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따위 선거는 이제 없다"
朴正熙 서거 30주년 기념 연재 46/維新으로 가는 길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1971년 4월 25일.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朴正熙(박정희) 후보는 4월 27일에 있을 제7代 대통령 선거를 위한 마지막 연설을 했다. 朴 대통령은 서두를 이렇게 시작했다.
  
  “요즈음, 우리나라 야당 사람들이 나에 대한 인신공격을 하는 가운데서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또 다시 朴 대통령을 뽑아 주면 총통제를 만들어 앞으로 朴 대통령이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해먹을 것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유권자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리거니와, 내가 이런 자리에 나와서 여러분에게, ‘나를 한 번 더 뽑아 주시오’ 하는 정치 연설은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그는 자신의 성취를 자신감 있게 피력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全세계의 개발도상국 가운데서도 가장 모범적이란 평을 듣고 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에 全세계 120여 개국 중에서 어느 나라가 가장 경제성장이 빨랐는가 하고 유엔과 세계은행에서 통계를 내어 보았더니, 가장 경제성장이 빠른 국가 중에서도 우리 대한민국이 세 번째에 들어갔습니다. 또 어느 나라의 수출성장이 제일 빨랐는가 하면 120여 개국 중에서 우리나라가 단연 1위였습니다.”
  
  朴 대통령은 옛날 이야기를 했다.
  
  “10년 전 5·16 혁명이 나기 며칠 전 대구 시내에 있는 몇몇 백화점에 들러서 내의와 양말을 사려고 주인한테, ‘내의와 양말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내 앞에 내놓은 물건은 전부가 일제 아니면 미제, 홍콩제뿐이었습니다. ‘우리 국산은 없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주인은 아주 쑥스러운 얼굴을 하면서 저쪽 구석에서 먼지가 뽀얗게 앉은 국산 양말 몇 켤레를 갖고 와서, ‘아이구, 손님 이거야 어떻게 신겠습니까. 그거 국산은 못 신습니다. 차라리 외제를 사시지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서울 시내의 백화점이나 기타 모든 상점에 가 보면, 그때와는 격세지감이 있을 것입니다.”
  
  이날 연설에서 朴 대통령이 “이번 선거를 끝으로 다시 입후보하지 않을 것이니 꼭 찍어 달라”고 호소하지 않으면 수도권에서 金大中(김대중) 후보에게 너무 뒤져 위험하다고 건의한 사람들이 많았다. 공화당의 수도권 선거 책임자이던 康誠元(강성원)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며칠 전 朴 대통령을 만났다.
  
  “각하, ‘다시는 출마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표가 안 나옵니다. 지금 서울에서 8 대 2로 우리가 열세인데 지지율을 40% 선까지 끌어올리려면 각하께서 그런 약속을 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말했더니 朴 대통령은 담배를 쥔 손을 바르르 떨었다. 화가 나면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大選(대선)을 사실상 총괄적으로 지휘하고 있었던 李厚洛(이후락) 정보부장은 전날 朴 대통령이 부산 유세를 끝내고 열차편으로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마중을 나갔다. 같은 차를 타고 청와대로 가는 도중에 李 부장은 “내일 유세 때는 꼭 ‘이번이 마지막 출마다’는 말씀을 해주셔야 합니다”라고 했다. 朴 대통령은 “지방 유세의 분위기가 좋았는데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기분이 나빠졌다.
  
  李 부장은 이날 장충단 공원 유세장으로 가는 朴 대통령에게 다시 “각하, 어제 그 말씀 꼭 하십시오”라고 졸랐다. 그는 선거 추이를 분석한 결과를 보고하면서 “결코 낙관적이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朴 대통령은 말 없이 뚱하고 나갔다.
  
  언론은 이날 朴 후보가 불출마 약속을 했다고 보도했지만 그는 장충단 연설에서 그런 약속을 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한 번 더 뽑아 주시오’하는 정치연설은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했을 뿐이다. 표를 구걸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대통령을 세 번만 하겠다고 못 박지 않았다. 언론은 朴 대통령의 깊은 뜻을 눈치채지 못하고 이날 연설을 ‘4選 불출마 선언’이라고 보도했다.
  
