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와 朴正熙, 앙숙의 對座
연재 58/朴 대통령은 손님을 앉혀놓고 '일장 훈시'式 안보 강연을 했다. 화가 난 카터는...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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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6월29일 카터는 도쿄에서 7개국 경제 頂上회담을 마치고 김포로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김포 지역의 안개로 착륙이 늦어져 영접 나간 朴 대통령은 거의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보도진에 둘러싸인 채 朴 대통령과 악수만 나눈 카터 대통령은 시동을 걸고 대기 중이던 美 해병대 헬기를 타고 회오리바람만 남긴 채 동두천 미군부대로 떠났다.
  
  朴東鎭 외무장관이 곁에서 지켜보니 ‘양 대통령은 非사교적인 성향이 있을 뿐 아니라 초면인 관계로 악수는 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다소 서먹서먹한 인상을 주었다’(朴東鎭 회고록 《길은 멀어도 뜻은 하나》. 동아출판사 刊)고 한다.
  
  6월 30일 여의도 광장에서 환영행사를 같이 하고 청와대로 들어온 두 대통령은 제1차 頂上회담에 들어갔다. 미국 측에서는 밴스 국무장관, 브라운 국방장관,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 글라이스틴 대사, 배시 주한미군 사령관이 배석했다. 한국 측에선 崔圭夏 총리, 朴東鎭 외무장관, 盧載鉉 국방장관, 徐鐘喆 안보특보, 金溶植 주미대사, 金桂元 비서실장, 그리고 통역을 맡은 崔侊洙 의전수석 비서관이 배석했다.
  
  朴 외무장관은 韓美 간에 사전에 협의한 회담진행 방식을 미리 朴 대통령에게 보고해 두었는데, 회담은 처음부터 이상하게 흘러갔다. 朴 대통령은 회담을 어떻게 진행하겠다는 것을 설명하여 상대방의 양해를 구하는 관례를 무시하고, 곧 바로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꺼냈다. 회담을 준비하면서 미국 측이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이 이 부분이었다. 美 국무부 홀브룩 차관보는, 이미 주한미군 철수 계획은 사실상 포기된 마당에 朴 대통령이 새삼 이 문제를 거론해서 카터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선 안 된다고 金溶植 대사에게 신신당부를 해놓았을 뿐 아니라 여러 경로를 통해서 재삼 다짐을 받아 놓았던 것이다.
  
  朴 대통령은 자신이 메모해 둔 종이를 꺼내 놓고 일방통행식이고 강의조의 발언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통역시간을 포함해 45분간 진행되었다. 배석했던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를 ‘장황하고 딱딱한 연설조의 주장’이었다고 표현했다. 朴 외무장관은 “일방통행식 발언이었을 뿐만 아니라 통역을 통해 하는 말이었으므로 매우 지루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朴 대통령이 강조한 것은 주한미군이 한국의 방위뿐 아니라 東아시아와 자유세계의 방어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金溶植 대사가 보니 카터 대통령은 펜을 들고 메모지에 무엇인가 쓰는 자세를 취했는데 경청하는 것 같지 않았다.
  
  朴 대통령은 자신의 발언에 열중하여 카터의 불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느꼈다고 하더라도 약 3년간 카터의 인권정책과 철군계획으로 속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던 그로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쏟아 놓아야 할 판이었다. 朴 대통령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탁탁’ 치면서 ‘안보강의’를 계속했는데 이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오는 행동이었다.
  
  카터의 턱 근육이 조용히 씰룩거렸다.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은 옆자리의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카터 대통령의 표정을 보니 매우 화가 나 있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카터는 메모를 써서 브라운 장관과 밴스 장관에게 슬쩍 넘겼다. 거기엔 ‘만약 朴正熙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주한미군 전원을 철수시키고 말겠소’라고 적혀 있었다.
  
  朴 대통령의 연설조 발언이 끝나자 카터도 반격을 시작했다. “인구도 많고 경제력도 우세한 한국은 왜 북한이 군사력의 優位(우위)를 점하도록 허용했는가”라고 공박했다. 韓美관계의 정상화를 목표로 했던 회담이 바야흐로 舌戰場(설전장)이 될 판이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과거 여러 번 頂上회담에 배석했지만 그날의 두 사람처럼 회담 자체를 엉망으로 만든 지도자들은 본 적이 없다”고 회고록에서 고백했다. 그는 “韓美관계 개선을 위한 우리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외에도 한국에 주재하는 미국의 고위 외교관으로서 개인적 실패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고 한다.
  
