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 잃고 詩人이 된 朴正熙
연재 52/한 송이 흰 목련이 봄바람에 지듯이, 아내만 혼자 가고 나만 혼자 남았으니, 斷腸의 이 슬픔을 어디다 호소하랴.

조갑제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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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 대통령은 부인 陸英修를 잃은 이후 자신의 일기에 여러 번 詩를 남겼다. 1974년 8월19일 장례식을 치른 다음날 朴 대통령은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는 국민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했는데 이런 표현을 썼다.
  
  <축제일을 슬픔으로 보내지 않을 수 없도록 한 데 대하여 진심으로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보내주신 정중한 조의에 보답하는 길은 이 땅에서 폭력과 빈곤을 몰아내고 사랑과 희망이 가득한 행복한 생활을 우리 모두가 골고루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8월 20일 朴 대통령은 오후 5시경에 車智澈 국회의원을 불러 경호실장에 임명하겠다는 사실을 통보한 후 저녁에 이런 詩를 썼다.
  
  <한 송이 흰 목련이 바람에 지듯이
  喪家에는 무거운 침묵 속에
  씨롱 씨롱 씨롱
  매미 소리만이
  가신 님을 그리워하는 듯
  팔월의 태양 아래
  붉게 물들은 백일홍이
  마음의 상처를 달래 주는 듯
  한 송이 흰 목련이 봄바람에 지듯이
  아내만 혼자 가고 나만 남았으니
  斷腸의 이 슬픔을 어디다 호소하리>
  
  朴 대통령은 8월 31일 밤에는 ‘추억의 흰 목련 遺芳千秋’란 제목으로 詩를 썼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산천초목도 슬퍼하던 날
  당신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는
  겨레의 물결이 온 장안을 뒤덮고
  전국 방방곡곡에 모여서 빌었다오
  
  가신 님 막을 길 없으니
  부디부디 잘 가오
  편안히 가시오
  영생 극락하시어
  그토록 사랑하시던
  이 겨레를 지켜주소서
  
  불행한 자에게는 용기를 주시고
  슬픈 자에게는 희망을 주고
  가난한 자에게는 사랑을 베풀고
  구석구석 다니며 보살피더니
  이제 마지막 떠나니
  이들 불우한 사람들은
  그 따스한 손길을 어디서 찾아보리
  그 누구에게 구하리
  극락천상에서도
  우리를 잊지 말고
  길이길이 보살펴 주고
  
  우아하고 소담스러운
  한 송이 흰 목련이
  말없이 소리없이 지고 가버리니
  꽃은 져도
  향기만은 남아 있도다>
  
  朴 대통령은 9월 1일 일요일 밤에도 詩를 썼다.
  
  <아는지 모르는지
  비가 와도 바람 불어도
  꽃이 피고 꽃이 져도
  밤이 가고 낮이 와도
  당신은 아는지 모르는지
  해가 뜨고 달이 져도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와도
  당신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 3일 뒤인 9월 4일 수요일 朴 대통령은 오후 6시 55분부터 8시 25분까지 金正濂 비서실장, 車智澈 경호실장, 崔永喆 의원, 柳赫仁 정무수석 비서관과 함께 청와대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한 뒤 아내 없는 침실로 돌아와 詩를 썼다.
  
  <이제는 슬퍼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건만
  문득 떠오르는 당신의 영상
  그 우아한 모습
  그 다정한 목소리
  그 온화한 미소
  백목련처럼 청아한 기품
  이제는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 더
  잊혀지지 않는 당신의 모습
  
  당신의 그림자
  당신의 손때
  당신의 체취
  당신의 앉았던 의자
  당신의 만지던 물건
  당신이 입던 의복
  당신이 신던 신발
  당신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이거 보세요”
  “어디 계세요”
  평생을 두고 나에게
  “여보” 한번 부르지 못하던
  결혼하던 그날부터 이십사 년간
  하루같이
  정숙하고도 상냥한 아내로서
  간직하여 온 현모양처의 덕을
  어찌 잊으리, 어찌 잊을 수가 있으리>
  
  朴 대통령은 아내를 잃은 뒤 한동안 일요일에 즐기던 골프를 치지 않았다. 9월 14일은 토요일이었는데 그는 오후 2시 34분부터 두 시간 동안 서울 근교를 드라이브했다. 다음날 일요일 오후 4시 50분부터도 드라이브를 하면서 보냈다. 이날 청와대로 돌아와서 쓴 詩의 제목은 ‘백일홍’이었다.
  
