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두번째 쿠데타
연재 47/1972년 10월17일 유신선포의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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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감독 같은 대통령
  
  
  
  1972년 6월 20일.
  
  이날 하곡수매에 관한 지방장관 회의에 참석한 朴 대통령은 내무부 지방국장이 砂防(사방) 사업과 造林(조림) 사업에 대해 현장 슬라이드로 보고할 때 일문일답을 하는데 토목공사장의 현장감독 같은 날카로운 지적이 계속된다.
  
  <朴: “저 슬라이드 한 장 넘겨 보시오. 내가 조금 서라고 하면 서고, 불 좀 끄고, 가만있어, 넘기라면 넘기고. 이건 서울에서 춘천 가는 도중에 어디를 찍은 모양인데, 저런 상태를 두고 우리가 금수강산이니 무어니 하고 누구한테 큰 소리를 치고 자랑을 합니까? 그 다음 넘겨요. 저 곳은 업자가 공사하느라고 파갔는지 전국에 가면 도처에 저런 상태요.”
  
  국장: “이것은 그 자리를 바로 손질해 놓은 것입니다.”
  
  朴: “저 꼭대기는 다른 방법으로 해야지 만일 비가 와서 저곳이 와르르 무너지면 밑에까지 다 내려오지 않겠어요. 또 다음. 이곳은 뒤의 암석을 그대로 살렸는데…. 밑에는 자연석을 맞추어서 상당히 튼튼하게 됐는데, 다음. 암석이 떨어져서 내려오지 않을까? 저런 데는 좋은 나무를 심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아카시아 같은 것을 심어서 자꾸 뻗어나가게 해서 덮고 사이 사이로 바위가 노출되도록 하면 튼튼해지지 않을까?”(下略)>
  
  朴 대통령은 경제·국방뿐 아니라 造林, 造景, 토목공사 등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수준의 안목을 갖고 있었다. 그가 토목공사나 도시계획 및 造景 등에 대해서 스케치로 남긴 여러 도면들을 보면 사물을 입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朴 대통령은 상황이나 사물의 핵심을 한눈에 잡아낼 수 있는 동물적인 능력의 소유자였다.
  
  朴 대통령은 헬리콥터로 전국을 돌아보면서 지도와 현장을 대조하는 것을 즐겼다. 장교 시절부터 ‘讀圖法(독도법)’에 능했던 朴 대통령은 1970년대에 들어가면 전국의 큰 나무 한 그루까지 안다고 할 정도로 국토에 대해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가끔 하늘에서 내려다본 국토를 “내가 그린 그림을 보는 것 같아”라고 말하기도 했다.
  
  國政(국정)과 국토개발의 세부 사항에 대한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파악능력에 있어서 朴 대통령은 당대의 한국인들 중 단연 1위였다고 할 수 있다. 李承晩 대통령도 그렇지만 朴 대통령의 경우에는 한국인들 중 가장 두뇌가 우수하고 비전과 열정이 가장 뜨거웠던 사람이 권력자가 된 경우이다. 대한민국의 기적적 발전의 결정적 요인은 두 천재형 지도자의 연속(30년) 등장이 아닐까.
  
  1972년 7월 1일.
  
  저녁 9시45분 당직 비서실로 내려온 朴 대통령은 당직자와 한참 동안 얘기했다.
  
  “송요찬 씨가 신병 치료차 일본 갈 적에 모든 편의를 봐주었지. 본인이 희망해서 군의관과 간호원을 따라 보냈어. 그 뒤 송 씨가 星友會(성우회)에 들러 이 사실을 장군들에게 전하면서 나의 은덕이 어떻다느니 하며 한참이나 칭찬을 했다고 하더군.
  
  이때 동석했던 다른 장성들은 송 씨가 간 다음에 ‘지난 날에는 대통령을 배신하더니 지금은 저렇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한다’고 빈정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어.
  
  10년 전에 많은 사람들과 혁명을 같이 했는데 거의 모두가 도중에 흔들리거나 탈락해 버렸어.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은 洪鍾哲과 李錫濟인 것 같아. 혁명을 같이 한 그 사람들이 나와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면 내게 충고를 해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자기들 말을 듣지 않자 의견이 다르다면서 한마디 말도 없이 내 곁을 떠나는 것처럼 섭섭한 일은 없어.”
  
