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必鏞 사령관 숙청의 내막
연재 48/박정희는 권부의 핵심인 수경사령관을 제거함으로써 李厚洛 정보부장을 떨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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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는 마을만 지원하라”
  
  
  朴 대통령은 매년 1월 중순의 연두기자회견이 끝나면 2월 중순까지 약 한 달간 각 부처와 지방을 순시하면서 업무현황을 파악하고 지침을 내렸다. 朴 대통령의 부처 및 지방순시는 허례를 빼고 실무를 중점적으로 챙기는 가장 강도 높은 현장수업이었다. 朴 대통령이 국정의 구석구석까지 알 정도로 업무파악이 완벽했던 것은 18년간 이런 현장순시를 많이 하여 실무자들의 견해를 들었기 때문이다.
  
  1973년 1월 15일 朴 대통령은 오전엔 경제기획원, 오후엔 재무부를 순시했다. 朴 대통령은 국세청과 관세청 직원들에게 ‘큰 야망이 없는 사람은 小利(소리)에 끌리기 쉽다’는 <牧民心書(목민심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다음날 朴 대통령은 오전엔 농림부, 오후엔 상공부를 순시했다. 농림부 순시 때 그는 농민 위에 군림하려는 공직자의 자세를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토지개량조합은 농민으로부터 水稅(수세)를 받아 월급에 보너스까지 타먹고 코로나나 크라운 차를 타고 다니고 있다는데, 세단 타고 다니면서 무슨 토지개량을 한다는 것입니까.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것이 우리의 실정에 맞아요.”
  
  그는 국민들을 향해서도 일침을 놓았다.
  
  “경기米가 아닌 통일벼 같은 것은 못 먹겠다고 생각하는 주부들의 사고방식을 뜯어 고쳐야 합니다.”
  
  1월 17일 朴 대통령은 건설부와 과학기술처를 순시했다. 1월 18일 朴 대통령은 큰형 東熙 옹의 백일 脫喪(탈상)에 다녀왔다. 아들 志晩 군과 朴鐘圭 경호실장만 데리고 갔다.
  
  다음날 朴 대통령은 교통부와 체신부를 순시하고 청와대로 돌아와 오후 3시 35분부터 25분 동안 尹必鏞(윤필용) 수경사령관의 업무보고를 들었다. 석 달 만에 처음으로 尹 사령관이 청와대에 들어온 것이다. 이때는 벌써 朴 대통령의 마음이 그로부터 떠나고 있었다. 반면 姜昌成 육군보안사령관은 자주 대통령 경호실장과 함께 골프를 치면서 尹 사령관에 대한 수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1월 21일 朴 대통령은 닉슨 대통령의 특사인 알렉산드 헤이그 장군(뒤에 닉슨의 비서실장, 레이건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을 접견했다. 헤이그는 타결이 임박한 베트남戰(전) 휴전협상안에 대해서 설명했다.
  
  朴 대통령은 이 휴전협상안이 결국은 베트남을 붕괴시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시간에 걸친 면담에서 많은 문제점을 제기했다. 朴 대통령은 특히 휴전안이, 미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하도록 하면서 베트남에 들어온 월맹군의 철수를 조건화하지 않은 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부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1월 22일 朴 대통령은 문교부를 순시한 자리에서 ‘국적 있는 교육’을 강조했다. 그는 기존 교육의 방향에 의문을 제기했다.
  
  “교육이란 피교육자로 하여금 사명의식을 분발시켜 가난한 농촌을 보면 富强策(부강책)을 생각케 하고 붉은 산을 보면 푸른 산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을 길러야 합니다.”
  
  朴 대통령은 내무부 순시에선 잘하는 마을을 우선적으로 지원한다는 새마을운동의 원칙을 새삼 강조했다.
  
  “당분간은 저 마을에는 돈을 주고 왜 우리 마을에는 돈을 주지 않는가라는 불평 따위는 들은 체 만 체 해도 좋습니다.”
  
  2월 4일 朴 대통령은 안양 컨트리 클럽에서 골프를 쳤다. 朴鐘圭 경호실장, 姜昌成 육군보안사령관이 李秉喆 삼성회장, 金容完 전경련 회장과 함께 했다. 姜 사령관은 그 이틀 전에도 朴 대통령을 獨對(독대)했다. 朴 정권 시대 측근들의 힘은 얼마나 자주 대통령을 만나느냐에 의해서 서열이 결정될 정도였다. 이미 그 횟수에서 姜 보안사령관은 尹必鏞 수경사령관을 앞지르고 있었다. 尹必鏞-李厚洛의 밀착에 대응하는 朴鐘圭-姜昌成 구도를 만들어 놓고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 朴 대통령이었다. 남은 것은 이 대립구도의 균형을 무너뜨릴 사건이었다. 그것은 朴 대통령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2월 6일 朴 대통령은 감사원(원장 李錫濟)을 순시하는 자리에서 감사의 원칙을 제시했다. 대통령이 업무지침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답안이 될 만하여 소개한다.
  
