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世光, 박정희를 향해 돌진하다!
연재 51/朴 대통령은 ‘퍽’ 소리가 난 뒤에도 6초 동안 연설을 계속했다. 녹음 테이프를 들으면 朴 대통령이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시종”이라고 할 때 달려가는 文을 본 청중의 “와~” 하는 함성과 함께 ‘탕’ 하는 제2탄 발사음이 들린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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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15일 오전, 文世光은 국립극장 맨 뒷줄에 약 10분간 앉아 朴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저격을 결심하고 허리춤에 질러 두었던 권총을 뽑아 배 밑으로 옮기는 순간 젖혀 두었던 공이치기가 격발되어 한 발이 발사되었다. ‘퍽’ 하는 소리를 내면서 총탄은 文의 왼쪽 허벅지를 관통했다.
  
  이때의 녹음 테이프를 들어 보면 朴 대통령의 연설 사이로 ‘퍽’ 하는 소리가 잡히지만 연설은 계속되었다. 공교롭게도 이때 朴 대통령은 북한 측에 대해서 불가침조약을 제의하고 있었다.
  
  “나는 오늘 이 뜻깊은 자리를 빌어서 조국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하는 순간 ‘퍽’ 소리가 난다. 文은 허벅지에 오발을 하자마자 놀라서 복도에서 안으로 세 번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통로로 나와 연단을 향하여 뛰어갔다. 통로 쪽 자리엔 경찰관들이 앉아 있었으나 아무도 文을 제지하지 않았다. 朴 대통령은 ‘퍽’ 소리가 난 뒤에도 6초 동안 연설을 계속했다. 녹음 테이프를 들으면 朴 대통령이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시종”이라고 할 때 달려가는 文을 본 청중의 “와~” 하는 함성과 함께 ‘탕’ 하는 제2탄 발사음이 들린다.
  
  이 총탄은 朴 대통령이 연설하던 演臺(연대)를 맞추었다. 文은 6초 동안 11.85m를 뛰어와서 20m 떨어진 朴 대통령을 향해서 쏜 것인데 맞히지 못했다. 文은 제3탄의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이었다. 제4탄을 쏘려고 하니 朴 대통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朴 대통령은 방탄연대 뒤에서 몸을 낮추어 버린 것이다. 文은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려 18.2m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陸英修 여사를 향해서 총을 쏘았다. 총탄은 陸 여사의 머리를 관통했다. 文은 제5탄을 쏠 때 청중 이대산 씨가 발을 걸어 넘어지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은 연단 위 태극기에 맞았다. 文은 넘어진 상태에서 체포되었다.
  
  文은 자리에서 뛰어나와 6초 만에 제2탄을 쏘았고, 7.5초 때 제5탄을 쏘고 잡혔다. 1.5초 사이에 세 발의 총성이 들렸다. 연발사격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을 놓고 경호의 실수를 미세하게 따져 나가면 현실의 긴박감과 유리되어 탁상공론이 될 수 있다.
  
  文이 총을 들고 단상을 향하여 뛸 때 가장 먼저 대응자세를 취한 사람은 朴鐘圭 경호실장이다. 그는 일어서더니 권총을 뽑아들고 단상 앞으로 뛰어나온다. 그가 일어선 것은 文이 제1탄을 쏘아 ‘퍽’ 소리가 난 지 4.5초 때였다. 그는 범인을 향해서 쏘려고 단상 앞으로 뛰어나오는데 관중석에서 단상으로 보내는 조명에 눈이 부셨다. 표적을 잃은 것이었다. 朴 실장의 행동에 대해서 1998년 청와대 경호실이 펴낸 사례보고서는 이렇게 지적했다.
  
  <경호실장이라면 범인에 대한 응사가 主가 아니라, 피경호인 朴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연대로 나와 피경호인의 머리를 숙이게 조치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朴 대통령이 스스로 연대 뒤에 몸을 숨긴 시기는 2탄이 연대에 맞은 후이거나, 3탄이 불발된 이후이기 때문에 범인이 제2탄을 정확히 사격했거나, 3탄이 불발되지 않았더라면 朴 대통령 저격이 성공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1998년 경호실의 사례연구서는 陸 여사의 피격은 막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범인이 朴 대통령을 좀더 가까운 거리에서 저격하기 위하여 통로를 달리면서 총을 쏘는 상황인데도 통로 좌우측에 앉아 있던 경찰 근무자들은 아무런 경호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저 앉아만 있었다. 총을 쏘는 범인을 밀어 넘어뜨리거나 정조준을 할 수 없도록 범인의 몸을 건드리기만 했어도 陸 여사는 머리에 총을 맞지 않았을 것이다.
  
