浦項 석유는 가짜였다!
연재 54/地上에서 들어간 輕油를 原油로 誤認하다.

조갑제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원유가 아니라 경유입니다”
  
  
  
  1973~74년에 제1차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박 대통령은 이 끈적끈적한 광물에 더욱 한 맺힌 유감을 갖게 된다. 이러한 심리 상태가 빚어낸 것이 포항 석유 대소동이다. 오원철은 《한국형 경제건설 제6권-엔지니어링 어프로치》에서 1976년의 포항 석유 발견 발표를 전후한 秘史(비사)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75년 12월 5일 박 대통령은 중화학공업담당 수석비서관 오원철을 서재로 불리는 집무실로 불렀다. 박 대통령은 회의용 탁자에 앉아 오 수석을 맞았다고 한다.
  
  “부르셨습니까?”
  
  “어, 이봐, 포항에서 석유가 나왔대.”
  
  박 대통령은 시커먼 액체가 들어 있는 링거 병을 보여주더니 마개를 뽑고 액체를 큼직한 재떨이에 조금 부었다. 성냥으로 불을 붙이니 재떨이에 번졌다. 시커먼 연기도 났다.
  
  오원철은 순간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원유에는 가스 성분, 휘발유 성분, 경유·중유 성분 등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다. 여기에 불을 붙이면 가스 성분이 펑 하고 소리를 내면서 불이 붙는다. 그런데 이 기름은 정제되어 나온 석유처럼 얌전하게 불탔다.
  
  오 씨는 직감적으로 원유가 아니란 생각을 했다. 박 대통령과 함께 기뻐할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 씨는 “석유가 나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고만 했다.
  
  “각하, 그 기름을 분석해보겠습니다. 제게 주십시오.”
  
  오 씨는 링거 병을 가져와서 김광모 비서관에게 보였다.
  
  “또 누가 엉터리 보고를 했구먼요.”>
  
  그때만 해도 吳 수석이나 金 비서관은 포항에서 정보부가 시추를 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석유가 나왔다는 흥분된 보고가 허위로 밝혀지는 경우를 여러 번 겪었었다. 우물을 파다가 기름이 떠오른다고 해서 현장 조사를 해보면 근처에 미군이 6·25 전쟁 때 기름 탱크를 갖고 있었고, 그 기름이 땅 속으로 스며들어 우물을 팔 때 물에 섞여 나왔다는 식이었다.
  
  김광모 비서관은 가까이 지내는 호남정유의 기획담당 임원이자 일류 화학기사인 韓聖甲(한성갑)을 불렀다. 오원철 수석은 기름이 든 유리병을 한 씨에게 넘겨주면서 엄숙하게 말했다.
  
  “가장 빠른 편으로 미국 칼텍스에 보내서 시험을 하되 신중을 기하시오. 원유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의견을 보내주시오.”
  
  한 씨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라고 물었다.
  
  “더 이상 묻지 말아요. 비밀을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한 4일이 지났을까, 한 씨가 분석보고서를 들고 들어와 吳 수석에게 설명해갔다.
  
  “이것은 원유가 아니고 경유입니다. 이걸 보십시오.”
  
  포항에서 나온 기름을 갖고 가서 증류 시험한 그래프를 펴 보였다. 원유에 열을 가하면 어떤 성분은 낮은 온도에서 증발하고 무거운 성분은 높은 온도에서 증발한다. 이걸 온도곡선으로 그리면 야산의 능선 모양이 된다. 그런데 한성갑이 보여준 그래프는 담뱃갑을 측면으로 세워놓은 형상이었다. 제로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다가 경유가 증발하는 온도에서 갑자기 선이 수직으로 올라가서 한동안 평평해졌다가 경유 성분이 끝나는 곳에서 갑자기 떨어져 다시 제로가 되는 것이었다.
  
  이 그래프를 보고 오원철은 이 기름은 경유 성분만 있고 다른 성분은 없다는 것을 간파했다. 휘발유·등유·경유·중유 성분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 것이 원유인데, 경유 성분만 검출되니 이 기름은 경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씨는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이 그래프를 보니 호남정유에서 경유를 만드는 온도곡선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대한석유공사 제품일 것입니다.”
  
  “경유는 거의 투명한데 무엇이 섞여 있다는 거요?”
  
  “중질유가 극소량 있습니다.”
  
  오원철 수석은 지질연구소 소장을 전화로 불렀다.
  
  “포항에서 기름을 파고 있다면서요?”
  
  소장은 마지못한 듯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시추할 때 경유를 윤활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오원철은 포항 B공에서 경유가 나왔고 정보부에서 이를 원유라고 오해한 까닭을 이렇게 추리해보았다.
  
