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의 거대한 비전: 중화학공업건설
연재 57/그는 21세기를 향한 國土개조계획도 세웠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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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학공업 건설의 성공은 한국을 선진국 대열로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경제규모가 달라졌다. 일자리가 많아지고 월급이 올랐다. 중산층이 두터워지고 대기업은 세계적 기업으로 승격하였다. 국가와 사회의 개방을 촉진하였다. 이게 1980년대의 민주화를 뒷받침하였다.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한 저력이었고, 통일을 주도할 수 있게 하는 국력이다.
朴正熙의 대전략: 중화학공업 건설
  -중화학공업 건설의 성공은 한국을 선진국 대열로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경제규모가 달라졌다. 일자리가 많아지고 월급이 올랐다. 평균수명이 길어져 세계최장수국 반열에 올랐다. 중산층이 두터워지고 대기업은 세계적 기업으로 승격하였다. 국가와 사회의 개방을 촉진하였다. 이게 1980년대의 민주화를 뒷받침하였다.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한 저력이었고, 자유통일을 주도할 수 있게 한 國力 건설이었다.
  
  
  
  *수출 100억 불!
  
  1977년 12월 22일, 드디어 한국은 연간 100억 불(달러) 수출 목표를 달성했다. 목표연도는 1980년이었는데 3년을 앞당겼다. 朴正熙 대통령은 이날의 일기를 신문기사처럼 적었다.
  <백억 불 수출의 날. 백억 불 수출목표 달성 기념행사 거행. 오전 10시 장충체육관에서 각계 인사 7,000여 명이 참석, 성대한 행사를 거행하였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던 해 연간 수출액이 5,000여만 불이었다. 그 후 1964년 11월 말에 1억 불이 달성되었다고 거국적인 축제가 있었고, 11월 30일을 수출의 날로 정했다. 1970년에는 10억 불, 7년 후인 금년에 드디어 100억 불 목표를 달성했다. 서독은 1961년에, 일본과 프랑스는 1967년에, 네덜란드는 1970년에 100억 불을 돌파했다고 한다.
  10억 불에서 100억 불이 되는 데 서독은 11년, 일본은 16년(1951~ 1967)이 걸렸다. 우리 한국은 불과 7년이 걸렸다. 1981년에 가면 200억 불이 훨씬 넘을 것이다. 1986년경에 가면 500억~600억 불이 될 것이다. 100억 불,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자. 새로운 각오와 의욕과 자신을 가지고 힘차게 새 전진을 다짐하자.>
  朴 대통령은 이날 무엇보다도 100억 달러 수출전선에서 일한 한국 근로자들의 勞苦(노고)에 감사했다. 그는 이해 4월 13일 일기에서 창원공단을 시찰한 소감을 썼는데 이런 대목이 보인다.
  <모든 산업전사들이 땀 흘리며 일하고 있는 모습이 거룩하게만 보였다. 눈에서 사라지지를 않는다.>
  
  *‘10월 유신, 100억 불 수출, 1000불 소득’
  
  1970년대 한국의 국가적 목표는 ‘10월 유신, 100억 불 수출, 1000불 소득’이란 구호로 표현되었다. 국민들의 개인적 목표는 ‘마이 카’와 ‘아파트 입주’로 상징되었다. 朴 대통령은 목표를 수치로 정해야 안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관념적 말장난보다는 누구도 속일 수 없는 수치를 신봉했다. 100억 달러란 수치를 맨 먼저 꺼낸 것도 朴 대통령이었다.
  1972년 5월 30일 중앙청 홀에서 무역진흥확대회의가 열렸다. 회의가 끝난 뒤 朴 대통령은 전시된 수출상품들을 둘러보았다. 이날 오후 朴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로 吳源哲 경제제2수석비서관을 불렀다. 朴 대통령은 집무용 의자에 앉아 있다가 “吳 수석, 차 한잔 들지” 하면서 방 한가운데에 있는 소파 쪽으로 가서 앉았다. 보통은 회의용 탁자 쪽 의자에 가서 앉는데 소파에 앉는 일은 드물었다. 吳 수석은 긴장했다.
  “임자, 100억 불 수출을 하자면 무슨 공업을 육성하지?”
  吳 수석은 ‘지난 2월에 1980년도 수출목표를 50억 달러로 확정지었는데, 왜 갑자기 100억 불 이야기를 할까’ 하고 의아해했다. 吳 수석은 이런 때를 대비한 복안은 갖고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한 뒤 외치듯 말했다.
  “각하! 중화학공업을 발진시킬 때가 왔다고 봅니다. 일본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경제를 소생시키기 위한 첫 단계로 경공업 위주의 수출산업에 치중했습니다. 현재의 우리나라와 사정이 같습니다. 그 후 일본의 수출액이 20억 달러에 달할 때 중화학공업 정책으로 전환했습니다. 이때가 1957년입니다. 그 후 10년이 지난 1967년에 일본은 100억 달러의 수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기계제품과 철강제품이 일본 수출의 主力(주력)상품이 되었습니다.”
  朴 대통령은 생각에 잠기더니 “자료를 갖고 와서 다시 설명해”라고 말했다. 吳 수석은 사무실로 돌아와 우선 朴 대통령의 국가운영에 대한 철학과 전략을 먼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朴 대통령의 저서와 연설문을 다시 읽어 보고 그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朴 대통령은 우리의 역사적 과업을 민족의 중흥과 평화통일로 설정하고 있다. 이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은 富國强兵, 즉 국력증강이다. 국력의 바로미터는 수출이다.>
  吳 수석은 며칠 뒤 金正濂(김정렴) 비서실장과 함께 朴 대통령에게 100억 달러 수출을 위한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보고했다.
  “일본은 1957년 중화학공업 선언을 하고 10년 만에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습니다. 1957년에 일본은 산업구조상 중화학공업 비율이 지금의 우리나라와 같은 43%였습니다만 10년 뒤엔 78%가 되었습니다. 수출품목에서 차지한 중화학공업 제품의 비중도 1955년엔 41%였는데, 1967년엔 67%로 늘었습니다. 중화학공업 유치에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와 경쟁관계에 있는 동남아 국가들보다 먼저 출발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현 시점이 중화학공업 진입의 마지막 버스를 탈 수 있는 기회입니다. 단순조립 공업은 임금이 올라가면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한국의 임금상승률은 대만을 앞지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대만보다 더 빨리 중화학공업을 이룩해야 합니다.”
  옆에서 金正濂 실장은 “각하, 자금 문제는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내자 동원은 별 문제가 없고, 외자는 수출이 증가하는 한 차관이 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 심각하게 듣고 있던 朴 대통령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吳 수석, 우선 중화학기획단 같은 것을 구성해서 계획을 짜도록 해보지.”
  朴 대통령은 金 실장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중화학기획단 구성에 대해서 내각에 지시하시오.”
  朴 대통령은 초인종을 누르더니 비로소 커피를 시켰다. 기분이 대단히 좋을 때 하는 행동이다. 吳 수석은 설명을 덧붙였다.
  “중화학공업을 건설하게 되면 남성 기능공이 主役이 됩니다. 일자리가 많아지고, 급료도 여성 기능공보다 많아집니다. 그래서 국민생활이 윤택해지고 국민소득도 급상승합니다.”
  吳 수석의 이날 보고가 1970년대 한국의 가장 중요한 발전 테마가 되는 중화학공업 건설의 시작이었다. 이 大사업이 朴 대통령이 던진 ‘수출 100억 불’이라는 화두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중화학공업 건설을 뒷받침한 것이 유신체제
  
  1972년 상반기 朴 대통령은 남북회담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방위산업 건설 계획, 100억 달러 수출 계획, 그리고 중화학공업 건설 계획을 준비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朴 대통령이 그해 10월 17일 유신조치를 통해서 헌법 기능을 정지시키고 국회를 해산한 뒤 유신체제를 발족시킨 배경을 이해하는 데 단서가 된다.
  朴 대통령은 유신체제 수립의 당위성을 7·4 남북공동 성명을 만들어 낸 남북회담과 국제정세 변화에 대응한 체제정비에 두었으나, 유신체제의 실질적 목표는 중화학공업을 건설해 한국을 선진국 문턱으로 밀어 올린다는 것이었다. 吳 수석 같은 이는 “중화학공업 건설을 위해서 유신체제를 선포해 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金鍾泌 前 총리도 “朴 대통령으로부터 ‘삼선개헌과 유신체제의 목적은 중화학공업 건설에 있다’는 취지의 말을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즉 권력의 집중은 수단이고, 목표는 중화학공업 건설이었다는 이야기이다.
  吳源哲 수석은 혁신적 발상을 잘 하는 엔지니어 출신으로서 독창적인 방법으로 중화학공업 건설을 밀고 나갔다. 그 핵심은 이러했다.
  <朴 대통령으로부터 지시받은 ‘방위산업 건설 계획’, ‘100억 달러 수출 계획’, ‘중화학공업 건설 계획’의 3개 과제를 한 시스템으로 통합한다. 즉 兵器(병기)를 생산하는 중화학공업, 수출을 하는 중화학공업을 건설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중복투자 방지, 건설비 감축, 작업량 확보와 가동량 증가, 평시 防産(방산)시설 활용과 戰時 병기 증산, 그리고 수출이 가능해진다.>(吳源哲, 《한국형경제건설》 제7권)
  유신선포 직후인 1972년 12월 28일에 상공부는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100억 달러 수출계획을 보고했다. 1980년에 100억 달러를 수출한다는 계획이었다. 朴 대통령은 이 보고를 듣고는 “10월 유신에 대한 중간평가는 수출 100억 달러를 기한 내에 달성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행정, 생산양식, 농민생활, 국민의 사고방식, 외교, 문교, 과학기술 등 정부의 모든 정책초점을 100억 달러 수출목표에 맞추어 총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스템 운영의 鬼才(귀재)’라고 불리는 朴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수치화하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각 부서의 역할을 명백히 한 다음에 適材適所(적재적소)의 인사를 통해서 각각의 역량을 이 방향으로 집중시켜 놓고는 그 집행과정을 제도적으로 확인하고 점검하며 수정과 독려를 되풀이했다.
  朴 대통령은 100억 달러 수출목표를 3년이나 단축해 1977년에 달성함으로써 이제는 1980년대의 國政 목표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이 무렵 朴 대통령은 1980년대의 비전으로서 國土改造(국토개조)를 구상하고 있었다.
  
  *김용환, 오원철
  
  朴대통령식 국정운영의 핵심은 큰일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추진력과 일을 야무지게 매듭짓는 능력의 소유자를 찾아서 適所(적소)에 배치한 뒤 전폭적으로 부하들을 밀어주되 일의 진행과정을 정기적으로 점검 확인한 점이다. 朴대통령은 군 지휘관 시절부터 "지시는 5%, 확인이 95%이다"는 말을 할 만큼 중간 점검을 중시했다.
  <대통령은 직, 간접적인 검증을 거친 후에야 행정부에 인재를 등용했다. 정치인이나 군출신자들을 입각시킬 경우에도 일단 공기업, 또는 관련 연구기관, 정치권 등에서 행정경험을 쌓는 과정을 눈여겨보면서 능력과 적성을 평가한 후, 즉 어느 정도 검증 절차를 거친 후 중용하곤 하였다(金龍煥 당시 재무장관 회고록-'임자, 자네가 사령관 아닌가')>
  吳源哲 제2경제수석이 기획한 중화학-방위산업 동시건설안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한 朴대통령은 1973년 5월53일 金龍煥 재무차관을 대통령특별보좌관으로 임명하여 중화학공업 건설의 정책적 뒷받침을 지시했다. 金보좌관은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의 기획단장도 겸임했다. 金龍煥 씨는 김정렴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일하던 그 전해에 '8.3 사채동결 조치'의 비밀 계획을 전담하여 성공시킴으로써 대통령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8.3 조치 발표 6일 전에 金龍煥씨를 불러 "발표와 함께 임자를 재무부 차관으로 발령을 낼테니 사채동결 정책을 반드시 성공시켜 우리 경제를 살리도록 하라"고 말했다. 당시 재무장관 南悳祐씨도 金차관에게 8.3 조치의 집행을 일임하였다. 朴대통령은 국가중대사에 대해서는 그 분야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을 앉혀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朴대통령은 방위산업을 민간주도-정부뒷받침의 시스템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많은 나라에서는 무기생산을 국방예산과 직결된 공기업 형태의 국가주도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방부는 국가주도형 방위산업 건설을, 청와대와 경제부처는 민간주도를 주장했는데, 朴대통령은 민간주도쪽에 손을 들어주었다.
  
  *국민투자기금으로 財源 확보
  
  朴대통령은 "방위산업은 중화학공업과 연계되어 있는데, 무기생산만 전담하는 공기업형으로 육성했다가 수요가 포화상태에 이르면 기업의 채산성이 악화될 수 있다. 따라서 민간기업이 무기와 일반상품을 함께 생산하도록 해놓아야 불황에 따른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정부는 이 업체들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중화학공업기획단장이 된 金龍煥씨는 경제기확원 물가국장 徐錫俊씨(나중에 경제부총리, 아웅산 테러로 사망)를 부단장으로 데리고 왔다. 金龍煥 팀은 첫 작품으로서 '중화학공업육성계획'을 내어놓았다.
  이 보고서는 1980년대를 복지사회 고도산업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중화학공업화에 따른 공업구조의 고도화 없이는 불가능하고 지적했다. 대통령은 1973년 8월에 金龍煥 특별보좌관을 경제제1수석으로 승진켰다. 金수석은 화공 엔지니어 출신인 吳源哲 제2경제수석(중화학공업기획단장 겸임)을 도와 중화학공업화의 자금동원과 산업기지 건설을 해냈다. 중화학공업단지의 건설은 산업기지개발공사를 설립하여 하기로 했다. 수자원개발공사 사장으로서 뛰어난 추진력이 검증된 安京模씨가 산업기지개발공사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1974년 4월1일부터 1979년12월14일까지 창원, 여천, 온산, 안정, 구미, 포항, 북평, 아산의 8개 산업기지가 만들어졌다.
  중화학공업건설에는 자금이 많이 들고 투자회수에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국내 저축률이 25% 이상 되어야 추진할 수 있는 대사업이었다. 당시 국내 저축률은 15% 정도였다. 吳수석의 비교법에 따르면 수출이 연간 18억 달러 하던 때 중화학공업 건설에 100억 달러를 넣어야 한다는 것은 지금 기준으로는 7000억 달러를 조달하는 것과 같은 자원 집중이었다. 金龍煥 경제제1수석은 중화학공업 자원확보를 위해 국민투자기금을 만들기로 했다. 1973년12월14일에 국민투자기금법이 제정되었다.
  이 기금의 대부분은 국민투자채권을 금융기관이 매입하는 방법으로 출연했다. 기금설립 초기엔 은행의 경우 예금증가액의 10-39%, 보험회사의 경우 수입보험료의 40~50%, 공공기금의 경우 여유자금의 약90%를 이 기금에 출연했다. 시중은행의 예금까지 국민투자기금에 편입시킴으로써 1978년 무렵부터 중화학공업 중복투자 및 과잉투자의 부담이 금융부문에 전가되자 제5공화국 출범 직후 중화학투자 조정이 이뤄지게 되었다.
  중화학공업 건설의 사령관인 朴대통령은 기술에 밝고 창조적 발상을 많이 하는 吳源哲 제2경제수석을 참모장으로 쓰되 재정에 밝고 꼼꼼한 金龍煥 제1경제수석을 통해서 보완과 견제를 해가면서 그의 마지막 대도박을 밀고나간다. 吳, 金 두 수석 다 패기만만한 40代였다.
  