  이날 연설을 분석하면 朴 대통령이 마음속으로 헌정을 중단시키는 일대 결심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날 朴 대통령은 국민들을 속이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이야기이다. 이날 연설의 묘한 뉘앙스 차이를 이해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정세 분석에 강한 康誠元 의원만은 자신이 건의한 내용과 朴 대통령이 말한 것의 차이에 유의했다. 그는 그 뒤에도 朴 대통령의 연설을 유심히 분석하다가 1972년 10월 1일 국군의 날 연설에서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란 단어가 나타나자 주위에 “이달 안으로 큰 일이 일어날 것이다”고 말하고 다녔다.
  
  장충단 공원 연설은 朴 대통령에게 선거와 민주주의에 대한 근원적인 懷疑(회의)를 갖게 했음이 여러 증언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1972년 6월 어느 날, 청와대 사정특보인 洪鍾哲(홍종철·前 문교부 장관)이 董勳(동훈) 비서관과 함께 朴正熙 대통령에게 전국 금융기관의 편중대출 상황 보고를 했다. 편중대출을 많이 받은 순서로 100大 기업과 개인을 표로 만들어 올렸다. 이를 훑어본 朴 대통령은 “이 사람들이 나한테 말하던 내용과는 영 다른데, 이것 쓸모가 있겠군”이라고 하면서 기분이 좋아 보였다.
  
  朴 대통령은 집무실 옆문을 열고 뜰로 나가 야외 식탁을 마련케 하고 두 보고자와 함께 점심을 하게 되었다.
  
  洪 특보가 “각하 요사이 시중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북한 요인이 서울을 다녀갔다던가 하는 소문인데…”라고 했다.
  
  朴 대통령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1년 전에 있었던 선거 이야기를 꺼냈다.
  
  “董勳 비서관, 지난번에 내가 장충단에서 유세할 때 가보았겠지?”
  
  “예, 굉장히 많이 모였더군요.”
  
  “이 사람이, 모였다고? 모이긴 무슨 모여, 그냥 실어다 날랐지, 하하.”
  
  董勳 비서관은 ‘朴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 장충단 유세 때의 군중이 대부분 관권과 금력에 의해 동원된 것임을 알고 있구나, 역시 속는 분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朴 대통령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그 군중이 나는 참 무서웠어. 군중이 혼란을 일으키면 결국 무력을 동원해야 진정이 되어요. 내가 4·19 때 부산계엄사무소장이었는데 그런 꼴을 보았어요. 내가 정복을 입고 군중 앞으로 나아가서 ‘같이 만세를 부르자’고 하여 진정을 시켰어요.
  
  만약 그 장충동에서 북괴가 모략전을 펴서 경찰관 복장을 한 사람으로 하여금 총을 쏘게 해놓으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그걸 빌미로 하여 북괴가 군대를 들여보낼 수도 있지 않겠어. 그날 나는 연설할 때 그런 걱정으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였어요. 연설을 마치고 내 자리로 돌아와서 수행원에게 맨 처음 물은 말이 ‘휴전선에 이상이 없느냐’였어.
  
  청와대로 돌아와서도 군중들이 다 해산했다는 보고를 받고 저녁을 먹었어. 작은 회사도 사장을 뽑을 때는 이런 저런 점을 살펴보고 신중하게 하는데, 하물며 국가의 운명을 짊어지는 대통령을 뽑는데 그런 식으로 군중을 잔뜩 흥분시키고 감정을 돋워 놓고, 그것이 식기도 전에 투표장으로 이끌고 가서 표를 던지게 한다면 엉뚱한 사람을 뽑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말이야.
  
  董勳 비서관은 법을 배운 사람이고, 민주주의에 대해서 많이 알 터인데 어디 말해봐요, 이게 민주주의요? 가장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감정적으로 유권자를 만들어 놓기 시합하는 것이 민주주의냐 이 말이야.”
  
  朴 대통령은 듣고만 있는 두 사람 앞에서 말을 이어갔다.
  
  “그때 장충동에서 내 연설 자세히 들었겠지.”
  
  “예, ‘이게 마지막 유세’라고 하시는 말씀 감명이 깊었습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한 말은 ‘이제 다시는 여러분들한테서 표를 달라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였다고.”
  
  董勳 비서관은 ‘이 말은 言中有骨(언중유골)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朴 대통령은 이때 갑자기 손바닥으로 탁자를 ‘탁’ 치더니 이렇게 내뱉는 것이었다.
  
  “이제 그 따위 놈의 선거는 없어!”
  
