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赤化통일의 시기는 지났다"
연재 45/ 삼척 울진 공비 침투 속에서 增産을 독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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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삼척에 무장공비 침투
  1968년 11월 5일 합참 對간첩대책본부장 柳根昌(유근창) 중장은 ‘지난 11월 2일밤 경북 울진군 북면의 동해안에 30명 내외로 추정되는 북괴 무장공비가 불법 침입, 양민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군경과 향토예비군이 이들을 포위, 섬멸 작전을 펴고 있다’고 발표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朴璟遠(박경원) 내무장관, 任忠植(임충식) 국방장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 金桂元(김계원) 육군참모총장, 金榮寬(김영관) 해군참모총장, 金成龍(김성룡) 공군참모총장, 姜起千(강기천) 해병대 사령관, 朴英秀(박영수) 치안국장, 柳根昌 대간첩대책본부장, 趙始衡(조시형) 청와대 정무수석 비서관이 참석한 대책 회의를 가졌다.
  
  정부는 강원도와 경북 북부 일부 지역에 을종사태를 선포했다. 을종사태 선포란 무장간첩 행위가 대규모로 이뤄져 경찰 병력만으로는 치안확보가 곤란하다고 판단할 때 군 병력을 투입해 장기간 작전하도록 하는 조치로서 대통령령 18호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날부터 한국은 사실상 兩面(양면)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베트남 전선에 이어 내부에 또 다른 戰線(전선)을 형성한 것이다. 對(대)간첩대책본부의 최초 발표와는 달리 동해안에 상륙한 무장공비 병력은 120명이었고 육군은 이들을 섬멸하기 위하여 수백 배의 전투 병력을 동원했다.
  
  김일성은 이 게릴라 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비무장지대와 서해안에서 陽動(양동) 작전을 폈다. 미국은 김일성의 의도를 이렇게 분석했다.
  
  1968년 11월 8일 미 국무부의 정보 조사국장이 딘 러스크 국무장관에게 올린 정보 보고는 다음과 같았다.
  
  <11월 1~3일에 한국의 동·서해안에 북한 무장 병력이 침투했다. 이 사건은 올해에 중단되었던 북한의 연안 침투가 재개되었음을 뜻한다. 서해안의 瑞山(서산) 부근에서 두 명의 공비 침투가 목격되었다. 이날 늦게 이 지역을 수색하던 한국군은 무장 공비 두 명을 사살하고 다이너마이트를 발견했다.
  
  2일 뒤 비무장지대에서는 일련의 총격전이 발생했다. 한 사건은 북한의 소대급 부대의 침투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두 사건은 동해안의 허리 부분에서 감행된 상륙작전으로부터 한국군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도발이었다.
  
  11월 2일 저녁에 한 척의 선박이 목격되었으나 저지당하지 않고 동해안 울진 부근에 공비들을 상륙시켰다. 다음날 무장한 북한군은 白晝(백주)에 작은 마을을 점령하여 주민을 모아놓고 선전 선동 시간을 가졌으며 돈을 나눠 주었다. 이 돈은 나중에 위조지폐임이 밝혀졌다. 마을 사람 네 명이 살해되었다.
  
  한국군은 이 지역을 포위하고 11월 8일 현재 8명을 사살했다. 지형이 험하여 작전을 어렵게 만들고 있으나 한국군은 침투 병력 전부를 소탕할 자신이 있다고 한다. 침투 병력에 대해선 異說(이설)이 있다. 30명이란 說(설)과 총 60명으로 구성된 두 팀이 상륙했다고도 한다(그 후의 조사에 의해서 120명이 상륙했고 그 가운데 107명이 사살되었으며, 7명은 포로가 되고 나머지는 겨울 추위로 죽은 것으로 추정).
  
  이 작전은 베트남형의 게릴라전이 겨울에 가능한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현재까지로는 동해 침투작전이 현지 주민들로부터 전혀 협조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비협조는 남한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펴려는 북한 측의 노력에 항상 흠이 되어 왔다>
  
  12월 16일 미국의 태평양 지역 사령관은 미 합참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김일성은 한국식의 베트남 전략을 남한에 대해서 실시하려는 것 같다. 처음으로 우리는 비무장지대에서의 도발과 함께 후방지역에서의 冬季(동계) 게릴라전에 직면하고 있다. 김일성은 남한에 게릴라전의 인프라를 구축하려 한다. 나는 남한 당국이 우리의 도움을 받으면서 김일성의 도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럴수록 김일성은 더 대담한 공격을 할 것이고 이것이 남한 정부를 자극하여 (우리와 협의 없이) 일방적인 보복전에 나서게 할 가능성이 높다.
  
