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철수를 둘러싼 카터와 朴正熙의 갈등
연재 56/미군 군부는 카터의 무모한 撤軍 계획에 반기를 들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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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核 가져가면 우리가 개발할 것”
  
  
  
  “동맹이란 것은 한 나라만의 이익을 위해서 맺는 것이 아니라, 당사국의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세가 변화되면 서로 의논해서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그 사람들(미국)은 그렇지 않더군요.
  
  지난 1년 동안 駐韓미군 철수 문제가 라디오나 신문에 등장하지 않은 날이 없었어. 스나이더 대사를 만났을 때 食傷(식상)하다고 했지. 가든 안 가든 결정은 지어야겠어. 그런데 美 8軍 장성들은 모두 철수를 반대하더군. 골프를 초대받은 적이 있어서 경기 끝나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모두들 하나같이 반대야. 내가 ‘카터 대통령이 軍 출신이니까 잘할 것 아니냐’고 했더니 美軍 장성들이 ‘그 사람, 잠수함을 석 달 탔습니다. 그것도 軍 경력에 들겠지요’라고 대답하더군.
  
  미국 대통령 선거 때 카터 참모들이 駐韓미군 철수를 주장해야 표가 많이 나온다고 건의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고 대통령이 되고 나면 국방성도 있고, CIA도 있고, 국무부도 있어서 이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서 해야 하는데. 하긴 선거 공약이니 안 할 수도 없겠지. 그들끼리도 의견 대립이 있는 모양이야.”
  
  1977년 5월 22일, 朴 대통령은 비서진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는 마치 교사가 학생에게 훈시하듯 국정에 관계된 것뿐만 아니라 평소 느낀 점들을 자상하게 털어놓았다. 이날도 어김없이 화제는 카터 비판으로 옮겨 갔다.
  
  “한국에 어떤 인권 문제가 있는가, 하고 미국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물으면 그들도 대답을 못 합니다. 인권 침해란 법에 의하지 않고 재판도 하지 않고 탄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헌법에 따라 3심을 거치고 그것도 공개리에 외국 기자들한테까지 방청을 시키면서 법으로 확정해서 처벌하는 것을 어떻게 인권 침해라고 할 수 있는가 말이오.
  
  지난번 울프 의원도, 스나이더 대사도 ‘카터가 한 얘기이니까 미국의 체면을 봐서 제스처라도 해달라’고 내게 말했는데, 내가 제스처를 할 것이 있어야지. 지금 잠깐 들어가 있는 사람도 전에 민청학련 사건과 같이 개과천선하면 사면될 수도 있는 것이오.
  
  反체제 사람들이 콧대를 높이는 것은 바로 미국 사람들 때문이야. 미국이 도움이 안 된다고 느낄 때라야 들어가 있는 사람들도 생각이 달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놓아 줄 수 있지. 이 기회에 그 사람들의 사대근성을 뿌리 뽑아야 됩니다. 외세에 의존하는 근성을 버리지 않고는 진정한 자주독립 국민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동안 미국에서 反정부 운동하던 사람들, 李龍雲 前 해군참모총장이나 文明子 씨 등이 한 근거 없는 말들을 미국은 그대로 언론에다 실었단 말이야. 駐韓미군이 東北亞(동북아) 평화를 위해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아직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된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 평화가 정착되거나 적어도 북괴를 확실히 능가할 힘이 생길 때까지 駐韓미군이 있는 것이 좋지. 그러나 그들이 일방적으로 간다고 했소. 한반도의 안보는 한국만의 책임인가? 韓美 양국의 공동 책임입니다. 그들이 떠나가더라도 장비를 넘겨주고 공군력만 증강한다면, 유사시에 우리 힘으로도 능히 敵을 막을 수 있어요.
  
  나는 월남사태 때 이미 駐韓미군 철수를 예상했어요. 모든 정세로 보아 북괴가 남침해도 중국·소련이 병력 지원을 안 할 것으로 봅니다. 우리의 힘이 강해지면 오히려 중국·소련이 북괴의 남침을 견제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산당의 전술이지.”
  
  朴 대통령은 이날 각오한 듯 말을 이어갔다.
  
  “내년에 프랑스에서 장갑차 150대를 도입하고, 가을에는 서해에서 미사일 시험 발사도 할 것입니다. 이번에 하비브 美 국무차관이 오면 核을 가져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텐데, 가져가겠다면 가져가라지. 그들이 철수하고 나면 우리는 核을 개발할 생각이오.”
  