  회담 중 휴식이 있었다. 미국인들은 그들끼리, 한국인들은 따로 모였다. 두 頂上의 험악한 언쟁으로 분위기가 무거워져 서로 대화조차 나누려 하지 않았다. 휴식이 끝나자 두 대통령은 기록자만 데리고 단독 회담에 들어갔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별실에서 기다리는 것이 ‘정말로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단독회담은 본격적인 공방전이 되었다. 카터는 “朴 대통령이 요구한 철군계획의 완전한 동결을 거부하고 아무런 약속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 정부가 방위비를 더 지출해 남북한 戰力 불균형을 감소시켜야 할 것이 아니냐”고 들이댔다. 朴 대통령은 “방위비 지출을 늘리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면서 “한국은 북한과 여러 가지 여건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드디어 카터가 인권문제를 들고 나와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요구했다. 朴 대통령은 북한의 위협으로 가까운 장래에 해제하는 것은 어렵다면서 “助言(조언)에 유의하겠다”고 넘겼다.
  
  단독회담을 하고 나오는 두 대통령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카터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나면서 미국대사 관저로 향하는 자신의 車에 밴스·브라운·브레진스키, 그리고 글라이스틴 대사를 태웠다. 그는 즉시 글라이스틴 대사를 힐난했다. 그 사이 차가 한 10분간 청와대 본관 앞을 떠나지 못했다. 전송 나온 金桂元 비서실장은 차가 떠날 때까지 한참 기다려야 했다. 대사관저로 가는 車中에서도 카터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글라이스틴 대사를 향해서 삿대질까지 했다.
  
  “왜 그는 한국의 군사비 지출을 최소한 미국 수준(GDP의 6%)으로 늘리지 않는가. 왜 그는 정치적 자유화를 위한 조치에 반대하는가.”
  
  글라이스틴은 朴正熙를 위한 변호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朴 대통령은 철군문제에 있어서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지 못해 난감했을 것입니다. 한국은 개발도상국으로서는 과도한 방위비를 부담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과거 한국 군부의 독재적 경향을 우려해 의도적으로 방위비 증액 요구를 자제해 왔습니다.”
  
  카터는 글라이스틴 대사의 주장을 일축하고 또다시 朴정권의 인권탄압을 규탄했다. 자동차가 대사 관저 현관 앞에 도착했는 데도 車中 토론은 계속되었다. 밴스와 브라운 장관도 끼어들어 몰리는 글라이스틴을 감쌌다. 욕을 실컷 먹은 글라이스틴은 카터에게 물었다.
  
  “朴 대통령이 무엇을 해주기를 기대하는가?”
  
  카터는 두 가지를 주문했다. ‘한국이 국방비 지출을 국내총생산(GDP)의 6%까지 높일 것’과 ‘괄목할 만한 인권신장 조치 약속을 받아 내라’는 것이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각하가 돌아가시기 전에 최선의 결과를 만들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제서야 카터는 차에서 내렸다. 카터를 예방하기 위하여 뒤따라온 崔圭夏 국무총리, 朴東鎭 외무장관들이 탄 승용차가 긴 행렬을 이루며 대사 관저 정문을 지나 길에까지 늘어서 있었다.
  
  그날 오후 밴스 장관과 홀브룩 차관은 金溶植 대사를 통해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金桂元 비서실장과 崔侊洙 의전수석을 통해서 朴 대통령에게 두 가지 주문을 전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는데 오후에 金桂元 실장이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연락을 취했다. ‘전날 頂上회담에서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므로 내일 오후 밴스 국무장관을 朴 대통령이 따로 만나기를 원한다’는 전갈이었다. 金실장은 대사에게 “좋은 소식을 기대해도 좋다”고 말했다.
  
  이런 경과가 카터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그의 기분도 좋아졌다. 6월 30일 밤 청와대 國賓(국빈) 만찬장의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웠다. 7월 1일 朴 대통령은 밴스 국무장관에게 방위비 지출을 GDP의 6%로 올릴 것을 약속하고, 카터 대통령의 인권에 관한 생각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카터 대통령이 그날 오후 離韓 인사차 朴 대통령을 찾아왔을 때도 실속 있는 대화가 오고 갔다. 먼저 카터 대통령은 “방위비 증액 요구를 받아들여 준 데 대해서 감사하고, 워싱턴으로 돌아가면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에 대한 朴 대통령의 희망을 고려해 ‘만족할 만한’ 결론을 내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朴 대통령이 오랫동안 고대하던 말이었다. 끝으로 카터는 인권개선 조치가 양국 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임을 강조했다. 朴 대통령은 “현재로서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확언할 수 없으나 각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리무진에 동승했다. 카터는 朴 대통령에게 “종교가 있느냐”고 물었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교회의 주일학교에 다닌 경험밖에 없는 그는 “없다”고 했다. 카터는 “각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는 침례교회 목사 김장환 씨를 보내 “우리의 신앙에 관해 알려드리고 싶다”고 덧붙였다. 朴 대통령은 평소부터 잘 아는 金 목사를 환영하겠다고 했다.
  
  카터가 탄 전용기가 이륙하자 朴 대통령은 드문 웃음을 짓더니 글라이스틴 대사를 껴안았다. 朴正熙로서도 스트레스를 크게 받았던 3일간이었다. 이로써 정권적 차원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인 韓美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글라이스틴 대사도 그렇게 낙관했다. 한국 현대사는 그러나 권력자의 희망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또 다른 진짜 위기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 2009-04-07, 17:1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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