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김대중 통일방안 비교
연재 44/박정희의 진짜 평화적 통일방안과 김대중의 위험한 연방제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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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의 對北(대북)정책은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인내한다는 것이었다. 이 평화의 시간이 길수록 시간은 우리 편이기 때문에 對北 우위에 좀더 확실하게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인내에는 한계가 있어야 했다.
  
  朴 대통령은 1969년 4월 25일 기자회견에서 “인내와 자제는 반드시 한계가 명백해야 되며, 그 선을 넘었을 때에는 자제하고 인내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오히려 큰 불행을 가져오는 결과가 된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만약에 북괴가 또 다시 6·25와 같은 전면 전쟁을 도발해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우리의 결심은 명백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송두리째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보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 이때는 군과 민, 전방과 후방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전 국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이번만은 최후의 결단을 짓겠다는 각오로써 최후까지 싸워서 통일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1969년 10월 1일 국군의 날 유시)
  
  박정희가 북한의 침략에 대해 강조한 자주국방의 개념은 “북괴 단독의 침공에 대해서는 우리 단독의 힘만으로도 능히 이를 분쇄할 수 있는 자주 국방력을 언제든지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는 연설(1970년 1월 1일 신년사)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자주국방 정신을 더 쉽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이 나라를 우리의 힘으로 지켜야 한다. 우리나라는 우리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심과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고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의 힘이 부족할 때는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남이 돕는 것은 어디까지나 도움이라고 생각해야지 남이 우리를 대신해서 지켜 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것을 국방의 주체성이라고 말한다. 남이 우리를 도와주는 것도 우리에게 국방의 주체성이 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1968년 2월 26일 서울 대학교 졸업식 치사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주국방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자주국방이라는 것은 다른 나라, 즉 미국의 지원도, 우방의 지원도 없이 전부 우리 힘으로 하자는 것이냐, 하는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자주국방이라는 것은 이렇게 비유를 해서 얘기하고 싶다.
  
  가령 자기 집에 화재가 났다. 이랬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우선 그 집 식구들이 일차적으로 전부 총동원해서 불을 꺼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는 동안에 이웃 사람들이 쫓아와서 도와주고 물도 퍼다가 주고 소방대가 쫓아와서 지원을 해 준다. 그런데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그 집 식구들이 끌 생각은 안 하고 이웃 사람들이 도와주는 것을 기다리고 앉았다면, 소방대가 와서 기분이 나빠서 불을 안 꺼줄 것이다.
  
  국방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를 지킴에 있어 전쟁이 도발되었다든지, 무슨 사태가 벌어졌을 때에는 1차적으로 우리 한국 국민들이 여기에 대해서 불을 끄자는 말이다. 우리가 불을 끄지는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미국 사람들이 와서 들여다보고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주장하는 자주국방의 기본개념인 것이다>(1972년 1월 1일 기자회견에서)
  
  박정희가 권력을 잡은 뒤 자신의 신조를 국가 전략의 大綱(대강)으로 전환시킨 것이 있는데 바로 自助(자조)-自立(자립)-自主(자주) 정신이다. 그는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것은 자주·자립의 정신무장이며 자조·갱생의 생활신조이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는 한국인이 의타심과 사대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하겠다는 자조정신을 가져야 그 바탕에서 자립경제, 즉 외국 원조 없는 국가운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자립경제의 뒷받침이 있어야 자주국방이 가능하고 자주국방이 가능해야 진정한 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아주 단순한 이 3自(자)정신은 박정희의 18년 장기집권 기간 중 일관성 있게 3단계 국가발전 전략으로 승화되어 실천됐다.
  
  
  위대한 국가·조직·인간은 그 내면에 상반되는 두 가지 요소를 공유하되 그것들이 相剋(상극)하는 관계가 아닌 相生(상생)하는 관계로서 더 차원 높은 통합을 이룰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일종의 변증법적인 正(정)-反(반)-合(합)의 승화이기도 하다. 오래 존속하면서 영화를 누리고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긴 세 국가 로마제국, 베니스, 신라는 엄격한 尙武(상무)정신과 유연한 文藝(문예)정신을 통합한 공통점이 있다.
  
  박정희는 군인으로서의 강직함과 文人(문인) 같은 교양을 공유하고 있었다. 단순한 공유 차원이 아니라 相反(상반)되는 요소가 서로를 견제, 자극, 경쟁, 격려함으로써 제3의 단계로 진보하도록 하는 비결을 가진 것이 그였다.
  
  1960년대 말 북한 김일성 정권의 도전에 직면한 박정희는 국가 건설과 국가 안보란 상반된 조건의 압박에 몰렸다. 다른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으나 박정희는 건설과 국방이란 상반된 조건을 다 살리면서 거대한 역사적 진전을 이루는 방향으로 대한민국을 끌고 간다. 여기에 대한민국의 거대한 전환, 즉 후진국으로부터 선진국을 향한 중진국으로, 경량급 국가에서 중화학 공업력을 지닌 중량급 국가로의 전환이 이뤄지는 것이고 남북간 힘의 逆轉(역전)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 위대한 역전과 轉禍爲福(전화위복)이 김일성의 도전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뤄졌으니 국가의 운명에도 塞翁之馬(새옹지마)가 있는 모양이다.
  