  *기능공들의 중산층화
  
  
  1970년대 97개 工高의 연간 졸업생은 5만 명에 달했다. 1973~1979년 사이 배출된 기능공은 80만~1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은 현재 50대 중후반이다. 1970년대 의 중화학공업 건설의 현장에서 뛰었던 이들은, 1997년 외환위기 때 구조조정의 칼바람도 피해갔다. 他人(타인)이 갖추지 못한 고유의 기술을 보유한 덕분이었다.
  이 기능공들의 삶이 그 뒤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분석한 <1970~80년대 양성된 중화학공업 부문 기능공의 계층이동에 관한 생애사적 연구>(柳光浩 著)란 논문이 2013년 12월에 발표되었다.
  
  柳光浩(유광호) 씨는 1973~1986년 풍산금속 안강공장에 入社(입사)했던 기능공 20명의 현재 생활 상태를 조사했다. 먼저 이들 20명의 청소년기 경제사정을 확인했다. 이중 15명(75%)이 ‘객관적 가정형편’ 상 대학진학을 꿈꿀 수 없었다고 한다. 조사 당시 이들의 평균 현금성 임금(연봉)은 6400여 만 원에 달했다. 글로벌 대기업群(군)에 속한 현대자동차의 경우, 연 1억 원에 연봉을 받는 근로자들이 많은 데, 이를 기준으로하면 이들의 연봉은 中上 정도에 해당한다. 중소기업 연봉이 평균 3000만~4000만 원 정도임을 감안하면 풍산 소속 근로자들의 연봉이 상대적으로 높음을 알 수 있다(注: 2012년 기준 국내 제조업 평균 연봉은 3625만 원).
  게다가 이들 20명의 자녀 모두 전문대 이상의 학교에 진학했다. 저자는 “그들 자녀의 100% 대학 졸업률(4년제 대학 재학 및 졸업자가 94.3%, 전문대 졸업자가 5.7%)은 기능공들이 중산층이 되었음을 웅변해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저자는 “농촌 중하층 출신의 청소년을 중화학 공업화에 필요한 숙련노동자로 변신시키지 않았다면 농촌의 잠재적 실업자인 농촌과잉인구로 퇴적되거나, 잘해야 경공업 부문의 半(반)숙련 노동자가 될 가능성이 컸다고 할 수밖에 없겠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大변화는 발전국가가 萬難(만난)을 무릅쓰고 공업화, 그것도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한 결과”라고 진단했다.
  
  *중화학공업 건설이 만든 글로벌 기업
  
  루치 샤르마(Ruchir Sharma)씨는 모건 스탠리의 Emerging Markets and Global Macro 부서 책임자이다. 그가 쓴 ‘Breakout Nations'(Norton, 2012)는 한국, 대만, 중국, 인도, 브라질, 멕시코 등, 선진 경제권에 도전하는 나라들의 장단점을 분석한 책이다. 흥미 있는 제목, ‘The Gold Medalist'가 있어 그 부분부터 읽었다. 금메달감의 나라가 어디인가 궁금해서였다. 샤르마 씨는 한국을 도전 국가群(군)의 1등으로 꼽았다. 그는 한국의 라이벌이 대만이었는데 지난 10여년 사이에 한국이 선두에 나섰다면서 極讚(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조업 重視가 계속되는 점에서 ’아시아의 독일‘이란 표현도 썼다.
  
   1. 대만과 한국은 지난 50년간 연평균 5% 이상의 경제성장을 지속한 세계의 唯二(유이)한 나라이다.
   2. 한국 경제는 1997년과 2008년의 세계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창조적인 파괴를 통하여 체질을 개선, 더욱 강해졌다. 守勢的(수세적)으로 위기를 넘기려 하였던 일본과 대조된다.
   3. 한국 경제기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제조업 重視(중시) 노선이 경제구조의 선진화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5년 전과 비교하면 제조업 비중이 26%에서 31%로 늘었다. 제조업 비중이 25%를 넘기면 서비스 重視로 바뀌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은 반대이다. 한국의 제조업은 또 중화학 공업을 중심으로 다각화되어 있다. 한국을 ‘아시아의 독일’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유이다.
  
   4. 대만은 주문생산 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하였지만 한국의 대기업은 무모하게 보일 정도의 모험을 통하여 ‘글로벌 브랜드’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삼성, 현대, LG는 한국 GDP(국내총생산)의 16%를 차지한다. 이에 힘입어 수출이 汎지구적으로 확대되었다. 2003년에 한국 수출액의 3분의 2는 先進경제권에 판 것인데, 2011년엔 3분의 2가 중국 등 개발도상국으로 나갔다. 한국의 수출액은 GDP의 53%이고, 무역액은 GDP와 거의 맞먹어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인 경제구조이다.
   5. 이런 성공의 중심엔 재벌 기업이 있다. 한국의 재벌 기업은 장기적, 모험적 투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데 이는 오너가 결정권을 가진 덕분이다. 현대 자동차가 세계 제5위의 판매량을 기록한 데는 鄭周永 회장의 미국 시장 진출 결단(1986년), 鄭夢九 회장이 결정한 新車 판매에 대한 10년 보증 및 알라바마 현지 공장 건설에 힘입은 바 크다. 이런 모험은 재벌 출신 경영자이니까 가능하였다.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가 退潮(퇴조)하는 마당에 어떻게 미국에서 자동차 공장을 짓느냐는 비판도 있었지만 지금 현대의 알라바마 공장이 미국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다.
  
   6. 한국의 성공사례는 가장 강한 기업 모델(the strongest corporate model)은 ‘가족이 소유하면서도 주식은 공개되어 있고, 전문가들이 관리하는 회사’임을 보여준다. 공개된 기업은 경리를 투명하게 할 수밖에 없다. 매킨리의 조사에 의하면 가족이 경영하는 회사는 2008년의 금융위기를, 非가족 회사보다 더 성공적으로 극복하였다. 가족 회사는 이 기간에 빚을 줄였고 기술 개발 투자는 늘렸다.
   7. 대만은 한국보다 쉬운 길을 가다가 뒤처졌다. 가장 큰 敗因(패인)은 삼성, 현대, LG와 같은 독자적인 글로벌 브랜드를 만들지 못한 점이다. 대만은 일본의 하청업체로 안주하려 하였지만 한국의 대기업은 일본을 이기려 하였다. 대만 기업은 중국, 인도 등에 주로 투자하여 매달 20억 달러씩 해외로 빠져나갔다. 대기업이 기술개발에 집중한 한국은 특허 出願(출원) 건수에서 세계 5위 안에 드는데, 대만은 20등 안에도 들지 못한다. 대만은 부품을 자체 개발하기보다는 일본으로부터 사들이는 방식을 選好(선호)하다가 2011년 쓰나미 사태로 큰 타격을 받았으나 한국은 끄떡없었다.
  
   8. 세계의 금융인들은 서울의 KOSPI를 세계 경제 동향의 중요 변수로 여기는데, 대만 주식시장엔 관심이 적다. KOSPI에 등록된 회사들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이는 한국 제조업의 다각화를 반영한다.
   9. 한국 기업은 해외의 다른 회사를 매입하기보다는 자신들의 회사에 투자하거나 공장을 새로 짓는 쪽을 選好한다. 2010년 한국 기업은 해외에서 1400억 달러를 투자하였다.
   10. 한국 제조업은 세계에서 로봇을 가장 많이 쓰는 축에 들고 省力化(성력화)로 대만보다 생산성이 높다.
  
   11. 한국은 교육수준이 세계 최고이고 중산층이 강하여 富의 분배 문제에 민감하다. 한국의 富者들은 조심하는 사람들이다. 우선 10억 달러 이상의 순자산을 가진 부자가 적
   다. 러시아는 100명인데 한국은 16명이다. 대만은 25명, 터키는 38명이다. 한국의 10억 불 이상 부자 16명이 소유한 富의 총액은 국내총생산의 4%에 불과하다. 러시아는 29.2%, 인도는 17%, 말레이시아는 20%, 대만은 14.6%인데 한국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같은 수준으로 가장 낮다. 부자들이 정치적 연줄을 이용, 치부하고 호화판 생활을 하는 나라에선 정치 불안이 생기는데 한국의 부자들은 사생활에 신경을 쓴다.
   12. 한국 재벌 기업의 2, 3세들은 대체로 좋은 자질을 가졌다. 워렌 버핏은 가족이 운영하는 회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이 서로 싸우지만 않는다면 좋다.”
   13. 대만은 중국을 흡수 통일할 수 없지만 한국은 북한을 흡수, 지하자원과 훈련된 노동력을 얻어 한 번 더 도약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不動(부동)의 금메달감’이다.
  
   샤르마 씨의 분석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한국 재벌기업에 대한 好評(호평)이다. 물론 조건이 있다. 재벌 총수가 소유권을 장악, 장기적 전략의 투자와 의사결정을 하고, 기업을 공개, 투명한 經理를 하며, 전문가들이 회사를 운영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 같은 회사가 그렇게 하고 있다. 확고한 장기 전략, 투명성, 전문적 관리가 결합되면 最强의 기업이 된다. 단기 목표 달성에 치중하는 월급장이 사장보다는 재벌 오너가 그런 기업을 만드는 데 유리하다는 것이다. 한국엔 재벌세습을 권력세습과 동일시하여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세습 자체가 합법적이라면 善惡 是非의 대상이 아니다. 합법성과 투명성이 확보된다면 營利(영리)가 평가의 기준이다. 기업은 돈을 많이 벌어 세금을 많이 내고, 일자리를 많이 만들면 되는 것이다. 누가 주인이냐의 與否는 부차적이다. 꿩 잡는 게 매이다.
   한국이 제조업 전반에 걸친 세계적 경쟁체제를 구축한 것은 1973~79년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건설 덕분이다. 이 시기는 유신체제와 겹친다. 朴 대통령은 낭비적 정치 투쟁을 '한국적 민주주의'로 극복하여 얻은 國力을 중공업 건설에 집중 투자하였다. 이 시기는 두 차례의 석유파동이 몰려와 세계적 경제위기가 휩쓸던 때였다. 위기를 오히려 好機로 이용한 것이 박정희의 선진국 進入 전략이었다. '아시아의 아이리쉬'로 통하던 한국인이 '아시아의 독일인'으로 불리게 된 것도 거대한 중화학공업의 기반이 국가의 운명과 국민성까지 바꿔놓은 덕분이다. 이런 대전환의 두 주인공은 강력한 지도자와 창의적인 기업인이었다.
   생전에 李秉喆 회장을 가까이서 모셨던 한 전직 언론인은, "늘 회사 일만 생각하는 분이었다. 한번도 편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늘 걱정하고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부자가 행복하다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李健熙 회장 역시 아무리 삼성전자가 기록적인 수익을 올려도 自祝 분위기를 허용하지 않고 배전의 노력을 주문하였다. 기업은 시장경제의 무한경쟁 속에서 생존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그런 숙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기업인들의 밤낮 없는 수고 덕분에 많은 보통사람들은 행복을 누린다. 이런 기업인들이 민주투사들처럼 우대 받게 될 때 한국의 자본주의는 더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다.
  
  
   *통계는 말한다
  
   1961년 朴正熙 소장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에 착수하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당시 경제통계 대상이었던 103개국 중 87위로 最下位圈이었다. 1위는 2926달러의 미국, 지금은 한국과 비슷해진 이스라엘은 당시 1587달러로 6위였다. 일본은 26위(559달러), 스페인은 29위(456달러), 싱가포르는 31위(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은 40위(326달러), 수리남은 42위(303달러), 말레이시아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세 배가 많아 44위(281달러)였다.
   지금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는 짐바브웨도 당시엔 1인당 국민소득이 274달러로서 한국의 약 3배나 잘 살았고 46위였다. 필리핀은 당시 한국인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보다 약 3배나 많은 268달러로서 49위였다. 남미의 과테말라도 250달러로 53위, 잠비아(60위, 191달러), 콩고(61위, 187달러), 파라과이(68위, 166달러)도 한국보다 훨씬 잘 살았다.
   필자의 가족은 이 무렵 파라과이로 이민을 가기 위한 수속을 밟았는데 다행히 잘 되지 않아 모두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나세르의 이집트도 152달러로서 70위였다. 박정희 소장 그룹의 일부는 이집트의 나세르를 따라 배우려 했다. 아프가니스탄도 124달러로 75위, 캄보디아도 116달러로 78위, 태국은 110달러로 80위였다. 차드 82위, 수단 83위, 한국 87위!
   한국은 유신시대로 불리는 1972~1979년에 중화학공업 건설을 본격화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 랭킹에서 도약한다. 1972년에 한국은 323달러로 75위, 말레이시아는 459달러로 64위였다. 1979년에 가면 한국은 1734달러로 59위로 오른다. 말레이시아는 63위로 1537달러였다. 말레이시아가 못해서가 아니고 한국이 잘하여 뒤로 밀린 것이다.
  