  1. B공 지하 1,475m에 空洞(공동)이 있었다. 그 공동은 물로 차 있었을 것이다. 이 공동 부근의 지층에는 틈이 많이 가 있었다.
  
  2. B공 가까운 곳에서 A공을 먼저 시추할 때 냉각수로서 물을, 윤활제로서는 경유를 상당량 고압으로 주입시켰다. 시추기를 가동하면서 기어 오일이나 그리스 같은 기계유도 썼다. A공이 지하 1,500m쯤에 도달했을 때 ‘이런 기름 섞인’ 물의 일부가 바위 속 틈을 타고 이동해갔다. 모여든 곳이 B공 지하 1,475m 공동이었다. 여기에 조금씩 모여든 기름이 수십 리터가 됐다.
  
  3. 이런 상황에서 새로 시추하기 시작한 B공의 위치가 바로 이 공동이 있는 지상이었다. B공 시추기가 지하 1,475m까지 도달하여 이 공동을 뚫고 지나가게 됐다. 이 시추기는 이 지점에서 2m쯤 뚝 떨어지는 현상이 생겼다. 경유와 윤활유 등은 공동 안의 물 위에 떠 있었는데 시추 坑井(갱정)을 메우고 있는 순환 泥水(이수)를 타고 지표면으로 올라오게 됐다. 이것을 본 현장 사람들이 원유가 나왔다고 오해한 것이다. 때는 1975년 12월 3일 새벽 2시 30분이었다.
  
  실망한 대통령, “정보부장을 부르라”
  
  
  이런 추측 겸 해석을 한 오원철은 한성갑이 가져온 보고서를 들고 김정렴 비서실장을 찾아갔다. 金 실장과 吳源哲은 마주 앉아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원유가 나왔다고 여러 사람들에게 자랑을 많이 하고 있는데 만일 원유가 아니라면 거짓말을 한 셈이 된다. 두 사람은 그래도 사실대로 보고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吳源哲은 “경사 난 집에 재를 뿌리는 것과 같은 이런 보고는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가장 기분 나쁜 보고거리일 것이다”고 회고했다.
  
  잠시 후 金正濂 실장은 분석보고서를 갖고 吳 수석을 데리고 박 대통령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오 수석이 보고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포항에서 나왔다는 기름은 원유가 아니라고 합니다. 오 수석, 직접 보고하시오.”
  
  오원철은 사실대로 설명했다. 박 대통령은 “김 실장!”하고 부르더니 “중앙정보부장을 당장 불러!”라고 했다. 오원철은 대통령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회의용 탁자 정면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앞만 노려보고 있었다. 김 실장과 오원철 수석은 그 왼쪽에 앉아 무거운 침묵을 견디고 있었다. 세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침묵을 깨려고 하지 않았다. 오원철은 “처단을 기다리는 포로 신세 같았다”고 한다. 기나긴 15분이 흘렀다. 남산에서 출발한 申稙秀(신직수) 부장이 황급히 들어왔다. 인사를 하고 오른쪽에 앉았다.
  
  박 대통령은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고 “신 부장, 포항에서 나온 기름은 원유가 아니라면서! 어떻게 된 거야?”라고 말했다. 오원철이 살펴보니, 신 부장은 갑자기 당하게 되자 대답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오 수석, 임자가 설명해!”
  
  오 수석은 괜히 이런 악역을 맡게 됐다고 원통한 생각이 들었다. 포항에서 나온 기름이 진짜 원유라면 여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좋아할 텐데…. 비밀공작 하듯이 석유 탐사를 벌이고 있는 정보부에 吳 수석의 기술자적인 오기가 칼을 들이댄 꼴이 됐다.
  
  吳 수석은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게 요점만 설명하기로 했다.
  
  “석유가 나왔다고 해서 너무 기뻤습니다. 그 원유를 미국의 칼텍스에 보내 분석을 시켰습니다. 그 결과 원유가 아니고 경유란 판단이 나왔습니다.”
  
  보고서를 申 부장에게 넘겨주니 수행한 간부가 받아본다. 박 대통령이 먼저 이 어색하고 긴장된 분위기를 풀려고 했는지 오원철을 향해서 “오 수석, 임자 생각은 어때?”라고 말했다.
  
  “각하, 정보부에서 보고한 대로 시추 작업에서 채취된 기름이란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전문가가 아니라 원유로 잘못 안 것 같습니다.”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것은 아니다’고 정보부를 변호하는 답변을 했다. 박 대통령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신 부장, 포항에 석유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말썽이 많으니 이번 기회에 속 시원히 뚫어서 확인토록 하시오.”
  
  그제야 오원철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申稙秀 부장이 상처를 받지 않고 이 침통한 분위기에서 헤어난 것이 다행스럽게 생각됐다. 박 대통령의 절묘한 결심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박 대통령은 申 부장을 수행한 간부에게 말했다.
  
  “앞으로 석유탐사를 할 때는 오 수석과 자주 상의를 하라. 그리고 오 수석을 통해서 보고토록 하라.”
  