  이런 전환의 시작엔 박정희의 남다른 안목이 있었다. 그는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기 위해선 휴전선과 해안선을 봉쇄하는 것보다 빈곤층을 없애고 중화학 공업 기반을 건설하는 것이 근원적인 해결책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1965년 1월 23일 ‘자유의 날에 즈음한 담화문’에서 이미 이런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
  
  <우리의 안전과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비단 밖으로부터의 침략만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보다 더 무서운 적이 우리 안에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다. 그 적이란 다름 아닌 빈곤인 것이다. 우리 내부에 이 빈곤을 두고서 반공이나 승공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무용한 徒勞(도로)이며, 또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자초하였던가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공산주의의 不穩(불온)사상이 기생하기 쉬운 빈곤을 추방하는 것 이상으로 더 효과적인 對共(대공) 투쟁의 방법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늘 이야기하는 일면 국방, 일면 건설이라는 이 두 가지 말은 똑같은 뜻인 것이다. 국방 그 자체가 경제 건설이다. 왜냐 하면 국방을 잘 해서 북괴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해야 경제 건설이 되지 국가의 방위가 위험할 때에는 경제 건설이 될 수 없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경제 건설을 빨리 해서 모든 실력을 하루 속히 증강해야만 보다 더 국방의 바탕이 튼튼해지지, 경제 건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국방이라는 것도 될 수 없는 것이다>(1970년 1월 9일 기자회견에서)
  
  <그러기에 우리는 일하면서 싸워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싸우면서 일해야 한다>(1968년 5월 29일 고급 공무원에게 보내는 친서에서)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는 우리의 현실이 벅찬 시련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시련은 과연 무엇을 위한 시련이며, 이것을 극복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겠는가.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오늘에 사는 우리 세대와 우리 후손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것이며, 번영과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1969년 6월 25일 담화문에서)
  
  박정희가 1960년대 말의 위기를 1970년대의 好機(호기)로 돌려세우는 데 있어서 취한 두 가지 가장 중요한 초치는 새마을사업과 중화학공업 건설이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으로서 경제건설의 참모장 역할을 했던 김정렴 씨에 따르면 두 사업 모두 김일성의 적화 전략에 대응하기 위해 考案(고안)된 것이라고 한다. 즉, 새마을사업(뒤에 가선 의료보험 실시)을 통해서 공산주의자가 침투할 수 있는 토양으로서의 빈곤을 없애고 중화학공업 건설을 통해서 자주 국방이 가능한 공업력을 갖추겠다는 계산이었다는 것이다.
  
  김정렴 씨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듯 경제적 목적을 두고 두 사업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국방을 염두에 두고 하다가 보니까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항상 국방에 대해 집무 시간의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했고, 다음이 경제였으며 정치는 우선순위에서 아래쪽이었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남북통일에 대해서도 아주 간단하면서도 실용적인 전략과 생각을 유지해 갔다. 그는 1966년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통일은 감정 아닌 이성의 판단과, 단순한 祈願(기원)이 아닌 과학적인 노력에 의해 계획되고 추진되어야 한다. 통일을 성취하는 데는 방안의 氾濫(범람)보다도 조건의 성숙이 앞서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그 조건의 성숙을 “경제적·문화적·사회적·군사적으로 북한을 압도할 절대 우위의 주체적 역량을 갖추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지금은 통일을 말할 때가 아니요, 오직 통일의 전 단계인 경제건설과 근대화 작업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할 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통일을 위한 적극적인 접근을 시도할 시기는 통일의 민족적 基地(기지)인 경제 자립의 盤石(반석)을 공고히 하고, 우리의 민주적 역량을 충분히 축적하여 모든 면에서 주도권을 우리가 완전히 장악할 수 있다고 내다보는 1970년대 후반기가 될 것이다>(1966년 6·25 담화문에서)
  
  박정희는 경제 전문가도 정치 전문가도 아니었지만 일단 정권을 잡은 다음에는 놀라운 素養(소양)을 발휘했다. 그 비밀은 그의 독서에 있다고 보인다. 박정희는 어릴 때부터 역사책을 탐독했다. 종합 사회·인문과학으로서의 역사를 자신의 교양으로 흡수하면서 그는 국가경영과 전략의 기본을 세울 수 있었다. 그는 남북통일을 준비하는 국가적 전략과 자세를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모델에서 찾으려 했다.
  
  박 대통령은 1972년 1월 11일의 기자회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좀 길지만 인용해본다.
  
  <신라, 백제, 고구려로 鼎立(정립)이 되었다가 통일이 될 때까지는 약 700년이 걸렸다. 통일이 된 건 문무왕 8년, 서기로 668년이라고 생각하는데, 3국 통일을 위해서 신라가 여러 가지 계획을 수립하고 본격적으로 서두른 지 120년 만에 통일이 되었다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진흥왕 때부터 120년간에 화랑도를 만들고, 국민들을 훈련하고, 정신 교육을 하고, 삼국 통일에 대한 대비를 해서 120년 만에 비로소 통일이 되었던 것이다.
  
  또, 통일이 될 때에는 신라 단독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唐(당)나라의 힘을 빌려 가지고 통일을 했다. 통일을 한 다음에도 당나라 군사가 생각이 달라져 돌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서 눌러 있으려 하였기 때문에 金庾信(김유신) 장군이 지휘하는 신라의 군대가 당나라 군대와 근 10년 동안 血戰苦鬪(혈전고투)를 해서 당나라 군사를 쫓아내고 완전히 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보더라도 통일문제는 염원이나 갈망만을 가지고 쉽게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어려운 고비가 많고 이에 대한 노력을 해야 되며, 또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했다가 국제 정세나 여러 가지 여건이 우리 국민들의 희망대로 잘 돌아가지 않을 때는 오히려 실망을 크게 할 뿐이다. 그러기보다는 보다 더 끈질긴 인내심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여기에 접근하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되겠다>
  
  박정희는 1960년대에는 충무공의 현충사를 성역화하는 등 國難(국난) 극복의 민족사를 기념하는 데 신경을 썼고, 1970년대에는 경주 天馬塚(천마총) 발굴과 경주 종합개발계획의 추진 등 신라통일의 유적을 다듬어 통일 교육의 현장으로 삼으려 했다.
  