  董勳 비서관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朴 대통령은 이어서 인도네시아 헌법에 대해서 董勳 비서관에게 물었다. 자연히 인도네시아 이야기로 화제가 옮아갔다. 朴 대통령은 인도네시아의 역사와 정치에 대해서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朴 대통령은 특히 1965년에 공산당이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에 수카르노 대통령이 놀아나자 수하르토가 나서서 공산당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십만 명이 살육당하는 과정을 설명해 나갔다.
  
  朴 대통령은 섬이 많고 문맹률이 높은 인도네시아가 그 현실에 맞는 헌법과 정치제도를 도입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朴 대통령은 식탁에서 일어서면서 두 사람에게 “오늘 한 이야기는 옮기면 안 돼”라고 일침을 놓았다.
  
  
  “후계자를 추천해 봐”
  1971년 4월 28일, 대통령 선거 다음날인 이날 金鍾泌(김종필) 공화당 부총재는 충남 서산 농장에 가 있었다.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는 朴 대통령이 94만여 표 차이로 金大中 후보를 이기고 있었다. 金鍾泌에게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朴 대통령이 현충사에서 충무공 탄신기념식에 참석한 뒤 온양관광호텔로 가니 그곳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호텔에 도착하니 안내자가 “점심 준비를 하는 동안 朴 대통령이 방에서 쉬고 있으니 들어가라”고 했다. 朴 대통령은 서서 정원을 내다보고 있었다.
  
  “저 왔습니다.”
  
  “응, 어딨었어.”
  
  “저, 서산에 가 있었습니다.”
  
  “그래?”
  
  朴 대통령은 한참 침묵했다. 그 사이 金鍾泌은 陸英修(육영수) 여사에게 가서 인사를 했다. 朴 대통령은 소파 쪽으로 오더니 앉으면서 이야기했다.
  
  “내가 요새 골똘히 생각해 보는데, 이것 안 되겠어.”
  
  “뭐가 안 되겠습니까?”
  
  “나는 그래도 빈곤을 추방하려고 열심히 일을 했어. 한 10년 열심히 하여 이제 굶지 않을 정도는 됐어. 수출도 잘 되고 말이야. 그런데 국민들이 내가 三選(삼선)을 하겠다니까 언짢게 생각하는 것 같아. 그걸 모르겠어. 내가 영구집권한다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지금은 정하지 않았지만 선거가 끝난 뒤에는 후계자를 정하겠다고 이야기했잖아. 그랬는데 金大中이가 뭔데 차이가 그것밖에 안 나나.”
  
  朴 대통령은 자신을 압승시켜 주지 않은 국민들에게 매우 섭섭한 모양이었다. 좀처럼 이런 말을 하지 않는 朴正熙는 그야말로 작심한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 사람(金大中)과 비교해서 국민들이 나를 대접하는 게 겨우 이 정도인가. 민주주의가 역시 약점이 있어. 우리나라 같은 경우 선거바람이 잘못 불면 엉뚱한 사람이 당선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어. 그랬을 때 과연 이 나라가 일관성 있게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할지 의심스러워. 그래서 내가 심각하게 걱정을 해.”
  
  朴 대통령은 이렇게 덧붙였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가 돈을 얼마나 썼나. 행정력은 얼마나 구사했나. 절대다수의 의석을 차지하는 공화당이 각 지구당에 돈을 얼마나 내려보냈나 말이야. 그래도 요것밖에 차이가 안 나?”
  
  이 대목에서 金鍾泌이 말했다.
  
  “선거에 취약점이란 게 왜 없겠습니까. 이번에 각하 표가 의외로 적었던 것은 역시 저희 보좌하는 사람들의 잘못인 것 같습니다. 각하께서 침통해하시는데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하는 건 여러 각도로 연구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요담에 내가 그만두기 전에 그런 면에서 취약점을 확실히 보완할 수 있는 체제를 정비해 놓는 게 내가 마지막에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요새 들어.”
  
  朴 대통령은 이날 낮 온양호텔에서 있었던 다과회에선 선거에 대해 일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는 “가뭄이 풀려서 한결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朴 대통령의 불평을 들으면서 金鍾泌은 오히려 국민들이 현명한 선거를 했다고 생각했다.
  
  “표차가 95만 표밖에 나지 않은 것은 국민들이 3選개헌에 대한 의아심을 풀지 않은데다가 표를 많이 주면 이 양반이 무슨 일을 할지 모른다고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1970년 12월 <조선일보>에, 고상현이라는 27세 파월장병 출신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작은 기사가 났다. 그는 서라벌 대학에 재학 중 입대하여 베트남 전선에 나갔다. 근무 중 안면 및 전신 화상으로 양 손가락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특기인 악기를 다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손가락을 쓰지 못하고 수술할 돈도 없다는 호소였다.
  