  
  성공한 鄭長出의 로비
  
  
  
  1968년에 일단 석유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던 포항 시추는 왜 시작됐으며 그것도 왜 정보부가 그 일을 하게 되었는가?
  
  1960년대 포항 드라마의 주인공이 정우진[나중에 鄭盛燁(정성엽)으로 개명]이었다면, 1970년대의 주인공은 그의 큰형 정장출이었다. 그는 대단한 수완의 소유자였다. 정 씨는 5·16 전후 정당 간부생활도 했고 비록 낙선했지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본 경험이 있었다. 정장출은 학자들과의 이론 투쟁보다는 정치력을 동원해서 일이 되는 쪽으로 꾸미는 데 전념했다. 먼저 일본인 친구를 찾아내 자민당 중의원 다나카 다츠오(田中龍夫)와 나카니시 이치로(中西一郞)를 소개받은 뒤 자신의 복안을 전했다.
  
  1975년 1월 12일 자민당 국회의원단 16명이 방한했을 때 훗날 문부상이 되는 다나카 다츠오 의원이 자민당 대외경제협력위원장 자격으로 끼어 있었다. 다나카와 나카니시 의원은 정장출과 만나 포항 지역의 한일 공동개발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2월 14일 일본 의원단은 박정희 대통령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두 의원은 포항 석유를 한일 양국이 공동 개발할 것을 제의했다. 박 대통령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이들은 다음날 김종필 총리를 방문해서도 그 계획을 털어놓았지만 김 총리도 듣고만 있었다고 한다.
  
  일이 어느 정도 추진됐다고 판단한 정장출은 포항 1차 시추 때부터 친면 있던 고려대 趙東弼(조동필) 교수의 소개로 코리아 타코마의 金鍾珞(김종락) 회장과 공화당 정태성 의원을 만나 한일 민간자본으로 포항 석유를 개발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2월 4일 이들 네 사람은 김종필 총리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정장출은 한아름의 보고서와 포항 1차 시추 때의 사진 앨범을 갖고 가 열정적으로 김 총리를 설득했다.
  
  이 무렵 포항에서 박 대통령에게 ‘고위 정치인들이 포항 광구를 빼앗으려 한다’는 탄원서가 올라왔다. 박 대통령은 김정렴 비서실장을 불러 탄원서를 주면서 “확인해 보라”고 지시했다. 확인 결과 진정서의 내용은 사실과 많이 달랐다.
  
  김정렴 실장이 대통령에게 보고하자 박정희는 화를 내는 대신에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아무튼 석유가 나오긴 해야겠는데, 업자는 있다고 하고 기관에서는 없다고 하고, 게다가 모략까지 들어온다고 하니 참…. 아예 이해관계가 없는 정보부에 시켜서 포항 지역에 시추탐사를 하도록 하시오. 미국에도 우리 학자들이 있으니 순수한 애국심만 있는 사람들을 동원해서 반드시 이해관계 없이 중립적으로 추진하시오.”
  
  박 대통령으로부터 석유 탐사 특명을 받은 신직수 정보부장은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김정렴 당시 비서실장의 회고는 이렇다.
  
  “석유에 문외한인 정보부장이 이 일을 맡게 되니 난감한 표정이 되어 땀을 흘립디다. 그래도 박 대통령은 신직수 부장을 믿고 맡기신 거지요. 신 부장은 이해관계 없는 순수한 사람을 쓰라는 각하의 하명에 따라 시추회사의 회장 격으로 정보부 陸東蒼(육동창·당시 육군 준장) 국장을 발탁했어요.”
  
  2월 6일 정장출은 뜻밖의 사람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서울 광교 부근의 어느 다방에서 만난 사람은 정보부 육동창 국장이었다. 육영수 여사의 인척이기도 한 陸 국장은 그동안의 포항 시추 경과에 대해서 물었다. 정 씨는 정보부가 고위층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고 있다고 판단했다. 정보부는 정 씨에게 정부에 요구할 사항을 물었다. 정장출은 시추기 두 대, 자금 2억 원, 방해 요인 제거를 건의했다.
  
  육 국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신직수 정보부장은 3월 5일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말했다.
  
  “하느님은 아마도 자원을 골고루 나눠주었을 것이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기름이 어딘가는 숨어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이만큼 컸으니 우리 손으로 기름을 한 번 찾아보자.”
  
  박 대통령으로부터 특명을 받은 정보부는 즉시 포항 시추의 진행 책임을 김영수 기획조정실장-육동창 국장-崔甲東(최갑동) 과장 선으로 정했다. 현장에서 진두지휘를 할 사람으로 뽑힌 최 과장은 육군 공병 대령으로서 정보부에 파견 나가 있었다.
  