  좌석에 앉아 있던 12명의 경찰관들은 무엇 때문에 행사장에 와서 앉아 있었는지에 관한 기본적인 행사교육이나 우발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단상에는 후미 근무자 2명을 제외한 5명의 근무자가 있었지만 범인이 고함을 지르면서 단상 쪽으로 뛰어나오며 사격을 하는 상황인데도 단상 좌우 측의 근무자들은 朴 대통령이나 陸 여사를 방호하러 즉각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朴鐘圭 경호실장이 뛰어나온 시점에 단상 근무자들이 행동을 취하여 피경호인을 방호하면서 머리를 숙이게 했더라면 陸 여사는 생존했을 가능성이 컸다.
  
  단상의 수행요원들은 범인이 연대를 맞힌 이후에야 행동을 취했으나 陸 여사를 방호하려고 달려가던 경호원은 陸 여사의 뒤쪽으로 숨고 말았다. 이는 경호원으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文世光의 朴正熙 저격 및 陸英修 사살 사건은 공식행사 도중에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생중계 중에 일어났기 때문에 가장 상세히 기록되고 목격된 암살사건이 되었다. 수사도 완벽하게 이뤄져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는 사건이다.
  
  일부 방송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과정을 보면 수사 전문가들이 아니라 아마추어들이 주로 음모설을 제기한다. 이들은 사건의 전모를 종합적으로 보지 않고 극히 부분적인 점(그것도 아마추어의 눈으로 보니 이상하지, 전문가 눈으로는 하등 이상할 게 없다)을 아마추어의 눈으로 들여다보고 황당한 상상을 하고 있다.
  
  당시 장면을 담은 텔레비전 중계 필름을 한 번 더 보자.
  
  <이날 식장은 무대 위로만 조명이 쏟아졌고 객석은 어두웠다. 文이 쏜 제2탄의 총성이 울리는 순간 단상의 朴鐘圭 경호실장은 이상한 움직임(文이 뛰어나오는 모습)을 발견한 듯 고개를 빼며 왼손에 종이뭉치를 든 채 일어섰다. 세 번째 총성(이것이 陸 여사 명중탄)이 울릴 때는 무대 맨 앞으로 뛰어나와 종이뭉치와 권총집을 떨어뜨렸다. 네 번째 총성이 울릴 때는 오른손에 권총을 거머쥐고 총소리가 나는 곳을 겨냥한다.
  
  이때 朴 실장의 위치는 文이 총을 쏜 곳과 陸英修 여사를 잇는 線(선)에서 약간 왼쪽으로 비낀 곳이었다. 네 번째 총성과 동시에 여러 사람이 몰려들어 文을 제압하자 朴 실장은 겨누었던 총을 거두어 들였다.
  
  단상 위의 요인들은 총성이 울리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쓰러지듯 몸을 낮추었다. 개중에는 자신이 앉았던 의자 뒤로 숨는 사람도 있었다. 陸英修 여사의 동작이 가장 늦었다. 세 번째 총성이 울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오른쪽으로 몸을 낮추려고 고개를 숙인 듯하던 陸 여사는 뒤쪽으로 급히 고개가 젖혀졌다(이때 머리에 총탄을 맞았다). 그리고는 서서히 왼쪽으로 머리를 떨구었다(注: 여기서 왼쪽·오른쪽은 단상을 바라보는 視點 기준).
  
  文世光이 체포된 직후 또 한 방의 총소리가 울리고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壇上(단상)의 한 경호원이 뒤늦게 객석을 향해 쏜 총알이 합창단원으로 앉아 있던 D열 86번의 張峯華(장봉화·당시 18세. 성동여실高 2학년) 양을 맞혀 절명케 하는 순간이었다.
  
