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굴로 들어가라!"
연재 50/석유위기 속에서 중동건설시장으로 진출하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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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0월에 일어난 제4차 중동전쟁은 産油國들의 석유武器化를 불렀고 이는 석유값의 폭등으로 이어졌다. 중화학공업 건설을 막 시작한 朴正熙 정부로선 크나큰 위기였다. 1974년 1월14일 ‘국민생활의 안정을 위한 긴급조치의 공포시행에 따르는 대통령 특별담화문’에서 朴 대통령은 “우리나라 경제만은 ‘불황 속의 인플레’에 말려들지 말고 이것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자”고 했다. 그는 또 “우리가 걸어온 길은 탄탄대로가 아니었고 태산준령을 넘고 거센 풍랑을 헤쳐나가듯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하면서 세계적인 성장과 발전을 기록해 왔다”고 했다. 朴 대통령은 그 직전에 긴급조치 1, 2호로써 反정부 세력을 엄단하기로 한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같은 국가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부 인사와 불순분자들이 反유신적인 활동을 자행하여 국가안보에까지 위협을 미치게 되었기 때문에 부득이 정부는 이를 먼저 제거하는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긴급조치 3호는 저소득층 부담 경감, 영세민 취로사업 확대, 임금체불과 부당해고 엄단, 정부예산 절감, 중소상공업자 지원, 농민보호 대책이 主調(주조)였다. 吳源哲 수석은 이 긴급조치의 효과를 ‘질서 회복’으로 해석했다.
  
  “석유파동이란 것은 질서가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러시아워 때 서로 먼저 가려고 하다가 자동차가 서로 엉켜버린 것과 같은 현상이 경제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교통순경이 등장하여 이 엉킨 차들을 풀어 주어야 하는데 대통령 긴급조치가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국민들이 대통령 말을 믿고 사재기를 중단하는 등 질서가 회복되니 정부도 물가체계를 재편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1974년 2월 1일 정부는 유류값을 평균 82%, 전기값을 30%, 해운요금을 최고 109%, 항공요금을 60% 인상했다. 2월 5일엔 생필품, 건축자재, 신문용지 등의 값을 대폭 인상했다. 정부가 통제하던 물건 및 서비스 요금을 최하 10%, 최고 100% 올린 것은 유사 이래 처음일 것이다. 그럼에도 시장과 국민들은 차분하게 받아들였다. 매점매석, 사재기, 품귀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吳源哲 수석의 표현을 빌리면 “폭풍 후의 고요함과 같았다. 남은 것은 할퀴고 간 상처뿐”이었다.
  
  이때 석유쇼크를 ‘재앙으로 위장한 행운’으로 만드는 일들이 일어난다. 행운은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찾아온다는 것이 朴 대통령의 한국에도 적용된다. 中東 진출을 위한 탐색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터널을 지나 새로운 무대로 진입하는 것이다.
  
  1973년 한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3억 880만 달러였는데, 1974년에는 20억 2,270만 달러로 늘었다. 자본거래 통계를 보면 1973년엔 2억 9,000만 달러를 빌리면 됐는데 1974년엔 19억 9,480만 달러를 빌려 와야 했다. 경제총사령관인 金正濂 비서실장은 출근하자마자 부도 직전으로 몰린 회사 사장처럼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야 했다.
  
  “오늘 결제 준비는 되었나.”
  
  “어제 홍콩에서 돈을 꾸어 오겠다는 것은 해결됐어.”
  
  “걸프에게 주는 원유대금은 며칠만 기다리라고 해.”
  
  吳源哲 경제2수석비서관의 회고에 따르면 중동 진출과 관련하여 朴 대통령에게 최초의 보고를 올린 것은 1974년 1월 30일이라고 한다. 마침 사우디 아라비아 나제르 기획상이 訪韓(방한)하게 되어 있어 중동에 대한 한국 기업의 진출 방향을 구상한 것이었다.
  