  <가. 10월 유신 과업 수행에 있어 감사원이 담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공무원의 紀綱(기강)을 확립하는 일이며, 이를 통해 일반 국민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종국적으로는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나. 현재 우리나라에는 2만 6,000여 기관에서 2조 4,0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집행하고 있습니다. 속담에 ‘열 사람이 도둑 하나를 잡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처럼 많은 기관을 감사원에서 일일이 다 감사를 하고 비위를 적발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역시 중점적인 감사를 해야겠습니다.
  
  또한 적은 인원으로 많은 대상 기관을 효과적으로 감사하고 단속하자면 고도의 감사 지식과 기술이 필요할 것입니다. 따라서 감사원 직원들은 평소 감사업무에 대한 연구에 더욱 주력하여 풍부한 지식과 고도의 감사기술을 갖고 권위 있는 감사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감사의 권위와 공정성이 보장된다면 비록 중점감사만을 실시하더라도 모든 기관이 사전에 스스로 비위를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며 자체단속도 더욱 강화할 것이므로, 결국은 일부 기관에 대한 감사가 전체 기관에 대한 영향을 미치고 모든 기강이 스스로 바로잡혀 나갈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바람직한 감사의 효과라고 생각합니다>
  
  朴 대통령은 지시를 할 때 오해가 일어날 소지를 없애기 위해 정확하면서도 쉬운 말을 한다. 그가 사안의 핵심을 적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므로 가능한 것이다. 상황파악이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높은 사람이 지시를 할 때는 총론이나 원론, 때로는 말장난만 늘어놓는다. 핵심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말을 할 때뿐만 아니라 일을 할 때도 낭비가 적다는 이야기이다.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영자(CEO)로 평가될 朴正熙의 성공비결 중 하나는 행정에도 경쟁개념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그는 1973년 연두순시를 하면서 ‘새마을사업 지원의 추진 방향’을 이렇게 설명했다.
  
  “새마을사업은 우수부락부터 우선적으로 지원하여 추진해야 합니다. 과거에 우리는 여러 가지 운동을 전개해 보았으나, 별로 두드러진 성과를 올리지 못했는데 그 가장 큰 원인은 정부에서 모든 부락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똑같이 분배해 주는 식으로 지원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정된 예산을 가지고 전체 부락에 고루 나눴기 때문에 지원자금이 영세하여 소기의 투자효과를 거둘 수 없었고, 또 스스로 잘살아 보려는 의욕도 없고, 부지런히 일하지도 않는 부락을 아무리 도와주어 보았자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식’으로 아무런 효과를 거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수부락부터 우선 지원하면 잘하는 우수부락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고, 그렇지 않은 부락은 뒤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이들 부락 사이에는 많은 격차가 생길 것입니다.
  
  물론, 부락 간에 격차가 생기는 것 자체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러나 뒤떨어진 부락 사람들도 우수부락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하여 잘 살게 된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면 이에 자극을 받아 조만간 분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정부는 이 마을도 지원해 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모든 부락이 차례로 다 고루 잘 살게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이렇게 추진해 가는 것이 시간이 걸리고 지루하게 보일지 모르나 결과적으로는 훨씬 빠르고 성과 있는 방법이 된다고 믿습니다. 새마을운동 실적을 심사하고 평가할 때는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하겠으며, 그 다음에는 객관적이고도 공정한 심사가 이뤄져야 하겠습니다.
  
  그저 막연한 추상적 기준이나 외양만 보고 잘 되었다는 식의 평가를 해서는 안 됩니다. 심사기준에는 주민들의 소득증대를 주된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朴 대통령은 기계적 평등을 자원낭비와 非효율적인 것으로 배척하고 의도적으로 차등 지원을 하여 마을과 마을 사이에 경쟁을 붙인 것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은 그 사촌을 따라잡기 위하여 부지런하게 일해야지 계속 배만 움켜쥐고 있다가는 정부로부터 일전 한 푼 받지 못하는 제도를 만든 것이다. 이런 차등 지원책이 결과적으로는 전국 마을이 다 잘 사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그는 확신했다. ‘차등을 통한 평등구현’과 ‘평등을 통한 불평등 自招(자초)’ 중 前者(전자)를 선택한 것이다.
  
  
  “대화는 대화고 혁명은 혁명”
  
  
  1973년 1월 24일.
  