   2016년 현재 세계 GDP(구매력 기준) 국가별 랭킹은 다음과 같다(미국 CIA 통계).
   1. 중국 19조3900억 달러
   2. 유럽연합 19조1800억 달러
   3. 미국 17조9500억 달러
   4. 인도 7조9650억 달러
   5. 일본 4조8300억 달러
   6. 독일 3조8410억 달러
   7. 러시아 3조7180억 달러
   8. 브라질 3조1920억 달러
   9. 인도네시아 2조8420억 달러
   10. 영국 2조6790억 달러
   11. 프랑스 2조6470억 달러
   12. 멕시코 2조2270억 달러
   13. 이탈리아 2조1710억 달러
   14. 한국 1조8490억 달러
   15. 사우디아라비아 1조6830억 달러
   16. 캐나다 1조6320억 달러
   17. 스페인 1조6150억 달러
   18. 터키 1조5890억 달러
   19. 호주 1조4890억 달러
   20. 이란 1조3710억 달러
  
   2016년의 한국은 세계 5대 공업국, 세계 7대 무역국(세계 5대 수출국), 세계 13위 경제대국이다. GDP에서 북한의 거의 50배이다. 여성 평균 수명 세계 3위, 삶의 질 세계 17위. 18년의 통치기간에 이런 대도약의 구조를 만든 박정희는 수치로 증명할 수 있는 업적 면에서 20세기의 10대 정치 지도자 반열에 들 것이다.
  
   *2030년의 최장수국
  
   영국 런던의 임페리얼 칼리지 소속 공공 건강 연구팀(팀장 Majid Ezzati)이 35개 선진국의 평균 수명 추세를 조사하였더니 2030년에 최장수국은 남녀 공히 한국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최근 발표된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30년에 태어나는 한국 여성은 90세를 넘겨서 살 것으로 계산되었다. 남자 기대수명은 84세. 모두 일본을 젖히고 세계 1위가 된다.
  
  세계보건기구 통계와 21개의 다른 통계치를 입력하여 예측한 것이다. 1985년 평균 수명 조사에서 한국 여성은 세계에서 29등이었다. 요사이 통계에선 한국 여성이 세계에서 5위권이다.
  
  영국의 조사팀은 한국인의 장수 비결로, 경제수준의 향상, 어린이 영양 상태의 양호, 의료 기관 접근성이 평등한 점, 서양에 비교하여 혈압이 낮은 점, 그리고 여성에서 흡연율이 낮다는 점 등을 들었다.
  
  미국은 평균수명이 별로 늘지 않을 나라로 꼽혔다. 2030년에 가도 2년 정도 늘어 선진국 중 말석을 차지할 것이다. 남자가 80, 여자가 83세. 사회적 불평등, 보편적 의료의 결핍, 높은 영아 사망률과 많은 살인사건 등이 지적되었다.
  
  최근 영국의 공영방송 BBC는 ‘오래 사는 다섯 나라’라는 기사를 실었다. 린지 갤로웨이 기자가 쓴 글인데, 일본, 싱가포르, 스페인, 스위스, 한국이 소개되었다.
  
  일본인의 長壽 비결은 노인들 사이에서 교제가 왕성한 점, 두부, 감자, 생선 요리, 인간적 갈등이 적은 사회 분위기 등이 꼽혔다.
  
  스페인은 심장에 좋은 올리브 기름과 채소 및 포도주, 그리고 낮잠 습관이 평가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오후 2~5시 사이에 시에스타를 갖는데 이때 식사를 하고 낮잠을 잔다. 시간에 쫓기지 않으니 음식을 천천히 제대로 먹는다. 스페인 사람들은 도시에서 자가용 대신에 걷든지 자전거를 이용하는 습관이 있다.
  
  싱가포르는 의료 제도가 완비되어 있고, 사람들이 운동을 좋아하며, 담배와 술에 대한 세금과 규제가 심하다.
  
  BBC 기자는 스위스 사람들의 장수 비결로 치즈, 낙농(酪農)식품, 알프스를 들었다. 알프스가 휴가와 운동의 기회를 제공한다.
  
   한국인의 장수 비결은 발표식품, 찜질방, 사회적 교류가 높은 점, 불교에서 유래한 정신적 안정 등.
  
  2016년 미국 CIA가 집계한 長壽 랭킹은 이렇다.
  
  1. 모나코 89.5(남85.6 여93.5)
  
  2. 일본 85(81.7/88.5)
  
  3. 싱가포르 85(82.3/87.8)
  
  4. 마카오 84.5(81.6/87.6)
  
  5. 산마리노 83.3(80.7/86.1)
  
  6. 아이슬란드 83(80.9/85.3)
  
  7. 홍콩 82.9(80.3/85.8)
  
  8. 안도라 82.8(80.6/85.1)
  
  9. 스위스 82.6(80.3/85)
  
  10. 건지(영불 해협에 있는 섬) 82.5(79.9/85.4)
  
  11. 이스라엘 82.4(79.3/85.8)
  
  12. 한국 82.4(79.3/85.8)
  
  모나코, 마카오, 홍콩, 건지, 안도라, 산마리노 같은 극소 도시 국가나 국가가 아닌 지역 등을 빼면 한국인 평균수명은 8등이다. 여성은 3등이다.
  
  101. 중국 75.5
  
  156. 러시아 70.3(64.3/76.4)
  
  158. 북한 70.4(66.6/74.5)
  
  161. 필리핀 69.2
  
  163. 인도 68.5
  
  223, 차드 50.2(49/51.3)
  
  남한 사람은 북한 사람들보다 1인당 12년을 더 산다. 러시아는 여성이 남성보다 12년을 더 산다. 이런 장수국화를 물질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박정희가 욕을 먹어가면서 추진하였던 중화학공업 건설이었다. 최단시간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업적을 이룬 것이다. 5000만 한국인을 행복하게 만든 민족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그는 수도를 공주 부근으로 옮겨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완충하면서 국토이용의 효율성, 특히 物流(물류)의 편의를 극대화하는 국토개조를 생각하다가 ‘가로림 프로젝트’(공식명칭 ‘중부종합공업기지 기본구상’)라는 큰 그림을 그리게 된다.
  1977년 2월 10일 朴 대통령은 서울 시청을 연두 순시해 市政(시정)을 보고받고 나서 몇 가지 지시한 뒤 약간 뜸을 들인 후 조용한 말투로 폭탄발언을 했다.
  “서울의 근본문제는 인구가 느는 것을 어떻게 억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잡음이 생길까 봐 이야기를 안 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통일이 될 때까지 임시행정수도를 만들어 옮겨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구체화된 것도 아니고, 위치가 결정된 것도 아닙니다.
  서울에서 한 시간, 길어도 한 시간 반 정도면 오고 가고 할 수 있는 그러한 범위 내에서 인구 몇십만 명 되는 새로운 수도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인구 700만 명이 넘는 수도 서울이 휴전선과 너무 가깝게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통일이 될 때까지 임시행정수도로서 독일의 본 같은 그런 수도를 만드는 것이 좋다는 구상을 한 것입니다. 수도 서울을 死守(사수)한다는 개념은 추호도 변함이 없습니다. 전쟁이 나면 대통령과 중요한 기관은 즉시 서울로 다시 올라와서 전쟁을 지도한다는 것만 국민들이 확실히 알면 심리적 동요는 없으리라고 믿습니다.”
  朴 대통령이 행정수도 건설을 이야기한 것은 그보다 2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1975년 8월 2일 진해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朴 대통령은 기자들과 이야기하면서 보도금지를 전제로 말했다.
  “수도권 인구분산 정책의 획기적인 방안은 수도를 옮기는 것밖에 없다. 정치·경제·문화는 서울에 두고 행정만 옮기는 것이다.”
  1975년 12월 朴 대통령은 李經植(이경식) 경제 제1수석에게 ‘수도권 인구억제 정책’ 수립을 지시했다. 이 업무는 1976년 초 申炯植(신형식) 무임소 장관에게 넘어갔다. 申장관은 朴鳳煥(박봉환) 재무부 이재국장을 기획실장으로 영입해 이 업무를 맡겼다. 朴 실장은 그해 3월 金秉麟(김병린)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을 불러 의견을 들었다. 金 과장은 李經植 수석팀 밑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임시행정수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소신 있는 경제엘리트 관료로 정평이 나 있던 朴실장은 그해 5월에 끝낸 ‘수도권 인구 재배치 기본구상’에 임시행정수도案을 집어넣었다.
  한편 朴 대통령은 1976년 6월, 그 전해에 총리직을 그만두고 쉬고 있던 金鍾泌 씨를 불러 임시행정수도 계획을 세워 보도록 지시했다. 朴 대통령은 ‘서울에서 두 시간 이내로, 가급적 금강변이며, 인구가 50만 명 정도인 행정수도 건설 계획을 짜보라’고 지침을 주었다. 金 씨는 6월 2일 서울大의 최상철·주종원 교수를 청구동 자택으로 초대했다. 金 前 총리는 지도 한 장을 주면서 임시행정수도의 입지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崔 교수팀은 서울 타워호텔에서 3주간 비밀작업을 해 미니 차트를 만들어 金 前 총리를 통해서 6월 22일 朴 대통령에게 올렸다. 차트의 명칭은 ‘N.C(New Capital)’였다.
  
  
  1976년 7월 22일 申炯植 무임소 장관은 朴 실장과 함께 朴 대통령과 총리(崔圭夏) 이하 관계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수도권 인구 재배치 구상’을 보고했다. 이 보고에 임시행정수도 건설안이 들어 있었다. 대전·청주·조치원 삼각지대 인근에 인구 50만 명 규모의 행정수도를 만들되 통일 후에는 서울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朴 대통령은 이 보고를 듣고 대단히 만족했다.
  
  “이렇게 많은 대학과 대학생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는 것 아닌가. 실은 나도 2, 3년 전부터 저 문제를 생각했어요. 6·25가 끝난 뒤 저 정도의 자리에 새로운 수도를 만들어야 했어. 서울로 되돌아와 이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저 방법 외에 무슨 방법이 있어?”
  
  그 한 달 뒤인 8월 18일 朴 대통령은 金載圭 건설부 장관과 김의원 국토계획국장을 불러 관련자료를 넘겨주고 입지기준을 제시하면서 행정수도건설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朴 대통령이 직접 메모해 불러 준 임시행정수도 입지기준은 이러했다.
  
  <휴전선을 고려할 것, 서울에서 두 시간 거리일 것, 경부선 주변 도로망이 좋은 곳일 것, 水源(수원) 확보가 용이할 것, 30분 내지 1시간 내에 기존 중심도시로 접근이 용이할 것, 優良(우량) 농지가 적을 것, 排水(배수)가 좋고 낮은 구릉 야산지대일 것, 20~30분 거리에 비행장 건설이 가능할 것, 50만 명 정도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을 것, 문화재 등 기존 특수시설이 철거되지 아니할 것>
  
  건설부는 보고서를 올리면서 朴 대통령에게 “범국가적인 사업이니만큼 새로운 임시기구를 만들어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이상이 朴 대통령의 연두 순시 공개 발언이 있기 전 진행상황이었다. 朴 대통령의 발언으로 행정수도 건설 계획이 공개된 직후인 1977년 3월 7일 朴鳳煥 실장은 朴 대통령에게 ‘수도권 인구 재배치 기본계획안’을 올려 결재를 받음으로써 임시행정수도 건설은 국가기본계획으로 확정되었다. 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행정수도 건설에 관한 지침을 구체적으로 내렸다.
  
  <첫째, 행정수도 건설은 아무리 빨라도 앞으로 10년, 혹은 그 이상이 걸릴 것이다. 국방력 증강 등 다른 중요사업 수행에 지장이 없도록 무리 없이 추진해 나가겠다.
  
  둘째, 백지계획부터 수립한다. 작성기간은 2년 정도로 하되 청와대가 직접 담당한다.
  
  셋째, 수도의 이전은 예산 범위 안에서 하나씩 하나씩 수행한다.
  
  넷째, 백지계획 업무는 중화학공업기획단장 책임下에 추진토록 하며 오늘 수도권인구계획을 성안 보고한 朴 실장이 기획단으로 옮겨 吳 수석을 보좌하도록 한다>
  
  방위산업 건설, 중화학공업 건설을 책임진 吳源哲 경제제2수석은 또 일복이 터진 것이었다. 그는 朴鳳煥 씨를 중화학공업기획단 부단장으로 임명하고 그 밑에 10명의 실무기획팀을 구성했다.
  
  백지계획이란 立地(입지)를 생각하지 않고 이상적인 도시계획을 한 뒤에 행정도시가 들어설 곳이 확정되면 거기에 맞게 수정해 확정계획을 세우는 방식이다. 기획팀에 참여했던 金秉麟 씨에 따르면 1977년 5월경에 吳源哲 수석이 충남 공주군 長崎面(장기면) 일대를 想定(상정)한 백지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장기면의 남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북쪽에서 남동쪽으로 이 지역을 가르는 대교천이 금강으로 들어간다. 북쪽엔 국사봉, 남쪽엔 장군산이 있다. 서울의 북한산·남산·한강축과 비슷한 지형이다.
  
  吳 수석은 장기면의 동서 12km 구간을 행정도시 축으로 설정했는데, 이곳은 서울 청량리-신촌의 12km 축과 비슷했다. 언덕이 많고 농지는 적으며 低지대가 아니라서 適地(적지)란 것이었다. 金 씨는 “이 지역의 남북 간격이 좁고 구릉지가 완만하지 않아 공사비가 많이 들며, 북쪽이 낮고 남쪽이 높아 문제가 있다”고 반대했으나 吳수석은 “많은 곳을 조사했으나 그만한 지역이 없다”고 했다. 盧武鉉 정부가 확정한 행정복합도시 입지는 吳源哲 팀이 想定(상정)했던 장기면과 일부 겹치되 동쪽으로 약 5km 밀려난 곳이다.
  
  吳 씨는 “풍수지리적으로도 우리가 정했던 곳이 낫다. 이번에 정한 곳은 低지대이고 지하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어 걱정이다”고 했다. 吳 씨는 “朴 대통령이 임시행정수도 건설이라고 했지만 청와대도 옮기는 사실상의 遷都(천도)였다”고 했다. 청와대가 들어갈 자리에는 경회루와 똑같은 연못도 마련했다고 한다.
  
  ―전쟁이 났을 때 먼 곳에서 지휘를 할 수 있습니까.
  
  “전쟁 지휘소는 일선에서 떨어진 곳에 있어야 합니다. 서울이나 사령부가 일선 가까이에 있으면 敵을 유혹합니다. 서울을 기습해 포위한 다음 停戰(정전)하자고 제안하면 큰일 아닙니까. 땅굴도 서울이 가까우니까 뚫는 것이고. 수도가 대전이라면 뚫겠습니까.”
  