  당직 비서관은 이렇게 말했다.
  
  “한 번 뜻을 같이 했으면 윗분이 잘못된 길을 걸으시더라도 몇 번 되풀이해서 충고 말씀을 드리고, 그래도 달라지지 않을 경우에는 윗분과 헤어질 것이 아니라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도 윗분을 따라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동양적 사고방식에서 말하는 의리인데, 요즘에는 그런 생각들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 우리 국민의 도덕률에 대해서 회의감마저 가지게 되더군. 나는 10년 정치에서 그러한 경우를 당할 때마다 그런 것이려니, 하고 체념하게 되었어”
  
  朴 대통령의 표정은 쓸쓸하게 보였다.
  
  1972년 7·4 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난 뒤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고 있던 어느 날. 북한 대표가 서울에 오기로 결정된 뒤, 박 대통령은 柳赫仁 비서 등과 함께 식사를 했다.
  
  “서북청년회 사람들은 때리는 것도 잘하잖아. 왜,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에게 얘기해서 달걀 좀 던지라고 해요. 국민들이 반대하는 사건도 있어야 회담이 잘 되는 거야.”
  
  영락교회 신도들은 북한의 적십자회담 대표가 서울에 올 때 던지기 위해 달걀까지 준비를 했었는데, 이것을 정보부가 알고 사전에 막아 버려 실제로 달걀 던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다음 자료는 1972년 7·4 공동성명 직후 朴正熙 대통령이 軍 지휘관들에게 보낸 친서의 주요 부분이다. 朴 대통령은 남북대화 무드 속에서 국군 지휘부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를 강조하여 설명하고 있다. 남북 무장대치상황에서 전개되는 오늘날의 대화 속에서 국군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지에 대한 하나의 示唆가 될 것 같다.
  
  <(前略)이제 ‘대화 있는 대결’로 접어드는 이 시점에서 나는 국토방위의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는 軍 지휘관 여러분에게 다음 몇 가지 사항을 특별히 강조하고자 합니다.
  
  1. 북한 공산주의자들과의 대결에 있어서 이제부터 시작되는 ‘대화 있는 대결’은 어느 의미에서는 지금까지의 ‘대화 없는 대결’보다도 오히려 더 복잡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새로운 시련에 직면하는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확고한 자신을 가지고 민족적 자각을 바탕으로 더욱 굳게 단결해야 하겠습니다.
  
  만의 일이라도 ‘대화’가 곧 ‘평화’나 ‘통일’을 가져오는 것으로 착각하여, 동요하거나 안이한 생각에 사로잡히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아니되겠습니다. 자신과 자각과 단결로써 결집된 국민의 힘이 정부를 강력히 뒷받침해 주어야만 할 때인 것입니다.
  
  2. ‘남북공동성명’의 발표가 우리 대한민국의 유일 합법적 정통성과 국가 기본 정책 등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더욱이 이 성명이 북한 공산집단을 합법정권으로 인정한 것은 결코 아니며 ‘유엔 감시下에 토착인구 비례에 의한 총선거’라는 우리의 통일정책 기조가 바뀐 것도 아니고, 그들을 비방·중상하지 않는다고 해서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우리의 정책에 하등의 변경이 있는 것도 아님을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3.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통일노력의 성과에 대하여 조급하게 서두르거나 환상적인 기대를 갖는 것은 삼가야 하겠습니다. 공동성명의 발표는 대화를 모색하는 첫 단계에 불과하며, 그 성과 여하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과연 그들이 약속한 바를 성의 있게 행동으로 옮기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동태에 더욱 큰 경계를 견지하면서 각기 자기가 맡은 임무에 충실하여 내실을 강화함으로써 국력배양에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고 해서 국군의 감축이나 유엔군 철수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유엔군의 한국 주둔은 우리나라의 안전보장을 돕기 위해서 아직도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무력행사의 포기를 말만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실증할 때까지는 유엔군 철수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5. 이런 때일수록 軍 지휘관 여러분은 더욱 긴장하여 막하 장병과 더불어 對共(대공) 경계를 철저히 할 것이며, 국방력 강화에 일각의 소홀도 있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항상 우리의 허점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우리의 방위태세에 만전을 기해 줄 것을 거듭 당부하는 바입니다>
  
  1972년 10월 16일.
  