  이 무렵 朴 대통령의 대화록을 분석해보면 駐韓미군 장성들과 교감하면서 카터의 撤軍을 비판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駐韓미군 장성들이 주둔국 대통령 앞에서 자신들의 최고사령관을 비방했다는 것인데, 이로 미루어 朴 대통령과 이들은 撤軍 반대로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1977년 3월 17일 美 합참은 ‘1982년 9월까지 3만 2,000여 명의 駐韓 美 지상군 병력 중 우선 7,000명 정도를 철수시키자’는 내용의 건의서를 카터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철수시한을 차기 대통령 임기까지 미루는 지연작전이었다. 하지만 카터는 5월 5일 “4∼5년 안에 全 駐韓 美 지상군을 철수한다”고 결정하고 이를 ‘대통령 지시각서’ 12호에 담아 美 합참에 내려 보냈다.
  
  1977년 5월 19일자 <워싱턴 포스트> 紙는 駐韓 美 8軍 참모장 존 싱글러브 소장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이 회견에서 존 싱글러브 소장은 “만약 (카터의) 撤軍 계획대로 4∼5년 동안에 駐韓미군을 철수시킨다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12개월간의 정보수집 결과 북한 戰力(전력)은 계속 증강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면서 “(워싱턴의) 정책입안자들은 3년 전의 낡은 정보 속에 묻혀 있다”고 비난했다. 美 8軍 참모장의 이런 폭탄발언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撤軍을 반대하는 美 8軍사령관 베시 대장의 공작이 있었지 않나 의심할 만한 근거가 있다.
  
  1977년 5월 17일, <워싱턴 포스트> 기사가 나오기 이틀 전 金載圭 중앙정보부장 특별보좌관인 李東馥 씨는 오랫동안 가까이 알고 지내던 駐韓미군 사령관 특별보좌관인 짐 하우스먼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긴급한 용무가 있으니 가급적 가까운 시간 안에 만나자는 것이었다.
  
  李 보좌관과 짐 하우스먼은 다음날 서울시청 맞은편 프라자 호텔의 한 객실에서 마주 앉았다. 여기서 둘 사이에 오간 대화를 李 특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金載圭 중앙정보부장에게 보고했다.
  
  <駐韓 유엔군사령관 특별보좌관 짐 하우스먼은 5월 18일 12:15∼13:30 當部 부장 특별보좌관을 접촉하고 베시 유엔군 사령관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전제하에 다음 사항을 부장에게 보고해 달라고 요청했음.
  
  1. 5월 24일에 내한하는 하비브 국무차관과 브라운 합참의장을 맞이해 베시 사령관은 駐韓 美 지상군 철수문제에 관하여 현지 사령관으로서의 기본입장을 다음과 같이 보고할 계획임.
  
  가. 베시 사령관은 1차적으로는 駐韓 美 지상군을 현재의 상태에서 동결, 어떠한 규모의 감축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백히 할 것임. 사령관의 논거는 6·25 때 駐韓미군이 철수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한 반면 휴전 이후에는 전쟁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駐韓미군이라는 전쟁 억지력이 엄존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할 것임.
  
  나. 만약 하비브 차관과 브라운 의장을 통해 美 행정부의 駐韓 美 지상군의 감축이 기정방침으로 확인될 경우 베시 사령관은 차선의 방안으로 다음 사항을 건의할 방침임.
  
  1) 駐韓 美 지상군의 감축은 상징적인 규모로 국한할 것. 美 육군 제2사단의 3개 여단 중 1개 여단에서 여단 建制(건제)는 그대로 둔 채 2개 대대만을 1979년 6월 이후에 철수하고 나머지 부대는 무기한(최소한 5년간) 한국에 잔류시키도록 결정할 것.
  
  2) 철수하는 2개 대대의 각종 화기와 장비는 한국에 남겨두어 한국軍에게 인계할 것.
  
  3) 현재 2개 대대 弱의 규모인 駐韓 美 공군은 완전규모의 3개 대대를 각기 거느리는 2개 비행단으로 증강시키되 증강되는 항공기는 태평양 공군으로부터가 아니라 본토의 공군으로부터 가져올 것(태평양 공군은 駐韓 美 공군의 후비로 이미 사실상 한반도에 들어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태평양 공군으로부터의 증강은 실질적으로는 증강이라고 볼 수 없음).
  