  吳 수석에 따르면, 朴 대통령은 백지계획이 거의 마무리될 때쯤인 1996년에 올림픽을 유치하기로 하고, 경기장을 계획도면에 집어넣도록 지시했었다고 한다. 吳源哲 씨는 통일 이후에도 新행정수도가 통일한국의 수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획을 짰다고 말했다.
  
  “북한이 적화통일하면 평양이 수도가 되는 것이고, 자유통일을 하면 그대로 가는 거지요. 이유는 간단해요. 북한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게 그쪽은 동해안도 서해안도 좋은 항구 자리가 없어요. 동해안은 수심이 너무 갑자기 깊어져서, 서해안은 얕아서 그렇죠. 북한은 통일이 되어도 좋은 항구가 있는 남한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쪽은 물건을 만들고 남한을 통해서 수출해야 할 운명이지요.
  
  한국은 해양국가라는 원칙이 지리적으로 이미 나와 있습니다. 한반도는 어디까지나 남한이 중심입니다. 장기면이 내륙이라도 가로림만이 서울에 대한 인천 역할을 하는 거지요.”
  
  吳 씨는 新행정수도 건설은 국민투표로 결정할 문제라 생각하고 그 준비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朴 대통령이 결정을 미루는 것이었다. 장기면을 朴 대통령이 시찰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입지를 공식적으로 결정하려 했는데 朴 대통령은 움직이지 않았다. 朴 대통령은 헬기로 국토개발 현장을 시찰하고 와선 “꼭 내가 그린 그림을 보는 것 같다”는 말을 할 만큼 건설과 토목에 취미가 있었다.
  
  吳 수석은 朴 대통령이 유신체제와 1970년대의 宿願(숙원)이던 중화학공업 건설을 궤도에 올려놓은 다음엔 국토개조와 그 핵심인 遷都에 착수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吳 씨는 ‘대통령을 했다는 것과 遷都를 했다는 것은 역사에 어느 쪽이 더 높게 평가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그래서 朴 대통령이 결정을 못 내리고 있다가 10·26 사건을 맞았다’고 보고 있다.
  
  하나 흥미로운 것은 吳源哲 前 수석을 비롯해 행정수도 백지계획에 참여했던 사람들일수록 盧武鉉 정부의 遷都 계획과 그 뒤의 이른바 수도분할式 행정복합도시 건설에 부정적이란 점이다. 吳 씨는 이렇게 말했다.
  
  “행정기능을 분할해 일부만 옮긴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연방국가인 미국이 만약 행정부처를 각 州(주)에 나눠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행정기능 분할은 효율성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킵니다.
  
  행정이란 것은 지휘소가 분명해야 카리스마가 생기고 명령에 따라 딱딱 움직입니다. 나눠 놓고 싸움만 한다면 일이 됩니까.”
  
  임시행정수도 실무팀에 근무했던 유원규(現 우정건설 부회장) 씨는 이렇게 썼다.
  
  <혹자는 행정수도는 충청권으로 옮기고 경제중심지로 계속 키워 나간다고 주장하지만, 미국과 같은 나라는 연방형 국가 운영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州정부가 자치권을 명실공히 행사하고 있어 政經(정경)분리가 잘 기능하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연방제도 아니고 地自體(지자체)의 分權(분권)도 여의치 못하기 때문에 政經일치로 움직이고 있어 행정수도가 건설되면 경제도 옮겨 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도 서울은 최악의 상태로 되어 버릴 것이고, 신행정수도에 정부기능과 민간기능이 이전하면서 政經일치로 체계를 갖추는 상당기간은 혼돈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으니 이 기간 우리나라는 국제경쟁대열에서 뒤처지리라 예상된다>(《임시행정수도 백지계획은 살아 있다》 해토 출판)
  
  
  
  
  
  
  
  朴正熙 대통령의 경제개발 정책은 독점과 경쟁을 적절하게 배합했기 때문에 성공했다. 모든 성공조직과 인간은 상반되는 요소와 성격을 균형 있게 통합·활용·조정해 시너지 효과를 올리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朴 대통령의 인간됨 자체가 수줍음과 강인함, 엄정과 관용, 理(이)와 氣(기)의 양면성을 균형 있게 통합한 모습이었다. 그는 전략과 정책에서도 그러했다.
  
  1970년대 朴 대통령의 중화학공업 건설과 방위산업 건설을 실무적으로 보좌하면서 이 사업들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던 吳源哲 경제제2수석비서관은 朴正熙식 ‘독점과 경쟁의 배합 전략’을 이렇게 정리했다.
  
  <1960∼1970년대에는 수요가 부족해서, 국제규모의 공장을 건설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국제규모에 미달하는 공장이라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국제경쟁력이 없는 공장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생산 제품은 국제 가격보다 비쌀 수밖에 없고, 따라서 수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럴 때는 하루 속히 국제 규모의 공장으로 키워 나가는 것이 우선적 과제였다. 즉 독점은 국제경쟁력이 생기고 난 후의 문제라는 뜻이다.
  
  이 독점 공장이 일단 국제규모화가 된 후에는 즉시 또 하나의 회사를 설립해서, 경쟁체제로 가야 한다는 것이 朴 대통령의 방침이었다. 그래야만 善意의 경쟁이 일어나서, 품질향상과 가격引下가 이뤄지고, 국제경쟁력 강화가 계속된다는 이론이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석유화학과 종합제철’이었다>
  
  1973년 1월 12일 朴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 선언을 할 때 ‘제2의 석유화학과 제2의 종합제철’을 건설한다고 했다. 朴 대통령은 중화학공업 건설에서 석유화학과 종합제철을 2대 기본공장으로 설정했다. 여기서 생산된 제품이 한국 공업구조 전체의 기본 소재로 제공되기 때문이었다.
  
  제2석유화학 단지는 麗川(여천)에 건설되어 민간업체 간 경쟁체제로 들어갔다. 종합제철만큼은 포항종합제철 하나만 존속되어, 독점체제로 남게 되었다. 포항 제철소가 확장을 계속하다 보니 입지여건상, 포항에서는 증설이 어렵게 되었다. 종합제철을 건설할 만한 다른 입지를 선정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석탄과 철광석을 호주나 캐나다에서 수입하려면 20만 톤급의 화물선을 이용해야 수송비가 낮아져서 생산원가가 내려간다. 20만 톤급 화물선이 출입할 수 있는 항구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連關團地(연관단지)까지를 생각하면 1,000만 평의 공장용지가 필요하다.
  
  
  제2종합제철 입지선정 작업을 하고 있을 때, 吳源哲 수석은 국토개편 계획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1976년부터 그는 ‘행정수도건설 계획과 이에 따른 국토개편 계획’을 수립 중이었다. 이때 전국 인구의 再배치 문제가 큰 과제로 등장했다. 농촌으로부터는 계속 인구가 빠져 나오는데, 2000년대 초까지 1,500만 명이 될 것이란 계산이 나왔다.
  
  이 중 기존 공업 基地(기지), 즉 포항·울산·창원·巨濟·구미·여천·溫山의 7대 基地에서 한 基地당 50만 명의 인구를 흡수한다고 계산하더라도 흡수 가능 인구는 35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머지 약 1,000만 명에게는 새로운 공업지구를 건설해서 일자리를 마련해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농촌에서 빠져나오는 인구는 서울 등 대도시로 모여들 것이다.
  
  吳源哲 수석은 국토개편 작업을 하면서 획기적 개념의 공업지구를 구상하게 된다. 그 전에 吳 수석이 산파 역할을 한 것은 한국 기계공업의 메카로 불리는 창원공업기지였다. 吳 수석은 창원공업기지만 한 공업기지를 10개 이상, 한 지구內에 건설하는 거대한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이 지구엔 초기 400만 명, 최종적으론 800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살아야 할 것이고 그러자면 약 3억 평이라는 토지가 필요하게 된다. 물론 20만 톤급 대형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항구를 끼고 있어야 한다.
  
  1978년 어느 날 吳 수석은 그런 조건의 땅이 있으리라고는 크게 기대도 하지 않은 채, 행운만 바라며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大항만을 건설할 자리를 알아보려고 海圖(해도)를 구해서 전국의 해안지대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환성이 터져 나왔다. 이상적인 장소를 발견한 것이다. 黃海(황해·서해)에는 큰 항구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는데, 이렇게 이상적인 장소가 있다니, 이런 것을 天運(천운)이라고 하나 보다. 20만 톤급 배 여러 척이 정박하는 데 문제가 없고, 배후에는 넓은 野山지대가 있었다.
  
  나는 全엔지니어링의 鄭鎭行(정진행) 씨로 하여금 곧 현지답사를 하라고 지시했다. 鄭 씨는 창원공업기지, 구미공업기지의 토지계획안을 수립했고, 그땐 행정수도 계획안을 작성 중이었다>(吳源哲 씨의 최근 메모)
  
  현지답사 후 확신을 갖게 된 吳 수석은 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각하! 오늘은 참으로 좋은 소식을 보고 올리겠습니다. 서해안에서 20만 톤급 배를 정박시킬 수 있는 항만 자리를 발견했습니다”
  
  朴 대통령은 금세 그 중요성을 알아차리고 “어디야?”라고 되물었다.
  
  “可露林灣(가로림만)입니다. 가로림만은 그 넓이가 바다와 같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 灣 안으로 막대한 양의 潮水(조수)가 매일 드나들다 보니, 입구가 파여 水深(수심)이 20m가 넘습니다. 20m의 수심이라면, 20만 톤급 화물선이 출입 가능합니다. 방파제도 필요 없습니다. 부두 岸壁(안벽)만 건설하면 되는데, 안벽을 만들 수 있는 길이도 9,000m나 됩니다. 실로 보기 드문 이상적인 항만 자리입니다. 그 외에 10만 톤급 선박이 정박 가능한 항만을 건설할 수 있는 장소도 그 주위에 있는데, 이곳의 안벽 길이가 2,000m나 됩니다. 이것만 해도 대단히 큰 항만이 됩니다.”
  
  吳 수석은 도면들을 펼쳤다. 도면에는 5개의 항만 자리가 표시돼 있었다. 朴 대통령은 이 도면들을 한참 보고 있었다.
  
  “각하! 이만하면 동양 최대의 항구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황해에서 가장 큰 항구가 上海(상해)인데 그 수심은 10m에도 못 미칩니다. 대대적인 준설 공사를 하더라도 5만 톤급 화물선 정도가 겨우 출입 가능합니다. 그 외에 황해에 있는 靑島나 天津이나 大連, 북한의 남포항 등은 2만∼3만 톤급 항만에 불과합니다.
  
  더욱이 가로림만 주변에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야산지대가 많습니다. 3억 평 정도는 됩니다. 이곳을 정리하면 공장대지 또는 주택용지로 사용할 수 있는데, 400만~80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가 됩니다.”
  
  설명의 내용이 중대해지자, 朴 대통령은 얼굴을 들고 그를 직시했다. 吳 수석은 보고를 계속했다.
  
  “각하, 싱가포르도 이만한 항구조건은 되지 못합니다. 싱가포르의 국토 면적은 685.4km2로서, 2억 평 정도입니다. 이 안에서 300만∼400만 명 정도의 인구가 경제 번영을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가로림만을 개발한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싱가포르의 1.5~2배가 되는 공업지대를 국토 안에 새로 건설한다는 결론이 됩니다. 환언하면 싱가포르의 두 배가 되는 항만과 공업지구가 우리나라에 예속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국토종합개발 계획상의 효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산업지구는 浦項·蔚山·釜山·창원·여수灣 등 동남해안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이들 산업 벨트에서 생산되는 鐵鋼材(철강재), 석유화학제품 등의 소재나 원료 등은 긴 거리를 수송해서 서울이나 수도권 및 기타 전국에 산재하는 공장에서 가공한 후 또다시 부산港 등으로 수송해서 수출하고 있습니다.
  
  특히 철강재는 重量物(중량물)이라서 수송비가 많이 듭니다. 이에 반해 앞으로 건설될 중부공업기지는 수도권이라는 대규모 消費地(소비지)와 인접해 있으므로, 공업의 효율화를 가일층 촉진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현재 서울이나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가장 큰 규모의 노동력 공급원은 호남권과 중부지방입니다. 중부공업기지는 이들 지방의 遊休(유휴) 노동력을 흡수하는 데도 크게 작용할 것이며, 아울러 호남권과 충청권의 공업발전 및 지역개발에 크게 이바지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중부공업기지를 중심으로 해서 북쪽은 수도권까지, 남쪽은 호남지방까지의 거대한 서부공업지대가 새로 구축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가로림 港灣을 중심으로 해서, 仁川항·아산만·비인만·長項항·群山항·木浦항·麗水항 등을 연결하는 경제적이고 편리한 해상교통망이 짜임새 있게 구성될 것입니다. 장차 우리나라의 공업지구는 서부공업벨트와 동남공업벨트로 양분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로써 호남이나 충청도의 소외감도 완전히 소멸될 것입니다.”
  
  朴 대통령은 이 보고를 다 듣고도, 아무 질문이나 의견을 달지 않았다. “한번 가보도록 하지”라고 딱 한마디 했다.
  
  며칠 후 朴 대통령 일행은 헬기를 탔다. 일행 중에는 현대의 鄭周永 회장도 끼어 있었다. 도착지는 충남 서산군(당시) 가로림만 북쪽 입구 모래둑. 허허벌판에 집 한 채 없고 사람의 발길조차 뜸한 곳인데 바람이 셌다. 가로림만의 물은 푸르다 못해 검정빛이 돌고 있었는데, 물결치는 파도가 요란해서 넓은 바다 그대로였다. 넓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가로림만 입구의 남쪽에 돌산이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朴 대통령은 빙 둘러보고는 “과연 넓긴 넓구먼”이라고 했다. 동쪽 멀리 끝자락에 높게 보이는 산이 있었는데, 산꼭대기에는 공군 레이더 기지의 둥근 안테나가 보였다. 일행은 바람을 피해, 모래 언덕 밑으로 내려갔다. 여기에서는 몇 사람의 일꾼들이 메주 덩어리만 한 돌들을 파내고 있었다. 朴 대통령이 “무엇에 쓰려고 하오?”라고 묻자, 이들은 하도 깡 시골에 사는지라 朴 대통령을 알아보지 못한 듯 일을 계속하면서 “硅石(규석)입니다. 품질이 세계 최상이지요. 몽땅 수출합니다”라고 대답했다.
  