  <당신이 먼 길을 떠나던 날
  청와대 뜰에 붉게 피었던 백일홍과
  숲 속의 요란스러운 매미 소리는
  주인 잃은 슬픔을 애달파 하는 듯
  다소곳이 흐느끼고 메아리쳤는데
  이제 벌써 당신이 가고 한 달
  
  아침이슬에 젖은 백일홍은
  아직도 눈물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데
  매미 소리는 이제 지친 듯
  북악산 골짜기로 사라져 가고
  가을빛이 서서히 뜰에 찾아드니
  세월이 빠름을 새삼 느끼게 되노라
  
  여름이 가면 가을이 찾아오고
  가을이 가면 또 겨울이 찾아오겠지만
  당신은 언제 또 다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한 번 가면 다시 못 오는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아, 이것이 天定의 섭리란 말인가
  아, 그대여,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나리>
  
  1974년 9월 30일은 추석이었다. 이날 오전 7시 朴 대통령은 국립묘지를 찾았다. 이 감상을 그는 그날 밤에 詩로 남겼다.
  
  <당신이 이곳에 와서
  고이 잠든 지 41일째
  어머니도 불편하신 몸을 무릅쓰고
  같이 오셨는데
  어찌 왔느냐 하는 말 한마디 없소
  잘 있었느냐는 인사 한마디 없소
  
  아니야, 당신도 무척 반가와서
  인사를 했겠지
  다만 우리가 당신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뿐이야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내 귀에 생생히 들리는 것 같아
  
  당신도 잘 있었소
  홀로 얼마나 외로웠겠소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당신의 옆에
  있다고 믿고 있어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당신이 그리우면 언제나 또 찾아오겠소
  고이 잠드오. 또 찾아오고
  또 찾아올 테니
  그럼 안녕!>
  
  
  1974년 11월 23일, 朴正熙 대통령은 訪韓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미국 포드 대통령을 김포공항에까지 환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동작동 국립묘지에 들러 아내의 무덤을 둘러보았다.
  
  비석은 아직까지 돌로 만들지 못해 임시로 木碑(목비)를 꽂아 둔 상태였다. 朴 대통령은 묘소 주위를 둘러본 뒤 木碑를 가리키며 말했다.
  
  “임시로 세운 비석이지만 깨끗하고 아름답게 되어 있는 것을 보니 생전의 지만이 엄마를 연상하게 하는구먼. 애쓰신 분들이 참 고마워. 관리 사무실 어디 있나? 거기 들렀다 가지.”
  
  朴 대통령은 그곳을 떠나기가 못내 아쉬운 듯 천천히 발을 떼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춘하추동을 여기서 맞는다는 것을 생각하니 아쉽고 안타까워. 그러나 그 사람이 늘 걱정하고 사랑하는 조국이 나날이 발전하고 애들도 잘 자라고 있으니 마음놓고 天上에서 자리 잡고 있겠지. 나도 열심히 일을 더 잘해야겠소.”
  
  朴 대통령은 느린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관리실에 들러 그곳 직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잘 돌보아줘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잘 돌봐주십시오.”
  
  朴 대통령은 조금도 대통령 티를 내지 않고, 단지 부인의 산소를 관리하는 분들에게 사례를 하는 평범한 남편의 모습으로 최대한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관리실을 나와서 떠날 때도 朴 대통령은 아쉬움이 남는지 묘소를 바라보았다.
  
  “잘 있으시오….”
  