  김일성은 베트남 전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활용하려 할 것이다. 베트남에서 대결이 끝나고 우방군대가 철수하여 남한의 군사력이 다시 증강된다면(한국군이 복귀하여) 김일성은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안 된다’는 조급증으로 해서 한국을 혼란에 빠뜨리거나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하려고 할지 모른다.
  
  김일성은 군사적으로 강력한 입장에 있으나 혼자 힘으로 남한을 점령할 힘은 없다. 그가 오판할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나는 그가 완전히 이성을 상실한 인간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가 공개적인 도발을 함으로써 국가와 그 자신에 큰 타격을 가져올 위험성이 그를 자제케 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가 赤化(적화)통일의 시간이 달아나고 있다고 생각하면 매우 위험해질 것이다. 우리는 한국 상황을 면밀하게 지켜보고 있다>
  
  한 쪽에서는 전투, 다른 쪽에서는 增産
  1968년 11월 1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에는 무장 공비들이 최초로 점령했던 마을의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새벽잠의 고요한 마을에 잔인한 奇襲·蠻行(기습·만행)’이란 제목의 기사 일부를 인용한다.
  
  <동해안 울진에 침투한 무장공비들이 처음으로 만행을 저지른 곳은 해안선에서 15km쯤 떨어진 북면 주인리. 태백산 기슭의 해발 400m되는 외딴 마을이었다. 일곱 가구 50여 명의 주민들이 옥수수, 조, 감자 등을 심고 사는 가난한 마을이었다. 이들의 평화스러운 잠을 깨운 것이 11월 3일 오전 6시쯤, 회색 싱글 신사복 차림에 넥타이를 맨 자와 붉은 점퍼를 입은 괴한 일곱 명이 고숫골 오모(69) 씨 집에 나타났던 것이다. 오 씨 집에서는 때마침 손자(18)와 삼촌(28)이 함께 옥수수와 조를 털고 있었다.
  
  이들은 처음에 “경북 유격대에서 주민등록증의 사진을 찍어 주러 왔다”고 속였다. 그리고는 다른 2명이 “우리 일행이 많으니 쌀 서 말로 밥을 지어달라”고 요구, 방에서 기어 나온 오 노인이 “우리 집엔 쌀은 없고 조뿐”이라고 대답하자 그것으로라도 모두 밥을 지어달라고 다그쳤다.
  
  오 노인의 딸(48)이 부엌에서 조밥을 짓는 동안 공비들은 약품을 섞지 않나 하고 감시하고 있었다. 그때 카메라를 멘 공비가 오 씨 집안 식구들의 사진을 찍었으며 다른 5~6명의 공비들이 부락민 50여 명을 끌고 왔다.
  
  모두 다발총, 기관단총, 권총 등으로 무장하고 수류탄은 몸에 두 줄로 두르고 있었다. 이때 산 주위에는 약 20명의 공비들이 마을을 포위, 망을 보고 있었다. 끌려온 주민 중에는 아랫마을에서 달걀을 사러 왔던 행상인 진 모(30) 여인도 끼어 있었다. 그의 남편은 송곳봉 너머에 있는 광산의 채광부. 공비들은 마을 사람들의 사진을 찍은 후 이른바 사상교육을 시작했다. 북괴 김일성의 사진이 들어 있는 불온서적을 나눠 주고 그쪽 노래를 불러 주며 이북의 ‘발전상’도 선전했다.
  
  그들은 100원짜리 위조지폐를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 한 사람에게 5,000원에서 1만 원까지 마을사람들에게 나눠 주면서 “이 돈은 이 지방에서 쓰지 말고 멀리 나가 헌 돈과 섞어 쓰라”고 돈 쓰는 방법까지 일러 줬다. 공비들은 “우리 유격대에 가입하여 남북통일에 적극 협력하라”고 얼러대면서 인쇄된 ‘유격대 지원청원서’를 꺼내놓고 서명을 강요했다. 맨 먼저 반장 김 씨에게 가입 여부를 물었다.
  
  김 씨가 “우리는 대통령 지시와 우리 법에 따라 살겠다”면서 머뭇거리자 신사복 차림의 한 공비가 권총을 빼 들고 “우리 인민 유격대의 맛을 보겠느냐, 불응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해 모두 성명, 나이, 주소 등을 기입하고 강제 서명을 받았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지장을 찍게 했다. 오전 10시쯤 송곳봉 좌측 등성에서 1발의 총성이 났다.
  
  잠시 후 전병두(32·노동·양양군 장성읍) 씨가 붙들려 왔다. 전 씨는 지난 10월 23일 선친의 제사를 지내러 이곳에 왔다가 아내 김 여인(31)과 2남 1녀의 자녀들을 먼저 보낸 다음 이곳 광산서 일하는 처남을 만나보고 혼자 마을로 내려오던 길이었다.
  