  이날 오후 6시. 金鍾泌 국무총리는 필립 하비브 駐韓 미국대사에게 다음날 朴 대통령이 발표할 비상조치의 내용을 통보했다(같은 통보는 駐韓 일본대사에게도 이뤄졌다). 金총리는 이 내용을 앞으로 24시간 비밀에 부쳐줄 것을 요청했다. 하비브는 수 시간 뒤 美 국무성으로 긴급電文(전문)을 보냈다.
  
  <이 비상조치는 朴 대통령에게 적어도 12년을 더 현직에 머물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이 기간 중 반대와 불만은 더욱 약화될 것이다. 만약 이 조치가 시행된다면 한국은 완전한 권위주의 정부로 변모할 것이다. 朴 정권이 북한과 대화하는 데 국내기반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조치를 정당화할 수 있는 객관적인 조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돈 오버도퍼 前 <워싱턴 포스트> 기자가 쓴 《두 개의 한국》이란 책에는 하비브 대사가 대사관 측이 朴 대통령의 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미리 얻지 못한 데 대하여 화가 났었다고 썼다. 그는 朴 대통령이 비상조치의 발표일을 잡은 것도 미국을 바보로 만들기 딱 좋게 한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 3주 전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헌정질서를 중단시켰지만 미국은 개입할 수 없었다. 마르코스와 朴正熙는 닉슨 대통령이 再選(재선)을 노리고 선거전에 돌입해 있는 시점을 잡았다. 닉슨은 베트남戰 휴전협상에 골몰하고 있을 때였다. 닉슨은 선거전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는데 마르코스나 朴 대통령의 비상조치에 공개적으로 개입하여 말썽거리를 만들 여유가 없었다.
  
  하비브는 電文에서 “가장 강경하고 즉각적인 조치만이 朴 대통령의 예정된 비상조치를 막을 수 있지만 다음 몇 시간 안에 그런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 미국 정부의 의무는 아니다. 그렇지만 朴 대통령은 이번 조치로써 그와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큰 문제를 일으킨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이번 조치에 대해서 논평할 때는 한국의 국내문제에 대해서 무관함을 명백히 하면서도 극히 우회적 표현을 해야 할 것이다”고 건의했다.
  
  美 국무부는 하비브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 대신 朴 대통령에게는 다음과 같이 항의하도록 훈령했다.
  
  <한국 정부가 이처럼 장기적으로 큰 영향을 끼칠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미국 정부와 의견 교환을 하지 않은 것은 미국이 역대 한국 정부, 특히 現 정부에게 제공했던 지원과 희생을 생각할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美 국무부는 또 하비브에게 지시했다.
  
  <만약 귀하가 ‘미국은 계엄령 선포에 반대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이것은 국내문제이므로 결정권은 朴 대통령에게 있다”고 답하라>
  
  美 국무부는 비상조치에 즈음한 朴 대통령의 성명서가 美中 화해와 이에서 비롯된 국제정세의 流動化(유동화)를 비상조치의 한 이유로 지적하고 있는 데 대해서 크게 우려했다. 윌리엄 로저스 국무장관은 金東祚(김동조) 駐美 한국대사에게 항의하여 이 대목을 빼도록 요청했다.
  
  당시 미국 CIA 지부장은 존 리처드슨이었다. 그는 1969년에 부임하여 1973년까지 근무하면서 3選개헌, 대통령 선거, 남북회담, 유신선포를 경험했다. 부임할 때 그는 이미 56세였다. 대머리인 그는 허리가 구부정하여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이미 CIA의 전신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전략정보국)에 몸담았던 베테랑 정보맨이었다. CIA 부장을 지낸 윌리엄 콜비, 리처드 헬름즈와는 친구 사이였다. 그는 그리스 정보기관을 조직, 훈련시켜 주고 자금을 대주는 일에 관여했다. 리처드슨은 1960년대 초반 사이공 주재 CIA 지부장을 지냈다.
  