  박정희가 말한 대로 진흥왕-문무왕 시대에 걸친 120년간의 삼국통일 준비 과정과 전략은 남북통일의 가장 좋은 교과서이다. 신라의 위대한 자주통일을, ‘당의 힘을 빌어서 이룬 사대주의적 통일’이라고 매도하는 북한 정권과 남한 내 일부 철없는 인사들의 挾攻(협공) 속에서 신라 통일의 교훈이 남북통일을 향해 가고 있는 오늘날 제대로 살려지지 않고 있는 것은 痛嘆(통탄)할 일이다.
  
  
  박정희의 통일 전략은 ‘평화를 통한 富國强兵(부국강병)’을 매개(또는 중간단계)로 한 한반도 전체의 자유화였다. 그는 통일이 외세의 힘을 빌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주체적 역량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1966년 8·15기념사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혹자는 국토의 양단이 他力(타력)에 의해 강요된 사실을 들어, 조국의 통일이 타력의 혜택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룩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주체성의 포기요 의타심의 소산인 것이다. 통일은 우리의 주체적 노력이 關鍵(관건)이다>
  
  그는 1968년 8월 15일 공화당 당원들에게 보내는 특별담화에서는 “통일은 결국 국내외적인 조건의 성숙과 더불어 이에 대비하는 우리의 주체적인 힘의 배양에 의해서만 이룩된다”고 강조했다.
  
  <우리 자체의 내실을 키워야 되고 객관적인 여건이 성숙되어야 되고, 객관적인 여건이 성숙되었을 때 우리가 기민하게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지, 그 이전에는 통일이 안 된다.
  
  가장 좋은 기회야 8·15 해방 때였을 것이다. 일본 군대 다 쫓고, 일본 사람 다 쫓아 통일 독립 국가를 만들기에 가장 좋은 기회였었는데도 우리가 못 했다. 그때 우리는 내실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여건과 기회를 포착할 수 없었다.
  
  그런 좋은 기회를 놓쳤지만 앞으로 그런 기회가 나는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대비해서 우리는 지금부터 꾸준히 노력을 해나가야 되겠다. 하물며 衆口難防(중구난방)으로 무책임한 통일론을 함부로 떠들어서 우리 국론을 혼란하게 만든다든지 하는 행위는 통일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백해무익한 일이다>(1972년 1월 11일 기자회견에서)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가 통일의 중간목표’(1969년 9월 25일 저축의 날 치사)이며 근대화가 완성되면, 그 경제 역량과 민주 역량을 기반으로 한 남한이 통일 전략 추진의 기지가 되어 북한을 자유 민주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김일성 정권이 북한을 남한 혁명의 기지로 설정한 것과 대칭되는 전략 개념이었다.
  
  통일의 중간 단계로서의 이런 근대화가 이뤄지려면 평화가 필요했다. 박정희의 사전에 나타난 ‘평화통일’이란 말은 평화를 통해서 번 국력으로써 남한이 주도하는 자유통일을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반도의 평화란 자유통일을 위해 꼭 필요한, 富國强兵(부국강병)을 위한 시간 벌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말장난으로서의 평화가 아닌 전략 목표가 뚜렷한 평화였다.
  
  박정희는 1972년 1월 11일의 기자회견에서 서독이 동독과 전쟁을 한 적도 없지만 평화를 확보하기 위하여 이중 삼중의 장치를 하고 있다는 점을 소개했다.
  
  <우리가 알기에는 유엔 동시 가입에 있어서 서독 정부는 20개의 조건을 지금 (동독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우리하고도 상당히 관계가 있고 흥미가 있는 조항, 즉 ‘무력 또는 위협의 상호 포기’ 운운 하는 조항이 있다. 지금 동서독에서 전쟁 준비를 해가지고 서로 치겠다는 그런 상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무력 사용 또는 위협의 상호 포기를 확실하게 다짐하자는 것이다.
  
  이밖에 전쟁 부인 선언, 즉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동시에 하자는 것, 또는 쌍방이 평화공존을 저해하는 행위를 포기하자는 등 세 가지 조항이 있다는 것을 들었는데, 다 뜻은 마찬가지이다. 무력 사용 안하고 폭력 사용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표현을 바꾸어 가지고 두 번 세 번 못을 박아가면서 이런 조건이어야만 유엔에 같이 들어간다는 이야기이다>
  
  박정희는 북한을 절대로 국가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는 그가 말한 평화란 것은 평화공존을 가장한 분단 고착화가 아니라 자유통일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란 것과 합치되는 이야기이다.
  
  그는 1966년 12월 17일 기자회견에서 “두 개의 한국이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인정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며, 또 아무리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공산주의식 통일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한 간의 대결은 민족사의 흐름 속에서 누가 민족사의 정통성을 쟁취하는가의 싸움이며, 그 정통성을 확보한 쪽만이 1민족 1국가의 월계관을 써야 한다는 역사관에 투철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4월 23일 대구 유세(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렇게 강조했다.
  
  <통일을 안 했으면 안 했지, 우리는 공산식으로 통일은 못 한다. 민주통일을 해야겠다. 통일이 된 연후에 북한 땅에다가 자유민주주의의 씨를 심을 수 있는 민주적인 통일을 하자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그렇게 하자니까 시간이 걸리고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고, 우리의 실력의 배양이 필요한 것이다>
  
  <혹자는 대한민국을 가리켜 자유의 방파제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비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 어찌해서 우리가 파도에 시달리면서도 그저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그러한 존재란 말인가. 우리는 전진하고 있다. 우리야말로 자유의 파도다. 이 자유의 파도는 멀지 않아 평양까지 휩쓸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한다>(1966년 2월 15일 대만 방문 시 장개석 총통 주최 만찬회 인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통일 전략을 가장 핵심적으로 표현한 것은 “통일을 성취하는 데는 방안의 범람보다도 조건의 성숙이 앞서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의 집권 18년은 대한민국이 주도하는 자유통일을 가능케 하는 경제적·정치적·사회적·외교적 조건을 성숙시키는 데 바쳐졌다.
  