  1975년 5월 31일부터 포항에서 중앙정보부 특별 석유탐사반은 ‘동신산업공사’라는 위장 간판을 내걸고 정장출이 지목한 3개 지점 A, B, D 세 개 갱정의 시추 기공식을 올렸다. A, B공은 정장출, D공은 자문위원들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 위치 선정이었다고 한다. 정보부는 상공부로 하여금 정 씨 형제들이 갖고 있던 이 지역의 석유개발권을 ‘실적이 없다’는 이유로 그 등록을 취소시켰다.
  
  
  地下 1,475m 화강암층에서 나온 기름의 정체
  
  
  
  정보부는 국내에 석유 개발 전문가가 부족함을 알고 외국 전문가들을 수시로 초청해 의견을 들었다. 1975년 6월에는 프랑스 국립석유연구소의 라트레이유 박사가 포항을 답사, ‘퇴적층이 너무 작다. 학술 목적의 시추가 아니라면 몰라도 경제적 목적의 시추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비판적인 보고서를 냈다.
  
  시추 작업도 비관적으로 진행됐다. 퇴적층이면 으레 나오는 천연가스 발견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낭보 없이 가을로 접어들었다. 신생대 제3기 지층을 다 뚫고 중생대 화산암층을 계속 굴진해도 정장출(그는 시추 현장에 시험실을 두고 지질 및 암석 분석을 하고 있었다)의 예견처럼 퇴적층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A공은 지하 1,150m 부근에서부터 단단한 화강암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푸석한 퇴적암이어야 석유가 괼 수 있는데 강철 같은 화강암이 등장하자 자문위원들 사이에서는 “그만 끝내자”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문제의 B공에서는 지하 900m쯤에서 화산암층이 나오다가 지하 1,400m쯤에서부터 화강암층이 나타났다. 자문위원들은 “이제 그만하자”는 의견을 냈다.
  
  1975년 12월 3일 새벽 2시 30분경, 포항 시추 현장 당직실에서 숙직 근무하던 광업진흥 공사 파견 직원 곽승진은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지금 이상한 게 올라오고 있습니다.”
  
  시추공의 흥분된 소리가 들려왔지만 곽 씨는 냉정하게 말했다.
  
  “더 자세히 살펴본 뒤에 다시 보고하시오.”
  
  그동안 포항 시추 현장 책임자였던 동신산업 崔甲東(최갑동·중앙정보부 과장) 사장은 시추공들에게 “기름이 나오는 걸 발견하면 상금 100만 원을 주겠다”고 하여 종종 시추공들이 오인 보고를 해오는 경우가 있었다.
  
  비슷한 시각, 이상한 예감에 잠이 오지 않았다는 정장출도 전화를 받았다. 그는 즉시 현장으로 달려 나왔다. 정 씨가 현장에 가보니 구멍에서 나오는 물을 받아두는 큰 통에서 물이 넘쳐 배수로를 따라 논도랑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시추 구멍에서는 샘솟듯 하는 지층수와 함께 시커먼 액체가 솟아 나와 수면 위로 확 번지고 있었다. 정 씨는 논도랑을 따라 300m쯤 걸어갔다. 시커먼 액체와 뒤섞인 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시추공들의 설명이 있었다.
  
  “새벽 2시경, 시간당 1cm 정도의 느릿한 속도로 내려가던 시추봉이 지하 1,475m 지점에서 갑자기 푹 꺼지듯 쑥 들어갔다. 마치 공동을 통과하듯 약 2m를 그렇게 지나갔다. 우리(야간작업반 시추공)는 사고가 난 줄 알고 굴진을 중단했다. 그런데 갑자기 검은 액체가 시추공을 통해 솟아나기 시작했다. 불을 댕기니 연기를 내며 탔다.”
  
  정 씨는 문제의 액체를 채집하기 전에 사진 촬영부터 해 두었다. 그는 동신산업의 회장 격이던 육동창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육 국장은 “속단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한편 인하공대 화공과 이희철 교수는 이날 아침 8시 30분경 인천의 학교로 출근했더니 정보부로부터 온 전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최갑동 사장이었다. 즉시 서울역으로 나와 포항 시추 현장으로 내려오라는 이야기였다. 이 교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포항 시추 자문위원이었던 이 교수는 다른 자문위원들과 함께 바로 전날 포항에서 서울로 돌아왔던 것이다. 10여 명의 자문위원들은 포항에서 이틀 동안 B공 평가회의를 가졌다. 거의 모든 학자들이 비관적인 견해를 보였다. 그런데 하루 만에 기름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 교수를 태운 정보부 승용차가 포항에 도착한 것은 정오가 조금 지나서였다. 갱정에서 샘솟듯 나오던 암갈색 액체는 오후 2시쯤 끊어졌다. 약 12시간 동안 한 드럼가량의 액체가 나온 셈이었다.
  