  4) 한국軍 현대화를 위해 다음 조치들을 강구할 것(생략).
  
  2. 베시 사령관은 앞으로 있을 韓美 협의 때 朴 대통령 각하께서는 물론 고도의 정치적 차원에서 말씀을 하셔야 하겠으나 관계장관 이하의 실무자는 이상 베시 사령관의 기본입장을 감안해 그보다 더 강경한 주장을 할지언정 더 온건한 주장을 하지는 말아 줄 것을 요망함.
  
  3. 베시 사령관은 하비브와 브라운 來韓 이전에 극비리(駐韓 美 대사관에 대해서도 비밀로) 韓美 양 국군 간에 사전 의견조정을 가질 것을 희망함. 그 방식은 1단계로 합참의 孫章來 장군이나 柳炳賢 장군과 유엔군 사령부의 번스 副사령관, 싱글러브 참모장 또는 콜러 작전참모 간에 협의를 갖고 2단계로 베시 사령관과 국방부 장관이 만나기를 희망함(단, 이러한 접촉은 베시 사령관의 입장에서는 美 행정부에 대한 일종의 항명이 될 수 있는 것이므로 극도의 보안을 요망함).
  
  4. 베시 사령관은 지난번 渡美, 카터 대통령을 만났을 때 “駐韓미군 철수 문제는 절대로 졸속한 결정을 회피할 것”을 건의했고, 이에 대해 카터 대통령도 “장군과 먼저 협의하지 않고는 駐韓미군 문제에 대한 어떠한 결정도 단독으로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일이 있으므로 미국이 일방적으로 감축 결정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고 만약 카터 대통령이 이러한 약속을 저버릴 때는 “군복을 벗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하우스먼은 말하고 있었음>
  
  李 특보가 듣고 보니 실로 중대한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문민통제의 원칙이 확립되어 있는 미국에서 육군의 한 최고지휘관이 참모들과 짜고 미국대사관을 따돌린 채 자기 나라의 대통령이 소신을 갖고 추진하는 정책을 저지하기 위하여 외국의 정보기관장과 내통하겠다고 나섰으니 말이다. 李 특보는 金載圭 부장에게 베시 사령관을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다음날인 5월 19일 오후 3시 15분부터 4시 30분까지 두 사람의 밀담이 美 8軍 영내 사령관 관사에서 이뤄졌다. 李 특보가 통역을 위해 배석했다.
  
  李 특보의 기록에 의하면 이 자리에서, 베시 사령관은 그가 金 부장을 만나자고 한 진짜 이유를 털어놓았다. 그는 우선 撤軍 문제에 관한 카터 대통령의 옹고집에 분노를 터뜨렸다. 그리고, 카터의 撤軍 공약은 결국은 이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왜냐하면 이 공약은 “너무나 현실과 괴리된 것이고 잘못하면 전쟁을 유발할 수도 있는 그릇된 정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터의 撤軍 공약이 이행될 경우에 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撤軍은 보완조치 없이는 진행될 수 없다”면서 韓美 양국 간에 즉각 ‘撤軍 보완조치’에 관한 협상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撤軍 보완조치’가 비용 면에서 駐韓미군을 계속 유지하는 것보다 비싼 것으로 만들어서 ‘비용 對 효과’의 차원에서 미국內, 특히 美 의회 안에서, 駐韓미군 철수에 대한 찬반 토론을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 베시의 본심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보완조치’로 인해 駐韓 美 지상군의 撤軍을 강행하는 것이 계속 유지하는 것보다 비용 면에서 비싼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경우 틀림없이 의회가 나서서 撤軍 강행을 저지하게 되리라는 것이 그의 계산이었다.
  
  한국 정부 안에서 그의 대화 상대는 徐鐘喆 국방장관과 柳炳賢 합참본부장이었다. 이 무렵 朴正熙 대통령은 카터 대통령에게 노발대발하고 있었다.
  
  朴 대통령은 “그렇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우리는 구걸하지 않겠다. 우리는 우리 길을 간다”고 자주국방을 외치면서 오히려 ‘駐韓미군 철수 不반대’를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카터의 오만에 맞서서 주권국가의 대통령으로 국민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朴 대통령의 대응은 ‘과연 대통령다운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통령에게 해당되는 것’이었고 그를 보좌하는 주무장관이나 참모들의 경우는 그와는 다른 것이었다.
  