  3단계 통일 방안이니 연방제 통일 방안이니 하는 정교한 통일 방안에 대해서 박정희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통일 방안이 아닌 통일로 가는 방향을 제시하고 원칙을 천명하는 데 그쳤다. 통일은 결국 국력을 바탕으로 하여 이뤄질 것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력을 쌓는 데 주력했던 것이다.
  
  그는 1970년 8·15 선언을 통해서 ‘평화통일의 기반 조성을 위한 접근 방법’을 밝힌다. 박 대통령은 통일의 원칙을 평화통일이라고 못 박고 북한 측에 대해서도 폭력 혁명에 의한 적화통일 전략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북한이 만약 이 요구를 수락한다면 남북한의 인위적 장벽을 제거해나갈 수 있는 획기적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다고 천명했다. 그는 또 북한이 유엔의 권위를 수락한다면 유엔의 한국 문제 토의에 북한이 참여하는 것을 굳이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평화적 체제 경쟁을 벌이자고 제의했다.
  
  <이러한 나의 구상에 덧붙여서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북괴에 대하여 ‘더 이상 무고한 북한 동포들의 민생을 희생시키면서 전쟁 준비에 광분하는 죄악을 범하지 말고 보다 선의의 경쟁, 즉 다시 말하자면 민주주의와 공산 독재의 그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 살게 할 수 있으며, 더 잘 살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회인가를 입증하는 개발과 건설과 창조의 경쟁에 나설 용의는 없는가’하는 것을 묻고 싶은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말한 ‘획기적 제의’는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가 북한 측에 제의한 이산가족 등 인도적 문제 해결을 위한 적십자사 회담이었다.
  
  이 제의가 북한 측에 의해 받아들여지면서 적십자사 회담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매개가 되어 본격적 정치회담인 이후락 정보부장-김일성 회담과 7·4 공동성명이 탄생했다.
  
  박 대통령은 이후락 정보부장의 평양 출장에 앞서 이런 요지의 훈령을 내렸다. 즉, ‘회담은 비정치적 문제를 풀어나가면서 정치적 문제로 이행하며, 남북 간의 분위기 호전을 위하여 비현실적인 일방적 통일방안의 선전적 제안을 피하고 상호 비방 중상을 피하며, 무력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
  
  이후락 부장에 앞서 북한으로 들어갔던 정홍진(남북 조절위원회 간사) 씨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전쟁은 막아야 한다는 데 이 정치 회담의 가장 큰 주안점을 두었다고 했다.
  
  한국 측은 실현 가능한 작은 것부터 해결하자고 하였으나 북한은 이 정치회담을 남북합작 회담으로 끌고 가 주한미군 철수 및 국가보안법 폐지와 남한 내 공산당의 활동자유 보장을 얻어내려 했으니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
  
  1973년 8월에 발생한 金大中(김대중) 납치 사건을 꼬투리로 잡은 북한은 일방적으로 남북조절위원회 회담을 중단시켰다. 비록 회담은 중단되었으나 이 고위 정치회담은 그 뒤의 정권 때 모습을 달리하여 단속적으로 이뤄졌고 2000년 평양 회담을 결과했다.
  
  
  1970년 8·15 선언-1971년 8·12 적십자 회담 제의-1972년 7·4 공동성명에 이은 이정표는 1973년 6·23 선언이다. 이 선언의 핵심은 그 동안 진행된 남북대화의 파급 효과를 바탕으로 공산권에 대한 우리의 문호개방 정책과 함께 북한의 실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탕에서 유엔에 남북한이 동시 가입할 것을 제의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현존하는 남북한의 평화공존을 제도화하자는 주장이었다. 북한은 남북 관계의 진전을 남한 적화의 호기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박정희의 이런 현실 인정 노선에 반대했다. 반대의 명분은 ‘두 개의 조선을 획책하여 영구 분단을 꾀한다’는 것이었다.
  
  주목할 것은 당시 해외에서 망명 중이던 金大中(김대중) 씨도 6·23선언을 ‘영구 분단을 조장하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했다는 점이다.
  
  金大中 씨는 1980년 7월 18일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 신문에서 이런 요지의 진술을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6·23 선언은 동·서독 방식인데, 이는 영구분단을 조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말한 사실이 있습니다. 6·23 선언 직후인 1973년 7월 6일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가진 한민통 발기 대회 강연에서 ‘6·23 선언을 반대한다’, 또 ‘英(영)연방제식으로 보완되어야 한다’고 말한 사실이 있습니다. 연방제 지지를 전제로 하지 않은 유엔 동시 가입은 동·서독처럼 남북 분단을 영구화하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김대중 씨의 이 반론은 역사가 흐른 지금 검증할 가치가 있다. 우선 6·23 선언이 동·서독 방식이기 때문에 영구분단을 조장한다는 비판은 역사적으로 오류임이 판명됐다. 동·서독 방식이란 서로 간의 실체를 인정한 다음 상호 간의 교류를 확대하여 동독에 자유의 바람을 불어넣는다는 전략이며, 이 전략이 주효하여 동독의 붕괴와 서독에 의한 흡수통일이 이뤄진 것이다. 서독은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박정희도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국가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대한민국만이 한반도의 유일 합법 정통 정부임을 견지하였으므로 영구 분단이란 말은 틀린 말이다. 영구 분단이란 남한과 북한이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는 관계를 말하기 때문이다. 유엔 동시 가입은 서로를 국가로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김대중 씨가 6·23 선언을 지지하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로 꼽은 것은 그 선언이 (남북한) 연방제를 전제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이 1973년이란 시점에서 남북한 연방제를 통일의 대전제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김일성의 연방제 통일안이나 김대중 씨의 연방제 통일안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했다. 김일성의 연방제안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북한의 적화통일 전략을 수용하는 것이니 대한민국을 북한에 팔아넘긴다는 뜻이 된다. 김대중 씨의 연방제안을 박정희가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김대중 씨는 上記(상기) 신문조서에서 김일성의 연방제와 자신의 연방제 통일방안의 차이를 이렇게 말했다.
  