  朴 대통령은 전국 치안 및 예비군 관계관 중앙회의의 유시를 통해서 7·4 공동성명 이후 진행되고 있던 남북대화에 대해서 아주 현실적이고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지금으로서는 그들을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접촉을 하여 한 가지 뚜렷이 안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기본 전략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으며, 우리 남한을 적화통일하겠다는 야욕은 하나도 포기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주변 정세와 세계적인 조류에 맞추어서 방법과 전술만을 약간 바꾸었을 뿐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북한은 금년에 들어서도 ‘4대 군사노선을 철통같이 다그쳐 나가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습니다. ‘4대 군사노선’이란 全국토의 요새화, 全인민의 무장화, 全인민군의 간부화, 장비의 현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알기로는 그들은 입으로는 7·4 공동성명이니 평화통일 운운했지만 자기들이 무력 남침을 하지 않겠다는 공식적인 발언을 한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습니다.
  
  ‘대화는 대화고, 혁명은 어디까지나 혁명이다’라는 말이 아마 그들 속심의 솔직한 표현일 것입니다.”
  
  1973년 4월 5일.
  
  朴 대통령은 식목일 기념일, 새마을운동 행사에 나가면 꼭 긴 연설을 했다. 연설이라기보다는 강의였다. 이런 강의식 연설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비전과 열정을 직설적으로 쏟아 부었다. 이날도 그는 열을 냈다.
  
  “이 땅은 우리 조상들이 살다 갔고,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고, 또 언젠가는 우리가 죽어서 모두 이 조국 강산에 묻혀야 될 땅입니다. 또한, 길이길이 우리 후손들이 이 땅에서 살아야 될 것입니다. 여기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조국이요, 조국의 강산입니다.
  
  그 사랑하는 표시를 무엇으로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당분간 ‘애국’이란 말은 입에서 딱 떼어 버리고, 우선 산에다 나무를 심고 나무를 아끼고 이 조국 강산을 하루바삐 울울창창하게 만듭시다. 그런 상태를 만드는 것, 이것이 무엇보다도 나라를 사랑하는 길인 것입니다.”
  
  1973년 4월 17일.
  
  朴 대통령은 전국경제인대회 치사를 통해서 기업의 사회적 의무와 윤리를 강조한다. 朴 대통령이 대기업 중시 정책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정서는 재벌적이라기보다는 서민적이었다. 그는 노동조합의 활동을 규제했지만 그 자신이 노조위원장이란 자세로 재벌총수들에게 富(부)의 사회적 환원을 강조하곤 했다.
  
  “넷째로, 모든 기업인은 노동 조건의 개선과 노동자의 복지 향상에 최선을 다하고 국민 민복에 기여한다는 투철한 사명 의식을 길러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기업의 이윤은 사회에 되돌린다는 大義(대의)에 투철한 기업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지난해 막대한 재정 부담을 무릅쓰고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8·3 긴급 조치’를 취했던 것도 기업의 이윤만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업의 건전한 성장 없이는 경제의 발전과 국민 생활의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는 기업의 공익성 때문에 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尹必鏞 계열 숙청
  
  
  
  1973년 4월 28일.
  
  朴正熙 대통령을 가장 오랫동안 모신 측근이자 군부內 실력자이던 尹必鏞 장군이 육군보안사에 연행된 것은 1973년 3월 9일, 정식 구속된 것은 3월 26일, 軍 검찰에 의해 기소된 것은 4월 17일, 비공개 공판 끝에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 선고가 있었던 것이 4월 28일이었다. 尹必鏞 소장, 孫永吉 준장 등 10명의 장교들이 군복을 입은 차렷 자세로 선고를 받는 사진이 이 날짜 석간에 실리면서 그들의 ‘죄상’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그 소스는 판결문과 국방부 장관 담화문이었다. 내용은 尹 장군 등의 부정·부패적 사생활, 軍內 사조직 운영을 중점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판결문은 법률적 판단을 한 내용이 아니라 ‘치부와 엽색행각에 치달음으로써 反유신적 죄악을 자행했다’는 식의 인신공격적인 규탄문이었다.
  
  <대한일보> 사장 金連俊(김연준) 씨의 수재의연금 횡령사건에 대한 수사를 尹 장군이 압력을 넣어 중단시켰다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그 얼마 뒤 金 씨는 횡령 혐의로 구속되고(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음) <대한일보>는 폐간되었다.
  
  이날 징역 15년에서 2년까지의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은 尹必鏞 소장(징역 15년)과 수경사 참모장 孫永吉 준장(육사 11기. 징역 15년)을 비롯하여, 육군본부 진급인사실 보좌관 金成培 준장, 육본중앙수사단장 池聖漢 대령, 26사단 연대장 權翊鉉 대령(나중에 무죄 확정. 육사 11기. 뒤에 민정당 대표), 육본 진급인사실 辛再基 대령(육사 13기. 뒤에 민자당 의원) 등 10명이었다. 기소는 되지 않았으나 尹必鏞 계열로 알려졌던 장교들 30여 명이 전역당했다.
  