  베시는 “대통령이 그렇게 할수록 정부 관계자들은 실무적 차원에서 가령 撤軍이 이루어지더라도 그로 인한 위험부담이 최소화되도록 미국을 물고 늘어져 최선의 보완조치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했다.
  
  
  特上보고
  
  
  
  문제는 한국 정부의 주무장관 등 관계 참모들에게 있었다. 베시가 그들을 접촉해 보니 그들은 “朴 대통령보다 한술 더 떠서 더 격앙되어 있었고, 더 강경해서 도저히 말을 붙일 수 없을 정도”였다. 하우스먼은 “베시 사령관이 徐鐘喆 국방장관 등 한국군 고위층으로부터 ‘미군이 나가고 싶으면 나가라.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아연 실색했다”고 전했다.
  
  카터 대통령은 撤軍 문제와 인권 문제를 가지고 한국 정부와 협의하기 위해 1977년 5월 24일 필립 하비브 국무차관과 조지 브라운 합참의장을 서울에 보내기로 했다.
  
  베시 사령관의 생각으로는 하비브와 브라운의 訪韓(방한)이야말로 이들 앞에 ‘撤軍 강행’보다 훨씬 高價(고가)의 ‘보완조치’ 보따리를 풀어놓아 이들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 정부 국방 관계자들을 만나 자신의 생각을 귀띔해 줄 절대적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길이 없었다. 베시는 金 부장에게 그의 충정을 朴 대통령에게 전달해, 朴 대통령으로 하여금 徐鐘喆 국방장관 등이 즉각 베시 사령관과 협의해 ‘撤軍 보완조치’를 마련하도록 지시해 줄 것을 희망했다. 그렇게 되면 하비브 차관 및 브라운 의장의 訪韓 때를 기점으로 韓美 간에 ‘撤軍 보완조치’ 협상을 본격화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金 부장은 눈에 띄게 감동했다. 서울 중구 필동 중앙정보부 분실 6층의 부장실로 돌아온 金 부장은 李 특보에게 베시 사령관과 나눈 대화를 對談(대담) 형태로 정리해 부장이 대통령에게만 올리는 보고 형식인 ‘特上보고’(일명 ‘빨간 딱지 보고’)로 작성해 달라고 주문했다.
  
  金 부장은 다음날인 5월 20일 청와대로 올라가 朴 대통령 앞에서 이 보고서를 낭독했다고 한다.
  
  필자가 대통령 면담일지를 구해서 대조해 보니 5월 20일 金載圭 정보부장은 오전 11시 27분부터 한 시간 동안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서 朴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으로 적혀 있다. 朴 대통령은 보고를 받은 직후 출입기자들과 점심을 함께 하면서 미군 장성들이 카터를 업신여기는 발언을 한 것을 소개했던 것이다.
  
  이날 朴 대통령은 駐韓 美 지상군 철수문제와 관련된 회의를 긴급히 소집했다. 오후 2시 14분부터 약 두 시간 동안 계속된 회의에서는 베시 사령관의 희망에 따라 미국 특사에게 撤軍 보완 조치와 관련된 협의를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이 회의에는 총리·국방장관·외무장관·청와대 주요참모·합참의장·합참본부장, 그리고 康仁德 정보부 북한국장 등이 참여했다.
  
  이날 金載圭 부장이 올린 特上보고서엔 재미있는 대화내용이 있다.
  
  <金載圭: “장군은 하비브 차관이 이곳에 와서 인권 문제를 거론하리라고 보는가?”
  
  베시: “카터는 분명히 한국을 돕고 싶어한다. 그런데 한국을 돕기 위해서는 美 의회와 여론의 지지가 필요한데 美 의회와 여론사회에서는 한국의 인권 문제에 관해 카터에게 모종의 행동을 취하라는 강력한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카터로서는 이 같은 압력 때문에 비단 한국관계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정책에 관해서도 美 의회의 협조를 거부당할지 모른다는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아마도 카터는 이번 訪韓하는 특사 편에 이 같은 정치적 고충을 朴 대통령께 말씀드리고 이에 대한 朴 대통령의 말씀을 들려 달라고 요청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미국의 호사가들은 朴 대통령의 강력한 영도력 행사는 불안정한 국내 政情(정정)을 안정된 것으로 위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악선전하고 있다. 2주일 전에 朴 대통령께서 美 8軍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시고 본인의 숙소에 들르셔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신 일이 있다. 그때 朴 대통령께서 아주 편안한 기분으로 하루 저녁을 지내시는 것을 보고 본인도 무척 기뻤었다.
  