  吳 수석은 석유위기가 발생하기 전에 유럽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건설회사 三煥(삼환)의 직원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三煥은 한국 기업체로서는 처음으로 사우디에서 고속도로 건설공사를 따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삼환 직원은 서울 시장이 초청한 제다 市長 부부와 동행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도쿄에 가까워지자 제다 시장 부인이 양장으로 갈아 입었다. 어찌나 아름다운지 클레오파트라를 연상케했다. 吳 수석은 귀국 후 삼환 직원을 불러 사우디의 상황을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吳 수석은 오일달러가 모이는 중동 시장을 겨냥하여 군수품의 판매, 공장건설, 토목, 건축, 기술 인력 수출을 생각했다. 1월 30일 오전 吳 수석으로부터 中東 진출 관련 보고를 받은 朴 대통령은 “국내 업자들을 불러다가 설명회를 개최하고 중동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뜻을 전하라”고 했다. 그날 오후 吳 수석이 다른 건으로 결재를 받으러 갔더니 朴 대통령은 “중동 진출 건에 대해 좀더 자세히 설명해 봐”라고 했다. 吳 수석은 군대식으로 목소리에 힘을 주어 보고했다.
  
  “각하,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첫째, 우수한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동은 작업환경이 가장 나쁜 곳입니다. 고온이고 사막지대입니다. 오락도 없는 곳입니다. 이렇게 나쁜 조건이야말로 우리나라에게는 극히 유리한 조건이 됩니다. 우리나라에는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수십만 명의 제대장병들이 있습니다. 월남에서의 경험도 있습니다. 각하, 에너지 위기는 國難(국난)의 일종입니다. 한국 男兒(남아)가 국난을 극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어린 여공들이 수출을 해서 우리 경제를 지탱해 왔습니다만 이번에는 남자가 나서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둘째, 우리나라 남자 기능공들의 인건비는 선진국보다는 훨씬 싸고 기술수준은 후진국보다 월등합니다.
  
  셋째, 工期(공기)단축인데 이 부문은 우리 건설업체가 자신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공사式으로 돌관작업을 하는 데는 소질이 있습니다.”
  
  “吳 수석, 소신이 있어 좋구먼.”
  
  “각하, 중동에 진출하자면 뒷거래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이 방면에도 소질이 있지 않습니까.”
  
  朴 대통령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金載圭의 손을 들어준 대통령
  
  
  朴 대통령 시절의 관료들은 일을 발상하여 실천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매우 짧았다. 2월 13일 나제르 사우디 기획상이 訪韓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2월 16일에는 한국-사우디 경제협력위원회가 창립되었다. 4월 25일엔 張禮準 상공부 장관이 민간기업체장들을 데리고 중동 방문길에 올랐다. 張 장관은 나제르 기획상이 마련한 만찬장에서 軍에서 차출해 간 태권도 유단자 두 사람의 시범을 보여 호평을 받았다. 사우디 왕실의 경호실과 군대에서 태권도 사범들을 초청하게 되었다.
  
  張禮準 장관은 “한국과 사우디 정부는 40억 달러가 들어갈 리야드 도시 건설에 우리 건설업체가 참여하고 고속도로 건설엔 한일개발이 참여키로 하는 등의 합의를 했다”고 발표했다. 맨 처음 중동에 진출했던 삼환은 제다市의 美化(미화)공사를 수주했다. 삼환은 工期를 단축하기 위해 밤에도 횃불을 피워 놓고 작업을 했다. 이곳을 지나던 파이잘 국왕이 놀랐고 한국 업체에 대한 인상이 좋아졌다고 한다.
  
  1974년 9월 개각 때 朴 대통령은 우직한 金載圭를 건설부 장관에 임명하였다. 朴 대통령은 임명장을 주면서 “오일쇼크로 인한 외환위기는 오일쇼크로 부자가 된 중동에서 처방책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金 장관은 간부들을 불러 놓고 “중동이라는 커다란 시장을 먹기 위해선 우리 업체들의 입이 너무 좁다. 입을 넓히는 작업을 하라”고 지시했다.
  