  이 총소리 직후 벽면을 비추던 방송은 ‘지지~’ 하는 소리와 함께 중단된다. 경호원들은 무대 위에서 권총을 뽑아 들고 演臺 뒤로 숨은 대통령을 경호한다. 객석의 하객들은 의자 밑으로 숨느라고 아우성을 친다. 이때 독립유공자석에 앉아 있던 卓금선 여인이 “국모님이…”라고 소리치며 무대 위로 달려 올라가 陸英修 여사를 안아 일으킨다. 陸 여사는 卓 여인과 경호원들에 의해 들려 나가고 張峯華 양과 저격범 文도 밖으로 들려 나간다>
  
  朴 대통령 가족 경호 담당인 李相烈 수행과장은 이날 국립극장 단상 뒤쪽에 쳐진 커튼의 뒤에서 근무 중이었다.
  
  “‘와~’ 하고 소리가 나서 커튼을 젖히고 내다보니 文世光이 달려오면서 총을 쏘는 것이 순간적으로 보였습니다. 제가 연대 쪽으로 뛰어나가 보니 각하께선 오른쪽으로 넘어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일으켜서 연대 뒤에 쪼그리고 앉도록 했지요. 朴 대통령께서는 ‘야, 우리 집사람에게 가봐’라고 하시더군요. 순간적으로 무슨 예감이 드신 듯했어요.”
  
  녹음 테이프에선 이런 소리가 들린다.
  
  〈”가만 계세요.”(경호원이 연단 뒤에 숨은 대통령에게)
  
  “가만히 계세요.”(대통령에 대한 경호원의 당부인 듯함)
  
  “잡았니?”(대통령의 물음인 듯함)
  
  “예.”(경호원의 답변인 듯함)
  
  “사모님이….”(경호원의 말인 듯함)〉
  
  이 직후 ‘탕’ 하는 소리가 나고 여자들의 비명이 들린다. 뒤늦게 경호원이 쏜 총탄에 합창단원 張양이 맞는 장면이다. 이 총격은 文世光을 체포하는 소란 속에서 일어났다. 文이 마지막 총탄을 쏜 지 15초 뒤였다. 이 총격의 주인공인 金모 경호원은 1998년 경호실 보고서 작성자에게 이런 증언을 남겼다.
  
  “나는 단상의 휘장 뒤편에서 경호에 임하고 있었다. ‘탕’ 하는 총소리와 군중의 함성을 듣고 휘장을 헤치고 무대로 나왔다. 文世光이 통로 중간쯤에서 단상을 향해 총을 쏘는 것이 보였다. 朴鐘圭 실장의 권총에서 나는 두 발 정도의 총소리를 듣고 범인을 향해서 실탄을 발사했다.
  
  잠시 후 범인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내가 쏜 실탄에 의해 제압된 것이라고 오해했다(실제로는 시민이 발을 걸어 넘어뜨려 잡혔다). 가늠쇠를 보고 발사할 수는 없었다. 정확한 사격이 되지 않아 범인제압에 실패하고 참석자를 희생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는 것이 마음에 한이 된다.”
  
  모든 것이 순간적이었다. 文世光이 네 발을 쏘고 붙들릴 때까지는 8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사이에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事後(사후)에 설명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金 경호원이 총을 쏘았을 때는 文이 붙잡힌 뒤였는데도 그는 자신의 총격에 文이 맞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다시 당시 상황을 동영상으로 확인해보자.
  
  <2분 만에 演臺 위로 朴 대통령이 몸을 드러내자 장내에서는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전 10시 26분 20초, 朴正熙 대통령은 예의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여러분, 하던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라고 운을 떼었다. 당황하거나 겁먹은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 10여 초간 아무 말 없이 연설문을 바라보던 朴 대통령은 중단했던 기념사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내 “다시 한 번 우리가 원하는 평화통일의 기본원칙을 명백히 하고자 합니다. 그 원칙의 첫 번째는…”라면서 연설하기 시작했다.
  