  말끝을 흐리며 아내에게 혼잣말로 작별 인사를 하고 나서도 朴 대통령은 몇 번이나 산소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청와대로 향하는 차 안에서 朴 대통령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날 밤 朴正熙는 이런 일기를 남겼다.
  
  <降雪(금년 첫눈) 종일 흐림
  
  김포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에 동작동에 들러 아내 幽宅(유택)을 찾다. 그저께 제막한 비석이 퍽도 깨끗하고 아담하게 서 있고 비문도 단정하고 맵시 있게 부각되어 있다. 애쓰신 분들에게 마음속으로 감사를 드린다. 당신이 여기에 묻혀 그 앞에 비석이 설 줄이야. 당신은 여기에 잠들어 風雨星霜(풍우성상) 춘하추동 가고 오고, 오고 가도 아는지 모르는지? 어찌 모를 리가 있으랴.
  
  당신이 사랑하는 이 조국과 겨레의 삶의 모습을 낱낱이 지켜보며 보살펴 주고 사랑해 주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오.
  
  아내가 그토록 정성들여 애쓰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저 깜박거리는 네온 불빛이 동작동에서도 보이겠지>
  
  1975년 8월 초 朴 대통령은 진해 猪島(저도)에서 여름 휴가를 보냈다. 그러나 말이 휴가이지 일종의 지방 시찰과 다름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朴 대통령은 몇 명의 경호원과 수행원만 데리고 연락도 없이 섬을 떠나 거의 하루 종일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궁금해했으나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저녁나절에야 朴 대통령이 숙소에 돌아왔다. 鮮于煉 공보비서관이 朴 대통령에게 물었다.
  
  “어디 갔다 오셨습니까?”
  
  “구경 좀 하고 왔지.”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주위에서 계속 물어보니까 그때서야 설명을 했다.
  
  “여천 공업단지, 호남정유 메탄올 공장, 七肥(칠비), 삼일만 부두공사 현장, 중화학공업단지, 여천 단지 공사 현장 등을 보고 왔소. 많이 구경했지? 허허. 지금 진행 중인 공사들이 완공되어야 선진국으로 가는 문이 조금씩 가까워질 거야. 오늘 그 많은 공장과 공사 현장을 보니까 마음이 후련해지더군. 해수욕하는 것보다도 한결 시원한 것 같아.”
  
  이 말을 하는 朴 대통령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朴 대통령의 이런 모습을 보고 수행했던 기자들이 나중에 “영부인의 1주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저렇게 종일 일을 하실 수 있을까” 라고 수군거렸다.
  
  그날 밤 朴 대통령을 찾은 한 비서가 이런 말을 했다.
  
  “영부인의 기일이 다가왔는데 각하께서는 일만 하신다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이 말을 들은 朴 대통령은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며 침통하게 눈을 감았다.
  
  “지만이 엄마 기일이 다가오니까 해수욕 생각도 없고, 그래서 團地(단지)들을 돌아보고 온 거야. 만석꾼 집에서 고이 자란 지만이 엄마 소원이 뭔지 알아?
  
  나보다 더한 개혁주의자였고, 국민들을 잘살게 해달라고 늘 나에게 말했어. 오늘 다녀온 곳이 모두 우리가 잘살게 되는 기본 시설 아닌가.”
  
  이 얘기를 하는 朴 대통령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 내가 혼자 시찰하고 온 줄 알아? 지만이 엄마랑 같이 갔다 온 거야.”
  
  낮은 목소리로 쓸쓸하게 말하는 朴 대통령의 그 말에 순간 비서는 온몸이 저리는 것 같았다고 한다.
  
  朴 대통령이 陸 여사를 그리워하며 쓴 일기 속의 詩는 수십 편에 이른다. 1975년 8월 진해 猪島 별장으로 휴가를 갔을 때는 1년 전의 일이 생각나 더욱 애잔한 詩를 남겼다. 8월 6일자 詩.
  