  이희철 교수는 샘플 한 통을 받아 싣고 곧장 울산정유공장의 원유 분석실로 달려갔다. 기술자들에게 엄중한 함구령을 내린 이 박사는 샘플 분석을 지시했다. 증류 시험, 가스 크로마토그래피 및 형광 분석 등을 거친 뒤 분석자는 “경질의 원유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곁에 있던 정보부 직원은 이 낭보를 본부로 전했다.
  
  이 액체는 두 갈래 경로를 따라 고위층에 전달됐다. 정장출은 그날 아침 서울로 전화를 걸어 부인을 급히 포항으로 내려오게 한 뒤 기름이 든 유리병을 코리아 타코마 김종락 회장에게 전달했고, 김 회장은 친동생인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갖다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최갑동-육동창-신직수로 연결된 정보부 명령 계통을 따라 기름이 든 유리병이 옮겨 다녔다. 12월 5일 신직수 부장은 분석표를 붙인 공식적인 기름병을 김종필 국무총리와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朴 대통령은 기름병을 받아 들고 아이처럼 좋아했다. 곁에 서 있던 김정렴 비서실장에게 “하느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어. 우리도 이제 산유국이 될 수 있구나”라면서 재떨이에 기름을 붓고는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이걸 그냥 마시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흥분과 자랑
  
  
  
  12월 6일. 오전 9시 30분부터 청와대 회의실에서 경제 각료들과 중동문제연구소 연구원들 간의 회의가 열렸다.
  
  낮 12시 30분경 회의가 끝나자 박 대통령은 김정렴 비서실장에게 “김 실장, 내 집무실에 있는 그것 좀 가져와 보시오”라고 했다. 잠시 후 대통령의 책상 위에 검은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올랐다.
  
  박 대통령은 “내가 오늘 여러분께 기쁜 소식을 하나 알려 주겠소. 우리나라 포항에서 기름이 나왔습니다. 이게 바로 그 원유이니까 한 번씩 돌려가면서 보시오”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기도 했다.
  
  12월 9일 박 대통령은 대구에서 열리는 전국 새마을지도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특별열차를 탔다. 열차가 경기도 안양에 이르렀을 때 옆 칸에 타고 있던 林芳鉉(임방현), 張東雲(장동운), 朴振煥(박진환) 특별보좌관들을 불렀다. 박 대통령은 이들에게 원유를 개발하게 된 경위와 실용적인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문제점 등을 자상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박 대통령은 석유가 나오는 꿈을 꾸다가 깨는 바람에 아쉬웠다는 이야기를 측근들에게 한 적이 있었다. 석유에 한이 맺힌 대통령은 원유가 담긴 병을 자신의 집무실에 둔 이후부터 틈만 있으면 누군가에게 이것을 자랑하고 싶어진 것이다.
  
  이날 저녁 숙소인 대구 수성관광호텔에서 열린 만찬장에서도 박 대통령은 포항 석유 발견의 보안을 지킬 수 없었다. 다음날 새마을지도자대회가 끝난 뒤 전국 지방장관들과 가진 오찬석상에서도 박 대통령은 이 소식을 알렸다. 이로써 포항 석유의 비밀이 깨져버렸다. 1975년 세모의 한국 사회는 대통령으로부터 번지기 시작한 석유의 꿈을 불태우며 저물어 갔다.
  
  필자(당시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는 1976년 1월 1일자 <국제신문> 사회면 머리기사를 썼다. 기사 제목은 ‘石油(석유)여 솟아라, 浦項(포항) 일대 中生代(중생대) 경상계 지층 탐사서 희망적 결론’이었다. 직설적으로 포항에서 석유가 나왔다는 언급은 없었지만 석유가 나왔다는 전제하에 유전 가능성을 지적한 내용이었다.
  
  기자는 연초의 연휴 때 포항 시추 현장을 둘러보았다. 해양 석유시추선에 눈이 익은 기자에겐 매우 초라한 규모의 시추탑이었다. 시추 구멍 사이의 거리로써 背斜(배사) 구조의 크기를 대강 짐작하고 왔다.
  
  1976년 1월 4일 회사에 출근하니 정보부 부산지부에서 좀 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갔더니 “포항 석유 관련 기사는 쓰지 않기로 되어 있는데 무슨 의도에서 썼느냐”는 추궁이 있었다. 정보과장이 기자를 수사과 직원한테 넘겨 진술조서를 받게 했다. 몇 시간 지나 풀려나긴 했지만 정보과장의 정중한 태도가 인상에 남았다.
  
  1979년 10월 27일 아침, 경찰서 출입 기자이던 필자는 전국에 지명 수배된 대통령 시해사건 범인 자료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필자를 조사한 그 정보과장이 시해범으로 지명 수배되어 있는 게 아닌가. 그가 박 대통령 경호원인 안재송, 정인형 두 사람을 사살한 朴善浩(박선호) 의전과장이었던 것이다.
  