  그는 고딘 디엠 대통령뿐 아니라 그의 동생으로서 정보기관장이던 고딘 누와 친했고 反고딘 디엠 장성 그룹과도 연락관을 두고 있었다. 당시 미국대사인 헨리 캐보트 롯지가 고딘 디엠 제거 공작을 시작하자 리처드슨은 이에 반대하다가 롯지의 요구로 본국에 소환되었다.
  
  미국이 불만에 찬 장성들을 지원하여 일으킨 고딘 디엠 제거 쿠데타는 고딘 디엠과 동생 고딘 누의 피살을 불렀고 베트남의 지도력 不在(부재)를 초래하여 미국이 베트남戰에서 패배하는 원인을 만들었다.
  
  리처드슨 지부장은 하비브 대사의 주장과는 달리 李厚洛 정보부장이 지휘하던 유신 준비작업을 미리 알았음이 확실하다. 朴 대통령, 李厚洛, 그리고 한 軍 정보기관장이 청와대에서 만나 비상조치에 대한 협의를 한 며칠 뒤 리처드슨 지부장은 軍 정보기관장을 만나러 왔는데, 토의내용을 알고 있는 것처럼 물었다고 한다.
  
  李厚洛 정보부장은 鄭洪鎭과 자신이 판문점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갈 때 리처드슨을 통하여 미리 美 CIA에 통보하여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1950년대 駐美 대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할 때부터 미국 정보기관과 친했고, 자신의 출세에 있어서 그쪽으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던 李 부장이 리처드슨 지부장을 바보로 만드는 보안작전을 쓴 것 같지는 않다.
  
  金炯旭 前 정보부장은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있으면서 리처드슨 지부장과 자주 만났다. 리처드슨은 끈질기게 “朴 대통령은 결국 총통제를 강행할 것으로 보는가”라고 물었다. 그 며칠 뒤 李厚洛 부장이 부하를 金炯旭에게 보내 “왜 총통제 이야기를 발설하고 다니느냐”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리처드슨은 李 부장에게 金炯旭의 이름을 인용했던 것 같다(김형욱 회고록).
  
  하비브가 유신조치에 대해서 하루 전까지도 몰랐다고 말한 것은 공식통보를 받지 못했다는 의미일 뿐이다.
  
  1972년 10월 17일.
  
  이날 아침 朴 대통령은 崔圭夏·朴振煥 등 특별보좌관들을 서재로 불러 저녁에 발표될 비상조치 발표문을 읽고 있었다. 李厚洛 부장이 들어오더니 “미국대사관에서 발표문 중 ‘미국과 중공의 접근’이 이번 조치의 한 원인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삭제해 달라고 부탁합니다”라고 보고했다.
  
  “내가 뭐 거짓말했나? 미국놈들이 안 그랬으면 내가 뭐 답답해서….”
  
  金正濂 비서실장도 “각하, 그 대목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래, 빼줘!”
  
  좀 있으니 일본대사관에서도 비슷한 주문이 들어왔다. 朴 대통령은 “그것도 빼줘!”라고 말하더니 “호네누키노곤냐쿠다”(뼈가 없는 곤냐쿠다. 곤냐쿠는 구약나물의 지하뿌리를 반죽한 다음 끓는 석회유와 섞은 뒤 물에 넣어 익힌 식품)라고 중얼거렸다.
  
  유신선포로 알려진 1972년 10월 17일의 대통령 특별선언은 비상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정을 중단시키고, 국회를 해산하며,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열흘 이내에 새 헌법안을 공고하며, 그 한 달 이내에 이를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이날 朴 정권은 전국 비상계엄도 선포했다. 며칠 뒤 새 헌법안도 계엄下에서 찬반토론이 금지된 가운데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이는 사실상의 쿠데타였다.
  
  나는 入社 2년짜리 기자로서 이 뉴스에 접했을 때 그야말로 느닷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요사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북한군이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갑자기 국회 해산이라니….
  
  5·16 군사혁명은 尹潽善 대통령마저 “올 것이 왔구나”라고 할 정도였고, 서울 시민의 과반수가 혁명을 지지한 것으로 여론조사가 나올 정도로 외부의 혼란이 무르익은 가운데서 일어났었다. 10월유신은 그런 가시적인 요인이 전혀 감지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행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 이건 朴正熙의 독재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유신에 대한 이런 선입견이 그 후 7년간 朴 정권을 따라다녔다.
  