  <一首
  
  님과 함께 놀던 곳에
  나 홀로 찾아오니
  우거진 숲 속에서
  매미만이 반겨하네
  앉은 자리 밟던 자국
  체온마저 따스하여라
  猪島 섬 백사장에
  모래마다 밟던 자국
  파도 소리 예와 같네
  짝을 잃은 저 기러기
  나와 함께 놀다 가렴>
  
  8월 9일에도 朴 대통령은 긴 詩를 썼다. ‘猪島의 추억’이란 詩의 일부를 소개한다.
  
  <해마다 여름이면
  그대와 함께 이 섬을 찾았노니
  모든 시름 모든 피로 다 잊어버리고
  우리 가족 오붓하게
  마음껏 즐기던 행복한 보금자리
  추억의 섬 猪島
  
  올해도 또 찾아왔건만
  아! 어이된 일일까
  그대만은 오지를 못하였으니
  그대와 같이 맨발로 거닐던 저 백사장
  시원한 저 백년 넘은 팽나무 그늘
  낚시질 하던 저 방파제 바위 위에
  그대의 그림자만은 보이지 않으니
  그대의 손때 묻은 家具(가구) 집기
  작년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데
  미소 띤 그 얼굴
  다정한 그 목소리
  눈에 선하고 귀에 쟁쟁하건만
  그대의 모습은 찾을 길 없으니
  보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찾을까
  
  해와 달은 어제도 오늘도 뜨고 지고
  파도 소리는 어제도 오늘도
  변치 않고 들려오는데
  님은 가고 찾을 길 없으니
  저 창천에 높이 뜬 흰구름 따라
  저 지평선 너머 머너먼 나라에서
  구만 리 장천 은하 강변에
  푸른 별이 되어 멀리 이 섬을 굽어보며
  반짝이고 있겠지
  저-기 저 별일까
  저 별일 거야!>
  
  8월 11일 휴가를 끝내고 청와대로 돌아온 朴 대통령은 그날 밤 이런 일기를 썼다.
  
  <청와대 현관에 도착하니 아내가 마중 나와서 맞아줄 것만 같아 낭하를 걸어 들어가면서도 이층에서 누가 내려오는 것 같기만 했다>
  
  1975년 8월 15일. 이날은 陸英修 여사가 피살된 지 1년째 되는 날이었다. 朴 대통령은 아침 일찍 국립묘지의 아내 무덤에 다녀왔다. 그 이후 朴 대통령이 비서들을 집무실로 불렀다.
  
  “벌써 1주년이 되었구먼. 그 사람 극락에 가 있겠지. 처음에는 눈물도 많이 흘렸으나, 이제 지만 엄마를 위로하는 길은 그 사람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나라 발전에 힘쓰는 것이라고 느껴.
  
  주위에서는 예의에 벗어난 줄도 모르고 재혼을 권하는 사람도 간혹 있는데, 내 뜻을 모르는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에게 부질없는 소리 말라고 일러줘요. 국내외에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내가 지만이 엄마를 잊고 그런 짓을 할 것 같아?”
  
  朴 대통령은 부인을 잃은 쓸쓸함에 대해서 말을 이어갔다.
  
  “용기와 의욕을 잃어버리면 집사람 초상화를 보면서 대화를 하지, 그 사람의 遺志(유지)를 받들어 더 열심히 일을 해야지 하고. 친구가 홀아비가 되었을 때는 그 마음을 짐작하지 못했는데 내가 겪고 보니 가슴이 텅 빈 것 같아. 성경에는 남자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서 여자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내 생각으로는 여자의 갈비뼈 하나로 남자를 만든 것 같아, 허허.”
  
  朴 대통령은 마치 살아 있는 부인을 옆에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朴 대통령의 숙연함에 비서들은 다 식은 커피잔만 내려다보며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대화가 끝나자 朴 대통령은 기제사를 지내기 위해 2층 거실로 올라갔다. 그 뒷모습이 쓸쓸하게 보였다.
  
  1975년 12월 12일. 朴 대통령은 출입기자들과 공보실의 비서관들을 불러 점심을 함께 했다.
  