  1976년 1월 15일 당시 <국제신문> 사회부 소속이던 필자는 박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 때 혹시 기름에 대해 언급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전날 미리 포항 시추 관련 기사를 몇 꼭지 써두었지만 박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석유 발견을 확인해주지 않으면 신문에 게재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몇 시간이나 다소 지루하게 계속되던 일문일답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도 석유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열 번째 질문으로 어느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포항 근교에 석유가 나왔다는 설이 일부 국민 간에 퍼져 있으며 제주도 남쪽 7광구에도 많은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어 국민들이 대단히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이 기회에 사실 여부를 밝혀주십시오.”
  
  박 대통령이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지난해 12월 우리나라 영일만 부근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기술진이 오랫동안 탐사한 후 3개 공을 시추한 결과 그중 한 군데에서 석유와 가스가 발견된 것이 사실입니다. 석유가 나온 양은 비록 소량이나 지하 1,500m 부근에서,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KIST에 의뢰해 성분을 분석한 결과 양질의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매우 반가운 소식이고 고무적인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장량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나 우리나라에서 석유가 나왔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경제성이 있을 만큼의 매장량이 있는지는 더 조사해보아야 합니다. 이 지역에 대한 탐사 및 조사를 위해 연초부터 외국 기술자를 불러오고 필요한 장비를 들여오고 있습니다. 4~5개월이 지나면 그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외국 기술자들이 유망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나 땅 밑에 있는 문제로 아직은 무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더 조사해봐야 할 것입니다. 좀더 확실한 것을 안 후 발표하기 위하여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기름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기름이 나온다니까 국민들이 흥분하고 좋아하는 심정은 충분히 알 수 있으나 직접 파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므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과 같이 국민들이 번영된 조국 건설을 위해 근면·자조·협동으로 부지런히 일하고 열성을 다하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좋은 선물을 가져다줄지도 모르니 조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필자는 이 대목이 끝나자마자 회사로 뛰기 시작했다. 마감시간을 늦추면서까지 석유 발표를 싣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우리 신문(국제신문)에 준비해 둔 기사를 넣기 위해서였다.
  
  吳源哲 수석은 이 기자회견장에 배석하고 있었는데 석유 관련 질문이 나오자 불안했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의 설명을 분석해보면 그는 포항 석유가 원유가 아니란 사실을 알면서도 원유가 발견된 것처럼 말했고, 마치 매장량이 많아 유전으로 성립될 수 있으리란 기대감을 주는 방향으로 대답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제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나 포항 석유 발견에 대단한 의미를 두는 발언이었다.
  
  박 대통령의 이 발표에다가 혹을 덧붙인 것이 언론의 소나기 같은 과장·조작 보도였다. 거의 모든 신문은 포항 석유 발견 발표를 1면 머리에 통단 컷 제목으로 보도했다. 이런 편집은 북한이 남침하거나 현직 대통령이 사망한 경우에나 사용한다. 박 대통령은 석유가 나왔다고만 했는데 거의 모든 신문들은 유전이 발견된 것처럼 보도했다.
  
  퇴적층을 뚫으면 소량의 석유는 자주 나오지만 경제성이 있을 만한 유전 발견율은 2%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무시하고 ‘우리도 산유국이 되었다’느니 ‘이제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될 날이 오고 있다’느니 보도하는가 하면, 어느 중앙지는 ‘포항 유전의 매장량은 일본 최대 유전의 열 배, 중동 최대인 멜라님 유전과 맞먹는 69억 배럴로 추정된다’고 백일몽 같은 기사를 쓰고 있었다. 이런 기사로 해서 주식 가격은 연일 폭등했다.
  
  참고로 일본에서 당시 가장 큰 유전은 매장량이 약 6,000만 배럴이었고, 중동에서 가장 큰 유전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가와르 유전으로서 매장량이 약 700억 배럴이며 멜라님이란 유전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필자는 박 대통령의 석유 발견 발표 다음날부터 포항 석유에 대해서 비관론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포항 시추에 관계했던 기술자들과 접촉하면서 언론 보도나 박 대통령의 희망 서린 발표와는 다른 냉담한 견해를 듣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는 포항 석유가 油徵(유징) 정도이고 그 한 해 전 부산 앞바다인 제6광구 도미 A갱정에서 발견된 含油層(함유층)보다도 오히려 의미가 작은 것이란 판단을 하게 됐다. 도미 A 갱정 석유 발견 특종을 해본 필자로서는 기름 몇 드럼의 발견이 유전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을 실감한 때문에 포항 석유가 유전 성립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었다.
  