  이날 朴 대통령이 읽은 특별선언문에도 왜 이런 엄청난 조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었다.
  
  진행 중이던 남북대화에 대비한 한국의 체제 정비 필요성, 파쟁을 일삼는 정당과 국회에 대한 불신, 한반도 주변정세의 변화만으로는 헌정중단의 당위성을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朴 대통령의 다른 연설과 비교해서 이 연설은 내용상 힘이 없었다. 다만, 끝 부분의 한 줄이 그의 비장한 각오를 드러낼 정도였다.
  
  <나 개인은 조국통일과 민족중흥의 제단 위에 이미 모든 것을 바친 지 오래입니다>
  
  이날 정부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사령관은 盧載鉉(노재현) 육군참모총장. 그 직후 朴 대통령은 육군보안사령관 姜昌成(강창성) 소장을 불렀다. 朴 대통령은 “이 친구들을 잡아 넣고 철저히 조사해”라면서 명단을 건네주었다. 李世圭, 趙尹衡, 趙淵夏, 李鍾南, 姜根鎬, 崔炯佑, 朴鍾律, 金漢洙, 金祿永, 金敬仁, 羅碩昊, 金相賢, 洪英基, 尹吉重, 李基澤, 朴漢相, 金東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姜昌成은 “朴 대통령이 한 사람씩 짚어가며 문제점과 비리를 이야기했다. 나는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 다시 청와대로 들어가 尹吉重, 李基澤, 朴漢相, 金東英, 金相賢, 趙尹衡, 李世圭는 온건하니 제외해 주십시오”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朴 대통령은 “李世圭하고 趙尹衡은 절대로 안 돼”라고 잘랐다. 金相賢은 그대로 넘어갔다가 한 달 후 유신비판 발언으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군부대로 끌려가서 혹독한 고문을 받은 이 야당의원들은 주로 金泳三·金大中의 측근이었거나 朴 대통령과 직접 관련되는 문제를 국회에서 폭로한 이들이었다. 비리혐의라고 했지만 朴正熙의 私感(사감)이 많이 개재된 수사지시였다. 수사관들은 “金大中의 자금출처와 조직계보를 대라”는 식으로 다그쳤다.
  
  이때 일본에 나가 있던 金大中은 국내로부터 들어온 정보를, 자기 수첩의 1972년 12월 19일자 난에다가 이렇게 적었다.
  
  <金相賢-너무 아파서 만 원까지도 자백. 나의 정치 자금 캐는 것. 안방까지, 부의금 명단. 운전사 고문.
  
  趙윤형 태도 의연: 나에게 격려. 玉斗-제일 强, 李泰九 씨 全裸 고문>
  
  1972년 10월 21일.
  
  朴 대통령은 사이공에서 귀임한 하비브 駐韓 미국대사를 면담했다. 하비브 대사는 사이공에 가서, 베트남 휴전案(안)을 가지고 와 베트남의 티우 정부를 설득하고 있던 키신저를 만나고 온 뒤였다. 하비브는 朴 대통령에게 막바지에 접어든 베트남 휴전회담의 진전 상황을 보고했다. 이야기를 심각하게 듣고 있던 朴 대통령은 이런 요지의 우려를 표명했다.
  
  “휴전案에 침략자인 월맹군의 철수는 규정하지 않고 외국군의 철수만 규정한 것은 불공평하다. 월맹과 베트콩과 베트남을 묶는 연립정부案의 성격이 애매하다. 국제감시에 대한 규정도 불안전하다. 따라서 이 案은 공산당의 침략을 법적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되어 베트남 정부를 약화시키고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이고, 티우 대통령이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공산당에 대해서는 강한 힘만이 그들로 하여금 약속을 지키게 할 수 있다. 만약 이 案대로 휴전이 이뤄지면 베트남은 1년도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다.”
  
  1972년 10월 23일.
  