  연설을 재개한 지 4분 40초쯤 지나면서부터 朴 대통령은 조금씩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연설문만 향하던 눈길을 거두어 객석을 이따끔 쳐다보았고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이기도 했다. 꼿꼿하던 몸을 조금씩 움직이는 횟수가 많아졌고 말을 빨리 하는 부분도 있었다. 읽은 곳을 다시 읽어 가볍게 더듬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도 두 군데 있었다. 연설문을 건너 뛰어서 읽거나 떨리는 목소리를 내는 실수는 전혀 하지 않았다. 연설문을 다 읽은 朴 대통령은 “감사합니다”라면서 연대 뒤로 한 발 물러나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우렁찬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신의 의자로 되돌아가던 朴 대통령은 밑에 떨어진 陸 여사의 핸드백과 고무신을 주우려고 몸을 숙였다. 梁鐸植 서울시장이 재빨리 몸을 숙여 고무신과 핸드백을 먼저 주워 경호원들에게 건네 주었다. 의자에 앉은 朴 대통령은 曺相鎬 의전수석을 불러 뭔가를 지시했다.
  
  장내 아나운서의 말에 따라 성동여자실업高 학생들이 일어나 광복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동요된 표정 없이 노래를 불렀다. 자리에서 일어선 朴 대통령은 3부요인 등과 악수를 나누고 무대 뒤로 퇴장했다.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朴 대통령이 퇴장하자 절대금연인 객석 여기저기에서 뽀얀 담배연기가 피어올랐다. 장내 아나운서는 “지금 퇴장할 수 없으니 잠시 자리에서 기다려 달라”는 안내 방송을 했다. 청중들은 오전 10시 50분부터 한 사람씩 몸 검색을 받고 밖으로 나왔다>
  
  이날 외국기자 다섯 명이 현장에 있었다. 많은 편이었다. 당시 민주화 운동이 거세지고 있었고, 朴 대통령이 중대 발표를 할 것이란 소문이 돌아 서울과 도쿄 특파원들이 왔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돈 오버도퍼 기자(워싱턴 포스트)는 “그날 내가 가장 놀란 것은 文世光의 총격이 아니라 朴 대통령이 연설을 再開(재개)한 것이다. 아내가 총에 맞고 실려 나갔는데도 연설을 계속하다니, 그것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차분하게…. 우리 미국인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이해도 가질 않았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은 朴 대통령의 공인다운 태도를, 미국인들은 인간으로서의 冷血的(냉혈적)인 모습을 느꼈던 것이다.
  
  陸英修 여사가 서울대학병원으로 실려 가고 공식행사가 끝난 직후, 국립극장 극장장실에서는 침통한 대화가 오갔다. 극장장실에는 朴 대통령을 위시하여 丁一權 국회의장, 閔復基 대법원장, 金正濂 비서실장 등이 배석했다. 朴 대통령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내용을 좀 설명해.”
  
  “…”
  
  좌중에는 침묵만이 흘렀고, 朴 대통령의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극장장실 입구 바로 앞에 朴鐘圭 실장이 멍하니 서 있었다. 상기된 얼굴로 하늘만을 응시한 채 누가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누가 와서 朴 대통령의 말을 전해도 말이 없었다.
  
  “각하께서 상황 설명을 듣고 싶어하십니다.”
  
  “…”
  
  朴 대통령은 몹시 궁금한 듯 다그쳤다.
  
  “뭘 좀 알아봤나?”
  
  한 비서관이 말했다.
  
  “알아본 것은 없지만 궁금하시다면 저라도 본 대로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래, 말해 봐.”
  
  “첫 번째 총성이 울리자, 단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피하고 朴鐘圭 실장이 뛰어나가 즉시 응사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뒤로 돌아 각하의 허리춤을 잡아 연설대 밑으로 피하게 한 다음, 영부인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朴 대통령은 간략한 설명을 들은 후, 영부인의 안부는 묻지도 않고 대뜸 이런 말을 했다.
  
  “객석은 어두워 잘 안 보일 텐데 그곳에다 쏘게 되면 시민들이 다치잖아.”
  
  “응사 시에는 별 일이 없었습니다. 영부인은 아마 지금쯤 서울대학병원에 도착하셨을 것입니다.”
  
  “그럼 다음 행사장으로 갑시다.”
  
  朴 대통령의 다음 행사장, 즉 지하철 개통식으로의 이동 지시가 떨어지자, 주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만류했다.
  
  “각하! 그것은 안 됩니다. 역사에 보면 오스트리아 황태자 살해 사건 때도 암살조가 세 팀이 있었습니다. 제1조가 던진 폭탄이 황태자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게 되자, 제2조가 다른 장소에서 결국 황태자를 살해하지 않았습니까. 측근의 만류를 무시하고 예정대로 두 번째 행사장에 참석했다가 결국 폭탄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부하들은 제2의 암살조가 또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등,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가면서 진언을 했다.
  