  박 대통령의 언급에서 필자가 느낀 것은 ‘아하, 이분이 석유를 무슨 우물 파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구나’ 하는 점이었다. 그는 지하 1,475m에서 기름이 발견되었으니 더 깊게 파면 더 많이 나온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감을 갖게 된 것이다. 목표로 하는 지층에서 기름이 나오지 않으면 더 깊게 판다고 해서 기름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석유 축제설과 논문 소동
  
  
  
  1976년 5월에 들어서자 포항 석유에 대한 2차 발표가 있을 것이란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5월 16일엔 석유 축제가 열릴 것이란 소문이 돌기도 했다. 주가가 또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때 필자(당시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는 논문을 완성했다. <한국의 석유개발: 비공개 자료의 분석에 의한 전망과 제언>이란 제목의 원고지 250장 분량의 소책자를 200부 찍었다. 인쇄비 11만 원은 “제발 그런 위험한 짓 그만두라”고 말리던 아내가 댔다. 이 책자를 연구소, 관청, 언론사로 보냈다. 정보부의 지시에 의해서 모든 언론이 포항 시추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논문이라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 비슷한 것이 있었기에 논문들을 다 보내고 나니 후련하기도 했다.
  
  <한국의 석유개발> 제5장에서 필자는 포항에서 정보부가 뚫고 있는 시추공의 위치와 이미 밝혀진 지질 단면도를 결합시켜 가능한 최다량의 원유 매장량을 계산해보았다. 유전 유망 지역의 평면적을 최대로 10km2로 잡고 유층의 두께는 10m, 유층을 형성하는 지층의 암석 空隙率(공극률-바위 안에 듬성듬성 구멍이 나 있는 공간의 비율. 이 값이 높아야 기름이 많이 스며 있다는 것이 된다) 20%, 含油率(함유율) 50%, 採油率(채유율) 50%로 계산해보니 可採(가채)매장량은 약 3,000만 배럴이란 추산이 나왔다. 이 수치는 모든 가능성 가운데 최고치를 가정하여 계산한 것이다.
  
  이 최대치를 기준으로 해도 포항 석유로 한국이 석유를 자급자족하게 되었다느니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느니 하는 보도는 터무니없는 과장이라고 필자는 지적했다. 필자는 포항 석유는 경제성이 없거나 있어도 매장량은 적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한 보름 뒤 정보부 부산지부에서 좀 보자는 연락이 왔다. 일본 <산케이 신문>에서 필자의 논문을 인용해 ‘포항 석유의 경제성은 비관적이다’고 기사를 썼다는 것이다. 정보부에선 필자가 배포한 보고서를 모두 회수하라고 강요했다. 그들은 필자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논문을 되돌려주십시오’란 요지의 글만 써주면 자신들이 대신 회수해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주었다. 그 보름 뒤 필자는 근무하던 <국제신문>에서 쫓겨나 실업자가 됐다. 정보부에선 두 번이나 정보부의 보도 지침을 위반한 필자를 몰아내도록 회사에 압력을 넣었던 것이다.
  
  나중에 필자가 <산케이 신문>을 얻어 읽어보니 이 신문의 서울특파원이 쓴 기사는 ‘한국 포항 유전 소규모’란 제목으로 외신면 머리기사에 실려 있었다.
  
  그 요지는 ‘석유 전문기자인 <국제신문>의 趙甲濟(조갑제) 기자가 포항 석유와 관련된 시추 자료를 근거로 하여 포항 석유에 대해서 비관적인 전망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 기사는 ‘탄화수소(석유와 가스의 화학성분)를 저장해야 하는 지층의 두께가 얇고 탄화수소를 생성시키는 母岩(모암)의 발달이 부족하다’면서 ‘정부에서 발표한 포항 석유 발견이 과연 유층의 존재를 의미하는지 고립된 소량의 석유 발견을 의미하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는 필자의 주장을 인용했다. 이 기사는 이어서 ‘趙 기자는 과대평가해서 매장량을 추산해도 포항 석유는 한국의 연간 소비량에도 미치지 못한 정도라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졸지에 실업자가 된 필자는 잡지에 글을 쓰면서 몇 달을 버티다가 국제상사 신발공장에 간부 사원으로 입사했다. 그 1년 뒤 신직수 부장이 金載圭(김재규)로 바뀐 다음 정보부에서는 ‘조용히 신문사로 복직하면 우리도 가만히 있겠다’는 암시가 왔다. 필자는 1977년 10월 1일자로 <국제신문> 사회부로 복귀했다.
  
  필자가 실직자 생활을 하고 있던 1976년 8월 박 대통령은 진해 별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면서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포항에서 석유 탐사를 계속했지만 아직 경제성은 확인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포항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뚫어도 뚫어도
  
  
  
  1976년 연두 기자회견 석상에서 한 박 대통령의 석유 발견 발표 이후 정보부는 바빠졌다. 신직수 부장은 검사 출신답게 합리적이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정보부는 박 대통령이 그런 발표를 하는 것에도 반대했다고 한다.
  
  언론의 과장 왜곡 도로 여론이 과열되자 우선 언론의 포항 관련 보도를 일절 금지시킨 다음, 정보부는 미국에서 5,000m까지 뚫을 수 있는 유전시추기를 도입하고 미국인 석유 시추 기술자 20여 명을 데리고 왔다. 명인성·김연수 박사 등 해외에서 활동 중이던 한국인 전문가들도 초빙했다. 동신산업은 현대적 석유개발회사로 변모했다.
  