  이들은 盧泰愚 대통령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지냈던 安敎德(안교덕·육사 11기)을 비롯하여, 鄭東喆(정동철·육사 12기. 506보안대장), 裵命國(배영국·육사 14기. 청와대 민정비서관실 파견. 뒤에 민자당 의원), 朴正基(박정기·육사 14기. 뒤에 韓電 사장), 金相球(김상구·육사 15기. 뒤에 민자당 의원), 鄭奉和(정봉화·육사 18기. 수경사령관 비서실장) 등이었다. 이때 숙청되었던 군인들이 5공화국 때 重用(중용)되는 경향이 있었다.
  
  尹 장군 계열의 숙청은 정보부로도 번져 李厚洛 부장의 고향(울산) 후배인 李載杰 감찰실장이 구속되었고 30여 명이 해직되었다. 李 실장은 동향인 孫永吉 수경사 비서실장과 연락하여 사이가 좋지 않던 李 부장과 尹 소장을 친하게 만들어 준 것이 화가 되었다. 이 사실은 이 사건의 핵심적 의미를 담고 있다.
  
  尹必鏞 계열의 숙청은 朴正熙 대통령이 갖고 있던 권력자 고유의 의심과 불안을 반영한다. 그는 전해의 7·4 공동선언 이후 李厚洛 정보부장의 대중적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李 부장은 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제2의 5·16 쿠데타’인 10월 유신도 기획, 실행했고 많은 여당 국회의원 후보를 추천하는 등 새로운 정치판을 짜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1973년 초 李厚洛 부장의 영향력이나 그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은 절정에 달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위기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朴 대통령이 내려다보니 尹必鏞 수경사령관까지도 李厚洛 부장과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朴 대통령은 권력의 4대 파수꾼인 정보부장, 육군보안사령관, 수경사령관, 경호실장을 서로 견제시켜 놓음으로써 권력의 안정을 기하는 방식을 애호했다. 尹必鏞 장군도 李厚洛 부장에 대한 좋지 않은 정보를 朴 대통령에게 많이 올렸다. 그를 잘라야 한다는 건의도 했다. 그런데 尹 장군이 朴 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서 내용이 李 부장에게 넘어가는 것이었다. 李 부장이 尹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그렇게 못마땅하냐”고 말한 적도 있었다. 尹 장군은 李 부장에 대한 朴 대통령의 신임이 굳다는 판단을 한 뒤에는 그에 대한 견제役을 회피했다.
  
  尹 장군은, 李 부장이 평양에 들어가서 金日成을 만나고 온 뒤엔 그에 대한 평가도 달리 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李 부장과 尹 장군 두 사람의 측근이 나서서 권부의 2大 실세를 친하게 만들고 있었다. 朴 대통령으로서는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1972년 10월 17일의 유신 선포와 동시에 계엄령이 선포된 직후 李厚洛 정보부장은 요인들을 초대하여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尹必鏞 수경사령관도 초청되었다. 尹 장군이 그 자리에 가보니 李 부장 이외에 朴鐘圭 경호실장과 대기업 회장 몇 명이 와 있었다. 尹 장군은 “계엄下인데 두 사람 이상이 모이면 내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건 불법집회입니다”라고 농담을 했다.
  
  李 부장은 “그래서 우리가 尹 장군을 모신 것이 아닙니까. 계엄업무로 고생하시는데 우리가 격려금이라도 내놓아야겠습니다”라고 했다. 李 부장은 참석자들의 지갑을 털게 해서 수백만 원을 몽땅 尹 장군에게 건네주었다. 이날 尹장군은 軍 선배인 李 부장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尹 장군은 또 李 부장에게 “앞으로 구성될 국회에는 軍 출신들이 많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시오”라는 부탁도 했다.
  
  “이제 어차피 계엄정치를 하게 되었으니 군인이 정치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유정회 의원의 3분의 1을 장군, 영관, 위관급 출신자들로 메워야 합니다. 태국처럼 군인들이 국회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朴 대통령한테 건의해 주시오.”
  
  李 부장은 “각하께 보고하여 30석 정도는 마련해 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尹 장군이 나중에 들으니 이런 보고를 받은 朴 대통령이 “건방진 놈들, 지들이 뭔데 국회의원을 마음대로 고르려고 해”라면서 화를 냈다는 것이었다. 이런 모습들을 朴 대통령 편에 서서 지켜보던 이가 朴鐘圭 경호실장이었다.
  