  朴 대통령은 그런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질 않았다.
  
  “일단 일정이 잡힌 공식행사이니만큼 가봐야 되지 않겠는가.”
  
  “각하께서는 서울대학병원으로 가시고, 지하철 개통식에는 丁一權 국회의장이 대신 참석하는 게 좋겠습니다.”
  
  목표물이 朴 대통령이니만큼 다른 사람은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래도 개통식에 가봐야지.”
  
  그러면서 朴 대통령은 자동차에 올랐다가 망설이듯이 다시 말했다.
  
  “아무래도 집사람이 걱정되니까 내 대신 丁 의장께서 참석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文世光 사건 수사 책임자가 되는 정보부 李龍澤 수사국장은 8월 15일 새벽에 골프장으로 가기 위하여 일어났다. 잠자리에 있던 아내도 일어나더니 “꿈이 이상합니다. 앉아서 제 이야기를 좀 들어보세요”라고 했다. 꿈 이야기가 심상치 않았다. 陸 여사가 소복을 입고 한 소녀를 이끌고 산으로 올라가더란 것이었다. 陸 여사가 소복을 입었다면 朴 대통령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李 국장은 골프 약속을 취소하고 남산의 수사국으로 출근했다. 당직자에게 간밤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그는 수사국 요원들을 비상대기 상태로 놓았다. 그는 오전 10시부터 텔레비전을 보다가 총성을 듣고 벌떡 일어났다. 뛰어나오면서 부국장실의 문을 여니 간부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야, 이 사람들아, 놀아도 텔레비전은 틀어 놓고 해야지. 지금 8·15 행사장에서 총소리가 났으니 출동하자.”
  
  李 국장은 과장을 태우고 국립극장으로 달리면서 본부에 지시했다.
  
  “방송사에 연락을 해서 국립극장에서 찍은 장면은 방영하지 못하도록 조치하라.”
  
  李 국장이 국립극장장실에 들어가니 朴 대통령이 침통하게 앉아 있었고, 朴鐘圭 실장이 얼굴이 하얗게 되어 입을 다물고 있었다. 李 국장이 보니 朴 대통령의 양복 어깻죽지에 검은 물방울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그는 다가가서 손가락으로 그곳을 만져 보았다. 피였다. 아마도 총탄이 陸 여사의 머리를 관통할 때 튄 피 같았다.
  
  李 국장이 들으니 범인은 체포되었다가 오발로 다친 허벅지 치료 때문에 국립의료원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李 국장이 국립의료원으로 가는 車中에서 라디오를 들으니 “범인은 일본인이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국립의료원에 이르러 안으로 들어가는데 마침 경호실 정보처장이 범인의 여권을 들고 나오고 있었다. 李 국장이 받아서 뒤져 보니 여권과 함께 외국인등록증이 나왔다. 여권에는 이름이 ‘요시이 유키오’로 쓰여 있었으나, 외국인등록증엔 文世光으로 적혀 있었다. 경호실에선 여권 이름만 보고 일본인이 범인이라고 기자들에게 이야기한 모양이었다. 경호처장은 “일본인이 아니네”라고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李 국장은 응급실로 들어갔다. 의사들이 文世光의 오발로 관통당한 허벅지를 붕대로 감고 바지를 입히고 있었다. 범인은 얼굴과 몸이 퉁퉁한 好人型(호인형)이었다. 李 국장이 일본말로 이야기했다.
  
  “아나다 조센진데쇼. 우소와 다메다(당신은 조선인이지. 거짓말은 안 돼).”
  
  “하이.”
  
  李 국장은 陸 여사가 수술을 받고 있던 서울대학병원으로 갔다. 朴 대통령은 전용 입원실에 있었다. 李 국장이 범인은 在日 한국인이라고 보고하니 朴 대통령은 “허, 또 우사(창피당)하게 생겼구나”라고 말했다. 朴 대통령은 朴鐘圭 실장을 향해서 “어떻게 범인이 일본인이라고 나갔나”라고 추궁하더니, “앞으로 수사는 정보부가 맡아서 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李 국장은 陸 여사의 머리를 관통한 총알과 文이 오발한 권총 탄알을 현장에서 직접 찾아냈다. 陸 여사의 머리를 꿰뚫은 총알은 떼구루루 굴러 무대 휘장 뒤로 갔기 때문에 찾는 데 애를 먹었다. 文의 오발탄도 접는 의자에 끼여 있어 겉에선 잘 보이지 않았다.
  