  駐베트남 한국대사 柳陽洙(유양수)는 본국의 훈령으로 일시 귀국하여 일차로 朴 대통령에게 베트남 휴전협상 건을 보고 올렸었다. 이날 새벽 金正濂 비서실장으로부터 柳 대사에게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전갈이 왔다. 오전 9시 대통령 집무실에서 朴 대통령은 하비브로부터 통보받은 휴전案을 柳 대사에게 보여주면서 자신의 걱정을 티우 대통령에게 전달할 것을 지시했다. 柳 대사는 朴 대통령이 하비브로부터 받은 휴전案이 자신이 그 며칠 전에 朴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첩보 내용과 너무 달라 송구스럽기 짝이 없었다.
  
  유신선포 7일째인 朴 대통령은 무척 수척해 보였다. 그는 연신 담배를 피워 가면서 두 시간 반 동안이나 걱정과 다짐이 오고가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민주주의도 좋고 자유도 다 좋지만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미국의 국론이 저렇게 분열되어 수습을 못 한다면 미국에 대한 자유세계의 신뢰는 떨어질 것이다. 우리는 결코 안보를 미국에만 의존해선 안 된다. 베트남을 보라! 자주국방을 하려면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선 국력의 낭비를 막아야 한다. 효율의 극대화, 국력의 조직화가 유신선포를 한 이유이다.”
  
  朴 대통령은 자기 말에 취해서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다. 朴 대통령의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柳 대사가 대통령 집무실을 나올 때 보니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1972년 10월 27일.
  
  이날 朴 대통령이 발표한 ‘헌법개정안 공고에 즈음한 특별담화문’은 유신선포를 만들어낸 자신의 정치 철학을 당당하게 밝힌다.
  
  <남의 민주주의를 모방만 하기 위하여 귀중한 우리의 국력을 부질없이 소모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몸에 알맞게 옷을 맞추어서 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 가장 알맞은 국적 있는 민주주의적 정치 제도를 창조적으로 발전시켜서 신념을 갖고 운영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헌법 개정안은, 능률을 극대화하여 국력을 조직화하고 안정과 번영의 기조를 굳게 다져나감으로써 민주주의 제도를 우리에게 가장 알맞게 토착화시킬 수 있는 올바른 규범임을 확신합니다>
  
  朴 대통령은 이날 담화문에서 유신체제라고 불리게 될 새 제도를 ‘능률적인 민주적 정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날 국무회의는 사실상의 쿠데타인 이번 조치를 ‘10월유신으로 개념화하여 모든 유신작업을 진행할 것’을 의결했다. 崔圭夏가 座長(좌장)으로 있던 특별보좌관 일동이 그렇게 건의했던 것이다.
  
  이 作名(작명)에 주로 관계했던 분은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했던 철학자 朴鍾鴻(박종홍)·林芳鉉(임방현) 두 특보였다. 중국의 고전인 詩經(시경)에 나오는 ‘周雖舊邦(주수구방)이나 其命維新(기명유신)이라’는 문구(周나라는 오래된 나라이나 국정혁신으로 그 생명력이 새롭다)에서 ‘維新’, 또 공자가 편찬한 <書經(서경)>에 나오는 ‘咸與維新’(함여유신: 다 함께 참여하자)에서 ‘維新’을 따왔다.
  
  維新이라 하면 한국인에게는 일본의 성공한 근대화 개혁인 ‘明治維新’이 너무 강하게 기억되어 아무리 중국의 고전을 들먹여도 일본적인 것, 무단적인 것, 따라서 非민주적인 것이 연상되었고, 이것이 일본 육사 출신 朴 대통령의 이미지와 중첩되었다. 維新은 한국인의 가슴속에 공통된 가치관으로서 뿌리 내리기에는 너무 고루하고 딱딱한 명사였다. 維新의 모토인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는 朴 대통령의 뛰어난 작명이었지만.
  
  육군보안사령관 출신인 金載圭 중장은 당시 제3군단장이었다.
  
  “유신헌법案이 나왔을 때 나는 세 번이나 읽었지. 읽는 데 분통이 터지더라고. ‘더러운 놈의 나라, 이게 무슨 헌법이야, 독재하는 거지’라고 고함을 지르고 책을 내던졌더니 애 엄마가 놀라 깨더군”
  
  이는 金載圭가 처형되기 하루 전 면회온 동생(恒圭)에게 한 말이다.
  
[ 2009-03-30, 23:2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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