  <북한 측이 주장하는 연방제는 남북에 현존하는 정치제도를 그대로 두고 양 정부의 독자적 활동을 보장하되 유엔 동시가입 등을 반대하는 것으로 보아 연방 공화국의 우월적 지배권을 갖는 연방공화국으로 알고 있습니다. 본인이 주장하는 연방제는 외교·군사·내정에 관해 완전한 독자적 지배권을 갖는 공화국 연방제로서 지배권 문제에 차이가 있습니다>
  
  김대중 씨는 또 자신의 연방제가 영국 연방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영 연방에 속하는 캐나다와 호주는 서로 독립 주권 국가 사이이다. 남한과 북한이 그런 관계에 선다는 것이야말로, 즉 서로 독립 주권 국가 관계가 된다는 것이야말로 통일을 포기하는 영구 분단을 의미하는 것이니 박정희의 6·23 선언을 영구분단 정책이라 비판할 수 없다.
  
  김대중 씨의 주장대로 박정희가 1973년에 영연방제와 비슷한 연방제를 통일방안으로 받아들이려면 자유통일을 포기하고 헌법 개정을 해야 했다. 美蘇(미소) 간의 냉전이 끝난 지금도 못 할 일을 냉전의 한복판에서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비록 김일성의 연방제와 김대중의 연방제가 다르다고 해도 박정희가 연방제란 이름의 통일방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북한식 통일방안에 동조하는 것으로 해석될 것이 분명한데 과연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김일성으로부터 세 번에 걸친 암살 시도를 당했던 박정희가 과연 그 북한 정권과 ‘영연방제식의 연방제 아래 상징적 통일의 제1단계’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 그러하지 못했다고 박정희를 비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를 묻게 된다.
  
  김대중 씨와 김일성은 1970년대에 이미 연방제 통일방안이란 말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 말뜻은 다르다고 해도 상호 접근할 수 있는 친근성은 있었다. 즉, 1970년대에 이미 김대중 식의 통일방안은 대한민국의 통일방안(대한민국이 북한 정권을 평화적으로 해체, 북한 주민을 구출한다는 의미에서의 반공 자유통일)보다는 김일성식 통일방안에 더 가까이 가 있었다.
  
  김대중 씨는 상기 진술조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산통일도 용납할 수 없지만 반공통일이나 멸공통일을 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연방제 통일방안은 통일조국의 이념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김대중 씨는 1992년까지도 “통일조국의 정치이념은 통일을 이룰 세대가 결정할 문제이다”라고 말했었다. 통일조국의 이념을 확실히 하지 않은 통일방안은 종착역을 설명하지 않고 열차 손님을 구하는 행위라고 할 것이다.
  
  김대중 씨의 1970년대 통일방안이 대한민국의 공식 통일방안보다는 김일성의 그것에 더 가까이 있었다는 의미는 그의 통일 정책 관련 인맥 또한 그러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밀하고 집중적인 탐구가 필요하거니와 여기서는 두 가지 사례만을 든다. 상기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 신문조서엔 이런 대목이 있다.
  
  <―피의자(김대중)는 裵東湖(배동호)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은 사실이 있나요.
  
  “양일동 씨의 소개로 알게 된 이후 유진산, 양일동과 만나는 자리에서 수차 만났는데 제가 미국으로 출발하려고 숙박비를 계산하려 했더니 당시 숙박비 30만 엔 정도를 배동호가 이미 계산했습니다.”
  
  ―<민족시보>를 알고 있나요.
  
  “그 신문은 배동호가 의장으로 있는 민족통일협의회의 기관지로 旬間(순간)으로 발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피의자가 본 <민족시보> 신문 내용에 대해 말하시오.
  
  “(전략) 7월 1일자에서는 ‘대민족회의를 소집, 고려연방공화국으로’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김일성의 사진을 게재하고 김일성의 통일방안을 게재하는 한편, 6·23 외교선언을 반대하는 배동호의 논평이 실려 있었습니다.”
  
  ―한민통 일본 본부 발기 준비를 위해 여러 차례 모임이 있었는데 그 경비는 누가 부담했나요.
  
  “본인은 부담한 사실이 없고 배동호 등 그 사람들이 회의장소 임대료, 식대 등을 전부 지불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묵고 있던 호텔에 찾아오면 커피 등 음료수는 제가 대접했습니다.”>
  
  우리 역대 정부는 배동호를 북한의 지령을 받는 인사로 단정했다.
  
  일본의 左派(좌파) 월간지 <世界(세계)> 1998년 3월 호에는 ‘김대중 대통령 탄생이 의미하는 것’이란 제목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池明觀(지명관) 한림대학 일본학 연구소 소장을 이 잡지의 편집장이 인터뷰한 것이다. 이 기사의 첫 머리에 池(지) 교수의 이런 술회가 나온다.
  