  정보부는 文世光의 진술을 받아 일본 경찰에 알려 주고 보강수사를 부탁했다. 李국장이 아직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는 文世光이 몇 번이나 “인천이 어디 있는가”라고 수사관에게 묻던 점이었다. “왜 묻는가”라고 추궁했으나 文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북한 측에서 文에게 암살에 성공하면 반드시 구출해 주겠다고 약속한 모양입니다. 인천이 그런 목적의 접선장소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文은 입을 닫아 버렸습니다.”
  
  朴鐘圭 경호실장에 대한 신문은 李龍澤 수사국장이 집을 찾아가 직접 했다. 朴 실장은 文世光의 제1탄(허벅지를 관통한 오발탄)이 발사되는 소리를 들었을 때 電球(전구)가 터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文이 통로를 달려나오는 것을 보고 朴 실장은 왼손에 들고 있던 프로그램 종이를 떨어뜨리고는 오른손에 든 권총의 공이치기를 뒤로 젖혔다. 그가 文을 향해서 쏘려고 하는 찰나에 단상을 향해 비추던 조명이 눈을 부시게 해 표적을 잃어버렸다. 朴 실장은 한 방을 쏘긴 했는데 청중이 다칠까 봐 총신을 올려 발사했다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여중생을 죽게 한 총알은 다른 경호원이 쏜 것이었다.
  
  李龍澤 국장은 朴 실장의 진술을 확인하기 위해서 국립극장 안의 조명을 사건당일과 같이 재현해 놓고 단상에 서 보았다. 과연 눈이 부셔 조준사격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李 국장은 朴 실장의 권총을 압수하고 그 권총에서 발사된 총알과 대조했다고 한다.
  
  金淇春 검사(前 법무장관)는 당시 중앙정보부에 파견 나가 정보부장 보좌관을 맡고 있었다. 文世光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8월 초순 金淇春 검사는 가족과 함께 대천해수욕장으로 여름휴가를 갔었다. 휴가지에서 金 검사는 막 한국어 번역판이 나온 소설 《자칼의 날》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한다. 그가 휴가에서 돌아온 지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아 文世光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申稙秀 정보부장은 8월 16일 金淇春 검사를 불렀다.
  
  “범인이 어제부터 서른 시간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있다. 내가 청와대 대책회의에 나가서도 할 말이 없다. 金 검사가 범행 동기와 배후를 캐내어 보라. 나를 비롯한 간부들이 오늘은 퇴근하지 않고 기다리겠다.”
  
  文은 링거주사를 맞으면서 남산 분실 수사국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金 검사는 일본어 통역을 옆에 앉히고 文과 대면했다. 金 검사는 수사관의 제1성이 범인의 진술을 얻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만큼 곰곰이 생각해 둔 질문을 던졌다.
  
  ―소설 《자칼의 날》을 읽었지요.
  
  “읽었습니다. 센세이(先生)도 읽었습니까.”
  
  ―나도 읽었소. 그런데 당신이 바로 자칼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내가 바로 자칼입니다.”
  
  실마리가 잡히자 대화는 차츰 본론으로 들어갔다.
  
  ―당신의 사상이 무엇인가.
  
  “나는 공산주의를 신봉합니다. 나는 공산혁명을 이룩하려는 한 수단으로 여기에 왔습니다.”
  
  ―그렇다면 혁명가답게 당당하게 자신의 행위를 설명하라. 왜 비겁하게 말을 하지 않는가.
  
  “알았습니다. 이야기하겠습니다.”
  
  ―여권명 요시이 유키오는 누구인가.
  
  “여자친구인 요시이 미키코(吉井美喜子)의 남편입니다.”
  
  ―요시이 유키오 명의의 여권은 어떻게 마련했나.
  
  “요시이 미키코가 남편 요시이 유키오의 호적등본 등 인적사항 서류를 제공해 주어 만들 수 있었습니다.”
  
  ―권총은 어디에서 났는가.
  
  “오사카 고츠(高津) 파출소에서 훔쳤습니다.”
  
  ―누구의 지시로 훔쳤는가.
  