  尹必鏞 사건의 단초가 된 뉴코리아 골프장에서의 申範植 사장의 提報(제보)도 朴鐘圭 실장이 미리 그 이야기를 듣고 자연스럽게 朴 대통령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그 자리를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尹必鏞 씨는 자신이 거세된 경위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1972년 말인가, 1973년 초인가 하루는 朴鐘圭 경호실장이 저를 보자고 하더니 전날 뉴코리아 골프장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골프 한 코스를 돈 뒤 커피숍에서 朴 대통령, 申範植 당시 <서울신문>사장, 朴鐘圭 경호실장이 담소를 하고 있었다. 申 사장이 느닷없이 이런 말을 꺼냈다는 것이다.
  
  “각하께서 연만하시니 더 노쇠하시기 전에 후계자를 키우셔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李厚洛 부장이 후계자로 좋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朴 대통령은 “미친 놈들, 내가 아직 노망하려면 멀었는데”라고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세 사람은 다시 골프장으로 나갔다. 골프를 다 치고 필드에서 나왔을 때 朴 대통령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는 申 사장에게 무섭게 물었다.
  
  “아까 그 말 말이야, 누가 그런 소릴 했어? 李厚洛이가 그랬나?”
  
  朴鐘圭의 설명에 따르면 申 사장은 그 자리에 꿇어앉았다고 한다.
  
  “이름을 못 대겠습니다.”
  
  朴 실장이 권총을 뽑아 “이름을 대라”고 위협했다는 것이었다. 申 사장은 “尹必鏞 장군이 그럽디다”라고 했다는 게 朴 실장의 설명이었다. 尹 사령관은 그 말을 듣자마자 피가 역류하는 듯하여 전화기를 들고 申사장을 부르려 했으나 朴 실장이 말렸다. 朴 실장은 “이 문제는 나한테 맡겨 주십시오”라고 했다.
  
  “제가 형무소에 있으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왜 申 씨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이해가 안 돼, 어떤 추리까지 해 보았습니다. 그때까지 申 씨는 저와는 가깝고 李 부장과는 사이가 아주 나빴어요. 그런데 7·4 공동성명과 유신 이후에 李 부장의 힘이 세어지니까 혹시 李 부장이 후계자가 되면 어쩌나 하는 공포심에서 직접 각하의 의중을 시험해 보고자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무섭게 추궁하니까 다급해서 내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고…. 朴 대통령께서는 제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하면 가볍게 넘겨 버릴 것이란 계산에서 말입니다. 그전에 申 씨와 함께한 술자리에서 노망 운운하는 이야기가 오간 적은 있었습니다.”
  
  尹 씨에 따르면 유신 선포 뒤의 어느 날 申 씨가 尹 사령관, 鄭韶永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金詩珍 민정수석비서관, 육군본부 池聖漢 대령 등을 이태원 식당으로 초대하여 대접을 했다. 이 자리에서 申 씨는 대강 이런 뜻의 말을 했다는 것이다.
  
  “각하께 정말로 충성하는 분이라면 ‘각하께서 연만하셔서 노쇠하시기 전에 청와대를 물러나십시오. 우리가 모시겠습니다. 그러면 영원한 대통령이 되십니다’ 이렇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런 말씀을 하실 분은 尹 장군뿐이십니다.”
  
  尹 사령관은 “술집에서 당치도 않은 말씀하십니다”면서 입을 막았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조사받을 때 보니 申 씨가 한 말은 내가 한 말로 돼 있고, 내가 한 좋은 말은 전부 거두절미하여 오해하기 좋게 만들어 놓았더군요.”
  
  尹必鏞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는 뉴코리아 골프장에서 있었던 일은 언제인가? 기자가 입수한 朴 대통령 업무일지 1972년 11월호분을 찾아보았다. 이 무렵은 유신조치에 따른 비상계엄 기간임에도 朴 대통령은 골프장에 자주 나갔다. 申範植 <서울신문> 사장이 말동무로 따라다녔다.
  
  11월 5일 한양 컨트리 클럽에서 대통령, 朴경호실장, 申範植 회동.
  
  11월 12일(일) 대통령, 경호실장, 申範植이 뉴코리아 골프장行(이것이 朴 실장이 말한 문제의 회동으로 추정되나 1973년 초의 일이라는 주장도 있다).
  
  11월 18일에도 뉴코리아 클럽에서 골프.
  
  흥미로운 것은 이 무렵 朴 대통령이 尹必鏞 수경사령관은 거의 만나지 않고 육군보안사령관 姜昌成 소장을 자주 청와대로 불러 만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尹 장군에 대한 감시역인 姜 장군을 朴 대통령이 자주 만난다는 것은 尹 장군에 대한 신임이 약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특히 유의할 대목은 11월 12일의 뉴코리아 골프장 회동 직후 姜昌成 사령관의 청와대 출입이 부쩍 잦아졌다는 점이다.
  