  이 기사를 읽은 朴正熙 대통령이 그 해 12월 4일 성형수술에 쓰라고 60만 원을 주었다.
  
  1971년 5월 8일자 청와대 비서실이 작성하여 朴 대통령에게 보고한 문서에 따르면, 고상현이란 사람은 60만 원을 받아 수술을 받고 1만 1,240원이 남아 반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문서에 朴正熙 대통령이 메모 지시를 했다.
  
  <앞으로 再起(재기)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支援(지원)할 터이니 本人(본인)의 希望(희망)이 무엇인지 알아보라. 잔금 1만 1,240원은 원호처를 통하여 본인에게 회송필(영수증 별첨)>
  
  1971년 6월 2일 고상현 씨 관련 보고서가 다시 대통령에게 올라간다.
  
  <원호처로 하여금 각하의 뜻을 본인에게 전언케 하였던 바, 본인은 감격을 금치 못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자신의 노력으로 자립 자활하여, 각하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것이 본인의 의사입니다. 고상현 군이 성형수술을 한 명동병원 원장 장상숙 씨는 수술비 수령액 50만 5,700원 중에서 40만 원을 고상현 군 자립을 위하여 기증하였습니다>
  
  朴 대통령은 이런 메모를 덧붙였다.
  
  <장상숙 원장에게 치하 서신 발송할 것(대통령 명의로)>
  
  작은 데에도 치밀한 것이 朴 대통령이었다.
  
  1971년 5월 중순 어느 날,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지원유세에 나선 朴 대통령은 충남 온양에서 金世培(김세배) 의원 지원 연설을 끝낸 뒤 헬리콥터를 타고 공주의 李炳主(이병주) 의원 지역으로 떠나면서 대전에서 출마했던 공화당 원내총무 출신의 JP 직계 金龍泰(김용태)를 동승시켰다. 공주에 도착한 일행은 점심시간이 되어 李 의원 집에서 식사를 했다. 점심을 끝낸 다음 朴 대통령은 주인인 李 의원과 金正濂(김정렴) 비서실장, 朴鐘圭(박종규) 경호실장에게 좀 쉬고 있으라 하고, “나, 金龍泰 의원하고 이야기 좀 하겠어”라고 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지난 서울 유세 때 후계자를 키우겠다고 했는데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그러한 중대사는 전적으로 각하의 意中(의중)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신분으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3選개헌 전에 金鍾泌을 후계자로 밀다가 혼이 났던 金龍泰로서는 사양하는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물어보니 대답하기 어렵겠지. 자네 생각나나? 6·25 때 대구 우리 집에서 맹세한 것, ‘이 나라에서 빈곤만은 없애 보겠다’고 한 말. 이제 그 꿈이 이뤄지고 있네. 나도 3選개헌이 무리였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李承晩 박사도 개헌을 하지 않았던들 지금은 國父(국부)로서 존경을 받고 있었을 거야.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이룩해 놓은 國富(국부)와 국력을 북괴가 남침해서 하루아침에 불살라 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커! 경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국력을 기르고 국방을 튼튼히 해줄 사람이 없단 말인가.”
  
  “각하께서 下問(하문)하신 일은 저로서는 상상조차 못 할 일입니다.”
  
  “이 사람아! 자네는 3選개헌을 반대하다가 내가 저질러 놓은 일들을 마무리짓기 위해 개헌을 하겠다고 하니 동의해 주지 않았나. 같이 걱정하는 뜻에서 묻는 것이야, 다른 뜻은 없어, 이 친구야!”
  
  金龍泰는 朴 대통령과는 광복 직후부터 인연이 있었고, 몇 안 되는 민간인 출신 5·16 혁명동지였다. 朴 대통령은 공화당 초대 원내총무로 그를 임명하고 ‘두목’이란 애칭을 붙여 주었다. 그는 1968년 공화당 內에서 金鍾泌 의장을 후계자로 옹립하려는 ‘국민복지회’란 단체를 만들었다는 혐의로 당에서 제명되었고, 1969년엔 공화당이 발의한 3選개헌案(안)에 반대하고 있었다. 이해 7월 金 의원이 태릉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있는데 金載圭(김재규) 육군보안사령관이 찾아왔다.
  