  “조총련 오사카 西지부 정치부장 金浩龍(김호룡)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金浩龍으로부터 어떤 지시를 받았는가.
  
  “1973년 11월 11일 홍콩 여행 중 권총을 구입하라는 명령과 함께 金으로부터 50만 엔을 받았습니다. 1974년 2월 초순의 어느 날 밤 10시쯤에 ‘朴正熙의 암살은 8·15 기념식 행사 때 하기로 한다. 이를 위한 사전준비로 현재 관여하고 있는 金大中 구출위원회 등의 모든 조직활동에서 손을 떼라. 도쿄 아다치(足立)에 있는 아카후도(赤不動) 병원에 가와가미 유지(川上勇治)란 이름으로 입원해라. 입원비는 조총련이 담당한다’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나는 1974년 2월 12일부터 3월 11일까지 이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공산주의 사상학습을 하였습니다. 이 기간 金浩龍으로부터 돈을 받았습니다.”
  
  ―만경봉號에 탄 적이 있는가.
  
  “있습니다. 1974년 5월 3일 밤 10시쯤 金浩龍의 지시로 한 시간 가량 승선하였습니다.”
  
  ―만경봉號에서 누구를 만났는가.
  
  “배 식당에서 47세 가량의 북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金 검사는 文世光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文이 머물렀다는 만경봉號 내부와 고츠 파출소의 내부 모습을 그리게 했다. 文은 의외로 그림솜씨가 있었다.
  
  범행 배후를 밝히면서도 文은 당당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국가원수를 저격한 죄가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도 전혀 죽음을 예상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文은 이따금 “밖은 괜찮으냐”란 질문을 했다. 그때까지도 文은 범행을 하고 나면 혁명이 일어나고 혁명세력이 자기를 구하러 올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金 검사가 文으로부터 받아낸 진술은 곧 신문 방송을 통해 알려졌다. 기자들의 관심은 요시이 유키오와 요시이 미키코 부부, 그리고 金浩龍으로 쏠렸다.
  
  8월 16일 오후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은 요시이 미키코(당시 24세)를 여권법 및 출입국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하였다. 요시이 미키코가 1973년 11월 초 같은 방법으로 남편 명의의 여권을 文世光에게 만들어 주었으며, 그해 11월 19일 이 여권을 사용한 文世光과 함께 2박3일간 홍콩 여행을 간 사실을 밝혀 냈다.
  
  8월 18일 오후 배후 인물 金浩龍은 조총련 오사카 이쿠노구(生野區) 西지부 사무실에 나타나 기자회견을 가졌다.
  
  “文世光과는 1972년 9, 10월경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를 배포하던 중 그의 집 앞에서 처음 만났다. 지금까지 文을 만난 것은 모두 세 번이며, 1974년 7월에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文에게 암살지령이나 거사자금을 전달한 사실은 없다. 요시이 부부와는 면식조차 없다. 일본 경찰이 이 사건과 관련, 직접 찾아오거나 출두요청을 해오더라도 (나는) 응하지 않겠다.”
  
  초기엔 일본 경찰도 범인이 일본 파출소에서 훔친 권총으로 한국의 대통령을 저격한 것 때문에 나름대로 수사에 열을 올렸다. 한국 측이 文世光의 배후세력으로 조총련을 지목하자 일본 수사당국은 非협조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이 이렇게 나오게 된 데는 당시 金大中 씨를 납치한 것으로 알려진 중앙정보부가 文世光 사건을 맡은 것이 한 원인이었다.
  
  文世光 사건을 수사했던 전직 정보부원은 이렇게 말했다.
  
  “일본 경찰에서 金大中 씨 사건과 관련한 협조 의뢰 문서를 보내오면 우리는 무조건 ‘잘 알 수 없음’이라는 회답을 보내곤 했습니다. 주권이 침해당했다고 시끄러웠던 일본으로서는 앙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일본 측은 그 앙갚음을 文世光 사건 때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도가 점점 심해져 ‘文이 미키코를 만났다는 다방이 오사카 ○○지역에 있다는데 사실인가’라고 물어도 ‘네 시간 동안 찾아보았지만 잘 모르겠다’는 회신이 왔습니다. 우리가 직접 확인해 보니 찾기 쉬운 곳에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 2009-04-02, 21:1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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