  “오늘은 지만이 어머니와 결혼한 지 만 25년이 되는 날입니다. 아내가 살아 있었으면 은혼식을 올릴 수 있었을 텐데…. 대신 아침에 산소에 다녀왔어요. 아내 산소 앞에서 나는 속으로 얘길 했지. ‘남편을 두고 혼자 먼저 가는 버릇은 어디서 배웠노’ 하고.
  
  참 생각할수록 고생만 하다가 간 사람이야. 애들에게 보충 수업도 해주고. 지만이가 중학교 3학년이었을 때는 여름에 피서도 안 가고 근혜하고 지만이를 가르쳐 주었지. 내가 강사료라도 좀 주었어야 했었는데. 참 그렇게 되면 과외수업이 되지, 허허허.
  
  아내가 살아 있을 적에 내가 ‘지만이를 위해 강사를 초빙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고 말했더니 집사람이 ‘그런 것을 하면 과외수업이 돼서 정부 방침에 어긋나는 게 아닙니까? 지만이는 나와 두 누나가 도와주면 족하니 그런 것 생각지 마시고 지만이 아버지는 정치에나 전념하십시오’라고 했었는데….”
  
  朴 대통령의 변화에 대해서 鮮于煉 공보비서관은 이런 비망록을 남겼다.
  
  <대통령은 영부인 생각이 날 때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살아 있을 때 잘해 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가슴 아파했다. 대통령은 우울하거나 기분이 언짢아 보였는데도 한두 시간 지나고 다시 보면 기분이 풀려 즐거운 표정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사이에 국립묘지에 가서 영부인을 만나고 온 것이었다.
  
  대통령은 영부인이 돌아가시고 나자 눈에 띄게 쓸쓸한 모습을 자주 보였고, 기력도 많이 약해졌다. 전에는 비서관들을 자주 불러 술도 함께 하며 농담도 잘했으나, 영부인의 서거 뒤로는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자리를 같이 하더라도 술보다는 주로 차를 들었다.
  
  청와대 식당 한쪽 벽에 커다란 영부인 초상화를 걸어 두고, 그곳에서 대통령은 혼자서 식사할 때도 자주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초상화의 영부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한 번은 차를 마시면서 대통령이 “옛말에 ‘惡妻(악처)가 효자보다 낫다’는 말이 있는데 그 의미를 좀 알 것 같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朴 대통령은 陸 여사에게 결코 자상한 남편도 모범 남편도 아니었다. 술과 여자를 좋아한 대통령이었다. 그 때문에 陸 여사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놀라운 절제력으로 그런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다. 참다 못한 陸 여사가 朴 대통령의 외국 방문을 앞두고 청와대를 가출하여 종적을 감춘 일도 있었다.
  
  무뚝뚝한 朴 대통령의 아내에 대한 진심은 아내가 죽은 뒤 아무도 보지 않은 일기를 통해서만 표현되었다. 陸 여사도 생전에 남편의 마음속에 숨은 이런 신뢰와 사랑을 느끼지 못했을지 모른다. 만 57세에 아내를 잃고 홀아비가 된 권력자의 허전한 마음을 채운 것은 ‘이럴수록 조국 근대화를 더욱 세차게 밀고나가야 한다’는 다짐이기도 했지만 인생에 대한 허무감도 곁들여졌을 것이다.
  
  陸 여사는 또 남편에게 정치적 견제도 할 수 있는 ‘청와대內의 야당’이었다. 陸 여사는 朴 대통령 측근들의 부패와 권력 남용에 대해서는 서민의 입장에서 분노한 이였다. 빈틈 없는 陸 여사는 남편에게 진정서를 전달하여 조치를 요청할 때도 미리 내용의 진실성을 조사한 뒤에 했다. 朴 대통령은 이런 아내의 건의를 존중하여 처리했다.
  
  朴 대통령으로서는 의지가 되고 동시에 견제도 해주던 동반자를 잃은 것이다
  
  
  
  
[ 2009-04-03, 11:3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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