  담담하게 지내는 사이였던 金 사령관은 “벌써 金 의원 집에 들러서 양복까지 가져왔으니 청와대로 같이 갑시다”라고 했다. 그는 金載圭의 차를 타고 가서 오랜만에 朴 대통령을 만났다. 朴 대통령은 약 40분 동안 3選개헌案에 가표를 던져 줄 것을 설득했다.
  
  朴 대통령은 金 의원에게 공화당 內의 개헌 반대자들도 돌려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金龍泰는 오히려 대통령을 돌려놓으려 했다.
  
  “내가 자네한테 설득을 당하고 있군. 金 의원 어때? 지금까지 벌여 놓은 일들을 마무리하는 데까지만 시간을 얻을 수 없을까. 저질러 놓은 일들이나 끝내고 학교로 돌아가 평생을 보내고 싶어. 우리 집사람도 자네와 똑같은 이야기만 하는데 사무실만 나오면 딴판이란 말일세.”
  
  朴 대통령은 金 의원과의 과거 인연을 꺼내 압박했다.
  
  “자네와 나는 혁명에 목숨을 걸었던 사이가 아닌가. 나의 결심이 오판이라고 생각하더라도 나를 좀 도와주게!”
  
  결국 金 의원은 굴복했다. 그는 공화당에 남아 있는 개헌반대 의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달라고 건의했을 뿐이었다.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에 공화당이 국회 제3별관에서 3選개헌案을 통과시킬 때 가표를 던진 의원들은 공화당 106명, 정우회 11명, 신민당에서 넘어온 3명, 그리고 金龍泰 의원 등 무소속 4명을 합쳐 총 124명이었다.
  
  이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金 의원은 아무리 朴 대통령이 후계자를 추천하라고 해도 입을 뗄 수 없었다. 朴 대통령은 담배를 연거푸 피우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金 의원은 대통령의 침묵에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속으로는 ‘내가 말한다고 해서 이 나라 역사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라고 생각하면서 입을 뗐다.
  
  “각하, 저의 뜻과 함께 시중의 여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각하의 후계자가 되실 분은 金鍾泌 공화당 부총재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각하께서 3選개헌 전에 부총재로 임명해 놓으셨기 때문에 국민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 대답하는 데 그렇게도 시간을 끈단 말인가.”
  
  “섣불리 말씀드렸다가는 제 목이 온전하지 못할 것 아니겠습니까.”
  
  “두목에 어울리지 않게 겁쟁이군.”
  
  “각하, 그렇습니다. 저는 겁쟁입니다.”
  
  “종필이… 글쎄, 다재다능은 하지만 신중하지 못해. 人和(인화)도 문제야. 吉在號(길재호)도 자기가 추천해 놓고는 요사이 犬猿之間(견원지간)이라고 해. 人和 없이는 막중한 일을 못해! 趙炳玉(조병옥) 같은 분도 軍政(군정) 때 경무부장을 했다고 해서 對人(대인)관계가 나빠졌대요. 종필이는 정보부장을 하는 동안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진 게 흠이란 말이야.”
  
  이때 충북으로 떠날 시간이 되었다는 기별이 들어왔다.
  
  “金成坤이한테 똑바로 전하쇼”
  1971년 5월 25일.
  
  이날 치러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약진했다. 지역구에서 공화당 86석, 신민당 63석, 국민당과 민중당이 1석씩. 전국구 의원들을 합치면 공화당 113석, 신민당 89석이었다. 공화당 창당을 주도해 왔던 金鍾泌계의 舊(구)주류는 크게 약화되었다. 金成坤(김성곤)으로 대표되는 5·16 이전의 소위 舊정치인들과 그들과 손잡은 吉在號 같은 혁명주체들이 공화당의 주도권을 잡은 것처럼 보였다. 이 新(신)주류는 흔히 ‘4人 체제’라고 불렸다. 당의장 白南檍(백남억), 재정위원장 金成坤, 사무총장 吉在號, 원내총무를 지낸 金振晩(김진만)이 당을 끌고갔는데, 특히 金成坤의 지도력이 강했다.
  
  이 4人 체제는 朴正熙를 위해 총대를 메고 3選개헌을 성공시켰고, 1971년에 들어서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주도하면서 더욱 영향력이 커졌다. 朴 대통령도 자신의 당선과 공화당의 승리를 위해서는 이들이 요구하는 人事(인사)·공천·청탁을 거절할 수 없는 처지였다. 朴 대통령은 당연히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마땅하지만 권력자의 심리는 그렇게 단순할 수 없었다.
  