  <1973년 2월경부터, 일본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 씨와 야스에(安江良介-<세계> 편집장) 씨 사이가 깊어져, 이때 가끔 일본에 오곤 했던 나를, 야스에 씨가 김대중 씨와 만나도록 해주었습니다. 한국에 있을 동안엔 서로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만난 적은 없었습니다. 당시는 한국의 정보부가 눈을 밝히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앞문으로 들어오고 김대중 씨가 뒷문으로 들어오는 식으로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김대중 씨를 처음 일본 저널리즘에 소개하고, 일본 사회에 소개한 것은 야스에 씨였습니다. 그때까지 김대중 씨는 일본 사회에선 거의 무명의 인물이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야스에 씨는 이와나미 출판사 사장까지 지낸 뒤 1997년 죽은 일본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이다. 1970년대에 <세계> 잡지의 편집장이던 그는 특히 김일성과 몇 차례 인터뷰한 사람으로 유명했다. 야스에가 한 김일성과의 인터뷰 기사를 읽어보면 야스에는 언론인이라기보다는 김일성의 말을 검증 없이 그대로 전하는 대변인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세계> 잡지를 통해서 親(친)김일성, 反(반)박정희 노선을 견지해 왔다. 1973년 5월호 <세계> 잡지에서부터 실리기 시작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필자는 TK生)’은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신랄하게 공격하는 사실과 소문과 과장의 혼합물이었다. 1988년 3월호까지 연재된 이 통신은 일본 지식인들의 한국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한국의 권위 정권에 대해 가차 없는 공격을 퍼부었던 야스에는 히틀러-스탈린과 버금가는 인간 도륙의 지옥을 건설한 김일성에 대해서는 비판은커녕 일방적인 대변에 충실했다. 이런 위선적 자세는 말년의 야스에가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 많은 비판을 받도록 했다. 그런 친김일성 인사가 1973년에 김대중 씨를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970년대 김대중 씨는 통일론이나 친교 면에서 대한민국의 공식 정책이나 주류 사회보다는 김일성의 것과 일본 내 좌파 지식인에게 더 기울어져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상대적 억압자인 박정희를 절대적 전제자인 김일성보다도 훨씬 더 심하게 공격했다. 그의 이런 성향은 김정일과의 회담을 성사시키는 데는 유리하게 작용한 반면 한국의 주류층을 불안으로 밀어넣었다.
  
  
  1973년 8월 8일에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 사건은 납치만 크게 부각되고 왜 이후락 당시 정보부장(또는 박정희 대통령) 측이 납치를 결심했는가에 대해서는 의외로 깊이 있게 다룬 글이 적다. 그런 점에서 1987년 10월 <신동아>에 실린 이후락 인터뷰는 좋은 자료이다.
  
  <신동아> 李鍾珏(이종각) 기자가 쓴 이 인터뷰 기사는 ‘김대중 선생 납치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시민의 모임(공동위원장 韓勝憲, 尹順女)’에서 펴낸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이란 자료집에 실려 있다. 일부를 인용한다.
  
  <그럼 여기에서 유신이 단행된 직후 해외에서 反유신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김대중 씨의 어떠한 언동이 국익에 위해스럽다고 여겨져 이 사건까지 일어나게 됐는지를 물어보기로 하자.
  
  ―구체적으로 김대중 씨의 어떤 활동이 그토록 유해하다고 생각했습니까?
  
  “…하… 이건 내가 했다고… 스스로 말하는 전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내 입장을 한번 잘 들어봐 주세요. 내가 1972년 5월 24일날 김일성이를 만났을 때 김일성이 하는 말이 “남쪽에는 통일방식을 달리 하는 민주인사들도 많데요” 이런 말을 합디다. 그때 내가 상당히 쇼크를 받았어요. 역시 통일문제에 대한 의견이 이러쿵저러쿵 나오는 것은 우리의 약점이구나 하는 것을 내가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 뒤 내가 국회에 증언 나가서 김일성이가 말한 것을 솔직히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통일에 대해서는 발언을 상당히 주의해야 되겠다는 것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씨가 미국에서 소위 ‘한국민주화촉진국민회의’를 만들어가고 있을 때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연설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모이는 사람들이 다 민주인사는 아니고 정말 위험스러운 인사들도 있었어요…. 이 분이 캐나다에 가도 또 그런 것을 만들고, 또 이제 일본에도 만들고, 장차에는 유럽에도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또 그중의 어떤 사람들은 ‘국민회의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망명정부를 세우자’ 하는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나, 솔직히 그때 남북대화에 미쳤어요. 내 목숨을 걸고 평양에 가서 인제 전쟁을 막고, 그리고 통일의 길로 서서히 나아가자는 일념에서 어떻게 하면 통일을 성공시키느냐 하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그 무렵일 거예요. 월남에서 월남과 호찌민 군대 간의 회담이 끝내 베트콩이 참여하는 3자 회담으로 갔는데, 그 당시 LA나 일본에 보내지는 북한 지령은 자꾸 그 조직에 적극 참여하라든지, 관심을 표명하라는 지령이 많이 가고 있었습니다. 또 상당한 반한 신문에서도 그런 방향으로 연락이 가는 첩보를 내가 탐지했고… 그럴 때, 나는 남북대화를 해오는 당사자로서 느끼기에 이렇게 가다가는 망명정부가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간에 그건 다음 문제로 치고, 자칫 잘못하면 김일성이가 남쪽의 박정희뿐 아니라 해외에 있는 민주인사까지 포함시켜서 3者회담으로 나가자 하는 그런 가능성이 눈에 환히 보였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이북 놈들하고 대화할 때마다 통일에 대해서 딴 의견이 남쪽에 있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를 아주 밥 먹듯이 해요. 그것이 나에게는 큰 고충이고, 이러다가는 남북대화는 어렵다, 또 해외에서 무슨 조직이든 汎(범)세계적인 조직을 만들어서 反韓(반한) 활동, 反정부 활동을 한다는 것은 대화를 위해서는 도움이 안 된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 없기를 바라지만 일부 인사가 주장하는 대로 망명정부가 이루어졌을 때는 이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이러한 기우도 나에게는 사실상 없지 않았어요.
  