  朴 대통령은 다시 헬기를 타고 가로림만 주위를 한 바퀴 돌고는, 공군 레이더 기지에 착륙했다. 거기서 가로림만을 바라보니, 얕은 야산들이 해변까지 계속 이어 나갔는데, 가로림만의 윤곽은 너무 멀고 커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朴 대통령은 “꼭 조선시대의 烽燧臺(봉수대)에 올라온 것 같구먼”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기지內를 돌아보고 장병들을 위로했다. 朴 대통령은 돌아오는 헬기 안에서 金正濂 비서실장에게 지시했다.
  
  “건설부에 지시해서 우선 산업도로부터 건설토록 하지.”
  
  이것이 이날의 시찰 결과였다.
  
  며칠 지나서 현대의 鄭周永 회장이 吳源哲 수석을 찾아와서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했다.
  
  “내 나이 칠십인데 이제부터 큰일을 또 한번 시작해 봐?”
  
  吳 수석이 “무슨 뜻이오?”라고 하니 鄭 회장은 “종합제철을 내가 해볼까 해”라고 했다. 吳 수석이 “朴 대통령의 내락은 얻은 것이오?” 하니 鄭 회장은 빙그레 웃고 답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검토는 해보지’라는 정도의 뜻은 받은 것 같았다. 당시 현대그룹에서는 각종 대형 토목 공사, 많은 아파트 공사, 플랜트 건설, 선박 건조, 자동차 생산 등으로 철강재 수요가 많았다. 현대그룹은 자금력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현대는 종합제철을 원했고, 그 뜻을 대통령에게 비쳤을지도 모른다. 吳 수석은 그래서 朴 대통령이 가로림만을 시찰할 때 鄭 회장을 동행시켰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보았다. 여하간 鄭 회장은 가로림만에 대해서 그 가치를 직감적으로 파악한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吳 수석이 나중에 들으니 鄭 회장은 지난번 시찰에서 돌아오자마자, “가로림만 입구에 있는 돌산(石山)을 구매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가로림만을 개발하자면 앞으로 많은 암석이 필요하게 될 터인데, 암석을 구하는 길은 그 돌산에서 얻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1978년 12월 吳 수석은 중화학공업기획단을 시켜 ‘중부종합공업기지 기본구상’이란 125페이지짜리 보고서를 만들어 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산업도로는 곧 착수돼서 완공을 보았다. 중부공업기지에 공업용수를 공급하게 될, 삽교천의 담수호도 완공했다. 바로 그날 朴 대통령은 세상을 떠난다. 그 후, 제2종합제철은 현대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포항제철 소속의 제2期 제철소는 중부공업기지에 입주하지 않았다.
  
  포항제철의 제2공장은 ‘중화학공업육성계획’에서 여천 석유화학공업基地의 확장 예정지로 잡아 놓았던 光陽에 건설되었다. 그 대신 加露林灣에는 현대정유와 현대석유화학, 그리고 삼성석유화학이 들어섰다. 종합제철과 석유화학의 입지가 서로 바뀐 것이다.
  
  2004년 9월, 吳源哲 前 수석은 加露林灣으로 가서, 朴 대통령이 시찰했던 바로 그 장소를 다시 찾아가 보았다. 그곳 바닷가, 종합제철소 예정지였던 곳에는 현대와 삼성의 석유화학 공장들이 널찍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작은 항만 하나가 건설되어 있었다. 그리고 항만 입구에는 해안 경비용 탱크 한 대가 加露林灣을 혼자서 지키듯, 포신을 높이 들고 버티고 있었는데, 光化門 앞 해태像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2004년 11월 호주에서 개최된 ‘朴 대통령 서거 25주년을 기념하는 포럼’ 때의 일이다. 회의는 朴 대통령이 벌였던 30∼40년 전의 일에 대해 贊否가 엇갈리는 논쟁을 계속했다. 吳源哲 씨는 “미래에 대한 朴 대통령의 이야기도 나와야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최 측에 부탁을 해서 회의종료 전 30분의 시간을 얻어 즉석 강연을 했다. 제목은 ‘가로림만 프로젝트’였다.
  
  吳 前 수석이 새삼 加露林灣 프로젝트에 대해서 애착을 갖게 된 것은 최근 발생한 새로운 국면 때문이다. 盧 정권이 공주-연기 지방에 행정복합도시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일과 중국 상해항의 개발로 부산항의 경쟁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吳源哲 씨는 가로림만 프로젝트가 이 두 가지 요소를 한꺼번에 해결하고 보완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중화학공업기획단에서 만든 ‘중부종합공업기지 기본구상’ 보고서도 그때 朴 대통령이 추진했던 행정수도 건설과 이 계획을 연결시키고 있다.
  
  <대전 부근에 위치하게 될 2000년대 신행정수도의 형성에 따라 本종합공업기지는 新수도와 강력한 張力(장력)을 유지할 것이다. 본 계획지에서 新수도에 이르는 간선 도로망이 구축되어 도시 간 소통이 원활하게 될 것이며, 본 계획지는 경제적 측면에서 新수도로, 新수도는 문화적 측면에서 계획지로 상호 상승효과를 부여함으로써 중부권은 국토의 중심적 기능을 발휘하며, 이에 따라 본 계획지는 바람직한 국가기간산업의 中核(중핵)기지가 될 것이다>
  
  이 논리를 진행 중인 공주-연기 행정복합도시 건설에 적용한다면 가로림만 기지는 이 도시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공업특구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가로림만에 대규모 공업특구가 들어설 경우 몇 가지 점에서 결정적 優位(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첫째, 이 공업특구에서 생산되는 물건의 상당량은 수도권에 공급되거나 수출될 것인데, 서울과 가깝고 항만이 좋아 물류비가 아주 적게 먹힌다.
  
  둘째, 노동력도 호남권과 충청권에서 확보할 수 있다.
  
  셋째, 깊은 바다에 면하면서 넓은 평야지대를 갖고 있어 400만 명이 수용될 수 있다(지금은 800만 명 가능). 개발지역을 표고 80m 이하, 경사도 30% 이하로 한정해도 공업지 약 5,800만 평, 주거지 약 6,360만 평, 상업 업무용지 약 610만 평, 공원녹지 약 4,030만 평, 기반시설 약 2,100만 평이 나오고, 자연녹지 등으로 약 1억 1,000만 평이 남는다.
  
  吳 前 수석은 “현재 한국에서 남아 있는 마지막 要地(요지)이기 때문에 이를 소중하게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1978년 吳 수석 팀이 만든 보고서에는 이 산업기지에 유치할 업종을 이렇게 설명했다.
  
  ▲자원을 많이 필요로 하는 공업
  ▲해외 원료 의존도가 높은 공업
  ▲원자재 및 제품수송에 항만시설을 요하는 공업
  ▲단위면적당 생산성이 높은 공업
  ▲대규모 공업용수를 필요로 하되 회수율이 높은 공업
  
  이런 기준에 따라 이 산업기지에 유치하기로 한 공장은 세계적인 규모로서 ‘이슬숲’이란 뜻을 가진 加露林灣이 세계에서 가장 큰 중화학 산업기지가 되도록 계획했다. 종합제철소는 연간 2,000만 톤 생산 능력을 가진 부지 500만 평, 철강 관련산업 부지는 360만 평, 기계공업은 국내 총수요의 37%를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하고 부지는 820만 평, 자동차공장은 年産 50만 대로서 부지는 120만 평, 非鐵금속 공장 부지는 240만 평, 석유정제 업종의 부지는 300만 평, 석유화학공업 시설은 에틸렌 기준 年産 200만 톤 규모로 하여 부지가 300만 평, 전기전자 공업은 전국 수요의 15%를 감당할 것으로 계산하여 300만 평, 기타 화학공업은 전국 수요의 10%로 잡고 부지가 210만 평이었다.
  이 보고서는 ‘개발전략’ 항목에서 가로림만 일대를 ‘새로운 지역사회를 창조한다’는 개념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계층, 연령별 주민 대다수가 지역의 산업구조에 유기적인 결합을 갖고 적극적인 형태로서 관여할 수 있는 새로운 지역사회를 건설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 가로림만 기지의 핵심은 항만이다. 이 거대한 기지에서 연간 발생하는 물동량은 5,408만 톤으로 예상되었다. 이를 처리할 항만은 다섯 개 만든다. 가장 큰 것은 안벽의 길이가 9,000m이고, 20만 톤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수심 20m 항만이다.
  
  이 기지가 필요한 電力은 400만~500만kW로 추정되었다. 현재 한국 전체 전력 생산량의 약 10%에 해당한다.
  
  
  
  
  
  
  *김용환, 오원철
  
  朴대통령식 국정운영의 핵심은 큰일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추진력과 일을 야무지게 매듭짓는 능력의 소유자를 찾아서 適所(적소)에 배치한 뒤 전폭적으로 부하들을 밀어주되 일의 진행과정을 정기적으로 점검 확인한 점이다. 朴대통령은 군 지휘관 시절부터 "지시는 5%, 확인이 95%이다"는 말을 할 만큼 중간 점검을 중시했다.
  <대통령은 직, 간접적인 검증을 거친 후에야 행정부에 인재를 등용했다. 정치인이나 군출신자들을 입각시킬 경우에도 일단 공기업, 또는 관련 연구기관, 정치권 등에서 행정경험을 쌓는 과정을 눈여겨보면서 능력과 적성을 평가한 후, 즉 어느 정도 검증 절차를 거친 후 중용하곤 하였다(金龍煥 당시 재무장관 회고록-'임자, 자네가 사령관 아닌가')>
  吳源哲 제2경제수석이 기획한 중화학-방위산업 동시건설안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한 朴대통령은 1973년 5월53일 金龍煥 재무차관을 대통령특별보좌관으로 임명하여 중화학공업 건설의 정책적 뒷받침을 지시했다. 金보좌관은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의 기획단장도 겸임했다. 金龍煥 씨는 김정렴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일하던 그 전해에 '8.3 사채동결 조치'의 비밀 계획을 전담하여 성공시킴으로써 대통령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8.3 조치 발표 6일 전에 金龍煥씨를 불러 "발표와 함께 임자를 재무부 차관으로 발령을 낼테니 사채동결 정책을 반드시 성공시켜 우리 경제를 살리도록 하라"고 말했다. 당시 재무장관 南悳祐씨도 金차관에게 8.3 조치의 집행을 일임하였다. 朴대통령은 국가중대사에 대해서는 그 분야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을 앉혀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朴대통령은 방위산업을 민간주도-정부뒷받침의 시스템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많은 나라에서는 무기생산을 국방예산과 직결된 공기업 형태의 국가주도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방부는 국가주도형 방위산업 건설을, 청와대와 경제부처는 민간주도를 주장했는데, 朴대통령은 민간주도쪽에 손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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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朴대통령은 "방위산업은 중화학공업과 연계되어 있는데, 무기생산만 전담하는 공기업형으로 육성했다가 수요가 포화상태에 이르면 기업의 채산성이 악화될 수 있다. 따라서 민간기업이 무기와 일반상품을 함께 생산하도록 해놓아야 불황에 따른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정부는 이 업체들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중화학공업기획단장이 된 金龍煥씨는 경제기확원 물가국장 徐錫俊씨(나중에 경제부총리, 아웅산 테러로 사망)를 부단장으로 데리고 왔다. 金龍煥 팀은 첫 작품으로서 '중화학공업육성계획'을 내어놓았다.
  이 보고서는 1980년대를 복지사회 고도산업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중화학공업화에 따른 공업구조의 고도화 없이는 불가능하고 지적했다. 대통령은 1973년 8월에 金龍煥 특별보좌관을 경제제1수석으로 승진켰다. 金수석은 화공 엔지니어 출신인 吳源哲 제2경제수석(중화학공업기획단장 겸임)을 도와 중화학공업화의 자금동원과 산업기지 건설을 해냈다. 중화학공업단지의 건설은 산업기지개발공사를 설립하여 하기로 했다. 수자원개발공사 사장으로서 뛰어난 추진력이 검증된 安京模씨가 산업기지개발공사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1974년 4월1일부터 1979년12월14일까지 창원, 여천, 온산, 안정, 구미, 포항, 북평, 아산의 8개 산업기지가 만들어졌다.
  중화학공업건설에는 자금이 많이 들고 투자회수에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국내 저축률이 25% 이상 되어야 추진할 수 있는 대사업이었다. 당시 국내 저축률은 15% 정도였다. 吳수석의 비교법에 따르면 수출이 연간 18억 달러 하던 때 중화학공업 건설에 100억 달러를 넣어야 한다는 것은 지금 기준으로는 7000억 달러를 조달하는 것과 같은 자원 집중이었다. 金龍煥 경제제1수석은 중화학공업 자원확보를 위해 국민투자기금을 만들기로 했다. 1973년12월14일에 국민투자기금법이 제정되었다.
  이 기금의 대부분은 국민투자채권을 금융기관이 매입하는 방법으로 출연했다. 기금설립 초기엔 은행의 경우 예금증가액의 10-39%, 보험회사의 경우 수입보험료의 40~50%, 공공기금의 경우 여유자금의 약90%를 이 기금에 출연했다. 시중은행의 예금까지 국민투자기금에 편입시킴으로써 1978년 무렵부터 중화학공업 중복투자 및 과잉투자의 부담이 금융부문에 전가되자 제5공화국 출범 직후 중화학투자 조정이 이뤄지게 되었다.
  중화학공업 건설의 사령관인 朴대통령은 기술에 밝고 창조적 발상을 많이 하는 吳源哲 제2경제수석을 참모장으로 쓰되 재정에 밝고 꼼꼼한 金龍煥 제1경제수석을 통해서 보완과 견제를 해가면서 그의 마지막 대도박을 밀고나간다. 吳, 金 두 수석 다 패기만만한 40代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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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工高를 특성화·전문화하고 학생들에게 혜택 부여(조성호 기자)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工高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한 ‘인력양성소’였다. 특히 工高에 진학하는 학생들에게는, 학비는 물론 병역과 진로선택에 있어서 혜택도 주어졌다. 형편 상 대학에 진학하기 어려웠던 농어촌·도시 서민층 젊은이들에게 또다른 기회가 생긴 것이다.
  
  
  기사본문 이미지
  출처: <아산 정주영과 한국경제 발전모델> 중에서
  
  
  2011년 ‘아산재단 창립 34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아산 정주영과 한국경제 발전모델(柳錫春·김형아 共著)>이란 논문은 工高의 현황(1979년 기준)과 재학생들에게 부여된 혜택에 대해 자세히 다뤘다(상단 표 참조).
  