  깔끔하고 소박한 朴 대통령과 4人 체제로 상징되는 舊정치인들은 생래적으로 맞지 않은 면이 있었다. 朴 대통령은 돈과 이권이 오고 가는 與野(여야) 정치인들의 밤낮이 다른 모습에 대한 정보보고를 받을 때마다 이를 이용하고 허용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해 자존심이 상했다.
  
  더구나 金成坤은 4년 후를 겨냥하여 내각제 개헌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폭넓은 인간관계와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하여 언론계와 야당에도 인맥을 구축해 놓았다. ‘이 따위 놈의 선거는 그만해야 돼’라고 생각하고 있던 朴 대통령에게는 이런 金成坤의 야망이 방해물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고려를 반영한 대통령의 人事가 1971년 6월의 金鍾泌 국무총리 기용이었다. 내무장관은 吳致成(오치성). 吳장관은 취임하자마자 지사, 치안국 간부, 시장, 군수, 경찰서장에 대한 대폭적인 교체와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선거에 큰 역할을 하는 이런 요직의 인사 때는 공화당의 4人 체제와 협의를 거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당시 요직에는 두 차례 선거를 위해서 공화당 실력자들이 천거한 인물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이들을 물갈이한 것이다. 吳 장관은 물론 朴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서 했다. 그는 내무부의 고위 공무원과 특히 경찰간부들이 어떻게 공화당, 특히 4人체제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조사하여 朴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철저하게 조사하여 시정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지침을 미리 받았던 것이다.
  
  金成坤, 吉在號는 이것이 吳 장관의 독단이든지 金鍾泌 총리의 보복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공화당 主流(주류)를 대표하는 이 두 사람은 朴 대통령이 자신들을 거세하려고 吳 장관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여기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감을 느꼈을 것이다.
  
  1971년 7월 29일.
  
  朴 대통령은 林大地(임대지) 총무비서관을 집무실로 불렀다. 朴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의 사진 얘기를 꺼냈다.
  
  “총리실이나 장관실에 가보면 집무실에 역대 전직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는데 왜 청와대에는 없지?”
  
  “尹潽善 씨도 아직 살아 있는데 걸어 놔서 뭐 하겠습니까?”
  
  “그런 정신으로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거야. 밤낮 우리가 선거 때의 기분만 갖고 사나. 역대 대통령 사진을 모시는 것은 우리나라 관습상 예의야. 총무비서는 역대 대통령 사진들을 액자에 정중히 넣어서 내 서재에 갖다 모시시오!”
  
  朴 대통령은 몹시 화가 나 있었고, 목소리 또한 높았다. 그날 총무비서관은 역대 대통령의 사진들을 구하느라 여러 곳을 뛰어다녀야 했고, 액자도 청와대 마크가 들어간 것으로 만들어 청와대 집무실에 걸어 놓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 사진은 朴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그대로 걸려 있었다. 尹潽善 前 대통령이 명동시국선언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을 때도….
  
  1971년 8월 5일.
  
  朴 대통령은 을지연습 종합강평 때 이런 요지의 유시를 했다.
  
  <敵(적)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당했을 때를 한번 가상해 보자. 敵은 全(전)휴전선에 걸쳐서 일제히 공격할 것이며, 동시에 그 시간을 전후해서 동·서해안으로 敵이 기습 상륙할 것이다. 또한 敵은 공수부대를 우리의 후방 깊숙이 대량으로 공중투하할 것이다.
  
  만약에 앞으로 공산당이 우리 대한민국에 지하조직을 가지게 된다면, 이러한 조직이 敵의 기습에 호응해서 일제히 도처에서 일어날 것이다.
  
  동시에 敵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군 세력으로 공중공격을 해올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행동이 거의 같은 시간에 기습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어떠한 대응책을 강구할 수 있겠는가. 제일 먼저 움직이는 것은 역시 軍일 것이다.
  
  다음에는 정부가 즉각 계엄령을 선포한다든지 동원령을 하달한다든지 戰時(전시) 국가지도회의를 소집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충무계획에 따라서 하나하나 대응조치를 취해 나갈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국민들은 초기에 반드시 상당한 불안과 공포에 싸여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측해야 할 것이다.
  