  공비들은 전 씨가 이 마을 사람이 아닌 것을 알자 연락원으로 경찰에 신고하고 오는 것으로 판단, 밧줄로 두 손을 묶었다. 공비들은 허겁지겁 조밥을 먹고 나머지를 비닐봉지와 와이셔츠에 싼 다음 전 씨와 반장 김 씨, 주 모(22) 씨 등 주민 9명을 포승에 묶어 납치, 매봉산 쪽으로 달아났다.
  
  이들은 마을에서 80m쯤 떨어진 골짜기에 이르자 전 씨를 꿇어 앉혀 놓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느냐”, “유격대에 따라가지 않겠느냐”고 졸라댔다.
  
  전 씨가 공비와의 합류를 원치 않는 듯 머뭇거리자 “이놈은 사상이 불온하다. 아무리 봐도 수상하다”고 캐물었다. 전 씨가 해병대 출신임을 안 공비들은 “이놈은 안 되겠다. 비협조적인 놈은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면서 대검을 꺼내 납치된 부락민이 보는 앞에서 마구 찔러 죽였다.
  
  오후 1시쯤 이들은 자기들끼리 잠시 의논한 후 총부리를 겨누고 “잘 보았지, 우리에게 협조해.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마을에 가서 기다려. 우리는 다시 올 테니 집집마다 대피굴을 파 놓아라. 사진까지 찍어두었으니 반항하거나 군경에 연락하면 죽인다”고 위협하고 주민들을 돌려보냈다. 일곱 시간 동안 붉은 만행을 직접 겪고 보아온 주민들은 5일 기자들이 현지로 찾아갔을 때도 겁에 질려 있었다.
  
  蔚珍 金雲夏 記者(울진 김운하 기자)>
  
  1968년 11월 11일 눈 덮인 동해안에서 무장공비 소탕 작전이 진행 중이던 때 박정희 대통령은 고향인 경북 선산 농산물(양송이) 가공공장 준공식에 참석했다. 그는 농민들 앞에서 치사를 하다가 講義調(강의조)가 되었다.
  
  <…여기 논들을 볼 것 같으면 금년에 벼농사가 끝나고 나면 지금부터 그 논은 앞으로 몇 달 동안 아무 수입도 없이 놀게 됩니다. 벼농사 한 번 지어먹고 논을 6 개월 동안 놀려둔다는 이런 식의 농사 가지고는 절대로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후략)>
  
  박 대통령은 그해 1·21 사태, 즉 북한 124군 특공대에 의한 청와대 기습 사건 때보다는 여유를 갖고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에 대처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사령탑을 친 1·21 사건이 전략적인 기습이었다면 그보다 몇 배나 되는 병력으로 후방을 친 이번 사태는 전술적인 것으로 충격이 덜했던 것이다.
  
  박 대통령은 선산 양송이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길에 상모리 생가에도 들렀다. 맏형 東熙(동희) 씨는 病席(병석)에 있었다. 이에 앞서 先塋(선영)에 참배한 박정희는 漢字(한자)로 되어 있는 碑文(비문)을 한글로 고쳐 가지고 올라오라고 친척에게 지시했다. 이 무렵 박 대통령은 한글전용화 정책에 집념을 쏟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1968년 11월 30일 수출의 날 치사에서 동해 무장 공비 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김일성의 실패를 예언한다.
  
  <김일성이가 가지고 있는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대한민국을 전복하고 그들이 노리는 적화통일을 하기에는 벌써 시기가 지났습니다. 그동안 대한민국의 국력이 너무 커져버렸고, 대한민국의 국방군이 너무나 강대해졌고,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의 정신 무장이 너무 단단해졌기 때문입니다. 전면 전쟁을 도발해서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뒤집어엎느니보다, 전쟁 행위를 중지하고 경제 건설을 많이 하고 수출을 많이 해서 북한 동포들이 좀더 잘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나가는 것이 현명한 길이지.…(중략)
  
  공산주의를 갖고 경제건설에 성공한 나라가 이 지구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초기에는 민주주의보다도 조금 더 성적을 올리는 그런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설령 김일성이가 경제 건설에 치중을 해서 성공을 했다 하더라도 북한 괴뢰 집단에 큰 문제점이 남는 것입니다.
  
  북한의 경제가 성장이 되고 수출이 많이 늘고 북한의 동포들의 생활수준이 올라가고 번영을 누리게 되고 만약에 이렇게 되었다면, 그 후에 무슨 문제가 또 생기느냐 하면, 북한 동포들 머릿속에 또 하나의 욕구 불만이 생길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좀더 자유롭게 잘살아보겠다는 욕구입니다. 이것은 공산주의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날 박 대통령은 “금년에 5억 달러 수출 목표 달성이 확실히 보이게 되었고, 내년에는 7억 달러, 내후년 1970년에 가서는 10억 달러 목표를 달성하려고 우리는 노력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 2009-03-30, 23:0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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