  건설부는 비밀 작업 끝에 중동에 진출하려는 건설회사들을 정부가 책임지고 지원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즉, 해외건설 회사에 대해서는 국내 은행이 물적 담보 없이도 신용으로 지급보증을 해주고, 건설수출 소득에 대해서는 법인세를 50% 감면해 주며, 25개 업체의 공동출자로 한국해외건설주식회사(KOCC)를 설립키로 했다.
  
  이 안에 대해서 기획원과 재무부는 반대했다. 위험도가 높은 해외건설에 대해 신용으로 지급보증을 해주었다가 사고가 나면 은행도 함께 망한다는 것이었다.
  
  金正濂 비서실장의 증언에 따르면 1975년 하반기 어느 날 수출진흥확대회의가 끝난 뒤 중앙청 국무위원 식당에서 朴 대통령, 국무총리, 관계장관, 경제4단체장이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金載圭 장관이 이 문제를 제기했다.
  
  즉, 건설부 장관이 허가한 해외건설업체에 대해서는 은행이 무조건 지불보증을 해주어야 한다고 했고, 金龍煥 재무부 장관은 최대한 협조하겠지만 지불보증은 선별적으로 해야 한다고 맞섰다. 南悳祐 기획원장관 겸 부총리는 재무부 편을 들고 경제단체장들은 건설부 편이었다. 여기서 朴 대통령은 건설부와 기업의 편을 들어 주었다.
  
  朴 대통령은 이렇게 정리했다.
  
  <재무부의 주장도 일리가 있지만 선별적 지불보증은 은행의 보수성에 비추어 업체의 中東 진출에 지장을 줄 것이다. 은행은 무조건 지불보증을 하되 건설부 장관은 업자를 엄선해서 허가하라>
  
  金正濂 실장은 청와대로 돌아오자 金載圭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金 장관, 우리 업자들끼리의 과당경쟁과 부실공사를 막아야 합니다. 그래야 은행의 지불보증에 따른 사고를 막을 수 있습니다. 해외진출 허가는 엄선에 엄선을 기해야 합니다.”
  
  “알았습니다. 동감합니다. 업계에서 아무리 아우성을 치더라도 20개 이내로 진출업체를 제한하겠습니다.”
  
  그 뒤 1년간 더 재직한 金載圭 장관은 약속을 지켰다. 1978년 총선을 앞두고 지방건설업자들이 공화당을 통해서 中東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했다. 金 실장은 반대했으나 건설부는 기회의 균등을 내세워 58개 회사에 허가를 내주었다. 中東 건설시장은 한국업체들끼리의 과잉 출혈경쟁, 기술인력 빼내기 싸움터로 변했고, 1980년으로 넘어가면 해외건설 부실사태를 낳게 된다.
  
  현대건설은 中東 진출을 둘러싸고 鄭周永·鄭仁永 형제가 충돌했다. 鄭 회장은 ‘우물쭈물하고 있다가는 機先(기선)을 놓치고 시장은 기득권을 가진 회사들에 의해 분할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부스러기만 주워 먹을 수밖에 없다’라고 걱정했다.
  
  “어렵고 힘든 일을 안 하고 살면 편하다. 그냥 편하게 주저앉아 쉬운 일만 한다면 회사 발전은 포기해야 하고, 각 기업이 그런 식이면 국가도 희망이 없다. 돈을 잡으려면 돈이 많은 中東으로 가야 한다.”
  
  동생 鄭仁永 사장은 이란의 조선소 공사를 수주하여 中東 시장을 개척한 사람이지만 대형공사 수주는 모험이라고 반대했다.
  