  초기에 우리 軍이 신속 과감한 행동으로 敵의 침투를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고, 또한 정부가 침착하고 자신 있는 행동으로 사전계획에 따라서 하나하나 잘 처리해 나가게 될 때, 처음에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던 국민들도 점차 냉정을 되찾게 될 것이고,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서 신뢰감을 가지게 될 것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과 공포감은 오히려 敵에 대한 적개심으로 변해서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 자진해서 적극 협력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초기 대응책이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이 전쟁은 우리가 충분히 버티고 나갈 수 있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朴正熙가 그리고 있는 전쟁의 모습은 입체적이다. 이런 그림을 항상 머리에 넣어 두고 金日成을 상대한 사람이 그였다.
  
  공화당의 지휘부를 장악하고 있던 4인 체제는 金鍾泌 총리와 吳致成 내무장관의 인사에 불만을 갖고 있다가 야당인 신민당이 金鶴烈(김학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申稙秀(신직수) 법무장관, 吳致成 내무장관에 대한 해임결의안을 내자 직계 공화당 의원들로 하여금 吳 장관 해임에 찬성하도록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朴 대통령은 공화당 內의 이런 움직임을 보고받고는 白南檍(백남억) 공화당 의장에게 집안단속을 지시하는 한편 金成坤에게도 간접적으로 뜻을 전했다. 9월 말 같이 골프를 친 사람들과 술을 함께 하던 朴 대통령은 건설기업인 趙奉九(조봉구)가 선약이 있다면서 미리 일어서자 이렇게 말했다.
  
  “趙 회장, 그 자리에 金成坤이도 나온다고 했죠? 金成坤이한테 똑바로 전하쇼. 吳致成이 같은 어린애 문제를 가지고 계속 덤빈다면 혼날 줄 알라고. 똑바로 전해야 돼요.”
  
  朴 대통령이 이 정도로 반대한다면 李厚洛 정보부장이 움직여 간단하게 당내 반란을 저지할 수 있었다. 李厚洛은 걱정하는 金在淳(김재순) 공화당 원내총무에게 “부결될 것이니 걱정 말라”고만 하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朴 대통령도 반란 지도부 인사인 金成坤, 吉在號를 직접 불러 말릴 수 있었을 터인데 간접적으로 뜻을 전할 뿐이었다.
  
  이런 가운데 金, 吉 두 사람은 나름대로의 논리를 만들어 자신들과 계파 의원들을 설득했다.
  
  “우리가 吳 장관 해임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각하를 돕는 일이다. 吳 장관에 대해서는 각하도 이미 능력의 한계를 알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당도 살고 국회도 산다.”
  
  吉在號는 혁명동지이자 육사 8기 동기인 吳致成과는 거의 원수지간이었다. 그는 朴 대통령이 자신들의 반란을 추인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지만 金成坤은 그 정도로 확신에 차 있지는 않았다. 다만, 그동안 자신이 朴 대통령에게 충성한 것을 감안한다면 사태를 이렇게 방치하면서 자신을 부르지도 않고 간접적인 경고만 보내는 대통령이 못내 섭섭하기는 했으리라.
  
  최근 金鍾泌은 기자에게 해임결의안 표결이 있기 직전에 金成坤 의원 집을 찾아가 朴 대통령의 강력한 뜻을 전하면서 야당에 동조하지 않도록 말렸다고 회고했다. 金 총리는, 5·16 혁명 뒤 군사정부가 金成坤 의원의 6·25 때 행적을 알고도 덮어 준 것까지 상기시키면서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때는 金成坤이 돌아설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일을 저질러 놓고 朴 대통령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대통령에게 당하는 것이 자신을 믿고 따랐던 의원들로부터 욕을 먹는 것보다 낫다는 판단을 한 듯하다. 朴 대통령은 이런 일로 金 의원에게 부탁하기 싫고, 金 의원은 이런 일로 자존심을 굽히기 싫고, 배짱이 센 두 사람은 일종의 자존심 대결을 벌인 셈인데, 그런 승부는 동원 가능한 권력의 크기에 의해서 결정된다.
  
  1971년 10월 2일.
  
  이날 새벽 白南檍 의장은 아무래도 불안했다. 吳 장관 해임결의안이 공화당 의원들의 반란에 의해 통과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그는 이른 아침에 청와대로 대통령을 찾아갔다.
  
  “이 시간에 웬일입니까.”
  