  이 논문에 따르면 ‘기계공고’는 고도의 정밀가공능력을 갖춘 기계를 가공할 수 있는 정밀가공사를 양성하는 학교로, 정밀기계, 배관, 금속, 전기, 용접, 공업계측 등의 전공이 설치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학비를 면제해 주었고, 희망자에게는 저렴한 기숙사 시설 및 저금리의 생활비 융자도 제공했다. 당시 일반공고의 학비면제 장학생 비율이 15% 수준에 머물렀던 것에 비해, 기계공고는 50% 이상의 학생들이 학비면제 혜택을 받았다.
  
  ‘시범공고’는 中東진출에 소요되는 기능공 중 기계조립, 판금, 배관, 제관, 전기공사 등을 전공으로 하는 인력의 배출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중동 건설진출을 담당했던 현대건설과 대림산업은 이들 학교들과 産學(산학)협동을 맺어 양성기능사들에게 1인당 20만 원 씩의 운영비와 실습재료비를 제공했다.
  
  ‘특성화 공고’는 전자, 건설, 금속, 제철, 화학, 전기 등 특정 분야의 기능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지정된 학교였다. 이들 학교 역시 기계공고와 거의 동일한 혜택이 주어졌다. 특성화 공고 중 금오공고는 對日(대일) 청구권 자금을 바탕으로 설립된 학교였다. 금오공고는 공업立國(입국)의 선봉이 되는 표본 학교로 지정돼 등록금은 물론 학비 전액 지원, 전원 기숙사 생활 등의 파격적인 지원이 이뤄졌다. 1970년대 이 학교에는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들었으며 2급 기능사 자격시험을 100% 통과하거나, 국제 기능올림픽에 출전해 두각을 드러냈다.
  
  
  
  
  
  1970년대 97개 工高의 연간 졸업생은 5만 명에 달했다. 1973~1979년 사이 배출된 기능공은 80만~1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은 현재 50대 중후반이다. 1970년대 의 중화학공업 건설의 현장에서 뛰었던 이들은, 1997년 외환위기 때 구조조정의 칼바람도 피해갔다. 他人(타인)이 갖추지 못한 고유의 기술을 보유한 덕분이었다.
  이 기능공들의 삶이 그 뒤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분석한 <1970~80년대 양성된 중화학공업 부문 기능공의 계층이동에 관한 생애사적 연구>(柳光浩 著)란 논문이 2013년 12월에 발표되었다.
  
  柳光浩(유광호) 씨는 1973~1986년 풍산금속 안강공장에 入社(입사)했던 기능공 20명의 현재 생활 상태를 조사했다. 먼저 이들 20명의 청소년기 경제사정을 확인했다. 이중 15명(75%)이 ‘객관적 가정형편’ 상 대학진학을 꿈꿀 수 없었다고 한다. 조사 당시 이들의 평균 현금성 임금(연봉)은 6400여 만 원에 달했다. 글로벌 대기업群(군)에 속한 현대자동차의 경우, 연 1억 원에 연봉을 받는 근로자들이 많은 데, 이를 기준으로하면 이들의 연봉은 中上 정도에 해당한다. 중소기업 연봉이 평균 3000만~4000만 원 정도임을 감안하면 풍산 소속 근로자들의 연봉이 상대적으로 높음을 알 수 있다(注: 2012년 기준 국내 제조업 평균 연봉은 3625만 원).
  게다가 이들 20명의 자녀 모두 전문대 이상의 학교에 진학했다. 저자는 “그들 자녀의 100% 대학 졸업률(4년제 대학 재학 및 졸업자가 94.3%, 전문대 졸업자가 5.7%)은 기능공들이 중산층이 되었음을 웅변해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저자는 “농촌 중하층 출신의 청소년을 중화학 공업화에 필요한 숙련노동자로 변신시키지 않았다면 농촌의 잠재적 실업자인 농촌과잉인구로 퇴적되거나, 잘해야 경공업 부문의 半(반)숙련 노동자가 될 가능성이 컸다고 할 수밖에 없겠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大변화는 발전국가가 萬難(만난)을 무릅쓰고 공업화, 그것도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한 결과”라고 진단했다.
  
  
  
  
  객관적·주관적 기준에 모두 ‘중산층’이라고 답
  
  저자는 구체적으로 이들이 어느 정도 수준의 중산층에 도달했는지를 분석했다. 먼저 ▲고등학교 졸업 이상(본인의 교육수준) ▲도시근로자 가구 月평균 경상소득의 90% 이상(소득수준) ▲20평 아파트의 自家 소유거나 30평 규모의 전월세 이상(자산 수준) ▲자동차 소유(자산 수준) ▲2년제 대학 졸업 이상(자녀의 교육수준) 등 총 5가지의 객관적 판별기준을 설정했다. 주관적 지표로는 ▲‘중산층 귀속의식’을 만들어 자신이 중산층에 해당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답하게 했다. 이상 5개의 객관적 기준과 주관적 기준 1개를 합해 4개 이상을 충족하면 ‘핵심적 중산층’, 3개를 충족하면 ‘주변적 중산층’, 2개 이하를 충족하면 ‘비중산층’으로 분류했다.
  
  그 결과, 14명 중 1명을 제외한 13명 모두 ‘핵심적 중산층’(객관적 기준 5개, 주관적 기준 1개 모두 충족)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들 역시 자녀의 대학 진학 문제는 모두 이루었다. ‘자동차 최초의 구입시기’를 확인한 결과, 1명을 제외한 나머지 13명 모두 소유하고 있었다. 대개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에 소형차로 마련했으며, 2000년대에 들어서 중형차로 바꾸어 현재는 모두 중형차를 가지고 있었다. 自家 마련 시기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2명(본가 거주, 사택 거주)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후반까지 마련한 상태였다. (※논문에 수록된 도표는 저자의 요청으로 미게재)
  
  
  기능공들의 삶은 윤택해졌다
  
  흥미로운 점은 주관적 계층 귀속의식(중산층 귀속의식)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생산직 종사자의 경우, 사회적 지위에 대한 만족도가 낮은 게 일반적이라고 한다. 이런 결과는 풍산의 기능직 종사자들에겐 예외였다. 이들의 중산층 귀속의식은 中中이 가장 많았으며 中下 이하로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높지 않은 학력수준에도 상대적으로 高연봉을 받는 등 삶의 질이 객관적·주관적 지표 상 매우 윤택해졌음을 알 수 있다.
  
  중화학공업 시대를 평가절하하는 現 시대상황에서 이 논문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이 논문은 정부와 기업이 기능공들을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는지 그에 대한 명확한 檢證(검증)과 결론을 제시해준다. 저자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내렸다.
  
  <한국 중화학공업화의 세 주체인 국가-기능공-기업은 상호 胚胎(배태)되고 완성적 동기로 ‘일반화된 호혜성’을 구현했다고 볼 수 있다. 국가는 기능공에게 숙련형성과 병역 특전을 주었고, 기능공은 기업에게 ‘농촌 중간층’[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의 결과 탄생했고 박정희 대통령이 농어촌고리채정리사업과 새마을운동 등으로 부유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던, 광범위한 ‘소토지 소유 자작농’(自作小農이라고도 칭할 수 있음)층을 계층론적으로 일컬어 본 개념임: 소유와 경영이 영세해서 대체로 가난하더라도 자기 소유의 재산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자립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점으로 인해 ‘중간층’ 또는 ‘중간계급’적인 성격을 가진다]의 윤리인 인내와 협동, 규율된 노동과 노사협조를 주었으며, 기업은 국가에게 기업의 전문화와 온정주의 경영으로 국가의 규율에 호응하였다. 국가는 기업에 정책적 지원과 숙련된 병역 특례병을 제공했으며, 기업은 대신에 기능공에게 고용안정과 임금 상승으로 보답하였다. 그 결과가 기능공의 중산층화였고, 기업의 세계적 전문기업으로의 성장이었으며, 중화학 공업화 달성으로 인한 발전국가의 성공이었다.> (同 논문 152페이지)
  
  당시 국가와 기업, 기능공들은 상호보완적으로 움직였다. 특별히 정부와 기업이 이익을 독점하는 구조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기능공들의 삶을 단순히 계급투쟁적 시각에서 보는 건 타당치 못하다. 풍산금속 안강공장 소속 근로자들의 경우, 블루칼라 계층임에도 소득수준이 화이트칼라에 육박했다. 일각의 주장대로 착취·非착취 구조가 만연했다면, 이들의 계층이동(低소득층에서 高소득층으로의 이동)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柳光浩 씨는 10일 <조갑제닷컴>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풍산금속 안강공장 기능공들의 중산층화는 결국 ‘노동자 계급의 부르주아化’를 입증한 셈”이라고 했다. 그는 블루칼라 계층을 단순히 프롤레타리아적 존재로 규정할 수 없다고 했다. 블루칼라 계층을 섣불리 마르크스주의로 계량하면 그들의 실체적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풍산금속 기능공들 다수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던 개인적 존재였으며, 국가발전에 기여한 훌륭한 국민 구성원이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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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경제, 재벌 힘으로 대만 압도, '아시아의 독일'이고 不動의 금메달감."
  
  루치 샤르마, "삼성, 현대, LG의 글로벌 브랜드 전략이 주효. 대만은 일본의 하청기업에 안주, 한국은 일본을 이기려 하였다."
  
  趙甲濟
  
  
  
  <한국의 성공사례는 가장 강한 기업 모델(the strongest corporate model)은 ‘가족이 소유하면서도 주식은 공개되어 있고, 전문가들이 관리하는 회사’임을 보여준다. 공개된 기업은 경리를 투명하게 할 수밖에 없다.>
  
  루치 샤르마(Ruchir Sharma)씨는 모건 스탠리의 Emerging Markets and Global Macro 부서 책임자이다. 그가 쓴 ‘Breakout Nations'(Norton, 2012)는 한국, 대만, 중국, 인도, 브라질, 멕시코 등, 선진 경제권에 도전하는 나라들의 장단점을 분석한 책이다. 흥미 있는 제목, ‘The Gold Medalist'가 있어 그 부분부터 읽었다. 금메달감의 나라가 어디인가 궁금해서였다. 샤르마 씨는 한국을 도전 국가群(군)의 1등으로 꼽았다. 그는 한국의 라이벌이 대만이었는데 지난 10여년 사이에 한국이 선두에 나섰다면서 極讚(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조업 重視가 계속되는 점에서 ’아시아의 독일‘이란 표현도 썼다.
  
   1. 대만과 한국은 지난 50년간 연평균 5% 이상의 경제성장을 지속한 세계의 唯二(유이)한 나라이다.
   2. 한국 경제는 1997년과 2008년의 세계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창조적인 파괴를 통하여 체질을 개선, 더욱 강해졌다. 守勢的(수세적)으로 위기를 넘기려 하였던 일본과 대조된다.
   3. 한국 경제기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제조업 重視(중시) 노선이 경제구조의 선진화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5년 전과 비교하면 제조업 비중이 26%에서 31%로 늘었다. 제조업 비중이 25%를 넘기면 서비스 重視로 바뀌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은 반대이다. 한국의 제조업은 또 중화학 공업을 중심으로 다각화되어 있다. 한국을 ‘아시아의 독일’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유이다.
  
   4. 대만은 주문생산 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하였지만 한국의 대기업은 무모하게 보일 정도의 모험을 통하여 ‘글로벌 브랜드’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삼성, 현대, LG는 한국 GDP(국내총생산)의 16%를 차지한다. 이에 힘입어 수출이 汎지구적으로 확대되었다. 2003년에 한국 수출액의 3분의 2는 先進경제권에 판 것인데, 2011년엔 3분의 2가 중국 등 개발도상국으로 나갔다. 한국의 수출액은 GDP의 53%이고, 무역액은 GDP와 거의 맞먹어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인 경제구조이다.
   5. 이런 성공의 중심엔 재벌 기업이 있다. 한국의 재벌 기업은 장기적, 모험적 투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데 이는 오너가 결정권을 가진 덕분이다. 현대 자동차가 세계 제5위의 판매량을 기록한 데는 鄭周永 회장의 미국 시장 진출 결단(1986년), 鄭夢九 회장이 결정한 新車 판매에 대한 10년 보증 및 알라바마 현지 공장 건설에 힘입은 바 크다. 이런 모험은 재벌 출신 경영자이니까 가능하였다.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가 退潮(퇴조)하는 마당에 어떻게 미국에서 자동차 공장을 짓느냐는 비판도 있었지만 지금 현대의 알라바마 공장이 미국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다.
  
   6. 한국의 성공사례는 가장 강한 기업 모델(the strongest corporate model)은 ‘가족이 소유하면서도 주식은 공개되어 있고, 전문가들이 관리하는 회사’임을 보여준다. 공개된 기업은 경리를 투명하게 할 수밖에 없다. 매킨리의 조사에 의하면 가족이 경영하는 회사는 2008년의 금융위기를, 非가족 회사보다 더 성공적으로 극복하였다. 가족 회사는 이 기간에 빚을 줄였고 기술 개발 투자는 늘렸다.
   7. 대만은 한국보다 쉬운 길을 가다가 뒤처졌다. 가장 큰 敗因(패인)은 삼성, 현대, LG와 같은 독자적인 글로벌 브랜드를 만들지 못한 점이다. 대만은 일본의 하청업체로 안주하려 하였지만 한국의 대기업은 일본을 이기려 하였다. 대만 기업은 중국, 인도 등에 주로 투자하여 매달 20억 달러씩 해외로 빠져나갔다. 대기업이 기술개발에 집중한 한국은 특허 出願(출원) 건수에서 세계 5위 안에 드는데, 대만은 20등 안에도 들지 못한다. 대만은 부품을 자체 개발하기보다는 일본으로부터 사들이는 방식을 選好(선호)하다가 2011년 쓰나미 사태로 큰 타격을 받았으나 한국은 끄떡없었다.
  
   8. 세계의 금융인들은 서울의 KOSPI를 세계 경제 동향의 중요 변수로 여기는데, 대만 주식시장엔 관심이 적다. KOSPI에 등록된 회사들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이는 한국 제조업의 다각화를 반영한다.
   9. 한국 기업은 해외의 다른 회사를 매입하기보다는 자신들의 회사에 투자하거나 공장을 새로 짓는 쪽을 選好한다. 2010년 한국 기업은 해외에서 1400억 달러를 투자하였다.
   10. 한국 제조업은 세계에서 로봇을 가장 많이 쓰는 축에 들고 省力化(성력화)로 대만보다 생산성이 높다.
  