  1975년 10월 바레인의 아스리 조선소 건설 공사는 1억 달러짜리였다. 鄭仁永 사장은 이 공사의 수주를 반대했다. 鄭周永 회장은 中東 선발대가 왜 발빠르게 움직이지 않느냐고 화를 내는데, 동생은 中東 공사 계약 관련자를 파면시키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었다. 鄭周永 회장은 鄭仁永 사장과 中東 진출 반대론자들을 한꺼번에 내보냈다. 鄭 회장은 李明博을 국내담당 사장, 李春林을 해외담당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당시 李明博은 30代 중반이었다.
  
  현대가 중동으로 진출하니 공사 규모가 달라졌다. 현대는 1975년 11월엔 1억 9,000만 달러짜리 사우디 해군기지 공사를 따내더니 이듬해 6월엔 9억 4,000만 달러짜리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했다.
  
  1973년에 한국업체들은 中東에서 2,400만 달러의 공사를 수주했었다. 中東 진출이 조직적으로 시작된 1974년엔 8,881만 달러, 1975년엔 7억 5,121만 달러, 1976년엔 24억 2,911만 달러, 1977년엔 33억 8,700만 달러, 1978년엔 약 80억 달러, 1979년엔 약 60억 달러, 1980년엔 약 80억 달러, 1981년엔 126억 달러로 수주액이 늘었다.
  
  절정기인 1978년에 中東 진출 한국 건설 노동자와 관련업체 종사자들은 14만 2,000명에 이르렀다. 베트남에 이은 두 번째의 거대한 해외진출 민족체험이었다. 朴正熙 대통령은 石油위기와 정면승부하여 中東 진출로써 한국 경제와 한국인의 새로운 활동공간을 창조한 것이다.
  
  석유파동과 中東 진출, 그리고 중화학공업 건설의 경제 3大 주제를 관리했던 1970년대의 네 인물이 있다. 비서실장으로서 경제정책의 총사령탑 역할을 했던 金正濂, 재무장관과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한 南悳祐, 경제제1수석비서관과 재무부 장관을 지냈던 金龍煥,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담당이었단 경제제2수석비서관 吳源哲.
  
  당시 金 실장과 南 장관은 50代, 吳·金 씨는 40代였다. 이 네 사람은 10여 년 전부터 왕성한 저술과 강연활동을 통해서 朴 대통령의 업적과 지도력을 전파하고 있다. 1970년대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이 네 사람의 증언과 기록은 안심하고 인용할 수 있다. 朴 대통령을 지근 거리에서 모시면서 國政(국정)의 핵심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증언에서 드러나는 朴 대통령의 국가경영술은 철학·전략·전술·정책·실천이 일관되게 흐르고, 입체적으로 짜인 아름다운 건축물 같다. 朴 대통령의 국가 운영에서 발견되는 일관성과 입체성의 비결은 무엇인가. 그는 골똘한 사색과 독서를 통해서 밑그림을 그리고 거기에다가 치밀한 설계와 신속한 실천, 그리고 철저한 확인으로써 속을 채워 갔다.
  
  겉으로는 엄정하고 경직되어 보이는 그의 국가경영술은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의외로 부드러웠다.
  
  그는 역사의 원리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여기서 우러난 전략과 실천은 단순명쾌했다. 말장난이나 현학적 관념론이 낄 틈이 없는 실용성과 합리성이 거기에 있었다.
  
  
  朴正熙 리더십 12계명
  
  
  1. 화합형 정책 결정: 朴 대통령은 무엇보다도 듣는 사람이었다. 엉터리 보고라도 끝까지 들어 주었다. 좀처럼 즉석에서 반대하지 않았다. 일단 본인의 의견을 제시한 뒤 주무장관이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대통령의 지시가 아니라 주무장관이 발안한 정책이 채택되는 방식을 취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야 정책에 대한 주인의식이 생기고 일을 할 때 신바람이 나는 것이다. 朴 대통령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남을 통해서 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2. 민주적 정책 결정: 朴 대통령은 어떤 회의에서도 먼저 발언하지 않았다. 토론을 시켜 문제가 제기되고 찬반의견의 방향이 잡혀 가면 그때 결론을 도출하고 필요한 보충지시를 내렸다. 당시의 정치체제와는 다르게 경제정책의 결정과정은 민주적이었다.
  