  그러한 점을 고려해서 결국은 ‘윤리적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 사람을 본국으로 데려와야 되겠다’ 하는 그러한 생각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납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해외에서의 김대중 씨 활동이나 조직을 너무 과대평가하신 것은 아닌가요?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김대중 씨의 그 단체는 조직이나 기구를 제대로 갖춘 상태가 아니었잖습니까?
  
  “첩보보고가 들어왔어요….”
  
  ―첩보에는 어떤 경우 과장이 있지 않습니까?
  
  “과장이 있었는지 모르지… 여하튼 그런 보고를 읽었어요. 물론 내가 조금 과대평가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이 미치다 보면 조그마한 것도 크게 보이게 마련이에요. 내가 남북대화를 하다 보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유리한 고지에 서느냐, 하다 보니까 우리의 취약점이 크게 보일 수 있는 법이에요.”
  
  ―1973년 8월경이라면 이미 그때 북한과의 대화에서 우리 측과는 상당한 간격을 느끼고 있을 때 아닙니까? 이 부장께서는 그대로 남북대화의 장래를 상당히 낙관적으로 평가하고 계셨습니까?
  
  “남북대화는 결국… 그때 내가 볼 때는 전쟁의 위기가 상당히 높았습니다. 왜 높았느냐, 일선에서 우발적인 사고가 일어나기가 쉽더라고요. 그래서 여하튼 간에 전쟁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되는 방법을 마련해야 되겠는데, 그것은 김일성과 만나서 이야기하고 연락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해서 내가 그 길을 택했지요. 물론 북한은 남북회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겠지요.
  
  그러나 대화란 것은 길을 터서 어떻게 하든지 넓히기는 쉽지. 길을 한 번 연다는 것은 어려우니까 여하튼 열어놓자, 열어놓고 자꾸 넓혀보자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게 생각하고 대화가 추진되고 있을 때였지 않습니까? 북한의 태도가 어떻든 간에 나는 남북대화를 넓혀보자 하는 일념뿐이었고, 사실 김대중 씨가 바깥에서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든지, 또는 납치사건이 없었다든지 했으면 어느 모로나 진전이 있었지 않았겠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이미 남북대화가 제대로 되겠나 하는 느낌이 상당히 들 정도가 아니었습니까?
  
  “현격한 차이가 있으면 있을수록 이쪽 약점을 더 줄이고 싶은 것이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 무렵 김대중 씨가 공화국 연방제를 주장한 것도 납치 사건의 한 요인이 됐습니까?
  
  “그해 6월 23일 김일성이가 체코 총서기인가 뭔가가 평양에 왔을 때 고려연방제를 말한 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에 의한 통일론인 만큼 그것을 시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필이면 이름을 왜 공화국 연방제를 내걸어요. 나는 진짜 기절할 정도로 쇼크를 받았어요. 이제 남북대화는 다 틀렸구나 하는… 나는 너무나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그 사람이 아마 틀림없이 일본에 와서인가 일본에 오기 직전인가 아니었나 싶어요. 지금도 그 말을 들으면 온몸에 소름이 끼쳐요. 어떻게 할 수 없나 봐요.”
  
  ―공화국 연방제나 대중경제론도 하나의 논의인데,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까? 이런 논의도 있고 저런 논의도 있을 수 있을 텐데요.
  
  “다른 사람은 쉽게 그렇게 말하실 수 있죠. 그러나 항상 국가안보라는 것은 최악의 경우라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어요. 정말 그 무엇 하고도 바꿀 수 없는 중대한 문제라고 하는 생각이 앞섰고….”
  
  ―박 정권이 종신집권이 가능한 독재체제로 되었기 때문에 김대중 씨는 反독재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닙니까? 그런 비민주적인 요인이 없었더라면 김대중 씨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텐데요.
  
  “우리 요원들이 김대중 씨에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권고했어요. 또 한국으로 돌아가도 절대 아무 일 없다고 몇 번 권고했어요.”
  
  ―김대중 씨의 통일론이 문제였다면, 박 정권의 종신집권체제인 유신체제와 남북대화도 무슨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그건 지금 이야기할 때가 아닌데… 남북대화할 때는 유신이란 것은 꿈에도 생각해본 일이 없었고, 다만 대화하다 보니까 통일방안이 남쪽에서 이게 나오고 저게 나오고 해서는 안 되겠어요. 그래서 내가 대통령에게 ‘이런 체제 갖고는 도저히 남북대화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리고, ‘통일주체국민회의란 것을 만들어서 여하튼 간에 통일방안을 하나로 집약해서 통일방안은 이거다, 이외에는 딴 의견이 없다 하는 방향으로 몰고 가야만 대화가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유신 헌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여러 가지 또… 딴 요소도 들어갔습니다만, 그때 취지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만들어서 대화를 해보자는 것이었어요. 그것이 최상이다 생각해서 발상한 거지, 혹자가 말하듯이 유신을 하기 위해서 남북대화를 한 것은 아니에요.”
  
  ―그럼, 유신체제 구상을 박 대통령에게 건의한 것은 정확하게 언제입니까? 7·4 공동성명에서 10월 유신(10·17)이 나오기까지는 불과 3개월 정도밖에 안 되는데요. 7·4 공동성명이 나올 무렵인가요?
  
  “그것이 9월이에요.”
  
  ―9월 초순입니까?
  
  “8월 말, 8월 말이에요.”
  
  ―8월 말에서 10월 17일이 유신이니까 약 두 달쯤인가요?
  
  “두 달, 두 달은 안 될 거예요.”
  