   11. 한국은 교육수준이 세계 최고이고 중산층이 강하여 富의 분배 문제에 민감하다. 한국의 富者들은 조심하는 사람들이다. 우선 10억 달러 이상의 순자산을 가진 부자가 적
   다. 러시아는 100명인데 한국은 16명이다. 대만은 25명, 터키는 38명이다. 한국의 10억 불 이상 부자 16명이 소유한 富의 총액은 국내총생산의 4%에 불과하다. 러시아는 29.2%, 인도는 17%, 말레이시아는 20%, 대만은 14.6%인데 한국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같은 수준으로 가장 낮다. 부자들이 정치적 연줄을 이용, 치부하고 호화판 생활을 하는 나라에선 정치 불안이 생기는데 한국의 부자들은 사생활에 신경을 쓴다.
   12. 한국 재벌 기업의 2, 3세들은 대체로 좋은 자질을 가졌다. 워렌 버핏은 가족이 운영하는 회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이 서로 싸우지만 않는다면 좋다.”
   13. 대만은 중국을 흡수 통일할 수 없지만 한국은 북한을 흡수, 지하자원과 훈련된 노동력을 얻어 한 번 더 도약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不動(부동)의 금메달감’이다.
  
   샤르마 씨의 분석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한국 재벌기업에 대한 好評(호평)이다. 물론 조건이 있다. 재벌 총수가 소유권을 장악, 장기적 전략의 투자와 의사결정을 하고, 기업을 공개, 투명한 經理를 하며, 전문가들이 회사를 운영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 같은 회사가 그렇게 하고 있다. 확고한 장기 전략, 투명성, 전문적 관리가 결합되면 最强의 기업이 된다. 단기 목표 달성에 치중하는 월급장이 사장보다는 재벌 오너가 그런 기업을 만드는 데 유리하다는 것이다. 한국엔 재벌세습을 권력세습과 동일시하여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세습 자체가 합법적이라면 善惡 是非의 대상이 아니다. 합법성과 투명성이 확보된다면 營利(영리)가 평가의 기준이다. 기업은 돈을 많이 벌어 세금을 많이 내고, 일자리를 많이 만들면 되는 것이다. 누가 주인이냐의 與否는 부차적이다. 꿩 잡는 게 매이다.
  
   한국이 제조업 전반에 걸친 세계적 경쟁체제를 구축한 것은 1973~79년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건설 덕분이다. 이 시기는 유신체제와 겹친다. 朴 대통령은 낭비적 정치 투쟁을 '한국적 민주주의'로 극복하여 얻은 國力을 중공업 건설에 집중 투자하였다. 이 시기는 두 차례의 석유파동이 몰려와 세계적 경제위기가 휩쓸던 때였다. 위기를 오히려 好機로 이용한 것이 박정희의 선진국 進入 전략이었다. '아시아의 아이리쉬'로 통하던 한국인이 '아시아의 독일인'으로 불리게 된 것도 거대한 중화학공업의 기반이 국가의 운명과 국민성까지 바꿔놓은 덕분이다. 이런 대전환의 두 주인공은 강력한 지도자와 창의적인 기업인이었다.
  
   생전에 李秉喆 회장을 가까이서 모셨던 한 전직 언론인은, "늘 회사 일만 생각하는 분이었다. 한번도 편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늘 걱정하고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부자가 행복하다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李健熙 회장 역시 아무리 삼성전자가 기록적인 수익을 올려도 自祝 분위기를 허용하지 않고 배전의 노력을 주문하였다. 기업은 시장경제의 무한경쟁 속에서 생존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그런 숙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기업인들의 밤낮 없는 수고 덕분에 많은 보통사람들은 행복을 누린다. 이런 기업인들이 민주투사들처럼 우대 받게 될 때 한국의 자본주의는 더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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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내의 한 CJ 빌딩 안엔 故(고) 李秉喆(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경영철학을 이렇게 요약하여 새겨놓았다.
  
   人材第一(인재제일)
   事業報國(사업보국)
   合理經營(합리경영)
  
   이 3大 원칙엔 李秉喆의 위대한 안목이 녹아 있다.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가 담긴 말이다.
  
   1. 기업경영의 원리를 사람 중심으로 파악하였다. 자원이 부족한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은 人材육성임을 간파한 것이다. 그는 일자리는 모자라고 사람은 남아돌던 시대에 인재발탁과 교육을 중시한 偉人(위인)이다.
  
   2. 국가건설期의 한국에서 기업의 존재목적이 富國强兵(부국강병)에 이바지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일자리를 많이 만들고 세금을 많이 내는 게 기업인의 애국이다. 그는 안중근, 유관순에 못지 않은 위대한 애국자였다.
  
   3. 경제는 과학이다. 집념, 뚝심, 배짱 같은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요소가 아니라 합리성이 成敗(성패)의 관건이다. 치밀한 계획과 정확한 판단이 뒷받침되지 않는 뚝심은 蠻勇(만용)이다.
  
   지난 해 봄 金東吉 선생과 함께 기차를 타고 대전에서 열리는 강연장으로 가면서 재미 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삼성그룹 창립자 李秉喆 회장을 수십 년간 모셨던 운전기사가 모는 차를 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늙은 기사는 金 박사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李秉喆 회장님은 삼성보다도 나라를 더 생각하신 분입니다."
  
   최근 삼성전자의 人事 부문 간부로 일했던 이를 만났다. 그는 "李秉喆, 李健熙 회장으로 이어진 人材第一이란 정신을 말단 직원들에게까지 스며 들도록 한 것이 삼성의 성공 비결이라고 봅니다. 삼성의 성공은 人事에서 시작되었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삼성 人事의 원칙, 즉 인재 발탁과 교육의 원칙을 능력, 청렴, 공정이라고 설명했다.
   "제가 주로 한 일이 인사에 地緣(지연)이나 學緣(학연)이 介在(개재)되는 사태를 막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사람을 뽑아 適所(적소)에 배치하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도록 한 뒤 평가를 정확하게 하고, 信賞必罰(신상필벌)하되 대우를 잘해주면 열심히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삼성은 경쟁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면서 끊임 없이 개혁해가는 조직"이라고 설명했다. 한 일본인이 삼성전자로 옮겨 경영에 참여하였다가 일본으로 귀국한 뒤 쓴 책을 읽어보니 삼성 성공의 다른 요인은 '시간'이었다. 그는 일본 회사의 일하는 방식을 '꽂이구이', 삼성을 '사시미(회膾) 접시'라고 비유했다. 일본 회사는 일을 할 때 계획, 검토, 결정, 집행의 과정을 꽂이구이 식으로 순서대로 꿰어서 하는데, 삼성전자는 각 과정을 회처럼 접시에 늘어놓고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수직적으로, 삼성은 수평적으로 한다는 이야기이다. 일본식 수직법은 한 단계의 일이 끝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진행할 수 없지만 '사시미 접시' 식에선 각 단계의 작업을 독자적으로, 동시적으로 해놓았다가 나중에 통합하면 된다. 이런 동시다발식 상품 제조는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소비자들이 바라는 것을 정확하게 집어내 만족시키는 데 유리하다.
  
   동시다발식 일처리는 임기응변에 능한 한국인의 소질에도 맞다. 전통적인 제조업 시대보다는 속도가 생명인 IT 시절에 더 적합하다. 일본식이 아나로그라면 한국식은 디지털 방식이다. 삼성은 일본의 장점과 한국의 장점을 겸하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인의 정확성과 한국인의 창의성, 일본인의 고지식함과 한국인의 자유분방함을 결합, 삼성 식으로 만든 셈이다. 위대한 것은 相反(상반)되는 요소를 균형 있게 통합할 때 생긴다.
  
   한국인들을 잘 다루려면 울타리를 넓게, 높게 쳐야 한다는 말이 있다. 재량권이나 자율권을 폭 넓게 보장하되 금지선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면 한국인들은 신바람 나게 일하면서 엄청난 생산성을 보여준다.
  
   이건희 회장을 '이병철의 아들'이라고만 보는 것은 과소평가이다. 이건희 회장은 아버지와는 단위가 다른 회사를 만들어 세계를 상대한 '글로벌 플레이어'였다. 두 사람의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사람중심의 경영, 즉 人材제일이란 핵심은 변함이 없다. 김일성은 '사람중심의 주체사상' 운운하면서 인민들을 짐승 취급했지만 이병철, 이건희 父子는 사람을 키워 돈을 벌고 국가의 富强(부강)에 기여했다. 자본주의의 재해석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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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분 좋은 국제 경제통계-한국은 우등생
  
   외환수지 통계에서 한국은 연간 928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 독일(2864억 달러), 중국(2138억 달러), 사우디 아라비아(1201억 달러)에 이어 세계 4위이다. 일본은 401억 달러, 싱가포르는 588억 달러이다.
  
  
  
   나는 정기구독중인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가 오면 늘 마지막 페이지를 먼저 읽는다. <경제 및 금융 지표>이다. 세계 주요 44개국의 경제통계표이다. 이 표로써 한국 경제 성적을 국제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 최근호에 따르면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은 3.7%로 예상된다. 올해 예상치는, 중국이 7.2%로 1등이고, 인도가 6.6%로 2등이다. 유럽 국가중에서 한국보다 높은 경제성장률은 없다. 아시아에선 대만(3.8%), 태국(4.2%),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각 5.5%)가 한국을 앞선다. 큰 경제 단위에서 한국의 성장률은 높은 편이다. 아베노믹스의 일본은 1.1% 성장률이 예상된다.
  
   한국의 연간 물가 상승률은 1.8%로서 안정적이다. 실업률은 3.8%인데, 그리스는 26%, 스페인은 23.4%, 유로 존 국가 평균은 11.2%이다. 일본은 3.6%이다. 한국은 실업률도 낮은 편이다.
  
   외환수지 통계에서 한국은 연간 928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 독일(2864억 달러), 중국(2138억 달러), 사우디 아라비아(1201억 달러)에 이어 세계 4위이다. 일본은 401억 달러, 싱가포르는 588억 달러이다.
  
   국가예산이 흑자로 편성되는 나라는 44개국 중 다섯 나라뿐인데 한국이 여기에 속한다. 독일, 노르웨이, 스위스, 홍콩, 한국이다.
  
   종합하면 한국은 건실한 경제대국이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그렇다. 정부와 기업, 그리고 근로자들과 소비자들이 다 애쓴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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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전자가 한국 GDP의 약 10% 생산!
  
   "삼성전자를 나라에 비교하면 인구가 1억이 넘는 방글라데시의 국내총생산 규모이다. 이런 위대한 기업 삼성전자를 만든 李秉喆, 李健熙 두 분은 한국사 교과서에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삼성전자가 3분기(7∼9월)에 매출 59조800억 원, 영업이익 10조1600억 원을 올렸다. 사상 최고의 실적이다. 삼성전자는 2분기(4∼6월)에 이어 최고 기록을 바꾸어가면서 분기 매출 60조 원 시대를 앞두고 있다. 스마트폰을 파는 IT모바일(IM) 부문은 36조5700억 원 매출에 6조7000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前 분기보다 7% 늘었다.9월에 새로 내놓은 프리미엄 스마트폰 ‘갤럭시노트3’가 특히 잘 팔린다. 出市(출시) 20여 일 만에 공급량 500만 대를 넘었다. ‘갤럭시탭3’ 등 태블릿PC의 판매량도 前 분기보다 20% 이상 늘었다. 보급형 휴대전화도 판매량이 10%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반도체 부문도 스마트폰 시장 好調(호조)에 힘입어 매출 9조7400억 원, 영업이익 2조600억 원을 기록했다. 前 분기에 비해 매출은 12%, 영업이익은 17% 늘어났다.
  
   이런 식이면 2013년 삼성전자의 매출액은 230~240조 원으로 예상된다. 한국의 올해 GDP는 약 12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삼성전자의 매출액이 한국 GDP의 20%라고 말할 수 있나?
  
   답은 "말할 수 없다"이다. 매출액과 GDP 계산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기업 매출액을 GDP 액수로 환산하는 공식은 없다. 대충 추산하면, 기업 매출액이 GDP의 약 40%라고 한다(삼성전자와 같은 고부가가치 업종은 이 비율이 높다). 즉, 삼성전자의 올해 매출액 추정액 230조원은 GDP로는 약 90~110조이다. 삼성전자가 국내총생산(GDP)의 약 10분의 1(약1000억 달러)을 맡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작년 헝가리는 GDP가 약1256억 달러, 방글라데시는 약1229억 달러였다. 삼성전자를 나라에 비교하면 인구가 1억이 넘는 방글라데시이다. 이런 위대한 기업 삼성전자를 만든 李秉喆(이병철), 李健熙(이건희) 두 분은 한국사 교과서에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 2013-10-29, 1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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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실력
  
   1. 李明博 정부 출범 이후 껑충 뛴 한국의 경제-복지-정치 랭킹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자매 회사 EIU가 매긴 ‘민주주의 지표’ 랭킹에 따르면 2006년 노무현 정부 시절 한국은 167개국 중 31등(일본은 20등)으로서 ‘결함 민주국가’로 분류되었다. 李明博 정부 들어 랭킹이 올라 2010년부터 한국은 ‘완전 민주국가’로 분류된다. 그해 조사에서 한국은 20등으로 일본(22등)을 앞섰다. 2011년 조사에선 한국이 일본 바로 다음인 22등이었다. 2012년 조사에선 20등으로 일본을 추월했다.
  
   *삶의 질과 복지 수준을 보여주는 UNDP(유엔개발기구) 발표 ‘인간개발지수(HDI)’ 랭킹에서도 한국은 이명박 정부 이후 크게 올랐다. 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2007년에 180여 개국 중 26위, 2008년에 25위를 하다가 2010년에 12위, 2011년엔 15위였다. 2013년엔 15위.
  
   *복지, 경제, 민주 부문에서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제 랭킹이 오른 것은 2008년의 금융위기를 잘 극복한 덕분이다. 당시 李 대통령과 姜萬洙(강만수) 장관도 위기를 잘 넘기면 국제적 위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적중하였다.
  
   *2013년 초 현재 외환보유고 1위 국가는 중국으로 3조 5490억 달러, 2등은 일본으로 1조 3510억 달러, 한국은 8등으로서 3192억 달러였다. 이는 미국 CIA의 2012년 통계이다.
  
   *소득 평등도 랭킹에서 한국은 136개국 중 28등이었다. 가장 평등한 나라는 스웨덴이었다.
  