  본인은 장기적으로는 한국도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다고 믿는다. 朴 대통령은 이미 국내에서 강력한 정치적 지지기반을 쌓아 올리셨고 그렇기 때문에 선거를 지금 당장 실시한다고 해도 아마 80∼90%의 지지를 얻어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시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본인이 보기에 朴 대통령께서는 국민의 복지증진과 안보, 그리고 경제건설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무책임한 정치인들의 정치작태를 낭비적이고 非생산적인 것으로 보아 정치를 멸시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반면, 카터 대통령 같은 사람은 좀 시끄럽기는 하더라도 선거를 통해 다수의 지지를 얻어 국가를 이끄는 것이 좀더 좋은 방법이라고 보는 데서 차이점이 생기는 것 같다.”
  
  金載圭: “요즘은 신문이 횡포 정도가 아니라 독재라 해야 할 정도인 것 같다.”
  
  베시: “그렇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신문 독재의 제물들이다.”>
  
  위의 대화록을 읽어 보면 朴 대통령이 기자들에게 한 말의 수수께끼가 풀린다. 朴 대통령은 “미군 장성들에게 골프를 초대받은 적이 있어서 경기 끝나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모두들 하나같이 撤軍에 반대야. 내가 ‘카터 대통령이 軍 출신이니까 잘할 것 아니냐’고 했더니 미군 장성들이 ‘그 사람, 잠수함을 석 달 탔습니다. 그것도 軍 경력에 들겠지요’라고 대답하더군”이라고 했었다. 카터를 이렇게 평한 사람은 베시였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베시 사령관이 金載圭를 통해서 朴 대통령과 내통하던 바로 그 시간대에 베시의 참모장 존 K 싱글러브 소령은 <워싱턴 포스트> 존 사르 기자를 만나고 있었다. 사르 기자는 이때 카터 특사 필립 하비브 국무차관과 조지 브라운 합참의장이 朴 대통령을 만나러 오는 것을 취재하러 서울에 와 있었다.
  
  사르 기자가 싱글러브 참모장에게 “귀하는 카터 대통령의 撤軍계획이 전쟁을 부를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싱글러브는 전역한 직후인 1978년 여름 白斗鎭 국회의장의 소개로 일본의 <新視点>이란 잡지 주간과 인터뷰를 했다. 이 녹취록을 구한 白 씨는 자신의 회고록에 그 全文을 실었다.
  
  이 녹취록에 따르면 싱글러브는 자신이 “그렇다”고 대답한 것은 북한군의 戰力증강에 대한 최신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북한군은 1970년대 전반기에 대포와 전투기를 倍增(배증)시켰고 장갑차는 세 배로 늘렸으며, 수륙양용차와 수송기를 4배로 증강시키면서 휴전선 가까이 공군기지를 만들고 병력을 전진배치하고 공격대형을 취했다. 이런 정보를 미군은 1976년 초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카터가 1975년부터 駐韓미군 철수를 주장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싱글러브는 카터가 대통령이 된 이후엔 군부로부터 보고를 받고 撤軍 주장을 취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워싱턴 포스트> 기자에게 “나는 撤軍에 반대하지만 만약 대통령이 그렇게 결정한다면 우리는 직업의식과 열성을 다해 이를 수행할 것이다”고 덧붙였다는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인터뷰를 보도하면서 이 부분은 생략했다.
  
  5월 19일 <워싱턴 포스트> 기사를 읽은 카터 대통령은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에게 즉시 싱글러브 참모장을 불러들여 데리고 오라는 지시를 했다. 브라운 국방장관은 한국에 가 있던 조지 브라운 합참의장에게 이 지시를 전달했고, 브라운 의장은 베시 사령관에게 명령해 싱글러브 소장을 백악관으로 보내게 했다. 워싱턴으로 불려 온 싱글러브 소장에게 브라운 장관은 이런 충고를 했다고 한다.
  