  
  姜昌成 보안사령관
  
  
  
  1972년 11월 14일 오전 朴 대통령은 姜 장군을 불러 약 30분간 요담했다. 그 이틀 전의 골프 회동 때 申範植 사장의 提報가 있었다면 이날 朴 대통령은 姜 장군에게 수경사령관과 李厚洛 부장의 관계에 대한 뒷조사를 지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11월 18일에도 朴 대통령은 姜 장군을 초치하여 약 한 시간 동안 이야기했다. 그 이틀 뒤 姜昌成 장군은 또 朴 대통령에게 불려와 약 40분간 요담했다. 11월 29일에도 姜 장군은 朴 대통령을 만나 35분간 軍內의 동향을 보고했다. 尹 장군에 대한 첩보수집 결과도 알렸을 것이다.
  
  尹必鏞 사건의 진행과정에 대한 각자의 주장을 검증하려면 1973년 3, 4월의 朴 대통령 업무일지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朴 대통령은 1972년 11월 뉴코리아 골프장에서 申範植 <서울신문> 사장으로부터 尹必鏞 수경사령관의 불순한 언동에 대해서 보고를 받은 지 넉 달 만인 1973년 3월 8일에 姜昌成 육군보안사령관을 불러 수사를 지시한다.
  
  이 넉 달 동안 朴 대통령은 姜 장군, 朴鐘圭 경호실장, 그리고 軍內의 다른 루트를 통해서 尹 장군에 대한 첩보를 보고받고 숙청을 결심하기에 이른 것이다. 尹 장군의 발언뿐 아니라 李厚洛 정보부장과의 밀착이 수사 지시의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1973년 3월 8일 낮 12시 7분에 朴 대통령은 姜昌成 소장을 초치하여 12시 35분까지 28분간 尹 사령관에 대한 수사지시를 내렸다. 姜 장군은 “朴 대통령이 나에게 수사를 지시하면서 ‘全斗煥 준장에게도 물어 봐’라고 말했다”고 기억한다. 朴 대통령은 한 장짜리 보고서를 건네주면서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철저히 조사하라”고 강조했다.
  
  그 보고서는 申 사장의 제보가 요약된 것이었다. 姜 장군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물러나오는데 朴鐘圭 경호실장이 들러 주었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경호실장 방에 들렀더니 朴 실장은 대단히 흥분하여 “모조리 잡아 넣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姜昌成 보안사령관은 수사관들에게 조사를 지시하고, 별도로 수도경비사 소속의 지휘관 몇 명을 불러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수사에 저항하지 말고 협조해 달라”고 당부, 사전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姜 사령관은 尹必鏞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퇴근길에 한 번 들러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육사 8기생으로 동기생인데다가 장성 진급도 같은 날에 했다. 姜 씨가 중앙정보부 차장보와 육군 보안사령관을 거치는 동안 수도경비사령관인 尹 소장과는 업무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었다. 姜 소장은 尹 소장에게 수사에 착수했음을 알렸다. 尹 소장은 모함이라고 펄쩍 뛴 뒤 “모든 것을 姜 사령관에게 맡길 것이니 선처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姜 소장은 “이 문제를 푸는 길은 각하께 찾아가 사과하는 것뿐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尹 장군은 3월 9일 해임되고 보안사로 연행된다.
  
  바로 이 무렵 池聖漢 육군본부 중앙수사단장(대령)에게 金詩珍 정보비서관이 전화를 걸어왔다. 金 비서관은 떨리는 목소리로 “빨리 내 방으로 오라”고 했다. 池聖漢 대령은 청와대 비서실에서 현역으로 근무했고 朴 대통령의 신임도 두터웠다. 池 대령이 金 비서관을 찾아갔더니 “그날 우리 尹 장군 하고 저녁 먹은 날이 며칠이지?”하고 물었다.
  
  池 대령은 “작년 연말입니다”라고 했다. 申範植 <서울신문> 사장의 부탁으로 이태원동 식사 자리를 만든 것이 池 대령이었다.
  
  金 비서관은 그 몇 시간 전에 朴 대통령에게 불려갔다는 것이다. 朴 대통령은 대뜸 “내가 너를 신임하여 그 자리를 맡겼는데 못된 자들 하고 돌아다니면서 술이나 마시고 나를 두고는 영감이니 노망이니 뭐니 그 따위 소리만 한다면서. 너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서?”
  
  朴 대통령이 말한 그 자리란 尹必鏞, 申範植, 鄭韶永, 金詩珍, 池聖漢이 만났던 이태원동의 식사자리였다. 金 비서관은 “각하, 그 자리에서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朴 대통령은 “이 친구야, 더 알아봐”라고 했다.
  