  3. 생산적 회의: 朴 대통령은 월간경제동향보고, 수출진흥확대회의(무역진흥회의), 청와대 국무회의, 국가기본운영계획 심사분석회의, 방위산업진흥확대회의를 정례화하였다. 이들 회의는 朴 대통령이 국정을 종합적으로 규칙적으로 파악 점검하고 살아 있는 정보를 얻는 기회였다.
  
  4. 철저한 확인과 일관된 실천: 朴 대통령은 계획수립에 20%, 실천과정의 확인에 80%의 시간을 썼다고 한다. 중앙부처 및 지방 순시 등 현장 시찰을 자주 한 것도 집행의 확인과 사람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계획의 수정이 필요할 때는 토론절차를 거쳐 신속하게 했다.
  
  5. 국민의 각성과 참여: 朴 대통령은 국민들이 自助(자조)정신을 발휘하여 자발적으로 건설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는 인간과 조직의 정신력에 주목한 사람이다. 그는 민족성처럼 되었던 패배의식과의 싸움에 이긴 사람이다. 그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같은 눈에 띄는 구체적 업적을 통해서 국민들의 체념과 자학을 자신감으로 교체해 갔다. 의욕을 불어넣기 위해 ‘새마을 노래’, ‘나의 조국’도 작사 작곡했다
  
  6. 정부는 맏형, 기업은 戰士: 朴 대통령은 경제관료와 기업인이 이견을 보이면 대부분의 경우 기업인 편을 들어 주었다. 그는 정부 주도형 경제개발정책을 채택했으나 기업이 엔진이고, 경제전선의 戰士는 기업인이라고 생각했다. 朴 대통령은 기업 엘리트를 존중해 주었고, 기업인들은 ‘대통령은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다.
  
  7. 내각에 권한과 책임 위임: 청와대 비서실이 장관 위에 군림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장관의 인사권을 존중했다.
  
  8. 관료 엘리트 중시, 학자들은 자문역: 실천력을 중시하던 朴 대통령은 집행기관장으로서는 학자를 거의 쓰지 않았다. 학자들은 자문역으로만 부렸다. 거의 유일한 예외는 서강대학교 교수 출신인 南悳祐 부총리였다. 南 부총리도 실무능력의 검증을 거친 다음에 중용되었다.
  
  9. 정치와 군대의 압력 차단: 그는 관료들이 국익과 효율성의 원칙下에서 소신대로 일할 수 있도록 군인들과 정치인들의 경제에 대한 개입을 차단하고 견제했다. 군대의 힘으로써 집권한 사람이 군대의 영향력을 차단한 예는 매우 드물 것이다.
  
  10. 경제발전 우선주의: 朴 대통령은 경제발전이 결국은 안보와 민주주의 발전으로 연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先경제발전, 後민주화’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에 따른 비난에 대해서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로 대응했다.
  
  11. 시장의 한 멤버로서의 정부: 朴 대통령은 정부가 시장의 규제자가 아니라 한 참여자라고 생각했다. 朴 대통령 시절의 정부는 시장 지배자라기보다는 시장의 일원으로서 시장 기능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정부는 기업가·은행가·개혁가로서의 역할도 했다. 電力·철강 등 민간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은 정부가 公기업을 만들어서 맡아서 하되, 경영은 민간기업 방식으로 운영되도록 했다.
  ‘官治(관치)경제가 아니라 대통령이 CEO로 뛴 주식회사 대한민국이었다.(김용환)’
  
  12. 주요 전략 선택의 적중: 朴 대통령이 채택한 수출주도형 공업화정책, 중점 투자전략, 先성장-後분배 전략, 과감한 외자유치 전략은 모두 성공했다. 朴 대통령은 정책과 전술은 수시로 변경했지만 철학과 전략은 18년 동안 그대로 밀고나갔다.
  
  
  
[ 2009-04-01, 16:4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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