  “대통령을 만나면 모든 책임을 기자에게 전가하세요. ‘그런 말을 한 사실이 없고, 나는 撤軍을 지지합니다’라고 하란 말입니다.”
  
  싱글러브 소장은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장관께선 잘 이해하시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 기자는 본인의 발언을 정확하게 보도했습니다. 저는 제 생각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카터 대통령의 체면을 살려주시오”
  
  
  브라운 장관은 싱글러브 소장을 데리고 카터 대통령 집무실로 갔다. 이상한 면담은 한 시간 반 동안 계속되었다. 카터 대통령은 경위를 물었고 싱글러브는 설명했다.
  
  “저는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발언을 한 시기는 韓美 간의 撤軍 협의가 있기 전이었으므로 각하께서 정책을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撤軍 결정이 내려지면 이를 열심히 수행할 것이지만 제가 알기로는 그런 결정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군인은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
  
  카터는 군대에 대한 민간통제의 전통에 대해서 강의하듯이 이야기했다. 녹취록에서 싱글러브는 “그런 것들은 다 알고 있는 내용이므로 필요없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카터 대통령도 싱글러브를 달리 처벌할 근거가 없다는 판단을 했다. 다만, 그를 다른 부대로 전출시키라고 장관에게 지시했다. 美 하원 군사위원회의 소위원회는 싱글러브 소장에게 출두명령을 내렸다. 싱글러브는 소위원회에 나가서도 撤軍의 부당성을 주장했다. 이 소위원회는 그 뒤 한국을 방문하고 撤軍반대 의견을 냈다.
  
  이렇게 되니 싱글러브 소장의 인터뷰 파문은 워싱턴의 가장 큰 뉴스로 부각되고 카터는 곤경에 처했다. 브라운 국방장관은 싱글러브에게 한국으로 歸任(귀임)하지 말고 바로 조지아州 육군사령부로 가라고 명령했다. 한국에 있는 가족과 짐은 잘 챙겨서 보내 주겠다고 설득했다.
  
  
  강력하게 반대한 것은 베시 사령관이었다. 브라운 장관은 싱글러브 소장에 대한 성대한 환송파티나 훈장수여를 금지시키고, 朴 대통령에 대한 離任(이임) 인사차 방문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아 베시 사령관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싱글러브는 朴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으나 朴 대통령은 사람을 보내 위로의 뜻을 전했다. 싱글러브 소장의 회고에 따르면 이임을 앞두고 일주일간 휴가를 얻어 한국을 여행했는데 가는 곳마다 보통시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식당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일어나 박수를 치곤했다는 것이다.
  
  싱글러브는 조지아州의 육군사령부 참모장으로 전속되어 근무하다가 1978년 4월에 또 공개석상에서 카터의 중성자탄 제조연기, B-1 폭격기 생산계획취소 조치를 비판했다고 해서 전역당했다.
  
  이상의 경과를 살펴보면 베시 駐韓미군 사령관과 싱글러브 참모장은 카터의 撤軍특사가 朴 대통령을 만나러 오는 시점을 D데이로 삼고 작전하듯이 反카터-反撤軍 공작을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 駐韓미군 사령부는 朴 대통령과 손잡고 카터를 물 먹인 셈이다.
  
  이런 공작이 발각되었다면 군법회의에 넘겨졌을 만한 일을 감행해 가면서 베시와 싱글러브가 카터의 撤軍정책에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撤軍의 논리와 전략이 너무나 허술하여 군부 전체의 웃음거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軍心이 완전히 떠난 상태에선 아무리 최고사령관의 의지가 강해도 먹히지 않는다는 교훈을 남긴 셈이다.
  
  1977년 5월 25, 26일 양일 간 미국 카터 대통령의 특사 하비브 국무차관과 브라운 합참의장이 청와대를 방문하여 朴 대통령에게 카터의 撤軍계획을 통보했다. 첫날은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1시 5분까지 소접견실에서 회의가 진행되었다. 한국 측에선 崔圭夏 국무총리를 비롯해 외무·국방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의전수석(통역)이 배석했다. 미국 측에선 스나이더 駐韓 미국대사와 베시 駐韓미군사령관이 배석했다. 둘째날인 26일에도 오후 4시부터 1시간 15분 동안 회의가 이어졌다.
  
  하비브와 브라운은 朴 대통령을 안심시키려 했다. 그들의 설명요지는 이러했다.
  