  池 대령도 그 식사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朴 대통령에게 불경스러운 이야기는 나온 적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池 대령은 청와대에서 바로 수도경비사령부로 직행했다. 尹必鏞 장군은 장교식당에서 식사 중이었다. 池 대령이 “그날 申範植 사장과 만났을 때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라고 물었다. 尹 사령관은 “허, 왜 자꾸 그것 가지고 이야기가 있는지 모르겠네. 얼마 전에도 朴鐘圭 경호실장이 나한테 그것을 물어와서 내가 다 이야기해 주었는데…”라고 했다.
  
  尹 사령관은 이런 부연설명을 했다.
  
  “그날 식사자리에서 나와 申 사장이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홀의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하던 중 그 이야기가 나왔다. 申 사장과 ‘이제부터는 朴 대통령이 건강하셔야 한다, 각하의 판단이 흐려지시면 물러날 시기를 우리가 알려드려야 한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했다. 그게 전부인데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
  
  池 대령은 다시 申範植 <서울신문> 사장을 찾아가 물었다. 申 사장도 “맞아, 맞아. 尹 장군이 말한 게 맞아”라고 했다. 안심한 池 대령은 金詩珍 정보비서관을 찾아가 자신이 파악한 내용을 보고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鄭韶永 경제수석 비서관이 들어왔다. 이태원동 식사모임의 동석자였던 그도 조금 전에 朴 대통령에게 불려갔다는 것이다.
  
  朴 대통령은 “자네도 그 자리에서 날 욕했다면서”는 취지로 이야기했다고 한다. 鄭 수석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고도의 모략입니다”라고 말했다. 鄭韶永 수석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물러나오는데 朴 대통령이 전화 버튼을 누르더니 “姜昌成 보안사령관 대줘!”라고 말하는 게 등 뒤로 들렸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金詩珍 비서관은 그 자리에서 姜昌成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金詩珍 비서관이 ‘각하께서 오해하고 있다’는 취지로 이야기했더니 姜 사령관은 이렇게 말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尹 사령관이 불경스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申範植 사장이 다 시인했습니다. 보안사에서 조사했고 그때 申範植 사장이 그렇게 진술했습니다.”
  
  金詩珍 비서관은 얼굴이 하얗게 되더니 “申 시장이 시인했대. 나도 이제 그만둬야겠어”라고 했다. 池聖漢 대령은 “가만 계십시오. 제가 한번 더 갔다 오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申範植 사장을 다시 찾아갔다. 외투 속에 녹음기를 숨기고 가서 대화를 녹음했다. 申 사장은 “내가 시인을 했다고? 무슨 소리야 아까 말한 그대로야”라고 했다. 池 대령은 “틀림 없지요?”라고 확인을 받은 뒤 사장실을 나와 녹취록을 작성하여 金詩珍 비서관에게 전달했다.
  
  申 사장은 池聖漢 대령이 나간 뒤 姜昌成 보안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신변보호를 요청했다고 한다. 池聖漢 대령도 며칠 후 구속되어 다른 尹必鏞 계열사람들과 함께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재판에 넘겨졌던 그는 나중에 무죄로 석방되었다.
  
  전역 뒤 기업인으로 변신했고, 마주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던 池聖漢 씨는 “이 사건은 유신 조치 뒤에 영향력이 커진 李厚洛 부장과 尹 사령관이 밀착되어 가는 것을 의심하고 있던 朴正熙 대통령에게 朴鐘圭, 申範植 두 사람이 과장된 보고를 올린 것이 계기가 되었다. 수사를 지시받은 姜昌成 보안사령관은 尹 사령관의 군복을 벗기는 선에서 그쳤으면 좋은데 가혹한 수사로 억울한 희생자를 너무 많이 만들었다”고 평했다.
  
  朴 대통령 업무일지를 살펴보면 姜 소장의 육군보안사령부는 즉각적으로, 또 집중적으로 尹必鏞 사령관과 그 계열 장교들에 대한 수사에 착수한 뒤 수시로 대통령에게 상황을 直報(직보)했음을 알 수 있다.
  
  3월 9일 朴 대통령은 오전 10시 10분부터 37분간 姜 장군의 수사착수 보고를 들었다. 그 한 시간 뒤 朴 대통령은 劉載興 국방장관과 李敏雨 육군참모차장을 불러 尹必鏞 수경사령관의 교체를 지시했다. 후임은 육사 8기인 陳鍾埰(진종채) 소장이었다.
  
  이날 오후 3시 25분 李厚洛 정보부장은 朴 대통령을 만나 약 55분간 업무보고를 했다. 자신의 운명에 큰 그림자를 남기게 될 尹必鏞 수사가 시작된 것을 알았을 李 부장은 상당히 불안했을 것이다.
  