  3월에 정보부의 위장 회사 동신산업은 기름이 나온 B공 북서쪽 약 50m 지점에서 DS 1호공을 뚫기 시작했다. B공 시추는 일반 광산용 시추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구멍이 지름 2.7cm 좁아 검층(지층의 상태를 조사하여 유전의 자격이 있는지 여부를 검사하는 작업)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추기가 掘進(굴진)심도 1,000m를 넘어 석유가 나왔던 1,475m를 향해 접근하자 누구보다도 가슴을 죄기 시작한 것은 현장책임자인 동신산업 사장 최갑동이었다. 육군 대령이던 그는 포항 석유 발표 직후 준장으로 진급했다. 지하 1,394∼1,396m 안산암에서 형광 반응이 있었으나 기름은 비치지 않았다. 시추봉은 지하 1,400m를 넘어섰다. 메마르고 단단한 화강암층을 갈아서 부수면서 조금씩 조금씩 파고 들어갔다.
  
  최 사장은 침식을 잊다시피 하며 현장에 나와 초조하게 작업을 지켜보았다. 정보부·청와대로 매일 아침 보고를 했다. 그는 졸도했다. 긴장의 연속에 의한 신경성 고혈압 때문이었다. 병원에 며칠 입원해 있다가 링거 주사를 팔뚝에 꽂은 채 현장에 다시 나타났다. “문제의 유층 심도에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병상에 누워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1,450, 1,470, 1,480, 1,490, 1,500, 1,550m. 기름은 나오지 않았다. 최 사장은 눈에 띄게 초췌해졌다. 초조하게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 정보부장과 대통령 쪽으로 매일 ‘유징 없음’이란 보고를 하는 것도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었다. 마침내 신직수 부장은 석유보다도 건강이 더 중요하다고 훈계를 한 뒤 그를 부산의 동래 온천장으로 강제 휴양을 보내버렸다.
  
  B공에서 불과 50m 거리를 두고 뚫었는데도 기름이 나오지 않았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함유층은 보통 고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수km2, 수십km2 뻗어 있는 법이기 때문에 같은 그 지층에 도달하면 유징이 나오게 되어 있다. DS 1호공 시추는 지하 2,176m까지 뚫고 끝냈다. 화강암층이 끝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기름은 沙岩(사암), 石灰岩(석회암) 같은 무른 퇴적층에 스며 있지 강철 같은 화강암층에선 발견되지 않는다. 정보부는 화강암을 지나면 또다시 퇴적층이 나오겠지 하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굴진을 계속했으나 인간의 소망이 아무리 간절하다고 한들 자연의 이치가 바뀔 리 없었다.
  
  정보부는 이어서 기름이 나온 B공에서 남동쪽으로 수십m 떨어진 장소에서 DS 2호공을 시추하기 시작했다. 문제의 지하 1,475m 지층을 목표로 했다.
  
  이런 시추는 아마도 세계 석유개발사상 처음이었을 것이다. 마당만한 면적에 세 구멍을 뚫는다는 것은 이미 유전을 찾자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 대륙붕 시추에서는 수십km2의 평면적을 가진 유전 유망 지층에 대한 평가를 단 한 구멍의 시추로 결론을 내렸다. 포항 시추는 유전이 아니라 대통령이 발표한 석유 발견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 성격이 변질되어 버렸다. DS 2호공 시추도 지하 1,475m를 아무 소식 없이 통과했다.
  
  매일 아침 “아무 징후 없습니다”란 보고를 정보부, 청와대 비서실로 올려야 하는 최갑동 동신산업 사장의 괴로움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오원철 수석은 직접 전화를 걸어와 “무슨 소식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오기도 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박 대통령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박 대통령은 그해 3월 포항의 시추 현장을 찾아 격려하고 올라가지 않았던가.
  
  단단한 화강암층을 파고 들어가는 것을 보다 못한 한 미국인 기술자는 자문위원인 이희철 교수(인하대학)에게 “당신들은 차라리 금을 찾는 것이 낫겠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새 구멍 굴진을 시작하는 한 기공식에 참석한 김영수 정보부 기조실장은 최갑동에게 “이번에도 기름이 나오지 않으면 너를 이 구멍에 파묻어버리겠다”고 농담을 했다. DS 2호공에서 유징이 나오지 않자 정보부는 지하 1,823m에서 굴진을 종료했다. 다른 지역의 시추공에서도 아무 성과가 없었다.
  
  필자가 ‘포항석유는 경제성이 의문시된다. 있다고 해도 소규모일 것이다’는 요지의 논문을 써낸 것은 이처럼 정보부의 신경이 예민해져 있을 때였다.
  
  
  
[ 2009-04-03, 15:5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