  <撤軍은 한반도의 군사력 균형을 파괴하거나 북한의 오판을 유발하지 않도록 진행될 것이다. 한국의 자주국방 능력 향상을 위한 한국 측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對韓방위공약은 변함이 없다. 美 공군은 계속해서 주둔한다>
  
  朴 대통령은 2~3일 전부터 꼼꼼히 메모해 두었던 견해를 조목조목 털어놓았다.
  
  <미국 대통령이 자기 나라 군대를 빼겠다는데 다른 나라가 막을 수는 없다. 駐韓 美 지상군을 4~5년 내에 완전히 철수한다는 것은 韓美 양국을 위해서 대단히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美 지상군은 북한군의 再남침을 저지하는 관건이자, 일본과 東아시아의 방위를 위해서도 크나큰 기여를 하고 있다.
  
  駐韓미군은 미국의 세계전략 차원에서 볼 때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더불어 소련을 견제하는 2大 근간이다. 유엔군사령관을 겸하고 있는 駐韓미군사령관은 4만여의 駐韓미군과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60만 한국군, 그리고 고도의 훈련을 쌓았으며 전투경험도 있는 250만 내지 300만 명의 예비군까지 지휘하고 있다.
  
  소련은 그 병력의 3분의 2를 西歐에, 3분의 1을 극동에 배치하고 있다. 3분의 2에 대해서는 NATO軍이, 3분의 1에 대해서는 駐韓미군 사령관 휘하의 韓美연합군이 대처하고 있다. 이런 미국의 세계군사전략으로 볼 때 駐韓미군을 완전히 철수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여기서 朴 대통령은 駐韓미군의 主力인 지상군이 철수하면 駐韓미군사령관에게 위임해 놓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도 再검토해야 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다. 朴 대통령은 金載圭 정보부장과 베시 사령관 사이의 밀약에 따라 ‘先보완 後철군’을 요구했다. 하비브 차관과 브라운 합참의장은 “카터 대통령의 방침은 보완과 撤軍을 병행하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두 사람은 이 이견을 해결하기 위한 韓美 간 실무자회담을 수용했다.
  
  1977년 5월 26일 오후 撤軍관련 회담을 끝낸 朴 대통령은 鮮于煉 공보비서관에게 회담에서 논의된 인권문제와 관련하여 이렇게 구술했다.
  
  <먼저 하비브 美 국무차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고 한다.
  
  “대통령께 이제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카터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카터 대통령의 국내 정치적 입장이 어렵다는 것을 각하께서 잘 좀 이해해 주십시오. 카터 대통령의 국내 정치적 입장이나 얼굴,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 간청합니다만 뭔가 제스처를 좀 써 주십시오.”
  
  朴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스나이더 대사에게는 이미 이야기했지만 한국에 소위 인권 문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카터 대통령의 입장을 고려하고 이해해 달라는 이야기는 같은 정치인으로서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 내에 소위 인권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대통령에게 사면권은 있습니다. 나 자신 대통령으로서 사면권을 과거 몇 차례 행사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민청학련 사건 때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 여부는 본인들, 즉 복역자들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개과천선하고 개전의 정을 보이고 또 복역 자세가 좋을 경우에는 내가 사면을 해왔고, 또 사면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복역자들의 자세가 마치 영웅이나 된 것처럼 경거망동하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특히 귀하들이 온다니까 구세주나 오는 것처럼 기대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사면을 하겠소? 사면은 못 합니다. 그들이 왜 그런 자세를 갖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미국에서 소위 한국의 인권 문제가 거론되고 제기될 때마다 미국 정부가 ‘관심을 표명한다’는 식의 논평을 내니까 그들이 자세를 안 바꾸는 것 아닙니까?”>
  
  朴 대통령은, 1977년 5월 27일 오후 4시부터 두 시간 동안 신민당 당수 李哲承을 청와대로 초청해 韓美회담 결과를 설명했다. 李 총재는 나중에 이렇게 기억했다.
  