  “각하, 확증이 있는 건 아닙니다만 吳 내무 해임안은 가결될 것 같습니다. 표결을 하루쯤 연기하면 어떨까 해서….”
  
  “그래요? 원내총무 보고로는 부결될 거라던데. 내 전투경험으로 보면 지휘관은 일단 정한 대로 밀고나가야 합니다.”
  
  반란의 실무 지휘자 중 한 사람이던 康誠元도 이날 아침 불안해서 吉在號 사무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사에 앞서서 지휘관의 의지를 再확인하고 싶었다.
  
  “여보 康 의원도 날 못 믿소? 吉在號가 언제 당신 속입디까? 이렇게 하는 것이 대통령을 돕는 일이란 것을 康 의원도 잘 알고 있지 않소?”
  
  공화당 의원총회장으로 가면서 白南檍 의장은 金成坤에게 말했다.
  
  “이 사람아, 지금 각하께 보고하고 나오는 길일세. 생각 고치지 않으면 다치겠네.”
  
  金成坤은 낮은 목소리로 “吉在號를 만났느냐”고 물었다. 金成坤은 金在淳 총무한테도 吉 총장을 만나 설득해 달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吉在號 총장은 약간 흥분해 있었다고 한다.
  
  “이제 와서 어쩌자는 겁니까.”
  
  白南檍·金在淳이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해임안을 부결시켜 달라고 호소했다. 白 의장은 朴 대통령의 지시를 다시 옮기면서 “각하께서 복안이 있다고 하셨으니 전원 부표를 던져 달라”고 말했으나 반응이 냉담했다. 金成坤도 뒤늦게 吉在號·金昌槿(김창근)을 따로 불러내 “白 의장이 총재를 만난 모양이던데… 의장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라고 했더니 吉 총장은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날 본회의에서 金鶴烈 부총리, 申稙秀 법무장관에 대한 신민당의 해임안은 부결되었으나 吳 내무에 대한 해임안은 공화당 의원 20여 명의 이탈로 해서 가결되었다(可 107표, 否 90표, 무효 6표).
  
  金正濂 비서실장이 朴 대통령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뭐 통과라구? 몇 표래?”
  
  그러고는 말 없이 외면해 버렸다. 金 실장이 나간 뒤 朴 대통령은 공화당 의장실로 전화를 걸었다. 白 의장이 “각하, 뵐 면목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白 의장, 철저히 조사하시오! 조사를 해가지고 吉在號고 누구고 다 처벌토록 하시오!”
  
  白의장이 미처 대꾸도 하기 전에 전화가 끊기더니 다시 전화가 왔다. 朴 대통령이었다.
  
  “金成坤도 빼지 말아!”
  
  이날 밤 金成坤·吉在號·康誠元 등 공화당 의원 30여 명이 정보부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들은 수사관들에게 얻어맞고 갖은 모욕을 당했다. 반란의 두 지휘관 金成坤·吉在號는 자진탈당 형식으로 의원직을 사퇴했다.
  
  약 7년간 朴 정권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하면서 金鍾泌 견제, 3選개헌, 朴 대통령 당선을 가능케 했던 4인 체제는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무너져 버렸다. 이와 함께 포스트朴을 꿈꾸면서 내각제 개헌을 준비했던 여당 內 세력도 제거되었다.
  
  그 1년 뒤 朴 대통령이 제2의 쿠데타를 일으키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었던 한 세력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또 다른 독자세력인 金鍾泌은 이미 국무총리로서 유신 쿠데타로 가는 길의 동행자가 되어 있었다. 朴 대통령이 그를 국무총리로 기용한 데는 유신정변에서 결백을 주장할 수 없는, 일종의 공범자로 만들려고 한 속셈도 있었을 것이다.
  
  한때 朴正熙 이후의 대권까지 생각했던 金成坤은 정계를 떠난 뒤 한 측근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속았어. 그리고 내가 朴 대통령이 원래 그런 사람인 줄 알았으면서도 오판을 했어.”
  
  ‘원래 그런 사람’이란 말은 朴 대통령이 결코 부하들의 반대에 몰려서 할 수 없다는 듯이 吳 장관을 자르는 식으로 장난을 칠 인물이 아닌데 그렇게 밀어붙이다가 당했다는 뜻이다. ‘속았어’란 말은 자신에게 한 말인지, 누군가가 함정을 파놓고 기다렸다는 뜻인지 알 수 없다.
  
  
  
[ 2009-03-30, 23:1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