  다음날인 3월 10일에도 姜昌成 사령관은 오전 9시 27분부터 30분 동안 수사상황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보안사령관이 거의 매일 대통령에게 직보하고 있었다.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수도권의 안전을 책임진 수경사사령관에 대한 조사였으므으로 朴 대통령도 신경을 무척 썼다. 朴 대통령은 3월 12일 오전 10시 55분 신임 수경 사령관 陳鍾埰 소장을 불러 부대 장악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
  
  1973년 3, 4월 중 朴 대통령의 업무일지를 보면 중대한 변화가 감지된다.
  
  姜昌成 육군보안사령관이 하루가 멀다 하고 朴 대통령을 獨對하여 보고를 하는 동안 거의 매일 朴 대통령을 만나던 李厚洛 정보부장의 청와대 출입이 줄어든다. 朴 대통령이 부르지 않았던지 면담요청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3월 21일에서 4월 2일까지 朴 대통령은 李厚洛 정보부장을 한 번밖에 만나 주지 않았다. 그 한 번이란 것도 15분간의 보고였다. 4월 3일 李 부장으로부터 약 50분간 보고를 받았던 朴 대통령은 다시 4월 8일까지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 그가 4월9일 밤 10시에 李부장을 만나 준 시간은 불과 5분이었다.
  
  거의 매일, 하루에도 몇 차례 찾던 정보부장을 대통령이 근 보름간이나 소외시켜버린 것이다. 이 기간에 姜昌成 육군보안사령관은 朴 대통령에게 獨對보고를 세 번 올렸다. 그 보고의 핵심은 尹必鏞과 李厚洛 부장의 밀착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朴 대통령은 이 기간 중 金致烈 정보부 차장을 한 번 불러 결재를 해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노골적으로 부장을 따돌린 셈이었다. 朴 대통령이란 태양의 둘레를 도는 행성에 불과했던 李厚洛 부장의 초조와 불안은 대단했을 것이다. 朴 대통령은 이런 조치를 통해서 李 부장에게 확실한 경고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朴 대통령이 이 무렵 李厚洛 정보부장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고 보는 대목이 또 하나 있었다. 朴 대통령은 1972년 5월에 평양에 가서 金日成을 만나고 와서 하는 행동에서 북한 측의 영향을 감지했던 것이다.
  
  7·4 공동성명 문안부터 북한의 對南공작노선을 상당히 반영하였고, 한때 李厚洛 부장은 북한 측이 요구하는 보안법 폐지를 추진하다가 金鍾泌 총리의 강한 반대와 朴 대통령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부딪혀 포기한 적도 있었다.
  
  朴 대통령은 남북회담을 하면서도 金日成의 약속이나 말에 아무런 신뢰를 두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가 있다. 1972년 8월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朴 대통령은 돌아온 남측 대표 李範錫 씨 일행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북한 당국을 상대할 때의 지침을 내렸다.
  
  <남북적십자 본회담時 지침
  
  1. 평양에서 있었던 일은 공식·비공식을 막론하고 모두 보고해야 한다.
  
  2.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할 때는 사전에 전략을 세워놓고 해야 한다.
  
  3. 북한 위정자들과 우리가 핏줄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4. 우리 적십자사는 인도적 사업이라고 보나 북한은 정치적 사업으로 본다.
  
  5. 북한 요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 정치적이다.
  
  6. 우리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
  
  7. 술을 마실 때도 상대방이 공산당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
  
  8. 북한 사람들과는 어떤 자리에서도 감상적으로 흐르지 마라.
  
  9. 북한이 남한 언론을 비판하면 자문위원들은 즉각 반박하라.
  
  10. 대표단과 자문위원 사이는 긴밀한 협의를 하되 매일 저녁 결산토록 하라>
  
  당시 權府(권부)에서 李厚洛 부장의 獨走(독주)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이는 金鍾泌 총리와 朴鐘圭 경호실장이었다. 尹必鏞의 수경사와 姜昌成 소장의 보안사는 전통적으로 라이벌 관계였다. 이런 권력 갈등하에서 李 부장과 가까워진 尹必鏞 장군이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尹必鏞 사건은 李厚洛 정보부장을 초조하게 만들었고, 그가 朴 대통령의 신임을 다시 얻기 위하여 저지른 金大中 납치사건은 결국 자신의 몰락을 불렀다. 金大中 납치에 대한 일본 언론의 집중보도로 생긴 反韓(반한)감정 속에서 文世光의 살의가 탄생하여, 陸英修 여사 피살을 부른다. 이 사건으로 朴鐘圭(문세광) 실장은 해임된다. 陸 여사의 퇴장은 朴 대통령의 내면을 흔들어 결국 그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尹必鏞 사건 수사에 따른 군맥의 浮沈(부침)은 5공화국 출범에도 흔적을 남긴다.
  
  尹必鏞 세력 제거는 그 영향의 심도에서 朴 대통령 시절의 최대 사건이다.
  
  
[ 2009-03-31, 22:0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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