원회에서 “일종의 전쟁 행위로 규정지을 수 있다”고 발언했다.
  
  이날 본스틸 유엔군 사령관 겸 주한 미군 사령관은 김성은 국방장관을 만나 이런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우리 미국은 이번엔 가만 안 있겠다. 지금까지 북한이 한국에서 숱한 도발을 해 오고 우리 미군도 피해를 보았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참을 수 없다. 이것은 미국의 방침인데, 원산항을 포함한 몇 개의 군사 시설에 폭격을 가할 계획이다.”
  
  김 국방장관은 한편으로는 기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면전이 일어날 가능성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미국은 월남전에 깊이 개입해 있었고 힘겨워했습니다. 과연 미국이 월남전과 한국전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을까를 먼저 따져봐야 했지요.”
  
  이날 오후 김성은 국방장관은 청와대로 들어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같은 사실을 전했다. 귀를 기울이고 듣던 박정희는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아! 기분 좋-다. 이거 한 번 때려 부셔야 한다. 좋-다. 김 장관, 우리도 준비합시다.”
  
  全軍에 비상이 걸렸다. 휴가 군인들은 즉시 부대로 귀대하라는 방송이 나갔고, 영외 거주자들은 영내 대기를 했다. 군 행정 사무실과 여타 근무지에서도 즉시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완전군장을 상시 비치하도록 했다.
  
  
  
[ 2009-03-25, 22:5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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