  ―처음 구상단계에서부터 박 대통령과 상의했습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통대를 만드는 식으로 개헌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처음 대통령께서는 아무 말씀 안 하시더구먼. 그러다가 한 열흘인가, 보름 후에 김성진 비서관이 유혁인 씨하고 왔어요. 내가 얘기했다는 것이 어떤 내용인가 해서… 다시 되풀이 설명을 했지요. 그래서 그때부터 그 체제의 골격 구상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어요.”>
  
  李厚洛(이후락) 씨의 증언을 해석해 보면 김일성의 고려연방제 통일 방안과 김대중 씨의 공화국 연방제 통일 방안은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는 것이다. 김일성이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통일 방안과 다른 김대중 씨의 통일 방안을 이용하여 북한 정권-대한민국 정권-대한민국 내 소위 민주인사의 3자 회담을 제의, 분열작전으로 나올 가능성을 염려했다는 것이다.
  
  이런 3자 회담은 한반도의 정치세력 구도를 2(북한 측) 대 1(대한민국)로 만드는 것이다. 김일성도 노동당 간부들에게 연방제 통일 방안이 바로 그런 구도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즉, 연방제 통일 방안을 대남 공작에 이용하여 남한 내에서 공산세력의 자유로운 활동을 확보해 주면 4,000만 국민 가운데 2,000만을 북한 편으로 돌려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북한 주민 2,000만과 합쳐서 자기 편이 4,000만, 대한민국 수호 세력이 2,000만이 되니 자유총선거를 해도 공산당이 이길 자신이 있다는 계산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한 측근은 “그동안 김 대통령이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아가면서도 자신의 통일 방안을 유지해왔기 때문에 북한 측도 신뢰하여 정상 회담을 수락하게 된 것이다”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이 말엔 진실이 있다. 김대중 씨는 1980년 5월에 계엄당국에 연행되어가 조사를 받을 때도 자신의 통일 방안을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이 통일 방안의 위험성을 지적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소신임을 의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대중 씨는 자신의 통일 방안이 김일성의 연방제안과 다른 점을 강조해 왔으나 비슷한 점이 많았다는 것은 2000년 6월 평양회담에서 뒤늦게 입증됐다. 북한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김대중 씨의 ‘연합제’가 공통점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 방향으로 통일을 의논해 간다는 중대한(또는 위험한) 합의를 했던 것이다.
  
  이 합의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로 북한의 대남 적화 전략의 핵심인 연방제案(안)의 일부 타당성을 인정한 것이다. 이런 인정의 연장선상에서 남한 내의 친북 세력이 지난 수년간 대담한 활동을 전개하여 대한민국 수호 세력을 反통일 세력이라고 공격해왔음은 이미 공지의 사실이 됐다.
  
  즉, 김일성의 통일 방안 일부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임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들의 대남 적화 공작에 일정한 공간을 제공하는 사태를 초래한 것이다.
  
  김정일 정권과 국내의 親北(친북) 세력은 이제 線(선)과 선의 연결이 아닌 面(면)과 면의 접촉으로 확대, 연동되어 김정일 정권의 조종대로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이 성숙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햇볕정책은 벼랑에 몰린 김정일 정권을 경제적·군사적으로 기사회생시키고, 한국 내의 대북 안보 체제를 약화시키고 있다. 이런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1970년대부터 지속되어온 김일성-김정일 정권과 김대중 씨 사이의 이해와 공감 때문이 아닐까.
  
  지금 한국에선, 1970년대에 박정희와 이후락이 걱정했던 것이 정권 유지를 위한 거짓말이라든지 단순한 기우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김정일의 연방제를 앞세운 적화 전략과 이에 놀아나는 남한 내의 親김정일 세력의 전략이 성공할 것 같지는 않다. 우선 김정일 정권의 악마성과 구제불능함이 너무나 심해서 그 정권 편을 공개적으로 들 수 없게 되어 있다. 웃음거리가 될 각오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 남한 내의 親김정일 세력은 개혁·민주·통일 세력으로 위장하고 있는데 이런 위장은 끊임없는 거짓말을 요구한다.
  
  거짓말과 위선이 습관처럼 되어 있는 세력은 결정적인 순간에 큰 힘을 내기가 힘들다. 아무래도 정직에서 진정한 힘이 나오니까 이들이 당당하게 親김정일 간판을 내걸 수 있으려면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야 한다. 그렇더라도 이들이 본색을 드러내는 날이 장례식이 될지 모른다.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보화 사회에서 마적단 두목을 사모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맨정신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퇴임한 김대중 씨와의 계속적인 연계를 유지하면서 한국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할 것이지만 김정일 정권의 악마적이고 反민족적인 본질 때문에 그와 협조하려는 세력은 자가당착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 정권이 남한 내의 親김정일 세력을 조종하는 한도 내에서 한국의 선진화는 불가능하다. 김정일 세력과 그 우호 세력은 광신, 미신, 억지, 살육, 비인간, 비과학 같은 전근대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이런 守舊(수구) 세력이 전진하려는 한국 사회를 억지와 광신으로써 계속해서 끌어당길 경우 한국은 속도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든 세력, 즉 한국 사회의 주류층이 합리와 과학과 자유와 인권을 대표한다면(즉 역사의 진보 세력), 김정일 정권과 親北(친북) 세력은 비합리와 광신과 억압을 대표한다. 그들이야말로 역사의 전진을 가로막는 수구 反動(반동) 세력인 것이다. 지금 한반도에서 이 두 세력의 대결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선진화인가 후진국으로의 회귀인가를 결판낼 것이다.
  
  
  
  
  
  
  
  
  
  
  
  
  
  
  
  
  
  
  
  
  
  
  
[ 2009-03-29, 09:0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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