  <인권과 주한미군 철수를 흥정하는 미국의 압력에 그는 참으로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국가안보를 볼모로 하여 정권투쟁을 해선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나는 중도통합의 철학에 따라 反정부와 反국가는 구별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쿠라라는 욕을 먹으면서도 朴 대통령의 입장을 옹호했던 것이다>
  
  李 총재는 미국과 일본을 방문해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한다는 견해를 要路(요로)에 전달하는, 야당외교를 벌이기도 했었다. 이 자리에서 朴 대통령은 “李兄, 撤軍에 반대하는 야당외교,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朴 대통령은 1950년대 사단장, 1군 참모장, 6관구 사령관을 지낼 때부터 야당의 국방위원이던 李哲承과 친했다.
  
  朴 장군을 ‘형님’이라 부르며 따랐던 韓雄震(특무부대장 출신)이 李哲承 의원과 동향으로 두 사람을 연결해 주었다. 그때도 不義(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의 朴 장군은 국정감사를 오면 꼬치꼬치 문제를 따지고 드는 李 의원을 좋아해 軍內의 문제점과 非理를 알려 주었다.
  
  4·19 혁명 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李哲承 의원은 당내 소장파의 선두에 섰고 국회 국방위원장으로서 張勉 정권의 실력자였다. 그때 매그루더 駐韓미군사령관은 젊은 장교들의 下剋上(하극상)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이 朴正熙 소장(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이라고 보고 새삼 거의 좌익 前歷(전력)을 문제 삼아 전역시킬 것을 張勉 총리에게 요구했다. 張 총리는 이 문제로 李哲承과 의논했다.
  
  李 의원은 朴 소장의 인품을 이야기하면서 감쌌다. 朴 소장도 李 의원을 찾아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朴 소장은 전역당하는 대신에 대구의 2군 부사령관으로 전출되었다. 閑職(한직)이었기 때문에 쿠데타 모의에는 좋은 자리였다.
  
  가까운 영천엔 韓雄震 준장이 정보학교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쿠데타 모의를 진전시켜 나갔다. 5·16 그날 밤 처음부터 끝까지 朴 소장을 동행했던 이가 韓 준장이었다.
  
  5·16 군사혁명이 나자 李哲承은 외국에 있다가 귀국을 포기하고 해외에서 反朴운동을 벌이게 된다. 그는 약 8년간 정치휴학생이 되는 바람에 金大中·金泳三 씨한테 밀리게 된다.
  
  이런 인연을 가진 李哲承 신민당 당수는 朴정권을 상대로 ‘참여하의 개혁’ 노선을 추구했다. 외교·국방 문제에선 超黨的(초당적) 협조를 하고 국내정치 문제에선 견제한다는 ‘중도통합노선’이 그것이다. 李哲承 씨는 1978년 12월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 공화당보다도 득표율에서 1.1%를 이긴 것은 선거법·국회법·정치자금법에서 야당이 유리하도록 고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개정이 가능했던 것은 안보부문에서 朴 정권에 협조해 주었으므로 朴 대통령이 공화당의 반대를 꺾고 야당 편을 들어 준 덕분이라고 한다.
  
  현재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서 애국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李 씨는 “나는 대안 없는 兩金식 강경투쟁이 생리에 맞지 않았다”고 말했다.
  
  두 개의 한국》이란 책을 쓴 돈 오버도퍼 기자에 따르면 카터의 撤軍 특사 하비브와 브라운은 카터 대통령이 1977년 5월 초에 서명한 1급 비밀문서(撤軍 일정표)를 朴 대통령에게 설명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1978년 말까지 1개 여단 6,000명을 빼내가고, 1980년 6월 말까지 또 1개 여단과 지원병력 최소 9,000명을 철수하며, 한국에 있는 핵무기는 줄여 가다가 撤軍 완료와 함께 다 가지고 나간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韓美 간 합의에 따라 카터가 낸 撤軍보완 예산이었다. 이 해 7월 브라운 국방장관이 19억 달러의 撤軍보완 예산을 의회 지도자에게 설명하자 한 사람도 撤軍을 찬성하지 않았고, 많은 의원들이 반대했다.
  
  의원들이 撤軍보완 예산 통과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朴 대통령을 지지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싫어해서였다. 그들은 인권탄압, 對美 불법로비, 한국 진출 미국계 회사들에 대한 정치헌금 강요, 金大中 납치사건 등으로 미국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는 朴 정권에 대해서 그런 지원을 승인해 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미국은 한국 측에 撤軍에 따른 보완을 약속해 두었는데 이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撤軍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카터가 당면한 여러 장애물 중의 하나였다.
  
  
  
  
  
[ 2009-04-06, 21:0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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