   *예산 흑자율 랭킹에서 한국은 213개 나라들 중 21등. 한국보다 앞선 나라는 거의가 産油國들이다.
  
   *한국은 電力 생산량이 세계 10위이다. 중국이 1등이고 미국, 러시아, 일본, 인도, 캐나다, 독일, 프랑스 브라질, 한국, 영국, 이탈리아 순위이다.
  
   *2013년 경상수지에서 가장 많은 흑자를 본 나라는 독일, 이어서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네덜란드, 한국 순이다. 한국은 약 800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국제투명성기구의 2011년도 부패인식지수 랭킹에 따르면 한국은 청렴도에서 세계 183개국 중 43등이었다. 2009년엔 39등이었다. 가장 깨끗한 나라는 뉴질랜드, 2위는 핀란드. 가장 부패한 나라는 소말리아와 북한으로 공동 꼴찌였다.
  
   *권위있는 국제통계에선 李明博 정부가 경제·복지·민주 발전을 동시에 이룬 것으로 평가되는데 국내에선 종북좌파들이 정부가 독재로 흘렀다고 비난하고 많은 국민들도 이에 동조, 대통령 지지율이 30%를 밑돌았다. 30%라는 수치는 李 대통령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분별력 점수일지 모른다.
  
  
   2. 이웃을 침략하지 않고 선진경제와 완전한 민주주의를 이룬 유일한 ‘5000만+’ 국가는 한국
  
   2012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구매력 기준 국가총생산(GDP) 랭킹에 따르면 한국은 약 1조6000억 달러로서 세계에서 12등이다. 우리보다 순위가 앞선 나라 중 인구가 우리보다 적은 나라는 없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완전한 민주국가로 분류된다. 우리보다 GDP가 많은 나라중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된 나라는 미국, 일본, 독일, 영국뿐이었다. 2012년도 랭킹에서 한국은 민주주의 순위가 20등으로서 미국(21위), 일본(23위), 프랑스(28위), 이탈리아(32위)를 앞섰다. 한국보다 GDP가 많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및 인도와 멕시코와 브라질은 ‘결함 있는 민주국가’로 분류되었다.
  
   요약하면 한국은 인구 5000만 명 이상을 가진 나라 중 선진경제와 완전한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룬 다섯 나라 중 하나이다.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한국이다. 이 다섯 나라 중 한국을 뺀 네 나라는 국가 발전 단계에서 식민지를 경영하였다. 미국도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다.
  
   인구 5000만 명 이상의 나라 중 한국만이 식민지를 수탈하지 않고도, 즉 이웃나라에 폐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식민지가 된 경험을 딛고 선진경제와 완전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룬 유일한 ‘5000만 플러스’ 나라이다.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逆轉劇(역전극)이다. 이런 위업에 가장 큰 공이 있는 사람은 나라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위에 세운 李承晩(이승만), 그리고 國力(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하여 중화학공업을 건설, 국가 발전의 주체역량인 중산층을 만들어낸 朴正熙(박정희)이다. 이 두 사람을 主敵(주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좌편향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금성, 미래엔, 두산동아, 비상교육, 천재교육)이다.
  
   <이코노미스트> 조사에 따르면 167개국 중 가장 억압적인 나라는 167등을 한 북한이었다. 좌편향 교과서는 이런 북한을 두둔하기 위하여 한국 민주주의의 두 건설자 이승만과 박정희를 폄하하였다. 가히 정신병적인 記述(기술)이다. 이런 기술을 허용한 대한민국 교육부는 대한민국에서 추방해야 할 조직이다.
  
   3. 53년 전 한국의 모습
  
   1961년 朴正熙 소장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에 착수하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당시 경제통계 대상이었던 103개국 중 87위로 최하위권이었다.
  
   1위는 2926달러의 미국, 지금은 한국과 비슷해진 이스라엘은 1587달러로 6위였다. 일본은 26위(559달러), 스페인은 29위(456달러), 싱가포르는 31위(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은 40위(326달러), 수리남은 42위(303달러), 말레이시아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세 배가 많아 44위(281달러)였다.
  
   지금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는 짐바브웨도 당시엔 1인당 국민소득이 274달러로 한국의 약 3배나 잘 살았고 46위였다. 필리핀도 과거 한국인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보다 약 3배나 많은 268달러로서 49위였다. 南美의 과테말라도 250달러로 53위, 잠비아(60위, 191달러), 콩고(61위, 187달러), 파라과이(68위, 166달러)도 한국보다 훨씬 잘 살았다.
  
   필자의 가족은 이 무렵 파라과이로 이민을 가기 위한 수속을 밟았는데 다행히 잘 되지 않아 모두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낫세르의 이집트도 152달러로서 70위였다. 박정희 소장 그룹의 일부는 이집트의 낫세르를 따라 배우려 했다. 아프가니스탄도 124달러로 75위, 카메룬은 116달러로 77위였다. 캄보디아도 116달러로 78위, 태국은 110달러로 80위였다. 차드 82위, 수단 83위, 한국 87위! 그 뒤 52년간 한국이 얼마나 빨리 달리고 높게 뛰었는지는 설명이 필요없다. 한국은 유신시대로 불리는 1972~1979년에 중화학공업 건설을 본격화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 랭킹에서 도약한다.
  
   1972년에 한국은 323달러로 75위, 말레이시아는 459달러로 64위였다. 1979년에 가면 한국은 1734달러로 59위로 오른다. 말레이시아는 63위로 1537달러였다. 말레이시아가 못해서가 아니고 한국이 잘하여 뒤로 밀린 것이다.
  
   2012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명목상 2만 2589달러로 세계 34위, 구매력 기준으론 3만 2800달러로 세계 30위이다. 삶의 질 순위로는 180여 개국 중 12등! 1961년에 한국보다 세 배나 잘 살았던 필리핀은 2611달러로 세계 124위, 이집트는 3112달러로 119위이다. 짐바브웨는 756달러로 158위.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지난 51년간 약 10배, 한국은 약 250배가 늘었다. 한국인은 필리핀인보다 25배나 빨리 달렸다.
  
   한국은 美, 中, 日, 獨에 다음에 가는 5大 공업국, 7大 수출국, 8大 무역국, 12위의 경제大國(구매력 기준 GDP)이고, 12위의 삶의 질을 자랑한다. 재래식 군사력은 8위 정도. 울산은 세계 제1의 공업도시이다. 維新期(유신기)의 중화학공업 건설 덕분이다. 1970년대 말에 우리는 선진국으로 가는 막차를 탔던 것이다.
  
  
   4. 숫자로 풀어보는 한국의 실력
  
   (1) 울산은 세계 1위의 공업도시이다. 국민평균 IQ도 1위. 대학진학률도 1위. 정치적 선동으로 속는 데도 1등일 것이다.
   (2) 한국의 교육은 핀란드에 이어 2위로 평가된다. 세계은행은 한국의 民事재판 제도를 세계 2위로 평가했다. 자살률도 2위다.
   (3) 삼성전자는 매출액 기준으로 세계 3위의 제조업체이다.
   (5) 한국은 미국, 중국, 일본, 독일에 이어 세계 5위의 공업국이다.
   (7) 한국은 제7위의 수출국이다. 여성의 평균수명도 7위.
   (8) 한국은 세계 8위의 무역국이다.
   (9) 한국의 군사비 지출은 세계 9위다(兵力은 8위).
   (12) 한국의 GDP(구매력 기준) 규모는 세계 12위. '삶의 질' 순위도 세계 12위.
   (21) 한국은 예산의 건전성이 세계 21위.
   (22) 영국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의 2012년 조사: 한국의 민주주의 성숙도는 세계 167개국 중 20위로서 ‘완전 민주국가’로 분류된다. 북한은 167등으로 꼴찌.
   (30) 1인당 국민소득(구매력 기준)은 세계 30위이다.
  
  
   5. 국민교양
  
   인류역사상 유례가 없는 발전을 70년만에 해치운 한국은 그러나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北의 核미사일 위협, 國內의 從北좌파 세력, 선동언론과 이에 넘어가는 국민들, 한글專用에 의한 한국어의 파괴와 교양의 붕괴, 法治의 약화, 과잉복지에 의한 국가財政(재정)의 부실화 등이다. 무엇보다도 평화가 오래 계속되니 국민들이 尙武(상무)정신을 잃고 있다. 전쟁 뒤엔 평화가 오고, 그 평화가 오래 계속되면 전쟁을 부르게 된다는 역사의 법칙이 한국에는 적용되지 않도록 하려면 국민들이 각성하여야 한다. 그 답은 교양에 있다. 교양 있는 국민이라야 간첩과 사기꾼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으로 뽑지 않는다. 교양은 독서, 예술, 스포츠 등 人文的 교육을 통하여 만들어진다. 법을 지키는 교양인이 정의로운 시민이다.
  
   한국의 발전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덕분이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경쟁과 견제를 도입하였으므로 한국인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법을 어기지 않는 범위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엄청난 생산과 건설을 할 수 있었다. 인간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하는 이 제도를 파괴하려는 세력이 계급투쟁론에 물든 공산주의자들과 종북좌익들이다. 이들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느냐의 여부가 한국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통계는 말한다
  
   1961년 朴正熙 소장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에 착수하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당시 경제통계 대상이었던 103개국 중 87위로 最下位圈이었다. 1위는 2926달러의 미국, 지금은 한국과 비슷해진 이스라엘은 당시 1587달러로 6위였다. 일본은 26위(559달러), 스페인은 29위(456달러), 싱가포르는 31위(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은 40위(326달러), 수리남은 42위(303달러), 말레이시아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세 배가 많아 44위(281달러)였다.
   지금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는 짐바브웨도 당시엔 1인당 국민소득이 274달러로서 한국의 약 3배나 잘 살았고 46위였다. 필리핀은 당시 한국인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보다 약 3배나 많은 268달러로서 49위였다. 남미의 과테말라도 250달러로 53위, 잠비아(60위, 191달러), 콩고(61위, 187달러), 파라과이(68위, 166달러)도 한국보다 훨씬 잘 살았다.
   필자의 가족은 이 무렵 파라과이로 이민을 가기 위한 수속을 밟았는데 다행히 잘 되지 않아 모두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나세르의 이집트도 152달러로서 70위였다. 박정희 소장 그룹의 일부는 이집트의 나세르를 따라 배우려 했다. 아프가니스탄도 124달러로 75위, 캄보디아도 116달러로 78위, 태국은 110달러로 80위였다. 차드 82위, 수단 83위, 한국 87위!
   한국은 유신시대로 불리는 1972~1979년에 중화학공업 건설을 본격화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 랭킹에서 도약한다. 1972년에 한국은 323달러로 75위, 말레이시아는 459달러로 64위였다. 1979년에 가면 한국은 1734달러로 59위로 오른다. 말레이시아는 63위로 1537달러였다. 말레이시아가 못해서가 아니고 한국이 잘하여 뒤로 밀린 것이다.
  
   2016년 현재 세계 GDP(구매력 기준) 국가별 랭킹은 다음과 같다(미국 CIA 통계).
   1. 중국 19조3900억 달러
   2. 유럽연합 19조1800억 달러
   3. 미국 17조9500억 달러
   4. 인도 7조9650억 달러
   5. 일본 4조8300억 달러
   6. 독일 3조8410억 달러
   7. 러시아 3조7180억 달러
   8. 브라질 3조1920억 달러
   9. 인도네시아 2조8420억 달러
   10. 영국 2조6790억 달러
   11. 프랑스 2조6470억 달러
   12. 멕시코 2조2270억 달러
   13. 이탈리아 2조1710억 달러
   14. 한국 1조8490억 달러
   15. 사우디아라비아 1조6830억 달러
   16. 캐나다 1조6320억 달러
   17. 스페인 1조6150억 달러
   18. 터키 1조5890억 달러
   19. 호주 1조4890억 달러
   20. 이란 1조3710억 달러
  
   2016년의 한국은 세계 5대 공업국, 세계 7대 무역국(세계 5대 수출국), 세계 13위 경제대국이다. GDP에서 북한의 거의 50배이다. 여성 평균 수명 세계 3위, 삶의 질 세계 17위. 18년의 통치기간에 이런 대도약의 구조를 만든 박정희는 수치로 증명할 수 있는 업적 면에서 20세기의 10대 정치 지도자 반열에 들 것이다.
  
  
  
  
  
  
   못된 한국인들은 ‘헬조선’이란 말로 지옥 같은 북한이 아니라 잘 사는 한국을 욕한다. 삶의 질에 대하여 가장 권위 있는 수치는 UNDP에서 매년 발표하는 인간개발지수(HDI) 랭킹이다. 교육, 壽命, 소득, 보건, 복지 등의 통계를 반영하는데 한국은 작년에 세계 188개 나라 가운데 17등이었다. 선진 민주 복지 국가라는 이야기이다. 노르웨이, 호주, 스위스, 덴마크, 네덜란드, 독일, 아일랜드,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싱가포르, 홍콩, 리히텐슈타인, 스웨덴, 영국, 아이슬란드, 한국, 이스라엘, 룩셈부르크, 일본 순이다. 일본보다 앞섰으니 克日을 한 셈이다. 이 나라는 헬조선이 아니라 ‘천국 다음 한국’이다. 이런 나라를 만드는 데 피, 땀, 눈물을 흘린 세대와 그들의 지도자 李承晩, 朴正熙의 동상을 세우지 않으면 福이 빠져나갈 것이다.
   박정희 등장 이전엔 우리보다 몇 배나 잘 살았던 필리핀은 115등, 방글라데시는 142등, 아프가니스탄은 171등, 동남아의 우등국 말레이시아는 62등이다. 박정희 그룹이 ‘근대화의 성공 모델’이라 하여 羨望의 눈으로 쳐다보았던 터키는 72등, 나세르가 이끌었던 이집트는 108등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故國 오스트리아가 한국보다 6단계가 낮은 23등. 저승의 李 박사가 還生한다면 ‘우리 韓人들, 정말 놀랍습니다’라고 인사를 할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을 알리는 1948년 8월15일 연설에서 李 대통령은 이렇게 말하였다.
   “민주주의는 비록 더디지만 종말에 가서는 善을 이룬다는 이치를 우리는 믿어야겠습니다.”
   세계 두 번째로 오랜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도 22등, 스페인 26등, 석유 파동 때 모든 한국인들이 부러워하였던 쿠웨이트가 48등이다.
  
  
  
  
  
[ 2009-04-06, 21:1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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